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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라희는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재빨리 대답했다. 여권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제주도와 일본 중 어느 곳으로 갈지 투표한 결과 일본으로 낙점돼서 그때 만들었다. 10년짜리 여권으로 아직 유효했다. 고등학교 때 난생처음 떨리는 마음으로 녹색 여권을 받아든 후 대학에 들어와서는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하느라 여행 한번 못 다녀 봤다.
시간이 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못 나갔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해외로 나가서 비자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로 스탬프를 가득 찍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이사 때마다 제일 먼저 여권을 고이 모셔 챙겨두었다. 지금은 자취방 책상의 첫 번째 서랍 안 깊숙한 곳에 들어있다.
“어디에.”
“........집에요.”
라희가 조그맣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잔뜩 움츠리고 있는 라희를 내려다보았다. 똑바로 응시하는 그의 두 눈동자에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바닥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 속에 가만앉아 있자, 아까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격해졌던 그의 불쾌한 기운이 점차 누그러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일단 내려가서 밥부터 먹고, 가서 가져오지.”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입을 연 그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주 보는 고요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시선 속에 그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평소의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방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라희는 뒤에서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어...옷이..”
그는 멈춰 서서 어제 옷을 그대로 걸쳐 입고 있는 라희를 바라보았다.
“어제 산 옷은 김기사가 옆방에 두었을 테니 갈아입고 내려와. 식당으로.”
라희는 그의 뒤를 따라서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몸을 돌려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 구조와 동일하고 조금 크기만 작을 뿐인 옆방에는 소파 옆 바닥에 쇼핑백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먼저 속옷을 챙긴 라희는 쇼핑백을 뒤적여 뭐가 있나 살펴보았다. 이내, 입기 간편한 푸른색 원피스를 발견하고서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라희는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가 앉아있는 커다란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정갈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는 식당 앞에 나타난 라희를 향해 맞은편에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라희가 쭈뼛거리며 조심스레 의자를 빼서 앉자, 주방에서 나이 지긋한 임여사가 라희 것으로 보이는 밥과 국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밥은 1인용 돌솥이었다. 잡곡밥 위쪽 부분에 칼로 정성스레 돌려 깎은 밤이 노랗게 읽어 올려져 있고 그 주변으로는 은행과 잣이 코스모스 꽃잎처럼 장식되어 보기에도 예뻤다. 그 옆은 채를 썬 녹색 파가 동동 띄워진 맑은 조갯국이었는데, 막 퍼낸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모시 조개 특유의 담백한 바다 향기를 피워올리며 식욕을 자극했다.
라희는 감탄하며 앞에 놓인 밥과 국을 바라보다가 눈을 들어 나머지 반찬들을 살폈다. 커다란 대리석 식탁 위에는 정말 한정식 전문점이나 설이나 추석 같은 큰명절날 받을 수 있는 상차림 처럼 육류, 어류, 패류, 야채, 나물, 젓갈이 골고루 한 상에 올려 있었다.
향긋한 송이버섯을 절편을 올려서 장식해 겉을 불에 그슬린 떡갈비 네 쪽과, 녹새의 월계수 잎사귀와 바람개비 모양의 갈색 팔각이 올려져 새하얀 비계에 이국적인 향이 살짝 풍기면서 갈색 육즙이 윤기나게 흐르는 삼겹살 수육, 노란 알 감자와 함께 조린 고등어조림과 큼직한 갈치 토막 구이, 선명한 붉은 색이 식욕을 자극하는 파, 배추, 갓 김치의 세 종류의 김치, 파프리카 채 썰어 포인트를 준 통통한 콩나물 무침, 들깻가루 듬뿍 묻은 토란 줄기 나물, 시큼한 식초향 물씬 풍기는 새파란 파래 무침, 고소한 견과류가 가득 들어가 있고 선홍색의 건 크랜베리로 포인트를 준 멸치볶음, 붉은 윤기 흐르는 오징어젓, 작은 피클 오이 크기의 선홍색 명란젓, 그리고 조금 큰 접시에 담긴 오색 잡채가 노란색 황금같이 반질거리는 놋쇠그릇에 놓여있어 식객의 젓가락을 기다렸다.
절로 군침이 돌 정도로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이었다.
그의 본가에서 밥상을 받고서야, 그가 말했던 제대로 된 식사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대충 라면을 먹거나 샌드위치로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한식 밥상이 익숙했나 보다. 하긴, 어릴 때부터 이런 궁궐 같은 집에서 살았다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그를 향해 라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잘..먹겠습니다."
그는 어서 먹으라는 듯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라희는 뭐부터 먹어야 하나 망설이며 앞에 놓인 반찬들을 향해 젓가락을 들었다. 잠자리에서 일어 난지 얼마 안 되어 잠잠했던 식욕이 음식을 보자 갑자기 솟아올라 배가 몹시 고파왔다.
제일 먼저 라희가 집은 것은 선명한 붉은색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던 배추 김치였다. 동글게 썰린 단면 위로 새빨간 양념이 듬뿍 묻어있는 배추김치 맛은 남도의 것처럼 자극적이지도, 충청도 스타일의 맹숭맹숭하지도 않은, 깔끔하게 새우젓으로 맛을 낸 서울식이었다. 당연하게도 인공 조미료의 맛은 느낄 수 없었다. 고급 식재료 본연의 풍부하고 꽉 들어찬 깊은 맛이 났다. 깊고 깔끔한 맛의 배추김치를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잡곡밥에 올려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밥알도 탱글탱글하고 찰기가 있어서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는 밥 특유의 고소함이 풍겨 났다.
직접 숯불에 그슬린 듯, 강한 불 맛이 나는 떡갈비도 한입 베어 물어 씹자, 잇새로 진한 육즙을 가득 흘리며 짭쪼름하면서 달콤한 간장 맛이 혀끝에 착착 감겼다. 나머지 음식도 전부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간도 적당하고 자극적이지도 않는 균형 잡힌 자연스러운 맛에 먹고 있으면 절로 몸이 건강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혀끝을 잡아끄는 깊은 감칠맛에 정신없이 취해있던 라희는 문득, 눈을 들어 식사 중인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서 길고 매끈한 손가락을 움직여 정갈한 젓가락질로 흠잡을 데 없는 식사예절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듯, 반듯한 자세로 소리를 최대한 적게 내면서 얌전히 젓가락질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눈길을 끌었다. 전부터 느껴왔지만, 그는 오빠나 다른 남자들처럼 성급하거나 게걸스럽게 음식 씹는 소리를 내며 밥을 먹지 않았다.
이런 궁궐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새침한 도련님처럼 반듯하게 앉아 깔끔한 모양새로 여유 있게 식사를 하는 그의 모습은 환히 비추는 한낮의 햇살이 비쳐든 으리으리한 식탁에 잘 어울렸다. 마치 화보 속 한 장면 모델의 컷처럼.
"입맛에 안 맞아?"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밥을 먹다말고 가만 멈춰선 라희를 향해 낮은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라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말 맛있어요.“
“그럼 든든히 먹어둬. 저녁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앞에 있는 음식은 전부 먹기로 작정한 라희는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접시 위에 놓인 음식들은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마지막 뱃속의 틈새란 틈새는 다 메꿀 기세로 열심히 구겨 넣었지만, 식탁에 차려진 많은 음식을 먹는 것은 무리였다. 식사의 끝 무렵에 주방에서 나온 임여사의 쟁반에 들린 과일 접시와 녹차잔을 본 라희는 남은 밥을 처리하듯 우겨 넣는 것을 포기했다.
“음식은 입에 맞으셨습니까?”
임여사는 녹차를 라희 앞에 놓으며 단정한 미소로 말을 건넸다.
“네. 정말 맛있어요. 이제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엄마 음식 빼고 가장 마음에 드는 맛이에요.”
“다행이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임여사는 한입 크기로 정갈하게 썰린 과일 접시를 라희 앞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라희가 접시 옆에 놓인 보석 장식의 예쁜 과일 포크로 앙증맞게 깎인 배를 꽂아 사각사각 씹으면서 맞은편 그를 보니, 그는 과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녹차만 마시고 있었다.
라희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가 먹고 난 음식들로 향했다. 밥은 조금 남았고 국은 건더기만 몇 번 떠먹고 대부분 남겼다. 남은 밥을 보니, 마치 원래 그렇게 새 밥을 푼 것 마냥 깔끔했다.
라희는 시선을 내려 자신이 먹다 남은 밥을 힐끔 보았다. 그녀가 남긴 밥은 고춧가루에, 김칫국물에 엉망이었다. 다시 그의 밥에 시선을 옮기며 조금 전 식사 모습을 떠올려보니 그가 김치 같은 붉은 색깔 있는 음식에 손대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혹시, 김치를 안 드세요...?”
라희가 불쑥 묻자, 그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마시고 있던 녹차잔을 내려 식탁에 놓았다. 찻잔은 비어있었다.
“음.”
그는 라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일어서서 계단으로 향했다. 라희가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으려니, 임여사의 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와 그가 떠난 자리를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좀 처럼 매운 걸 즐기지 않으세요.”
임여사의 딸은 호기심으로 눈이 동그래진 라희를 향해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이 낮게 소곤거렸다.
“맵고 자극적인 것은 잘 안 드시거든요.”
김치도 안 먹는다면 그럼, 새빨간 국민 간식은?
“떡볶이는요?”
라희가 묻자,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하는 듯 눈을 허공에 굴리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드시는 모습을 못 봤거든요. 아마 안 드실 거에요.”
얼굴이 살짝 펴지자 그녀의 인상은 처음 사무적이고 딱딱해 보였던 것과 달리 온화했다. 그 분위기에, 라희는 어젯밤부터 스멀스멀 떠올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던 질문을 눈 딱 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유진씨도 매운 것을 안 드시나요?”
여자는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라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유진씨요. 이유진씨...”
너무 노골적이었나.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 후회되기 시작한 라희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 끝이 흐려졌다. 임여사 딸은 그런 라희를 빤히 보고 있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무심히 접시를 겹쳐 올리며 답했다.
“처음이세요.”
무거운 돌솥이 쟁반에 담겼다. 이내, 그 옆으로 차곡차곡 쌓은 놋쇠 접시가 놓였다. 여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라희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집에 오신 여자분요.”
짧게 말을 마친 그녀는 쟁반에 가득 담은 그릇을 주방으로 옮겼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도와주려 일어서려는 라희에게 괜찮다며, 손님이니 편히 있으라며 그녀가 만류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라희는 방금 전 잔잔한 수면에 던진 돌맹이처럼 파문이 일고 있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조금 미지근해진 녹차를 들어 벌컥 마셨다. 답을 들은 순간 부터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투성이었지만, 오늘 두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나는 매운 것을 싫어하는 그의 식성. 그리고 너무나 의외지만, 유진은 본가에 와본 적이 없다는 것.
찻잔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 라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안쪽 주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커다란 집이 주는 적막감은 거대했다. 그는 늘 이런 적막감 속에 살고 있었을까. 아스라이 들리는 소음을 제외한 텅 빈 집안의 고요는 라희의 발걸음을 빨리 움직이게 했다.
식당을 나와 계단으로 올라가며 순간 어디로 가야 할 지 망설였다. 그의 방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옆방?
그녀의 고민을 멀리서 듣기라도 하듯, 계단 윗쪽에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 앞에 서서 턱을 살짝 치켜들고서 시선을 내리깔아 계단을 올라오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 기사가 가방을 가져다 놓았을 거야. 대충 담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라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턱끝으로 옆방 문을 가리켰다.
“일단, 가서 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