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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 건은 잘 처리하셨나요?"
유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석비서인 파울라가 데스크에 앉아 고개를 들고 물었다. 유진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쳐 자리로 가서 의자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대충."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고 있으려니 이제야 겨우 살 것 같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간 느낌. 피곤하다. 하루 치 모든 집중력을 세 시간짜리 미술품 경매에 쏟아붓고 나니 탈진한 기분이다.
"듣자하니, 오늘 깜짝 놀랄만한 대격변이 일어났다고 하던데요?"
파울라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쏟아졌다. 시선을 받은 유진은 눈을 위로 들어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프란시스 베이컨이었지. 연작이었는데, 뭉크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돼서 모두를 놀라게 했거든."
"무슨 작품이었는데요?"
"루시안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
"아. 그거. 본 적 있어요. 의자에 앉아 있는 그 그림이죠? 노란색. 요즘 평론가들 사이에서 말이 많던데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니, 비서생활 3년차이자, 예술에 문외한이었던 파울라의 제법 정확한 지적에 유진은 대견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동의했다.
"맞아. 요즘 프란시스 베이컨이 핫하니까. 게다가, 제프 쿤스와 윌렘 데 쿠닝의 작품도 정말 예상외의 높은 가격에 낙찰돼서, 이쯤 되면 전후 작가들에 대한 인기인지, 아니면 단순히 S&P 연수익률에 실망한 투자자들의 차선인지 헷갈린단 말이지. 내가 전에 말했다시피, 올해 메이모제스지수(Mei-Moses Art Index:국제 미술품 가격지수)가 S&P를 훨씬 상회했잖아."
"어찌 되었든, 오늘 한턱내셔야겠는데요? 오늘 경매로 우리 갤러리의 반년 치 운영비를 벌어들인 것은 맞죠?"
"좋아. 끝나고 밥 먹으러 갈까. 요즘 어디가 좋다고 하지? 조용하고 편한 데서 먹고 싶어. 프렌치는 말고."
유진이 피곤한 듯 말하자, 파울라는 신이 나서 화면을 들여다보며 마우스를 빠르게 클릭했다.
"저 태국요리 좋아하는데. 고급진 레스토랑 지금 알아볼게요."
딸깍, 딸깍, 창가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조용한 사무실 내에 마우스가 내는 소리만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유진은 등을 의자에 깊이 기대고서, 천정을 바라보았다. 벌써, 뉴욕의 소호에 작은 갤러리와 부속 사무실을 오픈한지 3년.
유진이 운영하는 YOO갤러리는 유진의 평소 전공분야이자, 관심 분야인 미국 근현대(American Contemporary Modern) 미술품을 다루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ADAA(The Art Dealers Association of America: 미국예술딜러협회)에 등록을 하고 홈페이지에 갤러리 이름을 올렸을 때는 정말 가슴 벅찼었다.
ADAA 가입 자격이 까다로운 만큼, 명성을 가져다줄 수 있고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만 한 눈에 띄는 거장들의 전시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학술적인 카탈로그도 몇 출간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오롯이 혼자서 이루어낸 성과는 아니지만, 지난 일을 되돌아보니 그런 조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조차도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따르르르.
유진이 묵직한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고요히 하루를 마감하는 사무실에 전화벨이 불쑥 울렸다.
"네. Yoo갤러리입니다."
파울라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전화 응대하는 소리를 귓가로 흘려들으며 유진은 피곤한 눈을 감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달깍, 파울라가 전화를 끊었다. 상당히 짧은 전화. 유진은 손끝으로 피로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때였다.
"관장님?"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 유진은 감았던 눈을 겨우 들어 올려 가늘어진 시선으로 파울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파울라는 아까의 신 나던 분위기가 아닌, 조금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데이빗이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는데요. 한국에서 미스터 김의 전언이에요."
***
".......왜?"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침묵. 진욱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남의 거리가 한눈에 펼쳐진 통유리창 너머 뉴욕만큼이나 번잡한 도시 서울. 유진이 나고 자란 서울에서, 김기사의 메세지를 듣고 급히 스케쥴을 조정해서 겨우겨우 짬을 내 찾은 이 정겨운 고국의 중심가에서, 자그마치 10년 동안 연인이었던 그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표현상으로는 시간을 갖자는 말이었지만 사실상 에둘러 말한 이별 통보나 다름 없었다.
"욱아....."
가늘게 떨리며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진욱은 흔들리지 않았다. 평소 진중한 그였기에, 유진은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체, 왜?
"외로워서? 내가 바빠서 그래? 우리 좀 소홀했었잖아. 내가 스케줄을 줄일게. 응?"
유진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서늘한 살갗의 감촉. 유진의 한손에 잡히지 않은 남자답고 커다란 손은 길고 섬세하다. 진욱은 무표정하게 눈동자를 내려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그의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욱아. 우리 이러면 안되잖아.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어떤 사이지?"
낮고 서늘한 음성이 방안의 무거운 침묵을 갈랐다. 유진은 그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떤 사이냐니. 그런 말이 어딨어."
"........"
단정한 옆모습에서 뿜어져 나와 투명한 공기 사이로 흩어지는 짧은 한숨. 그는 천천히 입을 꾹 다물고는 턱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의 왕자님. 10여 년 전, 낡은 학생회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보자마자, 유진은 본능처럼 깨달았다. 그를 놓쳐선 안 돼. 절대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언제나 조용히 있어주었던 그다. 그런데 이제와서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자니? 결코, 그런 종류의 말은 진욱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혹시,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걸까. 소문?'
유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니, 아직 그 무엇도 밝혀진 건 없다. 진욱 앞에서 태연하게 있어야 해.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몸의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팔이 미세히 떨리는 것이 느껴지자 유진은 깜짝놀라며 화들짝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TGH."
그가 짧게 말했다. 유진의 순간 너무 놀라 숨을 삼켰다. 알고 있는 걸까. 유진이 긴장된 눈초리를 그에게 던졌다. 진욱은 미간을 미미하게 좁힐뿐 이어서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정적. 고요한 오피스텔 펜트하우스에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어디선가 무슨 말을 들었을지도. 확인된 바는 없다. 그래도...'
팽팽하게 조여드는 신경. 유진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주먹을 말아쥐었다. 뉴욕 최고급 네일샵의 단장을 받은 손톱이 아프게도 손바닥을 쿡 찔러왔다. 무표정한 그. 또렷한 윤곽의 옆모습을 올려다보는 유진의 마음은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그의 느닷없는 통보로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이젠 불규칙적으로 뛰는 것 같다. 촘촘한 거미줄 같이 가슴을 답답하게 옭아매는 침묵.
한참동안의 침묵을 견디지 못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당연하게도 유진이었다.
"좋아. 생각할 시간을 갖자 우리."
들끓는 마음을 차갑게 식히는 이성적인 계산이었다. 유진이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갖은 공과 노력을 들여서 겨우 얻은 마음을 그렇게 쉽게 다른 누군가에게 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배포가 생기자, 유진은 호기롭게 배짱을 튕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두루두루 다른 여자들도 많이 만나봐."
유진은 손을 내밀어 그의 팔목을 둥글게 쥐고서 엄지손가락 끝으로 푸른 핏줄 돋아난 손목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이건, 그동안 내가 널 외롭게 내버려둔 보상이라고 치자."
유진은 촉촉한 목소리로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는 진욱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의 낮아진 눈동자가 흔들리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손끝에 감기는 보드라운 살갗. 피부. 그리고 느껴지는 온기. 우린 서로에게 익숙하니까. 결국, 그도 깨닫게 될 거였다.
"욱."
유진은 달콤한 목소리로 진욱을 불렀다. 미모. 학벌. 능력. 이제까지 만난 남자들이 백이면 백 다 탐내 하던, 그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강한 긍정과 확신.
"하지만, 결국 알게 될 거야."
유진은 유혹적으로 치켜 올라간 속눈썹 아래 뜨거운 시선을 그에게 보내면서 붉은 입매를 한껏 비틀어 올렸다.
"이건 단지 시간 낭비일 뿐이고 너에겐 역시 나뿐이라는 걸."
============================ 작품 후기 ============================
2015. 01. 08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