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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 (5)
라희는 거실을 유유히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눈길을 던졌다. 그는 그대로 거실을 통과해 뒤편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고, 가만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옆에 있는 냉동실을 열어서 안을 찬찬히 살피더니 손을 뻗어 뭔가를 꺼냈다. 라희가 서 있는 방음실 문 앞에서는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라희는 고개를 위로 빼다가 이내 포기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소파 앞을 지나, 하얀 대리석 식탁에 다다르자 바닥에 익숙한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화륵. 얼굴에 뜨끈한 열기가 확 몰렸다. 어젯밤의 흔적들. 라희는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 들어 품에 가득 끌어안고서, 그대로 몸을 돌려 침실로 후다닥 뛰듯이 걸어갔다.
잠시 후, 헐렁한 예일대 티셔츠를 벗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거실로 나왔다. 코끝을 간질이는 근사한 향이 느껴졌다. 코안 깊숙이 스미는 맛있는 냄새다.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어떤 장면일지 상상이 갔다.
지글지글 고열의 프라이팬 안에서 노오란 버터가 녹아내려 가며 고소한 냄새를 피워 올린다. 공기 중에 떠돌아 다니는 묵직하고 진한 버터 향. 이내, 그 냄새 위로 입안에서 바삭하고 부서지면, 육즙이 잇새로 스며들어 혀끝에 짠맛을 가득 남길 것 같은 베이컨 특유의 스모키향과 풍미 가득한 기름 냄새가 겹겹이 쌓였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는 주방에서 풍겨 나와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라희가 식탁 쪽으로 머뭇머뭇 다가가자, 손에 하얀 접시를 든 그가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얼떨떨하게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새하얀 대리석 식탁 위. 탁, 하고 가벼운 마찰음이 나면서 하얀 접시가 놓였다. 흰 접시 위에는 이 모든 냄새의 주범인 듯한 먹음직스러운 베이글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먹기 좋도록, 가운데 반 잘린 베이글의 안쪽 단면이 보였다. 진한 버터에 튀기듯 구워 둥근 테두리가 갈색으로 바삭하게 탔고, 그 안에는 샛노란 슬라이스 치즈 두 장. 치즈들 사이로는 기름진 베이컨 세 줄이 들어 있었다. 뜨거운 빵에 눌리고 안에 품은 베이컨의 열기가 치즈를 절반가량 찐득하게 녹여냈다. 베이글의 둥근 윗면에는 버터가 가득 스며들어 번들번들 기름기로 반짝였다.
갈색 베이글 안의 노란색 치즈와 베이컨. 심플하면서도 식욕이 당기는 모양새였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에, 보고만 있어도 침이 꼴깍 넘어가고 배가 꼬르륵거리며 요동쳤다.
하지만, 어쩐지 먹어도 될까 하는 망설임으로 식탁 앞에 서서 또 다른 접시를 들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눈이 마주친 그가 단정한 입매를 올렸다.
“같이 먹지.”
그는 냉장고에서 꺼낸 오렌지 로리나를 컵에 따라 라희 앞에 놓았다.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가느다랗고 아슬아슬한 샴페인 잔이 아닌, 그냥 투명하고 단순한 유리물컵이었다. 노란색 로리나는 물에 희석한 오렌지 주스 색이었다.
베이글 샌드위치와 노란 음료가 놓인 식탁을 마주하자, 라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라희의 맞은편에 앉아, 역시 같은 모양의 베이글 샌드위치와 음료를 앞에 두고 라희를 가만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라희는 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렇게 식탁에서 마주앉은 일은, 계약이후 반얀트리에서 같이 보낸 첫 사흘 이후 처음이라서, 굉장히 낯설었다. 어색과 긴장으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여기서 생활하지 않아서, 냉장고에서 먹을 만한 것은 이거뿐이야. 냉동된 것들이라 맛은 별로겠지만, 일단 먹어.”
라희가 앞에 놓인 접시를 물끄러미 가만 보고 있자, 그가 몸을 일으켜 주방 서랍을 열더니 커다란 톱니 빵칼을 꺼냈다. 접시 위의 절반 잘린 베이글 샌드위치는 그의 유려한 움직임에 의해 순식간에 한입 크기의 네 조각으로 잘렸다. 그는 뾰족뾰족한 톱니 모양 칼날에 노란색 치즈가 녹아 묻어 있는 빵칼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어서 먹으라는 듯 턱짓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 앞의 베이글 샌드위치를 통째로 들고 먹기 시작했다.
잘 구워진 베이글의 단면이 한입 크게 베어지고, 그의 턱의 움직임과 함께 바삭, 바삭 식감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배가 고플 대로 고팠던 터라 도저히 식욕을 참을 수 없었다. 라희는 손을 뻗어 앞에 접시 위에 네 등분된 조각 중 하나를 들어 한입 가득 먹었다. 겉은 튀김처럼 바싹 구워지고 속은 촉촉한 베이글이 파삭하면서도 쫀득하게 눌러 씹혔다. 혀끝으로 치즈의 농밀하고 진한 맛이 느껴지면서 잇새에 씹힐 때마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베이컨의 고소한 짠맛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샌드위치 안의 베이컨과 치즈 모두 짭짤했기에, 한 조각을 먹고 나서 앞에 있는 유리컵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약한 탄산 속의 달콤하고 청량한 오렌지 맛이 혓바닥 가득 느껴지면서, 입안에 진하게 남아있던 치즈와 베이컨의 짠 맛이 음료와 함께 쓸려 내려갔다.
기름기 가득 묵직한 샌드위치와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뱃속에 집어넣으라는 뇌의 원초적 명령이 내려졌다. 라희는 버터가 묻어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앞으로 뻗어 두 번째 조각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바흐 역시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고 나서 목이 탔는지, 컵을 기울여 음료를 마셨다. 그의 눈길은 맞은편에서 허겁지겁 샌드위치에 탐닉하고 있는 라희를 향했다. 깊은 눈매가 살짝 옅어졌다. 한참 동안 지켜보던 그가 입매를 단정하게 올렸다.
“하나 더 만들 걸 그랬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라희는 입안에 구겨 넣은 마지막 조각을 씹어 삼키던 것을 멈추고 그를 향해 힐끔, 시선을 돌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숨과 함께 빨려 들어간 음식물이 목에 턱 걸리면서 식도가 놀랐다. 이내 목이 메어왔다. 목구멍이 음식물로 콱 틀어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손을 앞으로 뻗자, 그가 손에 든 주스컵를 건넸다.
벌컥벌컥, 급하게 들이켜면서 차가운 음료가 목구멍으로 흘러들었다. 목안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던 곳이 여유가 생기자 스륵, 음식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라희는 겨우겨우 입안에 들어 있던 것을 마저 씹어 삼켰다. 그러고 나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충분해요. 그런데…. 요리를 잘하시네요.”
맛있게 먹은 답례로 뭐라 말해야 할 거 같아서, 라희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묻는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말라던 그에게 말을 건네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스멀거려 낮아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유학시절에 늘 만들어 먹던 거니까.”
의기소침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라희의 귀에 들려온 나지막하고 간결한 음성.
유학? 아까 입었던 티셔츠를 말하는 걸까? 라희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H고 출신이라는 것은 유진이 말해 주어서 알게 되었고, 지금은 미라와 같은 Y대학교 4학년이라 것, 그나마 가을학기부터는 취업계를 내고 학교를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라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학력사항의 전부였다.
바흐에 대해서 라희가 실질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허탈해진 라희는 자신 앞에 텅 비어 있어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도우미 이모님이 오실 거야. 그냥 내버려둬.”
비스듬히 내려다보면서, 식탁에 앉아 있는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덧붙였다.
“한 시간 정도 사무실에 갔다 올 거야. 여기 얌전히 있어.”
그가 몸을 돌려 침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면서, 라희는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사무실이라면, 처음 그와 계약서를 작성했던 곳이다. 삼성동 고층빌딩 밀집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H 빌딩 꼭대기 층. 그가 대표로 있는 회사 업무실.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빵부스러기와 버터가 묻어 있는 빈 접시 두 개를 포개고 그 위로 지저분한 치즈가 엉겨 있는 빵칼을 올려놓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빈 잔 두 개를 들고 싱크대로 다가갔다. 따뜻한 물을 틀어 빵 부스러기와 기름기를 밑으로 흘려보낸 후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거품을 내 남아 있는 흔적들을 닦아 나갔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중에 온다고 들었지만,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에 오점이 남아 있는 것은 보기에도 힘겨운 일이라서, 손에 세제를 묻힌 김에 소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샴페인 잔까지 가져와 뽀드득뽀드득 뿌듯한 노동의 효과음이 울려 퍼질 정도로 깨끗이 닦아냈다. 물에 젖은 깨끗해진 식기들을 싱크대 한쪽의 건조대 위에 올려놓고서 나자, 마음이 흡족해졌다.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으로 몸을 돌리니 말끔하게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침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멀찍이서 라희를 보고 있던 그의 새카만 눈매가 가늘어지며 깨끗한 식탁 위를 살폈다. 좁혀진 눈매로 어쩔 수 없군, 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라희는 주방에 멀뚱히 서 있다가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의 뒤를 따라가 현관 앞에 섰다. 그는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난 뒤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라희를 비스듬히 바라본 그가 말했다.
“.........갔다올게.”
현관 앞에서 어색하게 서 있던 라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 사이, 그는 몸을 돌려 현관문 밖으로 향했다. 서서히 닫히는 문틈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결혼한 부부처럼, 주방일 하던 라희가 쫓아 나와 바쁘게 출근하는 그를 배웅하는 모양새 같았다. 그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는 남편이 된 듯한 상황이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라고 할 걸 그랬나?
―띠리리.
현관문이 닫혀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라희는 재빨리 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풀썩,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았다. 등과 허리를 감싸오는 포근한 느낌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어젯밤, 여기서 내내 행했던 엄청나게 야한 일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라희는 소스라쳐 튕기듯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단지 소파일 뿐인데. 머릿속이 야한 거겠지. 라희는 좁혀진 미간을 거칠게 문질러 몸 안을 스멀스멀 채우던 야릇한 기운을 털어버렸다. 짧은 숨을 내쉰 후,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밝고 따사로운 햇살이 투명하게 내리쬐는 거실. 탁 트인 통유리의 창 너머의 아래에서는 늦은 아침의 거리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아침이라고 부르기에는 늦은 시각일지도 몰랐다. 밖에 비추는 태양 빛은 한낮처럼 한창이었고, 넓은 강남의 대로들은 오가는 자동차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개미 같은 작은 크기로 거리거리를 바쁘게 꼬물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게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라희는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어느덧 시간은 11시. 그가 한 시간가량 있다가 온다고 했으니 그동안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낮아진 시선은 앞에 놓인 가죽 소파에 머물렀다. 그리고 동시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샤워.
어젯밤 그 상태로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이 분명했기에, 아래에 말라붙은 정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 이 오피스텔에서는 현관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을 사용했지만, 아까 보니 침실 안 드레스룸 쪽에도 샤워부스가 있었다. 그쪽이 드레스 룸과 붙어 있어 샤워 후 옷 갈아입기가 수월하다는 허술한 핑계를 마음속으로 애써 되뇌며, 라희는 거실을 벗어나 침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샤워를 마치고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뽀송뽀송한 타월로 감싸 닦았다. 깨끗이 씻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의 샤워 부스 안에는 딱 네 가지만 있었다. 샤워 바스, 샴푸, 면도기, 바스 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지만, 오직 남자 물건만 있을 뿐, 다른 여자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 묘한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라희는 팔등을 킁킁거렸다. 향긋하면서도 조금 오묘한 냄새가 났다. 샤워 부스 안의 바스와 샴푸는 모두 불가리 제품이었다. 불가리 특유의 청량감 가득한 향이 은은해서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어쩐지 그의 향이 풍기는 것 같아 기분이 야릇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드레스 룸에 있던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나니, 물기가 마른 민얼굴의 피부가 건조한지 당기는 느낌이 났다.
'무언가 바를 게 없을까? 로션이라던가..'
주위를 둘러보니 드레스 룸 한쪽 구석에 로션과 스킨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자극적인 스킨은 패스하더라도 로션은 바라도 되지 싶어서 둥근 로션 뚜껑을 열고 코를 가까이 대 향기를 맡았다. 역시 남성용 화장품이라 진한 우디향이 코끝에 스쳤다. 이 향은 도저히 무리다 싶어 젖은 타월로 얼굴을 문지르듯 톡톡 찍어낸 후,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걸쳐 입고 드레스룸을 나왔다.
거실을 지나쳐 아까 앉았던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라희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서 그와의 약속을 떠올려 보았다. 천만 원에, 2주. 여기서 2주간 생활하려면, 당장 로션이나 속옷 등의 생필품이 필요했다.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라희는 사선으로 눈을 내려 걸치고 있던 치마를 힐끔 살폈다. 비록 몸은 깨끗이 씻었지만, 속옷 특히, 팬티는 어제 입던 것 그대로라서 찝찝했다. 핸드백 속에 팬티 라이너라도 하나 챙겨 둘 걸 하는 후회가 샘솟았다. 하다못해 아래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회용 팬티나 혹은 팬티 라이너라도 하나 사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찜찜한 기분으로 있는 것보다야 역시, 그편이 낫겠지?'
마음을 결심한 라희는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신으면서 얌전히 있어, 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지만, 다른 데도 아니고 바로 밑 편의점이라면 이해해 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라희는 문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어맛…! 아..”
라희가 입을 작게 벌리고 가만 서 있자, 그도 갑자기 문이 열려서 놀랐는지 살짝 커진 눈으로 라희를 응시했다. 앞서 말했던 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돌아온 그다.
이내 평정심을 찾은 새카맣게 깊은 눈동자가 라희를 향했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라희는 잔뜩 움츠러들어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 가려고.”
낮은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평이한 어조였지만, 어딘지 불쾌감이 희미하게 눌려 있는 듯한 음색. 놀라 굳어 서 있는 라희의 몸을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칭칭 감싸 죄였다. 그가 곧게 내려다보는 가운데, 라희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아래, 편의점에요.”
아주 간단한 대답인데도 말을 목구멍에서 꺼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대답을 마친 라희가 입을 닫고 가만 서 있자. 조용히 탐색하는 눈초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나갔다.
“왜.”
짧은 물음. 라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갖은 핑계를 대는 것보다는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낫겠지.
“……. 속옷이 어제 입었던 거라서...”
긴 망설임 끝에 우물거리며 말을 꺼내자, 그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제법 큰 노트북의 모서리 끝을 들어 열린 문틈 사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오늘 청산할 거니까, 3시 이후에 같이 움직이지. 그때까지 가만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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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