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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에서 꺼낸 짐을 소퍼백으로 옮겨 담아서 라희와 미라가 각각 나누어 어깨에 들었다. 주로 자질구레한 물품과 전공서적이라서 막상 어깨에 백을 메니 무거웠다.
"야, 무게가 장난 아니다."
라희가 작게 툴툴거리자, 미라는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살살 달래면서 대학 캠퍼스를 감회어린 눈으로 둘러보았다.
"곧 그리워지겠지?"
"과연."
"히히힛"
미라는 이제 곧 여기를 떠나 드넓은 호주의 새로운 환경에서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에서 살게 된다며 기분이 들떠 있었다. 국내에서 등록금 비싸기로 소문난 사립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미라가 딱히 돈이 필요해서 워킹홀리데이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미라는 평소 말버릇처럼 토익 성적도 탑까지 올릴 겸, 신 나게 놀 겸, 새로운 경험도 해볼 겸 해서 가는 거라고 했다.
"가서 뭘 하지. 일단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셀카를 똭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남겨야지. 아, 맞다! 셀카봉 챙겨갈까? 그리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한가한 캠퍼스의 풍경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다.
“어, 벌써 5시네.”
문뜩, 미라가 휴대폰의 시각을 확인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미간을 좁혔다가 할 말 있는 표정으로 라희를 힐끔 바라보았다.
“라희야. 아까 기현 선배가 말한 모임에 가 볼래? 진짜 부담 갖지 말고.”
사물함 앞에서 보았던 노숙한 남자의 이름은 기현이었다. 미라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라희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미라는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 끝을 삐죽였다.
“야, 이런 기회 흔하지 않다? 바흐 선배가 일단 오면 뭐든지 최고급으로 쏜다고. 오늘 내가 너한테 사줄 밥보다 비싼 거 먹을 수 있어. 난 그냥 저 앞에 TGIF가려고 했거든. 요즘 소셜에 쿠폰 떠서 그럭저럭 괜찮은 가격이더라구.”
미라는 눈매를 좁혀 라희의 의중을 떠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음, 우리 모임에 가서 회 먹으러 가자고 우길까? 이왕이면 한 사람당 10만 원 넘는 으리으리한 일식집으로.”
고전 음악 동아리 회원이 50명 정도 된다고 했으니, 1인당 10만 원이면 어림잡아도 500만 원이었다. 라희는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평소 남자에게 빌붙어서 밥 얻어 먹어 버릇 없는 미라조차 저런 발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고전 음악 동호회라고 했는데, 바흐 선배니까, 존 제바스티안 바흐를? 가만, 바흐가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였던가?
“.....그 사람, 바흐 좋아해?”
라희가 조심스레 묻자, 그 말은 들은 미라가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터줘나온 웃음을 참지 못해 배를 잡고 까르르 웃었다.
“아, 웃겨…. 바흐 선배라고 불러서 바흐를…. 푸크크크크..잠만.”
한참 웃던 그녀가 웃느라 눈가 끝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찍어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너 때문에 진짜 한바탕 웃었다. 크크. 그런데 그 선배. 음악가 바흐를 좋아해서 바흐라고 불리는 게 결코 아니야.”
“그럼?”
되묻는 라희의 호기심 어린 표정에 미라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어라? 진짜 바흐 좋아하나?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도 궁금하네. 하여튼, 그건 잘 모르겠다. 나도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학교에 잘 안 오거든.”
“....?”
라희의 호기심은 더 커졌다. 무슨 학생이 학교에도 안와? 라희의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미라가 입을 열었다.
“바흐 선배는 늦깎이 대학생이야. 우리보다 8살 정도 많나? 하여튼, 나이가 있어. 하지만 겉보기에는 멀끔해서 그다지 나이 차이 나 보지는 않아. 지금 4학년인데, 취업계 내고 학교는 그냥 심심하면 와. 근데, 왜 내가 지엄하신 바흐님을 알고 있지…. 음...”
잠시 미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 난듯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고전 음악 동호회 이번 회장이랑 바흐 선배가 사촌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예술에 조예가 깊잖냐. 파인 아트, 응? 그런 거, 들어봤어? 나 이런 사람이야. 후훗. 그래서 사촌 동생 밥 사준다고 가끔 들러. 하여튼, 이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고.”
궁금해하는 라희를 향해 미라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그 사람이 바흐 선배라고 불리는 이유는, 말야.”
“...응?”
마치 무대 위 쇼를 준비하는 마법사에 빙의라도 한듯, 잔뜩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출로 미라는 말 없이 손끝을 들어 캠퍼스 교정 한쪽 주차장을 가리켰다.
"....?"
그쪽은 미라가 아까, 라희를 위해 학교 소개를 해주다가 학과 건물들을 각기 설명해준 상경대 건물이 있었다. 예술학과 다음으로 돈 많은 교수님들이 그 주변에 서식한다며 상경대는 아무나 교수님 하는 거 아니라면서, 집안에 돈도 어느 정도 있고 미국 유수의 명문대에서 박사 패스할 머리도 되어야 한다고 말해 주었는데, 가리키는 손끝을 보니 과연 교수 전용 주차장인 모양으로 각양각색의 외체차들이 빼곡히 주차된 것이 보였다.
“저기 차들 보이지?
미라는 주차장을 향해 눈매를 좁히고 있는 라희를 보며 말했다.
“그 선배가 타고 다니는 차 이름이 바흐야.”
무슨 차 이름이…. 바흐? 음악가 바흐?
“바흐?”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바흐일까? 라는 생각에 라희가 잔뜩 말꼬리를 올리며 되묻자, 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차에 관심 없어서 잘은 모르는데 차 이름이 마이바흐라네? 그래서 줄여서 바흐.”
미라가 덧붙였다.
“마이 바흐니까, 아무래도 마이 선배는 어감이 이상하잖아. 차라리 바흐 선배가 낫지.”
“외제 차야? 이름이 진짜 이상해. 마이 바흐?”
라희는 차에 대해서 잘 몰랐다. 라희가 아는 차종이라고는 소나타니 그랜져니 에쿠스니 하는 흔한 국산 차와 몇몇 대중매체에 소개되는 벤츠, 비엠더블유 등 대한민국 사람들이면 다 알만한 유명외제차가 전부였다.
“응. 독일산 외제 차라는데 실은 나도 잘 몰라.”
미라가 순순히 동의했다.
“대중적인 차는 아닌가 봐. 그렇지? 나도 바흐 선배가 타고 다니는 거 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차야.”
라희는 고개를 갸웃이며 입을 열었다.
“독일차라면, 잡지에서 동글동글 딱정벌레 같은 폴크스바겐 뉴비틀은 많이 봤는데. 그 외 자동차들은 엠블럼을 제외하면 다들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거 같아. 그래서 세세한 차종은 잘 모르겠다.”
“나도. 하여튼, 마이바흐는 비싼 차래.”
미라가 동의했다. 아무리 비싼 차를 몰고 다닌다 해도 그렇게 돈을 펑펑 써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어 라희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사이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이러다간 곧 해가 지겠지.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라희는 미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라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고프다. 그냥 TGIF나 갈래? 처음 보는 사람들 만나는 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라희의 표정을 조심스레 건너다본 미라가 말했다. 오늘 라희를 불러낸 장본인이었으니 책임지고 밥과 술을 사야 했다.
“....응. 솔직히 여기 우리 학교도 아니고. 나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는데, 좀 그래. 그냥 TGIF가자."
라희는 싱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처음에 바흐 선배 뜯어 먹으러 가잘 때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는데 그냥 패밀리레스토랑 가자는 미라의 말에는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래, 아무래도 어색하니까' 라고 말하며 미라가 앉아 있는 라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일어나서. 짐도 무겁고 얼른 가서 에이드 한 잔 시원하게 마시면서 버터 듬뿍 바른 식전 빵 주워먹자구.”
“좋아. 그럼.”
라희도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소퍼백을 어깨에 들고 미라를 따라 걸었다. 미라가 캠퍼스 교정 인도 위를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으아. 돈 굳고 좋은 거 먹을 기회였는데. 좀 아쉽다. 나 이제 떠나면 1년 동안은 여기 안 올 거고, 바흐 선배는 졸업해서 이제 없을 텐데.”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한 미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사람 잘 생겼단 말이야. 키도 크고. 얼굴도 아주 그냥. 완전 모델 삘이야. 그렇지 않아도 가뭄에 콩 나 듯 등교하는 그 선배 보려고 얼마나 다들 눈에 불을 켜는데.”
“흐응.”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라희가 반응하지 않자, 미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TGIF도 뭐, 나쁘지 않아. 레모네이드도 맛있고. 일단 가서 밥부터 먹어야지. 그리고..”
“뭐, 술 정도는 내가 살게. 며칠 전에 아르바이트비 받았거든.”
라희의 제안에 미라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야, 다행이다. 실은, 나 오늘 술 살 돈이 조금 부족했거든. 지난번에 동대문 가서 예쁜 원피스 사느라.”
“뭐 샀어? 긴 거? 짧은 거?”
“그게 말이지. 별생각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매장언니가...”
둘이서 걸어가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크게 들렸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말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보니 단과대 건물 내에서 보았던, 기현 선배라는 남자가 자동차 창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어! 라희씨! 어디 가요.”
그가 크게 외쳤다. 그러자 미라가 옆에서 탐탁지 않은 말투로 소리를 빽 질렀다.
“기현 선배, 나는 안 보여? 아니 왜 아는 척을 나한테 해야지, 오늘 처음 본 라희한테 할까?”
기현은 유들유들 웃으며 받아쳤다.
“야, 인마.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여자는 오늘 처음 본 여자라는 말, 진짜 몰라? 상식인데?”
"그딴 상식 모르거든요. 이 수탉 효과야!"
미라가 혀를 쑥 내밀고 메롱 했다. 기현은 거봐, 알면서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뭔가 생각난 듯 외쳤다.
“아, 지금 바흐 선배 모임에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뒤에 타.”
그의 권유에도 라희와 미라가 선뜻 움직이지 않자, 그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몰고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인도 가에 멈춰서 자동차 창문을 완전히 내린 그가 상반신을 밖으로 디밀며 말했다.
“나 혼자 타는 차라서, 뒷자리는 비록 지저분하지만, 같이 타고 가자. 응? 나 외롭다. 미라야. 복학생은, 어디 낄 데도 잘 없고 절절이 외로워.”
“.......그게."
애원하는 듯한 표정의 기현을 향해 미라는 미간을 찡그리다가 라희를 힐끗 보고서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라희가 가기 싫다는데?”
미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현은 라희를 바라보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과장된 어투로 외쳤다.
“이런, 이런, 라희씨. 우리 라희씨가 참석하지 않는 자리.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모임 장소가 스카이라운지라 야경과 스테이크가 땡기긴 하지만, 에잇. 나도 라희 씨 없으면 그 자리 안 갈래요.”
“헤. 잘도.”
미라가 새치름하게 놀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으니 아무래도 기현 선배와 미라는 평소 굉장히 친한 눈치였다. 두 사람이 그냥 함께 가면 될 텐데. 먼저 집에 가 버릴까? 눈치를 살피던 라희는 집에 가겠다는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며 서 있었다.
“라희야, 우리 같이 가 볼래?”
기현의 기대에 찬 시선과 함께 미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당연했다. 미라는 아까부터 모임에 가고 싶어 하던 눈치였으니까.
"어, 그게. 나는 이만..."
라희가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는데, 중간에 끼어든 기현이 빠르게 말을 잘랐다.
“라희씨, 우리 같이 가요. 재미있을 거라니까요? 만약 자리가 어색하면, 미라랑 붙어 있으면 되잖아요. 나도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을게요. 어차피 왕따 복학생은 찬밥 신세라 혼자 가기 뻘쭘하거든요. 간다 해도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서 고기를 썰면 무슨 맛이겠습니까?. 네? 라희씨. 예쁜 라희씨? 마음도 얼굴만큼 예쁠 거 같은데요?”
기현이 애원하는 말투로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그 사이 미라는 눈짓으로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라희야, 나 이번에 호주 워홀 가면 일 년 동안 안 돌아오는 거 알지? 자그마치 1년이다. 우리 막판 작별인사는 조금 럭셔리한데서 하는 편이 어떨까? 그것도 공짜로."
미간을 찌푸리며 망설이는 라희를 향해 미라가 덧붙였다. 라희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같이 가죠..”
마지못한 라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은 눈빛을 빛내며 환호했다.
“예잇!”
“예!”
짝, 허공에서 맞부딪친 미라와 기현의 하이파이브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