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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28화 (2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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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오피스텔의 건물 밖으로 나오니 대로에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새카맣게 반짝이는 길고 중후해 보이는 차가 대기 중이었다. 운전기사가 나와 뒷문을 열어주었고 라희와 바흐는 뒷좌석에 각각 앉았다.

이 차에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지만, 뒷좌석이 마치 비행기의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의 좌석처럼 가운데 센터 공간을 사이에 두고 뚝 떨어져 있어서, 장거리 출장이나 업무용이지 아이들을 태울 수 있는 가족용 자동차는 아닌 것 같았다.

“예약은?”

그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기사에게 물었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래. 그럼 백화점 쪽으로 출발하지.”

차는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고, 뒷자리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언제나처럼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옆에 비치되어있던 영자 신문을 들고 천천히 읽어나갔다. 라희는 신문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해서 엉덩이 아래 맨살에 와 닿는 스커트가 신경 쓰였다. 아까 다시 씻고 나와 팬티를 입으려고 봤더니, 지저분한 얼룩으로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라희가 속옷을 손에 들고 이도저도 못하면서 망설이고 있자, 현관을 향하던 그가 낚아채서 쓰레기통에 넣으며 입매를 올렸다.

“그냥, 그대로 나가지. 난 상관없는데.”

오피스텔 현관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스커트 아래를 들추며 들어와 맨 엉덩이를 움켜쥔 그의 손바닥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인 채 차에 올라탔다.

라희는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거리 풍경을 보며 짧은 한 숨을 내쉬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속옷 매장부터 들르리라.

오후의 강남대로는 늘 그렇듯이 교통체증 중이었다. 차는 꽉 막힌 강남대로를 지나, 한강 다리를 건넜다. 잠시 후, 라희가 내린 곳은 소공동에 있는 L 백화점. 처음 그와 계약해서 같이 있었던 삼 일째 되는 날에도 함께 이곳에 왔었기에, 장소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백화점 정문 앞에 스륵 멈춘 차에서 내렸다. 그는 입구부터 붐비는 사람들로 혼잡스러운 본점이 아니라 본점 옆에 위치한 조용한 A관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라희는 멈춰 서 있었다.

“왜."

라희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눈치챈 그가 걸어가다 말고, 뒤 돌아서서 물었다.

“.....속옷 부터요.”

라희는 그의 곧은 시선을 피해 고개 아래로 숙이고 작은 소리로 달싹거렸다. 그는 깊고 검은 눈매로 천천히 그녀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순간,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라희의 허리를 감싸 곁에 붙이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본점 입구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내내 라희의 신경은 바짝 곤두섰다. 혹시나, 노팬티인 것을 누군가 눈치 채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허벅지를 바싹 붙이고 보폭을 좁게해 걷고 있으려니, 그가 평소 속도로 걸으면서 라희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인파와 함께 섞여 마침내 도착한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람들은 훤칠한 바흐를 힐끗거렸다. 그 옆에 허리를 붙들려 있는 라희에게도 은밀히 탐색하는 시선이 쏟아졌다.

많은 사람들의 눈초리 속에 그와 함께 서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데 스커트 아래에 속바지는 아니더라도 응당 입었어야 할 팬티까지 없으니 신경이 바싹바싹타고 이마에는 긴장으로 찐득한 식은땀이 맺힐 정도였다. 라희는 고개를 숙이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엘리베이터 옆에 안내된 플로어플랜을 살펴 보다가 속옷 매장이 밀집해 있는 4층으로 향했다.

“자.”

비교적 한가한 속옷 매장 복도에서, 저번과 마찬가지로 그는 검은 카드를 건넸다. 라희는 주춤거리며 손을 뻗어 그가 건넨 검은 카드를 쥐었다. 일반적인 신용카드 재질인 플라스틱 아닌, 무거운 메탈 재질의 아멕스 블랙. 온통 검은색으로 덮인 카드 가운데, 로마 시대의 전투모를 쓴 남자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는 카드다.

백화점 입구에서 시작된 긴장으로 식은땀이 배어 축축한 손에 들린 카드는 본래의 무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라희가 카드를 받아 들고 망설이고 있자, 잠자코 서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던 그가 턱짓했다.

“저기에 같이 들어가 직접 내 취향대로 골라주길 원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2주간 입을 수 있게 넉넉하게 사서나와.”

라희는 그의 말에 어깨를 떨구며 속옷 매장으로 걸어갔다. 친절히 응대하는 점원에게 사이즈를 말하고 그녀가 추천해 준 세트 중에서 편안해 보이는 디자인으로 일곱 개를 골랐다. 그와 함께하는 중간에 입은 속옷들을 손빨래하면, 7벌 만으로 2주간을 지내는 데에 문제없어 보였다.

카드를 건네 계산을 마치고 나서, 부피를 줄이기 위해 모든 포장을 제거하고 본품 만 쇼핑백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다. 점원이 포장에 몰두하는 동안 한 세트를 들고 재빨리 피팅룸에 들어가 갈아입었다. 원래 입고 있던 브래지어는 버려달라고 부탁하고 나자, 점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쇼핑백을 건넸다.

백화점에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옷 안에 속옷을 갖춰 입고 있어서인지, 팽팽했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복도에 서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는 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음.”

손에 쇼핑백 하나를 들고 있는 라희를 탐색하듯 살펴 보며 바흐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가지. 제대로 된 옷이 필요하니까.”

그 말에 라희는 지난번을 떠올렸다. 그는 그냥 즉흥적으로 발길 닿은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마네킹이 입고 있는 것을 달라고 주문하거나, 라희가 무심히 시선을 던진 옷을 쓸어담다 시피 했었다. 그렇게 그가 사준 옷들은 포장도 뜯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옷장에 들어있다.

어제 잠깐 뿔테와 함께 있을 때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가 그나마 입은 옷이랄까.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캐주얼한 티셔츠와 스커트로 라희가 느끼기에는 문제 없어 보였지만,그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희는 다시 허리를 감싸 안은 그에게 이끌려 옆 건물인 A관으로 향했다. 옆의 시끌벅적한 본점과 비교하면 거의 텅 비다시피 한 A관은 고요했다.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라희가 예상했던 A관의 옷 매장이 아닌, 4층에 위치한 멤버스 클럽이었다.

멤버스 클럽의 어두운 입구에 들어서자 검정색 개 석상이 앞을 지키듯 서 있었다. 어쩐지, 경계를 잔뜩 세운듯 보이는 검은 개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을 거부하며 쫓아내는 것 같아서 라희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멤버스 라운지 안의 벽도 검은색이었는데,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려 한듯 보였으나, 라희가 느끼기에는 앞에 서 있는 개와 같이 지나치게 답답하고 배타적으로 보였다. 벽의 한쪽 구석에 촛불 모양의 가느다란 스탠드가 여러 개 세워져 있는 탁자가 있고, 스탠드 사이사이로는 반짝반짝 빛나는 클러치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는 가격표와 함께 돋보이듯 전시되어 있었다.

“예약하셨습니까. 고객님.”

직원의 물음에, 그는 한진욱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직원의 안내로 안쪽 룸에 들어서자, 원룸 모양의 방이 펼쳐졌다.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은 밖이 보이는 테라스 모양의 하얀 창이었다. 방 한 가운데는 넓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고 한쪽 구석의 벽면은 전체가 거울이었다. 거울 앞은 작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꺼운 커튼이 반쯤 쳐져 있었다. 커튼 앞에는 역시 전신거울이 놓여있었기에 커튼이나 거울의 모양으로 보아 그 공간은 피팅룸으로 보였다.

라희는 처음 들어오는 곳이라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압적인 검정색 색상의 차분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방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푸른색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앉자 바로 예쁜 모양의 찻잔에 담긴 차와 케이크, 그리고 쿠키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지만, 낯선 환경에 긴장한 라희는 그 어떤 것도 손대지 않고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내 닫혔던 방문이 열리고,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여자 직원과 그 뒤를 이어 옷이 걸린 행거가 다른 직원들의 손에 들려 들어왔다.

여자 직원은 퍼스널 소퍼라는 자신의 소개를 간단히 마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세련된 고객 응대 톤으로 입을 열었다.

“젊은 여성분이시라길래 말씀하신 키와 체형에 맞춰서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원피스와 티셔츠, 그리고 바지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기 걸린 옷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입어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직원들이 잡고 있는 행거를 손짓했다. 라희는 잔뜩 굳어서 바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잡고 있던 허리를 놓아주며 어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라희가 소파에서 일어서 행거 앞으로 걸어가자 직원은 친절하게, 고객님께서 요청하신 한국 사이즈 55기준, 240 크기의 구두를 준비해 두었다고 알렸다.

라희는 행거의 맨 앞에 걸려있던 있는 원피스를 골랐다. 엉거주춤 굳어서 바흐를 슬쩍 바라보니, 그는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앉아서 테라스 모양의 창 너머의 통유리 밖 풍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라희는 원피스를 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커튼이 쳐진 피팅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라희가 고른 옷은 아이보리색의 장식 없이 심플한 라인의 원피스였다. 옷을 갈아 입고 나오자 직원은 의상에 맞춰 고른 차분한 색의 미들 힐 구두를 신겨주었다.

구두를 신고 나니 무릎 아래 부터의 다리 윤곽이 가늘어져 원피스와 잘 어울렸고, 라희는 어색하게 커튼 앞에 있던 널찍한 하얀 테두리의 전신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비록 거울 속의 얼굴 표정은 딱딱했지만, 몸에 걸쳐진 원피스는 맞춤옷처럼 라인이 딱 맞아 떨어졌다. 그는 찻잔을 내려 놓고, 라희를 보며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군요. 총 몇 벌입니까.”

그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말을 건네자, 직원은 상냥한 미소로 답했다.

“준비한 옷은 여기 보시는 대로, 원피스와, 티와 바지를 한 세트로 묶어 총 15벌입니다. 구두는 옷의 분위기별로 5켤레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지갑에서 아멕스 블랙을 꺼내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는 그대로 입고 나갈 거니, 맞춰서 준비해주시고. 나머지는 포장해 주십시오.”

그가 건넨 검은색 카드를 받아든 직원과 행거가 룸을 빠져나갔다. 라희는 직원의 안내로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옷에 붙어있던 태그을 뜯어내고, 옷매무새를 다시 만졌다.

라희는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의 가격을 떠올려 보았다. 270만원. 밖에 걸린 옷들을 전부 다 사면 총액은 얼마일까. 그리고,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은 대체 얼마일까.

라희가 살아왔던 세상과 전혀 다른 금전 감각의 그의 생활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직원이 작업을 마치기를 가만 서서 기다리는 중에, 벗어둔 구두는 바닥면의 스티커가 말끔히 제거되었다.

직원의 오케이 사인에 커튼 밖으로 나오면서 소파에서 일어 서 있는 그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비켜진 그의 시선은 라희 얼굴이 아닌, 목 언저리를 보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못마땅한 듯 살짝 좁혀졌다.

라희가 영문 모를 그의 불쾌한 표정에 굳어 서 있자, 그는 고개를 돌려 응대를 위해 서 있던 직원에게 라희가 들고왔던 쇼핑백을 가리키면서, 방금 구입한 물건과 함께 차에 갖다두라고 일렀다. 그리고는 바로 라희에게 가까이 와 허리를 감싸쥐고 멤버쉽 클럽 밖으로 향했다.

“밥 먹으러 가기 전에 1층부터 들르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라희는 A관의 한적한 1층의 한가운데 어리뚱절하게 서 있었다. 양 옆으로는 까르띠에와 불가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음. 너무 노티 나나.”

그가 두 매장을 번갈아 보다가 라희의 경직된 표정에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티파니는 저쪽으로 건너가야 있어.”

“.......네?

라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그는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목걸이.”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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