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1화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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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그들

11. 그들 (1)

“집은 어디쯤이지?”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을 가르고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희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크리미 베이지의 가죽 시트 깊숙이 몸을 기대고 비스듬히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는 시선을 피해 자동차 앞좌석 뒤편에 붙어 있는 검은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 xx역에서 내리면 돼요.”

“그래.”

차는 조용히 움직였다. 라희는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조용한 자동차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밤거리의 야경은, 밤하늘의 별들보다 빛났고 다채로웠다. 라희는 색색으로 조명을 환히 밝힌 밤거리가 주는 특유의 서정적인 느낌을 좋아했지만, 오늘은 마냥 감상에 빠질 수 없었다. 밀폐된 차 안 무거운 공기가 숨 막힐 듯 조여온다.

그는 라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좌석 가운데 칸막이처럼 높게 솟아있는 암레스트 콘솔 때문에 서로 간의 거리는 있었지만, 그의 곧은 시선 안에 사로잡혀 촘촘히 갇힌 느낌이었다.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등을 잔뜩 힘주어 움츠렸다. 계속된 긴장 때문에 허리와 어깨가 뻐근하다 못해 저릴 무렵, 창밖으로 익숙한 거리 풍경이 보였고 차는 xx역 앞에서 스르륵 멈췄다. 앞좌석의 운전기사가 내려 라희가 앉아 있는 차량 뒷문을 정중히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네요.”

사방을 옥죄어 오다가 차 문이 열림과 동시에 스르르 풀리는 해방감. 이제 좀 살 것 같았기에, 라희는 그를 향해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라희가 차 문밖으로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오른쪽 팔목을 붙잡는 강한 힘이 라희를 그대로 멈추게 했다. 커다란 손이 팔목을 붙잡았다. 초여름이었기에 맨살에 바로 닿는 그의 손길은 서늘했다.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손으로 그는 말없이 팔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

".........?"

라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심장이 옥죄이는 느낌. 역시나 무섭다. 그는 라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엉겁결에 손에 들고 보니 명함이었다. 그의 느낌처럼 검은색에 은박으로 아로새겨진 명함은 아무런 문자도 없었다. 그저 숫자인 휴대폰 번호만 적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때, 연락해.”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머릿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 대체 도움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이름조차 모르는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일단 이 어색하고 이상한 상황을 벗어나야 하니까.

“......고맙습니다.”

명함을 받아들자 그는 팔목을 쥔 손에 힘을 풀어 라희를 놓아주었다. 자동차 밖으로 나오니 운전기사가 정중히 인사했다. 그 뒤 잠시 서 있자 검고 긴 차는 천천히 출발해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라희는 검은색 명함을 손에 들고 잠시 보고 있다가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어 그냥 핸드백 한구석에 쑤셔 넣었다. 앞으로 그를 다시 만나거나 볼 일은 결코 없겠지만, 누군가 건네준 명함을 그 자리에서 버린다는 것은 찜찜했다. 물론, 명함이 휴짓조각처럼 버려지는 사회생활을 시작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일 테지만. 길거리에 그냥 버리자니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라희는 그날 그가 데려다 준 지하철역 부근에서 내려 환한 대로를 걸어갔다. 역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라희가 사는 주택가에 있는 자취방이 나온다. 발목 밑을 쓰라리게 만드는 이따위 구두 따윈 집에 도착하자마자 버려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통증을 굳게 참고 걸어갔다. 그날은 주택가 2층, 그럭저럭 평범한 원룸 방에 불을 켜고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핸드백을 던져놓고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

라희는 좁은 간이 식탁에 앉아 통장을 내려다보았다. 5천만 원. 오빠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 피투성이의 그 꼴을 보고 나서 집주인에게 연락해 자취방 전세 보증금까지 탈탈 빼서 월세로 돌리고 바로 학자금 대출을 받고, 라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금액을 끌어모았어도 여전히 부족했던 금액.

궁지에 몰려 간절했던 때에 거짓말처럼 그가 나타나 건네준 오천만 원. 통장 위에 선명히 찍힌 이 금액으로 오빠는 그들로부터 풀려났었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긴 했지만, 드물게 보내오는 문자를 보니 다시 쌩쌩해진 모양이었다.

오빠는 라희가 찾아와 그들에게 현금을 건네준 것을 본 뒤로 직접적인 연락을 삼갔다. 눈치가 있으니 그런 거다. 돈의 출처가 마음속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고작 학생이었고 돈벌이라고는 보습학원 시간강사 아르바이트생이었던 라희가 당장에 큰돈을 마련해서 건네준 사연을 세세히 알고 싶지 않았음이었다. 라희로서도 다행스럽게, 오빠는 라희를 피했다.

라희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그런 무관심의 회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차라리 편했다. 예전처럼 시도때도없이 불러내, 밥해 놔라, 청소해 놔라, 옷을 다려 놔라, 밑반찬을 만들어 놔라 하며 이것저것 시키는 일은 없으니까.

라희는 통장을 덮어 늘 넣어두는 루이비통 핸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핸드백 안에는 그날 받은 스무 장 노란 심사임당이 통장 옆에 세워져 들어 있었다. 라희는 짧은 숨을 내쉬며 핸드백 자석을 여며 닫았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려는데 핸드백 옆에 걸린 거울 속에 라희의 모습이 스쳤다.

"......."

라희는 거울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늘 마주하는 제 얼굴이니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턱을 기울여 목덜미를 살펴보았다. 붉은색으로 어지러이 낙인처럼 찍혀 있던 키스 마크는 이제 점차 옅어져서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흔적.

라희는 씁쓸히 냉소했다. 지난번 반얀트리의 객실 안에서 사육당하는 짐승처럼 목줄에 묶여서 몇 번이고 그를 받아들였던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세어보지도 않았다. 휴대폰 통화 기록을 보면,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을 텐데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몸 위에 새겨진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걸로 시일이 지남을 가늠했다.

피부 위에 새빨갛게 도드라졌던 그의 흔적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짙은 보라색으로 변했다가 점점 옅어져 연한 갈색으로 변했다. 이것 때문에 라희는 바깥출입도 하지 못했다. 혹여 누가, 볼세라, 들킬세라, 혼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며 방안에 웅크려 지냈다. 그간 집안에 틀어박혀 온라인 마트에서 주문한 물품 바구니를 수령해서 끼니를 때웠다.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에 사니 정말 다행이었다.

원래부터 사람 사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와 계약으로 엮이고 난 뒤부터는 극도로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했다. 혹시나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 도중에 갑작스레 그에게 연락이 올까 두려웠다. 애초부터 떳떳하지 못한 관계다. 타인이 그와의 관계를 눈치챌까 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꼬르륵.

빈속이 요란하게 요동쳤다. 뭐라도 먹을까. 허기져서 그런지 등골이 서늘했다. 아니다,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늦여름의 더위를 떨치던 계절은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얇은 반소매 차림으로는 추울 수 밖에.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고 간절기용 카디건을 꺼내려다, 무언가 발견하고서 멈칫했다. 자취방 옷장 안에는 그가 사준 물건들이 쇼핑백 채로 그대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계약한 첫날, 백화점에서 그가 주문한 대로 점원이 쾌재를 부르며 쓸어 담다시피 한 물건들은, 포장 하나 뜯지 않고 그대로 옷장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달깍.

라희는 카디건을 꺼낸 뒤 옷장 문을 꽉 눌러 닫았다. 그가 사준 것 중 유일하게 사용하는 것은 저 작은 루이비통 백,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그가 준 돈을 넣어두는 용도로만 사용했기에 평소에는 쓸 일이 없었다.

-꼬르륵. 꼬르륵.

뱃속의 울림이 심상치 않았다. 라희는 주방 싱크대로 다가갔다. 둘러보아도 딱히 먹을 것이 없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라면. 라면이라도 팔팔 끓여 먹을까 해서 작은 편수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 불 위에 올렸다. 왔다 갔다 움직이기 귀찮아서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꼬르르륵, 소리를 내는 뱃속은 시끄럽게 배고픔을 호소했다. 라희는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문득 지난번 뿔테를 떠올렸다. 갑작스레 반얀트리로 호출되어 가기 전, 그날도 이렇게 배가 고파서 집 밖으로 나가려다 그를 만났다.

다행히 뿔테는 그날 이후 찾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라희에게는 묘한 안심이 되었다. 바흐는 뿔테의 존재를 그날 이미 알고 있었다. 반얀트리에서 그런 굴욕적인 행위를 시킨 것은 아마도 뿔테 때문이 아닐까. 충성심 없는 고양이, 바흐는 그렇게 말했었다.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가스 불 위에 얹어진 냄비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물이 보글보글 끓으며 부풀었기에 라희는 싱크대 선반에서 스낵 면을 꺼내 포장을 뜯어서 냄비에 털어 넣었다. 2분만 끓이면 된다고 선전하는 이 라면은 면발이 가늘어서 좋았다. 그리고 편했다. 라면 스프가 일반 라면들처럼 건더기스프, 가루스프 이렇게 두 개가 아니라 간편하게 하나로 되어 있어서 간편해서 좋았다.

'계란이라도 넣을까?'

라희는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계란은 늘 냄비 바닥에 흔적을 남겨서 설거지하기 번거로웠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냉장고에 계란은 없었다. 텅 빈 냉장고를 떠올리니 조만간 장을 보긴 봐야 할 것 같았다. 라면이 익어가는 냄새가 코를 간질간질 자극할 무렵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띵동 띵동.

누굴까. 라희는 급히 라면 불을 끄고, 인터폰으로 향했다. 인터폰 버튼을 누르자 흑백의 선명한 화면 안에는 현관앞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뿔테. 라희는 잠시 가만 서서 인터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뿔테는 인터폰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고개를 갸웃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뿔테는 현관벨을 쉼 없이 눌러댔다. 라희는 반응하지 않고 잠자코 있기로 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쉴 새 없이 울리던 초인종 소리가 멈추자, 이제는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라희의 이름이 크게 불렸다.

“송라희. 안에 있는 거 알아. 송라희.”

-탕탕탕,

철제 현관문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다시 초인종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라희는 참다 참다, 주변에 민폐가 될까 싶어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가 출입문을 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뿔테는 문을 두드리려던 주먹 쥔 손을 멈춘 채 라희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있었네.”

뿔테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간을 찡그린 라희는 키가 큰 뿔테를 올려다보았다. 희멀건 얼굴의 단정한 그가 검은색 뿔테 안경 아래로 라희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응시했다.

“이렇게 찾아오지 마세요.”

단호히 말하는 라희의 목소리를 들은 뿔테는 허리를 숙여 라희와 눈높이를 맞춘 후 물었다.

“왜?”

뿔테 안경 너머 살짝 휜 눈매가 웃으며 물었다. 왜냐니, 라희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가, 바흐를 떠올렸다. 그리고 반얀트리. 목줄.

“싫으니까요.”

눈앞의 뿔테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가득 담겼다.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라희의 정수리 위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가볍게 미끄러져 어깨 위로 내려와 둥근 어깨를 감쌌다.

“전혀 아닌데? 싫어하는 사람을 이렇게 똑바로 보면서 눈을 마주치나?”

뭐? 어이가 없어서 그를 쏘아보는데 갑자기, 뿔테의 입술이 기습적으로 라희를 덮쳤다. 어깨와 허리가 감싸 쥐이면서 입술 위로 다시 가벼운 입맞춤이 스쳤다.

“이런 식으로, 유혹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면 말이지. 정말 참을 수가 없거든.”

라희의 허리를 감싸 안은 뿔테는 성큼 집안으로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음? 라면 끓였구나. 이건, 냄새로 보아 신라면은 아닌데. 마침 배고팠는데 같이 먹을까?”

태연히 주방 싱크대 앞까지 밀고 들어와 우뚝 선 뿔테를 라희가 굳은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뿔테가 말했다.

“지금 지방에서 바로 올라오는 길이거든. 나 이제 작은 형네서 일하게 돼서. 주중에 내내 시골 벽지에 유배되어 있다가 토요일이라 오후 진료 끝나고 밥도 못 먹고 겨우 올라왔다고. 일단 밥부터 먹여주면 안 될까? 응?”

“저기...”

“저기 아니고, 자기. 자기라고 해.”

어느새 수저통을 찾았는지 라면 냄비에 젓가락 4개를 꽂아 넣은 뿔테가 라희를 보면서 빙긋 웃었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 자기.”

============================ 작품 후기 ============================

으아 드뎌 썼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씬은 다음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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