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30화 (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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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올라가는 좁은 길을 지나 그의 차가 속도를 줄인 곳은 평창동 고급 주택가였다.

라희는 창밖을 살폈다. 간혹가다 드라마에서나 본 법한 고급 주택가의 골목길은 차가 없으면 접근이 힘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로등 총총히 밝혀진 길거리는 역시 걸어 다니는 하나 없이 한가했다. 은은한 가로등 앞에 보이는 집의 담들은 높고 육중했다. 담벼락을 내려다 보고 있는 CCTV가 여러 개 눈에 띠였다. 다들 요새 같은 높다란 담 안에서 철통 같은 보안 속 안전을 보장 받으며 차나 타고 외출하지 걸어다니지는 않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보면, 여기 이렇게 늘어서 있는 집들은 저택이라고 불렀다. 보통 삼 층짜리 단독주택의 넓은 정원을 가진 집들. 으레 등장하는 식모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을 때면, XX씨 댁입니다 하지 않고, 성북동입니다. 평창동입니다. 한남동입니다. 방배동입니다, 최근에서는 서래마을입니다 까지, 그런 동네 이름을 댔다. 라희는 그런 곳에 자신이 와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거기다 이제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그의 본가.

본가라는 말에서 가족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혹여나 막장 드라마에서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긴장되었다.

왜, 있잖은가. 남자의 고상한 어머니가 나타나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독기 품은 말을 한다거나, 격조 있는 이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천한 것이라며 머리채를 휘어잡는.

거기까지 떠올리니 앞으로의 일이 정말 진지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을 꼬여 오천만 원을 뜯어간 여자라고 무릎 꿇고 빌게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는 걸까. 순간, 갑자기 이런 상상이 실제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무릎꿇고 빌게 된다면, 그는 옆에서 드라마 속 마마보이들처럼

“엄마! 얘는 이런 여자 아니라고요.”

하면서 투정을 부릴 것인가. 그가 얼굴 모를 엄마에게 떼쓰는 모습을 상상하자, 입가에 경련처럼 떨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라희는 손바닥으로 급히 눌러 막았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에 빙의해서 본가에 방문해서 부모님과 격돌하는 클라이막스 장면을 상상하면서 긴장했던 스스로가 웃겼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차가 속도를 줄인 바로 앞에 검은색 계열의 대문과 두 개의 주차장문이 보였다. 차가 다가가자, 스르륵 검은색 문이 위로 열렸다. 차가 주차장 안으로 진입하니 다시 문은 스르륵 도어를 내렸다.

총 여섯 대가 주차 할 수 있는 슬롯이 있는 1층 주차장은, 한 칸을 제외하고는 꽉 차 있었다. 전부 강남 한복판이나 특급 호텔 주차장이 아니면 보기 힘든 외제 스포츠카였다. 페라리, 람보르기니등 잡지책에서 봤을 법한 차와 이름과 로고도 생소한 스포츠카가 번쩍이는 광을 내며 주차 슬롯 안에 있었다. 주차장 뒤편으로는 건물의 창이 있고 내부가 보였다. 안은 불이 꺼져 있어서 어두웠다.

이제 진짜, 그의 본가로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떠올린 막장 드라마 속 장면이 실제로 펼쳐질까? 그것보다도 먼저, 갑자기 본가로 자신을 들인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족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그녀가 있다. 그리고 이미 남의 집을 처음 방문해 인사드리기에는 사회적 상식과 예의에 어긋나는 늦은 시각이었다.

차를 주차한 운전기사가 내려 뒷문을 열어 주자, 그가 먼저 내리고 그다음 라희가 내렸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얼떨떨하게 주차장 내부를 둘러 보고 있던 라희에게 눈짓하며 그가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라 계단에 올랐다. 1층이었던 주차장에서 위로 올라오니, 바로 정원이 보였다. 한밤중인데도 은은한 조명이 환히 밝혀져 있는 정원은 가운데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전문가가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듯 꼼꼼하게 가꿔져 있었다. 정원 뒤로는 아까 밖에서 보았던 높다랗고 육중한 담이 감싸듯 둘러져 있었다.

단정하고 넓은 정원의 조명을 배경 삼아 보이는 그의 본가는 오래되 보이는 3층 석조건물이었으나, 정원과 마찬가지로 관리가 잘 되어있어 낡아 보이지 않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현관 앞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신전 기둥 같은 것을 지나니, 현관문이 안쪽에서 부터 열렸다.

"오셨습니까."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여성과 그녀와 닮은 얼굴의 30대 후반 여자가 열린 현관문 사이에 서서 맞이했다. 그녀들이 인사하자, 라희도 고개를 숙여 같이 인사했다. 이내, 두 사람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라희에게 쏟아졌다.

탐색하는 듯한 표정에서 라희는 당황했다. 그와 그들이 무슨 관계인지 몰라 더욱 혼란스러웠다. 본가라고 하더니, 진짜 가족인 걸까. 그러기에는 두 사람의 외모는 그와 좀 달랐고, 태도는 가족이라기에는 너무도 깍듯하고 정중했다.

그들 역시 라희 만큼이나 궁금한 듯 라희가 눈을 피하며 거북해 하는 모습에,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녁은 먹고 왔어."

그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 둘은 라희에게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거두고 정중히 고개를 수그렸다.

"네. 알겠습니다."

바흐는 현관을 지나쳐 안으로 걸었다. 현관 뒤 호텔로비 같이 높게 뚫린 공간은, 위층까지 막힘없이 위로 트여 있었고, 현관 옆쪽에 난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구조였다.

가운데 뚫린 정사각형의 공간의 층층은 중세의 성처럼 난간이 있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현관에서 일직선으로 보이는 위치에는 고풍스러운 하얀색의 석조 벽난로가 있었다. 잘 관리되고 있는 듯 안은 깨끗했다.

현관에서 오른편으로는 넓게 펼쳐진 고급스러운 거실이 보였다. 그의 오피스텔 거실의 1.5배 크기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거실은, 역시 소파와 티비, 오디오 시스템을 제외하고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 옆은 식당이었다. 성인 열 명도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대리석 식탁이 놓여있었다. 뒤쪽으로는 주방으로 보였는데 그쪽은 현관에서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이런 고급 주택은 처음이었기에, 라희는 호기심과 긴장으로 주위를 살폈다.

주택의 내부는 조용했다. 다른 가족과 마주치지 않을까 가슴 졸이고 있는데, 그는 무심히 계단으로 향했다. 그가 계단을 막 오르려다가, 멈춰 서서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당분간 식사도 맞춰서 준비해줘.“

그의 말에, 중년 부인이 옆에 서 있는 라희를 힐끗 보며 물었다.

"두 사람분으로 말씀입니까?"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중년 부인의 눈빛은 짧은 순간 다시 라희를 향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라희는 던져진 시선에 담긴 감정이나 의도를 읽어보려고 노력했으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약간의 호기심, 그것이 파악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바로 시선을 돌린 중년 부인은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수그렸다.

“올라가지.”

그는 라희를 향해 말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튼튼하고 육중해 보이는 석조 계단을 걸어 3층에 올라오니, 작은 거실이 보였다.

마치 호텔의 간이 휴게실처럼 소파 옆에 높다랗게 테이블 쪽으로 굽어진 은은한 조명의 스탠드가 놓여있고, 테이블 위에는 포브스, 타임, 뉴스위크 등의 익숙한 영자 주간지가 몇 개 놓여있었다.

작은 거실을 지나자 트인 공간의 난간 안쪽에 빙 둘러서 있는 방문들이 나왔다. 현관에서 가운데 뚫린 로비 공간의 난간을 따라 벽에 배치된 방문은 총 4개였다. 그는 그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짙은 오크색 방문의 문을 열었다.

공간이 곧바로 펼쳐져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문을 열자 복도가 있었고 그 끝에 또다시 방문이 있었다. 복도의 양 옆은 드레스 룸인 듯 보이는 수납공간이었다. 조금 더 지나자 문이 살짝 열려있는 욕실이었다. 그 옆을 지나쳐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을 여니 보이는 것이 침실이었다.

한 면이 바깥 테라스와 연결된 커다란 방은, 모던한 철골 구조에 투명하고 두꺼운 시스템 창을 통해 테라스 바깥 경치를 내다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한쪽이 트인 구조였다. 창문 앞에는 이중 커튼 있었고, 흰색의 커튼이 반쯤 드리워져 있었다.

라희는 창에서 눈을 돌려 침실 안을 살펴보았다. 방안에는 푹신해 보이는 킹사이즈 침대와 간이 테이블, 안락소파, 적어도 60인치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최신식 티비가 놓여있고 그 앞으로는 라희의 오빠도 즐겨했던 플레이스테이션과 엑스박스의 게임 콘솔이 보였다. 티비 옆의 창문과 가까이 있는 방의 한쪽 구석에는 그의 오피스텔에 보았던 그랜드 피아노와 흡사한, 하프시코드가 놓여있었다. 하프시코드의 위에는 펼쳐진 악보가 놓여있었는데, 낡고 손때가 묻어있어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내 방이야. 같이 있는 동안 식사는 제대로 해야 할 거 같아서."

키가 큰 그가 라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냉동식품으로 때울 수는 없으니."

라희는 어두컴컴한 창밖을 힐끗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오피스텔과 다른 낯선 공간이었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는 같았다. 단지, 그쪽에는 생활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이 방은 게임기와 잡지,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위의 스탠드와 아래에 펼쳐져 뒤로 엎어져 있는 페이퍼백 책 옆에 끄적이다 만 메모지와 그 위에 놓여있는 펜까지. 고스란히 삶의 흔적이 드러났다.

"여기가 원래 집이야. 오피스텔은 잠깐씩 사용하는 곳이고. 여기는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곳이지."

그의 말은 묘한 과거시제였다. 보통 침대 옆이나, 벽에 가족사진이나 액자가 있기 마련이라서 라희는 궁금한 눈초리로 방안을 살폈다. 그 어디에도 가족사진이나 액자는 없었다. 라희의 시선을 따라가 보던 그가 짧은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어. 중학교 때, 빗길 교통사고로."

갑작스러운 말에, 라희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보통, 라희가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에서는 유감입니다 라고 예의 바르게 반응하던데, 국어로는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말을 떠올리며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는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가 커다란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가에 드리워진 레이스 커튼이 밤바람에 하느작 나풀거렸다.

"여기.“

그는 라희에게 잘 보라는 듯 눈짓하고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협탁 위에 놓여 있는 회색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둘러싼 붉은 등이 켜져 있다가 딸깍 소리와 함께 녹색등으로 바뀌었다.

“쉴 수 있게 옆방을 준비해 주고, 테라스로 와인을 올려줘.”

“네, 알겠습니다.”

딸깍, 하고 연결이 끊겼다. 인터폰 같은 것이었다. 그가 회색 버튼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렇게 누르고 말해.”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머무르는 동안 아무래도 저 버튼을 사용할 일은 없어 보였지만 사용법을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인터폰을 보며 멀뚱히 서 있는 라희에게 그가 손짓했다.

“테라스로 나가지.”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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