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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들 (8)
“만나서 반갑다고 해야 하나요? 송라희씨.”
그녀는 고급스러운 푸른색 원피스 아래 늘씬한 다리를 뽐내듯 걸어 들어왔다. 텅 빈 오피스텔의 실내 공간이 공명통이 되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깊은 울림, 매력적인 음색. 바흐의 그녀는 목소리조차 매혹적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소파로 다가와서 몇 걸음 남지 않은 거리에서 우뚝 멈췄다. 라희는 그대로 서서 그저 길고 늘씬한 그녀를 마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이는 그녀는 확실히 미인이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얼굴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연갈색 눈매가 호기심으로 좁혀졌다. 라희의 주변은 온통 평범한 대학생인데 이런 대단한 미녀에다가 강렬한 인상의 여자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라희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머릿속 기억을 헤집었다.
갸름한 얼굴선 안에 담긴 또렷하고 큼지막한 이목구비. 살짝 끝이 치켜 올라간 눈매. 도도해 보이면서 유혹적인 몸매. 길거리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지만, 정말로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하지만 어디서? 머릿속이 뿌옇다. 라희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에서 헤매면서 미간을 좁혔다.
“......이유진이에요.”
건조한 목소리. 라희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향해 내밀어 진 손을 살폈다.
유진의 손은 그녀의 큰 키만큼 곧게 쭉 뻗어 있었다. 희고 가는 긴 손. 예쁜 하얀 손은 은근히 화려했다. 네일 전문샵에서 꼼꼼한 손질을 받았음이 분명한, 인공적인 윤기가 손톱에 매끈하게 흘렀다. 잘 다듬어진 길쭉한 손톱에서는 미미한 고운 빛이 반짝였다.
'가만, 이유진?'
라희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기시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낯이 익을 수밖에. 라희는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아니, 라희 또래의 여자 대학생 중에서 그녀를 알 만한 사람은 수백 명, 수천 명도 넘었다.
유진은 유명 인사다. 아직 텔레비전 출연은 몇 번 하지 않았지만, 매스컴은 유진을 집요하게 쫓았다. 지하철 가판대 신문이나 패션 잡지 등에서 심심찮게 유진의 인터뷰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유진.
이 시대의 알파걸이라 추앙받는 예일대 출신 아트 딜러.
지성, 미모, 능력 모든 것을 다 거머쥔 여자.
“라희씨?”
귓가를 찌르듯 파고드는 유진의 목소리에 라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라희의 앞에는 하얀 손이 내밀어 진 채다. 라희는 쭈뼛쭈뼛 손을 들어 내민 유진의 손을 잡았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유진의 손에 비해, 핸드 로션조차 바르지 않은 맨손은 무척 부끄러웠다. 유진과 맞잡은 손은 차가울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가벼웠고 따뜻했다. 기분 나쁘지 않은 악수.
'하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유진의 손에 악수하는 라희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졌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초면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바흐의 그녀와 악수하며 나누는 인사라니. 정말로 말도 안 된다.
라희는 말없이 손을 풀고 앞에 서 있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라희보다 키가 큰 유진은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고 라희를 내려다보았다.
“진욱이에게서 간간이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진욱. 바흐의 이름. 바흐의 본명을 너무도 쉽게 부르는 그녀를 보며 라희는 묘한 충격을 받았다. 분명 계약서 상 서명된 이름은 한진욱이었지만, 라희는 그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와 있을 때는 늘 고요한 침묵만을 강요받았다.
유진은 마치 담배 피우다가 학생주임에게 걸린 중학생처럼 딱딱하게 굳은 라희를 보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마실게 필요하겠군요."
유진은 몸을 돌려 오피스텔 거실 안쪽 주방의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새것 같은,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막 주문해 갓 진열한 듯한 커다랗고 매끈한 최신형 냉장고의 문을 열고, 고개를 기울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진은 무언가 고심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유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라희는 이 오피스텔에서 한 번도 저 냉장고에 손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바흐의 오피스텔은 라희에게는 낯선 타인의 장소였다.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사적인 공간.
유진은 고개를 갸웃이며 냉장고 안을 살피다가 선홍색 로리나(Lorina)를 두 병 꺼내 들었다. 잘록한 유리병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고 유진은 라희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거 마실래요? 다른 플레이버도 있어요. 핑크, 오렌지, 레몬.”
유진이 의사를 묻는 듯 눈짓을 보냈다. 라희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유진은 한 손에는 로리나를, 다른 한 손에는 샴페인 글라스를 두 개 들고 걸어와 라희 앞의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취향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서, 선택지가 있어도 늘 익숙한 것만 찾게 되네요. 로리나는 프렌치 베리가 가장 입맛에 맞는데, 진욱이는 내가 모든 맛을 다 좋아하는 줄 알아요. 항상 종류별로 빠짐없이 채워놓네요.”
딸깍, 유리병이 비틀어 열렸다. 은빛 플래티넘 장식이 화려하게 빛나는 길고 아찔한 자태의 샴페인 글라스에 선홍색 음료가 주륵 따라 담겼다. 유진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샴페인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라희는 자신 앞에 놓인 붉은 로리나 병과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샴페인 글라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서 있었다.
유진에게는 제약이 없었다. 바흐의 공간 안에서 유진은 마치 제집인양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유진의 모든 행동들은 여기, 이 오피스텔에서 이방인임이 분명한 라희에게 어떤 사실을 확실히 주지 시켰다. 여기는 유진의 공간익도 하다라는 사실. 직적접인 언급은 없어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진은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곳의 주인은 자신임을.
샴페인 잔을 기울여 한모금 마신 유진은 느긋한 자세로 라희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거실. 천연 가죽 소파의 부드러운 표면 위로 유진이 가볍게 앉으면서 그녀가 걸친 푸른색 원피스가 체중에 눌려 구겨지는 소리가 사각, 공기 중으로 바스락거리며 울려 퍼졌다.
“선우와는 무슨 사이에요? 나영이에게서 듣자 하니 선우가 쫓아 다니고 있다고 했다던데.”
선우. 예기치 못한 유진의 말을 들은 라희는 잔뜩 긴장해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정선우. 뿔테의 본명.
“.....애인?”
여성스러워 더욱 매력적인 목소리의 끝이 살짝 올라갔다. 유진은 라희의 얼굴을 빤하게 쳐다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차갑게 굳은 뺨 위로 쏟아지는 그녀의 시선이 따가웠다. 뿔테와 내가? 애인이냐고? 라희는 눈을 깜빡이며 어지러운 머릿속을 내리눌렀다.
“폰 번호도 모르는 관계요.”
라희의 대답에 유진은 피식, 세련된 붉은 입술을 번들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유진는 화려한 샴페인 글라스 안을 붉게 채운 프렌치 베리 로리나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같이 형수 생일 파티에 온 것치고는 재미있는 관계네요. 어차피, 전화번호는 알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선우, 집 나와 여기 살고 있잖아요. 요 아래층 어디라고 들었는데.”
뿔테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유진을 보며 라희는 미간을 좁혔다. 아는 사이일까? 라희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 얼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유진이 말을 덧붙이며 목소리 끝을 살짝 높였다.
“아니, 집을 나온 게 아니라, 여기도 선우네 집인가?”
들으라는 듯,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린 유진의 말에 라희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올렸다. 라희를 탐색하던 유진의 매혹적인 눈과 마주쳤다. 유진의 미간에 미미한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라희는 다시, 테이블 아래로 황급히 시선을 던졌다.
“여기 오피스텔 빌딩 건물주, 선우 아버님이잖아요. 몰랐어요? 진욱이가 귀국했을 때 나영이의 소개로 오피스텔을 계약했는데. 위치도 좋고 지인 할인도 받을 겸 해서요.”
처음 든는 말이었다. 라희가 놀라 하는 표정을 짓자 유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라희로서는 유진이 지금 말하는 모든 내용이 금시초문이었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뿔테에게 두 형이 있다는 것도 어젯밤에야 겨우 알았으니까.
“라희씨가 남자들 만날 때는 편하겠네요. 펜트에는 진욱이, 아래층엔 선우.”
그녀의 말투는 건조했지만, 묘한 비틀림이 들어 있었고 라희는 그것을 걸굴 피부 위로 생생히 느끼고 있었다. 소파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무겁게 온몸을 짓누르는 것 처럼 느껴졌다. 거실 통 창으로 여과 없이 스며들어오는 오후의 황금빛 석양빛이 공간을 답답하게 채우며 압박해왔다.
“으음. 이것도 기연이네요. 어떻게 하나같이 H고 출신 킹카들과 인연이 닿았죠?”
뒤에 생략된 말은 분명 네까짓 게 감히, 겠지.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의문 어린 목소리로 예의 바름을 가장했다. 지금 유진의 말은 은근하게 떠보는 듯한 기색을 풍겼다. 라희는 유진의 거들먹거리는 목소리 톤이 거슬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되물었다.
“.....H고등학교요?”
라희의 질문에, 유진은 갸름한 턱을 끄덕였다.
“네. H고등학교요. 강남 바닥은 좁아서. 우리 다 거기 출신이에요. 라희씨는 지방 쪽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맞나요?”
누구로부터 들은 거지? 라희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금은 오기였다. 유진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유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맞은 편 라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눈앞에서 뛰노는 토끼를 가소롭게 바라보는 배부른 맹수의 오만이 넘쳐 흘렀다.
“전에.“
순간, 유진의 그림같이 날렵한 눈썹 꼬리가 위로 들렸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요?”
선물? 무슨 선물? 라희가 무슨 뜻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되자, 유진이 똑똑히 알아들으라는 듯 명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진욱이가 고양이를 길들인다기에, 추천해 준 거거든요.”
그 선물. 화끈. 낯 뜨거운 선물이 떠오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피가 잔뜩 몰린 광대 위 뺨이 견딜 수 없이 뜨겁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따끔따끔한 감각. 가장 할 수 없는 수치심 얼굴 위로 확 드러나 열기가 몰려들었다. 라희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머리털이 쭈뼛 선다. 전신에 흐르는 피가 차갑게 혈관 속으로 파고들며 얼음 날처럼 날카로운 통증으로 찔러왔다.
라희는 입술 끝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물며 밀려드는 오만 생각을 떨치며 버텼다. 라희가 소파 위에 올려놓은 손끝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힐끗 본 유진이 말을 이었다.
“유학시절 친구들의 감상이 괜찮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둘이서 즐거운 시간 보냈길 바랐는데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뒤덮인 시야가 온통 흐려지고 있었다. 라희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생판 모르는 남 앞에서 유진의 의도대로 순순히 무너질 수는 없었다.
“흐음. 라희씨는 말없이 조용한 것이 매력인가 보네요.”
유진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아슬아슬 가느다란 샴페인 잔의 스템을 잡고 기울였다. 샴페인 글라스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의 로리나를 천천히 삼켰다.
가득 차 있던 잔이 마침내 비워졌다. 투명한 샴페인 글라스의 바닥에만 미미하게 붉은 주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리뜬 시선 속에 비친 샴페인 글라스는 황금빛 석양에 물들었다. 투명한 유리 글라스의 또렷한 윤곽선을 찬란한 황금빛으로 희게 빛났다.
“벌써 시간이. 이만 가봐야겠어요.”
유진은 가느다란 손목에 차고 있는 비틀어진 S 자 모양의 시계를 힐끗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계를 들여다보느라 손목이 약간 비틀리자 시계 표면에 반사된 화려한 노을빛이 눈부시게 번쩍였다.
특이한 모양의 손목시계를 보고 있자 자연스럽게도 미라가 생각났다. 워홀 가기 전 둘이서 하릴없이 만나 시간을 보냈을 때 명동의 백화점에서 미라가 열광했던 시계. 카르티에 베누아S. 투명한 쇼윈도에 매달려 전시된 시계를 바라보던 미라가 베누아(Baignoire)는 프랑스어로 욕조라는 뜻이야 라고 알려주었다. 가늘게 비틀린 S자 모양의 베젤에서 뽑아낸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를 안에다 채워 넣으면 그야말로 럭셔리한 욕조가 되겠다고 중얼거리면서.
라희는 유진의 손목에 감겨 빛나고 있는 우아한 시계에 눈길을 던졌다.
아마, 저 시계값만 해도 라희를 옭아매고 있는 족쇄, 오천만 원을 훌쩍 넘으리라.
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느릿한 움직임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라희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앉아 있었다. 시선을 들어 그녀를 마주 볼 기운조차 없었다.
“저녁 비행기 시간이 다 되어서요. 오늘 뉴욕에 가서 한 달 뒤에나 돌아올 거에요.”
유진은 고개 숙인 라희의 정수리를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라희씨.”
다정하게, 마치 여동생을 부르는 것처럼. 유진의 미동 없는 눈동자에서 뿜어내는 시선이 고개 숙인 라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라희가 부름에 반응이 없자 유진의 눈매 끝이 가늘어졌다.
“.......진욱이, 잘 부탁해요.”
유진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 내가 없으면 외로워하거든요. 한국에 혼자 있을 진욱이가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그럴 때마다 라희씨가 곁에 있어주면 안심이겠네요.”
당부하듯이, 담담함을 가장한 태연한 음성으로 말하는 그녀의 의도를 라희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평온해 보이지만, 음색의 어딘가 바짝 날이 서 있다.
“그럼,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또 보죠. 우리.”
끝까지 건조한 말투로 마무리 짓고 싶었겠지만, 감정 조절에 실패했는지, 마지막 말에는 희미하지만, 노골적인 적의가 들어 있었다.
라희는 그대로 시선을 바닥에 꽂아 박은 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유진은 소파 테이블 앞에 멈춰서 라희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소파에서부터 멀어져가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현관 센서 등이 켜지면서 빈 시야의 가장자리 저편에 빛이 반짝였다. 구두를 신는 소리. 현관문이 열리고 나서, 아찔한 높이의 하이힐 굽이 바닥과 부딪혀 내는 딱딱한 소리가 들렸다. 달깍. 현관문이 닫혔다. 띠리릭, 도어락이 자동으로 잠기는 기계 소리가 텅 빈 오피스텔을 울렸다.
"후..."
억눌렀던 숨이 터져 나왔다. 지독히도 억누르던 압박감이 일시에 풀렸다. 라희는 경직되어 있던 몸을 풀고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머리를 기댔다. 곰곰이 조금 전 대화를 머릿속에서 되짚어보니 유진이 한 말들의 의미를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교양있는 말투, 세련된 화법으로 바흐와 유진 사이의 히스토리를 내비치듯 이야기하면서 우아하게 경고한 것이었다. 우린 이렇게나 깊은 사이다. 너 따위가 감히 끼어들 생각하지 마라. 아까 청담동 파티하우스에서의 쏘아보던 눈빛의 정체는 질투.
피식,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일대 출신의 화려한 스펙에 걸맞은 능력에다가 세련된 미모까지 갖춘 대단한 유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전 세계의 하이아트 시장을 누비는 유진이, 세상에, 투기를 하고 있었다.
고작 국내 이류 대학 휴학생 따위에게.
나영의 생일 파티에서 유진을 피해 몸을 감추듯 자리를 떠난 라희를 찾아서 몸소 오피스텔로 찾아온 거다. 연인의 천하디천한 상대를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비루한 처지를 자각시켜서 똑똑히 경고하려고.
속 시원히 바흐와 한 계약에 대해 말해줄 걸 그랬나? 당신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값이 없어서 유지되고 있는 관계라고.
하지만, 라희는 그러지 않았다. 당연한 듯, 바흐의 공간과 그와의 관계에 대해 안주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유진이 비위에 거슬렸다. 교양 있는 말투로 차분하게 이야기 건넸지만, 마치 안방마님이 천하디 첩을 쳐다보는 시선 속 차가운 오만 가득한 경멸은 지독히도 노골적이어서 숨이 턱 막혔다.
겉으로는 바흐와 깊은 유대를 과시하는데도 유진 안에 내밀히 흐르는 감정은 서투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세련된 유진은 못내 부정하고 싶겠지만, 연적에 대한 질투와 연인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조급한 심경이 날카로운 적의가 담긴 목소리 안에 진하게 스며 있었다.
'사랑? 질투?'
라희는 눈매를 좁히며 유진이 남기고 간 빈 유리잔을 응시했다.
'둘 다 미지의 감정이지만, 대체 왜 그 대상이 나여야 한단 말인가. 나는 고작 돈 때문에 사로잡힌 고전적인 신파 속 주인공일 뿐인데.'
유진이 바쁜 스케줄의 짬을 내 찾아와 알리지 않아도 바흐와 유진과 라희의 간극을 확실하고도 또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라희는 샴페인 글라스를 보며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다지도, 초라하고 비참한 처지라는 것을.'
유진처럼 아무렇지 않게 오피스텔 냉장고를 열어볼 용기도, 능력도 없다. 부서질 듯한 모멸감의 바닷속에서 곧이라도 익사할 것 같은 답답함으로 뇌리 깊숙이 인식하고 있다. 이 오피스텔은 라희에게 속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라희는 소파 위에서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아 다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따사롭게만 보였던 황금빛은 어느새 사라져 도시의 건물 사이로 깊은 음영이 내려앉았다. 웅크린 긴 침묵 속에서 희미한 석양은 어둠으로 물들어 사라졌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띡 따릭 띡띠딕
차갑게 짓누르던 어둠을 깨고 현관 도어락이 눌리는 소리가 텅 빈 오피스텔을 울린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 라희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텅 빈 암흑 속 오렌지빛 현관 센서등이 다시 불을 밝혔다. 부드러운 조명 아래에는 키가 큰 바흐가 우뚝 서 있었다. 라희가 고개를 든 순간, 방안 가득한 암흑같이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바흐는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희미한 도시의 야경이 뿜어내는 희미한 빛을 배경 삼아 어둑어둑한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라희를 응시했다.
'평소라면 그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고개를 수그리고 었겠지만.......'
라희는 소파에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바흐는 가까이 다가오는 라희를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현관의 조명이 또렷히 비춘 바흐의 얼굴은 잘 생겼다. 적당히 짧은 길이의 단정한 흑단 같은 머리카락 아래, 매끈한 이마, 짙은 눈썹, 깊은 눈매, 반듯하고 오똑한 콧날, 그리고 차가워 보이지만 진중해 보이는 입술.
바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는 라희를 가만 지켜보았다. 멈칫. 라희의 발걸음이 그의 앞에서 멈췄다. 라희는 용기를 내 평소 마주치기도 두려워하던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깊은 눈매 안, 흑요석처럼 빛 나는 새까만 눈동자의 초점이 조용히 라희를 향했다. 어두운 심연을 간직한 투명한 검은색 눈동자 위로 라희의 하얀 얼굴이 가득 비쳤다.
'저 압박해 오듯 짓눌러오는 어둠의 정체가 외로움이라고?'
라희는 유진이 한 말을 떠올렸다. 외로운 연인을 다정하게 배려하는 듯한 유진의 말투는 거슬렸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심술이 스멀스멀 차 올라와 샘 솟았다.
라희는 빳빳하게 턱을 치켜들고 바흐의 검은 눈동자를 유심히 살폈다. 새카만 눈동자 안 둥그런 암흑이 좁혀지며 라흐를 주시했다. 눈동자에 비친 새카만 배경 속의 라희의 모습이 차츰 커졌다. 가까이 다가간 라희는 단정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윤기나는 매끄러운 뺨이 손바닥 아래 느껴졌다. 외출했다가 들어온 그의 뺨은 약간 서늘했다.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라희는 발목을 들어올려 그에게 향했다. 단정한 입술 위에 입 맞췄다. 굳게 닫힌 입술 틈을 촉촉한 혀끝으로 적시자,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따뜻한 온기가 마주닿은 틈으로 전해진다. 라희는 진한 베르가못 향이 감도는 말캉한 혀를 애타게 빨아들였다. 그의 연인의 날카로운 질투 때문일까. 그의 고독의 맛은 감미로웠다.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