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28)

- 02 -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어요. 다들 난리가 났어요. 마침 CCTV가 고장 나서 형들이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영상은 찍히지 않았지만 척하면 척이죠. 누가 간판도 붙어 있지 않은 사무실에 침입해서 폭격 맞은 꼴을 만들어 놨겠어요. 사무실 안에는 훔쳐 갈 물건도 없는데.]

나민이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아침에 사무실 문을 연 순간 다들 입을 쩌억 벌리고 얼어붙었을 놈들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어떻게 서랍 안에 넣어 뒀던 속옷까지 꺼내서 갈가리 찢어 놨냐면서 더티한 새끼들, 상도덕도 모르는 개새끼들이라며 욕을 하던데요.]

정신 줄 놓고 야생마처럼 길길이 날뛰던 우리들이 지쳐 갈 무렵 노금영이 등장했다. 노금영은 정수기, 머그컵, 로커 안에 넣어 둔 물품들까지 깨부수고 자근자근 밟아 망가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책상 서랍을 열어 개인 물품들까지 하나하나 끄집어내 부수는 비열, 치졸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팬티를 맨손으로 찢고 이로 물어뜯는 짓을 했을 때엔, 저놈이 내 동료라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졌다. 결국 나중엔 다 불 싸질러 버리겠다고 라이터를 들고 설치는 놈을 우리들 모두가 달려들어 간신히 뜯어말려야 했다.

“그 짓을 한 놈은 책상 서랍에서 팬티를 발견하고선 이 새끼는 사무실에서 야동 보며 자위라도 하냐고 욕을 하던데.”

[야동 보며 자위……. 푸흐흐흐. 으하하하!]

나민이가 이렇게 자지러지게 웃는 건 처음 들었다. 웃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하다가 나중엔 숨쉬기도 괴로워졌는지 끄응끄응 앓는 소리까지 내면서도 웃는다.

“창가 가운데 책상이 제일 높은 놈이 앉는 자리 맞지? 그거 아냐? 그 인간 책상 서랍 안에 서양 SM 포르노 잡지 쌓여 있는 거? 그건 구하기 힘든 거라면서 우리 애들이 챙겼다.”

[하하하! 그 인간 여자 더럽게 밝혀요. 술만 마셨다 하면 저한테도 여자 있는 술집 가자고 꼬시는 인간이에요.]

“또라이 새끼. 너 그 새끼 따라갔던 건 아니지?”

[어쩔 수 없이 딱 한 번 끌려갔었어요. 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도망쳐 나왔지만요. 전 여자가 무서워요. 여자들 가슴은 정말 좋은데.]

“너 진짜 어지간히 가슴에 집착한다. 내 가슴이 좋냐? 여자들 가슴이 좋냐?”

[사실대로 말하면 음…… 여자 가슴이 아주 조금 더 좋아요. 폭신하고 말랑해서요.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폭 안기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도 좋고.]

“그건 네가 엄마 젖 제대로 못 먹고 자라서 그래. 나도 여자 가슴은 좋거든.”

그 푹신푹신 말캉말캉한 느낌. 젖 냄새가 나는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살덩어리. 감촉을 떠올리기만 해도 손이 근질거리는 그런 느낌이 있다. 마치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고양이 뱃살이나 강아지들 빵빵한 배의 감촉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우리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대낮부터 가슴 이야기나 하고.]

“좋지 않냐? 평범한 사내놈들이 된 것 같아서?”

[제 나이 또래 사내놈들도 대낮부터 가슴 이야기 하면서 낄낄대진 않는데요.]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여자 얘기 하니까 웃기다. 그렇죠?]

“그럼 이제부터 남자 엉덩이 얘기나 할까? 고추 얘기도 좋고. 태양초 고추 얘기 말고.”

[하하하! 형 가끔 되게 아저씨 같아요.]

녀석이 또 숨넘어가게 웃었다. 기분 좋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섞여 누군가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들이 불러요. 우리 나중에 통화해요.]

“오늘 저녁에 약속 있냐?”

[아뇨. 제가 약속 같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럼 같이 저녁 먹자. 오랜만에 고기 뜯게 해 줄게.”

[형이 사 주시는 거예요? 오늘 포식하겠다. 알았어요. 나중에 사무실에서 나갈 때 전화할게요.]

“아, 그리고…….”

내가 할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전화를 뚝 끊었다. “조심해라. 나민아.” 난 수화기에 대고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릴 리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핸드폰과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찬 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손가락 끝이 저릿하게 아팠다. 오늘 저녁엔 녀석한테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사 줘야지. 애피타이저에 메인 디시, 디저트까지 배 터지게 먹게 해 줘야겠다.

김명진의 클럽으로 찾아가는 사이, 신발 가게에 들어가 나민이의 운동화를 한 켤레 샀다. 녀석에게 도움받은 것이 있으니 보답을 하는 것이 당연한 거다.

목적지에 도착해 난 ‘Closed’라는 푯말이 붙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김명진이 팔짱을 끼고 서서 중년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왔냐?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

김명진은 날 입구에 세워 두고 중년 사내와 몇 분 정도 더 얘기를 나눈 뒤에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형, 가게 관둔다고 들었어요. 저 사람이 가게를 인수받은 사람이에요?”

“송 사장이라고 청담동에 레스토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알아주는 가구 디자이너인 모양이더라. 그나저나 너, 새끼야, 나한테 먼저 사과부터 해.”

김명진은 시비를 걸듯 팔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너, 날 삼시세끼 밥 잘 처먹고 남 험담이나 하는 사람 취급했잖아. 그래, 나 입 싸다. 근데 나, 근거도 없는 거짓말로 죽은 사람을 모욕할 정도로 막돼먹은 새끼 아냐.”

근거 없는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진경이에 관련된 일을 무슨 연예인 뒷말하듯 함부로 지껄이긴 했지.

“죄송해요. 진경이, 그 자식은 젊은 나이에 죽은 것도 불쌍한데 죽어서까지 그딴 저급한 구설에 휘말리나 싶어서 눈이 홱 뒤집히더라고요.”

난 마지못해 사과했다.

“그래, 불쌍하지.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하고 그리됐으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어린 나이에 자살까지 했을까 싶기도 하고. 근데 너도 선아 얘기를 들어 보면 진경이를 무조건 동정할 순 없을 거다.”

내게 실컷 욕을 들어먹은 김명진이 먼저 박선아의 친구인 김연진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선아는 대학 때, 석진경과 가장 친했던 날 만나고 싶다고 했고 김명진이 오늘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

*

클럽에서 나와 약속 장소인 카페를 향해 걸으며 김명진이 뜬금없는 소리를 흘렸다.

“동추야, 사랑이란 게 대체 뭘까.”

김명진과 윤영이의 관계가 삐걱대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랐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글쎄요. 형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네요.”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솔직히 말해 줘라. 동추야. 나, 윤영이 따라 프랑스로 가지 않는 게 낫겠지?”

“네, 가지 마세요. 걔가 유학 간다는 소리는 형이랑 헤어지고 싶다는 뜻인 거예요.”

김명진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카페 문을 열었다. 갓 볶은 커피 향기가 콧속으로 확 파고들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박선아는 여전히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웠다. 나이가 들어 원숙미와 우아함이 더해진 압도적인 미모에 시선이 저절로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박선아는 웃는 얼굴로 나와 김명진을 맞아 주었다.

“선아 누나는 여전히 예쁘시네요. 불로초라도 드셨나. 어째 하나도 안 늙으셨어.”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많이 늙었어. 동추 너야말로 예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진 것 같다.”

“동추, 이 자식이 이 미모 유지하려고 얼마나 발악을 하는데. 아마 동추 이 자식이 선아 너보다 미용 정보는 더 빠삭히 꿰고 있을걸?”

김명진까지 가세한 농담에 박선아는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었다. 남의 가게에 들어와서 커피도 시키지 않고 있을 순 없어서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커피 드실 거죠? 누나는요?”

김명진은 아메리카노, 박선아는 핫 초콜릿을 주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문해 받은 음료 세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 박선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나중에 청첩장 보낼 거긴 하지만 나, 내년 2월에 결혼해.”

“진짜요? 축하해요, 누나. 청첩장은 저한테도 꼭 보내 주셔야 돼요?”

“우와. 축하한다, 축하해. 이렇게 대학 동창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는구나. 그런데 기왕 할 거면 따뜻한 봄에 하지 왜 2월이냐. 한창 추울 때인데.”

“속도위반을 해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

박선아는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난 꽤 놀랐다. 아침 이슬만 먹고 살게 생긴 사람이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하다니.

문득 김명진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대학 시절 그녀가 석진경의 아이를 뱄었다는 얘기. 나도 모르게 그녀의 배를 빤히 바라본 모양이었다. 박선아가 손으로 배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이번이 첫 임신은 아니지” 하며 운을 뗐다.

“동추, 너도 알지? 맞아. 나 진경이의 아이를 뱄었어. 그 애를 좋아했었거든. 진경이도 날 좋아했고. 하지만 나도 걔도 제대로 사랑을 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거야. 그때 우린 너무 어렸지.”

이미 한 번 들은 이야기라 확실히 충격은 덜했다. 하지만 왠지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박선아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서웠어. 부모님께 알리지도 못하고 학교 친구들이 전부 나만 바라보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 학교도 나갈 수 없었어. 몸 상태가 최악이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그렇게 괴로웠던 게 입덧 때문이더라. 학생이었던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가진 돈도 없고 당장 아이를 낳는다 해도 뭘 해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너 혼자 임신한 것도 아닌데 왜 혼자 벌벌 떨었어? 진경이랑 상의를 했어야지.”

“물론 말했지. 그런데 어디 좀 모자란 것처럼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만 다니던 애가 내가 임신을 했다고 하니까 태도가 싹 변하더라. 애를 지우래. 낙태 비용은 자기가 마련해 준다면서.”

허벅지 위에 올려 둔 내 손이 흠칫 떨렸다. 난 그때에서야 시선을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박선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날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초점 잃은 시선이 흔들렸다. 박선아는 곱게 루주를 칠한 입술 끝을 잘근 씹었다.

“세상에, 진짜? 진경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걔가 얼마나 착했는데. 걔 별명이 진경 보살이었잖아.”

“그래. 참 착했지. 나도 그 착한 성격에 끌려서 사귀게 된 거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을 말해 줄까? 내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아이 못 지우겠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결혼하자고 하니까 진경이가 그러더라. 미쳤냐? 제정신이냐? 인생 망치려면 혼자 망치지 왜 내 인생까지 망치려 드냐. 이런 일로 발목 붙잡히고 싶지 않다. 피임도 잘 못해서 애가 생긴 건 순전히 네 탓인데 왜 자기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냐고……. 온갖 욕을 하면서 미친 듯이 날뛰더라. 정말 무서웠어. 걔가 날 죽일 것 같아서.”

“미친 새끼.”

김명진이 서슴없이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서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군대에 가 버리더라.”

결국 박선아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자마자 얼른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김명진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감싸고선 잠시 어깨를 떨며 소리 죽여 울었다.

“허, 거참. 쓰레기 같은 새끼. 그 새끼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 앞에서는 온갖 착한 척을 다 하더니 그게 내숭이었단 얘기잖아.”

김명진은 커피로 입을 헹구며 옆에 앉은 날 흘끔 바라보았다. 나도 석진경 욕을 하며 박선아를 위로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 없이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꺼풀이 경련하지도 볼이 꿈틀거리지도 않는다. 표정 짓는 것을 잊어버린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커피만 기계적으로 마셨다.

몇 분 동안 계속 울기만 하던 박선아가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를 손수건으로 꾹꾹 찍어 누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들어야만 한다. 적어도 나는 이 여자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난 진경이한테 편지를 썼어. 네가 뭐라고 하든 아이를 낳을 거라고. 아이 낳고 네가 제대할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답장은 한 번도 오지 않았어. 단 한 번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몇 통이나 보냈는데. 결국 부모님이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아시게 되고 아이는 유산됐어.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남 보기 부끄러우니까 외국에 나가라고. 거기서 외국 남자 만나서 살림을 차리든 말든 너 같은 거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부녀의 연을 끊자고…….”

“동기 녀석들은 넌 집에서 외국 유학도 보내 준다면서 되게 부러워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너희들이 공항까지 배웅하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 내가 그때 너희들 앞에서 너무 울어서 다들 놀랐을 거야.”

“놀라긴 했지. 그때 너 꼭 죽으러 가기라도 하는 애처럼 우릴 보고 펑펑 울었으니까.”

“죽으러 가는 것과 비슷하긴 했지. 그때만 해도 다시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근데 난 외국 나가서 살 체질은 아니더라. 엄마랑 한국 음식 생각나서 병이 날 정도였으니까.”

박선아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웃었다. 그녀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진경이는 내가 죽인 거야.”

그녀는 여전히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너 때문에 걔가 죽다니. 왜 그런 생각을 하냐?”

“그게 아니면 걔가 군대에서 자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내가 외국에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냈었어. 내 인생 이렇게 만든 널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학교에 다 말하고, 네 어머니한테도 말해 버릴 거라고 협박했어. 난 이렇게 망가졌는데 너 혼자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복하게 살게 놔두진 않을 거라고.”

김명진은 무슨 말이든 하려 입을 벌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날 바라보는 박선아의 시선이 칼날이 되어 내 몸 여기저기를 쑤셨다.

“진경이는 나 때문에 죽은 거지?”

내게 향한 질문임에 분명했다. 난 컵 안의 커피만 노려보았다.

“내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진경이는 자살하지 않았겠지? 나, 못된 여자 맞는 거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인 거지?”

“선아 네가 왜 이기적이야? 네가 군대에 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군대란 곳이 온갖 스트레스 요인이 넘쳐나는 곳이야. 걔가 자살한 이유가 네가 보낸 편지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여러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었을 거 아냐. 아직도 가끔씩 꿈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진경이가 나와. 네가 아니었으면 난 죽지 않았을 거라고 걔는 끊임없이 날 원망해. 결혼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난 매일매일 고민하고 또 고민해. 이 결혼을 꼭 해야 할까. 내가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자격이나 있을까. 난 사람을 죽인 여잔데. 나 때문에 한 사람이 그렇게 됐는데…….”

“누나 때문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커피를 마셨음에도 입 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난 눈물에 젖어 엉망이 된 박선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경이가 죽은 거, 누나 때문이 아니에요. 전 진경이와는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으니 잘 알아요. 그 자식이 그렇게 된 거, 누나 탓이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시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세요.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요.”

“동추 넌 진경이가 자살한 이유가 뭔지 알고 있어?”

“진경이가 군대 내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 일 때문에 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요.”

박선아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듯 후두둑 떨어졌다. 아마 다시 터진 그녀의 눈물은 오래도록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누나는 잘못한 거 하나 없어요. 그러니 행복해지세요. 아이 낳고 남편이랑 예쁘게 살아 봐요. 지금까지 고생만 했으니 이제 행복하게 살 자격 있어요, 누나는.”

박선아는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수그렸다. 윤기가 흐르는 고운 머리칼. 동그란 뒤통수. 옷 사이로 드러난 희고 가는 목덜미.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

저 여자만큼이나 예쁘고 아름다웠다. 내 기억 속의 석진경은. 드라마 속의 여대생처럼 두꺼운 전공 서적을 옆구리에 끼고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동추야!’, 날 부르며 뛰어오던 그 애는.

더 이상 박선아의 울음소리를 덤덤하게 듣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요, 누나. 제가 그 자식 대신 사과할게요.”

수그린 작고 둥근 여자의 뒤통수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기 전에 난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퇴근 시간 전의 평일인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금색 머리칼을 지닌 사람, 파란 눈을 지닌 사람, 까만 피부를 지닌 사람. 한국어와 영어, 일어, 중국어,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언어들이 뒤죽박죽 섞인 소음들이 거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은 채로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니 사람들과 몇 번이나 부딪쳤다. 대부분 외국어로 먼저 사과를 해 왔다. 그들 눈에 비친 나는 먼저 부딪친 주제에 사과도 하지 않는 무례한 한국인일 것이다.

바람이 찼다. 얼굴, 손발, 몸뚱이, 내장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고물상에 잔뜩 쌓인 폐기물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한 날 무심히 지나쳤다.

지나는 길에 붕어빵을 샀다. 아무 생각 없이 홀리듯 노점에 다가가 돈을 내고 붕어빵 봉지를 받아 들었다. 빵 하나를 입에 물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눈물이 굴러떨어져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먹던 붕어빵을 뱉었다.

“맛 더럽게 없네.”

난 볼을 가득 부풀려 중얼거리며 점퍼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웬일이야? 이번 주말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어쩌나, 반찬도 없는데.”

화장기 하나 없는 누렇게 뜬 얼굴을 한 진경이의 어머니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줌마는 몇 달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마르고 초췌해졌다. 얼굴에 생기가 하나 없는 게 중병을 앓는 환자 같다.

“밥은 됐어요, 아줌마. 오늘은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에요.”

“근데 너 울었니? 눈가가 발갛다. 왜? 무슨 일 있어?”

그녀는 손을 뻗어 벌겋게 짓무른 내 눈가를 건드렸다.

겨우 잠재운 감정이 다시 왈칵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하나뿐인 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 인생의 유일한 빛이었던 아들을 잃고 마지못해 살고 있는 사람. 당신은 상상조차 못 하겠죠. 당신의 착한 아들, 자랑스러웠던 아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아마 당신은 그 얘기를 들으면 쓰러져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겠지요. 머리 좋고 착했던 외동아들을 추억하며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아뇨. 울기는요. 안구건조증이 심해서 눈을 비비다 보니 이렇게 된 거예요.”

난 웃는 얼굴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래. 요즘 젊은 사람들, 하도 컴퓨터를 오래 봐서 다들 눈 건강이 별로라더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와. 어유, 손 차가운 것 좀 봐.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장갑을 끼고 다녀야지.”

그녀는 자신의 양손으로 얼어붙은 내 손을 문질러 주었다. 조금의 부드러움도 느낄 수 없는 거칠고 메마른 손이다. 문득 아까 먹은 인생 최악의 붕어빵 맛이 떠올랐다. 진경이네 어머니가 구워 파는 붕어빵은 정말 달콤하고 고소했는데.

“저, 아주머니. 진경이 유품들요. 아직 정리 안 하셨지요?”

“그래. 어떻게 그걸 정리할 수 있겠어.”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응, 상관없어. 진경이 쓰던 작은 방에 가면 상자가 하나 있거든. 그 안에 다 넣어 놨으니까 꺼내 보고 있어. 난 잠깐 마트에 갔다 올 테니까.”

“괜히 저 때문에 가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냉장고가 텅텅 비어서 반찬거리 좀 사러 가야 돼. 목마르면 냉장고에 주스 있으니까 꺼내 마시고. 금방 다녀올게.”

난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내가 찾아오면 손수 밥 한 끼 차려 먹여 보내는 게 그녀의 큰 즐거움이란 걸 아니까.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지갑 하나 달랑 들고 나가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아들 친구를 혼자 놔두고 나가고, 나도 아무도 없는 남의 집에 혼자 있는 게 어색하지가 않다.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날 혼자 두고 장을 보러 나가곤 했었다.

난 곧바로 진경이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방 안은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주기적으로 방을 청소하는 모양이었다. 책상 한구석에 놓인 스탠드와 탁상시계, 책장에 꽂힌 책들, 의자에 걸린 보풀 일어난 후드 점퍼.

몇 년 전, 몇 달 전에 보았던 광경 그대로다. 석진경의 유품이 든 상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 몇 달 전, 이 집에 찾아왔을 때에도 이 방을 한 번 대충 둘러본 기억이 난다. 방 한구석에 놓인 종이 상자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일부러 보고도 못 본 척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석진경이 학교 앞 자취방에서 쓰던 물건들과 군대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물품들이 든 상자. 난 감히 저 상자를 열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건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상자에 손도 대기 싫다고 했다. 상자를 열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면 내 새끼는 진짜 이 세상에 없구나, 뼛속 깊이 절감하게 될 것 같다고 하시면서.

난 지금까지 애써 외면했던 방 한구석의 상자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상자 입구를 봉해 놓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테이프는 이미 오래전에 접착력이 사라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바삭바삭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상자 겉면뿐만 아니라 안까지 먼지가 가득 들어차 콧속이 간질거렸다. 7년이나 밀봉해서 방치한 터라 상자 안에선 눅눅한 곰팡이 냄새 비슷한 게 났다.

낡은 옷 몇 개. 칫솔. 수건. 컵. 반쯤 남은 로션. 보습 크림. 속옷과 양말. 녀석이 좋아하던 작가의 책 몇 권과 중국어 교재. 녀석은 학교에서 그렇게 공부를 하고도 군대에 가서 또 새로운 공부를 할 생각이었나 보다.

옷 사이에 들어 있는 전자시계를 발견했다. 내가 녀석에게 군대 잘 다녀오라며 사 준 것이다. 너무 저렴해 보이지 않고, 디자인이 촌스럽지 않은 걸 고르려고 몇 시간 동안이나 동대문을 뒤졌던 기억이 난다.

싸구려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라 다른 것보다 값은 좀 비싸도 튼튼하고 오래간다던 가게 주인의 말대로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망가진 부분 하나 없이 멀쩡하게 시간을 알려 주는 걸 보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검은색 비닐 커버의 공책 한 권을 펴 들었다.

진경이가 군대에 가기 전, 학교에 다니면서 쓴 일기장이다.

혹시 박선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 싶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독했건만 별거 아닌 내용들만 가득했다. 교수님의 수업 내용, 과제 이야기, 이번에도 장학금을 탔다, 학교 선배들은 다 좋은데 술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오늘 학교 식당 밥은 별로였다, 이런 시시콜콜한 내용들. 나쁜 내용은 하나도 없고 좋은 내용들만 가득하다. 마치 선생님에게 보여 주기 위해 좋은 내용만 서술하는 초등학생들 그림일기처럼.

학교에 다니면서 싫은 일, 나쁜 일 하나 없었을까. 선배들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후배들 기선 제압한다고 술을 퍼먹여 신입생 한 명을 응급실 신세 지게 한 개새끼들도 있었다. 같은 학년 친구들이라고 다를까. 좋은 놈, 나쁜 놈, 성질 더러운 놈,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놈. 온갖 유형의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임동추란 녀석과 친구가 되었다.>

친구들과 술 마신 이야기 뒤에 잠깐 내 이름이 등장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석진경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난 조심스럽게 일기장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도 녀석이 학교 식당에서 내게 점심을 사 주었다. 이상한 녀석. 얼굴이 잘생겨서 그 자식한테 관심 있는 여자애들도 많은데. 여자애들한테는 자판기 커피 한 잔 안 사 주면서 나나 동성 친구들한테는 커피도 잘 사 주고, 술도 사 주고 그런다. 다른 친구들한테도 잘하지만 나한테는 필요 이상으로 잘해 주는 듯해서 좀 부담이 된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다. 내가 석진경에게 밥을 사 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리고 학교 여자애들이 나한테 관심이 많았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내가 여자애들한테 하도 쌀쌀맞게 굴어서 걔들은 다 날 싫어하고 욕하는 줄 알았는데.

웃긴 게 그 당시엔 티 안 나게 잘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석진경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한테도 여러 번 밥을 사고 술을 사면서 난 널 친구로 생각해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별 뜻은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거. 석진경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거.

그런데 석진경의 눈에는 훤히 보였던 모양이다. 얼굴에 열이 확 올라 부채질을 하며 다음 장을 넘겼다.

<동추는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몇 월 며칠. 삐뚤빼뚤하게 쓴 날짜 아래에 쓰여 있는 달랑 한 문장. 녀석도 이 문장을 쓰고서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볼펜으로 지익 그어 놨다.

쥐구멍에라도 머리를 들이밀고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녀석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애 보는 것처럼 지켜봐 왔다는 거. 내 마음을 눈치챘다 해도 그 녀석이 뭘 할 수 있었을까. 어차피 보답 받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다. 난 녀석을 정말 좋아했지만 녀석도 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물론 녀석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내가 해 준 것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돌려받고 싶은 보상 심리도 존재했다. 예나 지금이나 난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놈이니까.

빈 페이지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학교생활을 적은 일기는 거기서 끝났다.

다른 일기장이 없나 싶어 상자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죄 끄집어냈다. 공책 몇 권을 발견했지만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필기한 노트였다. 하지만 난 수북이 쌓인 물건들 속에서 이상한 걸 하나 발견했다. 열어 보지도 않은 누런 소포 봉투였다. 여느 소포 봉투와 다를 게 없는 형태지만 이상한 건 봉투 앞에 적힌 주소지였다.

발신인이 장경필, 수신지는 바로 이 집, 받는 사람의 이름은 석진경.

장경필은 진경이가 자취하던 집 옆방에 살던 형의 이름이다.

‘본인 외에 뜯어보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를 보고 아주머니는 소포를 뜯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진경이의 책상 위에 놓아두고 녀석이 휴가 나왔을 때 주려던 생각이었을 터다.

보낸 날짜를 보니 7년 전 2월 25일이다. 진경이 녀석이 죽기 이틀 전에 날아온 소포.

난 뭔가에 홀린 듯 봉투를 잡아 뜯었다. 김태민이 배달 의뢰하던 과일 상자 입구를 잡아 뜯었을 때처럼 시꺼먼 덩어리 같은 것이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안에 든 것은 상아색 뼈가 아닌 노트 한 권이었다.

방금 전 내가 펼쳐 봤던 검은색 비닐 포장지에 둘러싸인 것과 똑같은 재질의 노트. 페이지를 펼치는 손가락 끝이 떨렸다. 누가 등 뒤에 서서 몇 페이지를 펼쳐 보라고 속삭이기라도 하듯 저절로 손가락이 움직여 십몇 페이지를 건성으로 휙휙 넘겼다.

그리고 난 발견하고 말았다.

가로로 죽죽 그어진 칸을 다 무시하고 쓴 문장 하나.

<여자를 죽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외출했던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오징어가 싱싱하기에 사 와 봤어. 매콤하게 오징어 볶음 해서 먹자. 밝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사 들고 온 것들을 정리했다. 난 펼쳐 들었던 노트를 얼른 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보겠습니다.”

“밥은 먹고 가지. 금방 만들어 줄게.”

“당장 가서 해야 하는 급한 일이라서요. 밥은 나중에 먹으러 올게요.”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집 밖으로 달려 나왔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트를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품속에 쑤셔 넣었다. 낮에 샀던 운동화를 진경이의 집에 두고 온 걸 깨달았지만 다시 돌아가기가 싫었다.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진경이네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나눌 자신이 없었으니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나민이일 것이다.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으니까.

[어디세요? 저 지금 사무실에서 나왔는데.]

“아무래도 7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오늘은 그래야 돼. 현재의 인생은 나중에 즐겨도 되니까.”

입을 열어 중얼거리고는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알아듣게 설명 좀 해 주세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 미안하다, 나민아. 밥은 다음에 먹자.”

형.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왜 그래요? 형. 혀엉! 녀석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한 귀로 들어왔다가 한 귀로 흘러나왔다. 현재 내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의 목소리가 산속의 메아리처럼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저기 보이는 고깃집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번쩍거리는 광이 나는 싸구려 점퍼를 걸쳐 입고 야구 모자를 쓴 남자. 담배를 뻑뻑 피워 물며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저 남자는 7년 전의 석진경이었다.

<동추야, 임동추.>

날 부르는 석진경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긁었다. 그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음산했다. 눈을 감았다 뜨자 고깃집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날 부르던 우중충한 목소리 대신 자동차 소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 *

<20XX년 1월 7일>

여자를 죽였다.

동네에서 유명한 미친년. 오늘도 그년이 철조망을 넘어온 모양이다. 보초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귀신 산발을 해서는 억새밭 사이에서 튀어나와 나한테 달려들었다. 밤늦게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쏘다니다가 미친 새끼들한테 더러운 짓을 당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년을 죽였다.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할퀴는 게 짜증이 나서 총 머리로 딱 한 번 후려갈겼는데 죽어 버렸다.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어떡하지? 어떡하지? 내가 죽인 거야? 진짜 죽었어? 그년이 먼저 나한테 달려들었다고.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살짝 밀친 것뿐이야. 왜 죽고 지랄이야. 제길!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20XX년 1월 8일>

억새밭에 숨겨 놓은 여자의 시체를 옮겼다. 고참 개새끼한테 피 같은 담배 한 보루를 상납했다. 겨울이라 땅이 얼어붙어 구멍을 파다가 죽는 줄 알았다. 식당 주인인 아버지와 어린 남동생이 있다던데. 딸이 사라졌다고 실종 신고를 했을까. 경찰이 그 여자를 찾고 있을 텐데. 구멍에 집어 처넣고 흙을 덮으려다 보니 죽은 년이 꽤 예뻤다.

눈물이 났다. 왜 난 이렇게 운이 없는 걸까. 박선아에게 못되게 군 벌일까. 박선아는 진짜 내 아이를 낳을까? 아이가 태어나도 아빠란 놈이 살인자인데 어쩌나. 내가 감옥에 처박혀도 박선아는 면회를 와 줄까. 엄마가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우리 엄마.

<20XX년 1월 10일>

휴가가 5일 남았다. 탈영할까. 영창에 처박히나 감옥에 처박히나 그게 그거 아닐까.

<20XX년 1월 12일>

아무래도 난 미쳐 버린 것 같다. 보초를 서다가 억새밭에서 그 여자를 봤다. 살아 있었던 건가? 하지만 숨이 끊긴 걸 분명히 확인했는데. 여자는 마른 억새 잎을 흔들며 뛰어놀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이 희었다. 회반죽 칠을 해 놓은 것처럼 푸르스름한 흰색이다.

여자가 날 발견했다. 웃는 얼굴을 하고서 곧장 뛰어왔다. 여자의 얼굴은 웃는 모습의 가면을 씌워 놓은 것 같았다. 산발이 된 머리칼에는 마른 잎 같은 것들이 붙어 있고 두 눈은 벌겠다. 여자가 들고 있던 억새 잎으로 내 가슴을 쿡 찌르면서 말했다.

네놈이 날 죽였지? 히죽 웃는 입술 한쪽이 귀까지 쭈욱 찢어졌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가 온통 붉었다. 벌어진 여자의 입에서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난 기절했다. 눈을 떠 보니 의무실 침대 위였다. 군의관이 피로가 쌓여서 이리된 거니 푹 쉬다 가라고 했다.

날 보고 웃던 여자의 창백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난 미친 걸까.

<20XX년 1월 13일>

그 여자를 다시 만났다. 머리에 하얀 국화꽃을 꽂고서 여름용 원피스에 샌들을 신고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는 또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네가 날 죽였지?

여자가 갑자기 내 손목을 물었다. 깜짝 놀라 여자를 밀쳐 내자 여자가 휘청대며 낄낄낄 웃었다. 여자의 입술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손목 살점은 움푹 패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자가 입술에 묻은 피를 핥아먹었다. ‘널 잡아먹을 거야’라고 했다.

잡아먹을 거야. 잡아먹을 거야. 널 산 채로 잡아먹을 거야. 난 여자한테 잡아먹히는 건가.

여자는 살아 있다. 어쨌든 살아 있다. 나도 미쳤고 여자도 미쳤고 세상 모든 게 다 미쳤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20XX년 1월 14일>

휴가 나가는 날. 임동추가 생각났다. 날 좋아하는 호모 새끼 임동추.

<20XX년 1월 16일>

임동추는 역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래 봤자 자기가 뭘 할 수 있다고. 날 바라보던 눈빛이 장난이 아니더라. 그 새끼는 날 정말로 좋아하나 보다. 역겨운 새끼.

<20XX년 1월 20일>

장경필에게 연락. 엄마에게 부탁해서 통장에 저금해 둔 돈을 그 새끼에게 모두 입금했다.

지금쯤 임동추 그 새끼는 강원도에 와 있겠지. 아무리 산 구석구석을 뒤져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임동추가 이번 일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그 약속 꼭 지켜라, 임동추. 나중에 한 번 자 줄게.

<20XX년 1월 29일>

임동추 새끼가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지만 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겠다고 지껄였다.

우는소리를 좀 해 줬더니 자기만 믿고 있으란다. 병신 같은 새끼.

장경필과 통화했다. 1주일 안에 일을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할 거냐고 물었다. 그건 일급비밀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개새끼. 그 많은 돈을 받아 처먹어 놓고서.

오늘 밤에도 미친년이 날 물어뜯으려고 했다. 깨무는 힘도 약하고, 휙 밀치니까 확 주저앉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운이 많이 없어진다. 썩은 내도 더 심해진다. 피부색이 가면 갈수록 흙빛이 된다. 오늘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회색이다. 꼭 산송장 같다.

<20XX년 2월 5일>

장경필이 여자를 처리했다고 한다.

산송장이 죽었다. 이번엔 내가 그 여자를 죽인 게 아니다. 임동추 그 새끼가 죽였다.

<20XX년 2월 10일>

박선아에게서 편지가 왔다.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만든 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란다. 자기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학교에 다 말하고, 엄마한테도 말해 버릴 테니까 각오하란다. 난 이렇게 망가졌는데 너 혼자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복하게 살게 놔두진 않을 거라고 한다. 씨발.

행복해? 누가? 난 이미 완전히 망가졌는데.

<20XX년 2월 15일>

박선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없는 번호란다. 엄마와 통화했다.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커다란 짐승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산 채로 잡아먹히는 꿈을 꾼다. 잠을 잘 수가 없고 밥도 먹을 수 없다. 사정도 모르고 고참 새끼들이 날 갈군다. 놈들을 소총으로 다 갈겨 버리는 상상을 했다.

<20XX년 2월 20일>

여자는 이제 확실히 죽었는데도 난 아직까지 매일 밤 억새밭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춤추는 여자를 본다. 여자가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날 죽일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난 확실히 미쳤다.

선아 누나. 미안해. 엄마. 미안해. 임동추. 미안하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 미안해. 다들 행복하게 살아. 나도 출세해서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게 일기의 마지막 장이었다.

마지막 일기를 쓰고 1주일 뒤인 2월 27일. 석진경은 죽었다.

7년 전 2월 20일경, 석진경은 죽음을 결심하고 이 일기장을 장경필에게 우편으로 보냈을 것이다. 군인이 복무 중 자살하면 군 관계자들이 자살자의 유품을 조사한다. 자살한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서다. 자신이 죽는 이유를 밝히고 싶지 않았을 터다.

장경필은 일기장을 우편으로 받자마자 다시 석진경의 집으로 보냈다. 일기장 앞에 ‘너와 나 사이의 일은 깔끔하게 끝났으니 더 이상 날 네 일에 끌어들이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적어서.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이래야 어떻게 장경필이 석진경이 군에서 쓴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걸 석진경의 집으로 돌려보냈는지가 설명이 된다.

난 소주병을 기울여 잔에 또로록 따랐다. 안주로 시킨 꼼장어에는 손도 대지 않고 벌써 소주만 세 병째 마시는 중이다. 소주를 입 안에 탁 털어 넣자 미간 사이가 구겨졌다. 소주 맛이 쓰다. 입맛도 쓰고 술맛도 쓰고 눈도 시리다.

7년 만에 밝혀진 진실이란 게 이렇다.

어떤 사랑에 눈먼 새끼가 실컷 이용만 당했다는 거. 여자를 죽였다는 말 외에 석진경이 했던 모든 말이 다 거짓이었다는 거. 내 목숨까지 던질 각오로 사랑했던 소중한 첫사랑이 알고 보니 거짓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악당 캐릭터였다는 것.

“바보 같은 새끼.”

난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면서 킥킥대며 웃었다.

난 결국 역겨운 호모 새끼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든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덜떨어진 놈.

거짓 눈물 줄줄 흘리며 내뱉은 그 새끼의 거짓말에 홀랑 속아 넘어가서 손 꼭 붙잡아 주면서 나만 믿어,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줄게, 호기롭게 지껄이던 같잖은 자식.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난 진심으로, 마음으로 녀석을 사랑했는데 놈은 날 친구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 이런 놈을 사랑했다. 이런 새끼 때문에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20대 초중반을 반미치광이가 된 상태로 보냈다.

이런 개새끼를 그리워하고,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했다. 내가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녀석이 혼자 괴로워하다가 죽은 거라며 자책하면서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놈의 어머니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냈다.

그동안 흘렸던 내 눈물, 내 고통, 내 괴로움. 그건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난 소주를 아예 병째로 털어 마시며 테이블 위에 둔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2월 20일에 쓴 마지막 내용을 글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읽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의 나열. 놈은 죽기로 결심하고서야 박선아와 나, 자기가 죽인 여자에게 사과했다. 마지막 문장이 물에 번져 뿌옇게 흐려진 걸 보면 놈은 울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순간에 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서웠을까. 슬펐을까. 개새끼로 산 인생을 후회하고 반성했을까. 죽은 놈은 말이 없다. 놈이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놈은 자신이 죽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물론 자기가 저지른 죄는 죽음으로 용서받았겠지. 하지만 어쩌나. 살인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나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충격에 미쳐 버린 한 아이는. 자기가 녀석을 죽인 거라고 오해하고 지금까지 괴로워했던 박선아는.

놈을 땅속에 파묻었으면 무덤에 찾아가서 다 썩어 버린 뼈를 파헤쳐 난도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놈의 유해는 강에 뿌렸다. 거기에 찾아가 침이라도 뱉고 욕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다고 내 마음이 편해질까.

석진경은 죽었다. 화장해서 뼛가루까지 뿌린 놈을 다시 데려와 갈가리 찢어발길 순 없다. 하지만 장경필은 살아 있다. 그 새끼는 살아 있어야만 한다.

난 빈 소주병을 테이블에 터억 내려놓고 일기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 일어섰다. 눈앞의 모든 게 빙글빙글 돌고 다리가 꼬여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걸었다.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내일 날이 밝자마자 장경필을 찾는다. 나를 사칭해 무학 도사의 딸을 죽였을 게 분명한 그 새끼의 모가지를 붙잡아 갈색 가면의 앞에 내던져 줄 것이다.

“죽자, 죽어, 죽어 버리자. 이놈의 인생 살아 봤자 뭐 하겠어!”

난 인적이 뚝 끊긴 밤거리에 대고 고함을 쳤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말리는 놈 하나 없네. 저것 봐라. 저 앞에 전봇대도, 하늘에 떠 있는 달도, 지나가는 고양이까지 날 바보 새끼라고 비웃는다. 왜 사냐, 왜 살아, 하면서 침을 퉤 뱉는다. 난 나를 비웃는 모든 것들에게 “으아아아!” 크게 한 번 외쳐 주었다. 목청껏 외친 뒤에 날 바보 새끼라고 욕하던 전봇대를 끌어안고 속에 든 음식물을 성대하게 게워 냈다.

*

*

“으으음. 물, 무울.”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손으로 주위를 더듬었다. 주위를 더듬는다고 물이 나올 리가 없다. 물을 갖다 바칠 사람도 없고. 일어날 순 없어서 뒤척거리며 갈증을 참아 보려 했지만 위액이 역류해 토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겨우 눈을 잡아 떴을 때. 어둠 속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두 개의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성대가 순식간에 오그라들면서 꺼거걱대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예전에는 숱하게 가위에 눌렸었다. 자다가 눈을 뜨면 누군가 천장에 달라붙어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무서워서 눈을 감고 싶은데 눈을 감을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손가락이 움직였다. 조용히 날 응시하는 두 개의 빛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뿐이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하지만 눈은 사라지지 않는다. 숨소리가 났다. 거칠어진 내 숨소리. 그리고 작고 안정적인 또 다른 누군가의 숨소리. 어둠 속에 누군가 있다. 누가 내 방 안에 들어와 지금까지 잠든 날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 나민이?”

꽉 막힌 목구멍에서 쉬어 터진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말끝이 올라갔다. 날 응시하는 두 개의 빛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놈이 천천히 눈을 깜빡인 것이다. 난 조심스럽게 침대에 달라붙은 몸을 움직였다. 손으로 침대 바닥을 딛고 상반신을 일으키려 한 순간. 어둠 속에서 날 지켜보던 시꺼먼 형체가 휘익 내게 달려들었다.

흡사 짐승에게 습격당한 것처럼 놈은 자신의 팔과 다리 사이에 나를 가뒀다. 날 보는 놈의 윤기가 번지르르한 갈색 얼굴엔 커다란 네 개의 눈이 뚫려 있었다.

“팔자 좋아. 이런 상황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고.”

갈색 탈에서 용천 도사의 집에서 들었던 이질적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흙 비린내, 물비린내, 옅은 피비린내 따위나 풀풀 풍기는 걸 보니 이놈은 진짜 갈색 가면이 맞다. 싸구려 향수 냄새 풍기던 가짜가 아니란 말이다. 눈앞에 있는 이놈이 진짜 그 새끼라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뭔가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분노? 그것과는 약간 종류가 다르다.

반가움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옛 지인을 만난 것 같은 그런 감정.

치밀어 오른 감정의 정체를 깨닫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분명 내가 취해 있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일 거다.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가슴 두근거렸던 첫사랑의 추억, 7년 묵은 그리움, 애틋함, 슬픔, 죄책감,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난 취해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옛 감정과 밀려드는 새로운 감정. 감정이라는 술독에 푹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야, 반갑다.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난 웃으며 가슴 울렁이게 하는 감정을 말로 끄집어냈다.

“취했군.”

놈은 한 마디로 지금의 내 상태를 정의했다. 내 입에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너, 이 새끼 우리 집 오는 거 처음이지? 남의 집에 처음 왔으면 두루마리 휴지라도 사 와야 되는 거잖아. 하여튼 애새끼가 싸가지가 없어, 싸가지가.”

난 버릇없는 학원 애들에게 하듯 손가락으로 놈의 이마를 툭툭 쳤다. 놈도 기가 막힌 모양인지 픽픽대며 웃음을 흘렸다.

“취한 꼴이 제법 귀여운데?”

“비켜 봐라. 목말라 죽겠다. 화장실도 가고 싶고.”

“싸서 말려. 흉보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 미친……. 이 새끼 제법 농담도 할 줄 알고…… 으하하하! 콜록콜록!”

웃다가 거하게 사레가 들어 한 몇 분 동안 기침만 해 댔다. 기침하다가 숨이 막혀 죽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오래전에 부러졌다 다시 붙은 갈비뼈 부근이 미친 듯이 쑤셨다. 놀랍게도 놈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쌔액쌔액대는 내 등을 두들겨 주었다.

“미쳤군.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셔? 이딴 식으로 살다간 제명에 못 죽어.”

“웃긴 새끼. 날 가장 괴롭히는 게 누군데. 누가 누구 걱정을 해.”

“당신이 비명횡사라도 하면 곤란해. 내가 7년을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발버둥 쳤으니까 당신은 적어도 앞으로 14년 이상은 더 괴로워하며 살아야 해.”

놈은 그렇게 빈정거리며 내게 플라스틱 물통을 던졌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500밀리리터짜리 생수통이다. 혼자가 아니었다. 현관문 유리창에 검은 인영이 비쳤다. 언제나 갈색 가면 놈 옆에 달라붙어 있는 하얀 가면을 쓴 귀면일 것이다.

갈색 탈을 쓴 놈의 얼굴이 물을 마시는 날 바라보았다. 네 개의 구멍이 뚫려 있지만 반짝이는 빛이 도는 건 위의 구멍 두 개뿐이다.

난 놈의 왼손이 벌겋게 물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피와 흙이 뒤섞여 말라붙은 것이다.

“다쳤냐?”

놈은 말없이 왼팔을 들어 올려 벌게진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도 보고 팔을 접었다 폈다 하기도 했다. 놈도 지금에서야 손의 상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신기해. 다치면 아파.”

“당연하지, 미친놈아. 다치면 누구나 다 아파. 살아 있는 생물이니까 고통을 느끼는 게 당연한 거다.”

“고통 따위 느끼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죽고 싶은 것도 아냐.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난 왜 살아 있는 거지?”

이제야 내가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놈도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평소의 놈이었다면 내가 괴로워하든 말든 아랫도리 발딱 세우고서 몇 번이나 쑤셔 댔을 텐데. 오늘은 어째 독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하고 싶은 게 왜 없어? 적어도 14년 이상 날 달군 철판 위에서 살살 굴려 가며 괴롭힐 거라면서? 너도 나 없는 데서 픽 쓰러져 죽거나 하지 마라. 넌 내가 죽인다.”

갈색 가면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 개똥아.”

정혜 도사에게 들었던 놈의 이름을 불러 봤다. 붉은 피딱지가 말라붙은 손가락을 움직이던 놈이 흠칫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내가 그 이름을 아냐고? 정혜 도사라고 알지? 그 여자가 말해 줬다. 전부 다. 무학 도사가 사실은 네 아빠라는 거, 죽은 누나가 사실 네 엄마라는 거. 그런데 개똥아, 넌 왜 네 엄마를 누나라고 부르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도 아니고.”

가짜 갈색 가면 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빈정거림을 섞어 던졌다. 놈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머리카락이 다 뽑혀 나갈 것 같은데도 실실 웃음이 났다. 그래, 이래야 네놈답지.

“다 늙어빠진 네놈 아부지가 자기 양녀랑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거 들키기 싫으니까 누나라고 부르게 시키데? 하긴 사람들 시선이 두려워서 자진해서 시골구석에 처박힌 양반이니. 네 엄마란 여자도 참 불쌍타. 자기가 원해서 그 영감탱이랑 그런 관계가 된 거라면 다행이지만…….”

“무학 도사는 욕해도 돼. 그 인간은 욕을 들어 먹어도 싼 개새끼니까. 하지만 내 착한 누나를 모욕하지 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네 그 착한 엄마를 죽인 거, 내가 아냐.”

“또 그 소리인가? 지겹지도 않아?”

“이번엔 확실한 증거도 있어. 옷걸이에 걸린 오리털 점퍼 주머니 안에 석진경이란 놈이 군대에서 쓴 일기장이 있을 거다.”

“어디서 개가 짖는군.”

“이제 그만 우물 밖으로 기어 나와, 새끼야. 우물 안에서 일어난 일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지 말고. 너도 대가리가 있으니 생각이란 걸 해 봐. 석진경이 네 누나, 아니, 네 엄마를 죽였어. 석진경은 시체를 몰래 묻었지. 그런데 여자가 되살아났어. 석진경의 일기장을 보면 살아난 여자는 회반죽 같은 낯빛을 하고 썩은 내를 풍기는, 산송장 같았다고 표현이 되어 있어. 산송장 같다. 이 표현이 굉장히 익숙하지 않냐? 귀면이었다고, 되살아났던 네 엄마는. 누가 죽은 네 엄마를 귀면을 만들듯이 살려 낸 거라고.”

“임동추. 당신이 누나를 죽였어.”

“그래, 죽였어. 하지만 나, 아니, 나를 사칭한 어떤 새끼가 죽인 여자는 진짜 네 엄마가 아니라 누가 되살려낸 귀면이었다고.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은 엄마를 꼭두각시로 만들었다고?”

“그래. 귀면을 만들 수 있는 놈이 또 누가 있겠어. 무학 도사밖에 더 있겠냐고.”

“그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 산속에서 발견한 누나 시체를 자기 눈으로 확인했을 때에야 누나가 죽은 줄 알았지.”

“그래. 귀면, 네놈들식으로 말하면 꼭두각시. 무학 도사가 죽은 네 엄마를…… 응? 뭐?”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술이 확 깼다. 여자는 두 번 죽었다. 처음엔 석진경이 죽였고, 나를 사칭한 장경필이 되살아난 그 여자를 다시 죽였다.

그런데 무학 도사가 자기 딸이 두 번 죽은 걸 몰랐다고? 그럼 처음 석진경이 여자를 죽였을 때 누가 그 여자를 되살려냈단 말인가.

석진경이 쓴 1월 12일의 일기 내용이 떠올랐다. ‘보초를 서다가 억새밭에서 그 여자를 봤다. 살아 있었던 건가?’ 석진경은 분명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파묻었던 여자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억새밭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걸 봤다고 했다.

“설마 진짜로 죽지 않았던 건가.”

난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갈색 가면은 아무 말도 없이 날 쳐다보았다.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귀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석진경은 살아 있는 인간을 죽여 달라고 돈을 주고 사주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석진경은 여자를 두 번 죽인 게 아니라 한 번 죽였다는 얘기가 될 뿐이지.

“좋은 거 하나 알려 줄까? 꼭두각시들 열한 마리 중 저번에 불태워 없앤 두 마리는 임충식의 부하가 아냐. 펜션 사장과 사장 아들의 시체로 만든 꼭두각시지.”

“펜션 사장? 사장 아들? 그건 또 누구야?”

“누나를 겁탈한 개새끼들. 누나는 그 새끼들한테서 도망치느라 억새밭으로 철조망을 뛰어넘었고 그런 누나를 석진경이 죽였지. 그리고 당신이 다시 한번 누나를 죽였고.”

놈이 피딱지 말라붙은 손으로 경직되어 약하게 떨리는 내 볼을 툭툭 쳤다.

“정혜 도사인가 하는 여자. 아버지 같은 개새끼를 좋아했던 그 멍청한 여자. 그 계집이 꼭두각시를 만든 시체들이 묻혀 있던 장소의 흙을 파 갔지? 우리가 했던 것처럼 꼭두각시들을 불태워 없애려고? 하지만 당신네들은 꼭두각시들을 불태울 수 없을 거야. 그 여자 부하들이 흙을 파 간 장소는 펜션 사장과 사장 아들이 묻혀 있던 장소였으니까.”

“그럼 그 새끼들을 죽인 건…….”

“누구겠어?”

갈색 탈의 입매가 위로 길게 말려 올라가는 듯했다. 묘하게 자신감에 차 있는 놈의 목소리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온몸에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전율이 일었다. 등줄기가 찌리릿 울렸다. 갑자기 밀려온 현기증에 눈앞이 노래지는 건 아까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임충식과 함께 처형당한 부하는 열한 명이었다고 했어, 분명히.”

“그중 두 명은 오체분시 되어 들짐승 밥으로 뿌려졌다는 기록은 없었나 보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열한 마리의 귀면들 모두가 100여 년 전에 죽은 임충식의 부하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 7년 전, 겨우 열몇 살에 불과했을 아이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것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졌던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지 말라고 내가 매달렸던 그 작은 아이가.

“사람을 죽이는 건 명백한 범죄야.”

저절로 훈계하는 듯한 말투가 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갈색 가면은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죽이는 게 살인이고 범죄가 되는 거지 짐승만도 못한 벌레 같은 새끼들을 죽인 게 죄가 되나?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손톱만큼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당당함. 정상이 아니다. 이 새끼도, 돈을 주고 사람을 죽여 달라고 의뢰했던 석진경도.

“너…… 어쩌다 이렇게 됐냐.”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지?”

내 탓이냐. 내가 널 이렇게 만든 거냐. 웃기지 마. 네놈이 악마 새끼가 된 게 어째서 내 탓이야.

“넌 진짜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 내가 죽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누구 탓을 하며 살래?”

“그래.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지.”

웬일인가. 평소엔 이런 소리를 하면 이성을 잃고 날뛰더니 오늘은 순순히 인정한다. 놈이 손가락으로 내 턱을 살살 긁었다. 놈의 손가락에서 옅은 피 냄새가 났다.

“개똥아.”

“한 번만 더 그 이름으로 불러 봐. 주둥이에 주먹을 처넣어 줄 테니까.”

놈은 손으로 어둠 속에서도 누런빛을 띠고 있을 내 얼굴을 매만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놈과 만나기만 하면 유혈전을 벌이거나 짐승의 교미 같은 섹스를 하곤 했었는데. 이렇게 멀쩡한 상태로 마주 앉아서 긴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이건 꿈이다. 꿈이 분명하다. 꿈이 아니라면 놈이 이렇게 다정한 손길로 내 얼굴을 쓰다듬을 리가 있나. 이러고 있으니 놈과 내가 연인 사이인 듯하다. 놈이 내게 부드럽게 키스하고 상냥하게 감싸 안아 줄 듯하다.

“넌 이렇게 사는 거 지겹지 않냐?”

눈꺼풀이 저절로 스르륵 감겼다. 목소리도 추욱 가라앉았다.

“난 지겨워. 이런 인생 이젠 지긋지긋하다. 이젠 좀 평범하게 살고 싶어.”

“평범하게 산다는 건 어떤 거지?”

놈 역시 내 목소리만큼이나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게 질문했다. 난 눈을 감은 채로 내 자신에게 반문했다. 평범하게 산다는 거? 그러게. 그건 어떤 걸까. 어째서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이 생각났다. 배 속 가득 붉은 팥 앙금을 품은 통통하고 바삭바삭한 붕어빵.

“추운 겨울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붕어빵을 먹으면서 행복을 느끼는 삶?”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인 자칭 심리 전문가의 개똥철학보다 나은 비유라고 생각하며 난 웃었다.

“평범한 인생이란 거 별거 없어, 새끼야. 그냥 그렇게 별거 아니게 살면…….”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의식도 멀어져 갔다. 두 번이나 위액까지 쥐어짜 속의 내용물을 게워 냈어도 지독한 취기가 남아 정신을 밑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정신을 잃었다 생각한 순간 잠시 암흑이 찾아왔다. 이윽고 눈앞에 안개가 자욱이 낀 산길이 펼쳐졌다. 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뿌연 안개가 가득 찬 사방이 꽉 막힌 상자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냉기를 머금은 습기가 피부에 착 달라붙어 이가 덜덜 떨리도록 추웠다. 걷다가 한쪽 발바닥에 따끔한 통증을 느껴 아래를 쳐다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다. 살갗 여기저기가 쓸리고 까져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여긴 어디일까. 난 왜 맨발로 이런 곳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해도 두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내 두 다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안개 너머로 역삼각형 모양의 표지판이 보였다. 지뢰 매설 지역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난 역삼각형 표지판이 걸린 철조망 앞에 가 섰다. 그리고 철조망 주위에 있는 뻥 뚫린 구덩이를 보았다. 석진경이 죽인 여자가 묻혀 있던 구멍. 구덩이에 묻혔던 여자는 살아 있었을까. 살아서 직접 흙을 걷어 내고 기어 나온 것일까. 7년 전 그때와 똑같이 등 뒤에서 파삭파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와는 달리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무 옆에 커다란 갈색 탈을 쓴 아이가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네 개의 눈이 뚫리고 큰 귀를 지닌 갈색 가면. 탈의 크기에 비해 아이는 너무 작았다. 아이의 팔다리는 조금만 힘을 줘도 톡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조용히 날 응시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 생각을 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뭘? 뭘 어쩌겠다는 건가. 여자가 펜션 사장과 그 아들 새끼한테 몹쓸 꼴을 당하지 않게 막을 수 있었을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로 달려든 여자를 총 머리로 때려 죽였던 석진경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었을까.

저 아이를, 이름도 없이 개똥이라 불렸던 저 불쌍한 애가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악마로 변하지 않게 보듬어 안아 줄 수 있었겠는가.

난 신이 아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과거로 되돌아간다 한들 엉망으로 어긋나 버린 톱니바퀴의 나사를 제대로 꿰맞출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리 와.>

난 아이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한 발 앞으로 떼자 아이는 흠칫 놀라 등을 돌려 안개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끔찍한 한기를 참다못해 눈을 번쩍 떴다. 난 거실 한구석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쓰러져 자고 있었다. 두 팔로 부르르 떨리는 몸을 감싸 안고서 꿈지럭대며 일어섰다. 창밖은 밝은 회색을 띠고 있다. 아침이 된 것이다.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덜덜 떨며 방으로 들어가 두툼한 겉옷을 껴입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연거푸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감기 기운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에 망치로 쾅쾅 두들기는 듯한 숙취를 동반한 두통까지 더해졌다.

어젯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놈은 분명히 몇 시간 전까지 이 집 안에 있었다. 방바닥에 남은 발자국과 빠끔히 열려 있는 현관문이 그 증거다.

미쳤다. 미쳤어. 다른 놈도 아니고 갈색 가면, 그 새끼를 앞에 두고 잠이 들다니. 아무리 술이 떡이 되도록 퍼마셨다곤 해도 어떻게 잘 수가 있냐. 문을 잠그려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다가 신발 여러 개가 나뒹구는 현관문 앞 타일 바닥에 검붉은 자국 몇 개가 있는 걸 발견했다.

형태와 색깔만 봐도 딱 알 수 있다. 이건 핏자국이다. 갈색 가면 놈의 피일 거다. 놈은 상처를 입은 상태로 날 찾아왔던 거다. 마치 상처 입은 들짐승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듯이.

정말 놈은 여기가 안전한 장소라 생각해서 기어들어 온 건가. 자기 누나, 아니지, 자기 엄마를 죽인 범인의 집이 안전한 곳?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차라리 날 괴롭히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찾아왔다는 게 말이 되지. 하지만 놈은 얌전히 대화만 하고 갔다. 오히려 우리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귀한 정보까지 던져 줬다.

그 새끼는 대체 왜 왔던 거야? 몸이 아프니까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외로워져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생각의 화살 하나가 빛의 속도로 머리를 꿰뚫었다.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아 타일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쳐다보던 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옷걸이에 걸린 점퍼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석진경의 일기장이. 분명히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는데. 술이 떡이 되도록 취했어도 일기장은 확실히 챙겨서 왔다. 집에 와서 옷걸이에 점퍼를 걸어 두었을 때 일기장을 넣어 두었던 주머니가 불룩하게 솟아 있던 것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놈이다. 갈색 가면, 그 새끼밖에 더 있나.

내 무고함을 증명하겠다고 친절하게 일기장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줬던 건 다름 아닌 나다. 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이번엔 옷장 서랍 안을 뒤졌다. 다행히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총은 그대로 있었다. 총을 꺼내 들자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어차피 일기장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안의 내용은 이미 다 봤으니까. 카페에 가서, 한강에 가서, 포장마차에서 안주도 없이 소주를 들이마시면서 몇 번이나 읽고 외웠다. 중요한 건 그 안에 석진경이 자기 손으로 까발려 놓은 추악한 진실이지 일기장 자체가 아니다.

다시 총을 서랍 안 깊숙이 쑤셔 넣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번호를 의무적으로 저장해 두긴 했지만 한 번도 연락해 본 적 없는 백단영의 이름을 길게 눌렀다.

[이른 아침에 웬일이십니까.]

수화기 저쪽에서 백단영의 잠이 덜 깬 불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네가 강원도에서 퍼 온 흙 말입니다.”

[그 얘기를 꼭 아침부터 해야 합니까?]

“중요한 얘기니까 그냥 입 닥치고 들으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뭡니까. 뭔가 문제가 생긴 겁니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감지한 백단영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그 흙, 필요 없게 됐으니 그냥 갖다 버리시라고요.”

[음……. 아무래도 전화상으로 할 얘기가 아닌 듯하니 만납시다. 오늘 밤, 천달봉 씨의 가게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죠. 아, 그리고 말인데요.”

[네. 말씀하시죠.]

“당신들 사람 하나 처리하는 데 얼마 받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 놈도 잠이 홀랑 달아나 버렸을 거다.

[왜요? 처리할 사람이 있습니까?]

“처리할 놈이야 있지. 하지만 그놈은 내 손으로 처리할 거니 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주시죠.”

[요새는 위험 부담이 커져서 우리는 웬만하면 그런 짓까진 안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런 쪽 일만 전문적으로 처리해 주는 중개업자 연락처를 가르쳐 드릴까요?]

백단영은 끝까지 얼마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캐물어도 놈은 말을 빙 돌려 중개업자를 소개해 줄 테니 그쪽 사람과 얘기해 보라는 소리나 해 댈 것이다. 여기까지 놈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됐습니다. 밤에 봅시다.”

꼬투리를 잡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지껄이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오전 7시도 안 된 시간이다. 놈이 이른 아침부터 그딴 얘기를 하냐고 짜증을 낼 만하다.

지끈지끈 쑤시는 두통과 오한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쉴 수가 없다. 난 억지로 기지개를 쭈욱 펴 굳은 몸을 이완시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