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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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경이 장경필에게 입금한 돈은 5백만 원. 놈이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다. 7년 전의 물가를 생각하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다.

장경필. 워낙 개성 있게 생긴 얼굴이라 정확히 기억한다. 쭉 찢어진 삼백안, 새까만 눈썹, 유난히 볼록하게 도드라졌던 광대뼈, 홀쭉한 뺨과 뻐드렁니. 처음 봤을 땐 외국인 노동자인가 싶었다.

<다들 그래. 나보고 외국인 아니냐고. 길을 가다가 중국인이 나한테 먼저 말을 건 적도 있어. 그런데 난 부모님 모두 한국인이거든? 그리고 난 아직 학생이야. 너희들이 다니는 학교만큼 좋은 덴 아니어도 인 서울 4년제 대학생.>

술에 취해서 아마 내가 먼저 질문했을 것이다. 형, 외국인 아니냐고. 장경필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말했다.

놈은 학생이라고 했다. 군대 다녀온 복학생이라고.

대학생이 용돈 벌이 삼아 돈을 받고 사람을 처리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노금영에게 들은 바로는 백단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해결사 일을 시작했고, 밤일꾼 멤버 중 제일 막내인 동수가 스무 살이다. 그 당시 장경필은 스물네 살이었다.

장경필이 ‘해결사’ 일을 하고 있었다고 백 프로 확신한다.

장경필은 돈을 입금 받은 지 보름여 만에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다.

인적 없는 시골길을 걷던 여자와 남자아이는 뒤따라오던 봉고차에 납치당했고, 여자는 무참히 살해당했다.

여자와 아이를 낚아채 봉고차에 태운 게 장경필이라 해도 차를 운전하는 놈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가난한 대학생이 돈을 벌려고 그런 짓을 한 거라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그리고 놈은 여자를 처리하는 것과 동시에 함께 납치했던 어린 남자애의 귀에 임동추, 내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그건 실수였을까? 나는 그게 전부 놈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한다.

놈은 남자아이를 일부러 납치했고 일부러 살려 보낸 것이다. 자기 누나를 죽인 남자가 나, 임동추라고 믿게 하고서. 그렇게 하면 범인은 임동추가 되는 거니까. 실제로 그 남자아이는 아직도 내가 누나를 죽인 범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게 장경필, 그놈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석진경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7년 전 석진경의 자취방이 있었던 주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옛날 형태 그대로 존재했다. 문패에 달린 주인의 이름도 똑같았다. 2층 주인집에 올라가 문을 두드려 봤지만 안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석진경이 살던 반지하 1호실 앞을 기웃거렸다. 문 앞에 가득 쌓인 박스들 속에서 여성용 화장품 케이스를 발견했다. 이제는 이 방에 여자애가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 옆에 딱 달라붙은 2호실. 장경필의 방이다.

이 집은 방음 시설이 좋지 않아 옆방에서 무슨 TV 프로그램을 보는지 다 알 정도다. 이런 집에 박선아가 드나들었단 말이지. 석진경의 방에서 여자 목소리가 나면 벽에 딱 달라붙어 옆방 소리를 엿듣는 장경필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됐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놈은 그런 이미지였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거나 눈빛 자체가 불쾌했던 놈.

석진경의 일기를 보면 놈도 장경필을 좋게 생각지 않았던 듯하다. 하긴 누가 그런 놈을 좋아했을까.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새끼와 마주치는 것조차 싫었다.

1호실 안에서 젊은 여자애가 꺄르륵,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그곳에서 벗어났다. 젊은 사내놈이 여자 혼자 사는 집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걸 누가 보면 뭐라고 할 텐가.

목 부분이 털로 뒤덮인 코트를 입은 중년 여자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보였다. 7년 전에 비해 많이 늙긴 했지만 주인집 아줌마가 분명하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시꺼먼 사내놈이 갑자기 다가와 알은체를 하자 여자가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 누구세요?”

“7년 전에 반지하 1호실에 살던 석진경요. 걔 친척입니다. 아주머니가 직접 그 녀석 방에 있던 물건들을 챙겨서 보내 주셨다는데 그땐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려서요.”

“아, 그 학생? 방이 나가서 물건을 정리한 것뿐인데 고마워할 게 뭐 있어요.”

“아뇨. 그래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찾아올 거까진 없는데. 여자는 연신 중얼거리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무안하기도 할 테지. 여자가 한 말대로 빨리 방에 사람을 집어넣어서 월세를 받아먹어야 하니 방치된 물건을 정리한 것뿐일 테니까.

“그런데 반지하 2호실에 살던 장경필 기억하십니까? 얼마 전에야 진경이 유품을 정리했는데 장경필 씨 물건이 나왔어요. 중요한 물건인 듯한데 만나서 돌려 드리고 싶어서요.”

내 입에서 장경필이란 이름이 나오자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 호로 잡놈의 새끼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격렬한 반응이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와 집에서 잠만 자는 장경필은 얌전한 세입자 축에 속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여자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손으로 입가를 막고서 말했다.

“그 새끼가 술 처마시고 돌아다니다가 길 가던 여대생을 겁탈한 모양이에요.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서 그놈을 잡아가고, 동네 사람들 전부 구경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알고 보니 그 새끼가 무려 네 명한테 그 짓을 했대요. 상습범이었던 거지.”

전혀 다른 종류의 사건을 예상했던 나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아뇨. 그 사람을 저도 한 번 본 적 있는데 그런 짓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거든요.”

“뭐가 그런 짓 할 사람처럼 안 보여. 딱 그런 짓 할 놈처럼 생겼구먼. 하여튼 그 새끼 때문에 집값 떨어져,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서 세입자가 들어오지도 않아, 내가 그 새끼 때문에 손해 본 게 얼만 줄이나 알아요? 어유, 속 터져.”

“그런데 그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일이 벌어졌던 게 3년 전이니 아직 감방에서 콩밥이나 처먹고 있겠지.”

다행히 여자의 핸드폰이 울린 덕분에 끝도 없는 하소연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택가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온 나는 일단 눈에 보이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핸드폰이 고장 난 것 같아서 그런데 전화 한 통 빌려 쓸 수 있을까요? 전화비는 드릴게요.”

나는 커피와 간단하게 먹을 샌드위치를 주문하며 가게 사장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에게 공손한 말투로 부탁했다. 사내는 전화비는 됐다고 웃으며 선뜻 카운터에 비치된 전화기를 내 주었다. 난 미리 적어 둔 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정확히 두 번의 수화 음 뒤에 “네. 해찬 기업 XX 영업소입니다”라는 여자의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그쪽 부서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버튼을 눌렀다. 카드 회사 고객 센터에 전화할 때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음악이 흘렀다. 곧 “고객님, 불편 사항을 말씀해 주시죠” 젊은 사내의 굵고 활기찬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일을 의뢰하려고 하는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사람 하나를 처리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그쪽 일만 전문으로 하는 사원이 있다고 하던데요. 장경필이라고.”

[장경필 사원은 3년 전에 개인 사유로 퇴사했다고 나오는데요.]

“그러지 마시고 급해서 그러니 그 사람과 연결해 주십시오. 아는 사람이 장경필이란 사원에게 일을 의뢰했는데 그 사원이 아주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주었다고 하더군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호텔 직원 뺨치게 공손하고 친절했던 남자의 태도가 일변했다. 난 속으로 조소했다. 이제야 본성이 나오는군.

“장경필이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아직 감옥에 있나?”

[너 뭐 하는 새끼냐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장경필 그 새끼 지금 어디 있는지나 말해.”

[너 이 새끼, 거기 어디야? 당장 쳐들어가서 확 죽여 버린다.]

“목소리를 들으니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어째 말이 짧다? 너 몇 살이야? 새끼야, 이딴 식으로 일하면서도 돈을 받아 처먹냐? 네놈 부모가 나이 많은 형한테 욕이나 찍찍 갈기라고 가르치데?”

[거기서 부모님 얘기가 왜 나와? 너 누구야. 대체 장경필이 그 새끼랑 어떤 사이야!]

“내가 3년 전에 그 새끼한테 일을 의뢰했던 사람이야. 3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당연히 의뢰했던 일은 완벽하게 처리됐겠지 싶었는데, 장경필한테 거금을 떠안기면서 치워 달라고 했던 새끼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네? 알고 보니 그 새끼가 3년 전에 아랫도리 간수 제대로 못 한 죄로 체포됐더라고? 의뢰비만 날름 받아 처먹고? 그 새끼 어디 있는지만 말해. 아니면 그 새끼 가족이 사는 데라도 알려 줘. 내가 직접 받아 낼 테니까. 아니면 그쪽에서 내 돈을 물어 주든가.”

[우리가 그 돈을 왜 물어 줘야 하는데!]

“넌 새끼야. 거기서 일하면서 회사 기본 규칙이 뭔지도 모르냐? 의뢰받은 일을 완수하지 못했을 땐 의뢰 비용을 그대로 돌려주게 돼 있어.”

놈이 어, 음, 그런 규칙이 있긴 했던 것 같은데……, 멍청하게 어버버거렸다. 그런 규칙이 있는지 알 게 뭔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장경필은 XX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고 나오는데요.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었네요.]

더 이상 감정적인 대응을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놈이 갑자기 존댓말을 썼다.

“그럼 아직 감옥에 있다는 거야?”

[네. 그놈 식구는 어디 보자.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에 형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고, 현재 살고 있는 곳은 XXX동 410-13번지…….]

사장이 직접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갖다 주었다. 난 바로 전화를 끊고 사장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아, 이거 통화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맛있게 드세요.”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가게였는데 커피 맛이 의외로 훌륭했다. 가게 한구석에는 천달봉이 언제나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로스팅 기계가 떠억하니 놓여 있었다. 난 오랜만에 마시는 질 좋은 커피의 깊은 맛을 음미하며 유리창 밖을 쳐다보았다.

역시 장경필은 내 추측대로 해결사 일을 하던 놈이 맞았다. 방금 전 내가 전화를 걸었던 곳은 해결사 사무실이었다.

해결사 사무실 직원에게 들었던 장경필의 식구들이 사는 집 주소는 머릿속에서 지웠다. 내게 필요한 건 장경필, 그 새끼뿐이다.

피로가 몰려왔다. 약 기운이 다했는지 관자놀이 부근이 욱신거리며 쑤시기 시작했다.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다. 장경필이 수감되어 있다는 교도소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교도소 면회 시간은 4시까지이니 여기서 좀 쉬었다 가도 되겠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시선은 창밖에 둔 채로 눈을 꼬옥 감았다. 얕은 두통을 동반한 수마가 눈꺼풀 위를 덮쳤다.

<선생님, 손금 봐 드릴까요?>

나민이의 모습이 눈꺼풀 위로 떠올랐다.

녀석이 눈을 빛내며 내 손을 펼쳤다. 활짝 펼친 내 손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은 제법 진지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네요. 선생님도 그동안 힘드셨겠어요. 형제는 없고, 선생님 혼자시고요. 쭉 XXX에서 사시다가 서울로 올라오셨죠?>

기껏해야 생명선이 중간에 끊겨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길 거라느니 따위의 소리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난 꽤 놀랐다. 아버지가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외에는 다 맞는 말이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장면이 휘리릭 바뀌었다.

<어머니는 7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사고였어요. 굉장히 끔찍한 사고요.>

침울한 어조로 말하던 나민이의 모습. 그때 난 생각했었다. 나나 저 녀석은 7이란 숫자와 묘한 인연이 있구나, 하고.

또 휘리릭, 장면이 바뀐다. 나민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흰 환자복을 입은 박하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휠체어에 앉은 놈이 이를 까드득 갈며 말한다.

<무슨 증거겠어. 한나민이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소속 딸랑이라는 증거지.>

그래. 나민이네 집 욕실에 아리랑헌터의 가게 이름이 적힌 라이터가 있더라. 녀석에게 그게 왜 너희 집 욕실에 있냐고 추궁했지만 녀석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지.

난 박하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꼰대랑 꼰대 친구들이 풍기 문란 놈들인 척하고 우리들 뒤를 쫓아왔을 때. 그때 그놈들이 나타났잖아. 귀면인지 뭔지 하는 놈들. 그때 난 분명히 봤어. 한나민, 그 자식 말이야. 그 자식이 귀면인지 뭔지 하는 괴물 같은 새끼들 사이에 껴 있었어.>

그때 놈들은 전부 똑같은 헬멧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녀석인 줄 알아봤냐? 내가 박하신에게 물어봤다.

<꼰대, 당신보다 내가 더 오랫동안 한나민을 지켜봐 왔어. 병신같이 그 새끼가 좋아서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지켜본 나야. 그래서 놈의 걸음걸이나, 사소한 버릇 같은 것도 다 꿰고 있단 말이야. 커튼 뒤에서 실루엣만 비춰 줘도 그놈이란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난 전혀 몰랐다. 녀석과는 살을 섞는 관계였는데도. 내가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건 그 애의 하얀 얼굴, 날 보는 눈, 차가운 하얀 손.

얼어붙은 하얀 손…….

일그러진 박하신의 얼굴이 사라지고 다시 한나민의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무학 도사를 처리해 버리는 게 어때요?>

나민이가 건조하게 말라붙은 목소리로 말한다. 녀석의 얼굴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다. 나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우린 사람은 죽이지 않아.

<무학 도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어째서 그 인간을 사람으로 분류하냐고 따져 묻는 듯한 말투다. 마치 아이가 이건 왜 안 되는 거냐고 묻는 것처럼 순진무구함마저 느껴졌다.

나민이가 중얼거렸다. 계속 말을 했다. 나민이의 얼굴은 하얗다. 온몸이 하얗다. 녀석의 손. 따뜻하게 데워졌어도 금방 식어 버리는 언제나 차가운 하얀 손……. 나민이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난 불안하게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손조차 볼 수 없는 어둠 속이다. 갑자기 소리도 없이 어둠 속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어둠의 장막을 찢고 튀어나온 그것은 내 목을 꽈악 졸랐다. 한쪽에 다섯 개씩, 열 개의 손가락이 목의 근육 하나하나 핏줄 하나까지 야무지게 움켜쥐어 조른다. 난 목을 조르는 손을 떼어 내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퍼덕거리는 내 손도 보이지 않는데 내 목을 조르는 두 개의 손은 하얗게, 창백하게 빛났다.

하얀 손은 끔찍하게 차갑다. 눈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얀 손이 꿈틀거리며 속삭였다.

<형은 날 믿죠? 네? 형만은 날 믿어 주셔야 해요.>

난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전속력으로 100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이 거칠어졌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 잔과 손도 대지 않은 샌드위치, 커피 향기가 감도는 훈훈한 가게 안, 창밖의 풍경. 모든 것이 아까와 똑같다. 그런데도 주위 모든 것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심지어 귓속으로 흘러드는 숨소리까지 내 것이 아닌 듯하다.

하얀 손. 하얀 손. 얼어붙은 희고 창백한 손. 난 약하게 경련하는 내 손을 바라보며 되뇌었다. 녀석의 손은 희다. 얼굴도 하얗고 온몸이 다 하얗다. 그리고 내가 아는 누군가의 손도 하얗다. 희미하게 빛나는 겨울 달빛처럼 창백하게 희다.

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 공기마저 쨍쨍하게 얼어붙은 거리를 내달렸다.

*

*

어땠지? 강원도에서 만났던 두레 식당집 그 애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었지?

그 애는 쇠꼬챙이처럼 말라 있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칼이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고. 강원도 산골의 강추위에 노출된 양 볼은 붉게 터 있었다. 작은 손은 거칠었고 손등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애는 지저분했다. 냄새도 났다. 아이라기보다는 온 산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는 똥강아지 같았다.

나민이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안에서 누가 움직이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문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방 창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반지하 방이라 지상에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일전에 박하신도 그놈 친구들도 이런 식으로 나민이의 집에 몰래 들어왔을 것이다. 물론 창문이 열려 있다면 말이다.

혹시나 싶어 창문을 슬쩍 밀어 보았더니 의외로 쉽게 밀렸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떠올랐다. 창문이 닫혀 있었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못된 짓 말이다.

창문을 조금 열어 그 틈으로 “나민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역시 대답은 없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난 창문을 홱 열어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갔다.

방 안은 여전히 서늘하고 살풍경했다.

난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닫고 신발을 벗어 품에 안았다. 방바닥에 발자국이라도 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장롱 문이 빠끔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장롱 문을 열어 보니 안에 든 것은 죄 옷이다.

일전에 이 집에 몰래 들어왔던 박하신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던 ‘증거’를 발견했다. 옷장 안에 대충 쑤셔 넣은 검은색 오토바이 헬멧이다. 은색 삼단봉과 함께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이 지니고 있어야 할 필수적인 소품.

난 그 헬멧을 꺼내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붙어 있는 건 없다. 입이 닿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입 닿는 부분이 끈적거린다. 접착력 강한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 낸 흔적 같기도 하다. 헬멧을 다시 옷장 안에 집어넣고 옷 속을 뒤졌다. 두툼한 보드용 장갑과 부직포 케이스 안에 곱게 수납된 삼단봉도 찾았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분명히 뭔가 더 있을 텐데. 내친김에 이불과 이불 사이, 서랍까지 뒤졌다. 대체 뭘 찾고 있는 거야? 무의식의 내가 묻는다. 좀도둑 짓을 하고 있는 내가 대답한다. 증거. 증거? 그래, 증거. 무슨 증거?

무아지경의 상태로 속옷과 양말 사이에 손을 쑤셔 넣어 뒤지던 난 깜짝 놀라 손을 휙 잡아 뺐다. 속옷과 양말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는 게 보였다. 옷장 겸 장롱 문은 죄 활짝 열렸고 서랍까지 골고루 빠져나와 있다. 방바닥에는 내가 정신없이 휙휙 집어 던진 옷가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역시 이건 아냐.

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산더미처럼 쌓인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내 안에 존재하는 의심병 종자가 또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봐. 확실히 이상하지 않아? 동물적인 감을 자랑하는 너이니 어렴풋이 느꼈을 거 아냐. 숫자 7. 하얀 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사고방식. 한나민의 숨겨진 잔악성. 그렇게 말 잘 듣고 순하던 애가 숨기고 있던 본모습을 들키자 네 목을 졸랐어. 장난 따위가 아니었잖아. 녀석은 진짜로 널 해할 생각이었다고. 한강 둔치에서 아무렇지 않게 리키의 머리통을 터뜨리던 모습. 그게 단순히 불우한 가정 환경 탓에 좀 비뚤어진 거라고 생각해? 아니잖아. 그걸 아니까 걔를 병원에 상담받으라고 보낸 거 아냐. 그리고 한나민이 너한테 준 정보들. 일개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한 녀석이 그런 고급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난 장롱 문을 쾅, 닫으며 옆에서 끊임없이 속살거리는 의심병 종자 새끼를 떨쳐 냈다. 그리고 다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는데. 그 꼴을 대문 앞에 서 있던 노인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나민이 집 위층에 산다는 치매 걸린 노인이었다. 난 얼른 신발을 꿰어 신었다.

“철진이 친구야? 철진이 아까 나갔는데.”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선 채로 이가 다 빠져 홀쭉하게 팬 뺨을 오물거려 말했다. 노인은 나민이를 자기 손자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철진이 오면 밥 먹으라고 해. 철진이 좋아하는 미역국 있어.”

“하하, 네. 철진이한테 꼭 전할게요.”

“그리고 철진이한테 이제 피 안 나나 물어봐.”

노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피가 나요?”

“그래. 철진이 어제 팔에서 피 났어. 내가 봤어.”

노인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일부러 왔던 길 반대편으로 향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곧 여보세요, 하는 나민이의 나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냐?”

[집이에요. 형은요?]

내 뺨이 씰룩 경련했다. 집? 방금 전 내가 네 집을 들쑤셨는데?

“어제 내가 일이 있어서 저녁 같이 먹자는 약속을 못 지켰잖아. 미안해서. 지금 먹을 거 사 들고 너희 집으로 갈까?”

[아뇨. 콜록콜록. 제가 감기 몸살에 걸려서요.]

“저런, 많이 아파? 아프면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텐데 내가 가서 밥 차려 줄게. 그러고 보니 요새 딸기가 참 달고 맛있던데.”

[밥 먹고 약도 먹었어요. 그냥 자고 싶어요. 다음에요. 다음에 봬요.]

나민이는 격하게 기침을 해 댔다.

“나민아.”

[네.]

“아직도 날 좋아하냐?”

[무슨 말이 그래요. ‘아직도’라니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좋아해요.]

녀석이 기침을 계속하느라 거칠어진 목소리로 속살거린다.

“나도.”

단 한 마디만 꺼냈는데도 가슴이 꽉 막혔다.

“나도 널 좋아한다, 나민아. 예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말이 없다. 나도 녀석도. 수화기 반대편에서 쌔액쌔액 내쉬는 숨소리만 들렸다. 나도 뻐근한 가슴을 움직여 숨을 토해 냈다 들이마셨다.

“나도 너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너 아닌 다른 사람하고는 평생 사랑 놀음 같은 거 못 할 거 같아.”

[동추 형…….]

“쉬어라.”

하얀 입김이 향로 구멍에서 비어져 나오는 연기처럼 벌어진 입 사이로 마구 뿜어져 나왔다. 난 하얀 입김이 흩어진 허공에 대고 조소했다.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니다. 녀석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내 마음은 거짓 한 톨도 섞이지 않는 진심이었다. 좋아했다. 아직도 좋아한다.

그래서 내 무의식이 부정했다. 자꾸만 커지는 의혹을 본능적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내 본능적인 감은 어느 순간부터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난 한나민을 오랫동안 지켜봐 와서 놈이 하는 행동, 걸음걸이 같은 것만 봐도 그 녀석인 걸 알아볼 수 있어.>

박하신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박하신의 말대로다. 녀석은, 한나민은 그날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

*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아 마시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담벼락 아래에 숨어서 아버지 담배를 몰래 훔쳐 나와 피워 봤을 때도 이러진 않았는데.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머리 위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난 고개를 쳐들었다. 허리 라인이 잘록하게 들어간 검은색 코트에 붉은 머플러를 둘둘 만 정혜 도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얇고 긴 장초 하나를 입에 물고서 날 빤히 바라봤다. 불붙여 주지 않고 뭐 하고 있냐고 따져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난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터로 망할 여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 연기 한 모금 빨아 마셨다고 기침이나 해 대던 나와는 달리 정혜 도사는 능숙하게 니코틴 연기를 내뿜었다.

“도사가 담배를 피워도 됩니까?”

“도사는 사람 아닌가요? 도사도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정력에 좋다는 거, 몸에 좋다는 거 다 처먹고 오입질도 하고 삽니다.”

“참 입이 더러우시네요. 외모만 가꾸지 말고 입도 좀 가꾸십쇼.”

“생산성이라곤 하나 없는 비역질이나 즐기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 닥치시죠.”

정혜 도사는 싱긋 웃으며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후욱 뿜었다. 오입질이며 비역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봐요, 정혜 씨.”

“제 본명은 진예은입니다.”

“네. 이보십쇼, 진예은 씨.”

“성까지 붙여서 부르지 마세요. 무학 도사가 꼭 날 부를 때 성까지 붙여 불렀거든요.”

대체 뭘 어쩌라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짜증과 신경질이 쓰나미처럼 밀려와서 난 가슴을 쿵쿵 쳤다.

“예은 씨, 이렇게 부르면 되지요?”

“향수 뭐 써요? 냄새 좋네.”

갑자기 정혜 도사가 내 팔을 들어서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사람이 말하면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해라, 이 망할 여자야.

“그냥 싸구려 비누 냄새입니다. 그나저나 날 이렇게 싫어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티 나나요?”

“예, 엄청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더군요. 나, 너 싫어, 더럽게 싫어, 하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임동추 씨를 좋아할 수가 있나. 당신이 미림이, 걔를 죽였잖아요.”

“미림? 전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무학 도사의 딸 이름이에요. 미림이.”

담뱃재를 털던 내 손가락이 움찔했다.

“난 미림이가 싫지 않았어요. 덜떨어진 애가 강아지처럼 언니, 언니 하면서 날 따르는 게 귀여워서 꽤 예뻐했지. 그 애한테 무슨 죄가 있겠어요. 백치 상태인 애를 건드린 무학 도사, 그 새끼가 개자식인 거지. 그런데 안 그래도 불쌍한 애를 당신이 죽였지.”

“이봐요. 난…….”

“알아요. 당신이 걜 죽인 범인이 아니란 거. 그 애를 죽인 건 당신 친구란 거. 하지만 당신도 그 애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죠.”

정혜 도사가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매가 뱀눈처럼 가늘어졌다. 가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 끝에서 회색 재가 툭 떨어졌다.

“당신은 믿는 겁니까?”

“뭐가요?”

“내가 무고하다는 것 말입니다.”

“사람 죽이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는 놈들한테서는 굉장히 기분 나쁜 오라가 느껴지는데 당신은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제가 그런 걸 유난히 잘 알아본답니다.”

“그런데 개똥이, 그 새끼는 왜 모르는 걸까요?”

“색안경을 끼고서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니 다른 게 보일 리가 있나요. 그 애가 아직 미성숙해서 사람의 오라까지 보이지 않는 걸 수도 있고요.”

예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이 여자는 묘하게 노티 나는 말투를 구사한다. 문득 이 여자가 보이는 것보다 젊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은 씨는 대체 몇 살입니까?”

“면전에 대고 여자 나이를 묻다니. 당신 진짜 재수 없네요.”

옆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회색 재가 날아왔다. 일부러 저 여자가 내 쪽 방향으로 담뱃재를 턴 게 분명하다. 이 여자가 진짜! 눈에 독기를 품고 노려봤지만 여자는 날 쳐다보지도 않고 먼 산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멍청한 녀석.”

“뭐라고요? 이거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당신한테 한 말이 아니라 혼잣말한 거니까 발끈하지 말아요. 그래서 걔가 뭐라던가요?”

걔라니, 또 누구요? 난 씩씩대며 되물었다. 대답은 없고 되묻기만 한다.

“흙이 필요 없다고 걔가 직접 그러던가요?”

그제야 ‘걔’라는 게 갈색 가면을 말하는 것이란 걸 알아챘다. 난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머리를 굴렸다. 생각 없이 말했다간 저 여자는 또 꼬투리를 잡아서 빈정댈 거다.

“그게 직접 들은 건 아니고…….”

“나한테는 씨알도 안 먹힐 테니 급조한 거짓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나 하시고. 당신이 걔랑 몇 번이나 그 짓을 했는지 횟수까지 다 아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요.”

저 여자한테는 그런 것까지 다 보인단 말인가. 설마 그 새끼가 어떤 식으로 제 아랫도리를 휘둘렀는지까지 다?

“이건 딴 얘기인데 당신을 미워하는 만큼 좋아하는 마음도 큰 듯하니 걔를 너무 미워하지 마시죠.”

“조, 좋아……? 그 새끼가 날 조, 좋아한……? 당신 미쳤어요?”

“당신한테 붙어 있던 것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잡귀 수준이 아니라 악령이었을 거예요. 그대로 놔뒀다간 당신은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죽은 지 오래되어 자기가 인간이었단 사실조차 망각하고 악령이 된 것들이 어째서인지 갑자기 기가 팍 죽었죠. 당신 몸속에 흘러든 강력한 힘을 지닌 기운 때문에요. 걔는 매번 콘돔도 없이 당신 몸속에 쌌었죠?”

“아, 아니. 무, 무슨 말을 그렇게…….”

내 입에서 ‘쿨럭쿨럭!’ 기침만 신나게 터져 나왔다.

“당신이 남자라서 다행인 줄 알아요. 여자였다면 한 방에 세 쌍둥이가 들어서고도 남았을 강력한 씨앗입니다, 걔 체액이. 남자 몸 구조가 몸속에 들어온 건 내보내는 구조라 씻겨 나가도 예전에 씻겨 나갔을 텐데도 이 정도이니. 젊어서 그런가. 진하다, 진해.”

“그, 그만 좀 하시죠. 무슨 여자가 어떻게 그런 말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합니까!”

“이 정도로 증오하는데도 당신을 아직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것만 봐도 그래요. 이런 게 애증인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지만 좋아한다? 희한하네. 난 날 배신하고 제 양녀를 건드린 무학 도사 새끼를 찢어 죽이고만 싶은데.”

“강원도에서 퍼 온 흙, 그거 귀면들 게 아니랍디다. 그 새끼 누나, 미림 씨랬나? 일전에 지하 아지트에서 불타 죽은 귀면 두 마리. 그 여자한테 몹쓸 짓을 한 펜션 사장이랑 아들 새끼 시체로 만든 귀면이래요.”

난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정혜 도사는 허공을 쳐다보며 담배 필터를 빨았다.

“어쩐지 불타 버린 그 두 놈은 유난히 역한 악취가 나더라니. 영이 저급하니 냄새도 고약했던 거였어.”

정혜 도사의 하얀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직접 물어봐야겠죠.”

“직접 뭘 물어요?”

“나머지 귀면 놈들이 묻혀 있던 장소가 어디였는지.”

누구한테? 설마……. 무학 도사? 정혜 도사는 마지막으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서 손가락 마디 하나의 길이 정도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미림이를 건드렸다는 그 금수 새끼들을 죽인 건 무학 도사라던가요?”

“아뇨.”

“그럼 설마 그 애가?”

난 침묵했다. 정혜 도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불쌍한 녀석.”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주제넘겠지만요. 그 애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어릴 때부터 키우는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자란 불쌍한 애예요.”

“그렇게 불쌍했으면 당신이 데려다 키우지 그랬습니까.”

내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섰다. 빈정대면서 사람 약 올리는 거 좋아하는 여자가 이번엔 아무 말도 못 한다.

미미네 치킨 로고가 찍힌 스쿠터가 보였다. 스쿠터에 탄 동수 놈이 날 알아보고는 파닥파닥 손을 흔들었다. 저러다가 넘어지고 말지. 불안하다 싶었건만 스쿠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동수와 스쿠터는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저 바보 같은 자식. 그러게 왜 손을 흔들어!”

얼른 뛰어가서 동수 놈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자 놈이 히히히 웃는다.

“형, 우리 사촌 형이요. 시험 보면 자기가 타던 차, 나 준대요.”

“얼씨구. 시험? 무슨 시험?”

“수능요. 수능 봐서 대학 붙으면 차 열쇠 준댔어요. 어마어마하게 잘나가는 형이라 타던 차가 스포츠카거든요. 히히, 신난다.”

웃냐, 웃어? 웃음이 나오냐? 퍽이나 신나기도 하겠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허허허 웃었다. 놈은 “사촌 형한테서 차 받으면 형을 제일 먼저 태워 줄게요” 호기롭게 선언한다. 난 놈의 뒤통수를 빠악 갈겼다.

“어우! 왜 때려요!”

“신나냐? 응? 신나? 결국 너한테 차는 절대로 안 주겠단 얘기 아냐, 이 멍청한 자식아. 수능? 대학? 하하핫! 염소 소갈비 뜯는 소리 하고 자빠져 있네!”

“제가 수능을 못 볼 이유가 어디 있어요. 수능 볼 거예요. 수능 봐서 대학 떠억하니 붙어서 차 받을 거예요오.”

“스쿨. 뜻이 뭐냐?”

“스…… 어어…… 스콜? 음료수 이름?”

“에라이, 이 자식아. 스쿨, 학교! School! 요새 초등학생도 다 아는 단어도 모르면서 뭐? 수능? 넌 수능 보려면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인마. 그냥 깔끔하게 포기해.”

“우씨, 두고 봐요. 이러다 내가 수능 봐서 대학 붙으면 어쩔래요?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에요!”

놈은 뒤에서 연신 깽깽깽 짖어 댔다. 동수 놈만큼이나 골 텅텅 빈 놈들도 대학에 가긴 했다. 내가 그놈들 옆에 달라붙어서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시켰으니까. 뒤에서 스쿠터를 질질 끌고 따라오는 놈을 흘끔 쳐다봤다. 저놈도 지금부터 내가 채찍 휘두르며 공부를 시키면 가능은 하겠지. ‘헬로우 존, 하이 제인, 하와유? 파인 땡큐 앤 유?’부터 가르치면.

“걱정 마세요. 당신은 대학에 합격합니다.”

우리가 하는 얘기를 다 들었는지 정혜 도사가 한마디 했다. “진짜요? 그럼 내년 이맘때쯤 대학교에 스포츠카 끌고 다닐 수 있는 거죠?” 동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아뇨. 내년 이맘때쯤엔 당신은 개구리색 군복 입고 넉가래로 눈을 치우면서 욕을 하고 있을 겁니다. 대학에 합격하는 건 몇 년 뒤가 되겠지만 어쨌든 4년제 대학에 합격은 합니다. 늦깎이 대학생이 돼서 어린것들한테 삥 뜯기듯이 밥을 사 주고 있겠네요.”

동수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난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큰 덩치로 끊임없이 구시렁대며 넉가래로 눈을 치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기다 못해 창자가 비비 꼬였다.

“그만 좀 웃어요. 거참 너무하시네. 제 불행이 곧 형의 기쁨이에요?”

너무 웃어서 미안하긴 해도 도저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웃다가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나게 웃어젖히다 보니 가슴 중간에 막혀 있던 덩어리가 쑤욱 내려간 듯했다.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동수와 정혜 도사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와아, 눈이다.”

“또 하얀 똥 덩어리가 내리네요.”

놀라운 건 순수하게 내리는 눈을 보고 감탄한 건 동수 놈이고, 하얀 똥 덩어리 운운한 건 정혜 도사라는 점이다. 무드라고는 없는 여자 같으니.

*

*

“형, 그때 보니 얼굴색이 완전 썩어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동수는 들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보온밥통이 들어 있었다. 밥통 안에 든 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복죽이다.

“이거 네가 만든 거냐?”

“그럴 리가 있어요? 엄마가 형 갖다 주라고 만들어 줬어요.”

아줌마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전복죽의 아리따운 자태에 숟가락을 들었다.

엄청난 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전복죽은 처음 먹어 봤다.

난 걸신들린 놈처럼 죽을 퍼먹었다. 전복이 마구마구 씹힌다. 썰어 넣은 채소의 달큼한 맛과 전복의 쫀득한 식감, 고소한 참기름의 맛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뤄 입 안에서 웅대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동치미 국물도 좀 마시면서 먹어요.”

동수 놈이 내미는 국물 그릇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무가 동동 뜬 동치미 국물이 또 예술이었다. 시원하고 시큼한 이 맛! 동수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워낙 유명하지만 이건 정말 희대의 역작이다. 난 순식간에 밥통 가득 들어 있던 전복죽을 퍼먹고 그릇 밑바닥에 남은 밥알까지 싹싹 긁어 먹고는 숟가락을 쪽쪽 빨았다.

“더 없냐?”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냄비째로 가져올 걸 그랬다. 전복죽, 진짜 맛있죠? 우리 엄마가 전복을 여섯 마리나 때려 잡아넣었다고요. 다음에 또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 후식으로 딸기 먹어요.”

동수는 깨끗이 씻어서 먹기 좋게 꼭지까지 따서 넣어온 딸기를 꺼내 내게 이쑤시개까지 쥐여 주었다. 딸기도 완전 꿀이다, 꿀.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래요. 엄마가 다 만들어 준댔어요.”

“그럼 난 얻어먹은 만큼 널 공부시켜야겠지?”

딸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말하자 동수 놈이 이를 드러내고서 씨이익 웃었다. 그럼 그렇지. 동수네 어머니가 정이 많으신 분이긴 해도, 나 몸보신이나 시키려고 비싼 전복을 여섯 마리나 때려잡아 죽을 끓여 주실 분이 아니다.

“엄마가요. 대학은 꼭 가래요. 대학 나와야 사람 구실한다면서요.”

“대학이 그 사람의 능력치를 파악하는 기준은 아냐. 대학 안 나온 사람들 중에도 머리 좋은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들 많아. 다만 넌 머리도 나쁘고 쓸데없이 큰 덩치 말고는 특별한 능력도 없으니 살아남기가 좀 힘들겠지.”

“전 아버지랑 같이 치킨집 하면서 살 건데요.”

“너 그 얘기 너희 부모님 앞에서 해 봐라. 그럼 신나게 등짝을 두들겨 맞을걸?”

“치킨집이 뭐 어때서요. 전 치킨집 하는 울 아부지가 자랑스러운데요. 분명히 나중에 내 자식도 치킨집 사장님인 날 자랑스러워할 거고요.”

“어이구, 네가 그래도 장가가서 자식 낳을 생각은 있구나.”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은 형뿐이에요. 믿어 주세요. 지금 제 마음속엔 형밖에 없다니까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렇지 좀 더 나이 들어 봐라. 네 몸속에 각인된 장남, 외동아들의 피는 무시 못 하게 될 거다. 다 안다. 이 자식은 자식새끼 하나만 보고 온갖 고생 다 하며 살아오신 부모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못할 놈이란 거. 넌 결국 얼굴은 평범하지만 성격 좋은 여자 만나서 애 두서넛 낳고 잘살 거다.

“어디 나가시게요?”

이를 닦고 있는데 동수 놈이 욕실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문틀을 긁으며 물었다.

“서점에 갈 거다. 너도 무조건 따라와.”

“서점은 왜요?”

“네놈 수준에 맞는 교재를 사러 가야지. 너, 중학교 저학년 레벨이란 거 알고는 있지? 아니다. 초등학생 레벨부터 시작해야 하나.”

초등학교 레벨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동수 놈은 실실거리며 웃는다. 쓸개 빠진 놈 같으니라고.

“히히히. 형, 사랑해요.”

한 술 더 떠서 몸을 배배 꼬면서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들은 고백의 말을 지껄인다. 사람의 오라를 볼 수 있는 정혜 도사 같은 능력이 없는 내 눈에도 빤히 보인다. 놈의 온몸에서 마구마구 뿜어져 나오는 ‘형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좋아 죽을 것 같아, 형이 진짜 너무 좋아♥’의 형광 핑크빛 오라가.

“형, 그때 제가 사 드린 부적은 잘 가지고 다니죠? 부적에 실린 힘이 형을 지켜 준댔어요. 절대로 그거 몸에서 떼어 놓지 말아요.”

동수 놈은 집 밖으로 나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내내 떠들었다. 내가 기운이 없어 보이니 기분을 풀어 주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이리라.

“근데요, 형. 정혜 도사님 말이에요. 몇 살이나 먹었을까요? 그 여자, 꼭 백 년 묵은 구미호 같지 않아요? 예쁘긴 한데 사람 같지가 않아요. 형, 내 말 듣고 있어요? 전복죽에 후식까지 싹 다 먹어 치운 사람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역시 무슨 일 있는 거죠? 형, 혀엉. 말 좀 해 봐요.”

동수가 내 어깨를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짜증이 솟아올라 무슨 말인가를 하려 입을 열었던 나는 입을 벌린 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한나민이 저 앞에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멸치 대가리, 저 새끼. 동수가 잇새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놈은 이쪽으로 걸어왔고 우리들도 놈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놈과 우리들은 딱 마주쳤다.

“외출하시는 모양이네요. 지금 형 집에 가는 중이었는데.”

나민이는 입으로는 내게 말하면서 눈으로는 동수 놈을 흘겨보았다. 내 눈은 나민이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빨간색 털모자를 쓰고 있어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더 하얗게 보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동추 형이랑 나는 서점에 간다. 내가 먼저 형이랑 약속했으니까 넌 꺼져, 새끼야.”

동수가 나민이의 어깨를 툭 치며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 동수가 어깨를 친 순간 나민이의 눈썹 한쪽이 움찔 경련하는 걸 내 눈은 정확히 캐치했다.

“서점은 나중에 가시면 안 돼요? 형이랑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데.”

녀석은 동수의 도발을 무시하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눈 밑에 파란 그늘이 져 있다. 입술에 허옇게 각질이 일어나 있고 양 볼도 홀쭉하게 패어 있다. 초췌한 얼굴로 웃으며 녀석은 내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동수를 뿌리치고 자기와 함께 가 주길 바라는 눈치다.

“야, 이 새끼야. 넌 내가 우습냐? 좆만 한 새끼가!”

동수가 드디어 폭발했다. 나민이도 이번엔 가만히 있진 않았다.

“동추 형이랑 나 사이에 끼어들지 말아요. 눈치도 더럽게 없네.”

“뭐, 새끼야?”

동수가 눈에 독기를 품고 나민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더럽게 귀찮게 구네. 씨발.” 손을 뿌리치며 낮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를 나도 동수도 똑똑히 들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씨…… 뭐? 이 새끼가 진짜!”

“그래, 씨발이라고 했다. 낄 데 안 낄 데 대가리 들이밀지 말고 꺼져 줘라, 좀.”

아오오오! 동수가 짐승처럼 포효하며 주먹을 쳐들었다. 난 동수 놈의 두꺼운 손목을 텁 움켜잡았다. 동수는 굉장히 억울해하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난 동수의 손목을 움켜쥔 채로 녀석과 나민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희들 지금 뭐 하냐?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동수와 나민이의 입에서 “하지만 형!” 동시에 똑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거리 한복판에서 잘하는 짓이다. 난 이제부터 얼굴 팔려서 이 동네에서 어떻게 살라고 이 지랄을 하냐?”

“하지만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입이 툭 튀어나와서 구시렁대는 동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공평하게 나민이의 머리통도 후려갈겼다. 두 놈이 후려 맞은 머리통을 붙잡고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너희 둘 다 똑같은 새끼들이야. 둘 다 꺼져. 꼴도 보기 싫어.”

손짓을 하며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는데 두 놈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래? 그럼 내가 꺼져 주지.”

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놈이 쪼르르 뛰어와 내 양옆에 한 놈씩 섰다.

“형, 혼자 가면 어떻게 해요. 같이 서점 가기로 했잖아요.”

오른쪽에 선 동수 놈이 내 팔에 몸을 기대며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어, 동추 형. 서점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럼 이쪽으로 가야죠.”

지하철역 안에서 서점으로 가는 방향 반대쪽 개찰구로 들어가니 동수가 소리쳐 날 불렀다.

“서점 안 간다. 따라올 거면 따라오고 따라오기 싫으면 돌아가.”

두 개의 개찰구 중간에 서 있던 두 놈은 잠시 서로를 응시하더니 곧 내 뒤를 따라왔다.

*

*

<나는 앵무새가 참 좋아.>

이모님이 나를 무릎 위에 눕혀 놓고 귀지를 파 주며 말했다. 귀이개로 귓바퀴를 살살 긁는 느낌이 너무도 좋아서 스르륵 눈이 감기던 참이었다.

<앵무새가 왜 좋은데요?>

<알록달록한 게 활짝 핀 꽃 같아서. 동추 너는 앵무새를 본 적 있어?>

<날이 좀 풀리면 서울에 있는 동물원에 앵무새 보러 가자. 가는 김에 서울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롯데월드요. 에버랜드도 가고 싶고 남산, 명동…….>

<가고 싶은 데가 많기도 하다.>

이모님은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며 웃었다. 사실 가고 싶은 데는 더 많았고 먹고 싶은 것도 엄청나게 많았다. 우아하게 나이프로 두툼한 스테이크도 썰어 먹고 싶었고, 스파게티랑 피자도 실컷 먹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이모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 혼자 서울로 쫓겨나듯이 올라와 신나게 쏘다녔다. 이모님 무릎 위에 누워 생각했던 데 모두 다 가 보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었다. 그런데도 언제나 내 심장에 난 커다란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좋은 데 가서 좋은 풍경을 볼 때도,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이모님 생각이 나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그분이 너무도 그리워서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울지 않으려고 코만 연신 훌쩍거렸다.

혼자서 빨빨거리며 온갖 좋은 데 다 다녔으면서도 동물원에는 오늘 처음 왔다. 언젠가 이모님과 함께 와야지 싶어서 마지막까지 남겨 뒀다. 그런데 앵무새 우리 앞에 선 지금, 내 옆에 이모님은 없다. 대신 혼자는 아니다. 열대 조류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떠드는 한 놈과 내 옆에 서서 부리로 날개깃을 정리하는 앵무새를 바라보는 또 한 놈이 함께이긴 하다.

“앵무새는 참 예쁘네요.”

옆에 서 있던 나민이가 시선을 앵무새에게 향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예쁘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TV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화려하네.”

“저 새, 해적이 어깨에 얹고 다니는 그 앵무새 맞죠?”

나민이가 가장 화려하고 큰 앵무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녀석의 말대로 TV나 영화에 나오는 해적들이 마스코트처럼 데리고 다니는 그 새다.

알록달록 활짝 핀 꽃 같은 새. 날개를 활짝 펴니 정말 만개한 꽃 같다. 새 한 마리가 푸드덕대며 날아와 철창에 착 달라붙었다. 나민이는 철장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철창에 붙어 있느라 둥글게 오그라든 새의 발톱을 살살 만졌다.

“한동수를 집으로 들이지 마세요.”

녀석은 웃는 얼굴로 입술만 오물거려 말했다.

“그 자식이 형한테 마음 있는 거 아시잖아요. 그 자식이 형 집에 드나드는 거 전 싫어요. 질투가 나서 그 자식을 확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녀석의 목소리에는 진득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나를 봐서 꾹 눌러 참고 있는 거다. 내가 없었으면 동수한테 흉기를 들이대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 죽인다는 말을 참 쉽게 한다, 너.”

“저도 아무한테나 죽이고 싶단 말은 쓰지 않아요. 그럴 만한 놈한테나 쓰는 거지.”

녀석이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접어 웃어 보였다. 보조개가 패는 녀석의 볼 한쪽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 이 녀석은 화가 나 있다. 폭발 직전의 상태다.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내 눈에는 다 보인다. 난 손을 들어 날 보며 웃는 나민이의 얼굴을 가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녀석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무학 도사의 집 위치를 알아냈어요.”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 나민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잘했어, 수고했어,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 줘야 하겠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민이 넌 무학 도사가 죽었으면 좋겠냐?”

“그 영감탱이는 해충이잖아요. 해충은 죽여 없애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연히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 하는 질문이다. 난 아니다. 늘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고, 내 손으로 죽이는 상상을 했지만 그를 해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새끼라도 사람이었다. 인간이었다.

“형은 그런 짓을 당하고도 아직도 그 인간도 사람인데 어떻게 죽이냐, 이런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영감은 자기 손자를 직접 보내 형을 죽이려고 했다고요.”

아니. 그때 집 앞에서 날 기다리다 날 공격했던 그놈은 갈색 가면이 아니었어. 역한 향수 냄새나 풍기던 어설프기 짝이 없는 가짜였지.

“당하기 전에 해치워야 돼요. 형들이 사무실을 뒤집어엎어 놓은 바람에 영감이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다고요. 당하기 전에 해치워요. 그 영감은 완전히 미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잠깐만요. 형, 어디 가세요? 제 말 듣고 있어요?”

난 녀석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사내아이들이 날 치고 지나갔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뛰어가던 녀석들 중 한 명이 뒤따라오던 나민이를 몸 전체로 들이받았다.

“여긴 너희들 놀이터가 아냐.”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나민이는 자기와 부딪친 사내애를 붙잡고 한마디 했다. 노려보는 눈빛이나 말투가 어찌나 살벌한지 아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로 꽁꽁 얼어붙었다. 퍼렇게 질려서 오들오들 떠는 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나민이가 붙잡고 있던 어깨를 놔주자 아이는 엄마를 외쳐 부르며 도망쳤다.

저 자식은 나 이외의 인간들에겐 가차 없군. 아이한테도 저러는데 학교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한테 어떻게 대하는지 알 만하다.

“형, 오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어느새 녀석은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 내 뒤에 와 섰다. 난 대답 없이 화장실에 비치된 거품 비누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닦았다.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답답하게 이러지 마시고 말 좀 해 주세요.”

“그렇게 그 노인네를 죽이고 싶으면 네가 직접 하지 그래?”

페이퍼 타월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던졌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목소리가 떨린다 싶었더니 녀석의 눈가도 약하게 경련했다. 눈가의 경련이 아래로 내려와 볼 근육까지 뒤틀렸다.

난 나민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그 여자 시체.”

묘한 정적이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에 내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시체라니 누구의 시체요?”

“무학 도사의 딸. 미림이란 여자. 무학 도사가 직접 자기 입으로 자기 딸의 시체를 이용해 임충식을 부활시킬 거라고 했어. 그럼 그 여자의 시체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거 아냐.”

“무학 도사의 집 어딘가에 있지 않겠어요?”

“그 무학 도사의 집이라는 게 모래 늪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말이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형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라고요?”

내가 대답 없이 돌아서려는 순간 나민이는 내 팔을 움켜잡고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를 변기 위에 짐짝처럼 내팽개치고 손을 뒤로 해서 문을 잠갔다.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 녀석을 밀치고 변기 위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녀석은 내 양어깨를 붙잡고는 단단히 짓눌렀다.

“내가 왜 형을 함정에 빠뜨리는 짓을 하겠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대체 왜요? 노력했잖아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줬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까지 절 못 믿으세요?”

녀석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무언가가 꾸물꾸물 꿈틀대며 기어 다니는 게 보이는 듯했다. 이 녀석의 몸 안에 들어찬 검은 덩어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찌꺼기들. 녀석과 상담을 했던 전문의가 내게 보여 준 것이 있다.

검은색 사람, 그 옆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사람 하나. 검은색 사람은 눈도 없고 코도 없다.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히 들어찬 입만 있다.

바닥에 웅크린 작은 사람은 사실 의사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스팔트 위에서 말라죽은 지렁이처럼 보이기도 했고 뱀의 허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커다란 검은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웅크려 누운 작은 사람을 잡아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게 한나민이 그린 ‘가족’이라는 그림이었다.

“좋아요. 형이 좋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난 왜 이렇게 아직도 외롭죠?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죠? 제발요. 형, 제발…….”

날 좀 믿어 줘요. 날 봐 줘요. 날 인정해 줘요. 녀석이 핏발이 선 두 눈을 부릅뜨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 난 손을 들어 녀석의 경련하는 뺨을 쓸었다.

“나도 널 좋아한다.”

녀석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널 좋아하는데, 힘들어. 아프다, 많이.”

얼굴이 굳어서 내 마음대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졌다. 아무 표정 없이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며 녀석은 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날 좋아한다면, 네가 입버릇처럼 지껄이는 좋아한다는 말에 아주 조금의 진심이라도 섞여 있다면…… 나민아, 날 죽여.”

녀석의 고운 눈매가 일그러졌다. 아직 젊은데도 저렇게 찡그리니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 녀석의 한쪽 볼에 생긴 보조개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보송보송한 뺨의 피부가 물에 젖은 고무처럼 손바닥 안에 탄력 있게 감겨들었다.

녀석의 하얀 손이 내 목을 매만졌다. 목을 조르듯이 차가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녀석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곧 녀석의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녀석의 입술 사이에서 분홍색 혀가 비어져 나와 내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난 눈을 감고 입을 벌려 내 입술을 핥는 혀를 가볍게 빨아 들였다.

녀석의 손이 내 한쪽 얼굴을 감싸 쥐었고 난 녀석의 귓바퀴 위를 쓸었다.

키스는 피부에 닿는 실크 속옷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서로의 숨결을 서로의 입으로 확인하고 코로는 서로의 체향을 흡입했다. 녀석의 목덜미 부근에선 싸한 파스 냄새가 났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분명 콧속으로 파고드는 파스의 독한 향 때문이리라. 녀석의 입술을 핥던 나는 잇새에 말캉한 살덩어리를 끼워 물고 힘을 주어 깨물었다. 녀석이 깜짝 놀라 입술을 뗐다. 내게 깨물린 입술 한쪽에 핏물이 배어 나와 있었다.

난 녀석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날 붙잡지 않는다. 날 보지도 않는다. 핏물이 배어 나온 입술을 손끝으로 만지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녀석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일부러 확인하지도 않았다.

“형! 형! 저기 가면 새끼들 모아 둔 데 있대요. 새끼 호랑이 보러 가요!”

날 발견한 동수가 달려와 어디 가지고 조르는 애처럼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아까 나와 나민이가 보고 있던 앵무새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대며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 * *

눈앞에 있는 놈은 내가 기억하던 7년 전의 장경필이 아니었다.

둥근 메추리알을 심어 놓은 것 같던 광대뼈가 유난히 도드라졌던 해골 같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웬 살찐 백돼지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걸 보니 고생해서 부은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지내다 보니 살이 찐 거다. 어지간히 감옥 생활이 몸에 맞는 모양이다.

“사식 없냐? 사식? 빈손으로 오면 어쩌냐. 내가 전에 면회 올 때엔 치킨 한 마리라도 사 오라고 했냐, 안 했냐.”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세요?”

그제야 놈은 플라스틱 칸막이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사람 흘겨보는 기분 나쁜 눈빛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어? 그러네. 너 누구냐?”

“임동추입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임동추. 임동추. 인상을 쓰고서 내 이름을 반복해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놈이 “아아! 그놈이구나!” 하며 손뼉을 탁 쳤다.

“석진경, 그 새끼 좋아하던 병신 같은 놈. 맞지?”

저절로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나와 놈 사이를 가로막은 칸막이만 없다면 당장 놈의 저 머리통을 깨부쉈으리라. 놈은 날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렸다.

“석진경 그 새끼가 말이야. 갑자기 나한테 연락을 해서 자기가 한 번 죽인 여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괴롭히는데 그 여자를 확실하게 처리해 달라, 날 도와줄 수 있는 건 형밖에 없다, 이런 미친 소리를 해 대며 울면서 매달리는 거야. 삼류 대학 다닌다고 늘 날 무시하던 새끼가. 기분이 꽤 좋아져서 큰마음 먹고 50퍼센트 반액 세일을 해 줬지. 그런 일을 의뢰받으면 보통은 큰 거 한 장을 받는데. 너도 그 얘기를 듣고 석진경, 저 새끼 단단히 미쳤구나 싶지 않던?”

석진경은 내게 실수로 여자를 죽였다고만 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참 새끼를 등장시켜 둘이 함께 여자의 시체를 묻었다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늘어놓았었다.

“그 똑똑하고 정나미 떨어지도록 냉정한 새끼를 미치게 한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졌지. 근데 그냥 미친 여자던데? 얼굴은 꽤 예쁘장한 것 같은데 하고 있는 꼴이 서울역 노숙자 뺨치더라고. 몸에서 풍기던 악취는 또 얼마나 심하던지 아직도 그 냄새만 떠올리면 속이 뒤집혀.”

놈은 머리를 득득 긁고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며 어제 본 TV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듯 기가 죽인 여자 얘기를 지껄였다.

“왜 그랬습니까?”

“응? 뭘?”

“왜 나를 사칭했냐고요.”

“아아, 그거? 당연한 걸 왜 묻냐. 너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지.”

“그래서 일부러 그 여자와 남동생을 함께 납치했던 거군요.”

“그렇지. 넌 내가 그 미친 여자를 죽이기 전에 그 여자 동네에 알짱거렸잖아. 석진경 새끼를 돕겠답시고. 병신같이 그 영악한 새끼한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쯔쯔. 갑자기 한적한 시골 마을에 나타나서 알짱대던 수상한 젊은 놈. 폭행당하고 무참히 살해당한 젊은 여자. 자기 누나가 죽는 걸 본 어린 사내애가 누나를 죽인 범인이 너라고 떠벌린다. 내가 직접 범인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들었다. 이런 증언까지 하면 넌 영락없이 살인범이 되는 거야. 어때? 모든 정황이 딱딱 들어맞지 않냐? 기가 막히지?”

이마에 핏대가 솟고 목구멍 안에서 피거품 같은 것이 부글부글 끓었다.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이가 뿌드드득 갈렸다.

5백. 한 여자를 죽이고, 한 아이의 인생을 말아먹고, 7년 동안 내게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씌운 값이 겨우 5백…….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계획을 짠 건 석진경이고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난 떨리는 주먹으로 칸막이를 쾅 쳤다. 구석에 앉아 있던 교도관이 벌떡 일어났다. 칸막이 반대쪽에서 장경필이 히죽 웃었다. 더 이상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교도관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난, 그 애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날 장경필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봤다.

“석진경 그 새끼, 진짜 대단한 놈 같아.”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 새끼는 동시에 나와 너를 도구로 이용했어. 그리고 자기가 한 추악한 짓을 써 놓은 일기장을 내게 보내고 뒈졌지. 죄책감에 못 이겨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야. 난 그 새끼를 알아. 그 새끼는 밑바닥 인생으로 평생을 빌빌거리며 사느니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죽어 버린 거야. 죄책감?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놈이 돈을 주고 사람을 처리해 달라고 일을 맡겨? 나한테 일을 맡긴 게 탄로 나기라도 할까 봐 자기를 도왔던 널 이용하고? 그 새끼는 이 세상에 자기만 존재하는 줄 아는 놈이야. 세상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해. 그 새끼 일기를 보면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리며 죄를 뉘우친 것처럼 보이지? 그건 그냥 흉내를 낸 거야. 일기장을 남한테 보여 줘야 하니까, 보여 주기용 생색을 낸 거라고.”

교도관이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며 장경필에게 다가왔다. 장경필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좌우로 까딱였다.

“석진경이 자살해서 다행인 줄 알아. 그 새끼가 살아 있었다면 넌 산 채로 말라 죽었을 거다. 뭐, 나도 예전에 죽었겠지. 다음에 또 찾아올 거면 사식으로 치킨 좀 사 와라. 비둘기만 봐도 치킨 생각이 나서 죽겠다, 아주.”

놈은 코웃음을 픽 치고는 돌아섰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장경필의 둥글넓적한 몸뚱이를 빨아들이고는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내린 눈이 녹아 교도소 앞은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으로 만들어진 진창 사이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교도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찌걱대는 소리가 나며 회색으로 변한 눈이 짓뭉개졌다.

장경필을 만나면 퍼부으려고 준비했던 온갖 욕과 저주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난 놈의 초연한 태도에 무의식적으로 압도당한 것이다. 놈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놈에게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경필은 죽는다.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놈은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 그런 느낌이 왔다. 영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나조차도 놈에게서 풍기던 짙은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분노, 울분, 서글픔, 짜증, 온갖 감정들이 한데 뒤엉켰다. 걸을 때마다 흙탕물이 튀어 신발 밑창을 더럽혔다. 어렸을 때, 진창에서 싸우는 개 두 마리를 본 적이 있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문 채 두 마리의 개는 빙글빙글 돌았다. 어느 한쪽이 진이 빠질 때까지 절대로 상대를 놔주지 않았다. 그때 난 개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저놈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건가. 무엇을 위해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피를 줄줄 흘리며 싸우는 걸까.

지금의 우리들도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와 다를 바 없다. 우리들이나 저쪽 놈들이나 이미 온몸이 진흙 범벅이 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건가. 돈, 돈 때문이다. 우리들은 돈을 위해 이 일에 뛰어들었다.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을 한다, 이런 허울 좋은 핑계를 대지만 결국 나도 돈을 원한다.

무학 도사의 목숨값. 그게 우리들이 받을 돈이다.

이런 내가 장경필을 욕할 자격이 있나. 모든 일의 원흉인 석진경이나 욕하고 저주해야지.

난 곧장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표 한 장을 끊었다. 석진경의 유해를 뿌린 강이 있는 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놈을 죽이러 간다.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놈을 죽여 없애기 위해 난 버스에 올라탔다.

*

*

그로부터 닷새 뒤. 장경필은 자살했다.

[7년 전에 내가 죽인 미친년이 나를 면회 왔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유서를 남기고서.

7년 전 2월 20일. 석진경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죽은 여자가 억새밭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는 내용의 일기를 쓴 뒤 죽음을 선택했다. 하얀 피부에 무척 키가 큰 미녀가 장경필이 죽기 전에 찾아왔다고 했다.

이름은 한미림.

무학 도사의 죽은 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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