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8. 진흙탕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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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드르륵 드르륵, 사람 신경을 긁어 대는 진동 소리가 울렸다. 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침대 주위를 더듬었다. 비몽사몽, 잠에 취해 핸드폰을 쥐어 귀에 갖다 댔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냐?]
노금영의 목소리가 새어 나올 것이라 생각했건만 귓속에 파고드는 건 나이 든 남자의 음성이었다.
덕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얼른 귀에 갖다 대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눈으로 확인하니 액정 화면에 ‘아버지’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나민이의 핸드폰이었던 것이다. 어젯밤 한 침대에서 함께 잠들었던 녀석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이젠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거냐? 요즘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네놈은 생각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요즘같이 어려울 때에 착실하게 일을 해결할 생각은 못 할망정. 에이, 못난 놈.]
“저, 죄송합니다. 아버님. 나민이가 잠깐 핸드폰을 두고 나가서요.”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상대방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에선 약간 거칠어진 숨소리만 들렸다. 곧 남자가 대뜸 질문했다.
[당신, 내 아들이랑 무슨 관계요?]
“나민이와 친하게 지내는 형입니다. 나민이 아버님 맞으시지요?”
[그렇소.]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주제넘은 줄은 알지만, 아버님께서 조금만 나민이에게 관심을 보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요?]
“아니, 설교가 아니라 나민이가 성인이 됐다곤 하지만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 아닙니까.”
[주제넘은 줄 알면 건방지게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지 마시오.]
“아버님. 그렇게 기분 나빠 하실 게 아니라…….”
[자네 이름이 뭔가?]
“임동추입니다. 혹시 의심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전 얼마 전까지 학원 강사였습니다. 나민이와는 학원에서 선생, 제자 사이로 만났고요.”
남자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속에서 불이 끓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나민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난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 가서 대충 씻고 나와 냉장고를 뒤지는 사이 나민이가 돌아왔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녀석은 곧바로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볼에 닿는 입술이 차갑다.
“아침부터 어디 갔다 오냐?”
“운동 다녀왔어요. 몸이 영 찌뿌드드해서요.”
“어디로 갔는데?”
“XX 공원에요.”
“멀리도 갔다 왔다. 그냥 동네 한 바퀴 돌고 올 것이지. 계란 프라이 할 건데 먹을래?”
녀석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댓바람부터 운동을 하고 왔으니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일 거다. 계란 두 개를 꺼내려다 네 개를 끄집어냈다. 사내놈 둘이 먹을 건데 겨우 두 개로 되겠나.
“근데 어제 해 놓은 찬밥이 남아 있나 모르겠네.”
“제가 나가기 전에 밥 해 놨어요.”
녀석은 전기밥솥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밥솥 상태 알림판에 보온 표시 불이 들어와 있었다. 잠들어 있는 날 깨우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옷을 챙겨 입고 나와 쌀을 씻어 밥솥에 넣어 놓고 나갔을 녀석을 생각하니 불쾌한 기분이 싹 사라졌다.
“어이구 예쁜 녀석, 기특한 녀석.”
난 녀석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 줬다. 녀석은 순수하게 기뻐하며 실실 웃었다. 헝클어진 제 머리칼을 매만지며 “밥 해 놓고 나가길 잘했다” 이러면서 배시시 웃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나. 서로 좋아 죽을 때도 애교 한 번 제대로 떨지 않던 녀석이.
“계란 프라이 제가 만들게요. 형은 반숙이 좋아요? 완숙이 좋아요?”
녀석은 뒤돌아서서 불 위에 올려놓은 프라이팬에 계란을 깼다. 앞모습은 비교적 멀쩡했는데 뒤통수 쪽 머리칼은 뿔처럼 솟아 있었다. 난 손을 뻗어 붕 뜬 녀석의 머리칼을 빗겨 주었다. 날 흘끗 바라보는 녀석의 양 볼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형, 한동안 제가 계속 여기 있을게요.”
“왜? 내가 위험해질까 봐?”
“그놈은 또 올 거예요.”
그놈이라면 갈색 가면을 사칭했던 그 새끼를 말하는 거다. 확신에 찬 녀석의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다. 난 열심히 계란 프라이를 만드는 녀석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날 밤, 나민이는 집에서 저녁을 다 만들어 놓고 날 기다리다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단다. 일하러 가라는 전화였다. 왜 형들은 안 가고 나만 일하러 가냐는 질문에 상대방은 ‘일이 생겼다’라고 했고, 나민이는 그 일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다고 한다. 녀석은 한달음에 내게로 달려왔고, 달려와 보니 어떤 놈이 날 공격하고 있더라는 게 녀석의 이야기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무학 도사의 손자 놈은 형한테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노릇노릇 잘 익은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담았다.
“원한은 무슨. 그냥 내가 자기 눈앞에서 알짱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겠지.”
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밥그릇에 밥을 퍼 담았다. 나와 녀석은 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 몇 개와 계란 프라이만 달랑 올려 둔 소박한 밥상이었다.
“정말요? 그 자식은 형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너 그 자식이랑 친하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입 안에 퍼 넣으며 심드렁한 어조로 질문했다. 물론 눈으로는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그 자식은 아무하고도 안 친해요. 놈이 상대하는 건 무학 도사나 꼭두각시들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냐?”
“그냥 느낌이 그래서요. 열 일 제쳐 두고 형과 관련된 일에 뛰어드는 것만 봐도 그렇고.”
사실대로 말할까 싶었다. 그때 우리 집 앞까지 찾아왔던 놈은 갈색 가면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민이의 표정을 보고는 마음을 돌렸다. 표정은 그대로인데 눈꺼풀이 아주 약하게 떨리는 걸 내 눈은 놓치지 않았다. 사실 난 아직까지 녀석을 믿지 않는다. 놈이 내 목을 조르며 발광한 이후, 녀석이 자기 입으로 무학 도사 이야기를 꺼내고부터는 더 못 믿게 됐다. 녀석이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 같다.
녀석은 귀엽고 사랑스럽고 불쌍하다. 하지만 포악한 본성을 드러낸 녀석은 무섭다. 녀석을 좋아하는 감정은 여전하지만 가끔씩 녀석을 내 카테고리 안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내 안에서 치열한 혈투를 벌인다.
예전에 사귀던 누군가 어느 순간 상대를 믿지 못하게 됐다면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상대를 믿지 않는 상태로 관계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나민이는 날 믿고 있나? 나민이 역시 날 믿지 않는 게 아닐까.
“아, 아까 네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었어. 잠결에 내 핸드폰이 울리는 줄 알고 받아 버렸다. 미안.”
녀석은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밥숟갈을 쥔 하얀 손이 흠칫 떨렸다.
“아버지가 뭐라시던가요?”
“별말씀 없으셨어. 음, 그리고 내가 초면에 좀 무례한 행동을 했어. 나중에 아버지한테 정말 죄송했다고 전해 드려. 그리고 너희 아버지, 생각보다 나이가 좀 있으신 모양이던데. 목소리나 말투가 보통 네 아버지 또래 같지가 않고 시골 할아버지 같더라고.”
“아버지가 나이가 좀 많으세요. 제가 늦게 태어나서요.”
녀석은 좀처럼 당황한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웬만한 감정이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능숙하게 연기를 할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자기 아버지와 통화를 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녀석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밥을 우걱우걱 기계적으로 씹는다.
“어머니가 7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지?”
“아, 네에. 7년 전에요.”
“병으로 돌아가신 거야?”
“사고였어요. 굉장히 끔찍한 사고요.”
생각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은지 녀석의 고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7. 남들에게는 행운의 숫자일 7. 내게는 7이 짜증 나는 숫자다. 그리고 나민이에게도 7은 불행의 숫자다. 계속되는 우연은 어쩌면 누군가 만들어 낸 필연일 수 있다……. 대학생 시절, 선배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었다.
한동안 밥그릇에 수저가 부딪치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밖에 많이 추워?”
지금까지 나눈 대화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화제를 내던졌다. 어색한 분위기에 짓눌려 있던 녀석은 내가 던진 화제를 반갑게 물었다.
“아뇨. 날씨 많이 풀렸어요.”
“우리 놀러 갈까?”
“네? 어디로요?”
“아무 데나. 나가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너도 그동안 힘든 일이 많아서 골치 아플 거 아냐. 나도 기분 전환 좀 하고 싶고.”
“저야 좋지만 형은 괜찮겠어요?”
녀석이 대놓고 좋아하지만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놈들은 날 공격한 그때 그 시각 동수와 노금영, 박천수와 천달봉에게도 찾아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이지만 다들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백단영이야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으니 직접적인 타깃이 된 건 당연하겠지만, 자신들까지 공격의 대상이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무서웠을 것이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각자의 목을 꽈악 졸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최고의 장점이 바로 이거다. 좌절과 절망도 쉽게 하지만 회복도 빠르다는 것.
갑자기 어두운 골목길에서 툭 튀어나온 사내놈들과 싸우다가 이마가 찢어졌다는 노금영은 내게 전화를 해서 이를 드드득 갈며 명령했다.
<임똘추, 넌 그 확실한 정보통이란 놈을 만나서 놈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알아내. 놈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 왔으니 받아 줘야지 않겠냐.>
내게 무학 도사의 계획을 알려 주고 해결사 놈들이 임충식의 머리뼈로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 준 정보통. 난 나민이의 밥 위에 노른자가 터진 계란 프라이 하나를 터억 얹어 주었다.
“뭐, 머리 맞대고 끙끙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카페 하는 형님네 가게가 부서졌다니까 오늘은 다들 거기 가 있을 거야. 얼른 밥 먹고 나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저, 형.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대하기가 편하다니까. 내 입에 저절로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나민이도 어색하나마 웃으면서 입에 밥을 퍼 넣었다.
옷을 차려입고 집에서 나온 시간은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가려고 마음먹었던 시내 쇼핑몰은 여기서 버스로 20분. 10시가 넘어야 쇼핑몰 문을 열 텐데. 좀 빨리 나온 것 같다며 중얼거리자 나민이는 그럼 잠깐 어디 좀 갔다 가자며 날 잡아끌었다.
아침부터 어딜 가냐고 물어도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자기 집에 갔다 가려는 건가 싶었지만 녀석이 날 끌고 올라탄 버스는 생전 처음 타 보는 번호의 버스였다. 타 본 적이 없는 버스이니 당연히 노선도 낯설다.
버스에서 내려 나민이는 어학원 건물 뒤편의 골목으로 날 데려갔다. 그러고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1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여기가 어디냐?”
“우리 사무실이에요.”
녀석은 잿빛 복도를 터벅터벅 걸으며 말했다. 나도 녀석을 따라 터덜터덜 발소리를 내며 걷다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사실은 맞은편 건물이지만요.”
복도 끝, 창가에 붙어 선 녀석이 창문을 살짝 열고는 손짓으로 날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 창틈으로 맞은편 건물 11층을 살폈다.
블라인드를 반 정도만 쳐 놓은 상태라 사무실 안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들, 각자의 책상 사이를 가려 놓은 칸막이, 등을 보인 채로 전화를 받는 남자, 종이 뭉치가 가득 든 박스를 들고 움직이는 사내들. 여느 사무실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저런 규모의 사무실이 XX동에 하나 더 있는데 저 사무실이 사실상 우리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죠. 우리들은 유령처럼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녀요.”
“왜 나한테 이런 걸 가르쳐 주냐?”
“사무실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가슴이 뜨끔했다. 노금영과 통화하는 걸 듣기라도 건가. 이 정도로 눈치가 빠르면 오히려 무섭다.
“괜찮냐? 이런 짓을 하면 넌 배신자가 되는 거잖아.”
“마음 붙일 곳 없는 절 받아 준 고마운 데였어요. 성질 더러운 형들도 있었지만 좋은 형들도 있었고. 돈도 벌게 해 주고. 하지만 저한테는 동추 형이 더 소중해요. 형이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진짜로.”
“그럼 머리 만져 주세요. 아까 머리 만져 주신 거 되게 좋았어요.”
난 녀석의 뒤통수를 거칠게 슥슥 문질렀다. 녀석의 머리칼은 보들보들했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난 핸드폰을 꺼내 창밖으로 보이는 맞은편 사무실 풍경을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다음엔 내가 사람들을 이곳에 데리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주위 풍경을 눈에 익혔다. 놈들의 사무실이 있는 맞은편 건물 1층은 닭갈빗집이다. 오른쪽은 호프집, 왼쪽은 핸드폰 대리점.
아무 생각 없이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녀석이 내 뒷덜미를 잡아 다시 건물 안으로 끌어 들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짜증이 나서 한마디 하려니까 나민이가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갖다 댔다가 앞으로 뻗었다. 입 닥치고 앞을 보라는 거다.
녀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차 한 대가 맞은편 건물 앞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차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왜소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이어 중절모를 쓰고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노인이 내린다.
중년 남자의 얼굴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웬일로 양복을 쫙 빼입은 아리랑헌터다. 아리랑헌터와 얘기를 하는 노인의 얼굴.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데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저 얼굴. 폐공장에서 봤던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긴 하지만 확실하다. 저 영감은 무학 도사다.
난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버튼을 누른 순간 울리는 ‘찰칵’ 소리에 아리랑헌터와 나란히 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노인이 갑자기 고개를 홱 틀었다. 노인의 날카로운 시선은 나와 나민이가 숨어 있는 쪽을 향해 있었다.
일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아리랑헌터가 무학 도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그제야 다시 고개를 돌려 아리랑헌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뒷문으로 나가요.”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민이가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나와 녀석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거의 뛰듯이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큰길로 나와 눈에 보이는 도넛 가게로 무작정 들어갔다. 바닥 청소를 하던 아르바이트생이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걸 듣는 둥 마는 둥 2층으로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설마 그 영감, 우리가 있는 걸 알아챈 건 아니겠지?”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불안한 눈으로 바깥을 쳐다보며 물었다.
“모르죠. 워낙 귀신같은 노인네라.”
빈정대는 나민이의 말투에 진한 적의가 녹아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무학 도사를 싫어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녀석은 무학 도사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살의까지 품고 있는 듯하다. 그럼 녀석이 그 노인네를 그렇게까지 싫어하게 된 이유가 뭘까.
<무학 도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던 녀석의 태연한 어조가 떠올랐다. 그 확신에 차 있던 말투.
“월급 받는 건 포기하고 오늘부터 사무실 근처에도 가지 마.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창밖을 바라보던 나민이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물론 필요해. 하지만 오늘 사무실 위치를 알려 준 것만 해도 충분해. 더 이상 너한테 이런 위험한 짓을 시킬 순 없어. 이러다가 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네 아버지 얼굴을 보겠냐. 이젠 됐어. 쇼핑하러나 가자.”
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얼른 다시 주저앉았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는 창가 쪽 반대편으로 반쯤 등을 돌렸다. 두툼한 오리털 패딩을 껴입은 사내놈이 아까 우리가 걸어 나온 골목에서 뛰어나오는 걸 봤기 때문이다.
“저기 까만색 패딩 입은 덩치 큰 놈. 너희 사무실에서 일하는 놈 맞지?”
“네. 맞아요. XX 체대 다닌다던 형이네요. 그러게 사진은 왜 찍으셨어요.”
나민이도 나처럼 등을 돌린 채로 고개만 살짝 틀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형. 지금은 제가 함께 있잖아요.”
녀석은 테이블 바깥으로 비죽이 삐져나온 내 손가락 끝을 살짝 쥐었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실소가 픽 비어져 나왔다. 조금도 무섭진 않지만 혼자가 아니란 사실이 위안이 되긴 한다.
“무학 도사의 집 위치를 알아낼게요. 영감의 진짜 집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전 알아낼 수 있어요. 저라면 가능해요.”
내 손가락을 아프도록 꽉 쥐며 녀석이 말했다.
“말로는 형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사실은 절 위해서예요. 형한테 믿음을 주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예쁨받고 싶으니까요. 형이 우리 이제 끝내자고 했을 때, 형 앞에서 온몸에 기름 뒤집어쓰고 분신을 할 생각도 했었어요.”
“넌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 사람 목숨 우습게 아는 그 정신머리부터 좀 뜯어고쳐. 헤어진 정도로 왜 죽어? 내가 뭐 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형은 저한테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아침을 잘 먹여 놨더니 혀에 기름기가 잘잘 도는가 보다. 말하는 놈은 진지하기만 한데 듣는 쪽은 부끄러워서 손발이 배배 꼬인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마지막 한 방으로 지금까지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위험해.”
“저 머리 좋아요. 눈치도 빠르고 감도 좋고.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발 뺄게요.”
그래. 잘 안다. 너 머리 좋고 눈치 빠른 거. 민첩하고 영리하고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녀석이란 거. 하지만…….
난 창밖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아까 골목에서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까만 패딩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운동하는 놈이라 그런지 떡 벌어진 체격이 동수 못지않다. 지난밤, 내 뒤를 미행하던 놈도 저놈처럼 커다랬다. 만약 그날 총이 없었다면 놈을 제대로 상대할 수나 있었을까. 인간 대 인간의 싸움에선 체격이 작은 쪽이 밀리게 되어 있다.
가장 안락한 방공호였던 내 집마저 더 이상 안전하지가 않다.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 입고 슬리퍼 직직 끌고 다니던 집 근처 골목길도 이제부터는 잔뜩 긴장해서 주의 깊게 살피며 지나야 할 것이다.
지친다. 솔직히. 힘들다, 이젠. 돈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시골로 내려가 산 구석에 처박히고만 싶다.
“내가 하지 말라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도 하겠지? 너, 은근히 고집 세니까.”
내 말에 나민이는 씨익 웃기만 했다.
“그럼 그렇게 해. 아니, 해 줘. 너한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다. 네 앞에서 이런 약한 소리 하고 싶진 않은데, 빨리 이 일을 해결하고 편히 쉬고만 싶다. 지쳤어, 솔직히. 대신 무학 도사의 집 위치만 알아내면 당장 도망쳐. 그 뒤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그리고…….”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는 내 입술에 녀석의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닿기만 하고 떨어진 애기들 뽀뽀 수준의 스킨십이었다.
“좋아해요, 형.”
열이 올라 붉어진 녀석의 입술에 포근한 미소가 걸렸다. 녀석의 웃는 얼굴이 너무도 해맑아서 입 안에 쓴 타액이 고였다.
*
*
[돈 잘 받았어. 매번 고맙다, 동추야.]
“저번 달에 용돈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주머니.”
[아냐. 네가 왜 죄송해? 아들 친구한테 돈이나 타 쓰는 내가 염치가 없는 거지. 저녁이나 먹으러 와. 이번 주 주말이 진경이 생일이더라.]
그제야 깨달았다. 핸드폰 캘린더에 이번 주 토요일에 일정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긴 한데 대체 이날이 무슨 날이었지 싶었다. 그날은 석진경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놈이 죽고 난 후, 매년 녀석의 생일 때 난 진경이네 어머니가 끓여 주신 미역국을 먹었다. 아줌마는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 놓은 음식을 맛있게 퍼먹는 날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곤 했다.
“네. 꼭 갈게요.”
[너 갈비찜이랑 부추 부침개 좋아하지? 아줌마가 맛있게 만들어 놓을게.]
사실 갈비찜과 부추 부침개는 석진경이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매년 그 집에 갔다 올 때면 밤늦도록 소화가 되지 않아 약을 챙겨 먹어야 겨우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 날씨도 추운데 웬만하면 장사 나가지 마세요. 이런 날씨에 장사 나갔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나중에 약값이 더 나와요.”
[안 그래도 요새 무릎 통증이 더 심해져서 병원 다니고 있어. 계속 추워서 그런지 나가도 장사도 잘 안되고. 이제 슬슬 장사 그만둬야 할까 봐.]
“잘 생각하셨어요. 그 연세에 밖에서 장사하시는 게 어디 쉽나요. 그럼 아주머니, 주말에 찾아뵐게요.”
동수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보여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저 자식은 요즘 내가 전화만 했다 하면 누구랑 통화하는 거냐고 캐묻는다.
“누구랑 통화하고 있었어요? 왜 제가 오니까 바로 끊어요?”
이거 봐라. 짜증 나게 이러는 거.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빤히 노려보는 놈의 낯짝을 손가락을 세워 부욱 긁었다. 놈은 “아오오!” 앓는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여자들처럼 손톱은 왜 안 자르고 그래요? 이 잘생긴 얼굴에 흠집 생기면 어쩌려고요.”
“웃기네. 네놈 얼굴이 어디 손톱으로 긁었다고 흠집 날 상판이냐? 추우니까 빨리 앞장서. 거시기 얼겠다.”
“걱정 마요. 형 거시기 얼면 제가 이 손으로 따뜻하게 녹여 줄게요.”
동수는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보이며 흐흐흐 웃었다. 짜증이 확 치밀어서 발로 놈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놈은 킬킬 웃으며 나한테 맞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걸어갔다. 쟤는 또 왜 저러나. 대낮부터 술이라도 퍼마셨나.
“넌 뭐가 그리 신이 나냐? 난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이런 때일수록 재밌게 살아야죠. 힘들다고 축 처져 있으면 더 힘들어져요. 아, 형. 잠깐만요. 도사님이 빈손으로 찾아오는 거 되게 싫어하시거든요.”
놈은 길가에 있는 가게에 후다닥 들어가더니 곧 족발을 사 들고 나왔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빈손으로 가기가 그래서 나도 슈퍼에 들어가 과일과 막걸리를 샀다.
용천 도사의 집은 산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허벅지 터지도록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영감의 집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등산로였다. 눈이 내려 빙판길이 되면 여기 사는 사람들은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되는 거 아닐까 싶었다. 이 욕 나오게 가파른 언덕을 동수 놈은 어떻게 스쿠터를 타고 올라간 건지.
용천 도사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다리가 덜덜 떨려 벽에 기대 있어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 왔다. 하지만 동수는 숨소리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도사님, 휘림이 왔어요!” 우렁차게 외치며 대문을 벌컥 열었다.
“어이쿠, 휘림이 왔냐!”
용천 도사가 동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할배, 할배!” 하면서 뛰어 들어가는 귀여운 손자와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지만 실상은 이렇다.
영감이 반갑게 맞아들인 건 동수가 아니라 동수 놈이 사 들고 간 족발 봉지였던 것이다. 후다닥 뛰어나온 영감은 동수의 손에서 족발 봉지만 냉큼 빼앗아 “어이구우. 날씨가 춥네”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집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암만 봐도 영감은 족발은 좋아도 동수 놈은 반갑지가 않은 모양이지만 동수는 도사님, 도사니임 하면서 살갑게도 엉겨 붙는다.
이미 용천 도사는 거실에 상을 차려 놓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상 차려 놓고 우릴 기다린 게 아니라 우릴 기다리면서 뭘 먹고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비빔밥이 가득 든 커다란 양푼 냄비에 동치미 국물이 담긴 그릇 하나. 상 앞에는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미녀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정혜 도사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를 살짝살짝 문질러 닦고 머리칼을 매만져 댔다.
방금 전까지 다리 쩌억 벌리고 앉아서 양푼 비빔밥을 퍼먹고 있다가 우리가 오니까 입가에 묻은 고추장 닦으면서 얌전 떠는 거다, 분명히.
“오늘 오신다던 분들이 저분들이었나 봅니다, 용천 도사님.”
정혜 도사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온갖 거만을 다 떨며 속삭이듯 말했다. 입가에 밥풀을 묻히고서.
“원래 오기로 한 녀석은 저 덩치 좋은 놈이고. 저기 저 돈 많은 아줌마들 등 처먹게 생긴 날제비 같은 놈은 덤이야, 덤. 일단은 배에 기름칠 좀 하자꾸나, 정혜야. 요새 계속 수련을 하느라 풀떼기만 씹었더니 속이 영 허했는데 잘됐다.”
“뭘 좀 여쭤보려고 찾아온 겁니다. 덤이라서 거참 더럽게 죄송합니다.”
난 상 위에 막걸리와 과일이 든 봉지를 터억 올려놓았다. 포장을 뜯는 둥 마는 둥, 살점 붙은 다리 하나를 들고 신나게 뜯어먹던 용천 도사가 눈을 빛내며 봉투에서 술을 꺼냈다.
“어머, 딸기네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데 어떻게 알고 사 오셨나요, 동추 씨.”
술부터 꺼내 드는 용천 도사와는 달리 정혜 도사는 딸기 박스를 꺼내 들고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 여자가 왜 갑자기 친근하게 동추 씨라 부르는 건가. 누가 들으면 저 여자 먹이려고 딸기를 사 온 줄 알겠다.
“당신 먹으라고 사 온 거 아닙니다. 용천 도사님 드리려고 사 온 거지.”
“아무나 먹으면 어떤가요. 어차피 다 같이 먹으려고 사 오신 걸 텐데. 이것 좀 씻어 올래요?”
정혜 도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동수에게 딸기 박스 두 개를 척 내밀었다. 기가 차고 코가 막힐 지경인지 동수 놈은 “허, 허어, 허어어!” 성대하게 콧방귀를 뿡뿡 뀌어 댔다.
“제가 씻어 오라고요?”
“네, 씻어 오세요.”
“내가 왜 이걸 씻어 와야 되는데요?”
“그럼 무릎이 시큰거리는 이 늙은 누나가 움직여야 되는 건가요?”
갓 스무 살 된 여자애들 못지않게 피부에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주제에 스스로 늙은 누나란다.
“얼른 씻어 오너라. 딸기 맛 좀 보자.”
막걸리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시던 용천 도사도 한 마디 거들었다. 동수가 툴툴거리며 딸기 박스를 들고 일어섰다.
“기왕 온 거 앉아라. 차린 건 없어도 뭣 좀 먹고.”
차린 게 없어도 너무 없는 밥상이라 밥숟가락 하나 더 얹기가 무진장 송구스럽다. 용천 도사는 비빔밥이 담긴 양푼 그릇만 내 앞에 들이밀었다. 영감은 손님한테 살점 한 점 내주는 법 없이 족발을 열심히도 뜯어 먹었다. 정혜 도사는 내가 밥상머리에 앉아 빤히 보고 있으니 다리 하나 들고 신나게 뜯어 먹진 못하고 살점만 뜯어 새우젓에 푹 담가 오물오물 씹었다.
“어째 처음 봤을 때보다 넌 기가 더 탁해진 것 같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잡귀들이 기가 많이 죽긴 했는데 엄청난 악귀 하나가 더 붙었어. 너, 어디 아픈 덴 없냐?”
용천 도사가 깨끗이 살점을 뜯어먹은 다리뼈로 내게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두통이 심해지긴 했는데요.”
“두통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이대로라면 너, 곧 쓰러져 죽는다. 어디서 저런 기분 나쁜 걸 달고 왔누. 쯧쯧.”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 것 같아서 난 아무것도 없는 등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그렇지요? 저도 임동추 씨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되어서 부적이라도 써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휘림이가 저놈 줄 거라고 부적을 써 달라고 해서 준비해 놓긴 했는데, 오늘 보니 안 되겠네. 휘림아, 돈 좀 더 줘야겠다. 좀 더 강력한 부적으로 새로 써야겠어.”
주방에서 나온 동수가 딸기가 가득 든 바구니를 상에 내려놓고 앉았다.
“돈은 더 드릴 수 있어요. 우리 동추 형, 더 이상 다치게 않게 강력한 걸로 좀 써 주세요.”
동수가 그렇게 말하며 가장 크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딸기를 내게 내밀었다.
“돈을 준다면 부적 써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저놈한테 붙어 있는 게 워낙 질이 나쁜 놈이라 부적으로 쫓아낼 수나 있을까 모르겠네. 원한과 증오로 똘똘 뭉쳐 있는 악령의 일종이긴 한데 살아 있는 령이란 게 문제지. 게다가 단순한 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원한 덩어리가 저놈 몸속에 흘러든 것 같은……. 잠깐. 너 혹시 악령이랑 교접했냐?”
딸기를 씹다가 그만 혀를 꽉 깨물고 말았다. 입술 사이로 피 섞인 딸기즙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 무슨 정신 나간,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왜 귀신이랑 그, 그 짓을 해요?”
“아니, 그게 귀신이 아닐 수도 있어. 잘 생각해 봐라. 최근에 어딘가 좀 이상한 여자와 관계한 적이 있는지. 너한테 개인적인 원한이 똘똘 뭉쳐 있어서 알게 모르게 상대의 행동이나 말투가 공격적이었을 거야. 그 여자랑 한 번이 아니라 꽤 여러 번 관계했을 거고. 이상하게 올라타서 열심히 허리를 움직여도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기가 쪽 빨리는 것 같은 그런 여자가 있을 텐데. 분명히.”
내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행동이나 말투가 공격적인 인간. 최근에 관계했고,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 짓을 했던 인간이 분명히 있긴 하다. 그놈은 여자가 아니라 신체 건장한 사내놈이고, 내가 놈 위에 올라타 허리를 움직인 게 아니라 그놈이 내 위에 올라탔긴 했지만.
“에이, 도사님. 여자 분도 계시는데 그런 얘기는 그만하세요. 무안해하시잖아요. 다른 얘기 해요.”
동수가 얼른 나서서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정혜가 이 정도 얘기를 듣고 무안해해? 정혜 쟤가 개불 구워 먹으면서 남자 거시기 씹어 먹는 것 같아서 기분 괜찮네요, 하면서 실실 웃던 계집애야. 어디 그것뿐인 줄 알아? 다 같이 놀러 가서 사내놈들끼리 홀딱 벗고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 걸 몰래 훔쳐보면서…….”
“어머, 도사님이 벌써 취하셨나 보다. 술만 드시지 말고 안주도 좀 드세요.”
정혜 도사가 조잘대는 용천 도사의 입에 족발을 처넣었다.
“그래, 임동추 씨. 뭘 물어보려고 찾아오셨나요?”
족발 기름 묻은 손을 휴지에 문질러 닦으며 정혜 도사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런데 정혜 도사님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지인의 집에 놀러 온 게 그리 큰 잘못입니까? 저도 한때는 전국 도사 연합 멤버였기 때문에 도사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도사님들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거기서 제 발로 나왔지만요.”
용천 도사가 기름기 묻은 손가락을 쪼옥쪼옥 빨면서 낄낄 웃었다.
“제 발로 나간 거 좋아하네. 쫓겨난 거면서. 도사 연합은 규칙을 어기는 멤버는 즉시 쫓아내거든. 저 간덩이 땡땡 부은 계집애가 비밀 술법서를 빼내서 귀면을 만들려고 하던 걸 딱 들킨 거야. 네가 아직 젊고 무학 도사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은 걸 아니까 쫓아낸 정도로 봐준 거지. 다른 놈 같았으면 도력 다 뺏기고 폐인 꼴로 산속에 움막 짓고 살아야 했을 거다, 이 계집애야. 제 발로 나간 건 네가 아니라 무학 도사지.”
“무학 도사도 전국 도사 연합 소속이었군요.”
내가 흘린 말을 용천 도사가 바로 받아쳤다.
“당연하지. 이 나라에서 도사 노릇 하며 먹고사는 놈들 중에 도사 연합 소속 아닌 놈 없어. 도사 연합에 소속되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 뭘 해 먹고 살 수가 없거든. 대여섯 평짜리 신당이라도 차리려면 도사 연합에서 허가를 받아야 돼. 개인 사업자가 사업자 등록하고 장사하는 것처럼. 얼핏 보면 우리 도사들 개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해 주는 단체 같지? 그런데 규제가 장난이 아냐. 뭣 좀 하려고 하면 일일이 신고해야 하고, 매달 세금 조로 일정 금액을 상납까지 해야 해. 독과점의 폐해라 해야 하나. 우릴 대표하는 단체가 딱 하나뿐이니 이런 병신 같은 일이 생기는 게지. 생각 있는 사람들이 다른 단체를 만들려고 해 봤지만 도사 연합에서 귀신같이 알아내서는 처리해 버리더라고. 어디나 힘없는 놈들은 당하고 산다지만 이 업계는 특히 그런 게 더 심하거든.
무학 도사는 도사 연합의 횡포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 발로 단체에서 빠져나갔지. 그리고 보란 듯이 도사 연합 그지 깽깽이들이 가장 금기시했던, 귀면을 만들어 내는 짓을 저지른 거야. 한 마리도 아니고 열한 마리나. 그리고 오직 자기 힘으로 도사 연합에 대적할 만한 단체를 만들어 냈어. 다른 건 몰라도 도사 연합 놈들을 거하게 물 먹였다는 점 하나만큼은 박수 쳐 주고 싶다니까.”
용천 도사가 나불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혜 도사가 끼어들었다.
“도사님은 그 인간을 무슨 구국의 영웅처럼 떠받드시는 것 같은데 그 작자는 그냥 도망친 것뿐이라고요. 사람들한테 비난받을 게 두려워서요.”
“떠받들긴 누가 떠받들어. 도사 연합을 물 먹여 줘서 통쾌했다는 거지. 그리고 정혜야, 이런 말 하는 건 미안한데 무학 도사는 그 어린 계집애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더라. 사람들한테 자기가 비난받을 게 두려워서 도망친 게 아니라 자기 아이를 밴 사랑하는 여자가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을까 봐…….”
정혜 도사는 눈에 살기를 품고서 용천 도사를 노려보았다. 노인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큿흠 큿흠! 궁금한 건 이게 다냐? 또 뭐가 궁금한데?”
노인이 헛기침을 쥐어짜며 나와 동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그게 말입니다. 어디서 들었는데 음성을 변조해 주는 술법이라 해야 하나. 그런 게 있다고 하던데요.”
“그래, 있긴 하지. 하지만 요샌 그런 술법은 안 쓴다. 음성 변조해 주는 기계가 쌔고 쌨는데 뭐 하러 그런 술법을 쓰나. 그런 기계가 없던 옛날에나 쓰던 방법이지.”
“그런데 기계로 목소리를 변조하면 헬륨 가스 마신 것처럼 목소리가 좀 웃기게 바뀌지 않습니까?”
내 질문에 용천 도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형, 아까 도사님들이 나누던 얘기요. 뭐예요, 그게? 무학 도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었대요? 대체 어떤 여자랑요?”
난 눈치도 없이 조잘거리는 동수 놈의 손등을 꽈악 꼬집었다. 정혜 도사는 말없이 이쪽을 노려보며 딸기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정혜 도사와 무학 도사 사이에 존재하는 오장육부 뒤틀리는 막장 스토리를 알 리 없는 동수가 내게 꼬집힌 손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무학 도사 같은 인간이랑……” 딱 거기까지 말한 순간.
“예끼, 이놈들아!”
등 뒤에서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에 나도 동수도 앉은 채로 펄쩍 뛰었다.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웬 이상한 탈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용천 도사를 보았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내 온몸이 차갑게 굳었다.
커다란 네 개의 눈. 크고 뭉툭한 코. 웃고 있는 입술. 얼굴의 반만 한 귀.
용천 도사가 쓰고 있는 탈이 갈색 가면, 놈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견고한 나무로 만들어진 갈색 가면의 탈과는 달리 용천 도사의 것은 짚으로 만든 어설픈 것이었다.
“변조된 목소리가 딱 이런 목소리였지?”
용천 도사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냈다. 그래, 어투나 깊은 울림은 좀 달라도 놈의 목소리도 저랬다.
“가면 안쪽에 부적을 단단히 붙여 놓아서 이렇게 목소리가 변하는 거다.”
용천 도사는 쓰고 있던 짚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가면을 벗자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과연 용천 도사의 말대로 가면 안쪽, 입이 있는 부분에 노란 종이 딱지 같은 게 붙어 있었다.
“도사님, 그 가면 말이에요.”
“귀면들을 부리는 새끼 도사가 쓰고 다니는 가면이지?”
“네, 맞아요. 놈이 쓰고 다니는 건 나무로 만들어졌지만요.”
“이건 방상시탈이라고 한다. 옛날에 악귀를 쫓는 데 사용했던 탈을 현세에 와서 악귀들의 앞잡이가 사용하고 있다는 게 우습지.”
“자세히 좀 봐도 될까요?”
용천 도사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짚 가면을 내밀었다. 난 가면의 표면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거칠다. 힘을 주니 쉽게 구부러진다.
갈색 가면의 얼굴 거죽은 매끈하고 욕 나올 정도로 딱딱했는데. 오래되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걸 얼굴에 써 보았다. 뚫린 눈구멍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는 동수의 멍청한 얼굴이 보였다. “동수야” 하고 목소리를 내 보기도 했다. 전혀 다른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목소리를 바꾸는 부적을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가면이 아니라 오토바이 헬멧 안쪽에 붙여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놈의 진짜 목소리를 들으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동수가 내 얼굴에서 가면을 확 벗기며 용천 도사에게 물었다.
“가면을 벗기면 되지.”
대답은 간단했다. 가면을 벗기면 놈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고, 놈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놈은 가끔 오토바이 헬멧을 쓰기도 하던데.”
“헬멧도 벗기면 되는 거지.”
“아, 진짜! 뒤집어쓰고 있는 걸 벗기려면 그놈을 붙잡아 눌러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고요. 놈 옆에 착 달라붙어서 놈을 보호해 주는 보디가드 같은 귀면도 있고. 진짜 그 방법밖에 없는 거예요?”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이리 와 보거라.”
용천 도사가 흐흐흐 웃으며 동수 놈을 방으로 데려갔다. 저 영감은 또 애한테 부적이니 뭐니 잔뜩 팔아먹을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에서 본격적으로 물건을 팔기 시작하는 장사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얼마고, 저건 얼마고, 이건 값은 좀 나가도 성능 하나만은 죽여준다, 어쩌고저쩌고.
저 등신 같은 놈이 또 용돈 탈탈 털리기 전에 끌고 나와야겠다.
“임동추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몸을 일으키려 하자 딸기를 조용히 먹어 치우던 정혜 도사가 날 불러 세웠다.
“네, 물어보세요.”
“무학 도사의 아들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난 말없이 붉은 입술을 오물거려 딸기를 먹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꼭 말로 해야 합니까.”
“우린 귀면들과 무학 도사, 그리고 그 미친 영감의 아들까지 싹 다 처리할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들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다 좋은데 그 영감 아들놈은 저한테 던져 주시죠. 그놈은 제 손으로 잡아 죽여야만 돼서요.”
여자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려 미소 지었다. 입술에 묻은 딸기 과즙이 꼭 핏물 같았다.
“그럼 정혜 도사님,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세요.”
“그놈 이름이 뭔지 아세요? 무학 도사 아들놈 말입니다.”
“개똥이. 무학 도사는 걔를 개똥이라고 불렀어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지어 줘야 나중에 죽여도 죄책감이 덜 들 거라면서요.”
빌어먹을 영감탱이.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키우는 개한테도 정이 들게 마련인데. 놈은 자기 아버지에게 개 취급도 못 받은 거다.
“그 애가 일곱 살 때였던가. 그때 그 애에게 말해 준 적이 있어요. 네 아비에게 복수를 하고 싶으면 조용히, 네 아비가 눈치채지 않게 조용히 너만의 날을 갈고 기다려라. 기회는 온다. 기회가 오면 준비한 너의 날로 네 아비의 목을 단칼에 쳐라. 그 애는 벌써 그 나이에 아비를 능가하는 도력을 지니고 있던 애였어요. 제 충고를 새겨들었다면 지금쯤은 무학 도사, 아니, 도사 연합의 호연 도사와 대적할 만한 능력을 가진 도사로 성장했겠지요.”
“이제 보니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군요. 왜 멀쩡한 아가씨가 그런 영감을 좋아했나 싶었더니 당신도 미친 여자였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전 그냥 불쌍한 아이에게 버티고 살아갈 힘을 준 겁니다.”
30만 원! 27만 원에 해 주세요! 28만 원! 그 이하는 절대로 못 깎아 줘! 방 안에서 장사꾼과 구매자가 흥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수 놈이 비상금을 탈탈 털리기 전에 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천달봉이 어둠 너머를 응시하며 인상을 썼다.
“형님, 여기까지 와서 초 치지 마세요. 놈들이 밟은 게 지렁이가 아니라 독사였다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어요. 밟으면 꿈틀하는 정도가 아니라 발목을 사정없이 물어뜯긴다는 걸 보여 줘야죠. 형은 놈들 때문에 가게가 부서졌는데도 그런 말이 나와요?”
조수석에 탄 노금영은 이마 한쪽에 붙은 반창고 위를 슬슬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을까?”
운전석에 타고 있던 천달봉이 고개를 돌려 차 안에 탄 우리를 보았다. 노금영은 물론이요, 나나 동수도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짓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건 천달봉뿐이었다. 적어도 나는 당한 것에 이자까지 쳐서 갚아 줄 생각이었다. 놈들 때문에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 노금영은 아예 놈들의 사무실에 불을 싸지를 생각을 하고 왔겠지만.
그렇다고 천달봉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림책이며 장난감이 나뒹구는 차 안. 달봉 형님네 애들이 실컷 뒹굴며 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 애들 생각을 해서라도 되도록 위험한 짓은 하고 싶지가 않은 거겠지.
“달봉 형은 그냥 차 안에 계세요.”
그 말은 놀랍게도 노금영의 입에서 나왔다.
“아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래.”
“이번에 형수님도 직장에서 잘리셨다면서요. 당분간 돈 나올 구멍이라곤 카페뿐인데 형이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애들이랑 형수님을 먹여 살립니까. 그래서 천수 형님한테도 나오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형은 차 안에서 망이나 보세요.”
천달봉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몸을 돌려 앉았다. 백미러에 천달봉의 착잡하게 굳어진 눈매가 보였다.
“정말 미안하다. 대신 다른 잡일은 내가 다 할게.”
“형님이 왜 미안해하세요? 집에 돌아가라는 것도 아니고 망보라는 건데. 원래 쥐뿔도 없는 똘마니들이나 하는 일을 시키는 건데 화를 내야지 왜 미안해하시나.”
킬킬 웃으며 노금영은 팔꿈치로 천달봉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 인간은 꼭 한 마디가 더 많다. 옆에서 동수가 “히히히. 오늘은 달봉이 형님이 내 똘마니다, 똘마니” 빙구처럼 웃으며 거들었다. 사람 좋은 천달봉은 동생들의 장난에 허허허 웃기만 했다.
차 한 대가 주차장에 우리 뒤에 붙어 서는 게 보였다. 평소엔 차체를 긁기라도 할까 봐 접근하기조차 꺼리는 외제 차다. 핸들을 쥔 해맑은 표정의 봉이와 그 옆에 탄 백단영의 낯짝이 보였다.
“재수 없는 새끼. 왜 외제 차를 끌고 와서 저 지랄이야. 차 자랑하러 왔어?”
노금영이 주저 없이 욕을 했다.
봉이와 백단영이 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사내 놈 넷이서 소형차에 구겨져 타고 왔는데 저놈들은 저 큰 외제 차를 달랑 둘이 타고 왔다. 기분이 갑자기 팍 더러워지고 배알이 꼴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와아, 장난 아니다. 우와아, 죽인다. 진짜 멋있다. 이 차, 봉이 형 거예요?”
밸도 뭣도 없는 동수는 쪼르르 달려가 번쩍번쩍 광이 나는 차체에 아예 엎어져서 허우적댔다.
“파파가 버쓰데이 기프트로 사 줬는데 별거 아냐. 미쿸에 더 나이스한 차 있어.”
하물며 백단영의 것도 아니고 봉이네 아버지가 놈의 생일 선물로 사 준 거란다. 게다가 별거 아니라고 겸손을 살짝 끼얹은 육갑을 떠신다.
“우와아아아아. 진짜 부럽다. 난 배달용 스쿠터가 내 애마인데. 형, 나 한 번만 타 보면 안 돼요? 저 운전 면허증도 있고 운전도 잘해요.”
“오케이.”
봉이는 선뜻 동수에게 차 키를 건넸다. 노금영이 양손으로 공손하게 키를 받아 들고 신이 나서 차로 달려가는 동수 놈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우리 동수, 우리 막내 새끼가 격 떨어지게 왜 이럴까. 지금 이럴 때가 아닐 텐데.”
노금영은 이를 악문 상태로 중얼거리며 동수 놈의 목을 졸라 탈탈 터는 시늉을 했다. 동수 놈은 눈물을 머금고 차 키를 봉이에게 반납했다. 봉이는 “나중에 렌트해 줄게” 이 말로 풀죽은 동수를 위로하며 찡끗 윙크를 했다.
“형, 사랑해요, 알라뷰”, “나도 알라뷰” 느끼하게 엉겨 붙는 동수와 봉이, 두 놈은 무시하고 우리들은 잠시 말없이 쓰레기 썩는 악취가 진동하는 골목 너머를 쳐다보았다. 밤에도 대낮처럼 환한 대로변과는 달리 뒷골목은 어둡고 음습하다.
“임충식의 뼈는 잘 가지고 있지?”
노금영이 하얀 입김을 뿜으며 질문했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서 있던 백단영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기에 걸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 정혜 도사가 가지고 있다.”
“정혜 씨가? 여자 혼자 그런 걸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지 않겠어?”
“알고 보면 되게 무서운 여자야, 그 사람. 그리고 용천 도사도 함께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흙은 구했냐?”
“오늘 낮에 연락을 받았어. 화물 트럭을 빌려서 싣고 올 거라고 하더라.”
노금영과 백단영이 주고받던 대화가 뚝 끊겼다. 내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 빨리 할 일 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해야지.
건물 경비원의 정신을 쏘옥 빼놓을 취객 역할은 누구나 인정하는 미친개 노금영이 하기로 했다.
자, 노금영. 가라. 너의 똘끼를 마음껏 발산해라. 백단영이 등을 떠미는 것과 동시에 노금영은 소맥을 물처럼 퍼마신 주정뱅이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춘자 불러와! 춘자!” 노금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건물 문을 열고 들어서자, TV를 보던 경비원이 후다닥 달려 나왔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여긴 술집이 아닙니다. 나가세요.”
“웨이터 형님, 춘자 불러오라니까요. 입 옆에 점 세 개 있는 애. 계가 춘자걸랑요. 내 여자 친구였던 춘자, 걔 불러와 줘요. 팁 드릴게!”
노금영은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경비원의 셔츠 주머니에 꽂는 시늉을 했다.
“춘자고 영자고 여긴 아무도 없으니까 나가시라니까요.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아이쒸, 거 되게 깐깐하게 구시네. 팁 드린다니까. 딸꾹! 근데 갑자기 오줌이 마렵네.”
바지춤을 푸는 노금영의 행동에 경비원은 기겁을 했다. 노금영은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바지까지 끌어 내리는 미친 연기력을 발휘했다.
노금영이 바지를 끌어 내린 순간 낮게 욕을 하며 시선을 돌렸던 백단영이 손가락 두 개를 허공에 들어 올려 휙휙 저었다. 지금이다. 들어가자. 군대 갔다 온 놈, 갔다 오지 않은 놈도 다 알아볼 수 있는 수신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팀의 리더를 자처한 백단영의 명령이 떨어지자, 우리들은 빠르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CCTV가 달려 있는 것을 확인한 터라 비상구를 이용해 11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일행들은 11층까지 올라가며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숨이 차서 헐떡이는 건 나뿐인 듯했다.
내가 일행 중 가장 마지막으로 11층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들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장갑까지 낀 상태였다.
군대 용품 전문 쇼핑몰에서 단체로 구입한 눈 빼고 얼굴 전체를 가릴 수 있는 마스크에 검은색 작업용 장갑. 겉모습만 보면 다들 훌륭한 무장 강도다.
놈들의 사무실에는 간판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때 나민이가 했던 방법처럼 맞은편 건물로 올라가 사무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봉이가 1분도 되지 않아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해결사 생활을 오래한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이놈은 미국에서 무슨 짓을 하며 살았기에 이럴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우리들은 본격적으로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책상을 뒤집어엎고, 서류가 가득 든 박스를 내던지고, 컴퓨터 본체를 내팽개치고, 모니터를 칼로 북북 긋고.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려 부수고 내던졌다.
사무실 안에 CCTV가 달려 있다 한들 알게 뭔가. 놈들은 우릴 신고할 수도 없을 텐데.
“저기 형들, 잠깐 이것 좀 봐요.”
방금 전까지 컴퓨터 본체만 집중적으로 번쩍번쩍 들어 올려 내동댕이치던 동수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우릴 불렀다. 다들 하던 짓을 멈추고 동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진 수십 장과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화이트보드가 하나 있었다.
사진에 찍힌 놈들은 죄 교복을 입은 사내놈들이었다. 화이트보드 맨 위에는 ‘금형 고등학교 일진 클럽’이라는 붉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예전에 학원 수강생이던 덕진이 친구 놈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금형 고등학교에는 스무 명 정도로 구성된 일진 클럽이 있다고.
“저놈들이 다음 타깃인가 본데? 일진 클럽이라면 한 놈이 아니고 여러 명일 테니 한 번에 목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겠네.”
백단영이 ‘일진 클럽 짱’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 하나를 떼어 냈다. 웬 눈 풀린 꼴뚜기 한 마리가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임동추 씨,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들한테도 말해 주시죠.”
사진 속 인간 꼴뚜기를 들여다보던 난 깜짝 놀라 백단영을 쳐다보았다.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는데 백단영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저놈들을 1급 신고란에 신고한 게 제가 아는 아이 같습니다.”
“이번에 놈들 사무실 위치를 알려 주기도 한 확실한 정보통이라는 그 아이요?”
난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걸 피했다. 백단영은 가늘게 뜬 뱀눈을 하고서 날 빤히 쳐다봤다. 다행히 동수가 나와 백단영 사이에 끼어들어 주었다.
“형님들, 놈들을 제대로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어요.”
이를 드러내고 씨이익 웃는 사악한 얼굴을 보니 그 방법이란 게 뭔지 대충 짐작은 간다.
“놈들이 일진 클럽 애들을 사냥할 때 우린 놈들을 사냥하자고요. 화이트보드에 붙은 사진 수만 해도 족히 20개는 되어 보이는데 그 많은 놈들을 잡아 족치려면 남은 아홉 마리 귀면들도 총출동하지 않겠어요?”
“과연,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과 귀면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군요.”
백단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똑같이 소리 없이 미소 지어도 동수는 말썽 많은 동네 개구쟁이 같은데 백단영은 어둠의 보스 같다.
“어쩌면 놈들과 귀면들, 무학 도사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백단영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놈은 범접할 수 없는 어두운 오라를 팍팍 풍기며 떼어 냈던 사진을 다시 화이트보드에 붙였다.
그런 뒤 소매를 둘둘 걷어붙인다 싶더니 놈은 창가에 놓인 화분을 허공에 내던졌다. 화분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일단은 신나게 스트레스 발산 좀 해 봅시다.”
백단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수와 봉이는 목줄 풀린 두 마리 사냥개가 되어 지랄 발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