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3화 (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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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남 (1)

시작은 오천만 원이었다.

라희는 통장에 찍힌 금액을 확인했다. 정확히 오천만 원. 그가, 삼 주 전 라희에게 건넨 돈이었다. 일 주 일전 써 둔 일기장을 보며,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오천만 원이 시작이었나?

아니, 시작은 오빠였다.

이내, 라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가 돈의 시작인 것은 맞다. 하지만, 처음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오빠 때문이 아니었다.

시작은, 미라였다. 맞다.

내 친구 미라.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위에 놓인 통장에 찍힌 금액을 다시 확인했다. 일주일 전 그에게서 받은 백만 원을 통장 사이에 끼워 놓았다. 은행에 가서 입금처리를 해야 하는 데, 자꾸 까먹는다. 루이비통 페이보릿은 그와 만날 때 쓰는 가방이라서, 평소에는 쓸 일이 없기에 그 안에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라희는 삐뚤삐뚤 써 놓은 일기장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저 글을 썼을 때는, 잠이 몰려와 몽롱했고, 아래가 욱씬욱씬 뻐근했었다.

지난 일 주일간, 라희는 그의 오피스텔을 찾지 않았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 납치돼서 만나게 된 뿔테 안경과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뿔테.'

내가 22층 오피스텔에 드나드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그의 그녀도 지난 삼 주 동안 나와 그의 관계에 대해 몰랐을 텐데. 측근도 아니고 고작 밑에 층에 사는 그가 그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궁금했다.

라희는 허공에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 위로 쏟아져 내리는 전등의 하얀 빛을 느끼며, 마치 CF에서 순수한 청초함을 강조하는 이온음료 여자 모델이라도 된 듯, 한껏 자세를 잡고 생각에 잠겼다.

뿔테의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관계에서 거칠었던 모습과는 다르게 무척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가 젖은 아래를 가득 채워주었던 감각이 나쁘지 않았기에, 라희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욕실을 사용하고 그 오피스텔을 나왔다. 한사코 배웅하겠다는 뿔테를 거절하면서.

방금 강간하다시피 해 놓고는 무슨 배웅이람. 레알 사이코패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다고 물이 뚝뚝 흐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허리를 돌려 댈 때는 언제고 뿔테를 사이코패스 취급하는 자신이 더 웃겼다.

강간은 아니었지, 엄밀히 말하면. 물론, 서로 합의하고 가진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날 달아올랐던 뜨거운 아래에는 꽉 물어 움켜쥘 뭔가가 간절히 필요했으니까.

'어차피, 그도 그녀가 있으니 나도 뿔테 정도는 거느려도 되지 않을까?'

라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감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눈을 뜨고 다시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신사임당을 품에 안고 두툼하게 부풀어 있는 통장이 보였다. 오늘은, 저것을 꼭 은행에 입금해야겠다. 라희는 가늘게 좁힌 눈동자로 통장을 노려보았다.

그래, 역시 시작은 미라였다. 지금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연락도 안 되는 미라가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니, 갑자기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웃겼다.

여름 방학이 코 앞인 그때, 미라는 호주로 워홀간다고 들떠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학 내 사물함 짐 정리를 위해 라희를 불러냈다. 명목상으로는 짐 정리였지만, 실지 얼굴이나 보고 밥이나 먹자는 의도였다. 둘 다 대학이 달라서 일부러 약속을 잡거나 만날 일을 만들지 않으면 접점이 없으니까. 대학이 다른데, 어떻게 친구가 되었느냐고? 계기는 학원이었다. 라희와 미라는 지난겨울 토익학원에서 같은 반으로 등록해 수업을 듣다가 우연히 그룹 액티비티를 같이 하며 친해졌다.

사는 곳도, 다니는 대학도 서로 달랐지만 둘은 스물한 살로 나이도 같았고, 취향도 비슷했다. 경영학과였던 미라는, 유독 토익 성적만 나오지 않는다며 짜증을 냈다. 전 과목 우수 학점을 받아도 토익 점수 때문에 흥이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번 겨울 방학에 특강을 들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면, 워킹 홀리데이라도 떠나봐야겠다고 넌지시 말을 비췄었다.

라희도 비슷한 이유로 토익 수업을 듣고 있었기에, 깊이 공감하며 알고 있는 같은 과 워홀러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렇게 친해졌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기대만큼 토익 성적이 오르지 않자 봄학기부터 미라는 부지런히 워홀을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주로 떠나기 전에 라희더러 얼굴도 보고 얼굴 본 김에 사물함 짐도 나눠 들고, 같이 밥 먹고 술 먹으면 참 알찬 하루가 되겠지? 라고 연락을 해 왔다. 라희는 흔쾌히 승낙했고, 그날 미라네 대학교 교정에 발을 딛게 된 것이었다.

한참 사물함의 짐을 꺼내 가져온 쇼퍼백에 넣고 있는데, 뒤에서 다가와 미라의 등을 툭, 가볍게 치는 남자 선배가 있었다. 복학생으로 보이는 노숙한 남자는 미라를 향해 저녁에 있을 동아리 모임에 올 거냐고 물었다.

“무슨 모임인데요? 선배, 고전음악동호회 유령회원 아니었어요?”

미라의 싸늘한 물음에 그 남자 선배는 넉살 좋게 씨익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야, 얌마. 오늘 바흐 선배 오잖냐.”

“바흐요?”

미라는 되물으며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녀의 표정을 힐끗 본 남자 선배가 계속해서 말했다.

“바흐 선배가 오면, 술, 안주, 2차 노래방, 피시방 다 공짜야. 알잖냐. 이게 바로 50명의 동호회 회원들이 풀뿌리처럼 흩어졌다가 전부 단합해 모이는 이유지.”

“음, 뭐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네요. 저 어차피 여기 이 친구에게 저녁밥이랑 술이랑 쏜다는 조건으로 데리고 온 거거든요.”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 친구 이름이 뭐지?”

남자가 빤히 바라보며 묻는 말에 라희가 재빨리 대답했다.

“송라희에요.”

“오, 이름. 여성스럽고 아주 예뻐. 예뻐.”

남자가 빙긋 웃으며 과장된 칭찬을 하자, 미라가 볼썽사나운 꼴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그만하라는 듯, 손사래 쳤다.

“됐구요. 바흐 선배 언제 온대요?”

“아마 5시쯤? 우리랑 달리 워낙 바쁘시잖냐. 미라, 넌 라희씨랑 같이 오면 되겠네.”

“옴마, 언제 봤다고 라희씨래요?”

남자는 라희의 핀잔에 씨익 웃으며 라희를 향해 말을 건넸다.

“라희씨도 오실 거죠?”

예상치 못한 초대.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린 라희는 자신 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야, 이 학교 학생도 아니고요. 또 고전음악 동호회 회원도 아니고...”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우리 동호회는 엄청나게 멤버십이 자유롭거든요. 모토가 듣고 느껴라니까요. 라희씨, 비발디 사계 알죠?”

남자는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계라. 한국인 치고 비발디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라희는 뜬금없는 질문의 의도를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알죠."

“그럼, 가장 좋아하는 곡이 뭐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이요.”

남자가 씨익 웃었다.

“비발디 사계 겨울 중에 무슨 악장을 가장 좋아하세요?”

중학교 다닐 무렵 음악 시간에 곡 알아맞히는 듣기 평가를 시행했었기에, 비발디 사계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각 곡은 3악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악장은 대개 알레그로, 프레스토, 아다지오, 라르고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그중 겨울은 1악장 알레그로, 2악장 라르고, 3악장 알레그로의 구조다. 특히 그중에...

“라르고요. 겨울 중 2악장 라르고가 가장 좋아요.”

라희의 말에 남자가 그럴 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 봐요, 고전음악 좋아하시네. 그 정도면 우리 동호회 모토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해요. 오늘은 어차피 술 마시고 밥 먹으러 놀러 가는 거라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거든요. 거기다 특히 여자면, 거기다 라희씨처럼 얼굴이 하얀 미인이 함께하면 정말 좋죠.”

“어휴, 누가 늑대 아니랄까 봐 흑심 봐, 흑심.”

미라가 남자를 향해 눈을 흘기며 핀잔 주는 말투로 툴툴댔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라희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이따가 꼭 보는 거에요? 알았죠? 부담 갖지 말고요. 어차피 바흐 선배가 쏘는 거니까.”

라희가 대답하지 않는데도 남자는 재차 참석하라는 말을 강조하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자의 재촉으로 라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짐을 챙기던 미라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그만 좀! 가라고. 다른 데 가서 놀아. 우리 짐 정리해야 해.”

미라의 성화를 못 이겨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돌려 멀어지는 남자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외쳤다.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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