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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도 사주셨는데,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셔도 돼요, 라는 말은 입안으로 삼켜졌다. 이미 받을 대로 다 받았는데, 부담된다는 말을 해 보았자 진정성이 없었다. 라희가 말끝을 흐리고 서 있자, 그가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목 언저리의 붉은 흔적 값이라고 치지. 개당 10만원이라니, 다른 곳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저렴하군.”
부끄러움의 값인가. L 백화점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시선을 던진 곳은 라희의 목 언저리였다. 그의 팔에 허리가 붙들려 있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속옷 가게 점원도 티 나지 않게 라희의 몸을 살폈고, 멤버쉽 클럽에서 정중하고 예의 바른 손님 응대를 교육 받은 직원조차도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훑는 원초적인 호기심은 어찌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대 놓고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입니다, 라고 광고 하는 듯한 그의 모습과 역시나 수치심도 없이 딱 달라 붙어 걸어가는 여자를 보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다가, 타인이 주는 시선 속의 수치심에서 자신에 대한 조소로 이어졌다. 혼자 있을 때 텅빈 무력감 속에서 솟아오르곤 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친숙하게 몸안에 스미고, 라희의 굳은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라희의 시선은 번쩍이는 천장 조명을 반사하는 A관 1층의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으로 향했다. 멤버쉽 클럽 안에서 느낀 위화감과 이질감에 은근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방금 그의 말에 순식간에 참담한 기분으로 곤두박친 라희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고, 깨물었다. 라희가 말없이 가만 서 있자 바흐는 그녀를 감싸 안아 까르띠에 매장 입구로 이끌었다.
“가까운 데로 가지.”
한적한 매장 내에 들어서자, 상냥하게 영업 미소를 띠고 다가온 직원이 두 사람을 향해 어떤 종류의 물건을 찾고 있느냐는 질문을 사근사근하게 던졌다.
바흐는 옆의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목걸이를 보여달라고 건조하게 답했고, 직원은 젊은 커플 고객과 친근감을 높이기 위해 뭔가 입을 열려다가 딱딱히 굳어있는 라희의 표정을 보고선 입매를 닫았다.
"역시 젊은 여성분들에게는 과하지 않은 크기의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디아망 레제가 잘 어울려요. 크기는 이렇게 두 가지, 색상은 핑크골드, 화이트, 골드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큰 라지 모델 쪽이 잘 어울리실 듯해요. 디자인 자체가 우아하고 심플함을 지향하는 거라서 지금 입고 계시는 옷에도 잘 어울리죠. 색상은, 피부가 흰 편이시라 화이트가 무난하겠네요.“
점원이 동그란 원형 모양의 팬던트 안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체인을 진열대에서 꺼내 위에 놓고 보여주며 자세한 제품 설명을 했다. 바흐의 무심한 눈이 목걸이를 향했다.
"가격은 세금포함 3,070,000원입니다.
애써 설명했는데도 남자가 보이는 무반응에, 점원은 조심스럽게 옆에 서 있는 하얀 얼굴의 여자의 안색을 살폈다. 남자는 한 눈에도 돈이 많아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전적 여유가 넘쳐흘렀다. 옆에 서 있는 얼굴이 하얀 여자가 사겠다고 하면 바로 구입 할 기세였다.
차림새로 보아 가격이 부담 되는 것은 아닐텐데도 정작, 구입 의사를 나타내야 하는 여자 쪽에서 입을 닫고 있자 점원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어때?"
바흐의 말에 라희는 눈 앞에 놓여있는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그가 사주겠다고 한 이상 어떤 것이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받았어야 했던 키스마크 값이라지 않은가.
바흐가 카드를 꺼내 건네자 직원은 즉시 포장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착용하고 나갈 겁니다. 케이스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고객님, 보증서가..."
"그것도 됐습니다."
뭔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이던 직원은 그의 단호한 어투에 입을 다물었다. 본품을 제외한 나머지야 어차피 구매한 고객의 마음이었다. 모든 것이 필요없다고 하는 걸로 보아 환불하거나 교환할 의사가 없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카드 계산을 완료하고, 직원이 건네준 케이스를 열어 목걸이를 꺼낸 그가 라희의 목에 직접 걸어주었다. 나머지인 케이스와 영수증 그리고 보증서를 그대로 진열대 위에 둔채로, 그는 라희의 허리를 잡고 매장 밖으로 향했다.
"저녁 먹지."
그렇게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백화점 바로 옆에 위치한 L호텔이었다. 마치 유럽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높은 천정의 복도가 번쩍거리며 화려하게 빛나는 신관에 들어서 엘리베이터 숫자판 가장 꼭대기에 직사각형 안에 35라 적혀있는 층 번호를 눌렀다. 중간에 정차 없이 곧장 위로 올라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곳은 L호텔의 자랑이자,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P였다.
엘리베이터 앞 로비에는 타원형의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역시 거대한 화병이 꽃이 만개한 채 놓여있었다. 번쩍이는 대리석과 유리 기둥이 섞여 있는 벽은 호사스러웠고,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은 아이보리색 바탕의 검정색 격자무늬로 반짝였다.
유리와 대리석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엘리베이터 로비를 지나치자, 양쪽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스탠드를 양쪽에 나란히 켜놓은 데스크가 중앙에 있었다. 두 개의 기둥에 지붕을 얹어 놓은 듯한 심볼이 데스크 뒤에 둥근 원형 조형물 가운데 박혀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유니폼을 차려 입은 여자직원이 정중하게 물었다.
“고객님 예약 하셨습니까? 성함이.....”
“한진욱입니다.”
그가 이름을 말하자, 다른 남자 직원이 나와 안내를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나 봄직한 화려한 레스토랑이었다.
천장을 온통 금칠 해 놓은 듯한 널찍한 황금색 다이닝홀을 지나 벽을 온통 사각형의 격자들 한가운데 둥근 무늬가 큼직하게 박혀있는 브라운 색상의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별실로 안내 되었다.
별실 앞에는 황금색 알파벳으로 Albert Camus 알베르 까뮈라고 쓰여 있었다. 개장 초기부터 큰 화제가 되었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기에 언젠가 잡지에서 P 레스토랑의 별실 4개는 전부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났다.
별실에 들어서자 중구의 고층 오피스 빌딩이 한눈에 보이는 통창을 제외한 모든 벽을 그레이브라운의 격자무늬가 어지러이 채우고 있었다. 천장에는 나팔꽃 같기도 하고 고대 바이킹들이 마셨던 원뿔 모양의 술잔들을 방사형으로 모아둔 것 같기도 한 유리공예 샹들리에 두 개가 환히 밝혀져 매달려 있었다. 처음 엘리베이터 로비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의 모양으로 레스토랑 전체 조명은 이것으로 통일한 모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기가 질려버린 라희는 찬찬히 방안을 둘러 보았다.
별실 한 가운데는 새햐안 식탁보가 씌워진 커다란 타원형의 테이블이 세팅되어 놓여있었다. 동그랗게 성형된 앙증맞은 사이즈의 노란 무염 버터가 맨 위쪽에는 반투명한 종이를 덮고 사각형의 작은 접시 위에 올려 있어서 당일 제작된 듯 신선함을 풍겼고 손님 한명 한명을 위해 준비된 듯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옆으로 빈 잔들과 바로 앞에는 테이블 단면 모양이 음각으로 새겨진 빈 접시가 기본으로 세팅되어있었다.
자리에 착석하자, 앞에 주어진 두꺼운 메뉴판에는 한글로 음식의 이름과 간략한 설명이, 뒤쪽은 각각 영어와 불어 버전이 실려 있었다.
라희가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는 사이, 그가 주문을 마쳤다. 호기심에 밑에 적혀 있는 가격을 보니 디너 메뉴 두가지로, 1인당 20, 30만원 중반대의 가격이었는데 그는 역시 그답게 가장 비싼 메뉴를 시켰다.
며칠이나 가는 키스마크 값이 고작 서너 시간이면 소화되어 사라질 한 끼 밥값에 못 미치니 저렴하다는 소리나 듣지. 라희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다 보았다. 커플로 온다면 이곳의 밥 4번을 먹을 수 있는 가격이라 생각하니 더이상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적 부담을 덜었다고 해도 이런 사치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은, 태어나서 처음이라서 라희는 테이블 위 식기를 하나하나 살펴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함에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 하루 부실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든든하게 먹어야겠지.”
그의 말대로, 오늘은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은 베이글 샌드위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문득 느낀 허기로 테이블 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디너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웰컴디쉬가 나왔다.
웰컴디쉬는 한 접시 위에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음식이 이리저리 놓여있어 마치 잘 설계된 조형물을 보는 것과 같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선명한 연두색의 레몬 라임주스가 작은 유리잔에 담겨있었고, 그 옆으로 오백원 동전 사이즈의 갈색 초콜릿, 녹색의 루꼴라 케익, 황금색의 진저 사브레 쿠키가 담겨 나왔다. 그리고 작은 그릇에 쳐빌과 레몬크림이 들어있는 둥그렇고 하얀 공모양의 머랭이 놓였다. 식전의 식욕을 돋우는 월컴디쉬답게 한입 사이즈의 아기자기한 크기의 음식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조용한 가운데 그가 먹기 시작하자, 라희도 다양한 색감과 앙증맞은 크기에 호기심을 느껴 하나씩 맛보아 갔다. 레몬 라임주스는 상큼하고 달콤했고, 루꼴라 케익이라 불리는 초록색 둥그런 것은 건강해지는 맛이었다. 진저 사브레 쿠키는 달달한 맛과 향긋한 생강 향이 입안을 감쌌다.
그 사이, 푸른 유니폼을 입은 남자 직원이 하얀색 앞치마를 두르고서 빵을 가져와 테이블 옆에 간이 도마를 설치하고 직접 썰어주었다. 미니 바게트, 잉글리쉬 머핀, 카라멜 무화과 브레드, 이탈리안 브레드를 가져와 즉석에서 먹기 편한 크기로 썰어서 개인 접시에 종류별로 담아주었는데 딱딱한 빵과 부드러운 빵이 함께 놓였다.
라희는 맞은편 바흐가 하는 것처럼, 버터 위를 덮고 있던 종이를 제거한 후, 버터와 빵을 곁들여 먹었다. 고소한 버터를 듬뿍 묻혀서 뜨끈한 빵 위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입에 넣으며 창을 보니, 오피스텔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밝았던 밖은 어느새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서울 중구의 고층 빌딩의 조명들이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야경을 좋아하나 보군.”
그가 조용히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밤하늘의 별보다 빛나 보여서요.”
“흐음.”
잠시 후, 에피타이저가 들어왔다. 에피타이저와 함께 샴페인이 잔에 따라졌다. 황금색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황홀한 빛이 눈을 어지럽혔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실제 본다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라희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시골에 놀러 갔을 때, 어지럽게 빛나는 별들을 본 적 있다. 하지만, 별빛은 미약했고 너무 작았다. 이렇게 환히 빛나는 야경이 더 밝고 화려한데.
샴페인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이고 나니 첫 번 째 에피타이저가 나왔다. 푸르죽죽한 녹색이 담긴 접시는 수상해 보였다. 총 천연 녹색으로, 오리간 무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계란찜을 덮고 토핑으로 렌틸콩 무스와 구운 호박을 넣은 요리였다. 바닥 부분에 스푼을 넣고 긁어 올려 맛을 보았다. 오리 특유의 향과 맛이 진하게 입안을 맴돌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에피타이저는 한입 크기의 샐러드였다. 양상추 위에 여러 가지 재료를 얹어 놓은 모양새였다. 메뉴판에서 읽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마도 거기에 적혀 있던 것처럼 베이컨, 포도, 샐러드잎, 이탈리안 햄을 양상추 위에 얹고 처음 들어 보는 이상한 이름의 소스를 뿌렸으리라. 아삭아삭한 식감과 다양한 토핑의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져 색다른 맛을 선사했다.
다음은 생선요리였다. 둥글고 얄팍한 접시 위에 직사각형의 마들렌 크기의 익힌 생선에 올리브 소스, 게살을 곁들이고 녹색 파프리카를 얹은 요리로 익힌 생선의 담백함과, 곁들인 음식재료의 다양한 식감이 어우러져 근사한 맛이 났다. 그 옆으로는 따로 접시가 놓여서 아보카도 크로스무슈라는 샌드위치 모양의 기괴한 녹색과 붉은색이 층층히 겹쳐진 음식과 맑은 레몬그라스향의 스프가 같이 제공되었다. 독특한 맛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색다른 맛의 탐험에 어쩐지 기분이 조금 들뜨기조차 했다.
메인이 나오기 전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조용히 샴페인을 마셨고, 라희는 접시 옆 둥그런 메탈 고리 위에 놓인 나이프를 들어서 살펴보았다. 나이프 가운데 서명으로 보이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제작자 이름인 듯 보였다. 그동안 라희가 갔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보았던 식기들은 기껏해야 WMF가 적혀있는 기성 제품이었는데, 여기는 식기 하나하나가 전부 맞춤으로 보였다. 세계적인 레스토랑이라서 그런가?
라희는 앞에 놓인 둥그런 계란 모양의 소스 접시가 아슬아슬하게 놓여있었는데 마치 꼭 들어맞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기에 호기심에 들어보았다. 역시, 접시 가운데 부분과 그릇이 닿는 접촉부에 자석이 박혀있었다. 이런 세세한 것 하나하나가 모여서 이름값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흐의 시선은 맞은편 호기심을 잔뜩 드러내며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는 라희에게 머물렀다.
잠시 후 나온 메인은 어린 송아지 갈비구이였다. 뜨거운 그릴에서 꺼내 무쇠 그릇에 담겨 나온 고깃덩어리를 즉석에서 서버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접시로 썰어 올린 후, 통후추를 그라인더로 갈아 뿌려서, 가니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았다. 마치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요리를 보는 것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무쇠팬의 소리와 함께 묵직한 고기 냄새가 코를, 그리고 정성 들여 썰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쉐프의 모습은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메인을 다 먹고 나니, 디저트였다. 이곳 레스토랑은 디저트도 코스 요리처럼 여러 개가 순서대로 제공되었다.
맨 처음 나온 것은 손바닥 사이즈의 별모양의 접시 위에 볼록 솟아오른 바닐라 수플레 케이크였다. 검은색 트러플이 중심에 올려져 있어 포인트로 보이는 케이크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다른 접시에 담겨 같이 나온 차가운 프로마쥬 블랑 치즈 아이스크림을 뜨거운 케이크 위에 올리니 순식간에 하얀 아이스크림의 아랫면이 사르르 녹아 생크림처럼 변했다. 아이스크림과 같이 떠서 입에 넣은 바닐라 수플레 케이크의 맛은, 폭신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했다. 향긋한 바닐라 향과 독특한 트러플 맛이 입에 감돌면서 아이스크림 특유의 풍부한 유지방 맛이 전체를 어우러지게 하며 혀를 사로잡았다.
그가 케이크를 먹고 나서, 물을 주문했다. 푸른색 호리병 모양의 탄산수가 잔에 따라졌다. 라희도 잔을 기울여 한 모금 맛보았는데 약간 염분기가 느껴면서 톡 쏘는 특이한 맛이었다.
그렇게 입안의 단맛을 씻어 내고 나니 붉은색 비트시럽 샤베트와 젤리가 흰 접시에 담겨 나왔다. 모두 다 한입 사이즈로, 차갑고 상큼한 샤베트와 젤리를 먹었다.
그 뒤로는 둥그런 구슬 크기의 치즈볼이 나란히 놓여 마치 일본식 정원의 여백을 장식한 조약돌 같이 접시 위를 장식하고 있는 디저트 모듬이 나왔다. 접시 가운데는 얇게 채선 쌜러리가 하얀 요구르트 크림 위에 얹어져 있었다. 치즈볼을 곁들여 한입 먹으니 치즈볼이 바삭하게 부서지면서 아까 먹은 셔벗같이 시원한 느낌의 요구르트 크림과 아삭아삭한 식감의 샐러리가 어우러졌다. 고소하고 상큼하고 신선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요리 세 개를 맛 보고 나서 이제 디저트는 끝이려나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그다음은 르까보샤라는 층층이 겹쳐진 둥그런 파이 모양의 음식이었는데, 연두색 제스트 잼 시럽이 바닥에 깔려있고, 그 위로 주홍색의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붉은 깜파리 셔벗, 노란색의 레몬 비스퀴, 진한 갈색의 둥그런 밀크초콜릿이 뚜껑처럼 맨 위를 장식했다.
맨위의 초콜릿을 스푼 끝으로 부서뜨리며 한꺼번에 떠서 단맛과 신맛이 진하게 혀끝에 남아있는 맛을 음미하고 나니, 다시 흰 사각 접시 위에 백원짜리 동전 크기의 앙증맞은 아몬드페이스트, 모과 꽁피, 로얄아이싱, 리코타치즈, 초콜렛 넛이 올려져 나왔다. 작은 크기였지만, 음식 하나 하나의 맛은 독특했고 색달랐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해서 먹을 때 마다 입안의 혀를 즐겁게 했다.
그것을 먹고 나자, 유리잔에 담긴 디저트가 나왔다. 깔때기 모양의 마티니잔에는 파인애플 판나코타가 바닥을 채우고 그 위에 투명한 녹색 알로에 토핑이 네 조각 박혀있고, 얇은 파인애플 칩이, 마치 마티니에 꽂힌 올리브 조각처럼 비스듬히 꽂혀있었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에서 이어지는 디저트의 향연으로 질릴 대로 질린 단맛이었기에, 혀는 자극적인 맛들에 시달려 피로감을 호소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에스프레소와 시럽처럼 진한 단맛의 음료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서버가 커다란 나무 상자를 열어 들고와 그 담겨있는 초콜렛을 먹으라고 권했다. 라희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다가, 손가락 마디만한 사이즈의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어 먹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단맛이 에스프레소의 씁쓸한 쓴맛과 어우러져 혀끝에 달달함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려 마지막은 희미한 단맛이 남아 기분이 좋아졌다.
너무 배가 부른 나머지, 숨 쉬기도 버겁고 당장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작은 크기의 한입 싸이즈라 내심 무시했는데 코스가 길고, 셀 수 없이 다양한 요리가 나와서 어느덧 묵직하게 위를 채우는 포만감에 짓눌려 손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창밖에 번쩍이는 야경을 내다 보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맞은 편의 그는 깊은 고요한 눈매로 라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가지. 피곤해 보이는데.”
“.......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핸드폰으로 기사에게 대기하라 일렀다.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L호텔의 현관에 서니, 스르륵 다가온 그의 차에 기사의 도움으로 올라타 앉았다.
배도 부르고, 하루 종일 긴장해 있어서인지, 차에 올라타 푹신한 시트에 앉자마자 허리와 등 뒤가 노곤노곤했다. 그가 바로 옆에 앉아 있었음에도 젖은 솜같이 몸을 눌러오는 피로감에 전처럼 신경이 곤두서지도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라희가 다리를 앞으로 뻗어 새 구두 때문에 피곤한 발목을 슬슬 돌리며 풀고 있을 때,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피스텔 말고, 본가로.”
뒷좌석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백미러로 힐끗 본 운전 기사는 라희를 한 번 보더니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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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먹방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