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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 도사님. 우리 애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젠 진짜로 우리 애를 살릴 수 있는 건가요?”
나이 든 남자의 앵앵대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저거 아리랑헌터의 목소리 아닌가? 우돼지 돼지갈비 사장님.
“임충식의 뼈는 모두 갖춰졌으니 물론 가능하지.”
이번엔 무학 도사의 목소리다, 저 목소리. 눈을 감고 들어 보니 확실히 알겠다. 실수로 나민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들려오던 그 목소리가 맞다.
정혜 도사는 무학 도사에겐 나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었다.
<임동추 씨, 당신 때문에 흔들리고 있으니까요.>
정혜 도사에게 대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난 그 답을 알고 있다. 누가 나 때문에 흔들려? 그에 대한 답은 이거다.
무학 도사의 아들인 한나민. 녀석이 나 때문에 흔들리고 있으니까. 내게 향한 허튼 감정에 정신이 흐트러져 제구실을 못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무학 도사는 알고 있을까. 제 옆에서 묵묵히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는 아들놈이 자신을 해치울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때나마 나와 같은 편이 되어 제 아비를 죽일 계략을 세웠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시체는 준비했나?”
다시 무학 도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체 어린애 시체를 어떻게 준비합니까. 어디서 시체를 사 올 수도 없는 거고요.”
아리랑헌터가 무학 도사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구해 왔어야지 않나. 시체가 없으면 자네 아이를 살릴 수 없다고 했을 텐데.”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무학 도사님은 처음에 우리들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을 믿고 따르면 당신들의 죽은 가족을 살릴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분명 그땐 시체 얘기는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밤일꾼 놈들에게 들은 얘기를 도사님께 해 드리니까 그제야 시체 얘기를 슬쩍 꺼내셨지요. 이젠 도사님을 예전처럼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아리랑헌터, 저 아저씨에게 사실을 보여 주고 설득한 보람이 있다.
난 눈을 잡아 떴다. 끔찍한 두통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을 뜨자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동수 놈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녀석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이마 한쪽이 찢어져서 피딱지가 말라붙어 있고 뺨엔 크고 작은 생채기투성이다.
얻어맞은 뒤통수 부근이 너무 아파서 좀 주무르고 싶지만 비닐 끈으로 손이 뒤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자네 왜 이러나. 나를 화나게 해서 좋을 게 하나 없을 텐데.”
무학 도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리랑헌터를 협박했다.
“다른 아이의 시체가 없이도 우리 애를 살릴 수 있냐, 없냐 그거 하나만 말해 주십시오.”
“시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나.”
“어떻게 다른 아이의 시체를 구해 온다 칩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살아난 건 내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리랑헌터의 외침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목소리는 절망과 슬픔, 지금까지 자신을 속인 무학 도사에게 향한 분노로 푹 젖어 있었다.
“도사님,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우린 당신을 사기죄로 고소할 생각입니다.”
이번 것은 아리랑헌터가 아닌 다른 사내의 목소리다.
“오, 쟤네들 세게 나오네”, “고소 잔치가 벌어졌구나. 여기저기서 다 저 영감을 고소하네.” 옆에서 노금영과 박천수가 야구 경기를 관람하듯이 떠벌렸다. 두 사람의 앞에는 정혜 도사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며칠을 놈들에게 붙잡혀 있던 인질치고는 모양새가 깨끗하고 얼굴에선 윤기까지 잘잘 흐른다. 정혜 도사가 삼시세끼 다 퍼먹으며 잘 지내고 있다던 한나민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난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다. 전에도 와 봤던 폐공장인 듯하다. 우리들 뒤에는 귀면들이 길 어귀에 버티고 선 장승처럼 서 있었다.
뒤집어쓰고 있던 형형색색의 가면은 어디 갖다 팔아먹었는지 썩어 문드러진 흉한 민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정신을 차리기 전부터 콧속으로 파고들던 불쾌한 악취의 근원은 저놈들이었군. 나는 꿈틀꿈틀 움직여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무학 도사와 아리랑헌터, 한 명의 젊은 사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열한 개의 냉동고가 있던 곳에 서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열한 개의 냉동고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자네들이 나를 배신하겠다고?”
“배신이 아니죠. 처음부터 당신이 우릴 속였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일도 그래요. 처음엔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약간의 수고비를 받고 도와주자는 취지로 이 일을 시작했었지요. 솔직히 말해서 좋았습니다. 부업으로 돈도 벌고 괴롭힘당하는 애들을 도와준다는 보람도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일은 하나의 사업이 되었지요. 뭐, 다 좋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도 돈에 눈이 멀어서 발을 빼지 못한 우리들의 잘못이죠. 하지만 최근에 당신이 우리들에게 시킨 일들. 그건 진짜 못 하겠더란 말입니다.”
젊은 남자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무학 도사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는 저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었죠. 살짝 겁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죽여 없애라고요. 당신은 우리에게 살인을 하라고 시킨 겁니다.”
“하지만 자네들은 저놈들을 죽이지 못했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살인을 합니까! 우린 범죄나 저지르려고 당신을 따르기로 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더 이상은 이런 짓 못 해 먹겠습니다!”
사내가 주먹으로 옆에 있는 냉동고 뚜껑을 내리쳤다. 무학 도사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격분해서 씩씩대는 젊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나를 사기죄로 고소하겠다는 건 자네들 생각인가? 아니 모두의 생각인가?”
“일단 우리 둘의 생각이긴 하지만 곧 다른 사람들도 설득할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자네들만 없애면 되는 게로군.”
“그게 무슨…….”
무학 도사가 한 손을 척 쳐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공장의 모든 문이 쾅, 쾅,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연이어 터지는 소리에 사내와 아리랑헌터가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미림이가 되살아나면 엄청나게 배가 고플 테니 네놈들을 먹이로 줘야겠다!”
무학 도사가 쳐든 손을 까딱, 움직이자 두 사람의 몸이 공중에 부웅 떴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두 사람을 움켜잡아 허공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우리의 입에서 두려움 섞인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잔재주를 피우는군, 망할 영감탱이.”
모두가 숨 쉬는 것도 잊고 놀라워하는 와중에 정혜 도사만이 비웃음을 흘리며 이죽거렸다. 등허리에 놓인 그녀의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그녀의 손목을 묶은 비닐 끈은 끊어져 있었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입술만을 오물거려 말한다.
‘준비해요’ 하고. 준비하다니, 뭘?
“개똥아, 개똥아!”
무학 도사는 소리 높여 아들을 불렀다. 곧 수북이 쌓인 폐자재 뒤에서 갈색 가면을 쓴 사내놈과 하얀색 가면을 쓴 귀면이 걸어 나왔다.
갈색 가면은 정혜 도사의 가방을 들고 있었고 귀면은 미색 천에 싸인 뭔가를 들고 있었다.
무학 도사가 무릎을 굽혀 바닥에 놓인 덩어리를 감싼 천을 풀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 머리칼이 달라붙은 동그란 머리였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빛나는 굳은 몸뚱이. 봉긋하게 솟은 가슴의 형태로 저것이 여성의 시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학 도사의 양녀, 한미림의 시체일 것이다.
무학 도사는 냉동된 고깃덩이처럼 딱딱해졌을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림아” 하고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정혜 도사의 등이 살짝 경련했다. 분명 그녀는 오만상을 구기고 입으로 욕을 짓이기고 있을 거다.
“이제야 임충식의 뼈가 온전한 형태로 내 손에 들어왔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미림아.”
저 영감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섯 명을 무참히 죽인 살인마다. 그런데 7년 전에 죽은 여자의 시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바라보듯 하며 자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갈색 가면을 쓴 나민이는 그런 무학 도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던 아버지. ‘없는 존재’로 취급하며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은 비정한 아비. 버젓이 살아 있는 자신의 혈육은 매정하게 밀어내던 인간이 이미 오래전에 죽은 여자를 애달프게 바라보며 쓰다듬는 꼴을 바라보는 녀석의 심정이 어떨까.
무학 도사가 손을 들어 보이자 갈색 가면은 메고 있던 백을 내려놓았다.
영감이 안에서 나무 함을 꺼내는 동안 갈색 가면은 냉동고 뒤쪽에서 캐리어 가방 하나를 더 끌고 왔다. 갈색 가면이 캐리어 가방을 열어 안에 든 상아색 뼈들을 쏟아 냈다. 무학 도사는 입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연신 중얼거리며 바닥에 쏟아진 뼈들을 여자의 시체 주위로 늘어놓았다.
우리들 뒤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던 귀면들이 일제히 크릉 크르릉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무학 도사가 나무 함의 입구를 봉한 부적을 찢자 놈들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영감은 천천히 나무 함의 뚜껑을 열었다. 일전에 경험한 것처럼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엄청난 압력이 우리들을 짓눌렀다. 귀면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동시에 터진 놈들의 울음소리에 고막이 쨍쨍하게 울렸다.
상아색으로 빛나는 임충식의 머리뼈가 여자의 머리 위에 놓였다.
무학 도사는 노래를 부르듯 낮게 웅얼거리면서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지 영감의 검버섯 들어찬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영감의 탄력 잃은 피부에서 흐른 피가 임충식의 머리뼈를 적셨다. 놀랍게도 둥근 두개골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영감의 피를 쪼옥 빨아들였다.
영감이 눈을 감고 좀 더 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폐공장 전체가 누군가 마구 흔드는 것처럼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주위에 널린 폐자재들이 폭탄처럼 휘익휘익 날아다녔다. 공포영화에서나 보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귀면들이 우우우우, 입을 모아 똑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마치 최고의 악당이 등장할 것을 알리는 배경 음악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잡혀 허공에 뜬 사내와 아리랑헌터가 악을 쓰며 발버둥 쳤다. 살려 줘요! 살려 주세요! 다 큰 사내들이 우는소리를 하며 애원했다.
공장 안의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은 하얀 연기가 바닥에 깔리고, 날파리 같은 것들이 공장 안을 휘익휘익 날아다녔다. 하지만 그것들은 벌레가 아니었다.
하얀 덩어리가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하얀 덩어리는 눈 코 입을 지닌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람 얼굴 모양을 한 덩어리가 씨익 웃는다.
흐어어억! 꺼어억! 우리 일행들의 입에서 연이어 숨넘어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 저, 저것들은 대체 뭐야?”
“냄새를 맡고 몰려온 잡귀들이죠. 진정하세요. 별거 아닌 놈들입니다. 우리가 무서워하면 이것들은 더 기가 살아서 날뜁니다.”
정혜 도사는 속삭이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하얀 덩어리들은 그녀의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도망친 하얀 덩어리는 여자의 시체를 향해 날아갔다. 여자의 시체 위엔 이미 놈의 동족들이 커다란 타원형을 만들어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푸른빛이 여자의 몸 전체를 감쌌다 생각한 순간.
냉동된 고깃덩이 신세였던 여자의 시체가 꿈틀, 움직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분명히 보였다. 여자의 한쪽 어깨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곧 팔을 허공에 뻗는다.
“하하하! 미림아! 그래, 좀 더 힘을 내렴!”
무학 도사가 환희에 찬 웃음 소리를 터뜨리며 두 팔을 쫘악 벌렸다.
너 이 자식, 또 날 속였겠다! 난 갈색 가면을 노려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조용히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나민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학 도사는 분명히 실패할 거라고 했잖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어 달라며!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 저 빌어먹을 놈을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바보지. 미쳤지. 그렇게 저놈한테 속고도 또 속아 넘어갈 뻔하다니.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잠시나마 흔들렸던 자신이 한심하기만 하다.
갈색 가면이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뭐? 고개는 왜 까딱여? 하지만 그것은 내게 보내는 신호가 아니었다. 놈이 고개를 움직이는 것을 본 순간 정혜 도사가 묶인 시늉만 하고 있던 양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얼른 옆에 앉은 노금영의 손을 풀어 주었다.
“도사님?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그녀는 우리들 뒤에 버티고 선 귀면들을 계속 곁눈질로 관찰하며 작업에 임했다. 다행히 놈들은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무학 도사 역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딸에게 정신이 팔려 우리들에겐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우리들의 두 손은 자유로워졌다. 우리가 손이 풀려나 자유로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도 갈색 가면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서둘러요. 여기서 도망쳐야 합니다. 미림이가 완전히 부활하면 여기는 순식간에 아귀 지옥으로 변할 거예요. 전 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갈 테니 모두 밖으로 나가요, 얼른.”
“어떻게 도사님만 놔두고 가요. 같이 나가요.”
“한동수 씨. 당신은 오히려 짐만 될 뿐입니다.”
정혜 도사는 머뭇거리는 동수의 등을 떠밀었다.
“정혜 도사님 옆에는 내가 있을 테니 나가라. 도사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은 짐만 된다.”
정혜 도사와 난 허공에서 눈빛을 교환했다. 진예은 씨, 당신과 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잖아. 그렇지?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안 돼요. 형. 저도 못 나가요. 같이 나가는 거 아니면 안…… 으허어억억!”
이대로는 못 나간다고 버티는 동수 놈의 머리통을 후려치려 했을 때. 놈이 바로 뒤로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고개를 돌렸던 나 역시 숨이 턱 멎었다. 여자의 시체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어깨만 살짝 꿈틀댔었는데. 어느새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다. 양팔을 추욱 늘어뜨리고 고개가 앞으로 푹 꺾인 채였지만.
주위가 심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우우우, 입을 모아 울던 귀면들의 울음소리가 뚝 멈춘 탓이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폭풍 전을 연상케 하는 불길한 적막.
“미림아, 미림아! 나다. 네 아빠다!”
무학 도사의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되살아난 여자, 한미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살려 낸 사람, 양아버지이자 자신을 건드려 임신시킨 몹쓸 사내새끼를 바라보았다.
“미림아. 자, 이리 오렴. 나한테 안겨 보렴.”
무학 도사는 한없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속살거리며 손짓을 했다.
되살아난 여자가 한 발 앞으로 뗐다. 그러자 몸에 걸치고 있던 천이 벗겨져 볼품없이 쪼그라든 알몸이 드러났다. 여자는 아빠에게 안아 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양팔을 뻗었다. 아, 아아, 옹알이 같은 소리를 내면서.
“그래, 그래! 미림아, 아빠다.”
감격에 젖은 무학 도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 아빠. 아빠!”
어설픈 발음으로 여자가 드디어 아빠라는 단어를 제대로 말했다. 그리고 여자는 무학 도사에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무학 도사의 품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달려든 것이었다.
여자는 몸을 날려 무학 도사를 덮쳐 영감의 목을 물어뜯었다. 여자를 껴안으려 크게 벌린 무학 도사의 팔이 덜덜 떨렸다. 물어뜯긴 영감의 목에서 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되살아난 여자는 무학 도사를 ‘아버지’가 아닌 ‘먹이’로 인식한 것이었다.
갈색 가면은, 한나민은, 무학 도사는 임충식을 부활시킬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분명히.
그리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을 거라고도 했었다.
그게 이런 의미였나.
갈색 가면은 굶주린 아귀가 된 여자가 자기 양아버지를 먹어 치우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다.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학 도사의 얼굴을 그저 조용히 보고만 있다.
통쾌할까? 등줄기를 울리는 아찔한 쾌감에 몸을 떨고 있을까? 녀석은 웃고 있을까? 꼴좋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욕을 하며 비웃고 있을까? 넌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냐, 한나민. 그 짜증 나는 갈색 가면 아래의 네 진짜 얼굴은 어떤 색을 띠고 있냐.
“도망쳐요!”
정혜 도사의 다급한 외침이 충격에 휩싸인 우리를 두들겨 깨웠다.
“형, 가요!”
동수가 움직일 생각은 않고 멍청하게 버티고 선 내 팔을 잡아당겼다.
피 냄새를 맡은 귀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은 크게 입을 벌리고 소름 끼치는 괴성을 내지르며 우리들의 뒤를 쫓았다. 놈들에게 지금의 우리는 먹이일 뿐인 듯했다. 놈들에게 붙잡힌 순간 우리는 굶주린 들짐승 같은 저놈들에게 산 채로 씹어 먹힐 것이다.
술법을 쓰던 무학 도사가 쓰러지자 허공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상황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늘어진 사람들을 노금영과 박천수가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바닥에 나뒹구는 각목, 부러진 철근 같은 것들을 쥐고 되는대로 흔들었다. 준비해 온 무기는 모두 뺏겼으니 별수 없었다.
아니다. 내가 품속 깊숙이 숨겨 두었던 총은 아직 남아 있다. 미리 이걸 꺼내 들고 흔들지 않았던 건 정말 잘한 짓 같다.
우리는 앞서 달려간 정혜 도사를 따라 냉동고 뒤쪽으로 달렸다.
귀면들은 달려 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냉동고들을 걷어차고 집어 던졌다.
쾅, 콰앙! 냉동고들이 처참하게 깨지고 박살이 났다. 아가리를 크게 벌린 귀면 한 놈이 날아서 날 덮쳤다. 들고 있던 철근을 휘두르자 놈의 머리 한쪽이 터졌다. 완전히 두개골이 함몰되었는데도 놈은 팔을 허우적대며 날 붙잡으려 했다. 이번엔 눈이 있는 방향을 후려쳤다. 썩은 피부에 매달려 있기만 하던 안구가 뻥튀기처럼 퍼엉 튀어나왔다.
여자는 쓰러진 무학 도사의 몸뚱이 위에 올라타 영감의 살을 먹어 치우고 있다. 무학 도사의 얼굴은 붉은 고깃덩이가 되어 있었다. 원래의 얼굴 형태는 알아볼 수도 없다.
“엄마…….”
여자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피비린내 가득한 공기를 울렸다.
“엄마.”
갈색 가면이 다시 한번 아까보다 더 애달픈 목소리로 불렀다. 붉은 고깃덩이에 얼굴을 파묻고 식사 중이던 여자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뭐 하는 거야! 그럼 너도 잡아먹히잖아!”
속으로 외친다는 게 입 밖으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얼굴과 갈색 탈을 쓴 놈의 얼굴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이를 드러내 “크르르릉!”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내게 달려들기 위해 몸을 날리려는 여자를 갈색 가면이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당신이야말로 먹히고 싶지 않으면 꺼져!”
놈이 소리쳤다. 가면 안쪽에 붙어 있을 부적 탓에 기분 나쁘게 변조된 음성. 난 가면을 벗은 저놈의 목소리가 어떤지 안다. 가면 아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여자가 발버둥 쳐 놈을 떼어 냈다. 한 번 크게 손을 휘저었을 뿐인데 갈색 가면은 요란하게 나가떨어졌다.
여자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입을 쩌억 벌린 채로 허공을 날았다.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짐승. 사람을 먹이로 인식하는 괴물. 난 주머니 깊숙이 넣어 두었던 총을 꺼냈다. 봉이가 가르쳐 준 대로 따로 안전장치를 해제할 시간도 없이 여자가 나를 덮쳐누르기 일보 직전, 이중으로 된 방아쇠를 힘을 주어 꾸욱 당겼다.
타앙!
낯선 굉음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총구 밖으로 뿜어져 나간 총알은 여자의 머리를 관통했다. 여자의 이마를 꿰뚫은 총알은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여자의 두개골을 엉망으로 헤집고, 뒤통수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는 빠져나왔다. 여자의 뻥 뚫린 뒤통수에서 뇌수만이 후두둑 떨어졌다. 피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었으리라.
“안 돼! 쏘지 마!”
갈색 가면이 악을 쓰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머리가 터져 잠시 휘청대던 여자가 한쪽 팔을 크게 휘저었다. 흉기와도 같은 손가락이 내 이마를 긁고 지나갔다. 난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쓰러진 순간 난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발사된 총알은 여자의 머리를 터뜨리지 못했다. 궤적이 빗나간 총알은 달려와 여자의 알몸뚱이를 뒤에서 껴안은 갈색 가면의 몸에 박혔다. 나도, 녀석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갈색 가면은 옆구리 부분을 움켜쥐고 휘청대더니 무릎이 휙 꺾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총을 든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여자에게 붙잡힌 손목에서 으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 소리 높여 비명을 질렀다. 열두 발 남은 총은 흙먼지 가득한 바닥에 떨어졌다. 여자는 반대쪽 손으로 내 목을 졸라 바닥에 짓눌렀다.
나를 보는 여자의 두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의 것도 아니다. 죽은 자의 생기를 잃은 눈. 회색빛으로 탁해진 동공. 다른 귀면들과 다를 바 없는 괴물이다.
부러지지 않은 멀쩡한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긁었다. 손가락이 여자의 벌어진 아가리에 들어갔다. 여자는 내 손가락을 씹으려고 턱을 따각따각 움직였다.
“으으윽…….”
버티기 위해 악문 잇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여자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있는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여자의 얼굴을 적신 피와 내 손바닥에 맺힌 땀 때문에 힘이 빠진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여자는 벌어진 입이 곧장 내 목을 물었다. 날카로운 이가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무학 도사처럼 산 채로 잡아먹히는 건가?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 간다. 죽음을 앞둔 이때에 배가 고프다는 감각이 가장 나를 괴롭게 했다. 죽기 전에 먹은 음식이 겨우 붕어빵이라니. 말도 안 돼. 어느새 반쯤 감긴 눈을 번쩍 뜬 순간.
한 발의 날카로운 총성이 귓전을 때렸다.
내 위에 올라타 있던 여자가 갑자기 “끼이이익!” 비명을 지르면서 펄쩍 뛰었다. 여자의 한쪽 발목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여자가 벌떡 일어나 자신을 공격한 자에게 달려들었지만, 또 한 발의 시원스러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총구를 여자를 향해 겨누고 있는 건 녀석이었다. 갈색 가면, 아니, 한나민. 가면이 벗겨져 나가 민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녀석.
“끝내주는군.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거야?”
녀석이 평소보다 더욱 희게 질린 얼굴로 피식 웃었다. 얼굴의 반이 사라지고 발목 하나가 터져 나간 여자는 양팔을 허우적대며 바닥을 기었다.
“너…… 괜찮냐?”
“아니. 괜찮지 않아. 아파, 아주 많이. 기절할 것 같아.”
나민이가 한쪽 옆구리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여자가 끼이끼이이, 작은 소리로 울며 녀석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이제 그만하자, 엄마. 이젠 편히 쉬어.”
녀석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총구를 겨눴다. 여자는 반만 남은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끼이, 끼이이, 하고 우는 소리가 흐느껴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나민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이렇게 슬프게 들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총성의 여운은 여인의 비명처럼 주위를 맴돌다 사라졌다.
완전히 머리가 날아간 여자는 그대로 추욱 늘어졌다. 간헐적으로 몸의 근육이 움찔움찔 떨렸지만 여자의 육체는 기력을 다했다.
나민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난 얼른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는 녀석을 끌어안았다.
“끝났어.”
내 품에 안겨 축 늘어진 녀석이 중얼거렸다.
“끝났어, 이젠. 내 곁엔 이젠 진짜로 아무도 없어.”
나민이는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힘없이 웃었다. 붉은 고깃덩이로 변한 무학 도사의 시체. 머리가 날아간 여자의 처참한 몸뚱이. 녀석은 순식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었다. 녀석은 이제 정말로 혼자가 된 것이다.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뜨거운 열이 눈으로 밀려 올라왔다.
이 녀석이 밉다. 날 능욕하고 괴롭힌 놈.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런데 미우면서도 불쌍했다. 잔인한 악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녀석이, 오직 나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살아온 녀석이 지독하게 안쓰러웠다.
“날 죽인다고 하지 않았어? 임동추. 그럼 죽여. 끝장을 봐.”
“이미 죽였어.”
네놈이 총에 맞는 순간, 난 널 죽인 거다.
나민이가 얼굴을 내 목에 파묻었다. 그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내 체 향을 삼키듯이. 목에 파묻힌 녀석의 얼굴이 꿈틀대며 움직였다. 어리광을 피우듯 녀석이 내 목에 얼굴을 대고 비비고 있다.
“혀엉…….”
잠꼬대를 하듯 낮게 속삭이는 녀석의 달착지근한 목소리에 귓바퀴의 솜털이 젖었다.
불쌍한 자식. 더럽게 불쌍한 새끼. 뜨거워졌던 눈가가 나도 모르는 새에 축축해졌다. 난 울고 있었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쏟고 있다.
아버지가 경찰에 붙잡혀 가게 되어 커다란 집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며 비난당하고 이유 없이 얻어맞았을 때에도 이를 악물어 참았는데.
박선아를 만나 석진경의 추악한 민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울었고, 지금 또 한 번 운다.
한나민은 내 품 안에서 힘없이 늘어졌다. 헝클어져 엉망이 된 나민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품에 녀석을 꼬옥 끌어안아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어느새 하얀색 가면을 쓴 귀면이 내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언제나 나민이의 옆에 달라붙어 보디가드처럼 지켜 주던 놈. 무표정한 하얀 탈이 나를, 내 품속에서 늘어진 나민이를 응시한다.
“죽지 않았어. 겨우 이 정도 상처로는 죽지 않아. 이놈이 어떤 놈인데. 하지만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하얀 가면을 쓴 귀면이 양손을 뻗어 녀석을 자기 품으로 데려갔다. 어미가 남의 손에 맡긴 아이를 돌려받듯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을 병원으로 데려가.”
하얀 가면 아래에서 크르르릉, 낮게 우는 소리가 났다.
놈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게 분명하다. 귀면은 사람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괴물이 아니었던가? 저 머리는 생각하기 위해 달린 것이 아니라 장식품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 녀석은 다른 귀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너 혹시…….”
형! 야, 똘추! 임동추 씨! 뒤쪽에서 동시에 나를 부르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하얀 가면을 쓴 귀면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더니 곧 휘익 돌아서서 달려갔다. 품에 정신을 잃은 나민이를 끌어안고서 어둠 속, 저편에 있을 출구를 향해 달려간다.
바닥에 나뒹구는 갈색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를 굽혀 들어 올리자 한쪽 면에 깨져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형이 따라 나오지 않은 거예요. 형이 잡아먹힌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곧장 내게로 달려온 동수가 나를 와락 끌어안고는 “허엉허어엉!” 우렁찬 소리로 울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임동추 씨, 당신이 해치운 겁니까?”
헝클어진 머리칼에 시뻘게진 얼굴을 한 백단영이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아직까지 움찔움찔 떨고 있는 한미림의 시체를 보며 물었다.
“허어억! 이건 웬 총이야! 아까 안에서 들리던 그 소리가 그럼 진짜 총성이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노금영은 바닥에 떨어진 총을 발견했다. 총을 본 백단영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표정을 굳혔다.
“똥수야. 형, 아파서 쓰러지겠다. 그만 좀 놔줘라.”
어깨 한쪽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날 끌어안고 펑펑 울던 동수가 마지못해 나를 놔주었다.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멈췄다. 눈물을 흘린 흔적이라곤 눈가에 남은 화끈거리는 느낌뿐이다.
“그거 갈색 가면 아니에요?”
퉁퉁 부은 눈을 비비던 동수가 내 손에 들린 갈색 방상시 탈을 내려다보았다.
“형! 그 새끼 얼굴 봤어요?”
“아니, 못 봤어.”
“허구한 날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졌는데 왜 못 봐요? 그나저나 그 새끼는 어디 있어요? 이 새끼를 그냥 화악!”
“죽었어.”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던 동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 하고 되물었다.
“죽었어, 그 자식. 내가 죽였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내가 놈을 쏜 게 맞긴 하니까. 잊고 있던 목의 통증이 밀려와 무릎이 픽 꺾였다. 동수가 아예 날 등에 업었다. 됐다고 뿌리칠 힘도 없어서 얌전히 업혔다. 난 들고 있던 갈색 가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저건 이제 아무 쓸모 없는, 뱀의 허물에 불과한 물건이다.
공장 밖으로 나온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아 준 것은 봉이의 외제 차가 뿜어내는 현란한 할로겐램프 불빛이었다. 귀면들이 그물 안에서 퍼덕거리는 꼴도 볼 수 있었다. 백단영과 같은 해결사의 일원인 듯한 사내들이 인상 쓴 얼굴로 공장 안에서 나오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불빛을 등지고 서 있던 정혜 도사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화장기 하나 없는 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보는 사람까지 우울하게 하는 음울한 미소였다. 나도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마 내 얼굴도 그녀 못지않게 우울하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었다.
*
*
[어젯밤, 경기도 XX시에 있는 폐공장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불은 폐공장과 근처 부지를 태우고 한 시간여 만에 진화되었습니다. 공장 안에서 불에 탄 남녀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시체의 훼손 상태가 심해 아직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소방 관계자는 이 불이 방화에 의한 것이라고……. 다음 소식입니다. 어젯밤 불법 튜닝한 오토바이로 서울 도심을 질주하던 폭주족들이 붙잡혔습니다. 폭주족들은 한 고등학교의 일진 클럽 멤버들과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단체의 일원들인 것으로…….]
앵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금영이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뉴스에 나온 경기도 XX시 폐공장 부지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 그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우리, 정확히 말하자면 백단영과 해결사 놈들이 한 짓이다.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실내에 감도는 침울한 분위기에 숨통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형, 드실래요?”
동수가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비닐봉지에서 바나나를 꺼내 노금영에게 내밀었다. 침상 위에 누운 채로 노금영은 입술만 오물거려 껍질을 깐 바나나를 씹었다.
동네 병원 4인실 병실은 우리 ‘패밀리’로 꽉 들어찼다. 나와 노금영, 동수, 박천수. 넷이서 사이좋게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난 손목뼈 골절과 목의 부상으로, 노금영은 갈비뼈 골절, 박천수는 호흡기 이상, 동수는 뇌진탕 증상. 폐공장에서 귀면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당한 부상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새끼가 또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동수네 부모님은 과일이며, 치킨이며, 바리바리 싸 들고 달려왔다.
<으이그, 내가 못산다. 내가 못살아! 너희들도 형이 되어 가지고 애가 위험한 일을 하면 말려야지! 같이 어울려서 못된 짓을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해!>
동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번갈아 가며 한 시간 넘게 우리에게 설교를 늘어놓고 가셨다.
“동수야, 귤 없냐? 귤?”
아까부터 계속 음료수만 마시던 박천수가 이번엔 귤을 찾았다. 동수가 침상 옆 테이블에 놓인 비닐봉지에서 귤을 꺼내 박천수에게 던졌다.
“동추 형도 귤 드실래요? 귤이 싫으시면 사과도 있어요.”
“바나나 줘. 귤도 좀 주고.”
어떤 상황에서건 배는 고프다. 동수 부모님이 싸 오신 치킨 세 마리를 방금 전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는데도 여전히 속에서 꾸르륵꾸르륵 난리가 났다.
손목이나 목의 상처 외엔 다 멀쩡하니 먹는 덴 문제없다. 동수가 곱게 껍질까지 깐 바나나와 귤을 내밀었다. 바나나의 흰 속살을 먹어 치우고, 귤껍질을 까서 우적우적 씹었다. 먹어야지. 먹어야 산다.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해가 안 돼.”
박천수가 침상에 바로 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 여자가 무학 도사를 공격한 거지? 무학 도사는 자길 되살려낸 사람이잖아.”
“전에 용천 도사가 그랬잖아요. 귀면들은 아무 감정 없는 굶주린 짐승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그 여자의 혼은 임충식 거였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가 않다 말이야. 분명 그 여자가 무학 도사를 아빠라고 불렀어. 너희도 들었지? 그렇다는 건 임충식의 혼이 들어차긴 했지만 어느 정도 여자의 혼도 섞여 있다는 얘기 아냐? 다른 귀면들은 입만 열면 크릉크릉 울기만 했는데 그 여자는 분명히 사람의 말을 했어. 그런데 무학 도사를 공격해서 먹어 치웠어. 확실히 뭔가 이상하지 않아?”
더 이상 노금영도 입을 놀리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게 나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나 역시 계속 화장실에 갔다가 뒤 안 닦고 나온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뭔가 개운치가 않다. 분명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새끼 도사, 무학 도사의 똘마니. 그 새끼는 어디 갔어? 동추, 네가 죽였다면서? 그런데 왜 그놈의 시체는 없냐?”
질문의 화살이 이젠 내게 향했다. 난 박천수에게 등을 돌려 누워서 귤만 오물오물 씹었다.
“우리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요. 이제 다 끝났잖아요. 무학 도사는 죽었고 도사 연합 할배들이 임충식의 뼈를 가져갔어요. 우리 일은 다 끝난 거라고요. 이제 돈 들어올 일만 남았는데 왜 자꾸 우울한 얘기를 계속해요?”
동수가 쾌활한 어조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렇긴 한데 어째 기분이 영 그래. 개운하지가 않아. 개운하지가” 박천수는 계속 비 맞은 중처럼 구시렁댔다.
“돈 들어오면 형들은 뭐 할 거예요? 전 일단 부모님 모시고 외국 여행 갈 거예요. 그리고 가게 리모델링도 할 거고. 기식이 형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멋진 오토바이도 한 대 살 거고. 63빌딩 뷔페도 갈 거예요. 가서 싹 다 쓸어 먹고 와야지.”
“우리가 받을 돈이 로또 1등 당첨금 정도 되는 줄 아냐? 그리고 똥수야, 넌 군대 가야지. 영장 나왔다는 거 다 안다.”
“오! 우리 동수. 드디어 군대 가냐? 이제 동수도 진짜 사나이가 되는구나. 축하한다!”
“축하는 무슨 축하요. 그리고 언제는 제가 사나이 아니었어요?”
“으하하. 똥수야, 군대 별거 없다. 그냥 짬밥 안 되는 처음만 아주아주 더럽게 힘들지. 가서 고참들한테 무조건 누나 있다고 해라. 없어도 예쁜 누나 하나 만들어. 그래야 군 생활이 편해진다. 뭐 그래 봤자 아주 조금? 개미 똥구멍만큼?”
동수는 “으악으악!”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발광하고 노금영은 비열하게 낄낄대며 웃었다.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왁자해졌다. 분위기가 밝아진 건 좋은데 이건 너무 시끄러운 것 같다. 역시 옆 병실 환자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좀 하라고 호통을 친다.
“군대 가기 싫어요.”
금세 눈물이라도 왈칵 쏟을 것처럼 울먹이는 동수의 심정. 다 안다. 군대 다녀온 사람은 누구나 다 저 심정이 어떤지 알 거다.
“어차피 이 나라 남자라면 군대는 가야 하는 거니까 후딱 다녀와. 너 공부해서 대학 갈 거라며? 얼른 다녀와서 동추한테 공부 가르쳐 달라고 해서 꼭 좋은 대학에 들어가. 넌 할 수 있다. 자아, 아자 아자 파이팅!”
막내를 위로한답시고 다 늙은 큰형님이 아주 해맑게 웃으며 불끈 쥔 주먹을 귀엽게 흔들어 보였다. 동수가 이상하게 구겨진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아자 아자 파이팅,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반응해 줬다.
“한동수 씨, 군대 갑니까?”
백단영이 병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하긴 그럴 나이겠군요. 솔직히 얼굴만 보면 스물대여섯 살로 보여서 군대 생각은 하지도 못했네요.”
저 인간, 진지한 얼굴로 대놓고 비꼰다. 늙어 보인다는 말을 남자다워 보인다는 의미로 알아들은 건지 철없는 똥수 놈은 히히히 웃는다. 백단영은 노금영의 침상 테이블을 꺼내곤 그 위에 들고 온 비닐봉지를 올려놓았다.
동수와 박천수가 눈을 빛내며 슬금슬금 다가와 비닐봉지를 열었다. 안에는 두툼한 스테이크와 각종 음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늘 삼겹살, 돼지갈비나 뜯던 인간들은 신이 났다. 허리에 보호대를 착용한 노금영도 먹고 살겠다고 먹을 것에 달려들었다.
“임동추 씨는 왜 안 드십니까?”
“입맛이 없어서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배 속이 꾸르르륵 천둥 치는 소리가 나며 뒤틀렸다. 백단영은 피식 비웃었다.
“그냥 드시죠.”
어울리지 않게 내숭 떨지 말고 얼른 먹지? 지금 안 먹으면 저 아귀들한테 다 뺏기고 말 텐데. 짧은 말속엔 분명 이런 의미가 숨어 있을 거였다. 폴폴 풍기는 음식 냄새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입 안에 침이 고였지만, 이 재수 없는 인간이 사 온 음식을 먹긴 싫다.
“아뇨. 됐습니다. 정말 입맛이 없어요.”
난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힘없이 말하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휴게실에 가서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 먹어야지 싶어서 병실 밖으로 나간 내 뒤를 백단영이 따라왔다. 막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려는데 백단영이 뒤에서 손을 뻗어 천 원짜리 한 장을 지폐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돈 드리겠습니다. 왜 당신이 커피를 뽑아 줍니까?”
“몇백 원에 뭘 그리 피곤하게 구십니까. 그냥 좀 드세요.”
딱 커피 한 잔이야, 커피 한 잔. 더 이상은 네놈한테 얻어먹지 않을 거야. 속으로 다짐하며 자판기 안에서 커피가 든 종이컵을 꺼내 들었다. 백단영은 남아 있는 잔액으로 자기 몫의 커피 한 잔을 더 뽑았다.
“정혜 도사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멀쩡합니다. 아까 전화했더니 낮부터 고기 구워 먹으면서 막걸리를 드시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리로 갈까요?’ 했더니 혼자 있고 싶답니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좀 달랍니다. 술에 취해서 딸꾹거리면서요. 혼자는 얼어 죽을. 분명 옆에서 용천 도사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역시 그 여자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평범한 여자가 대낮부터 소주도, 와인도 아닌 막걸리를 퍼마시면서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진 않을 텐데. 게다가 귀면들과 육탄전을 벌인 건 우리와 똑같은데 어쩌면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나.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은 고소당한 상태라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연조 씨가 찍은 사진들을 잡지와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아마 이번엔 합의금으로도 무마하지 못할 테지요.”
김연조. 심부름꾼이자 사진작가로 밥 벌어 먹고산다던 그 양반이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은 완전히 끝장났다. 우두머리였던 무학 도사는 죽어 없어졌고 놈들은 감방 구석에서 콩밥 먹으며 단합 대회라도 열어야 할 거다.
폐공장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참상을 목격한 아리랑헌터와 젊은 사내는 달게 벌을 받겠다고 했다. 그들은 감옥에 가라면 갈 거고 피해자들에게 전 재산을 뜯긴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며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폐공장을 바라보던 아리랑헌터의 허망한 얼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그 슬픈 눈.
“며칠 내로 각자의 계좌에 돈이 입금될 겁니다. 이젠 진짜로 끝났습니다.”
끝났다고 말하면서 백단영의 표정이 어째 떨떠름하다. 백단영도 영 입맛이 쓴 거다. 그는 설탕과 크리머를 듬뿍 집어넣은 다디단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포획한 귀면들은…….”
“태워 없애야죠. 도사 연합의 도사님들이 처리해 주실 겁니다. 퇴원하는 즉시 모두 다 같이 놈들의 화형식을 보러 가시죠. 사람을 막대에 매달아 불태우는 광경을 언제 또 보겠습니까.”
“사람이라고 하지 마시죠. 그것들이 어째서 사람입니까. 누가 들으면 우리가 진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살인마인 줄 알겠습니다.”
백단영이 실소했다. 나도 픽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혀가 마비될 정도도 달다. 단맛을 느끼고 싶어서 카페 모카를 뽑은 건데 이건 아예 설탕물이다. 천달봉의 가게에서 파는 쌉싸름하고 향 좋은 아메리카노 한 잔이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을 띄우시나.
“여덟 마리더군요.”
“뭐가 말입니까?”
“우리가 포획한 귀면들 말입니다. 분명 아홉 마리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한 마리는 도망친 걸까요?”
놈이 날 흘끔 바라봤다. 넌 알고 있지? 나머지 한 마리 귀면의 행방 말이야. 놈은 칼날 같은 눈빛으로 추궁했다.
“네. 한 놈은 새끼 도사를 안고 도망쳤습니다.”
난 이실직고했다.
“무학 도사의 손자, 정확히 말하면 아들이겠군요. 그놈은 죽은 게 확실합니까?”
“네. 죽었습니다.”
“당신이 죽였다고요?”
“네. 제가 총으로 놈을 쐈습니다.”
어느 정도의 팩트가 섞인 거짓말이다. 총으로 갈색 가면을 쏜 것도 맞고 죽은 듯이 기절한 것도 사실이다. 기절할 때까지만 해도 놈은 살아 있었지만 또 모른다. 병원으로 이동하는 도중 죽었을지도. 녀석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명치 부근이 쿡쿡 쑤셨다.
“죽었습니다, 분명히.”
난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놈은 죽은 걸로 해 두지요.”
그렇다는 건 놈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겠다는 소리다.
“만약 놈이 살아 있다면 어쩔 겁니까?”
“죽여 없애야지요.”
백단영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병원에 있는 동안 푹 쉬십시오. 병원비는 도사 연합 대표분이 내 주기로 하셨으니 입원비 걱정은 마시고요. 기왕 병원에 온 거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다 검사 받으세요. 몸이 건강해야 계속 이 짓을 해서 먹고살지 않겠습니까?”
놈은 그렇게 말하며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계속 이 짓을 해서 먹고살라고? 됐다. 난 이제 그만둘 거다.
밤일 따위 그만두고 지금 사는 집 전세금 빼서 시골 가서 작은 공부방이라도 하나 차리고 살련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쉬엄쉬엄, 흘러가는 대로 유유자적 살 거다. 지금까진 전쟁을 치르듯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젠 싫다. 다 귀찮다. 어차피 딸린 가족도 없는 인생, 적당히 벌고 적당히 살면 되지.
백단영이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갖다 대며 휴게실에서 빠져나갔다. 휴게실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평화로운 적막이 흘렀다. 볕이 좋은 오후라 입원 환자들 대부분이 산책을 나간 모양이었다.
난 멍한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삭막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이 추위에 얼어붙어 잔뜩 움츠린 우울한 풍경.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어 1번에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뚜르르, 수신 음만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뿐이다. 전화를 받을 리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수화기를 손에서 뗄 수가 없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여보세요’ 나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서.
계속되던 수신 음이 끝나고 기계에 녹음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곧 여자의 멘트가 끝나고 삐이이,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나민아.”
입으로 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청량음료를 마신 것처럼 코끝이 찡해졌다.
“형이랑 서울 가자.”
끝까지 하지 못했던 말. 강원도 산골의 깡마른 사내아이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 아닐까. 아이는 언제나 꿈꿨을 것이다. 상냥했던 서울 형아가 다시 돌아와 자신을 껴안고 서울로 데려가 주는 꿈. 서울 형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고 웃으며 지옥 같은 고향에 안녕을 고하는 행복한 꿈을.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전화가 자동적으로 끊겼다.
난 웃고 말았다.
서울에 가자니. 여기가 바로 서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전쟁 같은 삶을 살았던 도시, 나의 고향. 난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을 고향이라 생각지 않는다. 친구가 있고, 동료가 있고, 나를 필요로 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여기가 내 고향이다. 너도 그러냐? 너도 나만큼이나 이 도시에 정이 들었지 않아?
약으로 잠재웠던 통증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난 휴게실 벽에 기대 뻥 뚫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색으로 뒤덮인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놈이 뒤집어쓰고 있던 하얀색 가면이 생각났다. 윤기 흐르는 하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귀면. 가면 아래의 얼굴은 여느 귀면 놈들과 다를 바 없이 추하게 썩어 있었다. 분명 내 눈으로 봤었다.
하지만 그놈은 다른 귀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기절한 나민이를 품에 안고 도망쳤다. 놈은 마치 나민이의 보디가드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자식새끼를 돌보는 어미 같았다.
하얀색 가면을 쓴 귀면이야말로 한미림의 혼을 덮어씌우기 한 시체가 아닐까. 축 늘어진 나민이를 품에 안은 귀면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
너 혹시 한미림이야? 이 녀석의 엄마야, 당신? 놈을 보며 질문을 했다 한들 대답을 들을 수나 있었을까.
말도 안 돼. 이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망상이다. 미쳤구나, 임동추.
난 허공에 실소를 터뜨리며 눈을 감았다. 누가 라디오를 틀어 놓았는지 어디선가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이 들렸다. 이건 나도 아는 곡이다. 모차르트의 <자장가>. 아주 푹 자라고 자장가까지 틀어 주는구나. 귀에 익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나는 어느새 잠의 늪 속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 * *
“저, 실례합니다.”
난 창에 ‘민박’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쓰인 슈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기 히터 앞에 둘러앉아 나물을 다듬으며 수다를 떨던 여자들이 일제히 나를 봤다.
“아유, 어서 오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슈퍼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흙 묻은 목장갑을 벗으며 다가왔다.
“따뜻한 음료 좀 없을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다 보니 온몸이 꽁꽁 얼어서요.”
“꿀 차가 있긴 한데.”
여자가 노란 벌이 그려진 종이컵 하나를 들어 보였다.
“네. 그것 좀 주세요.”
“잠깐만 기다려요. 뜨거운 물 끓여서 넣어 드릴게. 추울 텐데 저기 가서 불 쬐고 있어요.”
여자들이 전기 히터 앞 곁자리를 내주었다.
따뜻한 불 앞에 서니 좀 살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20여 분이 걸렸다. 승용차로 왔으면 이런 고생 하지 않고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겠지만 말이다. 빌어먹을 뚜벅이 인생. 난 이번엔 꼭 중고차라도 한 대 뽑고 만다고 새삼 다짐했다.
여자들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죽었다니까. 그 누렁이 말이야.”
“잘못 본 거 아냐? 죽은 개가 어떻게 살아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녀?”
“내가 분명 차에 치여 죽은 걸 봤다니까 그러네. 시체라도 묻어 줘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집에 삽을 가지러 간 사이에 없어졌더라고.”
“죽은 것처럼 보였겠지. 얼굴 부분에 큰 상처가 있긴 해도 어쨌든 살아 있잖아. 그런데 참 신기해. 사람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녀석이 이상하게 요즘엔 그 총각 뒤를 졸졸 따라다니데?”
“보니까 그 총각이 먹을 것도 챙겨 주고 그 녀석을 참 예뻐하더구먼.”
“나도 몇 번 누렁이한테 먹을 걸 줬었다고. 우리 집에 데려가서 키우려고 고깃덩이를 흔들면서 꼬셨는데도 본체만체하지도 않던 녀석인데.”
슈퍼 주인 여자가 꿀 차를 내왔다. 조심해서 천천히 한 모금 마셨는데도 혀끝이 홀랑 다 뎄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주인 여자가 내 행색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등산하러 온 사람 같진 않고, 그렇다고 놀러 온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으니 이상하기도 할 것이다.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혹시 이 주위에 한아름 펜션이라고 있습니까?”
“지금 한아름 펜션이라고 했어요? 혹시 그쪽이 그 총각 형이신가?”
주인 여자가 질문을 던졌다.
“네? 그 총각이라뇨?”
“한아름 펜션에 사는 청년 말이에요. 할아버지가 펜션 주인이라서 잠깐 와 있다던. 얼굴 뽀얗고 훤칠하니 잘생긴 총각 말이야. 이름이…….”
“나민이잖아, 한나민.”
옆에 있던 여자가 끼어들었다. 내 목구멍이 파르르 떨렸다. 꿀꺽 삼킨 뜨거운 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나민,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난 백단영을 통해 정보 사냥꾼이란 놈들과 접촉해 한나민을 찾아 달라고 했다.
녀석의 사진 몇 장과 간단한 신상 정보를 가져갔던 정보 사냥꾼에게 곧 연락이 왔다. 녀석이 어디 있는지 찾았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한아름 펜션이란 건물과 그 주위의 부지는 무학 도사의 명의로 된 곳이었다. 영감의 명의로 된 집과 건물 주위를 뒤지다가 펜션에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는 녀석을 발견한 거였고.
“한아름 펜션이 요즘 영업을 안 하잖아요. 그럼 그 넓은 데에 애 혼자 지내고 있을 건데 혼자서 안 무섭냐고 물었더니, 곧 서울에서 형이 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쪽이 나민이 형 맞지요?”
“아, 네. 맞습니다. 제가 나민이 형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난 굳은 얼굴을 억지로 펴 웃으며 뜨거운 차를 삼켰다.
서울에서 형이 온다고 했다고? 그럼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녀석이 무학 도사의 자식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강원도 민박집 할머니 말에 의하면 녀석은 귀신을 볼 줄 안다고 했다. 정혜 도사도 아직 어렸던 녀석을 보고 이 아이는 곧 무학 도사를 능가하는 도사가 될 수 있을 거다, 확신했다 했었고.
슈퍼 밖에서 ‘컹! 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왔나 보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니. 이윽고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엉덩이를 덮는 기장의 검은 패딩 점퍼를 입은 젊은 사내 한 명이 들어왔다.
“너도 양반은 못 되겠다.”
“아줌마들, 제 험담하고 계셨죠?”
사내놈이 넉살 좋게 웃으며 야구 모자를 벗어 눌려 있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헝클어뜨렸다. 사내가 전기 히터 앞에 앉아서 꿀 차를 꼬옥 쥔 날 바라봤다. 그러고는 씨익 웃는다. 마치 불과 며칠 전에 헤어진 친구한테 웃는 것처럼.
폐공장에서의 그 사건 이후 한 달 하고도 1주일이 지났다. 그새 설 연휴가 지났고 입춘도 지나 봄을 앞둔 때다.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40여 일간. 녀석은 뱀이 허물을 벗은 듯 완전히 변해 있었다. 겉모습도 어딘가 변했고 분위기도 예전과는 다르다.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두 가지 모습을 지녔던 녀석과는 또 다른,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동추 형!”
나민이는 날 반갑게 부르며 내게 다가왔다.
“계속 기다렸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손 차가운 것 봐.”
녀석은 내 손을 움켜쥐고는 호오호오 따뜻한 입김을 불어 주는 시늉을 했다. 난 녀석에게 한 손을 내준 채로 굳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옷을 갈아입듯이 변할 수가 있지? 녀석은 절대로 이렇게 사근사근하고 밝게 빛나는 애가 아니었다. 너 정말 대단한 놈이다. 한나민, 정말 엄청난 놈이야. 이쯤 되니 무섭다 못해 경이롭다.
“형제가 어쩌면 이렇게 사이가 좋아? 우리 아들놈들은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데.”
여자들은 모두 흐뭇한 미소를 띠고는 우리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다.
“형, 가요. 해지기 전에 가서 바비큐 파티해요.”
녀석이 내 손을 붙잡아 당겼다. 주인 여자가 가서 형이랑 구워 먹으라며 녀석에게 새송이버섯을 안겨 주었다. 녀석은 형은 고기 먹을 때 꼭 술이 있어야 한다며 맥주도 샀다. 여자들이 문 앞까지 우리들을 배웅했다. 문 앞에는 누런 털을 지닌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서 있었다.
“너 진짜 무서운 놈이다. 한나민,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냐?”
슈퍼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뒤에야 나는 녀석에게 붙잡힌 손을 떼어 냈다. 녀석은 계속 내 손을 붙잡고 걸었던 것이다.
“적응하고 살아가려면 변해야지.”
녀석이 픽 웃었다. 녀석은 한 달여 만에 푸욱 삭은 느낌이었다.
“상처는 괜찮냐?”
“별거 아냐. 약간 스친 정도더라고. 의사가 조용히 묻더라. 이건 아무리 봐도 총상 같은데 누가 널 총으로 쐈냐고.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면서 오히려 다친 나보다 자기가 더 날뛰더라고.”
널 병원으로 데려간 거, 그거 귀면이었냐? 하얀색 가면을 쓰고 있던 그놈. 물으려다가 관뒀다.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서였다.
“돈…… 받았다. 무학 도사의 목숨값.”
난 하얀 가면 얘기 대신 돈 얘기를 꺼냈다.
“그래? 부자 됐겠군.”
“도사 연합에서 입금한 돈. 7 대 3으로 나누자.”
“어째서? 그건 당신 돈이잖아.”
“정혜 도사에게 들었다. 우리가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줬다면서? 너도 돈을 받을 권리가 있어.”
“필요 없어. 나 돈 많아. 영감이 남긴 재산이 꽤 돼.”
“한덕배 씨의 명의로 된 재산이 모두 압수될 예정이거든. 영감이 워낙 악독한 짓을 많이 해서.”
“걱정 마. 한아름 펜션이랑 서울 외곽에 있는 별장은 내 앞으로 명의 이전해 뒀으니까. 난 법적으로는 그 영감과 아무 관계도 아닌 걸로 되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한나민이 담담히 지껄였다. 무학 도사가 죽은 지 얼마나 지났나. 1년이 지났나. 반년이 지났다. 겨우 한 달 조금 지났다. 지금의 녀석에게선 아버지를 잃은 슬픔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소름이 끼친다. 무학 도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나조차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인데,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물려 죽는 것을 목도한 저 녀석은 너무도 멀쩡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밝아지고 둥글어졌다.
녀석과 어깨를 맞댄 채 걷기가 싫어져서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녀석은 앞만 보고 척척 걸어 나갔다. 자연스럽게 나와 녀석의 거리가 점차 벌어졌다.
덕분에 우리들 뒤에서 따라오던 누런 개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녀석은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잡종 똥개였다. 빳빳한 털에 축 늘어진 꼬리, 빼빼 마른 몸뚱이. 녀석이 고개를 돌려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비굴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녀석의 한쪽 머리가 크게 함몰이 되어 있는 게 보였다. 한쪽 안구까지 짓눌린 큰 상처다.
저런 상태로 살아 있는 게 용하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뻗은 순간. 아까 슈퍼에서 들었던 여자들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죽었다니까. 그 누렁이 말이야.>
<죽은 개가 어떻게 살아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녀?>
<내가 분명 차에 치여 죽은 걸 봤다니까 그러네.>
<죽은 것처럼 보였겠지. 얼굴 부분에 큰 상처가 있긴 해도 어쨌든 살아 있잖아.>
그녀들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녔다.
누렁이는 죽었다고 했다. 얼굴에 큰 상처가 있는 누렁이.
눈앞에 있는 이 개가 그렇다. 누렇고 얼굴에 큰 상처가 있다.
새까만 얼굴을 한 여자는 분명히 누렁이가 차에 치여 죽은 걸 봤다고 했었다. 시체라도 묻어 줘야겠다는 생각에 삽을 가지러 간 사이 없어졌다고.
죽은 개가 어떻게 살아서 돌아다녀? 코웃음을 치며 턱 끝에 커다란 점이 있는 여자가 새까만 얼굴을 한 여자에게 물었었다. 죽은 개. 죽어 널브러졌던 개가 어떻게 살아서…….
난 살아서 움직이는 시체를 봤다. 다른 이의 혼을 ‘덮어씌우기’ 한 시체는 살아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죽은 개의 사체에 다른 개의 혼을 덮어씌우기 해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보는 개의 눈이 시뻘겠다. 내빼문 혀끝도 검붉은색이다. 난 녀석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올려 보았다. 목석처럼 차갑고 딱딱하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서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움이라곤 조금도 느낄 수가 없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한기가 갑자기 전신을 강타했다.
딱 하나 맞추지 못했던 퍼즐 조각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한미림. 무학 도사의 딸. 석진경이 실수로 살해한 여자.
한 번 죽은 그 여자는 되살아나서 석진경을 괴롭혔다. 광증에 시달리던 석진경은 장경필에게 여자를 살해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렇게 여자는 두 번째로 죽었다.
첫 번째로 죽었던 여자는 귀면으로 되살아났던 거였고, 장경필은 귀면이 된 여자를 살해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여자는 세 번째로 부활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 추측에 오류가 생겼다. 한나민이 말해 주었던, 무학 도사는 장경필에게 살해당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에야 여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새로운 사실.
그럼 여자는 죽지 않았던 건가? 석진경은 여자를 죽이지 않았던 건가?
난 아무 의심 없이 내 추측에 생긴 오류를 수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귀면을 만드는 것은 무학 도사다. 내 추측대로라면 무학 도사가 석진경이 죽였던 여자를 귀면으로 되살렸어야 했는데, 무학 도사는 자기 딸이 이미 한 번 죽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귀면들은 새끼 도사, 한나민을 부하처럼 따랐다.
놈들은 나민이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주위 도사들의 말에 따르면 굶주린 아귀 상태인 놈들이 아무것도 아닌 나민이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한강 둔치에서 한나민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도 함께 떠올랐다.
<네놈 아버지가 나도 귀면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는 거 알고 있냐?>
내가 묻자 한나민은 코웃음을 쳤다.
<누구 마음대로. 그 영감은 그 여자도, 당신도 귀면으로 만들지 못해.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놈은 분명히 그랬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귀면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건 무학 도사인데 네놈이 뭐라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냐. 그 당시엔 녀석이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비웃었다.
마지막으로. 임충식의 혼을 이용해 되살려낸 한미림의 시체.
그것은 무학 도사를 공격했다. 자신을 되살려낸 무학 도사를. 가장 먼저 여자에게 공격당해야 할 것은 옆에 있던 녀석이었을 텐데. 무학 도사를 산 채로 먹어 치운 여자는 한나민에게는 달려들지 않았다. 포악해져 날뛰긴 했어도 무학 도사나 내게 했던 것처럼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거나 하진 않았었다.
우린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게 아닐까.
어쩌면 귀면을 만든 건 무학 도사가 아니라…….
난 벌써 저만치 멀어진 나민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안개가 자욱이 깔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안개 속에 가려져 녀석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내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발이 땅바닥에 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놈이 갈색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갈색 가면을 쓴 놈은 그저 증오로 똘똘 뭉친 악당이었다. 그런데 가면 아래 드러난 녀석의 민얼굴은 기이한 ‘뭔가’였다. 가면 아래 드러난 한나민의 민얼굴은 새까맣다. 어둠을 잘라 사람의 형태로 빗어 놓은 것처럼.
또 하나의 내가 다시 한번 지겹게도 묻는다.
어때? 임동추. 감당할 수 있겠어? 저 시꺼먼 뭔가를. 저건 네가 지금까지 보아 온 그 어떤 존재보다 어두워. 어둠 그 자체인데. 진짜로 네가 저걸 감당할 수 있을까? 책임질 수 있을까? 물러나려면 지금 물러나. 이번밖에 기회는 없어. 저 선을 넘어가면 넌 영원히 ‘저거’ 한테서 못 벗어나.
검은 무언가가 나민이의 어깨와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것은 새까만 혀를 날름대며 대가리를 쳐들고 이를 드러내 웃는다.
앞만 보고 걸어가던 나민이가 내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이 뒤돌아본 순간 주위에 깔렸던 안개의 환영이 사라졌다. 녀석의 머리 위로 피어올라 날 보며 비웃던 검은 생물들도 없어졌다.
녀석이 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느새 나민이는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입술 사이로 뿜어지는 입김도 하얗고 날 보는 얼굴도 하얗다. 겉은 이렇게 하얀데 속은 새까맣다.
“내 핸드폰에 메시지를 남겼었잖아. 당신이랑 같이 서울에 가자고.”
그랬다. 한 달여 전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도망치고 싶어?”
놈은 물었다. 커다란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내가 그렇다고 하면. 도망치고 싶고, 뒤로 물러나고 싶다고 하면 넌 내가 그냥 돌아서게 놔줄 거냐. 붙잡지 않을 거냐?
내가 여기에 이 녀석을 찾아온 이상 놈은 날 놔주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나 역시, 물러날 생각 없다. 녀석을 찾아내기 위해 정보 사냥꾼들에게 거금을 선뜻 내주었다.
그들에게 정보를 받아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난 이미 마음을 정했다. 서울 생활을 접고 이곳에 와서 살기로. 이곳에 오는 내내 딱 내가 원하는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시골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난 녀석의 하얀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차가운 손이다.
“여기로 이사 올 생각이다.”
나민이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집은 이미 있겠다, 난 그냥 몸만 오면 되는 거 아니냐? 왜? 나랑 살기 싫냐?”
“서울에서의 생활은 어쩌고?”
“거기엔 어차피 아무것도 없어. 내가 거기에 직장이 있냐, 부모 형제가 있냐. 밤일도 그만뒀다. 서울 생활에 미련 없어.”
잠시 동수와 밤일꾼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동수는 곧 군대에 갈 테고 다른 이들도 사느라 바빠서 한때 자신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내 존재를 곧 잊을 것이다.
“살자, 한나민.”
녀석의 차가운 손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아남았으니 어떻게든 살자.”
난 녀석의 손을 꼭 움켜쥔 채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발아래 그어졌던 보이지 않는 선을 훌쩍 넘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빈정거렸다. 분명히 넌 후회할 거야, 임동추. 날 비웃는 내면의 나를 숨을 크게 들이마셔 지워 버렸다.
난 이 녀석, 못 버린다. 못 잊는다. 석진경처럼 이 녀석이 죽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좋아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동정한다. 이 녀석은 오직 나만이 감당할 수 있다. 내가 옆에 있으면 이 녀석은 인간이 된다.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녀석이 아니면 누가 날 감당할 수 있을까. 허세 덩어리에, 어둡고 피폐하고 비뚤어지고 뭔가 한 부분이 결여된 나 같은 놈을.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며 우리 뒤를 따라왔다. 우리의 뒤로 세 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증거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