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VI. 그
22. 그 (1)
희미하게 들려오는 선율이 의식을 일깨웠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매우 작고 낮게 울리는 음악은 피아노 소리 같았는데도 약간 느낌이 달랐다. 피아노 음색이 둥글다면, 이것은 선명히 날이 서 있는 소리였다. 귓가에 점점 또렷해지는 악기 소리와 함께 라희는 눈을 떴다.
온몸이 노곤하니 힘이 없었다. 게슴츠레 뜬 눈 사이로 킹사이즈 베드에 널찍하게 펼쳐진 새 하얀 침대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 같아. 가만, 호텔?
순간, 정신이 든 라희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훌렁 내려간 침대 시트 사이에 드러난 몸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라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방안이다. 바닥은 온통 하얀 대리석이고, 침대 옆은 도시가 훤히 내다보이는 파노라마 창이었다. 훤한 창가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침대 위로 쏟아져 내려 시트 위에서 희게 부서졌다. 새하얀 침대 위에서는 바싹 마른 침구에 스민 햇빛의 냄새가 났다.
의식은 또렷했지만, 기억이 몽롱했다. 라희는 눈을 깜빡이며 여기가 어딘지 생각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통 창에 바닥이 흰색인 것을 보니 바흐의 오피스텔 같았다.
라희는 고개를 돌렸다. 옆의 빈 베개와 시트 위에는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리창 바깥을 보니 아침, 도로 위 버스와 승용차들이 한가하니 돌아다녔다. 출근 시간대는 지난 늦은 아침이었다.
어젯밤 그와.........
어제 일이 대강 생각나자 얼굴에 화끈, 열기가 몰렸다. 라희는 반쯤 감싼 시트를 제치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연한 갈색으로 변했었던 키스 마크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도드라져 온몸에 찍혀 있었다. 쇄골 아래, 어깨, 팔뚝, 가슴, 배, 그리고 허벅지 위와 안쪽에는 선홍빛 낙인이 어지러이 남았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야, 집 밖엘 아예 나가지 않거나, 외출 시에는 긴 옷을 필수로 입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왜 이곳이지?'
그의 오피스텔 안 침실은 처음이었다. 방안은 휑하니, 침대와 그 옆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출입문 맞은편에 문이 있는 걸로 보아 침실에 딸린 드레스룸, 혹은 욕실로 보였다.
먼 듯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점차 빨라지는 듯 했다가, 기묘하게 느려졌다. 지금 들려오는 멜로디는 익숙한 선율이었다. 평소 듣던 음색과 미묘하게 달랐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던 음악이다. 영화에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듣고 있으면 딱 어울릴만한 아련한 선율.
라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텅 빈 침실에는 걸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입고 왔던 옷은 어젯밤 식탁 그에 의해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것이 기억났다. 라희는 문뜩 창문을 노려보았다. 혹시 저 바깥 통 창으로 밖에서 알몸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긴장감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라희는 통유리를 노려보면서 드레스룸으로 추측되는 문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문을 여니 안쪽은 복도 같은 공간이었다. 양옆으로 하얀 벽 같은 옷장이 주륵 늘어서 있고 끝은 파우더룸으로 되어 있었다. 파우더룸 안쪽은 투명한 샤워부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라희는 재빨리 옷장 문을 열었다. 여러 층의 선반 같은 곳에는 마치 전문 매장처럼, 수십 켤레의 번쩍이는 남성용 구두가 놓여 있었다. 그쪽을 닫고 안쪽 옷장을 여니, 동그랗게 말린 벨트와 넥타이, 커프스 링크, 고급 시계들이 놓인 유리 선반이 나왔다. 그의 옷장. 전부 남성용이었다.
우습게도, 여자 물건 하나 없이 전부 남자의 물건인 걸 보니 묘한 안심이 들었다.
라희는 반대편 옷장 문을 열었다. 셔츠와 상의가 걸린 옷걸이들이 보였다. 그중에서 후줄근해 보이는 남색 티셔츠를 골랐다. 상당히 컸는데, 티셔츠 한가운데는 흰색으로 YALE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일대 티셔츠인가?'
예일대를 떠올리니 자연스럽게도 어제 맞닥뜨린 유진이 생각났다. 그녀도 예일대 출신이다. 유진 것일까? 하지만, 이 티셔츠는 커다란 치수만으로도 남자 것임이 분명했다.
다른 셔츠를 입으려고 옷장 안을 살펴보다가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다. 라희는 그냥 예일대 티셔츠를 몸에 걸쳤다.
'그녀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방안을 울리던 선율은 드레스룸으로 들어오니 조금 크게 울려왔다. 음정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크게 들리는 것은 아니고 마치 밀폐된 공간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듯이 원음의 기척만 풍겨 나왔다.
라희는 티셔츠를 걸쳐입고서 드레스 룸을 나와 침실까지 빠져나왔다. 문을 연 라희 앞에는 어젯밤 보았던 넓은 오피스텔 거실이 펼쳐져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 놓여 있는 빈 샴페인 잔과 로리나 병도 어젯밤 그대로였다. 거실에 있는 오디오 기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줄 알았는데, 거실의 전자기기는 모두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라희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가만 귀 기울이고 있으려니, 귀를 잡아끄는 듯 매혹적인 멜로디는 라희가 서 있는 침실 방 바로 옆문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을 마주하고서, 라희는 망설였다.
음악 소리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렇게 함부로 허락도 없이 문고리를 돌려도 될까.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하다가 문뜩 현재 입고 있는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옷장에서 마음대로 옷도 꺼내 걸쳐 입었는데, 이까짓 문쯤이야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딸깍,
문을 살짝 비틀어 여니 문밖에서는 희미하게 들리던 음악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날카롭고 선명한 금속성. 뚝뚝 끊어지는 음색. 확실히 동글동글한 피아노 소리는 아니었다.
라희는 문틈으로 보이는 방안 풍경을 살폈다. 바닥과 벽은 두꺼운 카펫 같은 천으로 되어 있었고 조명이 있는 천정은 벌집같이 촘촘한 네모 큐브들이 도배되어 있는 걸로 보아서 방음처리를 한 듯 보였다. 그 공간 가운데 그랜드 피아노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라희는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가 치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살폈다. 잠에서 깰 때부터 들리던 소리가 보통 피아노와 음색이 확연히 달랐듯이, 그가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비록 그랜드 피아노 모양이었지만, 생김새가 묘하게 달랐다. 피아노보다 전체 건반 폭이 좁았고, 무엇보다 건반이 2단이었다. 그리고 건반 색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보통 피아노에서 검은색 건반은 하얀색이고, 바탕 건반은 온통 검은색이다. 그리고 발아래 쪽 페달이 없었다. 라희는 기묘한 악기를 가만 지켜보았다.
아래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바흐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윗줄의 건반이 저절로 눌리며 그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것도 신기했다. 갑자기 연주에 집중하고 있던 그의 어깨가 흠칫, 하더니 그가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따라라라 딴따 따.
동시에, 손가락이 멈추고 연주가 뚝 끊겼다.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완전히 돌린 그가 라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났군.”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라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바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라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헐렁하고 편안해 보이는 라운지 팬츠 위에 흰 티셔츠를 입은 그가 라희 앞에서 우뚝 멈췄다. 그는 라희가 입고 있는 커다란 티셔츠를 보더니 입가를 슬며시 휘어 올렸다.
“구석에 있었을 텐데, 용케도 꺼내 입었군. 잘 어울리는데?”
그는 손을 올려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훤히 드러난 라희의 흰 목덜미 위를 손가락 끝으로 그리듯 문질렀다. 라희의 두 눈이 조심스레 그의 손끝을 향했다. 그는 하얀 피부 위에 박힌 선명한 붉은 키스 마크 자국을 만지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개당 십만 원짜리라지?”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소리지?'
의미를 알 수 없어 의문으로 가득한 말. 라희가 어렴풋한 기억 속을 헤집는 순간, 희미한 뇌리 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어젯밤 그에게 던졌던 유혹의 말.
―........즐거움을 주는 유혹의 대가는 얼마죠?
라희가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그에게 물었음에도, 그는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긴장된 침묵이 오갔다. 그는 대답 대신 대신 라희의 뺨에 라희가 조금 전 했던 것과 똑같이 입술을 닿을락 말락 갖다 대고는, 낮게 속삭였다.
“글쎄, 실력을 보면서 흥정해볼까. 시작해 봐.”
구체적인 금액이나 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던 라희는 순간 당황했다. 라희가 비스듬히 수그렸던 몸을 뒤로 빼서 물러나려 하자, 그의 손이 뻗어와 가는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이제야, 겨우 바람직한 관계가 되어가는데 물러서면 안 되지.”
건조하고 나지막한 평소 목소리와는 달리 은근하면서 치명적인 음성이었다. 붙잡힌 손목에 닿은 손끝 때문인지 그에게 눌린 살갗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아무리 어설프거나 형편없어도 줄 테니까, 돈은.”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걱정하지 말고 유혹해봐, 최선을 다해서.”
팔목을 잡은 그의 손이 라희를 바짝 끌어당겼다. 선심 쓰듯, 가르쳐 준다는 듯이, 그는 라희의 손을 자신의 턱 아래 셔츠 깃에 올려놓고 말했다.
“먼저 단추부터 풀어야겠지?”
라희는 숨을 들이켜고는 입술 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말한 대로 유혹을 시작한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의 시선 속에 갇혀서, 그가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서툰 손놀림으로 얇은 간절기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툭, 툭, 툭, 아래로 향하며 단추를 풀어나가자 탄탄한 복근 위 배꼽이 보인다. 이제 마지막 단추만 남았다.
-툭.
마지막 단추까지 다 풀었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복근을 보며 라희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라희를 따라 움직이다가 가늘게 좁혀졌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새카만 눈동자 위에 하얀 나신이 돌처럼 굳어 멈춰 있는 모습이 비쳤다. 그는 여유로운 눈매로 희미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단정한 입가는 기대에 차서 옅게 휘어 있었다. 그가 말없이 눈으로 묻고 있었다.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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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