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Ch9. 토끼몰이) (25/28)

#Ch9. 토끼몰이

- 01~03

01 -

좁은 방 안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모두 중·고등학생 자녀가 있을 법한 중년의 남성과 여성 들이다. 동수와 봉이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커피가 든 종이컵을 열심히 갖다 날랐다. 천달봉이 준비해 준 특제 커피다.

“우리가 합의를 해 주고 싶어서 해 준 게 아니에요.”

밍크코트를 입은 중년 여자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놈들한테 당한 우리 애는 아직 병원에 있다고요.”

“그런 새끼들이 애들 사이에서 정의의 사도라고 불린다죠? 정의의 사도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애들을 그렇게 두들겨 패서 병원에 입원시킨답니까. 그놈들은 그냥 돈 받고 각목이나 휘두르고 다니는 깡패 새끼들이에요.”

“썩어 문드러질 새끼들.”

여자의 말에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피해자 모임. 줄임말로 풍문위 피해자 모임의 멤버들이다.

유능한 사업가처럼 고급 양복을 쫙 빼입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백단영은 조용히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들이 생각했던 대로 정상적인 합의가 아니었다. 합의 과정에서 협박과 폭행이 있었다 한다. 사람들은 놈들이 절대로 합의 안 해 준다고 버티는 풍문위 피해자 모임의 대표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했다. 풍문위 피해자 모임의 대표가 누구냐? 바로 박하신의 아버지다.

“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했어요. 고소를 취하해 달라. 합의를 해 달라. 처음엔 부탁이었죠. 그런데 나중엔 협박이 되는 거예요. 합의를 해 주지 않으면 큰일 날 줄 알라면서. 말뿐인 협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봤자 저희들이 뭘 어쩌겠나 싶었죠. 그런데…….”

그때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밍크코트를 입은 중년 여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그런 협박 전화를 받은 다음 날, 풍문위 피해자 모임 대표인 박하신의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소 건 때문에 그러니 오늘 밤에 모이자는 얘기였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갑자기 누군가 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다.

곧 시꺼먼 옷과 헬멧을 쓴 사내들과 노인 한 명이 나타났다. 사내들 틈에는 엉망이 된 얼굴 꼴을 한 박하신의 아버지도 있었다. 누가 봐도 그는 놈들에게 폭행당한 것이 분명했다.

<다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입을 열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들일 테니 시간 끌 거 없이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합의해 주십시오. 합의금은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경찰은 우리들, 못 잡아넣습니다. 우리가 애들 코 묻은 돈 받고 이런 일이나 한다고 무시하시는 모양인데 우리가 당신네들 따위에게 무시당할 그런 놈들이 아니올시다.>

노인이 까딱 손짓을 하자 노인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모임 대표의 팔을 하나씩 붙잡았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합의하겠습니다. 합의해 드리겠습니다!” 모임 대표가 흙빛이 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했다. 사람을 얼마나 쥐어 팼으면 저 배짱 좋고 담이 센 양반이 저 지경이 되었나.

<여러분들이 합의해 주시지 않으면 이 양반은 죽습니다.>

놈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모임 대표가 동태처럼 굳었다. 아무도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숨 쉬는 것도 잊고 오들오들 떨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압도적인 공포가 사람들의 심장을 쥐어짰다.

“그런데 어떻게 합의를 해 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합의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죽인다는데.”

밍크코트 사모님이 손수건으로 눈물이 배어 나온 눈가를 꾹꾹 찍었다.

“그래서 합의금은 얼마를 받으셨습니까?”

백단영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리 많지는 않았어요. 고작 애들 병원비 할 정도였어요.”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셨습니까? 놈들이 당신들을 협박하고 폭행한 확실한 증거도 있었는데요.”

“당신 같으면 사람이 그런 꼴이 되는 걸 눈앞에서 봤는데 무서워서 신고할 수 있었겠어요? 신고하면 보복당할 게 분명한데요?”

“그래서 이대로 놈들을 용서하실 생각입니까?”

“그놈들한테 당한 우리 애는 아직 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요. 몸은 다 나았는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학교도 자퇴했어요. 용서요? 누가 용서를 해요! 마음 같아선 그 새끼들을 찢어 죽이고만 싶은데!”

여자가 침을 튀기며 악을 썼다. 고상함이고 우아함이고 다 때려치우고 시뻘건 얼굴로 울분을 토했다.

“그럼 다시 놈들을 고소하시지요.”

백단영의 말에 여자의 핏발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서로 눈치만 살피며 입 여는 것조차 꺼려 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백단영을 쳐다보았다.

“용서하기 싫으시다면 용서하지 마십시오. 폭행과 협박을 일삼는 시정잡배들한테 본때를 보여 주시죠.”

하지만……. 여자가 붉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끝을 흐렸다.

“저희들이 책임지고 여러분들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당신들…… 밤일꾼인지 뭔지 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한테 일을 의뢰하려면 돈을 줘야 한다고 하던데요.”

“밤일꾼은 뒤에 이분들이고 저는 해결사입니다. 뭐 어쨌든 이번 건은 여러분이 일을 의뢰하시는 게 아니니 돈은 필요 없습니다. 증거를 다시 모아서 고소하시죠. 그 모임 대표란 분은 아직 병원에 입원해 계시지요? 그분 진단서 떼시고 놈들이 협박한 목소리를 녹음한 게 있으면 좋은데…….”

제일 뒤에 앉아 있던 등산복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제가 녹음해 뒀습니다. 집에 걸려 온 전화 내용, 놈들이 우릴 사무실에 가두고 했던 말, 전부 녹음했습니다. 혹시 몰라 합의해 달라고 하던 노인과 모임 대표를 잡고 있던 놈들 사진도 찍었어요.”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으면 소리가 났을 텐데. 놈들한테 들키지 않은 게 용하네.”

남자 주위에 있던 누군가 대뜸 끼어들었다.

“펜 형식으로 된 녹음기와 카메라가 달린 안경을 쓰고 갔었거든요.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요.”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누군가 물었다.

등산복 남자는 덥수룩한 머리칼을 긁으며 웃기만 했다. 난 곧바로 알아챘다.

저 사람은 동족이다. 저 사람도 우리들처럼 밤일을 하는 사람이란 얘기다. 보통 사람이 모임 대표가 부르는데 도청기와 몰래카메라를 들고 간다? 다들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와중에 적이 하는 말을 녹음하고 사진을 찍는다? 등산복 남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 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이 났다. 들어올 때에는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들어오더니 나갈 때는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 나간다.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을 배웅하는 백단영에게 밍크코트 사모님이 물었다.

“그런데 그놈들, 대체 뭐예요?”

“사모님 말씀대로 돈 받고 각목 휘두르는 깡패 새끼입니다.”

“정말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거지요?”

“우리들은 한번 맡은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확실히 해결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지만 여자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아까 도청기와 몰래카메라 운운했던 등산복 남자가 사람들 틈에 끼어 빠져나가며 “수고하십니다” 하며 인사했다. 백단영이 남자를 불러 세웠다. 키는 작지만 단단한 풍채를 지닌 사내였다.

“밤일하시는 분이시죠?”

“네. 부업으로 심부름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 찍는 일 해서 버는 돈으론 사내애 둘 키우며 살기가 힘들어서요.”

남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조금 떨어져서 얘기를 듣고 있던 박천수가 얼른 달려와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밤일꾼 서울 지역 대표 박천수입니다” 대표라는 말에 묘한 강세를 두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까 말씀하신 증거 말입니다.”

백단영이 운을 떼자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뒤에야 입을 열어 말했다.

“애 병원비라도 받아 보려고 고소를 하긴 했는데 이런 망신이 없네요. 우리 애가 학교에서 친구들을 괴롭히고 돈을 뺏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애한테 괴롭힘당하던 애들이 그 사이트에 신고한 것 같고요. 그 사이트에 일을 의뢰하는 비용이 한 놈당 몇십만 원이라면서요? 애들이 얼마나 시달렸으면 놈들한테 그 많은 돈을 주고 일을 의뢰했겠습니까. 이번에 합의금 받아서 애 병원비에 보태고 남은 돈은 우리 애가 괴롭혔던 애들한테 전부 나눠 줬습니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기는요. 자식 잘못 키운 못난 애비지요. 그래서 말인데 솔직히 고소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합의금도 이미 받아 챙겼는데 뭘 또 고소를 한답니까. 쪽팔리게.”

남자는 등산복 주머니에서 검은 비닐을 꺼내 백단영에게 주었다.

“협박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와 놈들의 사진을 찍은 필름 원본입니다. 죄송하지만 대신 증거물 부탁을 드립니다. 전 이 모임에서 탈퇴할 겁니다.”

“사진작가시라고요.”

“그렇지요. 이건 제 자랑이지만 예전에 상도 받은 적 있는 보도 사진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기 없는 연예인 프로필 사진이나 찍고 돌잔치 결혼식에나 불려 가는 처지입니다. 그나마 요즘엔 그런 일도 많지 않아서 심부름꾼 일을 시작한 거죠.”

백단영이 음험하게 눈을 빛냈다.

“우리 일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전에 모임에서 탈퇴할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풍문위 대책 위원회 멤버가 아닌 사진작가인 당신에게 일을 의뢰하겠다 이 말입니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남자의 입 끝에 물속에서 잉크가 번지듯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런 거라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백단영과 남자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이 일 얘기를 하는 사이 백단영의 전화벨이 울렸다. 백단영은 핸드폰을 꺼내 그대로 내게 내밀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눈을 멀뚱히 뜨고서 쳐다보자 놈은 “당신이 받아도 상관없는 전화입니다”라며 핸드폰을 던지듯 안겨 주었다.

누구에게 걸려 온 전화이기에 이러나 싶어서 액정 화면을 확인하니 ‘예은 씨’라는 이름이 떠억하니 박혀 있다. 직접 귀면들의 시체가 묻혀 있던 장소를 찾아내 흙을 퍼 오겠다고 강원도로 떠난 정혜 도사다.

[단영 씨. 임충식의 부하들이 묻혀 있던 곳을 발견하긴 했는데, 사유지예요. 흙만 좀 퍼 가도 되냐고 했더니 그곳 주인이 우릴 경찰에 신고했어요.]

“다짜고짜 자기 집 흙을 퍼 간다는데 당연히 신고하죠.”

[어머나, 씨발. 깜짝이야!]

정혜 도사가 상큼한 어조로 상욕을 냅다 갈겼다.

[왜 당신이 단영 씨 전화를 받아요? 설마 당신 단영 씨를 죽인 거예요?]

말하는 본새 좀 봐라. 머릿속 구조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이런 엽기적인 생각을 하나. 수화기 반대편은 굉장히 시끌벅적했다. 누군가 욕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끈한 정혜 도사도 그 사람에게 욕을 퍼부으며 대거리를 했다. 악에 받친 앙칼진 목소리와 욕 내용만 보자면 정혜 도사의 승리였다.

[어쭈? 그 삽으로 패 죽이겠다? 죽여 봐, 죽여 봐아! 뭐? 계집년이 제 주제도 모르고 지랄이라고? 불알 두 쪽 달고 나온 게 자랑이냐? 내가 불알은 없어도 살덩어리 두 개는 있다!]

그 살덩어리 두 개가 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다. 여자에게는 남자한테는 없는 살덩어리 두 개가 가슴팍에 달려 있긴 하다. 정혜 도사가 땅 주인에게 머리를 들이밀고서 ‘죽여라, 죽여라아아!’ 악을 쓰며 발광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이거 왜들 이러십니까. 말로 하세요, 말로.”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출동한 경찰인 듯하다.

어느새 옆에 다가와 선 백단영이 핸드폰을 가져갔다.

“이봐요. 예은 씨. 경찰과 싸우시면 어떻게 합니까. 뭐요? 그쪽이 먼저 쌍욕을 하며 시비를 거는데 어떻게 참냐고요? 예은 씨, 제발 그 쌈닭 기질 좀 죽여요. 누가 이런 쌈닭을 데려갈는지. 아, 예에 예에.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경찰 좀 바꿔 주세요.”

백단영은 올백으로 넘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인상 쓴 얼굴로 경찰과 통화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사진작가 양반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만면에 번진 흐뭇한 미소를 보건대 백단영이 수고비를 꽤 두둑하게 쳐주기로 한 모양이다.

“토끼몰이 같군.”

동수와 봉이를 도와 사무실을 정리하던 박천수가 중얼거렸다. 도시에서 자란 동수와 봉이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난 박천수가 왜 이 상황을 토끼몰이에 비유하는지 잘 안다.

토끼는 앞다리가 뒷다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 아래에서 위로 뛰어 올라가는 건 잘해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데엔 서투르다. 사람들은 놈들의 그런 습성을 이용해 몽둥이와 부지깽이 같은 것들을 들고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토끼를 산 정상으로 몰아간다. 산 정상에는 그물을 쳐 놓고 포진하고 있는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위로 쫓겨 올라간 토끼들은 그물을 쳐놓고 기다리는 제2진을 피해 뒤돌아 달아나려 하지만 짧은 앞다리 때문에 쉽지가 않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토끼들을 한꺼번에 때려잡을 수 있다.

“모르죠. 우리가 사냥꾼이 될지. 놈들이 사냥꾼이 되고 우리가 몰이당하는 토끼가 될지.”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귀면들을 제외한 다른 놈들은 모두 일반인이잖아. 그런 놈들이 전략이 뭔지나 알겠어?”

“그러는 우리도 따지고 보면 일반인이죠. 우리가 뭐 특수 부대를 나왔습니까, 국정원 요원이기라도 합니까. 그놈들이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도사님들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걸요?”

박천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날 쳐다보았다.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나. 그쪽 놈들 대부분이 일반인이라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 온 덩치 좋은 젊은 놈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놈들에겐 귀면들이 있다.

놈들을 만든 무학 도사와 굶주린 들짐승과 다를 바 없는 귀면들을 능숙하게 조종하는 새끼 도사가 있다. 전력으로 따져 본다면 당연히 그쪽이 우리보다 낫다.

“노노. 버니, 토끼 아니에요. 놈들, 타이거예요. 타이거.”

듣고 있던 봉이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형, 형! 타이거, 호랑이! 맞죠?”

빈 종이컵을 한 아름 안고서 동수가 해맑게 웃었다. 난 코웃음을 치며 동수 녀석의 닭 벼슬처럼 빳빳하게 세워 올린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놈은 머리 모양 망가진다고 짜증 섞인 괴성을 내질렀다.

“술 마시러 가자, 술! 이런 날은 알탕에 소주를 마셔 줘야지!”

노금영이 짜악짜악 손을 마주쳐 소리를 내며 또 사람들을 선동한다. 술 얘기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저 새끼 또 저런다. 이런 얼굴로 노금영을 바라보는 백단영도 결국은 마지못해 끌려가서 술을 물처럼 퍼마시게 될 거다.

“야, 임똘추. 그때 네가 데려갔던 술집으로 형님들을 안내하거라.”

노금영이 친근하게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형도 어딘지 알잖아요. 전 오늘 볼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갑니다. 형들끼리 가서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뭐? 또? 너 사실 우리를 버리고 쭉쭉 빵빵 한 여대생 애인 만나러 가는 거지! 진짜 너무하다, 너.”

“뭐? 형 여자 친구 있어요? 그것도 여대생? 우와아, 이런 식으로 배신을 때려 버리시네.”

노금영과 기식이가 쌍으로 실망을 표출했다. 멋대로들 생각해라. 너희들 버리고 내 갈 길 가는 날 실컷 욕해도 된다. 난 손만 가볍게 흔들어 인사하고는 서둘러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마침 사무실 건물 앞을 지나던 빈 택시를 잡아탔다. 차창 밖으로 뒤늦게 따라 나온 동수 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 나간 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자 동수 놈은 바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난 바로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

*

“명진 형은 바빠서 오늘 못 온댔어.”

진기가 맥주병을 내밀며 말했다. 클럽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형, 그때 같이 나갔던 리키, 걔하고 나가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레슬링이라도 했어? 그 새끼가 머리통에 붕대 칭칭 감고 와서 형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지랄 지랄을 하던데.”

“그 자식이 뭐래?”

“형이랑 형 애인이 짜고서 자기를 죽여 버리려고 했다던데? 이 새끼가 웬 미친 개소리를 하나 싶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진짜 그 새끼를 죽여 버리려고 했어?”

“아, 진기야. 오늘…….”

“오늘, 뭐? 오늘 가게 분위기 죽인다고? 그렇지? 엄청나.”

음악 소리가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게 분위기 따위가 아니라, ‘왔냐? 내 새끼 스토커?’ 하고 묻고 싶었다. 테리 놈이 분명히 그 자식한테 연락을 했을 텐데.

하긴 진기가 그걸 어떻게 알까. 난 맥주병 마개를 열어 술을 들이켰다.

쇼가 시작되었다. 나체에 가까운 댄서들이 무대 위에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취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발광했다. 끽끽거리는 원숭이 떼와 다름없었다.

잔뜩 흥분해서 환호하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난 하얀 점 하나를 발견했다.

검은 도화지 중간에 난 구멍처럼 모자를 뒤집어쓴 녀석의 하얀 얼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저놈이다. 내 새끼 스토커라는 새끼.

하얀 얼굴이 몸을 돌리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난 몸을 움직여 사람들을 헤치며 걸어 나갔다. 방금 전 사라졌던 하얀 얼굴이 다시 저 앞에 나타났다. 얼굴이 자세히 보일 법도 한데 보이지가 않는다.

흥분한 황소 같은 사내놈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죄송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주위가 워낙 시끄러워 내가 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터였다. 누군가의 발에 걸려 내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덕분에 앞에 선 덩치 큰 사내놈의 가슴팍에 끌어안기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미안,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난 씩 웃어 보이며 사내놈에게 사과했다. 몸의 중심을 잡아 보려고 안겨 들었던 사내의 두툼한 가슴팍에 손을 대고 서 봤다. 하지만 앞의 놈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지르며 방방 뛰는 바람에 또 몸이 휘청거리고 만다.

내가 넘어지지 않게 날 부축한 사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지껄이며 손으로 내 허리를 감쌌다.

붉은 머리칼을 한 불곰 같은 사내가 느끼하게 웃으며 날 안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자기에게 안겨 든 것이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그런 게 아니라…….”

사내가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혀를 내밀어 내 뺨을 핥았다. 아래에 놈의 발기한 성기가 닿았다.

빠악! 소리와 함께 갑자기 불곰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놈이 얼굴을 움켜쥐고서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쥔 놈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길고 날씬한 누군가의 몸이 내 시야를 가렸다. 갑자기 나타나 불곰의 얼굴을 후려친 놈의 손에는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피비린내에 내가 다친 것도 아닌데 현기증이 일었다.

불곰이 젊은 놈에게 욕이 분명한 소리를 지껄였다. 이마 한쪽이 길게 찢겨 있다. 젊은 놈은 서양 불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불곰도 반격을 했다. 하지만 이마의 상처 때문에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지 불곰의 주먹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휙휙 갈랐다. 젊은 놈이 한 손으로 불곰의 목을 움켜잡고 피가 말라붙기 시작한 흉기를 쳐들었다.

구경꾼들이 비명을 질렀다. 경악에 찬 얼굴로 수군거리고들 있지만 그 누구도 용기 있게 튀어나오지 못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치뜨고서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는 젊은 놈은 광분한 연쇄 살인마처럼 보였으니까.

난 광분한 짐승 같은 놈을 뒤에서 덮치듯 끌어안았다. 팔의 근육을 이용해 놈을 단단히 끌어안고 협박을 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나민. 그만해, 새끼야.”

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기 등딱지에 달라붙은 날 쳐다보았다.

“그만 좀 해, 제발.”

내 목소리도 떨렸다. 표정이 흉하게 구겨졌다. 놈의 눈에는 내가 애원하는 것처럼 보일 거다. 사실 애원하는 게 맞다. 제발 미친 짓 좀 그만하라고 울면서 뜯어말리고픈 심정이었다. 녀석이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서양 불곰을 놔주었다. 쳐들어 올렸던 흉기 쥔 손도 툭 떨어뜨린다. 난 얼른 놈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로 칼 손잡이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해요. 왜 내 앞에서 다른 새끼들이 형 몸을 만지게 해요?”

녀석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이런 짓을 하고서 왜 울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람들을 뚫고 김명진과 진기가 달려 나왔다. 쌔액쌔액 심상치 않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서양 불곰을 발견한 김명진이 진기에게 소리쳤다.

“당장 119 불러! 119! 그리고 동추 넌 얼른 그 새끼 휴게실로 데려가. 너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하자, 새끼야.”

김명진이 내 어깨에 기대서 아직도 질질 짜고 있는 나민이의 머리에 수건을 덮어씌우고는 내 등을 떠밀었다.

나민이는 휴게실에 들어온 후에도 꽤 오랫동안 훌쩍거렸다.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는 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녀석은 진짜 울고 싶어서 울고 있는 거다.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럽고 슬퍼서. 한참을 훌쩍거리는 걸 지켜보다가 휴게실 안쪽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씻고 나왔다. 그제야 녀석은 울음을 멈추고서 소파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다 울었냐? 정작 울고 싶은 건 누군데.”

난 나민이에게 물에 적신 타월을 던졌다. 받아 든 타월을 부어터진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

옆에 앉아서 타월을 손에 들고 녀석의 얼굴을 벅벅 닦아 주었다. 잘생긴 얼굴이 아주 엉망이 됐다. 닦아 주는 손길을 은근히 느끼며 얌전히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걸 보니 말 잘 듣는 아기 같다. 시뻘게진 콧날을 붙잡고 “자, 코도 풀어야지. 흐응, 해. 흐응!” 애에게 하듯 하자 녀석은 신경질을 냈다.

“애 취급 하지 말아요. 전 애가 아니에요.”

“애가 아니긴. 애가 아닌데 징징거리며 우냐?”

녀석의 고운 아미에 주름이 졌다. 하는 짓은 영락없는 애새끼인 주제에 그런 말은 듣기 싫은 모양이지. 갑자기 뼛속까지 사무치는 한기가 엄습했다. 부르르 떨며 팔로 몸을 감싸자 나민이가 꼼지락대면서 점퍼를 벗어 주었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거, 어떻게 알고 왔냐?”

점퍼를 꿰입으며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었지? 내가 클럽에 올 때마다 넌 테리 놈의 연락을 받았던 거야. 내가 널 클럽에서 처음 봤던 그때도 연락을 받고 온 거였어. 일부러 내 앞에서 알짱댄 거야. 넌 네 자신이 내 취향에 딱 맞는 얼굴을 하고 있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재밌냐? 날 이런 식으로 우롱하는 거?”

나민이는 울어서 발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난 바보가 아니다. 너 같은 어린애 따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멍청한 놈이 아니란 소리야. 사랑에 눈이 멀어 바보같이 이용만 당하던 건 어릴 때 얘기지.”

녀석의 하얀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날 쳐다보는 눈동자 속에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혼란스러워요.”

한참 만에 녀석의 입이 열렸다.

“내 안에서 형을 좋아하는 나, 형을 미워하는 나. 검은 놈과 하얀 놈, 두 놈이 치열하게 싸워요. 그래서 요즘 늘 머리가 아파요. 힘들어요.”

검은 놈과 하얀 놈. 놈은 자신 안에 두 마리 짐승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얀 놈은 나를 좋아할 테고 검은 놈은 나를 미워하는 괴물일 것이다. 녀석의 머리 위로 피어오른 하얀색과 검은색의 연기가 어지럽게 뒤엉키는 게 보이는 듯했다.

“다시는 이런 데 오지 마세요.”

“날 가둬 놓고 사육이라도 할 셈이냐?”

녀석이 픽 웃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농담이 아니다. 진심이다, 이 자식.

한나민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밀어붙였다. 나를 소파 위에 눕히고는 자기 몸으로 나를 단단히 짓눌렀다. 내가 놈의 품 안에서 바르작대자 놈은 귀를 잡아당겨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반항하지 말아요. 나 지금 완전 미쳤으니까.”

“미쳤냐. 남의 가게에서. 여기 대학 선배가 하는…….”

놈이 옷자락을 끌어 올려 손가락으로 추위에 질려 꼿꼿하게 서 있는 내 유두를 꽈악 잡아 비틀었다. 녀석은 다시 입술을 갖다 댔다. 혀가 입천장을 샅샅이 핥고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내 혀뿌리를 빨아 당겼다. 혀뿌리가 뽑힐 것 같은 압박감에 나는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쉬이 쉬이잇, 자꾸 반항하면 좋은 꼴 못 볼 거야. 협박이라도 하는 듯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놈이 서둘러 내 바지춤을 풀어 팬티를 끌어 내리고 드러난 성기를 움켜쥐었다. 공들인 애무고 뭐고 없이 세게 잡아 쥐어흔들기만 한다. 정액 배출만이 목적이기라도 하듯.

난 꼼짝도 하지 못하고서 헉헉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성기를 쥔 손바닥에 힘이 가해져 허리춤을 바르르 떨기만 해야 했다. 허우적대던 팔로 녀석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성의라고는 하나 없는 손동작만으로도 난 절정에 달했다.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지며 꼬리뼈에 힘이 들어가더니 녀석의 손바닥에 뜨거운 액을 왈칵 쏟았다.

“엄청 진하네요. 형도 꽤 쌓였나 봐요.”

녀석이 낮게 속삭이며 자신의 젖은 손가락 끝을 살짝 핥았다. 방금 전 사출했음에도 아랫배가 다시 뜨거워졌다. 쌓이긴 했다. 그동안 정신없이 바빠서 자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젖은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더듬는 게 느껴졌다. 깃털로 간질이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

내 딴에는 제법 힘겹게 말을 꺼낸 것인데 녀석은 “그런가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에 푹 꽂았다. 안으로 파고드는 이물감에 소파 등받이를 움켜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 형을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지껄이며 녀석은 바지 지퍼를 열어 발기한 자신의 물건을 끄집어내 다리 사이에 조준했다.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딱딱한 살덩어리가 몸 안으로 꽂혀 들어왔다. 꼬챙이로 찌르듯 단숨에 힘을 주어 푸욱 꽂아 넣는다. 익숙한 감각. 하지만 익숙하기에 더 지랄맞은 이 느낌.

녀석은 앙다문 내 입술 위를 할짝거렸다. 위로하듯, 애무하듯, 부드럽고 말랑한 키스와는 달리 몸속에 파고든 녀석의 성기는 불기둥처럼 뜨겁다.

어때요? 좋아요? 평소처럼 안달이 나서 묻지 않는다. 키스하며, 간헐적으로 떨리는 내 턱을 핥으며 말없이 내 허리를 끌어안아 더 깊숙이 파고든다. 이상하다. 녀석의 손은 차가운데 몸은 뜨겁다. 녀석의 것을 받아들인 항문이 작열감을 호소했다. 빨리 실컷 흔들다 싸고 빼 주면 좋을 텐데 놈은 쑤셔 넣은 상태 그대로 날 끌어안고만 있다. 마치 자신의 물건에 맞게 내 항문 크기를 맞추듯이.

난 숨을 내쉬었다 들이마시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더러운 형광등. 한쪽 구석에 퍼런 곰팡이가 핀 하얀 표면. 눈앞에 녀석의 까만 머리칼이 살랑인다. 난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녀석의 동그란 뒤통수에 갖다 댔다. 보드라운 머리칼 사이로 따뜻한 두피가 만져진다.

마음은 사랑에 굶주린, 비뚤어져도 아주 비뚤어진 어린애. 몸은 더없이 훌륭한 성인.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 존재인가, 이 녀석은. 목 언저리에서 풍기는 옅은 살냄새. 난 녀석의 매끄러운 목에 입술을 갖다 붙였다. 그러자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날 보는 까만 눈동자가 슬퍼 보인다. 애절한 감정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다.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한나민.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네가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도 이런 네 얼굴을 보니 가슴이 떨린다. 네게서 풍기는 살냄새가 좋다. 내 안에 파고든 네 훌륭한 성기까지도. 녀석이 손등으로 내 얼굴을 쓸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녀석의 손등에 키스했다. 입술 끝에 닿는 하얀 손등이 뱀의 피부처럼 차갑고 매끄럽다.

끼이익, 휴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누군가는 안에서 벌어진 낯 뜨거운 상황을 보고는 “죄송합니다. 하던 거 마저 하세요” 당황한 목소리로 사과하고는 나갔다. 진기의 목소리다.

“형, 이젠 다신 여기 못 오겠네요.”

녀석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 가게는 망해서 오지도 못한다.

“이런 데 오지 마세요. 싫어요.”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녀석이 천천히 허리에 힘을 주었다. 녀석의 것이 안으로 더욱더 깊게 파고들었다. 불기둥 같은 살덩이가 조금씩 내벽의 길을 트고 진입하는 생생한 느낌에 찌르르한 감각이 꼬리뼈에서부터 척추까지 타고 올라왔다.

녀석은 떨리는 내 목에 이를 박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뜨거운 숨을 깊게 내쉬면서. 퍽퍽 기절할 듯이 박히기만 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쾌감이, 야릇한 신음이 되어 벌어진 입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녀석은 내 입에서 새어 나온 신음을 자신의 입술을 짓눌러 삼켰다. 떨리는 내 입술을 빨며 녀석이 다시 천천히 성기의 반 정도만 잡아 빼더니 있는 힘껏 푸욱 처박았다. 불기둥이 내 몸속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자극 점을 찔렀다. 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콧소리를 내며 목을 크게 뒤로 젖혔다. 저절로 다리가 활짝 벌어지고 허리춤이 잘게 경련했다.

녀석이 본격적인 추삽질을 시작했다. 녀석의 물건은 한 번도 빠져나가는 법 없이 반 정도 나왔다가 다시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퍼억퍼억, 로맨틱하지 못한 마찰음이 연이어 터졌다. 내 입에서도 교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비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 그만…… 으읏! 아, 아파. 흐으으…….”

나중엔 애원의 소리가 흐느끼는 소리로 변했다. 내 성기에서 뿜어져 나왔던 체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던 항문은 어느새 메마른 논처럼 말라붙어 쾌감이 아닌 고통만 선사했다. 녀석의 물건이 뿌리 끝까지 처박힐 때마다 눈꼬리에 고였던 눈물이 흘러 사방에 흩날렸다.

이윽고 녀석이 날 끌어안은 채로 등허리를 부르르 떨며 자신의 성기를 끄집어내 정액을 분출했다. 사정 직전 성기를 빼낸 것은 녀석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채 닫히지 않고 벌름대는 구멍을 적신 녀석의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고통과 쾌감이 뒤섞인 아찔한 감각의 여운에 난 눈을 감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차가운 녀석의 손이 한껏 벌어져 오므라들 생각을 않는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가라.”

입 밖으로 나온 내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꼴도 보기 싫어. 꺼져.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당장.”

쉬어 터진 목소리로 녀석을 보지도 않고서 매정하게 쏘아붙였다. 허벅지를 쓰다듬던 차가운 손의 감촉이 사라졌다. 귓속에 부스럭거리며 녀석이 옷을 챙겨 입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이렇다 할 행동도 취하지 않고서 나갔다. 나를 이 꼴로 남겨 둔 채로.

씨발. 한숨과 함께 욕을 내갈기며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동추 형.”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진기 놈이 들어왔다. 문밖에서 그 추한 소리를 다 들었단 말이지. 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바지춤을 움켜쥔 채로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형, 괜찮아?”

진기가 눈치도 없이 따라 들어왔다. 내가 화장실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놈은 바지를 끌어 내려 물에 적신 수건으로 체액이 달라붙은 다리 사이를 닦고 있는 날 보고는 “아, 미안” 사과하며 돌아섰다.

“그나저나 형, 사람 좀 가려 사귀어라. 테리 놈이 그러는데 저 새끼라며? 그놈한테 돈 주고 형이 오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던 자식. 리키 새끼 머리통 터뜨린 새끼도 저놈 맞지? 사람 머리통 터뜨리고 칼 휘두르고 스토커질이나 하고. 대체 저딴 정신병자 같은 새끼랑 왜 사귀는 건데? 혹시 협박당하는 거면…….”

“좋아하니까.”

가만 내버려 두면 끊임없이 떠벌릴 진기 놈의 말을 잘랐다. 돌아서 있던 진기가 고개를 돌렸다.

“형, 미쳤어? 저 새끼, 안 무서워? 한 번 눈 돌아가면 뵈는 게 없는 놈 같던데. 형한테 폭력 쓰거나 하지 않아? 아까 한 것도 억지로 한 거 아니었냐고.”

“몰랐냐? 나 이 클럽에 드나들 때부터 제정신 아니었다는 거.”

“뭐 확실히 정상은 아니긴 했어도. 근데 형,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사랑의 힘이었지. 한 번 깔리다 보니 계속 깔리게 되더라고. 해 보니 내가 하는 것보다는 당하는 게 더 좋기도 했고. 아마 내가 저 녀석 못 끊어 내는 건 속궁합 때문일지도 몰라. 저 자식, 생긴 거와는 달리 테크닉이 끝내주거든. 종마가 따로 없어.”

“미쳤다, 미쳤어. 웃음이 나오냐?”

진기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미쳤다. 웃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

“에휴. 참. 내가 남의 연애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도 아니고. 됐다, 됐어. 자기 인생 자기가 말아먹는 거지. 2번 로커 보면 안에 여벌 옷이랑 새 속옷 있어. 그리고 말인데, 형. 이제 보니 엉덩이 참 예쁘다. 언제 나랑 한번 할래? 난 확실하게 콘돔 쓰고 부드럽게 안아 줄게.”

난 헛소리를 해 대는 진기 놈에게 변기 위에 비치된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 던졌다. 나민이가 없어서 다행인 줄 알아라. 그 얘길 녀석이 들었으면 너도 머리통 터져서 ‘119!’를 외쳤을 거다. 진기가 낄낄대며 화장실 문을 닫고 나갔다.

난 다리 사이를 닦던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세수를 했다. 대충 땀에 젖어 있던 얼굴을 씻고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 붉어진 뺨. 불그스름해진 눈가. 섹스 후의 여운에 젖어 묘한 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이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자 방금 전까지 녀석의 물건이 들어와 있던 항문이 벌름거렸다. 어째 구멍이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고 녀석의 물건 크기만큼 벌어져 있는 듯한 느낌에 손가락 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엉덩이 사이는 여자의 음부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손가락 끝이 닿았을 뿐인데도 음란한 구멍이 살짝 입을 연다. 이 구멍에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있던 성기의 느낌. 난폭하게 내벽을 휘젓던 뜨거운 흉기. 복부 아랫부분이 기분 좋게 쑤셨다. 새까만 음모 아래로 늘어진 성기가 또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난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비웃으며 속옷과 바지를 끌어 올렸다.

*

*

덕진이가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때에도 한번 본 적이 있는 멍게와 주근깨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애들을 근처 피자 가게로 데려가 먹고 싶은 거 다 시키라고 하자 녀석들은 진짜로 이거저거 아무거나 막 시켰다.

멍게가 먼저 나온 콜라를 쭉쭉 빨아 마시며 입을 열었다.

“네. 선생님 말씀대로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람들이 놈들을 처리할 거라는 소문을 흘렸어요. 그런데 선생님, 그거 소문이 아니에요. 진짜로 다른 애들이 그놈들을 신고한 거예요.”

“그래. 알아. 하지만 일진 클럽 놈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 아냐.”

“그렇죠. 사실 모르고 있다가 습격당해야 재밌는 건데. 이렇게 해도 그놈들을 처리해 주는 게 확실하죠?”

멍게 옆에 있던 주근깨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왕거머리보다도 더 징글징글한 일진 놈들을 일시에 쓸어버릴 기회가 날아가 버릴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걱정 마. 그 일은 확실히 처리할 테니까.”

우리가 아니라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그놈들이. 금형 고등학교 일진 클럽의 멤버는 총 스물세 명. 원래는 스무 명이었는데 그새 세 명이 늘었단다. 두당 40만 원이니 그놈들을 신고한 애들은 거의 천만 원 가까운 돈을 풍문위 놈들에게 입금한 셈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 짓을 해서 벌어먹고 살려면 확실히 맡은 일을 처리해야 할 터.

“그 새끼들, 풍문위 형들이랑 한판 뜰 거라고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어요. 다른 학교 일진 놈들도 끌어들이고 있대요.”

“우리 학교 일진 짱도 거기에 낀다더라?”

덕진이가 멍게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얘들아, 내가 말한 대로 소문을 흘린 것 맞지?”

“네. 우리 반에 소문 실어 나르는 촉새 새끼 한 마리가 있어요. 점심시간에 일부러 그 새끼 옆에 가서 애들이랑 그 얘길 했죠. 그랬더니 바로 다음 날 온 학교에 소문이 퍼져 있더라고요.”

“그래. 잘했다.”

멍게가 씨익 웃으며 피자 두 조각을 돌돌 말아 동시에 입 안에 욱여넣었다. 순식간에 피자 한 판이 사라졌다. 저 자식들은 사람인가 식신인가.

“언제 전쟁이 터질지는 모르세요?”

주근깨가 소스 묻은 손가락을 쪼옥쪼옥 빨며 물었다.

전쟁이라. 난 속으로 웃었다.

금형 고등학교 일진 클럽. 일진 짱들끼리의 싸움에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는 ‘인간 지뢰 김형태’란 놈이 우두머리로 있는 20여 명 정도로 구성된 집단. 놈들은 웃기게도 인터넷 블로그까지 운영하며 자신들의 활약상을 낱낱이 기록해 놓았다. 그 활약상이란 게 애들 용돈 뜯어내는 수준이 아니라 성인 범죄 뺨을 쌍으로 칠 정도로 악질적인 것들이다. 또래 애들 삥이나 뜯고 커터 칼 들고 설치던 박하신과 패거리 정도는 귀여운 수준인 것이다.

더 가관인 건 놈들은 나름의 팬 층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도 형님들처럼 멋진 사나이가 되고 싶다는 중학생, 형태 오빠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XX 여고에 다닌다는 여자애, 싸움 잘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고2, 너희가 진정한 터프가이라며 치켜세우는 놈들. 그 자식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온갖 정신 나간 애새끼들이 득시글댔다.

“일짱모에서도 난리가 났어요.”

“일짱모? 그건 또 뭐래?”

“전국 일진 짱들의 모임이라는 사이트가 있거든요.”

어이구. 일진 짱님들께서 모임까지 만들어서 서로 교류하고 있습니까? 왜, 아예 전국 일진 짱 배틀 대회라도 열어서 전국 최고의 짱이라도 뽑지 그러냐.

“다들 몰려와서 우리의 주적을 때려잡자고 지랄을 떨고 있어요. 한판 붙는 날이 언제인지 알려지면 전국에서 관광버스라도 대절해서 몰려올 기세예요. 주적이라니. 북한도 아니고.”

“아니, 잠깐. 그건 좀 곤란한데. 그렇게 되면 판이 너무 커지잖아.”

“안 그래도 김형태가 이쪽 애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잘라 냈어요. 쪽수로 밀어붙이는 건 치사하다면서요.”

얼씨구. 그래도 그놈이 쪽팔린 게 뭔지는 아는구나. 난 식신들에게 남은 음식을 모두 뺏기기 전에 피자 한 조각을 들었다. 애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멍게가 캠코더를 들고 그놈들이 풍문위 형들한테 박살 나는 장면을 찍으러 갈 거라고 지껄이자 주근깨는 방송국에 제보하자는 말을 꺼냈다. 덕진이와 멍게는 주근깨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얘들이 왜 이러나. 방송국에 제보라니. 누구 인생 말아먹는 꼴 보려고.

“그런 짓은 하지 마. 방송에 나왔다간 풍문위 그놈들, 다 경찰에 잡혀간다. 그놈들 불법으로 영업하는 거거든.”

신나서 떠들던 놈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애들은 놈들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부모도, 선생도, 경찰도 해결해 주지 않는 학교의 암 덩어리를 말끔하게 제거해 주는 영웅.

“혹시 너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애들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해 줘.”

“그런데 정말 결행일이 언제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선생님 아는 사람이 풍문위 관계자라면서요?”

아는 형 동생이 그 사이트 운영자와 어울려 다니다 가출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출이 아니라 그 사이트를 운영하는 업체에서 일을 하더라, 아는 형 동생이 나한테 술을 사 주면서 부탁 좀 해도 되냐고 묻더라, 알고 지내는 애들한테 우리들의 다음 목표는 금형 고등학교 일진 클럽이라는 말을 흘려 달라, 미리 소문을 흘려서 그놈들이 뭉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놈들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이런 순서로 애들에게 말을 전했더랬다.

애들은 내가 술술 내뱉는 거짓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었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학교에 가서 소문을 퍼뜨렸다. 예상했던 대로 똥개 새끼들은 똘똘 뭉쳤다. 한데 뭉쳐서 전의를 불태우며 풍문위 놈들과 맞붙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아마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은 일진 클럽 놈들을 한 놈씩, 혹은 두세 놈씩 천천히 처리하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알 게 뭐냐. 그놈들 사정 따위 알 거 없다. 우리들의 계획대로 되려면 일진 클럽 놈들이 한꺼번에, 한자리에 모여 줘야 했다. 적개심만 가득한 데다 무서울 게 없는 어린놈들은 훌륭한 체스 말들이 되어 줄 터다.

체스 판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신의 손’은 쓸모가 없게 됐다.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 앞에 늘어선 체스 말들을 물리치고 킹을 쳐야 한다. 놈들에겐 귀면들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비장의 카드인 임충식의 머리뼈가 있다. 우리는 이 임충식의 머리뼈를 이용해 상대편의 ‘킹’을 수면 밖으로 나오게 할 것이다.

일격에 끝장을 본다. 그게 우리들의 계획이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 무학 도사는 더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들을 옥죄어 올 게 분명하다. 그 영감은 그대로 놔두면 서서히 자폭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까지 끌어안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을 인간이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분명히 당한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폭발의 화염에 휘말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쓰러지게 될 것이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 그 녀석이 우연히 엿듣게 됐는데 그놈이 다음 주 금요일요? 이러는 소리를 듣긴 했어.”

녀석들이 피자를 먹다 말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1주일 정도 남은 셈이다. “저 화장실에 좀…….” 멍게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덕진아. 하신이 요즘 학교에 나오냐?”

“아뇨. 그 자식 전학 갈 거라는데요? 하긴 나라도 쪽팔려서 다시 못 돌아오지.”

덕진이는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선생님, 진짜 과외 안 하실 거예요? 저 이제 고3 되잖아요. 엄마가 과외비가 얼마가 나와도 좋으니까 선생님을 단단히 붙잡으래요.”

“선생님이 요즘 정신없이 바빠서. 나중에 일이 좀 해결되면 연락할게.”

덕진이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일어섰다. 두 녀석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날 바라본다.

“계산은 하고 갈 테니까 너희들끼리 먹고 가라.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맙고. 수고했다.”

이번에도 덕진이만 벌떡 일어서서 고개를 깍듯하게 숙여 인사했다.

화장실 가는 길목에서 멍게가 핸드폰을 붙잡고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까 내가 말한 얘기를 친구에게 떠벌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소문이란 놈은 고추 끝에서 나오는 오줌 줄기보다 더 빠르게 흐른다. 소문이 흐르고 흘러 풍문위 놈들을 통해 무학 도사의 귀에 들어가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길을 걷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혜 도사다.

“뭐 하느라 아직 안 올라오십니까? 강원도에 애인이라도 숨겨 두셨나.”

[뒤돌아보지 말고 바로 큰길로 달려가서 택시를 잡아타요.]

농담을 던졌는데 돌아오는 건 차가운 반응이다.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낮술이라도 드셨어요?”

[뒈지고 싶지 않으면 제 말대로 하시죠.]

정혜 도사의 목소리에선 서슬 퍼런 살기마저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굽혀 앉아 신발 끈을 매는 척하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에서 퀵 서비스 업체 상호가 붙은 오토바이 헬멧을 쓴 젊은 놈이 발끝으로 벽을 툭툭 치며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검은 패딩 점퍼에 검은 헬멧. 신고 있는 신발까지 까맣다. 본능이 삐뽀삐뽀 사이렌을 울렸다.

[택시를 타고 XX동 장미 아파트로 가세요. 아는 동생이 승합차 한 대를 내줄 겁니다. 그거 타고 강원도로 내려오세요. 지금 당장요.]

불길한 예감이 가시 돋친 쇠사슬이 되어 전신을 휘감았다. 난 천천히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넣고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전화 통화를 하던 검은 놈도 뛰기 시작했다. 난 숨도 쉬지 않고 큰길로 달려가 막 손님을 내려 주고 지나가려는 빈 택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

*

평일 오후라 강원도로 가는 영동 고속 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정혜 도사가 알려 준 곳은 예전에 두레 식당과 민박집이 있던 동네였다. 잡초로 둘러싸인 좁은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렸다. 철조망을 몇 겹을 꼬아 만든 문 앞에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노란 테이프가 걸려 있었고, 경찰 두 명이 테이프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문 바깥쪽에서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서서 수군대고 있었다.

폴리스 라인. 범죄 현장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게 막아 놓은 테이프.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꽤 추운 날씨인데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철조망 문 안에서 걸어 나온 정혜 도사가 나를 맞아 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까 그 전화는 뭡니까?”

“그 얘기는 나중에 해요.”

화장기 하나 없는 파리한 얼굴을 한 그녀가 조용히 나를 노란 테이프 안으로 잡아끌었다.

“살인 사건이라도 났답니까? 이건 또 무슨 난리래요?”

“땅속에 파묻혀 있던 시체가 발견됐어요. 땅 주인에게 돈을 좀 쥐여 주고 흙을 퍼 가도록 허락을 받아서 열심히 땅을 팠는데, 시체가 든 마대가 발견된 거죠.”

정혜 도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현장에서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시체를 봤을 텐데도 겁에 질려 있지도, 당황한 기색조차 느껴지지도 않았다.

“임충식의 부하들의 시체요? 아니지. 그 시체들은 무학 도사가 귀면으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럼 그건 누구의 시체였답니까?”

“7년 전 산속에서 실종됐던 심마니들이라고 하더군요. 얼굴 형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신원을 확인하는 게 쉬웠습니다. 졸지에 땅 주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었고요.”

7년 전이라는 숫자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혜 도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체는 거의 썩지 않았어요. 7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요. 그리고 땅속에서 시체들이 들어 있던 마대를 발견하고 입구를 열었을 때. 시체가 제 손목을 잡았어요.”

갑자기 어디선가 삭풍이 불어닥치는 듯했다. 식은땀이 흐르던 몸이 급격히 식었다. 정혜 도사의 어깨 너머로 뻥 뚫린 구덩이 앞에 놓인 검은 방수포에 싸인 두 개의 덩어리가 보였다. 형광 초록색 비닐 옷을 입은 국과수 관계자들이 현장 검증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대청마루에 늘어져 앉아 경찰과 얘기 중인 머리가 훌렁 벗겨진 저 중년 남자는 땅 주인일 터였다.

“시체는 살아 있었단 얘기로군요.”

누가 들으면 정신 나간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시체가 살아 있다니.

“실패한 귀면인 거죠. 무학 도사는 그 사람을 죽여 신선한 육체를 손에 넣었지만 그걸로 귀면을 만들지는 못한 겁니다. 실패했으니 가차 없이 버린 거겠죠.”

“하지만 땅속에서 꺼낼 때까지도 살아 있었다면서요.”

“한번 몸속에 들어갔던 혼의 기운이 남아 숨만 겨우 붙어 있던 것뿐입니다. 제 손목을 붙잡은 시체는 제가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다시 죽어 버렸습니다. 경찰 말로는 7여 년 전에 이 주위에서 등산객들 몇 명도 실종된 상태라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시체가 더 있다는 얘기겠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해서 버려진 귀면들 말입니다.”

무학 도사는 단숨에 지금의 귀면들을 만들어 낸 게 아니었다.

딸, 아니, 한때 사랑했고 자기 아이까지 낳은 여자가 무참히 살해당한 뒤 무학 도사는 완전히 미쳐 버려서 들짐승처럼 산속을 헤매 다녔다고 했다. 미치광이 도사가 그런 끔찍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낸 것이 지금의 귀면이다.

“제 생각은 이래요. 일전에 놈들이 불태워 없앤 귀면 두 마리. 미림이를 겁탈한 펜션 집 부자였다고 했죠? 그놈들도 실험용 쥐였을 거예요. 그런데 운 좋게 그놈들의 시체를 이용한 실험은 성공한 거죠. 아마 그놈들도 실패작이 되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을 겁니다.”

“그 말은 더 많은 귀면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아뇨. 쓸 수 있는 혼은 모두 열한 개. 열한 마리의 귀면들만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좋은 대학 나오셨으니 산수 잘하실 테죠? 자, 계산해 보세요. 열한 개의 혼, 열한 개의 시체. 그런데 두 개의 시체가 사라져 없어졌죠. 그럼 이제 몇 개의 혼과 몇 개의 시체가 남았을까요.”

난 미간에 힘을 주었다. 아마 내가 하버드, 예일대를 나왔어도 이 여자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을 거다.

“시체는 아홉 마리. 혼도 아홉 개가 남았을 테지요.”

“땡입니다. 시체 두 개는 사라졌지만 혼은 여전히 열한 개예요. 그런데 아홉 개의 혼은 아홉 개의 시체에 봉해져 있으니 두 개의 혼은 자유라 이겁니다.”

“그럼 두 개의 혼을 가지고 두 마리의 귀면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두 마리의 귀면 중 한 마리는 임동추 씨, 당신이 될 거였고요.”

정혜 도사가 오늘 만난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 누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갈긴 듯했다.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내가 귀면이 될 거였다고?

“아직 서울에 있었다면 당신은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 시체는 무학 도사의 작업장으로 옮겨졌겠지요.”

“잠깐만요.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고…….”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저 앞에 보이는 검은 방수포 속에 든 시체들. 실종된 등산객들. 무학 도사는 개미 새끼 눌러 죽이듯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다. 그 영감에게 있어 죽은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실험용 쥐였을 것이고 나 역시 실험용으로 선택된 것이다.

“어째서 날 선택한 거랍니까?”

“당신은 젊고 튼튼하잖아요.”

“널리고 깔린 게 젊고 건강한 사내놈들 아닙니까.”

“살아 있는 상태로 악령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젊은 사내가 흔하지는 않죠. 무엇보다 무학 도사에겐 당신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흔들리고 있으니까요.”

“누가요? 누가 흔들린단 말입니까?”

질문을 했지만 답을 들을 순 없었다. 경찰들이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내게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나를 슬쩍 뒤로 밀어내고는 정혜 도사를 에워쌌다. 저절로 뒤로 밀려난 나는 멀뚱히 서 있기도 그렇고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에 가까이 가 보고 싶었지만 경찰 한 명이 증거 훼손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며 날 저지했다. 그 사람은 내가 허튼짓을 할까 봐 도끼눈을 뜨고 날 지켜봤다.

하는 수 없이 짖을 생각도 않고 얌전히 누워 있는 개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내가 다가가자 벌떡 일어나 혀를 내빼물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빳빳하고 거친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총각, 총각”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리번거리다 담벼락 위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있는 노파의 얼굴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노파는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민박집 할머니였다.

“역시 총각이었네!”

“안녕하세요, 할머니. 잘 지내셨지요?”

“나야 잘 지냈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장에 다녀오시는지 할머니의 손에는 파 뿌리가 비죽이 솟아 나온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도사라는 아가씨랑은 무슨 사이야?”

“일 관계로 만난 분이에요. 저희가 그런 분들이랑 자주 일을 하거든요. 여자분 혼자서 이번 일을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남자 직원을 내려보내 달라고 하셔서.”

응, 그래? 고생 많구먼. 할머니는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리며 비닐봉지 안에서 귤을 꺼내 건넸다. 마침 목이 탔던 터라 얼른 귤껍질을 까서 입에 넣었다. 귤이 아주 달고 맛있었다.

“이 땅 주인이 사람을 죽인 거래?”

할머니가 봉지에서 귤 하나를 더 꺼내 주었다.

“아직 확실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7년 전쯤에 죽은 시체라던데요? 타지에 살던 집 주인이 이곳에 이사 온 게 작년인가 재작년이라면서요.”

“그렇지. 저 양반이 여기서 터 잡고 산 게 올해로 딱 2년 됐어. 7년 전이라면 두레 식당집 영감이 한 짓이겠구나.”

노파는 바로 범인이 무학 도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난 대답 없이 입을 오물거려 귤만 씹었다.

“그럴 줄 알았어. 총각도 미쳐서 산속을 헤매던 그 영감탱이 눈을 봤어야 해. 사람 잡아먹는 짐승 눈이 그래. 눈에서 섬뜩한 살기를 뿜지. 눈이 퍼렇게 빛나. 그런 눈을 하고서 하루 종일 산속을 쏘다니고 밤이 되면 기어 내려왔지. 그때에도 내가 아들한테 얘기했던 적이 있어. 저 영감 곧 큰일 낼 거라고.”

할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바늘처럼 내 가슴을 쿡쿡 찔러 댔다. 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억지로 쥐어짰다. “어우, 날씨가 왜 이리 춥나” 발을 동동 구르며 지껄이면서.

“두레 식당집 애 사진 말인데.”

한참을 날 쳐다보던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아, 네. 사진이 있던가요?”

“아니. 걔가 워낙 사진 찍는 걸 싫어해서 없더라고. 대신 미림이를 찍은 사진은 있더라고.”

할머니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사진을 다시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놓은 것인지 화질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하얀 얼굴에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서 카메라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는, 작고 가냘픈 체구를 한 여자. 무학 도사의 딸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미인이었다.

“그런데 왜 이 여자 사진을 보여 주세요?”

“그 애가 신기할 정도로 미림이를 쏙 빼닮았거든.”

할머니 말을 듣고 나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여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얀 얼굴. 까만 머리칼. 커다란 눈. 내가 아는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얼굴이다. 난 할머니의 핸드폰에 저장된 여자의 사진을 내 핸드폰으로 전송받았다.

“그 애는 찾았어?”

이번에도 난 노파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머무를 거야? 잘 데 없으면 우리 집에서 자.”

“아뇨. 오늘 돌아갈 겁니다.”

난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서울이 좋은 것도 아닌데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생각 탓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이곳의 공기가 어둡고 탁한 것 같다. 시체 썩는 악취 비슷한 것이 콧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럼 일 봐. 만약 오늘 서울에 못 돌아가게 되면 우리 집으로 꼭 오고.”

할머니는 뒷짐을 지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아직 눈이 쌓인 길을 내려갔다. 노파가 미끄러지지 않고 무사히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한미림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한미림이 날 보며 웃는다. 그녀의 얼굴에서 비쳐 보이는 건 내가 아는 어떤 놈이다.

난 선 채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한미림, 죽은 그 여자와 꼭 닮은 얼굴을 한 누군가를 잘 알고 있다.

한나민.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눈가가 뜨거워져 난 고개를 틀어 방금 전 할머니가 걸어 내려간 길을 응시했다. 벌써 길 위로 진회색 빛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난 치미는 울음을 삼키며 할머니가 주고 간 귤껍질을 까 통째로 입에 욱여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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