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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에 실종됐던 등산객들로 추정되는 시체도 발견됐다. 그들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다름 아닌 예전 두레 식당집이 있던 곳이었다.
심마니들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발견된 등산객들의 시체는 몇 달 전 죽어서 묻힌 것처럼 멀쩡했다고 한다.
7년 만에 실종된 가족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현장에 찾아간 유가족들이 오열하는 영상이 9시 뉴스에 아주 잠깐 등장했다. 하지만 서울 시내를 발칵 뒤집고 있는 연쇄 살인범 소식에, 7년 전 강원도 산골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 소식은 조용히 묻혔다.
아무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인터넷상에서도 짧은 기사 몇 개만이 떠돌아다닐 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사건 사고 소식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온갖 끔찍한 범죄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인 사건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게다가 경찰은 요즘 한창 온, 오프라인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터다.
“하지만 이제 무학 도사는 더 이상 무고한 시민이 아닌 거죠. 이로서 그 인간은 태워 없애도 아무 문제 없을 완벽한 쓰레기가 된 겁니다.”
정혜 도사는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실내는 무척 따뜻했지만 이상하게 뒷덜미가 시렸다.
“임충식의 머리뼈를 잠깐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노금영이 정혜 도사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정혜 도사의 옆에 앉아 있던 백단영이 실눈을 뜨고 노금영을 쳐다봤다.
“우리가 그걸 빼돌렸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건 아니고.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부서져서 사라지기 전에 보고 싶어서 말이다.”
한 마디 더 쏘아붙일 거라 생각했던 백단영이 웬일로 말이 없었다.
“뭐야? 왜 주둥이 닥치고 있냐? 무학 도사와 함께 임충식의 뼈도 처리할 거 아니었어? 설마 그 불길한 물건을 남겨 둘 건 아니겠지?”
“임충식의 뼈는 전국 도사 연합 도사님들이 가져가기로 했다. 그래야 나머지 돈도 받을 수 있어.”
“아니, 그래도 그 인간들이 그걸 가지고 악용을 할 수도 있잖아. 그 사람들이 그걸로 새로운 귀면들을 만들어 내면 어쩌려고.”
“그 사람들이 뼈를 이용해 무슨 짓을 하건 우린 알 바 아니지. 이거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런 일 한두 번 해 보냐? 우린 의뢰받은 일만 해결해 주면 끝인 거야. 안 그래?”
노금영은 표정을 확 구겼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할 말도 없는 상황이다. 백단영의 말이 맞다.
갑자기 정혜 도사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곧 커다란 명품 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설마 저 비싼 가방 안에 그딴 걸 넣어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싶었건만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 그녀는 가방 지퍼를 열고는 그 안에서 노란 부적 종이가 처덕처덕 붙은 나무 함을 꺼냈다.
“오래는 못 보여 드립니다. 뼈의 냄새가 새어 나가면 현재 우리의 위치를 들킬 수 있으니까요.”
정혜 도사는 조심스럽게 입구를 봉해 놓은 부적 종이를 긴 손톱으로 찢었다. 뚜껑이 아주 조금 열린 순간. 갑자기 묵직한 무언가가 우리들의 머리와 어깨를 짓눌렀다. 공기 자체가 짜부라지는 듯했다. 정혜 도사가 뚜껑을 완전히 열자 무게감이 더해지고 숨통이 죄어 왔다. 골초라 폐가 좋지 않은 박천수는 가슴을 움켜쥐고서 컥컥댔다.
100여 년 동안 이 나무 함 속에서 잠들어 있던 머리뼈가 뻥 뚫린 눈으로 똑바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눈구멍 속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며 날 바라보는 듯 보였다. 그건 나만의 착각이 아니라 모두의 눈에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으아아, 파란빛이 날 보고 있어요!”
동수가 소리치자 다들 말없이 수긍하는 걸 보면.
뼈는 교교한 상아색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표면에 반짝이 가루를 뿌려 놓은 듯했다. 반질반질한 게 예쁘다. 사람의 뼈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이상했지만 임충식의 머리뼈는 정말 예뻤다. 섬뜩한 아름다움. 눈구멍 속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며 나를 보는 푸른빛. 푸른빛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누가 나를 저 안으로 쑤욱 잡아당기는 그런 기분.
정혜 도사가 나무 함 뚜껑을 탁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러고는 짜악짜악, 손뼉을 두 번 쳤다. 잠자다가 두들겨 맞고 깨어난 것처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멍청한 얼굴을 하고 눈을 크게 끔뻑거리며 정혜 도사를 바라봤다.
“방금 전 그거, 뭐였어요? 누가 날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는데.”
동수가 눈을 세게 비비며 물었다.
“임충식의 혼백이 당신들의 혼을 끌어당긴 겁니다. 저도 일전에 멋모르고 뚜껑을 열었다가 육체와 혼이 완전히 분리될 뻔했죠.”
정혜 도사가 입구를 봉한 부적을 찢는 순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백단영이 대신 대답했다.
“저래서 무학 도사, 그 영감탱이가 임충식의 머리뼈를 기를 쓰고 뺏으려는 거였군. 어우, 기분 진짜 더럽네. 뭐 저런 게 다 있어? 진짜 저런 위험한 걸 없애지 않아도 되는 거야?”
노금영이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아직 실내에는 무겁고 불쾌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참다못한 박천수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임동추 씨.”
정혜 도사가 은근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어째 불안하다. 저 여자는 왜 또 저런 목소리로 날 부르는 거냐.
“미끼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잠깐만요. 왜 동추 형한테 그런 위험한 일을 시켜요? 제가 할게요! 제가!”
발끈한 동수가 목청 높여 소리쳤다.
“안 돼요. 임동추 씨가 아니면 안 됩니다.”
“왜 동추 형이 아니면 안 되는데요? 동추 형한테 그런 일 시키는 거, 제가 허락 못 해요. 그냥 저한테 맡겨요. 저 달리기 잘해요.”
“네놈이 뭔데 이래? 알겠습니다. 제가 하도록 하죠.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형, 안 돼요, 안 돼! 발악을 하는 동수 놈의 얼굴을 밀어내면서 난 정혜 도사를 응시했다. 그녀는 임충식의 뼈가 든 나무 함을 다시 가방에 밀어 넣으며 붉은 입술을 히죽 말아 올려 웃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임동추 씨, 당신이 먹이를 가지고 열심히 도망쳐 다니면 되는 겁니다. 그럼 먹이 냄새를 맡은 들개들이 전부 당신 뒤를 쫓겠죠. 들개들의 우두머리까지도 말이에요.”
여자의 눈이 요사스럽게 가늘어졌다.
“들개? 귀면들? 그럼 들개의 우두머리라면 그 젊은 도사 놈을 말하는 거야? 그런데 왜 그 젊은 도사 놈이 동추 뒤를 쫓아?”
노금영이 정말 아주아주 순수한 의도로 질문했다.
“에이, 형.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동추 형을 쫓겠죠. 젊은 도사 놈은 귀면들을 부리는 양치기인데요. 하하. 안 그래요, 동추 형?”
동수가 나를 도와준답시고 무진장 어색하게 웃으며 팔꿈치로 내 팔을 툭툭 쳤다. 노금영이 의혹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와 동수를 노려봤다.
“걱정 마시죠. 임동추 씨는 워낙 더럽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 괜찮을 겁니다.”
정혜 도사가 웃으며 일행을 안심시켰다.
“밑밥은 던져 놨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어요.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됐지요.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 싶은 분은 빠지셔도 좋습니다. 이번 일에서 빠지실 분은 손 들어 주세요.”
정혜 도사가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위험한 일은 하기 싫어하는 천달봉조차도 침묵을 지켰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내면 몇 년을 개같이 벌어도 못 모을 거금을 손에 쥘 수 있다. 게다가 호랑이굴 속에 혼자 들어가라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다. 이제 와서 나는 못 하겠다고 빠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한 고생이 아까워서라도 발을 뺄 수가 없을 것이다.
“자, 그럼 전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터 합숙을 할 겁니다. 가족이 있는 분들은 가족분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셨겠지요?”
박천수와 천달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수만 표정이 굳었다.
“용돈까지 드리면서 어디 잠깐 여행 가 계시라고 했더니 아부지랑 엄마가 죽어도 안 가신대요. 건물 주인이 가겟세 올려 달라고 해서 장사해야 한다고…….”
“돈 몇 푼 버시려다 더 큰 일을 당하실 수도 있는데요.”
“그렇지만 우리 아부지 고집은 아무도 못 꺾어요.”
“하는 수 없지요. 같이 갑시다, 한동수 씨. 제가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에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휘말려 다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요.”
예상치도 못한 정혜 도사의 반응에 동수가 입만 뻐끔거렸다.
“집에 다녀오실 분들은 다녀오시고요. 오늘 중으로만 이리로 오시면 됩니다.”
백단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행들이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노금영, 술 가져오면 죽인다.”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술타령하는 노금영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백단영이 인상 쓴 얼굴로 협박했다. 노금영은 어디서 개가 짖나 싶은 얼굴로 히죽거리며 웃기만 했다.
“아, 그리고 정혜 도사님. 제 차 타고 가실 거지요? 이것 좀 차 트렁크에 넣어 주시죠.”
백단영은 그러면서 커다란 검은 가방을 정혜 도사에게 내밀었다. 정혜 도사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옆에 선 동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받아 들지 않고. 여왕이 말없이 눈빛으로 명령했다. 동수가 입이 툭 튀어나와 구시렁대면서도 백단영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다섯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자가 들어찼다. 스르릉,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직사각형 철제 상자가 우리들을 태운 채 아래로 내려갔다. 하나씩 숫자가 줄어드는 숫자판을 올려다보고 있던 정혜 도사가 “임동추 씨” 하고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그녀는 말도 없이 들고 있던 명품 백을 내게 내밀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이제부터는 이건 당신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왜 지금 주시냐고요. 미끼 역할은 1주일 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가방을 뺏기지 않도록 해요. 갑자기 굉장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그러니까.”
정혜 도사가 단호한 어조로 내 말을 잘랐다.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정혜 도사의 얼굴에서 표정이 싸악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문이 열리면 무조건 피하세요. 적들이 문 앞에서 우릴 치려고 할 겁니다. 불온한 냄새가 나요.”
정혜 도사는 엘리베이터 안에 탄 일행들에게도 곧 들이닥칠 위험을 알렸다. 일행이 정혜 도사를 돌아본 순간 엘리베이터가 때앵, 소리를 내며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문이 스르륵 열린 순간.
문 앞에 서서 우릴 기다리던 검은 헬멧을 쓴 놈들이 느닷없이 삼단봉을 휘둘렀다.
“이 새끼들이!”
가장 먼저 반응해 몸을 움직인 것은 동수였다. 동수가 인간 포탄이 되어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무기를 부웅 휘두르던 검은 헬멧 두 놈이 불시에 몸을 날린 동수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우리들은 동시에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나도 정혜 도사의 팔을 붙잡고 저 앞에 주차된 연신마트 봉고차를 향해 전속력을 향해 뛰었다. 주차장 곳곳에 숨어 있던 검은 헬멧 놈들이 일시에 튀어나왔다. 사내들의 구둣발 소리와 또각거리는 여자의 하이힐 소리, 거친 숨소리가 지하 주차장 안에 울려 퍼졌다.
“한동수 씨, 그 가방 이리로 던져요!”
무슨 생각인지 정혜 도사가 동수에게 외쳤다.
반대편 기둥 뒤에서 우리를 노리고 달려오던 검은 헬멧들이 일시에 동수를 쳐다보았다. 아니, 저들이 본 것은 동수가 아니라 녀석이 어깨에 백팩처럼 매고 있는 검은 가방이다.
몸을 날려 바닥에 깔아뭉갠 두 놈을 떼어 내고 달려오던 동수가 허공에 가방을 휘익 던졌다.
정혜 도사가 두 팔을 벌려 녀석이 던진 가방을 정확하게 받았다.
하지만 그 순간,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보이지도 않던 헬멧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 정혜 도사를 덮쳤다.
놈은 정혜 도사에게서 검은 가방을 뺏으려 했고 그녀는 가방을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우리들이 정혜 도사를 도우려고 방향을 튼 때.
정혜 도사를 덮쳤던 놈이 칼을 꺼내 들어 그녀의 목에 겨눴다. 칼끝에 베인 정혜 도사의 하얀 목에서 빨간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검은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쫓던 검은 헬멧들은 우르르 승합차로 뛰어가 탔다. 정혜 도사의 목에 칼을 겨눈 놈도 그녀와 함께 천천히 뒷걸음질 쳐 승합차로 다가갔다. 안에 타고 있던 놈들이 손을 뻗어 정혜 도사를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사내놈들에 의해 끌려 들어갔다. “씨바알!” 노금영과 동수가 뒤늦게 차 뒤를 쫓았다.
“야, 임동추. 뭐 해? 빨리 타!”
어느새 봉고차에 타 운전대를 쥔 박천수의 외침이 고막을 찔렀다. 난 거의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차에 올라탔다.
정혜 도사는 날 보고 웃었다. 목에 피 칠갑을 하고서,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부탁해요, 임동추 씨.’
그녀의 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정혜 도사가 내게 떠안긴 명품 백을 품에 꽈악 끌어안았다. 놈들은 정혜 도사가 움켜쥐고 있던 검은 가방 속에 임충식의 머리뼈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차장 밖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동수와 노금영이 차에 올라탔다. 놈들을 태운 차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한참을 달렸지만 아까 봤던 그 승합차는 찾을 수 없었다. 노금영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있는 힘껏 차체를 주먹으로 쳤다.
“나 진짜로 뚜껑 열렸다, 개새끼들.”
머리 뚜껑 열리도록 화가 난 건 노금영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시뻘건 분노가 화르륵 불타는 불꽃이 되어 모두의 전신을 휘감았다.
* * *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여 귀면으로 만들겠다.]
정혜 도사가 납치된 지 만 하루 만에 놈들에게서 협박장이 날아왔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백단영의 핸드폰으로 이러한 메시지가 날아온 것이다.
사진도 한 장 첨부되어 날아왔다. 머리채를 움켜잡혀 억지로 고개가 쳐들린 정혜 도사의 얼굴이 찍힌. 비록 낯빛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지만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선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혜 도사에게서 자유로워진 두 개의 혼 이야기를 들은 터라 무학 도사의 말이 단순한 협박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젊고 건강하다. 게다가 도사의 능력을 지닌 육체일 테니 얼마나 좋은 그릇이겠는가.
곧바로 메시지가 날아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존재하지 않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백단영은 낮게 욕을 지껄이며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 말았다. 핸드폰이 망가지면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생기게 되니 말이다.
“임동추 씨, 당장 일진 클럽 애들을 모이게 하십시오. 놈들의 아지트를 찾았다,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을 흘리세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을 흘리면 의심할 텐데요.”
“정보를 턱턱 넘겨주던 당신 프락치한테 부탁을 해 보란 말입니다!”
흥분한 백단영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프락치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알아듣기 쉽게 첩자, 끄나풀이라고 말해 드릴까요? 당신이 말하는 확실한 정보통이라는 그 자식은 대체 뭐 하는 놈입니까? 아니, 당신 대체 뭐야? 임동추, 당신이야말로 첩자 아니야?”
“이보십쇼, 백단영 씨.”
“난 처음부터 당신이 수상했어. 당신은 무슨 놈의 비밀이 그렇게 많아? 대체 우리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냐고!”
백단영은 폭발한 화산 같았다. 목이며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입에서 말로 된 화염을 뿜어냈다. 흥분해서 꽥꽥대는 백단영의 태도가 아니라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백단영이나 놈의 측근인 봉이는 그렇다 쳐도 몇 년 동안 함께 부대끼며 일을 해 왔던 동료들까지도. 충격을 넘어선 실망감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 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어졌다.
“백 형, 미쳤어요? 누구보고 첩자래요? 생각해 봐요. 동추 형이 첩자였으면 정혜 도사님이 동추 형한테 임충식의 머리뼈를 맡겼겠어요? 그 감 좋은 분이? 동추 형을 믿으니까 안심하고 맡긴 거 아니에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동수가 내 대신 발끈해서 백단영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에 갔던 노금영도 바지춤을 추스르지도 않고 문을 박차고 나와서는 꽤애액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악! 이 새끼가! 가만 듣고 있으려니 빡이 돌아서 똥을 못 싸겠네! 야, 빽가. 너 대가리에 총 맞았냐? 쥐약 처먹었어? 똘추, 저 새끼가 좀 수상한 건 맞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첩자? 끄나풀? 저 새끼가 그딴 짓을 할 놈으로 보이냐? 똘추가 성질 개떡 같고 허세 쩌는 새끼이긴 해도 의리 하나는 있는 놈이야! 그러는 넌? 이 새끼야! 난 네놈이 더 수상해! 저 한국말 더럽게 못하는 양키 새끼도 그렇고. 네놈들 끄나풀이지! 사실 전국 도사 연합 할배들한테 고용된 첩자지!”
어째 편을 들어 주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노금영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패밀리를 건드리는 놈은 다 뒈진다.’
바지춤을 붙잡고 짖어 대는 노금영의 지랄 발광에 백단영은 더 이상 패악을 떨지 못했다.
“그래. 내가 흥분해서 해선 안 될 말을 했다. 인정한다.”
“나한테 그럴 게 아니라 똘추한테 사과해, 새끼야.”
“죄송합니다, 임동추 씨. 제가 너무 흥분한 모양입니다.”
백단영은 노금영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내게 사과했다.
“됐습니다.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한 거, 인정합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말씀드리진 못해도 이거 하나만은 믿어 주시죠. 전 당신들을 배신하는 짓 따윈 절대로 안 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해결사이신 저 두 분은 여전히 절 의심하겠지만 형님들은 절 믿어 주시겠지요?”
천달봉과 박천수가 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난 의자 위에 내려놓았던 정혜 도사의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노골적인 적의를 담은 백단영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저 인간은 임충식의 머리뼈가 내 손에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어디 가십니까? 외출하시려는 거면 그 가방은 놔두고 가시죠. 그걸 가지고 다니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백단영이 냉큼 말을 던졌다. 웃기고 있네. 날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결국은 내가 이걸 가지고 튈까 봐 불안한 거 아니냐.
“아까 당신이 말한 대로 애들한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나 하고 계시죠.”
형, 어디 가는 거예요! 동수가 벌떡 일어나 날 따라오려고 했다.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면 나 너 두 번 다시 안 본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협박하자 내 뒤를 따라오려고 준비하던 동수 놈이 멈칫했다. 협박이 통한 것인지 형들이 말린 것인지 녀석은 따라오지 않았다.
합숙 장소인 백단영의 집이 있는 거리는 사람이 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우리가 집 안에 처박혀 있을 때 눈이 내린 모양인지 거리는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에서 또 하얀 똥 덩어리가 내리네요.>
내리는 눈을 보며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리던 정혜 도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함께 있을 때는 늘 내 신경을 긁고 약점을 후벼 파던 얄미운 여자였다. 그런데 이젠 그 여자의 빈정대는 말투가 그립다.
나는 길을 걸으며 우선 덕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쯤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덕진이는 당장 이 소식을 애들에게 알릴 것이고 밤새 소문이 흘러 흘러 내일 아침이 되면 일진 클럽 놈들도 소문의 내용을 확인할 터.
그리고 나는 핸드폰에서 ‘놈’이란 이름으로 변경해 놓은 한나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평소에는 수신 음이 세 번 이상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던 녀석이지만 이번엔 끊임없이 수신 음만 이어졌다. 결국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간다. 난 녀석과 통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 문자를 날렸다. ‘놈’, 한나민에게 보낸 문자의 내용은 이랬다.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다. 이걸 뺏고 싶으면 알아서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라.]
나는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해 한강으로 향했다. 서울 시내에서 주위 환경에 방해 안 받고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 흔한가. 사람 없고 조용하고 뻥 뚫린 장소라면 한강이 최고지.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사서 둔치 쪽으로 내려갔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한강 둔치에는 운동하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벤치 위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자리를 잡아 고층 건물의 불빛들이 반사되어 일렁이는 새까만 수면을 바라보았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나는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나무 함을 꺼냈다. 전에 정혜 도사가 했던 것처럼 손톱으로 입구를 막은 부적을 찢고 뚜껑을 조금 열었다. 바깥에 있어서인지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은 전보다는 훨씬 덜했다. 대신 아까보다 주위 공기가 더 차가워진 듯하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난 주머니에 넣어 둔 캔 커피를 꺼냈지만 그새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차가운 음료를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아 캔을 옆에 내려놓고는 손을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미쳤군요.”
갑자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기척도 없이 내 뒤로 다가왔던 녀석이 뒤에서 빙 돌아와 내 앞에 섰다. 점퍼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한나민이 손을 뻗어 내 옆에 놓인 나무 함을 들어 올렸다.
“진짜 미쳤어. 제정신이에요? 이걸 왜 열어 놓고 있어요?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이걸 열어 놔야 나민이 네가 냄새를 맡고 찾아올 수 있을 테니까.”
나무 함 뚜껑을 닫던 녀석이 미간을 좁히고서 날 바라봤다. 사방을 덮은 눈에 반사되어 녀석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하게 빛났다.
거지 같다. 저 얼굴을 보고 아직도 예쁘다고 느끼는 점도. 각질이 하얗게 일어나 피딱지가 말라붙은 녀석의 입술 상태를 보며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냐는 생각이 드는 것도.
“정혜 도사님은 어디 있냐?”
얼굴이며 입술까지 얼어붙어 있어 비어져 나오는 목소리가 어째 어눌하다.
“정혜 도사가 누구죠?”
“시치미 떼지 마. 난 다 알고 있으니까.”
“뭘 알고 있다는 거예요?”
“돌아가신 네 어머니 이름이 한미림. 네놈 아버지 이름이 한덕배라는 거.”
적어도 어깨를 움찔 떨거나 당황한 기색이라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떨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네 애비인 한덕배 씨가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인 살인자라는 거.”
“아니에요. 다섯 명이에요.”
“뭐?”
“다섯 명이라고요. 한덕배 씨가 죽인 사람이. 심마니 둘. 등산객 둘. 산속 암자에 공부하러 왔다던 고시생 한 명.”
머리가 지잉 울렸다.
한덕배, 무학 도사가 죽인 사람의 수가 네 명에서 다섯 명으로 늘어난 게 뭐 그리 중요한가. 넷이든 다섯이든 무학 도사는 살인자인데. 놀라운 건 그 끔찍한 사실을 어제 먹은 저녁 메뉴를 말하듯 무심한 어조로 지껄이는 녀석의 태도다.
“한나민. 아니, 이제부터 개똥이라 불러야 하나?”
녀석의 하얀 손이 튀어나와 헛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난 윽윽대며 놈의 손을 떼어 내려 발버둥 쳤다.
온 힘을 다해 놈의 팔을 떼어 내는 데 성공했다. 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은 그런 날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봤다.
“형은 어차피 처음부터 절 믿지 않았죠. 아마 한 번도 절 믿은 적이 없을 거예요. 그렇죠?”
“사랑의 힘으로 믿어 보려고 해도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랑에 눈먼 바보가 되어 보려고 해도 그게 안 되더라. 내가 머리가 좀 좋은 편이라. 너도 내가 끝까지 네 정체를 파악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않아?”
나는 피식 웃었지만 녀석은 웃지 않았다.
“일부러 내가 알아볼 수 있도록 떡밥들을 뿌렸잖아. 팔짱 끼고 앉아서 내가 주위를 더듬어 퍼즐 조각 맞추는 걸 보면서 즐거워했던 거 아냐?”
모습을 완전히 감출 생각이었으면 녀석은 처음부터 장갑을 꼈을 것이다. 저 하얀 손이 얼마나 눈에 띄는 특징인지 놈도 모르진 않을 터인데.
또 놈은 죽은 자기 어머니 얘기를 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생각이었다면 굳이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할 이유가 없을 텐데도. 중간중간 놈이 흘린 의미심장한 말들, 수상한 행동들, 반복되는 우연들……. 놈이 어설퍼서 실수를 한 걸까? 그렇진 않다고 본다. 저 영악한 놈이 한두 번도 아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 리가 없다.
“즐거웠냐? 좋았냐? 낮에는 순진한 척 내 옆에서 온갖 아양을 다 떨고 밤에는 가면을 쓰고 날 짓뭉개는 짓이. 네놈의 시꺼먼 본성을 알아채고도 널 버리지 못하고 결국은 용서하고 받아들여 준 내 모습이 참 웃기기도 했겠다.”
“별로. 생각했던 것보다 즐겁지가 않아.”
한나민의 말투마저 바뀌었다. 놈은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난 당신에게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살았어. 날 배신하고 내 착한 엄마를 죽인 당신을, 당신의 인생을 갈가리 찢어발겨 주겠다는 복수심만으로 버티며 살아왔어. 그런데…….”
혼잣말을 하듯 힘없이 중얼거리던 녀석이 말을 멈추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녀석의 미간 사이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송곳니로 아랫입술을 잘근 씹는다.
“당신은 어째서 인간이지?”
내게 향한 것이 아닌 자신에게 향한 질문인 듯했다. ‘어째서 인간이지?’라니. 난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었다. 사람이었다. 이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어디 있나.
“왜 당신은 인간인 거지? 임동추? 당신이 인간이면 안 되는 거잖아.”
“야, 이 미친 새끼야. 무슨 개소리야?”
“죽여 없애야만 할 해충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당신은 인간이었어. 내 주위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인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제 알겠다. 저놈은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죽여 없애도 될 해충 같은 인간과 그냥 인간. 그런데 해충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내가 알고 보니 그냥 인간이었다는 얘기다.
“석진경의 일기장을 봤어.”
한나민이 입을 열어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 냈다.
“왜? 일기장 내용을 보니 그제야 네놈이 한 짓이 후회가 되더냐? 내가 그렇게 무고함을 주장했건만 네놈은 한 번도 내 말을 믿지 않았지.”
“당신이 날조한 증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믿고 싶었어. 당신은 엄마를 죽인 해충이어야 하니까. 7년 동안 그렇게 믿고 살았으니까. 장경필, 그 새끼를 만나러 갔지.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자 옷을 입고서. 내가 죽은 엄마와 똑같이 생겼거든. 그 새끼가 면회실에 나타난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지르더라. 넌 내가 죽였잖아. 분명히 내가 죽였는데! 이러면서 악을 쓰며 발광을 하더라고.”
녀석은 미간에 굵은 주름을 만든 채로 피시식 웃었다.
역시 마지막으로 장경필에게 면회를 간 건 놈이었다. 석진경이 자살하기 전 보았다는 여자의 환영도 녀석일 것이다.
“임동추, 진짜로 당신이 아니었어.”
뭔가 머릿속에서 ‘빵!’ 소리를 내며 터진 것 같았다. 난 낮게 욕을 내갈기며 녀석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도 똑같이 병신 같은 새끼다. 여자를 죽인 건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온몸으로 주장했다. 발아래 깔린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대면서. 놈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봤던 거다. 그러니 내가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는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겠지.
“한 번은 용서했지. 그런데 두 번은 용서 못 하겠다, 새끼야.”
“용서받을 생각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아. 난 여전히 당신을 증오해, 임동추.”
나도 녀석의 하얀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고 녀석도 내 얼굴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놈의 까만색 동공 안에 일그러진 내 얼굴이 비쳤다. 아마 내 동공에도 녀석의 표정 없는 하얀 얼굴이 비치고 있을 거다.
“그래? 그럼 죽여.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죽일 수 있다면 진작 죽였겠지. 난 당신을 안 죽이고 살려 둔 게 아니라 못 죽인 거야.”
녀석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이미 내가 수십 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소리. 그 말을 할 때의 억양과 표정까지도 생생히 그려 낼 수 있는 말.
“임동추, 당신을 좋아하니까.”
놈의 멱살을 틀어쥔 내 손이 약하게 떨렸다.
“7년이었어. 7년 동안 당신을 증오하며 살았어. 하지만 그리웠어, 당신이. 처음으로 날 사람으로 대해 주고 따뜻하게 품어 줬던 당신이, 당신의 따뜻한 품속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이……. 진짜 너무나도 그리웠어.”
녀석의 하얀 뺨도 떨렸다. 지껄이는 녀석의 붉은 입술도 떨렸다.
한나민이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지자 그 안에 숨어 있던 아이의 얼굴이 드러난다. 내가 7년 전에 산속에서 만났던 그 아이. 날 졸졸 따라다니던 애정에 굶주렸던 그 깡마르고 볼품없는 아이. 내가 사랑했던 나민이,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는 나민이.
난 떨리는 손으로 녀석을 밀어냈다.
“널 죽일 거야, 새끼야.”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다. 참 같잖은 협박이다.
“죽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어.”
한나민이 픽 웃으며 지껄였다. 애송이가 말하는 꼴 좀 봐라. 저 자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랬다. 뽀얗고 애기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하는 짓은 인생 다 산 영감 같았다. 그런 녀석이 가끔씩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 줄 때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이를 드러내고서 해사하게 웃는 얼굴. 웃을 때면 한쪽 볼에 생기는 귀여운 보조개.
녀석은 살아 있었다. 나와 함께 있었던 한나민은, 분명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나민은 들고 있던 나무 함을 다시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
“왜? 가져가지? 네놈 아빠한테 예쁨받을 기회일 텐데?”
“그런다고 새삼 ‘개똥이’가 ‘한나민’이 되진 않아. 한나민이란 이름도 내가 지은 이름이야. 사람다운 이름이 생겼는데도 그 인간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쭈욱 나를 개똥이라고 불러.”
녀석의 목적은 임충식의 뼈를 모으는 일이 아니다. 놈의 목적은 하나다. 대외적인 할아버지이자 생물학적인 부친인 무학 도사를 죽이는 것. 우린 적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같다.
“정혜 도사는 괜찮아. 인질로 납치되어 온 주제에 삼시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있으니까. 당신도 알겠지만 그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냐.”
“네놈 아버지가 나도 귀면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는 거 알고 있냐?”
“누구 마음대로.”
녀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 영감은 그 여자도, 당신도 귀면으로 만들지 못해.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이번엔 내가 코웃음을 칠 차례다. 네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미친 영감이 무서워서 쩔쩔매는 주제에. 귀면을 만들고 말고는 무학 도사가 정하는 거지. 네놈 허락 따위가 왜 필요하냐. 난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를 내 웃었다.
한나민이 고개를 돌려 한강변을 응시했다. 뿜어져 나온 하얀 입김이 안개처럼 녀석의 주위를 감쌌다.
암흑의 적막이 조용히 내려앉은 밤. 내 앞에 버티고 선 녀석은 내려앉은 어둠에 짓눌려 있었다. 저대로 두면 완전히 짜부라져 어둠 속에 녹아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당장 저 녀석에게 달려들어 욕을 하고 두들겨 패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갈색 가면을 뒤집어쓴 저놈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찢어 죽이고 터뜨려 죽였었는데. 그토록 나를 활활 불태웠던 살기의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지금 내가 너무도 지쳐 있기 때문이리라.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발버둥 쳤건만 이제는 살아 있으니까 그냥 숨 쉬고 사는 기분이다.
죽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애늙은이처럼 왜 저러냐 욕을 했으면서 결국은 나도 저 녀석과 똑같은 생각이 든다는 게 우습다.
예쁘게 빛나던 내 어린 연인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녀석은 까맣다. 그리고 나 역시 까맣게 퇴색되었을 게 분명하다. 서로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며 포만감과도 같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던 찰나의 시간. 난 정말로 행복했다. 나를 사랑해 주고 좋아해 주고 내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던 녀석이 내 옆에 있어 줘서.
“널 죽일 거야. 널 용서 못 해, 한나민.”
다시 한번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그래, 죽여. 용서하지 마. 나도 당신을 죽는 그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여전히 까만 황금빛이 반짝이는 수면 위를 바라보며 녀석이 말했다.
“내 인생은 당신이 망친 거야. 당신이 내가 살던 동네에 오지 않았더라면,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온기가 뭔지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살았을 텐데……. 당신이 날 인간으로 만들었어. 그 전까지의 난 고통도, 괴로움도 모르는 기계였는데 당신 덕분에 괴로움이 뭔지 외롭다는 게 뭔지, 춥다는 게 뭔지 알게 됐어.”
그래, 안다. 나 역시 이모님을 만나서 인간이 됐다. 나는 짐승이었다. 소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짐승. 연인 한 쌍이 서로의 몸에 접착제를 발라 놓은 듯 딱 달라붙어 걷는 모습이 보였다. 한 덩어리가 되어 붙은 그들은 이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저 자식들은 이 추운 데서 뭘 하고 있나 싶을 거다.
“임충식의 머리뼈, 그거 기를 쓰며 지킬 필요 없어. 그냥 적당히 가지고 도망치다가 쫓는 놈에게 넘겨. 임충식의 뼈를 가지고 있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동료들까지 위험해져. 머리뼈를 빼앗아도 어차피 무학 도사는 임충식을 부활시키지 못할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날 믿어. 지금까지 한 번도 날 믿지 않았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녀석이 보기에 내 눈빛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추위와 피로에 절어서 눈에 초점이 풀려 있을 거다, 분명.
“무학 도사는 죽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을 거야.”
‘죽을 거야’가 아니라 ‘죽일 거야’겠지. 한나민은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하얀 손등 위로 뼈가 불룩하니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야, 이 자식아.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이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 이런 상황에서 밥 타령이나 하면 얼마나 웃길까.
“붕어빵을 먹으면 행복할까?”
그런데 녀석이 더 웃긴 소리를 지껄였다. 웬 붕어빵? 인상을 팍 쓰고 녀석을 쳐다보다가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이란 걸 떠올렸다.
평범한 삶이란 뭘까? 한나민이 아닌 갈색 가면인 녀석이 질문했었고 난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추운 겨울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붕어빵을 먹으면서 행복을 느끼는 삶?>
그 말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더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핸드폰이 울린다. 내 핸드폰이다. 전화한 놈은 다름 아닌 똥수다. 녀석의 이름이 찍힌 액정 화면을 보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전화를 건 상대가 동수란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한동수, 그 새끼. 뒤통수 조심하라고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녀석이 휙 뒤돌아섰다. 부피가 큰 패딩 점퍼를 껴입어 웅크린 짐승 같은 녀석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어둠 속으로. 뿌옇게 깔린 밤안개 속으로.
*
*
“춥네요. 더럽게 추워.”
“그러게. 좆이 다 얼겠다.”
기식이와 노금영은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해 주고받았다. 말을 거듭할수록 목소리에 힘이 빠져만 갔다.
요 며칠 날씨가 좀 풀리는가 싶더니 간밤에 눈이 온 뒤 또 한파가 찾아왔다.
지긋지긋한 겨울. 지긋지긋한 추위.
박천수의 차는 그야말로 기름 먹는 하마다. 워낙 차가 기름을 많이 먹다 보니 기름값 아낀다고 박천수는 한겨울에도 웬만하면 히터를 틀지 않고,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기름값 내가 줄 테니 히터 좀 틀자고 하고 싶어도 차 주인이 없으니 멋대로 운전대에 손을 댈 수도 없다. 덕분에 우리는 차 안에 있는데도 달달 떨어야 했다.
잠깐 볼일을 보러 갔던 박천수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어우우, 춥다, 왜 이렇게 춥냐. 박천수가 앓는 소리를 하며 차에 타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노금영이 박천수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형님! 웬만하면 히터 좀 틉시다. 일 치르기 전에 얼어 뒈지겠수!”
“참을 만하지 않아?”
“동태 되기 일보 직전이라고요!”
아까부터 춥다 춥다 노래를 부르던 기식이도 징징대며 매달렸다. 조금만 참아 봐.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아껴야 잘살지. 박천수가 또 입을 열어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노금영이 얼른 손을 뻗어 히터를 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히터를 틀지 않았는지 털털털, 환풍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며 찬 바람만 숭숭 나왔다. 따뜻한 바람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동추 형, 어젯밤에 왜 백단영 씨 집에 안 왔어요?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정혜 도사님이 맡긴 뼈는 잘 가지고 있죠?”
기식이가 내 무릎 위에 놓인 가방을 흘끔 보며 물었다.
“왜? 내가 너희들을 배신하고 이걸 어디 갖다 팔았을까 봐? 정 못 믿겠으면 꺼내서 확인해.”
짜증이 치밀어 기식이 놈에게 가방을 내던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전 동추 형을 믿어요.”
입으로는 그렇게 지껄이며 녀석은 가방 지퍼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위장이 쥐어 짜이는 것 같아 죽을 사 먹고 왔는데 금세 소화가 됐는지 또 속이 싸아하게 쓰리다. 늘 가지고 다니던 약은 어제 다 먹었다. 이러다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구르게 될 것 같아 난 슬쩍 일어나 차 문을 열었다.
다들 일제히 날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거나 어떤 행동을 취할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이 내게 쏠렸다. 감시당하는 죄인이라도 된 기분에 속이 더 뒤틀렸다.
“약국에 가요, 약국에. 속이 안 좋아서.”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려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
약을 사서 나오자 맞은편 골목에 붕어빵 노점이 보였다. 나는 노점에 다가가 5천 원짜리를 꺼냈다. 노점 주인은 서비스라며 옆에서 함께 파는 계란빵 하나를 더 넣어 주었다.
계란빵이 제법 맛있었다. 다음에 한나민을 만나면 배고플 때 계란빵 하나를 먹어 치운 뒤 느껴지는 포만감과 행복함, 그런 걸 느끼는 삶이 평범한 인생이라고 말해 줘야겠다.
다음이란 게 있다면.
손에 붕어빵이 든 봉투를 들고 계란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연신마트 봉고차로 걸어갔다.
골목 끝에서 교복을 입은 사내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게 보였다.
금형 고등학교 교복이다. 일진 클럽 놈들도 곧 수업이 끝났으니 학교 밖으로 기어 나올 것이다.
탈탈탈,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미미네 치킨 스쿠터가 교복 입은 애들 사이를 뚫고 나타났다. 동수 놈은 어디서 구했는지 새빨간색 헬멧을 쓰고 있었다. 놈에겐 미안하지만 꼭 생선에 초장 찍어 놓은 것 같았다. 녀석이 멀뚱히 선 나를 발견하곤 손을 들어 휙휙 뒤로 젖혔다. 그 순간 금형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애들을 태운 오토바이 몇 대가 빠른 속도로 동수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난 연신마트 봉고차로 달려갔다.
“형, 애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했어요.”
박천수는 내가 안에 타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기식이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녀석은 차 옆에 세워 두고 있던 자신의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있었다.
“야, 빽가. 꼬맹이들이 출발했다.”
노금영은 곧장 백단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기식이의 바이크는 금세 우리들을 따라잡아 저만치 앞서 달렸다.
검은 헬멧에 고글을 쓰고 라이딩용 재킷과 바지, 장갑, 부츠까지 차려입은 기식이 녀석은 영락없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의 일원으로 보였다.
성능 좋은 기식이의 애마가 부우웅, 육중한 엔진 음을 내며 순식간에 꼬맹이들을 앞질렀다.
기식이가 맡은 역할은 ‘안내자’다.
금형 고교 일진 클럽 애들을 무학 도사가 말한 ‘장소’로 이끄는 역할. 고물상에 내놔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미미네 치킨 스쿠터를 탄 동수의 역할은 ‘탐지병’.
누가 봐도 배달 가는 치킨 가게 배달원으로 보이는 동수를 의심하는 놈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는 아직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
A 지점, 즉, 놈들의 은거지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던 천달봉이 알렸다. 놈들은 아직 일진 클럽 놈들이 자신들의 은거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일진 클럽 애들이 네놈들을 치러 갈 거야.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은 백단영의 몫이다. 이번엔 또 얼마를 처들여서 정보 사냥꾼들에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까지는 알 바 없고.
차가 마포 대교로 접어들었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지자 차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러시아워가 시작되기 전에 서울 시내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동수는 차량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갔고 박천수도 환상적인 끼어들기 신공을 펼쳐 보였다.
부아아앙, 심장까지 벌렁거리게 만드는 엔진 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싶더니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개구리 껍질 같은 녹색 가와사키. 몸체에 붙인 호랑이 문양. 일진 클럽 꼬꼬마들의 우두머리, 김형태의 오토바이다. 그 뒤로 몇 대의 오토바이와 스쿠터가 녹색 가와사키 뒤를 따랐다.
“드디어 나타나셨구먼.”
노금영이 내가 사 온 붕어빵을 우걱우걱 씹으면서 지껄였다. 언제 이렇게 다 처먹은 건지 붕어빵이 두 개밖에 안 남았다.
대시보드 위에 세워 둔 박천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천달봉이 소리쳤다.
[놈들이 땅굴에서 기어 나왔어요!]
“알았어. 우리도 지금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달봉아, 조심해라.”
[네. 알겠어요, 천수 형님. 그쪽 분들도 조심하세요.]
천달봉의 목소리 끝이 약간 떨렸다. 저 양반, 지금 분명 잔뜩 긴장해서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온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있을 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박천수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옆에 앉은 노금영만 태연하게 남은 붕어빵을 씹어 먹고 있었다. 실눈을 뜨고 노려보니 입가에 빵 부스러기를 묻힌 채로 노구멍은 씨이익 웃었다. “마실 거 없냐?” 이러면서.
잠시 신호 대기로 차가 멈춰 섰다.
김형태와 똘마니들은 신호 대기가 걸렸는데도 무시하고 쌔앵 지나갔다.
교통경찰이 사거리 앞에 서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 대도 아니고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신호 무시에 속도위반, 불법 튜닝도 모자라 보호 장구도 착용하지 않고 검은 머리칼 찰랑찰랑 흩날리며 겨울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꼬맹이들.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통경찰이 무전기를 입에 갖다 대는 게 보였다.
“그래! 폭주족 검거는 삼일절에만 하는 게 아니란 걸 보여 줘라, 민중의 지팡이들이여!”
노금영이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저 개새끼 좀 진정시켜!”
웬만해선 욕을 하지 않는 박천수도 이번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난 삐익삐익,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지랄을 떠는 노금영의 허리를 껴안아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차 안에 끌려 들어와서도 놈은 낄낄낄,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웃었다.
“빽가가 무학 도사를 만나러 갔겠구먼. 순식간에 빽가가 가지고 간 뼈가 임충식 게 아니란 사실이 뽀록나겠지?”
여전히 안면 가득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서 노금영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답이 필요한 질문인가? 당연히 들키지.
백단영이 007 가방 안에서 가지고 간 가짜 머리뼈를 꺼내 든 순간, 무학 도사 영감은 1초 내에 그게 가짜란 걸 알아본다는 데 5천 원을 건다. 가져간 물건이 가짜라는 것을 들킨 백단영은 한바탕 지랄 발광을 할 것이다. 연막탄을 피우든 최루탄을 터뜨리든 총질을 하든 놈은 이것이 제대로 된 지랄 발광이다, 하는 것을 몸소 보여 줄 게 분명하다.
“형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어쩌면 백단영 씨도 정혜 도사와 함께 인질이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20년 지기잖아요.”
“살아만 있으면 돼.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그놈이랑 정혜 씨는 어떻게 해서든 구해 낸다.”
노금영의 입가에 번졌던 미소가 한층 더 음흉해졌다.
선두에서 무리의 대열을 이끌고 있을 기식이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다. 동수의 스쿠터도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밖에서 계속 저러고 있으면 추울 텐데. 동수는 가장 힘이 들 탐지병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다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젊은 막내니까, 이런 이유로 그 역할을 녀석에게 떠넘겼지만 난 영 마음에 걸린다. 녀석이 탐지병 역할을 자청한 이유가 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녀석은 보디가드 역할을 하고 싶은 거다. 우리들의, 아니, 나의.
지켜 주겠다는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동수는 늘 행동으로 보여 준다. 난 그런 식으로 언제나 알게 모르게 녀석에게 보호받았다.
<형은 내가 지킬 거예요!>
녀석이 킹콩처럼 가슴을 탕탕 치며 지껄일 때면 자존심이 상해서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이 그렇다. 지갑 안에는 동수가 용천 도사에게 용돈 탈탈 털려 가며 구입한 부적이 들어 있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이것이 얼마나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박천수가 갑자기 핸들을 휘익 돌려 좌회전을 했다. 으아악! 캬아악! 나와 노금영이 동시에 괴성을 지르면서 시트 위에서 뒹굴었다.
“으악! 형! 갑자기 왜 방향을 틀어요!”
맞은편 시트에 얼굴을 박고 뒹굴었던 노금영이 시뻘게진 코를 움켜잡고서 꽤액 댔다. 뒤에 있던 차량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좌회전하는 우리들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했다.
“천수 형, 이쪽으로 가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잖아요.”
난 운전석으로 몸을 끌어당겨 박천수에게 말했다.
“봤어.”
“네? 뭘 봐요?”
“우리들 맞은편에 있던 놈들.”
난 고개를 홱 틀었다. 노금영도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박천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얀색 차 한 대가 우리들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연예인들이나 타고 다닐 법한 커다란 밴이다. 자주 볼 수 있는 차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 차량이다.
“저게 놈들이라고요?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감이 그렇게 말했어! 맞은편에서 신호 대기로 멈춰 선 저 차를 보는 순간 배 속이 찌르르 울렸다고!”
나는 감 타령을 하는 박천수를 비웃지 못했다. 나 역시 배 속 어딘가가 찌르르 울리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사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니 우리들의 감도 예민해진 것일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뒤를 쫓아오는 것이 오토바이가 아니라 밴이란 사실이다. 저 밴이 11인승일 텐데.
“무학 도사가 우리가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군.”
노금영이 시트 등받이를 으득 소리가 나게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박천수는 말없이 액셀러레이터를 꾸욱 밟았다.
“얘들아, 꼭 잡아라!”
이 양반은 F1의 광팬이다. 하지만 이 차는 레이싱용 차가 아닌 연식 10년 된 낡아빠진 봉고차라는 걸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뒤따라오는 하얀색 밴도 속도를 높였다.
무거운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경쾌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달봉이다.
[천수 형님. 오고 있어요?]
“우리들 뒤에 놈들이 따라붙었어. 우리가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단 걸 알아챈 것 같아. 10인승 정도 되는 하얀색 밴. 귀면들을 태운 차인 것 같다.”
[잠깐만요. 귀면이라고요? 그쪽 멤버로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쪽 땅굴에선 한 무리의 풍문위 놈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어요. 아마 놈들은 이쪽으로 오고 있을 일진 클럽 애들을 상대할 것 같으니 제가 그리로 갈게요.]
넌 올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박천수, 노금영과 나, 그리고 동수. 우리는 딸랑 네 명이다. 밴에 귀면들 아홉 마리가 전부 타고 있을까? 반으로 나누어 일진 클럽 애들을 상대하는 팀에 합류시켰다 해도 넷에서 다섯 마리.
[천수 형님, 출발했어요. 자유로 쪽으로 빠지세요. 그쪽에서 합류합시다.]
천달봉과 전화 통화를 하는 사이 노금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백단영에게 걸려 왔을 전화를 받은 노금영의 얼굴이 코 푼 휴지처럼 구겨졌다.
“가짜였단다, 빽가 놈이 만난 무학 도사. 놈들에게 붙잡혀 있던 정혜 도사 역시 가짜.”
일시에 전신이 얼어붙었다. 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들 뒤에 바짝 붙어 서서 따라오는 하얀색 밴이 유령처럼 보였다.
저들의 목적은 일진 클럽 소탕 따위가 아니다. 저 안에 타고 있을 놈, 무학 도사의 목적은 오직 임충식의 머리뼈를 빼앗는 것. 영감은 우리 팀원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나름의 계략을 세운 것일 터다.
“빽가야, 아무래도 우리들 뒤에 따라붙은 게 진짜 같다. 이런 말 하기 더럽게 쫀심 상하는데 말이다. 좀 도와줘라, 새끼야.”
노금영이 수화기 너머의 상대, 백단영에게 농담을 하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백단영과의 통화를 끝낸 노금영이 잠시 차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놈들을 상대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시체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 죽음이란 게 확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뭐 별수 있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분위기를 잡던 노금영이 금세 살아났다.
“이번 일 끝내면 우리, 공금으로 다 같이 온천에라도 가자.”
박천수가 맞받아쳤다. 기왕 통 크게 쏠 거 해외여행 정도는 가 줘야지 겨우 온천이라니.
“왜요? 온천 갔다 나올 때 설렁탕도 먹자고 하지?”
“설렁탕으로 되겠냐. 돼지갈비 정도는 먹어 줘야지.”
“그러니까 돼지갈비가 특식이냔 말입니다. 한 번 정도는 한우 파티 합시다. 횡성 한우 구워 먹으면서 소맥! 어때요? 캬, 생각만 해도 좋다!”
노금영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발밑에 놔둔 연장 가방을 꺼냈다. 박천수는 라디오를 틀었다.
스피커 밖으로 새어 나오는 걸 그룹의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노금영은 가방 안에서 도끼, 스패너, 장도리 같은 연장들을 꺼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형편없는 무기다. 외국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기에도 멋진 총을 지급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어쨌든 이 나라는 총기 규제 국가니까. 그래도 적어도 놈들이 가지고 다니는 은색 삼단봉처럼 폼 나는 무기를 단체 지급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이 녹슨 연장들이 무기라니.
물론 내 주머니 속에는 이런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탄환이 열네 발 남은 총.
또 하나, 녹슨 연장보다 더 위력적인 무기가 있긴 하다.
정혜 도사와 함께 강원도에서 퍼 온 흙이다.
연장을 가방에서 모조리 꺼내 놓은 노금영이 뒤쪽 화물칸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연신마트 상호가 인쇄된 하얀 비닐봉지 안에는 여러 개의 불룩한 천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박천수의 아내가 밤새 정성 들여 만든 천 주머니에 강원도에서 퍼 온 흙을 집어넣은 물건이다. 우리 형수님은 남편이 친구들한테 나눠 줄 거라는 말에 천 주머니 앞에 아기자기한 문양 패턴까지 달아 놓았다.
“형수님도 차암. 병아리가 뭡니까. 병아리가.”
천 주머니 끈을 길게 늘여 목에 매단 노금영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노금영의 천 주머니에는 입을 벌리고 삐약대며 우는 병아리 문양이 달려 있었다.
“형, 고양이도 있어요.”
난 까만 고양이 모양이 달린 천 주머니를 꺼내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강아지, 토끼, 코끼리……. 동물 그림 천지다. 꼭 애기들 도시락 주머니 같은 앙증맞음이 포인트다.
“이거 왜 이래. 마누라가 직접 만들어 파는 수공예 바느질 물건들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노금영이 목에 걸린 병아리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구시렁댔을 때. 콰앙! 뒤꽁무니에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뭔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뒤에서 콰앙, 하는 충격이 가해졌다. 뒤따라오던 하얀색 밴이 대가리로 연신마트 봉고차 꽁무니를 들이받은 것이다. 어째 저놈들이 조용히 따라온다 싶었다.
박천수가 핸들을 틀어 차선을 바꿨다. 하얀색 밴도 미끄러지듯이 차선을 바꿔 우리 뒤에 따라붙는다. 콰아앙! 아까보다 더 세게 들이받는다.
이번 건 충격이 상당해서 앉아 있던 우리들까지 허공에 부웅 떴다가 내려앉았다. 간덩이 때려 부은 새끼들. 여기가 한적한 시골 국도도 아니고. 주위에 지나다니는 차량 수가 얼만데 이런 간 큰 짓을 벌이나!
“으악! 개놈의 새끼들!”
박천수가 짐승처럼 포효하며 속도를 높였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불안하게 차체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이런 식으로 계속 최고 속도로 주행하면 이놈의 똥차가 버텨 내질 못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계기판에서 띵동띵동,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 같은 경고음이 울렸다. 하얀색 밴도 속도를 높여 우리들과 나란히 달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옆에서 들이받는다.
콰아앙! 덩치 큰 하얀 놈이 온몸을 이용해 들이받자 늙은 봉고차는 맥없이 크게 휘청거렸다. 우리들 뒤에서 달려오던 은색 중형차 한 대가 재빨리 방향을 틀어 반대쪽 차선으로 옮겨 탔다. 우리 옆에 달라붙어 있던 하얀 밴이 다시 스르륵, 우리 뒤에 숨었다. 적이지만 박수를 쳐 주고 싶은 운전 솜씨였다.
차선을 갈아탄 은색 중형차가 우리들 옆에 붙어 섰다.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리에게 뭐라 뭐라 소리쳐 댔다. 입 모양과 험악한 얼굴 표정을 보건대 온갖 쌍욕을 퍼붓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형, 형! 앞에서 연기가 나요!”
노금영이 앞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놈의 말대로 보닛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염려했던 상황이 닥치고야 말았다. 박천수가 걸걸한 목소리로 육두문자를 갈기며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차 세워야겠다.”
박천수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선언했다.
“동추야, 차가 멈춰 서자마자 임충식의 뼈가 든 가방을 들고 밖으로 튀어 나가. 나랑 금영이가 네 뒤에서 널 엄호할 테니까. 무조건 뛰어. 앞만 보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튀어.”
난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끈을 길게 늘여 어깨에 멨다. 노금영이 내 점퍼 주머니에 종이 몇 장을 쑤셔 넣어 주었다.
귀면이 나타나면 놈들에게 흙을 뿌리고 불을 붙인 부적을 날린다. 그게 원래 우리의 계획이었다. 부적을 만들어 나눠 주는 것은 정혜 도사의 역할이었고. 예상치 못하게 정혜 도사가 놈들에게 납치된 덕분에 용천 도사가 대신 부적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장당 2만 원씩이나 받아 처먹고.
박천수가 갓길을 향해 핸들을 틀었다.
난 시트 위에 널린 연장들 중에서 스패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갓길에 접어든 연신마트 차가 멈췄다. 난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막 이쪽 갓길로 접어들고 있는 하얀색 밴의 문도 열렸다. 아직 완전히 차가 멈춰 서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형형색색의 탈을 쓴 귀면 놈들이다.
난 허벅지에 꽈악 힘을 주었다. 한 손으로 가방이 흔들리지 않게 옆구리에 고정하고 한 손에는 스패너를 들고서 갓길을 따라 달렸다.
사방이 회색빛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석양이 오늘따라 유난히 붉다. 핏빛 바다로 뛰어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난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노금영과 박천수가 귀면들과 상대하고 있는 게 보인다. 멀리서 봐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듯하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라 바로 내 뒤에 따라오는 붉은색 가면을 쓴 귀면 놈의 존재가 가장 문제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던 붉은색 가면 놈이 갑자기 시야에서 휘익 사라지더니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카아악!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내며 놈이 날 붙잡기 위해 양손을 뻗었다.
난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스패너를 부웅, 휘둘렀다. 휘두른 스패너에 한쪽 손목을 맞은 놈은 반대쪽 손을 휘저어 스패너를 움켜쥐었다. 귀면과 힘겨루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다. 난 스패너를 깨끗이 포기했다. 미련 없이 스패너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다시 놈이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놈에게 목에 걸린 천 주머니에 담긴 흙을 뿌렸다. 그러고는 한 장에 2만 원이나 하는 부적을 주머니에서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여 날렸다. 신기하게도 바람이 꽤 센데도 불붙은 부적은 자석에 끌려가는 철 조각처럼 흙을 뒤집어쓴 귀면에게 날아갔다. 마치 기름을 뒤집어쓴 사람에게 불을 붙인 듯 놈의 머리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꽤애애액! 통쾌한 놈의 비명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다 내려가는 듯했다.
이거 진짜 효과가 있구나! 아예 놈의 몸뚱이 전체를 활활 태우기 위해 천 주머니를 기울여 손바닥에 흙을 쏟아부은 순간.
뭔가가 날아와 내 안면을 사정없이 갈겼다. 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휘익 날아가 가드레일에 부딪쳤다. 맞은 충격에 부딪친 충격이 더해져 난 아스팔트 바닥 위에 녹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려고 해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보이는 모든 것이 만화경으로 보는 세상처럼 겹겹이 층이 생겨 일렁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야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이 보였다. 네 개의 발. 두 명의 사람? 귀면? 가까이 다가온 누군가가 내 어깨를 움켜잡아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반은 빨간색, 반은 흰색인 탈을 쓴 놈이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걸 보니 네놈도 귀면이겠구나. 놈의 뒤에 서 있던 빨간색 가면 놈이 다가와 내가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에 손을 댔다.
<임충식의 머리뼈, 그거 기를 쓰며 지킬 필요 없어. 그냥 적당히 가지고 도망치다가 쫓는 놈에게 넘겨. 임충식의 뼈를 가지고 있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동료들까지 위험해져. 머리뼈를 빼앗아도 어차피 무학 도사는 임충식을 부활시키지 못할 테니까.>
순간 한강 둔치에서 나민이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녀석은 그랬다. 지금까지 자길 한 번도 믿지 않았겠지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믿어 보라고.
이게 있어도 무학 도사는 임충식을 부활시키지 못한다는 녀석의 말. 사실일까. 믿어도 되는 걸까.
놈은 자신의 아버지인 무학 도사를 미워한다. 그거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다. 만약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꼴을 당하면서까지 가방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가방을 움켜쥔 내 손에서 약간 힘이 빠졌다. 아니다. 그래도 정혜 도사가 나를 믿고 맡긴 물건이다. 난 다시 가방 끈을 세게 잡아당겼다.
빨간색 가면을 쓴 귀면 놈이 크르릉거리며 내 목을 졸랐다. 목 피부를 짓누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썩은 손가락.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내 목을 조르던 하얀 손가락이 있었다. 그래도 녀석의 손가락은 보기엔 예뻤다!
나는 숨통이 조여드는 압박감에 몸부림치며 꿈틀댔다. 젠장, 총. 나한테는 총이 있다 이거야. 얼른 그걸 꺼내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깨부숴 주겠어. 그렇게 생각해 보지만 현실의 나는 “커억 컥!” 아름답지 않은 소리를 내며 온몸을 비틀고 있을 뿐이다.
우웅우웅하는 이명까지 들리기 시작한 귓속에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파고들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실제로 오토바이 한 대가 이쪽을 향해 헤드라이트를 번쩍번쩍 빛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오토바이에 탄 운전자는 뭔가를 쳐들고 있었다. 각목? 나무 막대기? 아니다. 저건 동수가 용천 도사에게 거금을 들여 구입한 복숭아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칼이다.
퍼어억! 퍽! 꽤애액! 신명 나는 타격 음과 비명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 싶더니 난 바닥에 툭 떨어졌다. 머리를 움켜쥔 두 마리 귀면이 가드레일 쪽에 널브러져 부르르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동추 형! 얼른 타요!”
오토바이에 탄 운전자는 역시 동수였다. 난 몸의 중심이 잡히지도 않아 흐느적흐느적, 거의 기듯이 오토바이로 다가가 뒤에 올라탔다.
“너 미미네 치킨 스쿠터는 어쩌고. 이건 웬 거냐?”
“일진 클럽 애들 걸 잠깐 빌린 거예요.”
잠깐 빌린 게 아니라 갈취했겠지.
내가 뒤에 탄 것을 확인한 동수가 액셀 페달을 밟았다. 부릉부릉, 꽤나 육중한 엔진 소리가 배 속까지 떨리게 했다. 하나, 기체의 묵직한 진동을 허벅지와 엉덩이로 맛본 게 다였다.
누군가 뒤에서 둘러멘 내 가방을 힘껏 잡아당겼다. 끌어당기는 힘에 난 맥없이 끌려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랬다. 귀면은 아까 내가 상대한 두 마리만이 아니었다.
난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잡았다.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가방을 지켜야겠다는 오기.
“형을 놔줘, 이 새끼들아아아!”
오토바이에서 튀어 내린 동수가 칼을 휘두르며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귀신을 쫓는다는 복숭아나무 칼에 얻어맞은 충격에 놈들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검에 맞은 듯한 놈들의 어깨나 팔 부분에서 타는 냄새와 함께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우리 쪽의 구원 투수가 나타났다.
노금영이 인간 포탄화되어 끈질기게 가방끈을 쥐고 있는 귀면에게로 몸을 날린 것이다. 노금영은 귀면과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구르다 놈의 몸뚱이 위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우리 쪽의 공식 미친개 노구멍께선 일단 바지춤에서 작은 칼 하나를 끄집어내 쾌액쾌액대며 꿈틀대는 귀면의 어깨를 칼로 푹 찔렀다.
그리고 놈의 가면을 벗기고는 목에 매달린 병아리 주머니를 기울여 드러난 놈의 민얼굴에 흙을 쏟아부었다. 불을 붙인 부적을 놈의 얼굴 위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마무리.
카아아악! 귀면의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얼굴에 불이 붙은 귀면은 미친 듯이 바닥을 뒹굴다 가드레일 밖으로 떨어졌다. 노금영은 가드레일에 몸을 걸치고 아래로 떨어진 귀면에게 천 주머니 안의 흙을 마구 뿌리며 낄낄거렸다.
울려 퍼지는 동족의 끔찍한 비명 소리 때문인지 귀면들은 섣불리 우리들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형, 얼른 여기서 벗어나요.”
동수가 내게 다가와 팔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금영 형이랑 천수 형님은.”
“곧 백 형이랑 봉이가 이리로 올 거예요. 대로변에서 이 지랄을 떨었으니 곧 경찰도 출동할 거고요. 일단은 이걸 놈들에게 뺏기지 않아야 하는 거잖아요.”
녀석은 내가 끌어안고 있는 가방을 보며 말했다. 난 하는 수 없이 녀석이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생각 탓인지는 몰라도 가방 무게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진다.
동수와 난 멈춰 서 있는 오토바이에 다가갔다. 우리 앞을 가로막은 귀면들은 동수가 들고 있는 도목검을 위협적으로 쳐들어 보이는 것만으로도 주춤거리며 앞을 터 주었다.
“임동추!”
내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찢었다.
몸속 내장까지 울리게 하는 깊은 울림이었다. 나와 동수는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앞에 선 박천수의 몸뚱이 너머로 놈들의 하얀색 밴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밴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 두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네의 얼굴 하나. 그리고 젊은 여자의 얼굴 하나.
무학 도사와 정혜 도사의 얼굴이다. 갈색 탈을 뒤집어쓴 놈이 정혜 도사의 뒤에서 그녀의 목에 뭔가를 겨누고 있었다. 칼인지 송곳인지. 어쨌든 찌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흉기다. 정혜 도사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쓰다듬으며 무학 도사는 비열하게 웃었다.
“이젠 슬슬 지겨워진다, 임동추. 끝내자, 이젠.”
끝내? 누구 마음대로!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서 외치려고 입을 연 순간. 엄청난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두들겨 맞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난 정신을 잃고 앞으로 크게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