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7화 (7/214)

7

7. 만남 (5)

“불과 얼마 전까지 처녀였던 거치고는, 상당히 야해.”

쿡. 발사믹 소스가 듬뿍 뿌려진 샐러드 접시 위의 신선한 양상추 줄기를 포크로 찍어내며 뿔테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의 안경 너머 은근한 시선을 받은 라희는 급히 눈동자를 내려 앞에 놓인 와인잔을 찾았다. 조금 전, 소믈리에가 따라 놓고 간 붉은 와인을 벌컥 들이켜 마셨다. 반쯤 차있던 찰랑거리던 와인을 단숨에 비워내자, 그가 손을 뻗어 와인병을 기울여 다시 잔을 채웠다. 와인 잔은 핏빛 붉은색으로 찰랑이다 이내 잠잠해졌다.

“잘 마시는걸. 와인 좋아하니?”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혼미한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마시는 거였다. 바로 전에 이 남자와 집에서 정사를 벌였다. 그러고 나서 비록 집 근처이긴 했지만, 함께 밥 먹으러 강남역 노리타에 오다니. 라희는 다시 와인잔을 크게 기울였다.

-꿀꺽, 꿀꺽….

목구멍을 타고 미지근한 와인이 흘러들어왔다. 집에서 얼떨결에 씻고 난 후부터 제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잔뜩 신음소리를 내지를 때는 몰랐다가 평온한 얼굴을 마주하니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나가자는 뿔테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노리타.

데이트 장소이니만큼, 부드러운 조명 아래 테이블에는 버섯샐러드와 고르곤 졸라 피자, 그리고 까르보나라 스파게티가 새하얀 접시에 담겨 놓여 있었다. 이 세 가지 메뉴는 레스토랑에 착석하자마자 이곳의 대표 메뉴라면서 뿔테가 시킨 거였는데, 멋들어진 모양새와 함께 근사한 향을 풍기는 것이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여기, 대학생일 때 자주 왔는데 그때와 변한 게 없다.”

손님 북적이는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며 뿔테가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뿔테와 눈이 마주친 라희는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뿔테는 그 모습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의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포크 끝으로 둥글게 말아 올려 라희의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자. 아, 해봐.”

라희가 어색한 시선으로 포크 끝에 하얗게 돌돌 말린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가만 노려보자, 그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재차 말했다.

“어서, 아.”

계속되는 은근한 강요에 라희는 마지못해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가 먹기 좋게 입안으로 스파게티를 쏙 넣어주었다. 입술 안쪽으로 밀려들어 간 포크의 끝에 걸린 면발 한 가닥이 입술 옆으로 삐죽 빠져나와 있어, 라희가 황급히 안으로 빨아들여 삼키자, 뿔테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붉은 입술을 오므려서 흰 크림이 묻은 면 한 가닥을 빨아들이는 거, 그거 상당히 색정적인 동작이라는 거 알지? 그리고 이렇게....”

쭉 뻗어온 손가락 끝이 붉은 입술에 닿았다가 찍어내듯 쿡 누르고 떨어졌다. 순간, 손끝과 맞닿은 입술 끝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라희는 얼굴 위로 확,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낮아진 시선 앞으로 테이블 바닥에 놓인 냅킨이 보였다.

“입술 안 쪽.”

말을 하다가 멈춘 그의 목소리가 마저 들리자, 라희는 천천힌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내, 라희를 바라보고 있는 뿔테의 가늘어진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분홍빛 속살에 말야. 하얀 게 잔뜩 묻어 있으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잖아?”

그렇게 말하던 그는 집요하게 시선을 맞춰 라희를 응시했다. 곧은 시선이 서로에게 못박힌 가운데, 뿔테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묻은 흰 크림소스를 길게 내민 붉은 혀끝으로 살짝 핥아 올렸다. 라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을 핥아내는 혀의 날름거리는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아래가 뜨끈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꾸만 조금 전 방안에서 그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생각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보나마나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다.

“먹자구. 배, 고팠잖아? 아니면, 지금처럼 한입 한입 정성들여 먹여줄까?”

은근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이는 뿔테의 말을 들은 라희는 재빨리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포크를 손에 쥐었다. 먹여주다니. 그런 민망한 행위는 천만에. 이쪽에서부터 단호히 사양이었다.

“그런데, 집 주소는 왜 바뀐 거야? 진료 기록에는 강북 주소로 되어있어서 그쪽으로 찾아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이 쪽으로 이사했다고 말해 주던걸. 역시."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나머지 말을 마저 덧붙엿다.

" .......가까워서?”

“.......”

라희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포크를 움직였다. 분명 뒤에 생략된 말은, 그와 뿔테가 거주 중인 청담동 오피스텔을 말하는 것이겠지. 라희는 입술 끝을 삐죽였다.

'글쎄, 내가 당신에게 굳이 사사로운 사생활을 구구절절 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라희가 조용히 밥을 먹는 가운데, 뿔테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원래 그렇게 말이 없는 편이야?”

“…. 아니오.”

라희는 입술 끝을 작게 달싹여 대답했다. 평소 라희는 말이 적지도 많지도 않은 편이었다. 이것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라는 과거시제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라희는 포크를 멈추고,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단숨에 비워버렸다.

“와인 안 시켰으면 후회할 뻔했네.”

뿔테가 말하며 다시 붉은색 음료를 잔에 가득 채워 넣었다. 15도짜리 레드 와인을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셔서, 긴장으로 바짝 선 신경의 끝이 약간 뭉툭해졌다. 머리가 아릿하게 울린다. 라희는 조금 풀어진 눈으로 테이블 위 붉은 와인잔을 응시했다.

그날도, 테이블 위에 이렇게 와인이 있었던 것 같다.

***

미라의 학교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의 전망 좋은 10층짜리 건물 위, 스카이 라운지 레스토랑&펍은 학생들로 붐볐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시야 가득 보였던 광경은 탁 트인 통유리 바깥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해 촘촘히 너울지는 도시의 야경과 유리 창 안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었다.

사방이 막힌 데 없이 깨끗한 통유리로 둘러 싸여 마치 하늘 위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의 독특한 술집에는, 정말 50명의 사람의 배가 넘는 사람이 북적였다. 이곳에 들어 오기 앞서 미라가 말했던 그대로다. 공짜 저녁이니 발 디딜 틈 없이 붐벼서 누가 누군지도 모를거라는 말.

딱 그대로.

라희가 미라를 쓱, 쳐다보자 미라가 '거봐, 내 말 맞았지?'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기현 선배 같은 유령회원들이 저마다 혹을 달고 들어왔나 보지. 좋다. 부담 안 되고. 오늘 어차피, 바흐 선배가 오늘 여기 전부 통째로 빌렸다고 하더라.”

미라는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길게 빼고 사람들로 빼곡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이내, 통유리 창가쪽 유난히 길고 늘씬한 여자들로 북적거리는 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네. 저 여자들 사이에.”

미라의 말에 시선을 돌려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대여섯 명의 슬림한 여자들 사이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라희는 그 남자보다도, 주변의 여자들에게 먼저 시선이 갔다.

진정 대학생이 맞을까 싶은 하나같이 이기적인 늘씬한 몸매의 여자들이 캐주얼한 미니스커트에 요즘 유행하는 얇게 비치는 블라우스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 가슴골 바로 윗부분까지 단추를 풀어놓아, 아슬아슬, 은근히 야해 보였다.

“오늘도 인기 많네, 바흐 선배. 학과별 퀸카들은 죄다 꿰차고.”

미라가 가운데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가 바흐 선배라는 말에, 그제야 라희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남자를 향했다. 순간, 흑요석같이 어두운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찌르듯이 파고들어 오는 검은 눈동자와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눈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는 것만 같은 서늘하고 광포한 눈빛에 숨통이 죄어오고 목이 졸리는 듯한 답답함이 불안하게 온몸을 짓누르며 엄습해왔다.

처음부터 그녀만을 보고 있었던 듯, 라희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쏘아보는 눈동자가 내뿜는 날카로운 예기에 스쳐 몸이 산산이 조각나며 잘게 찢길 것만 같은 아득한 느낌. 라희는 입술을 잘끈 깨물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미라를 바라보았다. 비낀 시선이 뺨 위에 따갑게 내려앉았다. 등줄기를 따라 솜털이 오소소 솟는 것 같고, 얼굴 피부가 따끔거렸다. 미라는 이쪽을 바라보는 바흐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 눈 마주쳤어. 잘 생겼지?”

미라가 높은 소프라노 톤으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잘생겼냐고? 라희의 강렬한 인상 속에 그는 온통 검었고, 무서웠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으로 생김새가 어땠는지는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야, 다시 봐봐. 바흐 선배가 이쪽 본다.”

라희는 차마 바흐 선배라는 쪽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피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테이블에 착석해서 그녀들을 바라보며 흔들고 있는 기현의 손짓을 발견하곤 재빨리 미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까부터 손 흔들었는데. 어이쿠, 팔 떨어지겠네. 라희씨가 알아채서 다행이에요. 누구는 아주 한 눈 팔려서는.”

기현이 툴툴거렸다. 그러다가, 시선을 내려 바닥을 보다가 라희의 구두 끝을 보곤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라희씨, 오늘 신고 온 신발 새 신발 같아 보이는데, 발 안 아파요? 여자들은 새 구두 신으면 처음에 며칠 발 아프다던데.”

“아, 티 나요?”

라희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라희가 오늘 신고 온 펌프스는 얼마 전에 길가다가 눈에 띄어 구입한 거라서, 새것처럼 반짝였다. 자체의 굽이 높지 않아 신었던 처음에는 그다지 발이 아프지 않았으나, 저녁이 되자, 발이 퉁퉁 부었는지 딱딱한 구두 가장자리와 복숭아뼈가 닿는 부분이 쓸려서 아프고 쓰렸다.

“어휴, 저 오지랖. 누가 누나 많은 남자 아니랄까 봐.”

미라가 기현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라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자 미라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여기 이 다정함을 가장한 뻔뻔한 기현 선배는 말이야, 박씨 집안의 4대 독자로 위로 누나가 다섯 명이나 있으시단다. 셋은 이미 시집갔고, 둘은 아직 안 갔고. 그러니까 일찌감치 신경 꺼. 라희야. 차라리 넌 예쁘장하니 저쪽 퀸카 무리에 껴서 바흐 선배를 공략해봐.”

미라는 주의를 끌고 싶으면 늘 했던 대로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기현 선배랑 엮이면, 그때부터 헬 게이트 시작이야. 시어머니가 6명인 셈이거든. 거기다 못 말리는 시스콤이라서...”

“야. 서미라, 너 창창한 총각의 인륜지대사가 될지도 모르는 만남에 은근슬쩍 어깃장 놓는 고급기술은 어디서 습득한 거냐?”

기현이 소리를 빽하고 지르자 미라가 입가를 끌어올리며 피식거렸다.

“어휴, 인륜지대사 좋아하시네. 김칫국을 말 통으로 퍼 드셨어요? 라희 얘, 남자 완전 싫어하거든요?”

미라의 말을 들은 기현이 라희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라희씨, 진짜예요? 설마. 레즈비언? 뭐 그런 거?”

“에엑? 아니에요. 그런 거는.”

라희는 황급히 부정하며 손을 내저었다.

“라희네 오빠, 완전 왕자병 말기에다 동생 의존형이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라희를 죽도록 부려 먹었대요. 그래서 남자라는 족속에게 완전히 질려버렸다고 합디다.”

미라가 옆에서 말을 붙였다. 라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인생의 짐이자 태클이었던 오빠를 뇌리에 떠올리며 미라의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에이, 뭐야. 놀랬잖아요. 난 또 성적 정체성이 다른 줄 알고.”

말을 하던 기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기현은 라희에게 그윽한 시선을 보냈다.

“그럼, 가능성 있는 거네요. 라희씨.”

미라가 탁, 소리 나게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소리쳤다.

“됐거든. 흰소리 그만하고 빨리 주문해서 배부터 채우자. 배고파.”

미라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가만 보자, 음. 어차피 바흐 선배가 내는 거지?”

“그렇지. 회장이 오늘 여기서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키라던데.”

낯선 식당에서는 가장 비싼 것이 가장 맛있다는 미라의 주장대로 일행은 각각 스테이크와 샐러드, 스파게티를 가장 고액의 것으로 골라 주문한 후, 음식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음식이 테이블 위에 차례로 서브되면서 각자에게 붉은 와인이 한잔 씩 따라왔다.

“뭐에요? 이 건?”

미라가 종업원에게 묻자, 종업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주류는 와인이라서요. 더 필요하시면 손을 들어 알려주시면 됩니다.”

“오, 예!”

미라와 기현은 와인이 무제한이라는 말에 챙,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환호했다. 라희도 이런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마셔보는 와인은 처음이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잔을 부딪치며 분위기에 흠뻑 취해 즐겁게 먹고 마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 각자의 집으로 가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술에 취한 기현은 대리기사를 불렀다. 한사코 데려다 주겠다는 기현의 제안을 사양하고서, 라희는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하고, 미라는 뒷좌석에 놓인 사물함의 짐 때문에 기현과 같은 차를 타고 떠났다.

혼자서 터벅터벅 지하철을 향해 걷는데 늦은 밤인데다가 술까지 취해 퉁퉁 부어오른 발이 구두에 쓸려 말도 못하게 아파져 왔다. 딱딱한 구두 가장자리에 쓸려 날카롭게 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찌릿한 고통. 라희는 잠시 길에 멈춰 서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집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닥칠 통증을 대비해 짧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복숭아뼈 아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 감전된 듯이 그대로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두를 벗어 한쪽 손에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복숭아뼈 근처 해진 스타킹 밑으로 붉은 피가 비쳤다.

"무리."

라희는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도저히 계단 많은 지하철은 불가능해 보였기에, 지갑 속 현금을 헤아리고 나서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인도의 가장자리에 섰다. 시간대가 술자리를 파할 때여서 그런지, 지나가는 택시들은 많았지만 다들 손님을 태우고 있었다. 라희는 보도블록의 끝에 서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지나가는 택시 중에 빈 택시가 있나 목을 빼고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빵.

중후하게 울려 퍼지는 클랙슨 소리와 함께 기다란 검은 차가 라희가 서 있는 인도 앞에 멈춰 섰다. 검은 차의 맨 앞에 달린 삼각형 엠블럼 안에는 M자가 두 개 겹쳐져 있었다.

"누구?"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라희는 이내, 현재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럼, 나?'

라희가 놀란 눈으로 차를 바라보고 있자, 뒤 자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안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낮은 저음으로 말했다.

“발이 불편한 것 같은데. 타지.”

“누, 누구세요?”

라희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 안에 앉아 있는 남자는 낯설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심연처럼 어두운 검은 눈동자가 새카맣게 빛났으니까.

“아까 봤지? 위에서.”

그의 짧은 말과 함께, 어느새 다가온 운전기사가 뒷좌석의 문을 열고 정중하게 허리 굽혀 말했다.

“이쪽으로 타십시오. 아가씨.”

***

“계속 그렇게 먹지도 않고 와인 잔만 바라만 보고 있을 거야?”

귓가에 들려오는 뿔테의 말을 듣고 화들짝 정신을 차린 라희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줄곧 라희를 바라보는 눈길 속에서 음식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무슨 맛인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이어지는 뿔테의 질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허둥지둥, 서둘러 식사를 마무리한 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서는 뿔테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 정문을 나와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그가 계단에서 멈춰 섰다. 좁은 계단에는 단둘 뿐. 라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뿔테는 라희를 곧게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될 수 있으면. 건전하게 데이트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네?"

뻗어진 두 손이 라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라희는 무슨 말이 이어질 줄 몰라 그대로 가만 서 있었다. 뿔테의 손바닥이 양 뺨을 감싸 쥐고 내려왔다. 한 손으로는 라희의 턱을 가볍게 받치고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지를 길게 내밀어 라희의 입술 위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아까, 하얀 크림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나른한 눈빛으로,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뿔테의 행동은 연거푸 마신 와인에 취해 알딸딸하게 느껴지는 기분 속에서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 길로 택시를 타고 돌아와 라희의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뿔테는 라희의 허리를 감싸 안아 문에 밀어붙이고 입술을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딱딱한 현관문 쪽으로 밀린 등이 배기고, 반바지 뒤쪽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이물감으로 엉덩이를 찔러왔다. 온통 배기고 딱딱한 불편한 느낌. 스멀스멀 치솟는 불쾌감으로 라희가 미간을 좁히고 있을 때였다. 순식간에 뜨거운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흡..”

깊이 침입해 들어온다. 라희를 순식간에 감아올린다. 뜨거운 혀가 주는 느낌은 색달랐다. 아까 마신 와인 향이 배어들어 짙고 아찔한 감각으로 온몸을 순식간에 화륵 달궜다.

"흐읏, 하,"

거친 숨결이, 짙은 와인향과 한데 섞여 부드러운 감촉으로 입안에 스며든다. 말캉하고 미끈한 혀가 입안을 온통 헤집고, 촉촉한 입술이 가득 덮어와 깊게 빨아들이자, 빨리는 혀끝은 물론, 손끝까지 저릿저릿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안 가득 얽힌 혀가 쉴새 없이 움직이면서, 감아올렸다가, 풀어주고 빨아내면서 뿔테의 손이 가슴 위를 훑어 내렸다. 얇은 나시와 가디건 위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쓰다듬던 손바닥은 라희의 가슴을 둥글게 매만지다 아프게 움켜쥐었다. 찌릿한 느낌.

“읏..”

아찔하다. 숨이 헐떡여진다. 라희의 반응을 본 뿔테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낮아진 눈빛으로 라희를 응시했다. 이내 뿔테는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내려 앉은 뜨거운 입술은 좁은 턱을 지나 가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가슴 언저리에 다다르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맨 살 위에서 입술을 둥글게 오므려 흡착해 빨아들이듯 키스해대는 아찔한 감촉. 간지러움, 그리고 짜릿함이 느껴진다. 이상 야릇한 느낌 때문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뿔테는 얇은 카디건을 스륵 벗겨 내고, 손가락 끝에 걸린 민소매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로 드러난 브래지어 가운데 모여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골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흐윽..”

두 가슴이 짓눌리면서 뿔테가 뿜어낸 더운 숨결이 가슴골 위를 타고 솟구쳐 올라왔다. 뿔테의 입술은 둥그스름하게 부푼 살갗 위를 따라가기 시작해, 한쪽 유두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뿔테는 수줍게 드러난 유륜을 둥글게 붙잡았다. 오므린 입술 안쪽에서 빳빳한 유두를 뜨거운 혀로 촉촉이 감싸며 핥아 올리자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왔다.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 아래를 크게 비틀었다.

“흐읏..하...”

단단해진 유두 끝을, 말캉거리는 보드라운 살덩이가 촉촉이 적시며 빨아냈다가, 풀어줬다가 다시 깊게 빨아들인다. 혀끝으로 톡, 톡, 가볍게 건드리다가 지그시 눌러서 핥아 올리는 미칠 듯한 감각. 라희의 계속해서 숨이 할딱였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이 목구멍 깊은 안쪽에서부터 토해져 나왔다.

뿔테는 혀로 유두를 감싸고 빙글빙글 돌렸다가, 이 끝으로 자근자근 깨물면서 비틀었다가, 다시 놓아주고선 달래주듯 혀끝으로 감아올리며 연신 날름거렸다. 비죽 솟아난 유두 끝은 혀끝에 눌려 끈끈한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어 따스한 입안에서 이리저리 휘둘렸다.

"하읏..."

뿔테가 점점 더 빠르게 유두를 위아래로 핥아 올릴수록 아찔한 감각이 찌릿하게 전신을 감싸왔다.

“하앙..하..”

라희가 온몸이 녹아들 것 같은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에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였다.

―띠리리. 띠리리.

라희의 반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두번의 벨이 끝나자마자 엉덩이 부근이 기계의 움직임에 의해 잘게 떨리며 진동했다.

-띠리리. 띠리리.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라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속눈썹을 아래로 치떴다. 뿔테는 전화벨 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고 부푼 두 가슴을 마음껏 희롱하는 중이었다.

'전화라니. 귀찮은데.'

그래도 확인은 해야했다. 라희는 격정으로 떨리는 손을 더듬어 뻗어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쾌감으로 탁해진 눈동자를 가늘게 떠 핸드폰 액정화면을 응시했다.

「바흐」

액정 화면 위 떠있는 문구를 보자마자, 라희는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눈동자가 크게 떠지면서, 나른한 기운이 걷히고 아득했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띠리리. 띠리리.

벨은 계속 울렸다. 라희는 몸통을 크게 비틀어, 겨우 그의 입술에서 빠져나왔다. 휴대폰 액정을 손끝으로 밀어냈다.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대자마자 낮은 음성이 울렸다.

「지금 당장 와. 반얀트리로. 대답해.」

“네.”

라희의 대답을 들은 휴대폰은 딸깍, 바로 끊겼다. 의아한 표정으로 라희를 내려다 보는 뿔테를 향해 라희는 입술 끝을 지긋이 깨물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뒤, 라희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지금 당장 가 봐야 해요.”

============================ 작품 후기 ============================

후아 쓰기 힘드네요. 두편 분량인데 그냥 묶어서 올림.

쌓여가는 원고료 쿠폰의 압박으로 밤새워 썼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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