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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일기 (3)
나는 그를 향해 멈춰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는 턱을 비스듬히 들고서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와 다르게, 그는 주름 하나 없는 감청색 데님 팬츠에 얇은 흰색 셔츠를 막 잡지 화보에서 튀어나온 모델처럼 근사하게 걸치고 있었다. 긴 소매의 끝단 단추는 소파에 앉으면서 느슨하게 풀어둔 채였다.
곧게 쏟아지는 눈빛을 받으며, 나는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방안을 방황했다.
커다란 오피스텔의 안은 내가 서 있는 식탁을 기준으로 뒤쪽은 깔끔한 유럽식 주방, 앞은 모던한 느낌의 거실이었다. 벽과 바닥은 반질반질한 화이트톤으로 통일되어 있고 군데군데 블랙으로 포인트를 준 심플한 인테리어였다. 그가 앉아 있는 커다란 가죽 소파는 맞은편 같은 크기의 소파와 함께 넓은 거실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고 소파 뒤쪽은 한 면이 전부 창으로 되어 있어 훤히 펼쳐진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도시의 풍경을 액자 삼은 거실에는 백화점 진열대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 벽걸이 TV와 홈시어터가 있었고 그 외는 휑뎅그렁한 빈 공간이다. 이 하얗고 차갑고 커다란 공간의 끝에는 두 개의 방문이 있었다.
저곳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다. 몇 번이나 이곳에 왔었지만, 나의 방문은 거실과 현관 옆에 이어져 있는 욕실이 끝이었다.
아까 제집처럼 행동이 자연스러웠던 유진이 생각나자 복잡 미묘한 심경이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당연했다. 그녀는, 처음 그가 내게 말해주었다 시피, 그의 연인이었고, 나와 그는 단순한 계약 관계일 뿐이다.
그와 내게 남아 있는 기간은 이제 11개월. 아무것도 없는 절망 속에 막막했던 나는, 그가 제시한 오천만 원의 대가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취직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웬만한 대기업 초임 연봉보다 높은 오천만 원을 즉시 지급받고, 일 년간 내 몸을 제공하기로 했다.
은행보다 좋은 점은, 빌린 것이 아니니 기간이 경과하면 원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밤업소에라도 나가 몸이라도 팔려고 고려했던 처지였기에 오히려 그가 제안한 것이 마음 한편에서는 기꺼웠다. 그라서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짙은 화장을 하고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에게 웃음을 파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게 계약서에 서명했다.
아까 유진의 방문에 놀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바흐가 그녀에게 계약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는 첫날 건조한 말투로 그녀에 대해 언급했던 것과 반대로 그녀는 내 존재는 알지만 어떤 관계인지는 알지 못했다.
유진은 우리가 마치 감정적으로라도 엮여 있는 연인인 듯한 태도로 은근하게 날 질투했다. 문득, 나와 그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비췄을지 궁금했다. 내가 한눈에 반해 그에게 매달리는 여자인 건가, 아니면 그가?
어쨌든, 그녀의 질투가 나로 하여금, 승리자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서 이런 이상한 상황을 자초하게 만들었지만, 내 앞에 놓인 냉정한 현실은 그는 내 몸만을 원한다는 것이고, 그가 묻는 말 이외에는 침묵하라는 강요였다.
당장 오천만 원이 청산되지 않은 이 상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11개월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이 못 미치는 기간.
지난달 그는 처음 며칠을 제외하고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나를 찾았고, 대부분의 만남은 고작 몇 시간 채 되지 않아 짧았다. 앞으로의 시간도 다르지 않으리라. 한 달에 몇 번, 그를 만나서 짧은 시간을 보내면 된다. 금전을 매개로 한 계약관계를 일깨워 주려는 듯이, 그는 내게 매번 후한 팁을 주지 않았던가. 그 돈은 차곡차곡 통장에 모아두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준 돈을 꼬박꼬박 모은다면 남은 기간보다 빨리 계약을 청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불어 그가 처음에 백화점에 가서 사주었던 옷장 구석 물건들을 인터넷으로 되팔거나 명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전당포에 맡긴다면 제법 돈이 될지도 몰랐다.
돈.
팩트는 돈이다. 돈을 생각하자, 몽롱했던 정신이 퍼뜩 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에게, 나는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유혹? 그래 해줄 수 있다. 그에게 길들여진 내 몸 아래는 미끌거리며 젖어 그를 원했지만, 아까의 부끄러운 행위가 준 절정 때문인지 미칠 듯한 간절함은 아니었다.
나는 용기를 냈다. 이왕 그가 시켰으니, 응당의 대가를 약속받고 싶었다. 잠긴 목이 조금 풀리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어가자 그의 시선이 나를 쫓았고, 마침내 발걸음을 멈추고 소파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마음속 결심이 확고해지자 의외로 그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흉내 낼 수 있었다.
그의 깊은 눈빛이 호기심을 띠고 날 향했다. 나는 입가에 힘을 주어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았다. 그의 곧은 눈동자 안쪽에 희미한 관심의 빛이 어렸다. 그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난 몸을 숙였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그의 입술 가까이 다가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아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지척에서 그의 그윽한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해도 될까. 묻는 말이 이외에는 말하지 말라던, 그의 지시를 어겨도 되는 걸까. 입술 끝을 살짝 깨물며 망설이다가, 계약을 생각했다. 돈과 육체 그게 우리 사이의 전부다.
다시 잠긴 목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그러고 나서,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수없이 준비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도발적이고 끈적한 목소리로 그의 뺨에 속삭였다.
“.........즐거움을 주는 유혹의 대가는 얼마죠?”
============================ 작품 후기 ============================
짧네요. 원래 20+21편 이을 생각이었는데 새벽에 먼저 급하게 올리다보니.
왜 그랬을까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