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7화 (1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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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들 (7)

라희는 그의 오피스텔 거주자용 입구 앞에서 망설이다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1층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바흐의 말대로 오피스텔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그는 그녀와 함께 있으니 당장 올 수는 없을 거였다.

조금 전 청담동에서 뿔테와 헤어진 라희는 콜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후 대로로 걸어나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왔다.

노파심인 괜한 우려였겠지만, 라희가 타고 떠난 택시가 콜택시라서 만약 뿔테가 운행 기록을 조회하거나 기사에게 연락해본다면 목적지가 어딘지 들킬 것 같아서 집에 먼저 들렀었는데, 결과적으로 씻고, 옷도 갈아입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렇게 커피숍에 앉아 여유를 부릴 만큼.

새하얀 스타벅스 머그에서 희미한 김이 올라온다.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창가에 앉아 멍하게 밖을 건너다보니, 길거리는 늘 그렇듯 평화로웠다. 일요일 한낮의 오후의 길거리는 화창했고, 사람들은 활기가 넘쳤다. 자신을 빼고 모두 행복한 세상 속에 사는 것 같은 느낌. 라희의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

뜨거운 커피는 쓰다. 검은 아메리카노는 라희가 발 담그고 있는 구정물 같다. 쓰디, 쓰다. 라희는 고요한 커피 머그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틈날 때마다 곰곰이 곱씹어 보듯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늘 같았다. 벗어날 수 없는 암흑. 질퍽거리는 진창이다. 돈이라는 수렁이었고, 육체가 빠진 늪이다.

"..........."

그럼에도 계속해서 되짚어 생각해 보는 습관은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도 텅 빈 방안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겼었다. 왜 하루아침에 인생이 이렇듯 변해버렸는지.

그냥, 예전처럼 수업 마치고 아르바이트 가서 예쁜 초등학생 아이들 공부 도와주면서,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나누고 가끔 어른인 척, 심각한 척 하면서 아이들에게 으스대고 장난치다가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와 친구들과 SNS로 연락하고 잠이 들고 나면, 다시 다음날이 시작되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때론 가까운 교회에 등록해 나가라고 재촉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으며, 귀농 생활은 어떤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올해 사과밭은 풍년인지 소소한 안부를 묻다가 주말이 되면 불쑥 부모님을 찾아가 놀라게 했던 그런 평범한 일상이 왜 갑자기 이렇게 뒤바뀌어 버렸는지.

오빠 때문이다.

오빠 때문일까?

그냥 외면하면 되지 않았을까?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미워도 피붙이다. 단둘 밖에 없는 남매. 그런 오빠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울부짖으며 애타게 구해달라 소리치는 그런 전화를 받고 어떻게 모른 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 시작은 오빠였다. 하지만, 온전히 오빠 탓도 아니었다. 그날 따라 재수가 없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오빠가 몰고 있던 트럭은, 사 년 전 귀농한 아빠가 전 재산을 다 털어 산 사과 과수원의 작업용 차량이었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구매한 사과밭은 아빠의 오랜 꿈이었다.

평생 대기업에서 일한 아빠는 은퇴 후 귀농을 선택했다. 귀농 작목은 사과. 엄마는 극구 반대했지만, 아빠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두 분은 충주로 내려가 1헥타르가량의 과수 농지를 구매해 정착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한 귀농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로컬이 아닌, 도시 부동산을 통해 사들인 농지는 시세보다 비싼 가격이었고, 외지인이었던 아빠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몽땅 바가지를 썼다.

사과는 보통 3~5년생 묘목이어서 첫 수확물이 나오기 때문에 3년 차 묘목을 구입해서 식재하는 것이 이상적인데, 밭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말라죽는다는 말을 들은 아빠는 안전한 1년생 묘목을 1,500주 구입했다.

1년 동안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한해가 지났고, 다시 한해가 지났다. 그 사이 겨울 가뭄이 찾아왔다. 겨우내 말라버린 사과나무들은 봄이 되자 들이닥친 동해를 견디지 못하고 500주가량 죽어버렸다. 사과나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본 아빠는 더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그제야 부랴부랴 지역농업경영전문학교에 입학해서 귀농교육을 이수하고, 지역 농업기술센터를 주기적으로 방문해 사과 재배를 교육 받았다.

그사이 생활비와 여러 잡비 지출로 귀농 전 저축해 놓은 돈이 바닥났다. 거기다 3년 차 되던 해에 첫 수확에 실패해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올해, 마지막 사활을 걸고 과수원 일에 매달리던 중, 사범 대학 졸업 이후 임용고시에 번번이 실패한 오빠가 도움되어 보겠다며 과수원 일을 돕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시 노량진 고시촌에 들어가 임용 준비하라고 닦달했지만, 오빠는 가끔은 이렇게 시골에서 머리를 쉬어야 합격한다며 넉살을 피웠다.

오빠는 몇 달 동안 그랬던 것처럼, 장날 아침 시골집에서 나와 트럭을 몰고 읍내로 향하는 길이었다. 도로라고도 부를 수 없는 좁은 농로 길에는 앞서 가는 승용차 한 대만 있었을 뿐 별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 차가 도로 가에 멈춰 서길래 주변에서 쉬어가는 거겠거니 생각한 오빠가 앞질러 가야겠다 생각하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순간 도로 가장자리에 멈춰 섰던 차는 갑자기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좌측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가속이 붙었던 차량은 생각만큼 멈춰주지 않았고 그대로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 앞으로 미끄러져 승용차와 부딪쳐 사고가 났다. 경찰까지 부른 결과는 좌회전하는 차량의 뒤쪽을 들이박은 추돌이었다. 오빠의 과실로, 안전거리 미확보. 거기다 후미추돌이니 과실 비율 100퍼센트로 판명이 났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접촉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자동차 보험이었다. 귀농한 시골집에서는 평소 다니는 길이 도로라 부를 수 없는 농로길인 데다가, 차 사고 날일 없는 작업용 차량이기에 자동차 보험 가입할 당시 대물 보상을 기본으로 설정해 놓았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아마 도시였다면 보통 1억일 대물 보상 한도를 설마 이런 데서 차 사고나랴 싶어서 5천만 원으로 대폭 낮춰둔 것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사고 낸 승용차는, 하필이면 고급 외제 차였다. 튼튼한 트럭의 추돌 탓에, 뒤쪽 문짝 전체와 뒤범퍼, 그리고 휀다와 트렁크까지 수리해야 했고, 외국에서 부품이 국내로 오는 동안 차주의 렌트비도 추가되었다. 차주는 당연하게도, 사고 난 차량과 동일 수준의 외제 차로 렌트를 했기에 차량 수리기간의 렌트비만 보험 한도인 오천만 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보험회사에서 지급하고 남은 나머지 금액은 모조리 빚으로 남았다. 차주와 상의해서 차근차근 갚아 나가면 되겠거니 싶어서 차용증에 오빠가 도장을 찍었다고 했다. 그 뒤 라희가 오빠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은 채권추심을 음성적으로 처리하는 사무실이었다.

"........"

라희는 오후의 화창한 햇살을 담고 있는 커피 머그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쓰다. 여전히 쓰다. 지금 처한 현실 같은 쓴맛에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진다. 라희는 다시 커피 머그를 기울였다. 과거를 곱씹는다고 현재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저 이 쓰디쓴 맛에 익숙해지길 바랄 뿐.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 않듯이 이렇게 마음이 울적할 때면 왜, 누가,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쓸데 없는 의문 부호를 머릿속에 잔뜩 떠올린다.

그날, 오빠가 트럭을 몰고 나가지 않았더라면?

사고를 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사과 재배가 첫해부터 성공적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빠가 귀농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이런 진창에 빠져버렸다. 정말, 절망적인 순간에 혹하는 마음으로 부모님 몰래 사금융의 손을 빌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먼저 살인적인 이자율에 질려버렸고, 무엇보다 그렇게 큰돈을 선뜻 담보도 없는 대학생에게 빌려주는 대부업체는 없었다.

곧 죽을 것 같은 오빠의 몰골을 보고 나니 바싹바싹 피가 마르고 다급한 심정이었다. 한 달에 천만 원,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아르바이트 사이트도 뒤져보았었다. 카페 검색을 통해 실장이라는 사람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역삼동에 밀집한 고급 클럽, 소위 텐이라는 곳에 면접을 보러 갔었다. 실장을 통해서 가게로 들어가 마담을 만나려고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갔는데 그곳에서 마주친 늘씬하고 세련된 여자 한 명이 라희를 위아래로 훑다가 입을 열었다.

“너, 면접 보러 온 초짜구나? 내가 한마디 해줄게. 뼈가 되고 살이 될 테니 잘 들어. 마담 언니가 오늘은 널 위하는 척 말하며 거절할 거야. 이런 데서 일할 아이가 아니라고 하겠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데 수고했다고 교통비 몇십만 원 쥐여줄 거란 말이지.”

몇십만 원? 교통비라고? 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은 젊은 여자가 한껏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게 시작이야. 처음부터 돈맛을 들여놔야 제 발로 찾아오거든. 뭐, 일하고 말고는 네 맘이겠지만, 일단 당하더라도 알고 당해야지. 이게 이 바닥 수법이니까.”

여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 매무새를 다듬고 나서 화장실 문을 닫고 나가기 전, 이렇게 덧붙였다.

“머리 잘 굴러가는 애들은, 그냥 교통비 받으려고 여기저기 면접만 보기도 해. 얼굴만 내 비춰도 한 달 아르바이트비는 되니까. 그런데 너 아가씨 되면 내 아래다? 후훗.”

라희는 혼자 남은 화장실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여자가 말한 대로 마담과의 면접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손에 쥔 교통비 삼 십만 원. 라희는 텐에서 나와 정처 없이 강남거리를 걸었다. 넓은 대로를 지나 한참을 걸어서 멈춘 곳은, 강남 교보문고 맞은편 건널목이었다.

'오빠를 빼내려면 이제부터 대체 무얼 해야 할까. 내일부터 텐이라는 곳에 출근해서 마담으로부터 돈을 빌릴까. 아니면.......'

라희가 온통 뒤죽박죽된 머릿속 때문에 멍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을 때였다.

―빠앙

중후한 클랙슨 소리와 함께 앞에 나타난 긴 검은색 자동차. 멈춰선 자동차의 뒤 자석 창문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지난번 미라와 헤어지면서 차를 얻어 탔던 그날 이후, 라희는 새카만 눈동자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후우..."

라희는 커피 머그를 손에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은 정말 절박했다. 다시 쓸데없는 의문 부호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그때, 바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희는 시선을 내려 손에 쥔 머그잔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어느덧 뜨거웠던 커피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짧은 한숨. 라희는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바흐로부터 전화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천천히 눈이 감긴다.

'이제 그만. 올라가야겠지?'

감은 눈으로 오늘 처음 본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바흐와 그녀. 그 둘은 너무도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나무랄 데 없이 보기 좋은 선남선녀.

".........."

라희는 머릿속 생각을 털어내듯, 머리를 휘휘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타벅스를 나왔다. 터덕터덕, 무거운 걸음으로 입주민용 출입구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전용 카드키를 센서에 대고 22층 버튼을 꾹 눌렀다. 고속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위를 향해 올라갔다. 이 정숙한 엘리베이터는 뿔테와 이곳에서 마주쳤던 그날 이후, 처음이다.

이미 오빠의 사고로 충분히 꼬였고, 바흐와 계약하는 바람에 더욱 비틀린 인생은 뿔테를 만나고 완전히 뒤틀려버렸다.

"하아......"

라희는 긴 한숨을 내 쉬었다.

바흐와 계약한 이후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을 만큼, 자신도 답이 안 나오는 인생. 절망의 구렁텅이 그 자체.

스륵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라희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조용한 복도에 섰다. 22층 펜트하우스를 뜻하는 P층의 문은 두 개밖에 없다. 그중 그의 오피스텔은 오른쪽. 손에 익은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 비어 있는 큰 공간이 그녀를 마주했다. 다행이다. 아직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심지어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은 현관에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모아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오피스텔은 늘 그렇듯 깨끗했고 어떠한 생활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 사는 집이면 한두 개 굴러다닐 법한 개인 용품조차 없었다. 마치 모델 하우스처럼 세팅된 인테리어였다.

라희는 소파로 걸어갔다. 눌린 자국이나 구김 없이 새것 같은 가죽 소파. 그 위에 앉아 오피스텔 통유리창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노을 지는 오후의 석양 아래 오늘도 활기찼던 도시의 하루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라희는 무릎을 세워 몸을 웅크려 끌어안았다. 그리고 멍하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11개월이 지나면, 계약이 끝난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풍경 안으로, 사람들 속으로 다시 녹아들 수 있을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당장은 답할 수 없는 물음표들이 도시가 비추는 창 너머 허공에 유령처럼 떠다녔다. 라희는 느릿하게 떠다니는 물음들을 멍한 눈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띡 따릭 띡띠딕

번호키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오피스텔의 현관문이 서서히 열렸다. 어두웠던 현관문 앞의 센서 등이 인기척으로 환히 켜졌다. 오렌지빛 현관 조명 아래 서 있는 사람은, 바흐일 거란 예상과 다르게 키 크고 늘씬한 여자였다.

그녀다.

오피스텔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파 쪽을 쏘아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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