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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들 (5)
밤이 깊어지자, 한강에서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다. 부지불식간에 어느덧 주위가 한산해졌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서늘했던 피부 위로 슬쩍 찬 기운이 돌았다. 라희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굳이 핑계를 대보자면, 여름에 태어나서인지 추위는 익숙하지 않다.
그때 어깨를 따스한 감각이 감싸 안았다. 뿔테였다. 뿔테는 라희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자신을 향해 끌어안았다. 라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기댔다. 넓게 펼친 돗자리 앞에는 빈 맥주 캔과 먹다 남은 치킨 그리고 새로 사온 맥주캔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피부에 닿는 강바람은 이렇게도 서늘한데 왜 마음속 깊은 한강 변 이미지는 포근 한 걸까. 검은 한강 수면 위로 넘실대는 야경은 밤하늘의 별보다 빛났고 화려했으며 따듯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흐음."
라희의 머리 위로 뜨끈한 숨결이 느껴졌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뿔테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안경 너머 눈매 끝이 가늘어지며 살풋 미소를 띠었다. 그는 라희를 가만 바라보다가 어깨를 잡았던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단단한 팔이 허리에 감겼다. 꼼짝할 수 없다.
그대로 가는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라희를 감싼 그는 벌린 다리 사이로 라희의 몸통을 끌어당겼다. 라희는 허벅지 사이에 안겼다. 마주댄 등과 그의 품에서 뿜어져 나온 온기가 또렷이 느껴졌다. 뜨끈한 체온이 주위를 감싸자 차가웠던 몸이 조금 풀렸다. 순간 그가 라희의 등을 가슴으로 깊숙이 끌어안았다. 뿔테는 라희의 허리를 다시 꽉 감싸 안으며 깊은숨을 들이켰다.
“포근하니 좋은데? 계속 안고 있고 싶어.”
등과 맞닿은 뿔테의 체온은 따스했다. 어깨 위로 그의 턱이 내려와 걸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등 뒤로 탄탄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호흡하며 온기를 전했다. 라희는 귓가를 간질이는 뿔테의 숨소리를 들으며 앞에 펼쳐진 밤 풍경을 바라보았다.
검은 밤, 짙은 강물 위에 비친 서울 시내 화려한 야경이 반짝반짝 너울거리며 일렁이다 흘러갔다. 멀리 보이는 다리 위에서도 지나는 차들이 밝은 빛을 내뿜으며 멀리 사라져 갔다.
“.....형이 둘이야. 큰형은 산부인과, 작은형은 정형외과.”
나직한 목소리로 뿔테가 중얼거렸다.
“큰형의 병원은 뭐, 지난번 만났던 거기고. 여름 방학기간이라 환자가 많아져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지. 큰형 병원에서 형수님이랑 좀 트러블이 생겨서 지금은 작은형 도와주고 있어. 작은 형네 병원은 서울에서 오가기도 힘든 완전 시골 깡촌이야.”
“..어딘데요?”
라희의 물음에 뿔테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라희가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바라보자, 눈을 마주친 뿔테가 말했다.
“나에 대해 처음으로 궁금해한 거, 알아?”
뿔테는 라희의 어깨를 꽈악 끌어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인 인구 많은 곳이야, 라고 속삭였다. 덧붙여 둘째 형수 님이 그쪽 출신이라 형이 꼼짝없이 잡혀갔다는 말과 함께.
“큰형과 다르게 애처가거든.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떠나기 싫다는 둘째 형수 말에 완전 코가 꿰인 거지.”
나직이 중얼거리던 뿔테의 손이 둥근 어깨를 쓰다듬다가, 쇄골뼈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좁은 턱을 스쳐 입술 위에 닿았다.
"......"
아까처럼, 그는 손가락을 뻗어 입술의 윤곽을 따라 그리듯 부드럽게 만졌다. 그의 손끝이 입술 위에 스치는 감각은 연거푸 마신 맥주 때문인지 야릇했다. 라희는 이 미묘한 감촉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뿔테가 벌어진 입술의 가운데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눌린 손끝이 살짝, 안으로 파고 들어가 이 끝에 닿았다.
문득, 입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가락에 혀를 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지난 반얀트리의 소파 위에 앉아 민망한 자세로 입안에 들어온 바흐의 손가락을 정신없이 빨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의 야릇한 느낌을 몸이 기억하는지, 단지 기억을 상기했을 뿐인데도 찌릿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고 라희는 순간, 반사적으로 입술 끝에 힘을 주며 오므렸다. 입술 위에 얹어졌던 곧은 손가락의 감촉은 이내 사라졌다.
“형이 그럴 만도 해. 둘째 형수, 미인이거든. 자기처럼.”
작게 중얼거리자마자 등에 닿은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뿔테의 입술이 라희에게 닿았다. 야경에 취한 탓일까. 아니면, 좀 전 떠올린 민망한 기억 때문일까.
뿔테의 키스는 짜릿했다. 뿔테는 라희의 윗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면서, 혀끝으로 윗입술 안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입술을 살포시 뗐다가, 다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쪽 빨았다가 놓았다. 천천히 감각을 일깨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섬세한 입맞춤. 마침내 촉촉한 붉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그의 혀는 천천히 혀끝에 맞닿았다가 혀 밑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으응.."
보드랍고 말랑한 느낌의 키스. 그 사이 느껴지는 숨결은, 약한 알콜향이 섞여 있었다. 싫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라희는 그의 혀를 애타게 빨아들였다.
한참의 입맞춤 끝에, 촉촉해진 입술이 멀어지자, 라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닌데요. 그런 미인.”
뿔테는 눈매를 살짝 가늘게 뜨며 라희를 바라보았다. 뭐라 말을 꺼내려다가 살짝 잠긴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가다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거 애매한데. 미인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자기에게, 미인인데 라고 말하면 자기는 또다시 부정할 테고. 작전을 바꿔 내 눈에만 예쁘면 돼, 라는 답을 하면 자기가 객관적인 미인이 아닌 게 되잖아?”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라희의 목덜미에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예민해진 피부 위에 짧은 키스를 연속적으로 해오자, 찌릿한 감각에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미인인거 맞아. 나 지금 경쟁 중이지? 22층과.”
뿔테의 말을 듣는 순간, 라희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래. 뿔테는 처음부터 바흐를 알고 있었다. 바흐와 라희 사이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뿔테는 역시 바흐와 관계되어 있는 걸 알면서, 접근했다. 대체, 왜?
“자기 집 앞에 검은색 에쿠스 한 대 세워져 있는 거 알아? 내가 쓸데없이 기억력 하난 끝내주게 좋아서 말이지. 첫날 자기 집 찾아갔을 때 세워져 있던 그 차 그대로더라. 아까 여기 도착해서 편의점 들어갈 때 보니 저쪽 주차장에 낯익은 차가 보이는 거야. 슬쩍 보니 맞아. 따라왔나 봐. 번호판 넘버가 같거든.”
"......."
아마도 바흐와 관련된 사람이겠지. 라희는 바흐가 자신의 일상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번 눈치챘다. 어떤 경로인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감시였나. 계약서에는 없는 내용이었지만,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크게 상관없을뿐더러, 어떤 형태로든 그와 맞서는 것은 두려웠다. 바흐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오천만 원에 법정 이자를 포함한 금액을 갚거나, 계약서대로 1년을 채우면 된다. 이제 한 달이 지났으니 앞으로 11개월만 참으면, 끝.
“.....싫지 않아요?”
한참이 지난 뒤, 라희가 낮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뿔테는 여린 목덜미에 다시 키스했다.
“남잔데 싫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하지만?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한 라희는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라희를 뿔테가 꽉 끌어안았다.
“나도 자기가 처음이 아니듯, 자기도 내가 처음이 아닌 게 당연해. 뭐, 생각하기에 따라선, 예전처럼 모르고 겪는 것 보다 알고 있는 것이 낫기도 하고.”
그는 짧은 숨을 내쉬고는, 다시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땐 처음일 뻔했는데. 그때 보쌈해 갈 걸 그랬나 보다.”
병원에서?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 저었다. 그럴 일은 없었다. 그건 거래였다. 몸을 대상으로 한 계약. 변호사까지 입회하에 계약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예전은, 무슨 뜻이에요?”
느리게 묻는 라희의 입술을 그는 다시 손끝으로 눌러 건드렸다.
“그건 별로 대답하기 싫은데.”
반사적으로 입술 끝이 둥글게 오므려진다. 톡, 손가락이 둥근 입술을 가볍게 누른다.
“이러면 대답해 줘야 하잖아. 귀여워서.”
뿔테는 라희를 가만 바라보며 빙긋 웃다가, 기억을 되살리는 미묘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안경 속 눈동자가 허공을 거닌다.
“.......전 여친 양다리였거든. 감쪽같이 몰랐지. 이젠 과거지사지만.”
“그러면....”
뒤에 이어질 말은 막혀버렸다. 그가 턱을 잡고는 바로 키스해버렸으니까. 라희는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주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이제 한강 변의 부는 바람은 정말로 선선함을 넘어서 쌀쌀했다. 카디건을 걸치고 뿔테가 감싸 안은 상반신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반바지 아래 맨살의 종아리에는 오소소 살갗이 돋아올라 추위에 움츠러들었다.
“이제 춥나 보네.”
뿔테가 라희의 종아리 살결을 쓰윽 손바닥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피부는 차게 식었다.
“...갈래?”
은근한 말투로 묻는 그를 향해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낮에 막무가내 찾아오는 것은 밀어내지 못했지만, 밤에 함께 지내는 일은 사양이었다. 오빠에게서 벗어난 이후로 집은 온전히 그녀만의 공간이어야 했다.
“집에 가서 편히 쉴래요. 혼자.”
똑똑히 힘주어 혼자, 라고 강조하는 라희를 보고 있는 뿔테는 떼쓰거나 우길 거라는 라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서 쉬자. 내일 약속도 잡혀있고. 오늘 퇴근하고 바로 올라와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네.”
뿔테는 스트레칭 하듯 목을 길게 뻗어 둥글게 돌렸다. 뚝,뚝, 뼈소리가 작게 났다.
“아무래도 이 피로감의 원인은 격렬한 운동으로 유실된 단백질 소모가 원인 같은데.”
은근한 목소리가 라희의 귓가에 속삭여진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 그의 품에서 재빨리 벗어나려는 라희의 허리를 그가 꽉 잡아 쥐었다.
“내일, 오후에 데이트할 거니까. 시간 비워둬. 알았지? 미리 약속한 거다?”
내일? 라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희가 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허리를 감았던 손이 풀렸다. 라희는 그 길로 자리에서 일어나 뒷정리를 시작했다. 먹고 남은 것은 깨끗이 치워야 하니까.
"잠깐."
뿔테는 그런 라희의 손목을 잡더니, 그냥 그대로 쓰레기들을 돗자리의 정중앙에 털어 넣듯 몰았다. 그리고 돗자리를 둘둘 말기 시작했다. 각종 쓰레기들을 품은 채 그대로 말린 돗자리를 한 손으로 들고 한강 공원 초입에 있던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50리터 쓰레기봉투를 구입해 벌리고 거기에다 돗자리 더미를 통째로 집어넣었다.
'분리수거 해야 하는데.'
라희는 입을 열려다 멈추고 가만있었다. 생각해보면 라희 친오빠도 저런 식이었다. 옆에서 아무리 분리수거 하라는 잔소리를 해도 결코 고쳐지지 않았다. 이십 년간 같이 살아왔던 오빠도 그런데, 고작 몇 번 보지 않는 그에게 잔소리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으리라.
"끝났어. 가자."
한강에서 나와 잡아탄 택시는 먼저 라희의 집 앞에 멈췄다. 뿔테가 계속 타고 갈 거라고 말해 놓은 택시는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라희의 원룸 건물 앞. 좀처럼 손을 놓아주지 않던 뿔테는 집 앞에서 몇 번 실랑이하다가 라희의 손을 슬그머니 놓아주며 다짐받듯이 말했다.
“내일. 약속이다. 알았지?”
그가 탄 택시를 떠나 보내고 난 뒤, 라희는 원룸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닫고, 침대 위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바흐로부터 전화연락이나 수신된 메시지는 없었다.
아까 마신 맥주 때문일까. 라희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워 끌어안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무도 없다. 혼자라는 것을 자각게 해준 텅 빈 방안. 라희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정신은 또렷한데, 기분은 정말 엉망이었다. 아래로 내리뜬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닫혔다. 절망 같은 어둠이 시야로 내려앉는다.
최악이다.
몸도. 마음도. 인생도. 모두다.
***
―띵동 띵동
희미하게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눈이 뜨여졌다. 라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초인종 소리는 계속해서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데구르르
바닥에 있던 빈 맥주병이 발에 채 넘어지면서 저만치 굴러갔다. 뭐지? 라희는 잠결이라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찡그려 가늘게 뜨고서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에 집에 돌아와서 잠이 오지 않아 편의점에서 구입해 벌컥 들이킨 빈 맥주병 3개가 방안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재촉하는 듯한 초인종 소리를 들으며 라희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동그란 시계가 2시라고 가르쳐 주었다. 낮 2시. 맥주를 마시며 티비를 보다 새벽녘 동틀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는데 그 이후 오후까지 내내 자 버린 모양이었다. 오후? 그렇다면 저 시끄러운 초인종은 뿔테.
-띵동 띵동 띵동
인터폰으로 비춘 화면에는 뿔테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초인종을 눌러대고 있었다. 라희는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뿔테는 라흐를 보자 놀람으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거야?”
라희가 막아선 현관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뿔테는 방바닥 널브러진 맥주병을 보며 한숨지었다.
“그 야밤에 친구가 왔다 간 것은 아닐 테고, 진짜 이걸 혼자서 다 마셨어?”
라희는 대답하지 않았고 가만 서 있었다.
“오늘 데이트하자고 그렇게나 신신당부했는데. 우리 자기.”
은근히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라희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후, 싱긋 웃었다.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인걸? 그 상태로 나갈래? 나는 다 좋은데.”
라희는 그의 옷차림을 재빨리 살폈다. 어디 결혼식이라도 가는 지, 슬림한 핏의 흰색 옥스퍼드 셔츠 아래 벨트를 하고 베이지색 긴 면바지를 걸쳤다. 조금 캐주얼 하지만 어디에나 어울릴 복장. 뿔테가 눈매를 기울이며 바라보자 라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요. 오늘은 나갈 상태가...”
갑자기 말이 막혔다. 말하던 입술 위로 손가락이 길게 내리눌렀다. 말을 가로막는 손가락 때문에 더는 입술을 움직일 수 없다. 그때였다. 뿔테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라희를 내려다보던 뿔테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고개를 숙인 뿔테가 다가오자, 입술이 키스할 듯 가까워지다가 미끄러져 귓가에 닿았다.
“씻겨 줄까?”
낮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라희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데이트하기로 약속했잖아. 난 자기가 같이 나가지 않을거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번거롭게 밖에 나가지 말고 침대에서 벌거벗고 하루 종일 할까? 좋을 거 같은데.”
순식간에, 뿔테의 손이 바짓단 아래로 침입해 들어왔다.
“자기에겐 모닝섹스겠네. 방금 일어났으니까."
허벅지 안쪽을 스멀스멀 더듬거리며 올라오는 손끝이 느껴졌다.
"그런 거 좋은데, 무방비 상에서 하는 거 말이야. 되게 친밀하잖아.“
팬티 라인을 쓰다듬는 손길. 라희는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앞에서 타월을 손에 들고 작게 한숨 쉬었다. 이러니 씻고 나갈 수밖에.
***
“어디로 가는 거에요?”
라희가 물었다. 씻고 나온 라희는 언제나처럼 편한 옷차림이었는데, 뿔테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라희를 쓱 위아래 훑어보더니 방 안 옷장을 열어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검은색 원피스를 건넸다. 라희는 그가 건네주는 명품 브랜드의 블랙 원피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바흐와 백화점에 간 날 입게 된 옷으로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다. 뿔테가 주시하며 지켜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문 닫고 블랙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와 집 앞에 주차된 뿔테의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 거죠?"
재차 묻자, 뿔테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한 손을 라희에게 내밀어 무릎 위 가지런히 놓인 손 위에 얹으며 말했다.
“형수 생일파티.”
가족? 당황하는 라희의 손을 그가 꽉 잡았다.
“도망 못 가.”
차는 압구정역을 지나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 도로 쪽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상업지구를 지나 주택가 초입에 다다르자 차가 천천히 멈췄다. 어찌 보면 고급스러운 주택 같기도 한 하얀색 3층 건물 앞. 하지만 영업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활짝 열린 흰색 철제대문 앞에는 작은 간판이 걸려있었다. 차가 멈춰선 지 몇초 이내에 발렛 직원이 나와서 차를 가지고 외부 주차장 쪽으로 사라졌다.
“요번에 새로 생긴 파티하우스라나 봐.”
뿔테가 3층 건물을 쓰윽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뿔테에게 손이 깍지껴 잡힌 채로 라희는 계속 망설였다. 비록 차에 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뿔테와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 뿔테를 만나는 것과 뿔테 가족들에게 소개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뿔테와 이런 식으로 엮일 수는....
라희의 굳은 얼굴을 본 뿔테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잔뜩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할 말을 해야 했다.
"저기.."
라희가 입을 열려던 그 순간에, 고급스러운 승용차가 건물 앞에 멈춰 서고,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렸다. 아는 사이인지 그들과 눈인사를 나눈 뿔테가 빳빳하게 굳어있는 라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들어가자. 다들 도착했겠네. 그냥 얼굴만 비치고 나오면 돼."
건물의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결혼식이나 파티처럼 넓은 잔디밭 위에 새하얀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그 사이 대문에서부터 건물의 입구에 이르는 가운데 길은 이국적인 분위기의 하얀 지붕이 높게 펼쳐진 길이었다. 지붕 아래 바닥에 깔린 매끄러운 대리석을 밟자 또각또각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물 내부 창가 쪽으로 생일 파티 손님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낮은 피아노 선율과 첼로 선율이 흘러나오는 건물은 흰색과 검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모던하면서 깔끔한 분위기였다. 평상시는 유럽풍의 레스토랑인 듯, 여기저기 앤틱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본관 앞의 직원이 유리로 된 격자 문을 열어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모여 격식을 갖춘, 하지만 여자들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늘씬한 손가락에는 아슬아슬 가느다란 샴페인 글라스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령대는 20대와 30대들이 주를 이뤘다. 옷차림새는 요 앞 갤러리아 명품관의 마네킹의 옷들을 그대로 벗겨서 입을 듯 보였다.
뿔테가 라희의 손을 깍지낀 채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곳곳에서 스캔하는 시선이 쏟아졌다. 몇몇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옆 사람에게 소곤거리기도 했다.
“저 왔어요. 형수님.”
바깥 잔디정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투명한 검은색 격자무늬 창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커트 머리 여자에게 다가간 뿔테가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뿔테가 내미는 얇은 봉투를 받아든 그의 형수님은 키가 크고 짧은 숏커트 머리에 눈매가 매서운 여자였다. 흔히들 기가 세 보인다고 평가하는 외모.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추측되었다. 그녀가 뿔테를 보더니 입꼬리를 의도적으로 느리게 올렸다. 진갈색에 가까운 입매가 날카롭게 올라가면서, 매서운 시선은 뿔테 옆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라희를 살폈다.
“.....고마워요. 도련님. 그런데, 이 아가씨는?”
노골적인 탐색의 시선으로 샅샅이 훑어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라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뿔테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제가 요즘 열심히 따라다니고 있어요. 여간해서 안 넘어오네요.”
그의 형수는 냉소적으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여자들은 너무 적극적인 남자 안 좋아하는데. 도련님도 밀당을 배우셔야겠네요.”
그에게 말하고 나서 형수는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를 향해 커다란 보석이 반짝이는 반지를 낀 하얀 손이 내밀어 졌다.
“김나영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이렇게 와주셔서 고마워요.”
“송라희입니다. 생일 축하드려요.”
나영의 손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라희의 손끝을 힘주어 쥔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 도련님, 인기 많은 건 알고 있죠? 제 남편보다 키도 크고 인물도 더 나아요. 미인이신 어머님을 닮았거든요. 키 크고 인물 좋은 의사, 흔하지 않답니다. 쫓아다닐 때 꽉 잡아요.”
그런데 도련님이 반할만한 미인이시네요, 라고 덧붙이며 손을 놔 주었다. 뒤에서 다른 손님이 도착했는지 그녀를 향해 인사가 건네지자, 그 틈에 라희는 어색하게 다시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긴장감을 쓸어내리느라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있으려니 뿔테가 차가운 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뭘, 내가 더 고맙지. 형수랑은 지난번 일 이후 사이가 안 좋아서. 형이 오늘 꼭 오라더라고.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같이 와줘서 고마워.”
그의 나직한 말을 들으며 라희는 잔을 기울여 음료를 마셨다. 탄산 사과 주스 맛이 났다.
“어젯밤 과음해서 술은 별로 일 거 같아서 주스 가져왔어. 괜찮아?”
라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뿔테가 가볍게 어깨를 감싸 쥐었다.
“조금 있다 형 도착하면 얼굴만 비치고, 나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데이트해야지.”
입안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과 주스를 마시며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데, 저쪽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소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입구에 막 도착한 늘씬한 커플이 파티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단아하지만, 지적인 커리어 우먼 같은 심플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상당한 미인이었다. 누구나 한번 보면 얼굴에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 쭉 뻗은 팔다리가 모델 같아서, 마치 초원의 나무 위에 느긋하게 누워있는 늘씬한 암표범이 연상되었다. 갸름한 얼굴에 붉은 입술, 눈매 역시 살짝 올라가서 고혹적으로 보였다.
라희가 여자에 대한 감평을 마치고, 그 옆에 늘씬한 여자보다 키가 커서 훤칠한 남자에게 시선을 던진 순간, 곧고 새카만 눈동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라희는 그대로 숨을 삼켰다.
바흐였다.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