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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32화 (3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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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움직여봐.”

그가 숨을 몰아쉬며 잠긴 목소리로 명령했다. 귀 바로 뒤에서 울리는 그의 음성에 따라, 라희는 허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지금 그가 앉아있는 맞은편, 글라스룸 유리 벽에 비추는 라희의 모습은, 적나라했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위에서 천천히 허리를 위 아래로 움직이자, 그녀의 벌어진 허벅지 안쪽 그녀와 연결된 그의 기둥이 드러나 보이다가, 활짝 벌어진 꽃잎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드러났다.

그의 남성이 드나들면서 퍼져오는 짜릿한 감각에 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는 뜨겁고, 잔뜩 달아올라 있어 그의 기둥이 드나 들 때마다 찔걱이는 소리를 내며 하얗게 흠뻑 젖어 물들어갔다.

아까는 내내 와인을 홀짝이며 유리 벽 너머의 서울 시내 야경에만 집중하느라, 이렇게 검은 배경으로 안쪽이 비추는지도 깨닫지 못 했다.

그럼, 줄곧 그는 이 적나라한 광경을 보고 있었던 걸까. 아까는 등 돌린 엉덩이 아래에 드나드는 모습이 비쳤었겠지.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얼굴이 낯뜨거운 열기가 몰리면서 확 달아올랐다. 라희는 조금 전 그에게 이끌려 자세를 바꿔서 이제야 보게 된 모습이었지만, 아까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몸을 움직이던 그때부터, 저 유리 벽은 낯부끄럽고 노골적인 장면을 다 비추고 있었으리라.

허리에 흰색 원피스가 말려 걸쳐진 채로, 그의 위에서, 유리창을 향해 안쪽을 활짝 벌리고서, 굵고 단단한 기둥에 걸려 가슴과 배를 내밀 듯 둥글게 허리가 휘어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라희의 모습은, 그녀가 보기에도 정말 색정적이고 야했다.

그녀의 몸에 관통하듯 박혀있는 그의 기둥은 안쪽으로 드나들 때마다 살이 감겨서 끈적하게 찔걱이는 소리가 났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주던 손을 위로 뻗어와 가슴을 움켜쥐자, 순간 배꼽 아래에 힘이 들어가 꽉 조이면서 꼿꼿한 유두 끝이 손가락 사이에 쓸리며 찌릿거렸다.

그가 손을 쥐었다가 펴면서 딱딱한 돌기로부터 짤짤한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전에 그가 자극해서 민감해진 유두는 그가 손가락 끝으로 비틀어내자, 짜릿짜릿 참을 수 없는 쾌감을 전해주었다.

“흣...아읏...흣..아...”

라희는 그의 허벅지 위에서 허리를 더 빠르게 움직였다. 몸이 아래로 내려갈 때는 꿰뚫리듯 꽉 차는 느낌과 함께 허벅지 안쪽이 당기면서, 등골이 쭈뼛 설정도로 강한 쾌감이 밀려왔다. 몸이 위로 올라갈 때는 그의 기둥을 감싸 쥔 내벽이 쓸리면서, 흡착되는 느낌에 소름 같은 전율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아래를 채우고 있는 굵은 기둥과 속살이 맞닿아 뜨거운 열기를 피어올리며 쉴새 없이 몰아닥치는 감각은 라희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흐.......하...아..하아..”

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금세 라희의 몸을 지치게 만들었다. 라희가 주저앉듯 무너져 움직이지 않고 숨을 헐떡거리자, 그가 라희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아래에서 몸을 움직였다.

위로 찔러오는 그의 물건을 받아들이면서, 라희는 그가 이끄는 대로 온전히 자신을 내맡길 뿐이었다. 쾌감과 쾌락이 섞이면서, 허벅지 안쪽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몸은 깊이 아래로 가라앉고, 그의 남성은 위쪽을 향해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쾌감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듯, 닿을 듯, 애타며 헐떡이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매끈하고 투명한 유리에 비춘 라희의 얼굴은 열기로 가득했고 붉은 입술은 벌어진 채로 신음을 토해내며 울것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흐린 시야 속에서 활짝 벌어진 라희의 다리 사이로 그의 기둥이 드나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하얀 유방에 매달린 붉은 유두가 색정적으로 움직였다.

아래가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은 열기가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감각이 온통 한곳에 집중되자 참을 수 없는 쾌감에 못 이겨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라희는 양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그가 손을 뻗어 입을 막고 있던 라희의 두 팔목을 잡아 뒤로 묶다시피 허리로 고정하고선, 몸을 움직였다.

“핫.......!”

그의 몸 위에서 단단하게 솟아난 남성 위에 올라타듯 앉아 두 팔이 뒤로 붙들려져 부푼 흰 양 가슴 위 빳빳하게 일어선 유두를 내민 상태로 허리가 잔뜩 앞쪽으로 휘어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하읏.. 하..."

차오르는 쾌감을 이기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비틀어보았지만,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허리 뒤로 잡힌 팔목은 그의 단단한 손바닥 아래 눌려 있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를 관통한 그의 기둥은 순간, 꽂히듯 깊이 침입해 들어왔다.

"아흑!.....하으..읏.."

라희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뻐근함에 신음을 토했다. 그의 물건이 드나들수록, 활짝 벌어진 분홍빛 속살은 짙은 색으로 달아올라 안쪽이 점점 부풀어갔다. 속살들은 기둥을 빨아들일 듯 잡아당겨 찰싹거리며 감싸 안아 쥐었다. 통증과 같은 쾌감이 혈관 속을 타고 욱신거리며 흘러갔다. 전신을 휘 돌아 몸을 울리고 저릿하게 퍼져나가는 쾌감이 오한처럼 등골을 타고 흘렀다.

아래를 가득 채운 열기가 너무 거대해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뜨거운 살덩이에 그의 기둥이 파고들며 자극하자, 속살들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얗게 찐득거리며 빈틈없이 기둥뿌리까지 맞물린 느낌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들끓어 그의 물건을 단단하게 감싸 쥔 정점에 몰리는 것 같았다.

라희가 가늘어진 눈빛으로 애원하듯 그를 바라 보자, 유리창을 통해 열기에 가득 찬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래로 부터 피어나는 아찔한 자극에 숨을 헐떡이는 라희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흐느끼듯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은 헐떡이며 공기 중에 흩어졌다.

“흐으읏..!”

숨이 막히고 머리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이대로 까무러칠 거 같은 짙은 쾌락이 전신에 가시처럼 박혀 들어왔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리 아래가 들썩이며 저절로 움직였다. 쾌감을 이기지 못한 라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엉덩이를 들썩여 허벅지 안쪽을 조이자, 전율로 여성이 수축하면서, 꽃잎 안쪽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움찔움찔 수축하는 내벽들은 그의 기둥을 찰싹찰싹 감아 조였다. 그 순간, 그가 빠르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흣..하앗..아앗.. 앗.."

엄청난 속도와 압박이 주는 쾌감을 견디면서, 라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배꼽 아래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와 자리 잡은 그의 남성이 팽팽하게 부풀어 잠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정지해 있다가 울컥거리며 뜨거운 기운을 쏟아냈다.

“........하아.”

그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짜릿한 쾌감이 몸을 가른 동시에 아랫배 안쪽에 싸한 느낌이 감돌았다. 잠시 멈췄던 그는, 다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흥건한 안쪽을 드나들던 그는 그러다가, 마침내 만족한 듯 그녀의 안에 있던 남성을 꺼냈다. 유리창을 통해 라희 몸을 빠져나온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남성이 비쳤다.

그리고, 이내 주륵, 흐르는 느낌과 함께 뭉클거리는 백탁의 액이 붉게 흐들거리는 꽃잎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 모든 광경은, 유리창을 통해 마치 투명한 거울처럼 선명히 보였다.

라희는 힘없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앞에 펼쳐지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온몸의 힘이 불타올라 까맣게 재가 된 것처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가 라희의 양 가슴을 손바닥으로 감싸 몸 안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에 등을 대고 기대듯 안겨있자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 역시, 한참이나 그녀를 끌어안고서 깊은숨을 고르고 있다가 마침내 라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쉬어.”

건조하게 잠겨서 탁하게 들리는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동시에, 라희는 힘겹게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안을 가득 채우고 온몸을 감싼 따스한 온기 속에서 세상은 캄캄해지고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들렸다. 누구 것인지 모를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면서 이내 달콤하고 황홀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

살짝 뜬 눈 안으로 바늘처럼 찔러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눈을 뜨니 몸을 감싼 폭신하고 새하얀 이불이 보였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나 싶더니 이내 아래가 욱씬거리고 배, 등, 허리, 허벅지 무릎 이곳 저곳 지적할 것도 없이 온몸이 맞은 것처럼 당기고 저려왔다. 한참을 찌뿌등한 통증 속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라희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베개에서 고개를 비틀자, 한눈에 창가에 놓인 하프시코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방이다. 인터폰으로 아주머니에게 준비 해놓으라던 옆방이 아니라. 라희는 옆의 베개를 살폈다. 역시나 잠을 잔 흔적은 있지만, 그는 없었다.

허전한 느낌에 이불 아래로 손을 더듬어 보니 알몸이었다. 고개를 들어 침대 주위를 살폈다. 침대 아래, 둥그렇게 말려있는 흰 원피스가 보였다. 그럼 어제 그와 함께 잠든 건가.

몇 시지?

시계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라희의 눈동자에 벽에 걸린 둥근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시계 바늘은 열두 시 반을 넘어 한 시로 향하고 있었다.

온몸이 나른하고 뻐근하고 욱씬거려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시계를 보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벌써 한낮이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침대에 늘어져 있고 싶었지만, 이곳은 집도 아니었을뿐더러 여기 오게 한 그도 보이지 않았기에 라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통증을 참느라 주춤거리며 걸었다.

일단 씻어야 한다. 라희는 침실 문을 열고 바로 옆에 위치한 욕실로 향했다.

대충 씻고 난 뒤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면서, 앞으로 입을 옷은 어제 샀지만 얼굴에 바를 화장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킨, 로션 같은 기초제품뿐만 아니라 그나마 겨우 바르고 다니던 파우더 팩트와 립글로스도 없었다.

역시, 집에 한 번 들러서 가져와야 할까? 그에게 부탁해야 겠지.

라희는 물기를 닦아내고서 어제 걸쳤던 옷을 입었다. 구깃구깃했지만, 얼룩이 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제 구입한 옷은 아마 머물기로 했던 옆방에 있을 것 같았다.

옷을 대강 걸쳐 입고 그의 방을 나오자 복도 옆 휑하게 뚫린 난간이 보였다. 라희가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옆방으로 이동하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진욱아!”

굵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라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난간 아래 방향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아래 보이는 현관 앞에는 어제 보았던 두 여자가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 앞은 중년의 남성이 바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흐는 계단을 향해 몸을 돌린 상태였는데, 남성의 외침에 움직임을 멈췄다.

“삼촌.”

그가 뒤돌아 중년 남성을 불렀다.

"그만 하고 돌아가시죠."

섬뜩하리 만치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바흐는 뒤에 서 있던 고용인들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나이 든 여자가 현관 앞에 있는 인터폰을 들고 뭐라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싸늘한 눈초리로 삼촌이란 사람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물론, 내가 그동안 잘못한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네가 우현이에게 각별히 신경 쓴다고 들었다. 그간 우현이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챙겨줬다더구나. 진욱아, 우현이를 봐서라도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되겠니?”

거의 울먹이며 애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가 대답 없이 냉랭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삼촌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옛날에 일어난 일은, 지금 와서야 되돌릴 수도 없고 어찌 할 수도 없지 않느냐. 내가 정말 마음속 깊이 반성하고 있고 앞으로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 테니, 이번 한번만, 딱 한 번만 도와줬으면 한다. 진욱아. 제발.”

절절한 중년남성의 심경과는 반대로 바흐의 주변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삼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만 돌아가주십시오.”

“진욱아!”

삼촌이라는 사람이 바흐를 향해 다가서려던 찰나, 현관 문이 열리고 운전기사와 검은색 경비복을 입은 건장한 남성 두 명이 들어왔다. 바흐가 눈짓하자 그들은 가차 없이 삼촌의 양팔을 붙들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인연은, 삼촌이 이 집을 제멋대로 처분해서 팔아버렸던 때에 끝났습니다. 부모님이 남기신 유산의 대부분도 삼촌이 마음대로 쓰셨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기에, 그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언급하지 않을 겁니다. 우현이는 제가 아끼는 사촌 동생으로서 만나는 것이지, 삼촌과는 전혀 관련 없다는 점 알아두시고요.”

삼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그는 말을 멈추고, 경비와 고용인들을 향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분을 집에 들이지 않도록.”

“죄송합니다. 꼭 뵈시겠다고 하시기에...”

나이든 중년 여성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옆에 있던 고용인들이 명심하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턱짓하자, 경비 복을 입은 직원이 삼촌의 팔을 끌고 현관으로 나갔다.

“진욱아!”

중년 남성은 끌려나가면서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가 모습을 감춘 현관 문이 닫히자 집안은 싸늘한 고요가 감돌았다. 바흐는 계단으로 향하려다가, 고개를 돌려 중년 여성을 향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임여사. 삼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가나,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해.”

“며칠 전부터 집 앞을 지키고 계시다가 막무가내로 들어오셔서..........죄송합니다.”

임여사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쌩하니 뒤돌아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계단을 올라오던 그와 라희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표정은 좀 전의 일 때문에 기분 나쁜 듯 싸늘했다. 윗 층에 올라온 그가 턱짓으로 뒤에 있는 그의 방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쌔한 분위기에 겁먹은 라희가 머뭇거리며 그대로 서있자, 그는 방문을 열고 라희의 손목을 붙잡고 들어갔다.

그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앉게 된 라희 앞에서 그는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려는 듯 방안을 왔다 갔다 걸었다. 냉랭한 기운이 그의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기분 나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한 손으로는 턱을 쓰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며 라희는 긴장으로 잔뜩 굳어서 가만있었다.

그와 만나면서 이런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오빠가 화냈을 때를 떠올려보면, 남자가 기분 나쁠 땐 함부로 자극하지 말고 쥐죽은 듯 가만있어야 했다. 이럴 때는 그 어떤 사소한 자극이라도 기폭제로 삼아 억누른 감정을 폭발했다.

라희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내리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의 걸음이 느려지다가, 마침내 멈췄다. 그는 라희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라희가 고개를 들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권 있어?”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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