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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예약을 해 둔 종합 병원 신경 정신과에 나민이를 끌고 갔다. 혼자 보내면 가지 않고 다른 길로 샐 게 분명했으니까. 녀석은 병원에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수술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겨우 상담을 받으러 온 건데도 이런다.
“사람 죽인 내 아버지도 약 먹고 치료받으니 나아졌다던데 넌 금방 괜찮아질 거야. 아직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이 아니니까.”
녀석이 파리해진 얼굴로 날 쳐다봤다. 병원에 와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어린애 같아서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전 병원이 싫어요.”
“나도 싫다. 병원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냥 집에 가면 안 될까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치료나 잘 받을 생각해.”
시계를 보니 진료 시간은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지루한 법. 난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창을 띄워 포털사이트 대문에 박힌 인터넷 신문 기사들을 봤다. 어차피 기사 내용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예빈이랑 박진오랑 사귄단다. 박진오, 이 새끼 유예빈 팬들한테 욕 푸지게 얻어먹겠네.”
도축장 앞에 선 가축처럼 죽을상을 하고 늘어진 놈, 기분 좀 풀어 주려고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연예인 스캔들 얘기를 끄집어냈다. 할 말 없을 때 화제 삼기 최고로 좋은 게 연예인 얘기 아니겠는가.
“아깝다. 나 박진오 팬이었는데. 근육질 몸은 취향이 아니어도 얼굴은 귀여워서 좋아했단 말이지. 넌 어떻게 생각해? 유예빈보다 박진오가 훨씬 아깝지 않냐?”
바닥만 바라보던 녀석이 고개를 쳐들었다. 목에 꼿꼿이 힘주고서 “형”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영 심상치가 않다.
“임충식의 머리뼈는 지금 누가 가지고 있어요?”
대낮에, 병원 진료실 앞 벤치에서 이런 얘기를 하다니. 다행히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생각에 잠겨 있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느라 우리 얘기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아직도 해결사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제가 어제 일하러 갔다가 이상한 얘기를 들었거든요.”
“당장 거기 일 그만두라고 했잖아.”
“그만두더라도 돈은 받고 그만둬야죠. 월급 타는 날까진 버텨야 돼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어제 제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아세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듣고 왔기에 이렇게 뜸을 들여?”
“임충식의 머리뼈를 이용해서 꼭두각시를 만들어 냈다던데요.”
아무 생각 없이 <유예빈 매니저의 증언. 두 사람은 벌써 반년째 열애 중이다> 이런 제목의 기사를 클릭하려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귀면을 만들어? 누가? 누구긴 누구겠는가. 현재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는 쪽, 백단영과 해결사 놈들이지. 노금영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만 거다.
“가능한 일이야, 그게? 그러니까 임충식의 머리뼈만 있어도 귀면을 만들어 낼 수 있냔 얘기야, 내 말은. 아니다, 아니다. 그걸 떠나서 귀면이란 게 혼 덮어씌우기? 시체에 혼을 뒤집어씌우는 형식으로 만드는 거 아니었어?”
“시체는 어디서든 구하면 될 테고 머리뼈에 임충식의 혼이 깃들어 있을 테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무학 도사가 기를 쓰고 임충식의 머리뼈를 빼앗으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 하던데요.”
하지만 무학 도사만 쓸 수 있는 술법? 뭐 그런 기술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혼을 덮어씌워 살려 낸 시체들은 굶주린 짐승 그 자체라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어설프게 시도했다간 되레 잡아먹힌다던데. 그러고 보니 해결사 측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영 능력자가 있다고 했지.
“설마 형도 처음 듣는 얘기예요? 머리뼈를 가지고 있는 해결사와 한 팀이잖아요.”
“모르긴 왜 몰라? 알고 있었어. 요새 우리가 서로 바빠서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한 것뿐이지. 너도 대충은 알겠지만 우리한테 이번 일을 맡긴 게 전국 도사 연합이란 데거든. 전국 각지에서 능력 좀 되는 도사들만 추려서 만든 단체라 다들 실력이 어마어마해. 무학 도사 못잖은 실력자들이 모였는데 그거 하나 못 만들어 낼까.”
난 거짓말과 사실을 적절히 섞어 지껄였다. 하긴 그렇겠다, 하면서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서 어쩌겠대?”
“아마 꼭두각시들을 보내겠죠.”
“부패가 심해지고 있다면서.”
“그래도 에너지 드링크를 사발째로 퍼먹이면 잠깐 동안은 쓸 만해지니까요.”
“에너지 드링크?”
“피요.”
피. 귀면들을 보관해 둔 폐공장 천장에서 핏물이 쏟아지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벌였다간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
“형이 무학 도사라면 그딴 거 신경이나 쓰겠어요?”
세계 정복. 서울 초토화. 호연 도사가 지껄였던 개소리가 떠올랐다. 과연 그게 웃자고 한 농담이었을까.
시간이 됐는지 간호사가 나민이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상담 잘 받고 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의자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등을 떠밀었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며 녀석이 뒤돌아봤다. 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곧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닫았다. 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하고서야 난 벌떡 일어나 대기실에서 빠져나갔다.
수신 음이 울리자마자 수화기 저쪽에서 노금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침 전화 잘했다. 내가 지금 천수 형이랑…….]
“형. 백단영, 그 자식 지금 어디에 있어요?”
노금영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쏘아붙이듯 물었다.
[빽가? 회장이 뭘 좀 부탁해서 별장에 간다고 하던데.]
“언제 통화한 거예요?”
[어젯밤. 내가 먼저 전화했었거든. 야, 근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빽가는 왜 찾아?]
“별장이 어디에 있대요? 거긴 혼자 갔대요?”
[아, 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 새끼들이 임충식의 머리뼈를 이용해서 귀면을 만들어 냈답니다!”
목에 굵은 핏대가 팍 섰다. 약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곧 노금영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임똘추. 너 거기 어디야?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들을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장소를 알려 준 지 10여 분이 지나서 익숙한 봉고차 한 대가 병원 입구 쪽을 향해 달려왔다. 박천수의 연신마트 차다. 내가 안에 타기가 무섭게 박천수는 차를 출발했다. 차 안에 가득 찬 큼큼한 악취에 숨통이 턱 막혔다. 노금영은 내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쩌억 벌리고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한 대 때리기 전에 얼른 주둥이 움직여라. 아까 씨불였던 개소리, 그거 대체 뭔 소리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차창을 좀 연 뒤에야 난 나민이에게 들었던 얘기를 해 주었다. 길게 늘어놓을 얘기도 없었다. 백단영이 임충식의 머리뼈로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사실 이 한 마디로도 함축할 수 있는 얘기다.
“어디서 들은 얘기야? 확실해?”
“믿을 만한 소식통이 있어요. 그리고 어차피 금영 형도 백단영을 의심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믿을 만한 소식통이 누군데?”
“예전에 아리랑헌터가 자주 가던 피시방 위치를 알려 줬던 애들 있잖아요. 걔들이 운영자 아이디를 해킹해서 채팅방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나 봐요.”
“그래? 학원도 그만뒀는데 아직 애들이랑 연락하고 지내냐?”
“네. 걔들한테 또 도움받을 일이 있겠다 싶어서요.”
다행히 노금영은 생각나는 대로 둘러댄 거짓말을 믿는 눈치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적었다. ‘나민아. 미안하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 진료 끝나면 집에 가 있어. 볼일 끝나면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문장을 완성하고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노금영이 갑자기 내 핸드폰을 낚아챘다.
“누구한테 문자를 보내는 거야? 한나민? 누구야, 이놈은? 너한테 정보를 알려 줬다는 걔야?”
“이리 내놔요. 왜 남의 핸드폰을 멋대로 봐요?”
핸드폰을 다시 빼앗기도 전에 나민이에게서 답 문자가 날아왔다. 문자를 본 노금영의 표정이 흉하게 구겨졌다.
“네. 저녁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요? 한나민이 여자 이름이었어? 이 새끼, 이런 상황에서 애인이랑 문자질이나 하고! 말해, 새끼야. 네 여자 친구 예뻐? 예쁘냐? 몸매는? 가슴은 크냐?”
내가 게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노금영이 팔꿈치로 사람 옆구리를 쿡쿡 쑤시며 짹짹댔다. 짜증 나. 한동안 이걸로 갈굼깨나 당하게 생겼다.
“예뻐요. 몸매 죽이고 가슴도 엄청 커요. XX 여대 다니고요. 됐어요?”
핸드폰을 다시 뺏어 오며 되는대로 맞받아쳤다.
“어리고, 예쁘고, 몸매까지 죽이는 애가 미쳤대냐? 너 같은 놈하고 사귀게?”
“동추가 뭐 어때서 그래. 학벌 괜찮지, 잘생겼지, 현재는 백수 상태지만 동추 정도 스펙이면 곧 괜찮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고. 결혼하면 거치적거리는 시댁 식구도 없이 홀가분하지. 얼마나 좋아.”
노금영은 물론 박천수까지 껴들어서 떠들어 댔다. 한나민은 순식간에 참한 여대생이 되어 두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노금영은 계속 툴툴대면서 “똘추보다 내가 더 나은 놈인데, 내가 학벌만 좀 달리지 훨씬 더 괜찮은데” 이딴 소리나 지껄여 댔고 박천수는 마음 잘 맞고 이 여자 괜찮다 싶으면 빨리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너 지금 사는 집 전세금 빼면 내가 사는 동네에선 방 두 개짜리 신축빌라 전세 얻을 수 있다, 자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좋다, 아들보단 딸 키우는 재미가 그렇게 쏠쏠하더라, 이런 소리를 해 대면서 날 미치게 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국도로 빠져 달리길 몇십 분. 내비게이션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해결사 회장의 별장은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이 지역엔 간밤에 눈이 내린 것인지, 내린 눈이 채 녹질 않은 것인지 주위 풍광이 기가 막혔다.
우리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주위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박천수가 문 쪽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려 했다. 노금영과 나는 동시에 튀어 가서 박천수를 덮쳤다.
“형, 미쳤어요? 우리가 여기 뭐 하러 온 건데요?”
노금영이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자 그제야 박천수는 아, 맞다, 그랬지, 하며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나와 노금영은 조심스럽게 창문 너머로 별장 안의 동태를 살폈다.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 술병과 음식 그릇이 나뒹구는 걸 보면 밤새 술을 퍼마시고 방에서 자고 있는 건지도.
“근데 금영아, 동추야. 우리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닐까 싶어.”
멍청하게 큰 실수를 할 뻔했으면 눈치껏 주위를 망보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지 이런 식으로 산통을 깬다, 박천수는.
“이 형님이 또 왜 이리 재수 없게 구실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자고요? 임충식의 머리뼈를 우리가 갖고 있기로 결정한 거 아니었어요? 해결사 사무실로 가서 확실하게 담판을 짓자던 패기는 어디로 갔어요?”
노금영이 짜증을 내며 빈정거렸다.
“그건 그거고. 이건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는 거잖아. 몰래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어쩌냐 이 말이지, 내 말은.”
“안에 뭔가 있는 게 확실하다니까요? 내 짐승 같은 육감이 그렇대. 안에서 구리구리한 냄새가 풀풀 나는 것 같지 않냐고요.”
“구리구리한 냄새는 무슨…….”
박천수가 말하는 걸 멈추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나와 노금영도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누가 부엌 쪽에 있는 뒷문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덩치 큰 사내는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악취가 푹 풍겼다. 어찌나 심한 악취인지 골까지 띵해졌다.
우리들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노금영과 박천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저건 귀면들에게서 나던 냄새다. 시체가 썩는 끔찍한 냄새.
사내는 비닐봉지를 어깨에 둘러메고 강가 쪽으로 내려갔다. 봉투에 돌을 달아 강에 던지려는 것이리라.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노금영이 아까 사내가 나왔던 부엌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야. 금영아, 동추야. 좀 있어 봐. 우리들끼리 들어가는 건 위험해. 안에 몇 명이나 있을 줄 알고.” 포복 전진을 하듯 눈 덮인 땅바닥에 엎드려 징징대던 박천수도 마지못해 우리들 뒤를 따라 들어왔다.
밀폐된 집 안의 공기는 토기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역했다. 바닥이며 가구 위조차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건만. 노금영은 부엌과 거실의 중간에 위치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참 앞에 서 있었다. 계단에 검붉은 얼룩 같은 것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계단참을 통해 악취를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냄새를 풍기는 근원지는 저곳임이 분명했다.
노금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나와 박천수에게도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켜 두라고 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즉시 눈에 보이는 건 무조건 찍는 거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현장을 덮칠 땐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장 증거 사진을 남길 것. 밤일꾼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행동 아닌가.
내 계획은 살금살금, 쥐 죽은 듯이 내려가 몰래 사진부터 찍어 두는 것이었지만 노금영의 계획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놈은 말릴 새도 없이 냅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윽고 ‘쾅!’ 하고 발로 문을 차는 소리가 나더니 ‘으악! 으허헉! 끼야악!’ 갖가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망할 새끼야. 빌어먹을 종자야. 넌 팀플레이가 뭔지도 모르냐? 팀플레이!
난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얼른 뛰어 내려가 열린 문 사이로 핸드폰부터 들이밀었다. 찰칵찰칵, 사진 찍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이쪽을 보는 놈, 한 손엔 목이 홱 돌아간 닭을 들고 한 손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서 딸꾹질을 해 대는 놈, 찰진 욕설을 구사하며 삿대질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들이 핸드폰 속 사진 앨범에 차곡차곡 들어찼다.
“뭐 하는 새끼들이야, 이거! 아, 씨발. 찍지 마. 찍지 말라고!”
턱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젊은 놈이 내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 와중에도 난 놈의 얼굴에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 댔다.
“나? 노금영이다! 노금영! 내가 그 유명한 노금영이라고!”
똘기 폭발한 노금영이 놈들한테 대가리를 들이대며 익룡이 ‘꽤애애액!’ 하고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노금영? 그게 누구야?”, “너 아냐?”, “아니, 난 모르는데. 이 새끼 아는 놈?” 음주 단속에 걸린 현직 국회 의원이 교통경찰한테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고 소리치는 듯한 당당함에 놈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수군거렸다.
“이 새끼들, 이런 데서 오글오글 모여서 무슨 헛수작을 하고 있었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노금영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거무죽죽한 뭔가를 들고 탈탈 흔들며 꽥꽥댔다. 사방에 검붉은 액체가 튀었다. 피였다. 거무죽죽하게 축 늘어진 저건 개의 사체고. 내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덩치의 얼굴에도, 내 얼굴에도 피가 묻었다. 노금영, 저 새끼. 같은 편이지만 패 죽이고 싶다, 진짜.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새끼들아. 너희들이 여기서 귀면을 만들어 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온 거니까. 너희들이 만든 귀면은 어디 있어? 임충식의 머리뼈는!”
“이 새끼들 밤일꾼 놈들인 것 같은데요.”
목 비틀어진 닭 사체를 들고 있는 놈이 말했다. 말한 놈에게 노금영이 “그래. 우린 밤일꾼이다! 뼈를 내놔! 뼈!” 탈탈 흔들던 개 사체를 집어 던지며 펄쩍 뛰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귀면을 만들다니. 진정 좀 하고 우리 진득하게 얘기 좀 하세.”
중년 사내가 떼쓰는 어린애를 타이르듯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동물 사체들, 이 도구들!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이렇게 널리고 깔려 있는데 어디서 구라를 치려고!”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겠네. 여기서 놈들을 만들려는 시도는 했어. 하지만 결국은 만들지 못했어. 만들 수가 없었다고.”
“이거 왜 이러셔!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고 온 거라니까!”
노금영은 아예 철제 수술대 옆에 놓여 있던 물건들을 뒤집어엎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은 수술대 옆에 응당 있어야 할 메스 같은 게 아니라 흙이 든 봉지, 염주 알, 나무 조각들, 타다 만 부적 쪼가리 같은 것들이었다.
“그분 말이 사실입니다. 제 능력으로는 그것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어요.”
우리들의 등 뒤에서 곱디고운 여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냘픈 음색에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 원피스를 입은 미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 굳은 얼굴을 한 백단영의 모습도 보였다.
갑작스러운 미녀의 등장에 지랄 발광을 하던 노금영이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제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 그게 저기, 그쪽이 죄송할 것까지야……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자기보다 열 살 이상은 더 많아 보이는 형님들한테도 댁, 당신, 이따위 호칭으로 불러 대던 노금영이 놈답지 않게 공손한 말투로 질문했다. 상대가 젊고 예쁜 여자라 저러는 거다.
“정혜 도사님이시다.”
대답은 백단영의 입에서 나왔다.
“이 아가씨가 그쪽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영 능력자?”
벽에 바퀴벌레처럼 달라붙어 있던 박천수가 입을 열었다. 백단영은 고개만 끄덕이며 여자와 함께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노금영은 정혜 도사라는 여자의 청초한 미모에 넋이 나간 듯했다.
방금 전까지 핏발 선 눈으로 발광을 하던 들짐승이 여자의 등장과 함께 온순한 똥개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저 여자가 예뻐 보이지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남자 좋아하는 게이라도 예쁜 여자는 예쁘다고 인정하는 놈인데. 저 여자는 어째 생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하기만 한 것이 머리 늘어뜨린 처녀 귀신 같다.
“노금영, 넌 또 어디서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듣고 와서 이 지랄이냐? 이 지랄이.”
“개소리? 어쨌든 네놈들이 임충식의 머리뼈로 헛짓거리한 건 맞잖아! 직접 눈으로 본 이상 이젠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내놔, 머리뼈. 우리한테 넘겨.”
“힘들게 밥상 다 차려 놨더니 밥숟갈만 가지고 끼어드는 격이네. 이참에 까놓고 말해 보자. 임충식의 뼈를 찾는 데 너희들이 한 일이 뭔데? 돈 처들여서 김태민의 행방을 수소문해서 찾아낸 건 우리야. 자존심 상해서 지금까진 말 안 했지만 김태민을 찾는 거, 더럽게 힘들었어. 돈도 수천 깨졌고. 변태 같은 정보 수집가 놈들한테 빚도 졌지. 그런데 우리가 임충식의 뼈를 이용해서 헛짓 좀 하면 안 되는 건가? 온갖 고생 다 하면서 겨우 우리 손에 넣었는데 이걸로 이익 좀 챙기면 안 되는 거냐고.”
웬만해선 말발로 달린 적 없던 노금영도 이번엔 입만 뻐끔거렸다. 반박할 여지가 없다. 백단영의 말대로 뻔뻔한 건 우리다. 뭐 우리도 나름 김태민을 찾겠다고 고생 좀 했지만 수천만 원이나 처들였다는 해결사의 고생과 비교할 수나 있을까.
“회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탓에 스트레스 쌓여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왜 너희들까지 이러냐.”
백단영은 못 보던 새 부쩍 초췌해져 있었다. 노금영이 “아무리 그래도 이 새끼야” 하고 운을 뗐을 때. 정혜 도사가 나섰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모두 위로 올라가시죠. 올라가서 제가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얘기해라, 난 못 올라간다, 이러면서 날뛰었을 노금영이 “네, 알겠습니다” 하며 순순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박천수는 언제 위로 튀어 올라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버티고 서서 지하 공간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내가 있건 말건 원래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들고 있던 죽은 닭과 노금영이 허공에 털던 개 사체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주워 올리고, 물걸레로 수술대 위와 피가 튄 벽·바닥을 벅벅 닦았다.
“왜 안 올라오시나요?”
아까 위로 올라갔던 여자가 다시 내려온 모양이었다. 계단참의 어둠 속에서 여자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하게 빛났다. 역시 기분 나쁜 여자라니까.
“당신이 임동추 씨죠?”
“날 알고 있습니까?”
“딱 알아보겠네요. 호연 도사님께 당신 얘기를 들었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참 주위 영들이 더럽……, 지저분하군요.”
더럽다고 말하려던 거 다 안다. 얼른 말을 바꾸고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내가 도사나 무당은 아니어도 사람 본모습 하나는 귀신같이 꿰뚫어 보는 놈이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귀신들 때문에 되는 일 하나 없으시겠네요.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겠습니다. 쯧쯧.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나중에 부적 하나 써 드리겠습니다.”
“종이 쪼가리 한 장에 얼마나 받아먹으려고 이러시나.”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것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정혜 도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결국 공짜로는 죽어도 못 써 주겠다 이거군. 그녀는 발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위로 올라갔다. “얼굴은 예쁜데 볼 때마다 참 기분 더럽게 나빠진단 말이야.” 뒤에서 열심히 물걸레질을 하던 해결사 똘마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를 보고 기분 나빠지는 게 정상이다. 노금영처럼 넋을 잃고 홀리는 게 비정상인 거고.
내가 올라갔을 땐 이미 모두들 거실 소파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정혜 도사는 가운데 상석에 홀로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여왕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졸병들 같군. 난 속으로 조소를 흘리며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창백한 낯빛을 한 여왕이 굳은 표정의 졸병들을 휘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충식의 머리뼈만으로 귀면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뼈 전체가 우리 손에 들어온다 해도 제 능력으론 불가능할 거고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지만 안 되더군요.”
정혜 도사는 깨끗하게 인정했다. 말투나 목소리에선 패배감이나 좌절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은 있었습니다. 귀면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냈으니까요.”
모여 앉은 사내들의 시선이 부러질 듯 가냘픈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여자의 분홍색 루주를 칠한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장밋빛으로 색칠한 뺨에 둥근 곡선이 생겼다.
“흙이 있으면 됩니다. 귀면들이 묻혀 있던 장소의 흙이요. 그게 있으면 우리도 귀면들을 태워 없앨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대체 어디서 구해요? 놈들이 어디에 묻혀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박천수가 질문했다. 지금은 무조건 여자 편을 들어 주고 싶을 노금영도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귀면이 묻혀 있던 장소. 대충 어디인지 짐작이 간다. 예전에 무학 도사가 살던 강원도 두레 식당 근처의 산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순간 정혜 도사의 웃음 띤 눈빛이 내게 고정되었다. 여자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설마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가늘게 뜬 그녀의 두 눈이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강원도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정혜 도사의 말에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저절로 내 어깨가 움찔 떨렸다.
“강원도에는 왜요? 거기에 뭐가 있답니까?”
“7년 전에 무학 도사가 그곳에 살았었습니다. 거기서 작은 식당을 차렸었다죠. 정신 이상한 딸과 어린 손자를 데리고요. 추정컨대 귀면이 만들어진 건 그 시기이니, 그 일대 야산의 흙을 파 보는 게 맞겠지요.”
노금영과 박천수, 줄곧 정혜 도사와 함께 있었던 백단영까지도 놀라서 입을 쩌억 벌렸다. 난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저들은 생전 처음 듣는 얘기일 터. 나도 한발 늦게 억지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 도사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그치를 만나러 강원도에 갔던 적이 있으니까요.”
“‘그치’라면 무학 도사요? 아니, 그 영감을 도사님이 왜 만나요? 뭣 때문에?”
“한때는 연인 관계였죠. 지금은 그치를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없지만.”
이번엔 나도 순수하게 놀랄 수 있었다. 연인 관계라니. 7년 전이라 해도 무학 도사는 노인네였다.
그리고 그 당시 정혜 도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젊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어떻게 자기 딸과 비슷한 나이 대의 여자를 건드릴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저 여자는 아버지도 아니고 할아버지뻘인 다 늙은 영감과 연애를 할 수 있었던 거지?
“그 사람과는 모든 게 다 잘 맞았어요. 마음도 잘 맞고 성격도 잘 맞고 속궁합도 잘 맞고.”
속궁합이란 말에 노금영은 제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백단영의 표정도 벌레 씹은 것처럼 일그러진 걸 보니 놈도 저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린 제법 잘 지냈어요. 서울에서 각자 도사 생활 열심히 하면서 돈도 차곡차곡 모으고, 살림을 합쳐서 함께 살 계획도 세웠었어요. 그런데 그 계집애, 그 미친 계집이 나타나면서부터 모든 게 틀어졌어요.”
정혜 도사의 표정이 갑자기 일변했다. 목소리 톤도 확 바뀌었다.
“도사 생활하면서 연락이 끊겼던 남동생 부부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죽었다고 하더군요. 동생한테는 정신 좀 이상한 딸이 한 명 있었는데, 부모가 죽었으니 걔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면서 데리고 왔더군요. 양녀로 삼겠다고. 그런데 그 계집애가 점점 배가 불러 오는 겁니다. 임신을 했던 거지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고요. 난 또 애가 머리는 이상해도 얼굴은 예쁘장하니까 나쁜 놈한테 몹쓸 짓을 당한 게 아닌가 싶어서 아기 용품도 사다 주고 가서 애도 봐주고 그랬었죠. 바보같이. 아기한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설마, 설마, 설마……. 난 속으로 그 소리만 되뇌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마 아닐 거야, 싶었던 일이 정말로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알고 보니 그 애가 그 작자 씨였어. 그 발정 난 늙은 개새끼가 걔를 건드린 거야!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된 계집애를! 그것도 자기 동생 딸을! 난 그것도 모르고 그 작자가 사기당하고 강원도로 가서 수행을 한다기에 진짜로 그런 줄 알았지! 쓰레기 같은 새끼!”
정혜 도사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살기등등한지 다들 잔뜩 몸을 움츠리고는 여자의 눈치만 살폈다.
이젠 내가 뒷덜미 잡고 쓰러져야겠다.
무학 도사의 동생 딸이 낳았다는 아이는 갈색 가면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학 도사는 갈색 가면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란 얘기다. 죽은 여자는 누나가 아니라 어머니였던 거고.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나.
딱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묘한 호칭 문제. 죽은 여자는 무학 도사의 딸이었고, 갈색 가면은 무학 도사의 손자. 그런데 갈색 가면은 죽은 여자를 ‘누나’라고 불렀다. 왜 놈은 여자를 고모가 아니라 누나라 불렀을까. 분명 이상한 일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신경 쓸 다른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뇌가 포화 상태였던 탓이다.
강원도에서 보았던 깡마른 사내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먹이를 던져 준 사람을 언제까지고 쳐다보는 똥개 같던 애.
그 애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의 통증이 수반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금의 갈색 가면을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도록 아프다. 두레 식당집 깡마른 사내애는 갈색 가면과 동일 인물인데.
격분해서 순간 뒤집어쓰고 있던 내숭 가면을 벗어던졌던 정혜 도사가 “흠, 흐음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여하튼 강원도로 보낸 분들이 흙을 가져오면 그걸 이용해서 귀면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겁니다. 보란 듯이 귀면을 만들어 내서 그 인간의 자랑거리인 귀면 놈들을 찢어 죽이고 그 인간도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하는 수 없지요. 여러분도 이 일에 협력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누구의 입에서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게 어디 대답이 필요한 일이던가.
어차피 목적은 하나다. 무학 도사의 목을 치는 것.
그렇게 하려면 저 여자가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일을 의뢰한 ‘갑’에게 무학 도사의 잘린 목을 보여 줘야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건 괜한 걱정일지 모르지만요. 무학 도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한 인간입니다. 그 작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정혜 도사의 가는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가운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의 발랄한 목소리에 침묵이 깨졌다.
“다들 여기서 뭐 하심미까! 오마이갓! 형들 아니심니까? 왜 형들이 여기 있슴미까? 무슨 일임미까!”
출처 불분명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짖어 대는 놈은 바로 봉이였다.
*
*
자꾸만 주머니 속에 손이 들어갔다.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가 안에서 느껴지는 낯선 느낌에 깜짝 놀라 손을 빼내고, 다시 무심코 넣었다가 빼내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손끝에 닿는 이 감촉엔 아마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형이 부탁하던 그거임미다.>
봉이가 날 몰래 불러 차고로 데려가 뭔가를 건넸다. 언젠가 녀석에게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총이었다.
사실 부탁했던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봉이에게 총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날은 귀면들한테 산 채로 잡아먹힐 뻔했던 날이다. 그날을 떠올리면 기억나는 거라곤 열한 개의 냉동고에서 튀어나오던 귀면들, 천장에서 쏟아지던 피, 놈들한테 잘근잘근 씹혔던 것들밖에 없다.
<군대 갔다 온 한쿡 남자니까 쏠 줄 알지요? 이러케 이러케 하고 이러케. 오케이?>
봉이는 간단하게 조작 방법을 시연해 주고는 탄창이 꽉 찬 총을 내밀었다.
<총알은 열다섯 개. 더 필요해요?>
난 필요 없다고 했다. 열다섯 발이면 충분했다. 사실 그걸 다 사용할지도 미지수였다. 어차피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나 정도는 갖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부탁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손에 넣고 보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고작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인데 천하무적의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 그 무시무시한 흉기를 내가 지금 가지고 있다. 누가 봐도 길을 걷는 20대 후반의 평범한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내가.
난 아예 점퍼 주머니에 지퍼를 채웠다. 주머니를 닫을 수 있는 옷을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이 옷을 입고 오지 않았다면 봉이가 내민 로고가 찍힌 쇼핑백에 총을 넣어 왔을 터였다.
든든한 마음과는 별개로 어깨가 자꾸만 움츠러들고 고개가 수그러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나라에선 총기 소지 자체가 불법이니까. 갑자기 어디서 경찰이 튀어나와 내 뒷덜미를 붙잡고 수갑을 채울 것 같아 빨리 집에 가고만 싶었다. 통장과 언젠가 반쯤 미쳐서 샀던 촌스럽고 나이 들어 보여서 차고 다닐 순 없는 다이아 박힌 명품 시계를 숨겨 둔 서랍 깊숙한 곳, 거기에 총을 숨겨 놓을 생각이었다.
아니다. 아냐. 그래도 기왕 손에 넣은 거 사용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총이란 건 자고로 애인 다루듯 계속해서 만져 주고 손질해 줘야 하는 건데.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잡생각이 싸악 사라졌다. 갑자기 뒷덜미를 찌르르 울리고 오른쪽 귓속으로 파고들어 뇌를 거쳐 왼쪽 귀를 파르르 떨리게 하는 불온한 직감 때문이었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 한 명이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늦은 밤이기도 했고 대로를 지나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길로 접어든 참이라 길에는 놈과 나밖에 없었다. 푹 눌러쓴 야구 모자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 그래. 그러는 넌 잘 지내고? 새끼야, 얼굴 좀 보고 살자. 언제 한번 시간 내. 곱창에 소주나 한잔하자.”
통화 내용도 별다를 것 없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젊은 놈이다.
그런데 내 직감은 끊임없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난 걸음을 빨리했다. 등 뒤에서는 놈이 친구와 통화하며 낄낄 웃는 소리만 들렸다. 난 뛰듯이 빠르게 걷다가 눈앞에 보이는 좁은 골목길로 몸을 틀었다.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뚝 끊겼다. 이윽고 급하게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놈이 숨을 헐떡이며 골목길로 몸을 튼 순간, 숨죽이고 벽에 달라붙어 있던 난 놈의 앞을 터억 가로막았다. 놈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하며 물러섰다. 놈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이 야밤에 날 왜 따라오냐? 내가 죽여주게 예쁜 아가씨도 아니고.”
난 실실 웃으며 지퍼를 열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잡히는 덩어리를 꽈악 다잡아 쥐었다.
“임동추지?”
놈이 점퍼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래, 내가 임동추다. 나한테 무슨 볼일 있냐?”
“그냥 얌전히 몇 방 맞고 병원 가서 푹 쉬어. 살살해 줄게. 사람 죽이는 건 내키지 않으니까.”
지랄한다, 지랄을 해. 자기가 나한테 살살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판에. 예상했던 대로 놈이 품에서 꺼내 든 건 접이식 칼이었다. 덜덜 떨며 커터 칼 꺼내 들던 양아치 놈들과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다부진 체격을 보건대 나민이가 말하던 ‘운동깨나 한 형들’ 중 하나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냐. 내가 오늘 마침 아주 좋은 걸 가지고 있는데.
“괜히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끝내자. 나도 이런 짓, 더럽게 하기 싫거든.”
놈의 말투에선 여유가 묻어났다. 말하는 것만 보면 놈은 이미 승자다. 난 콧방귀를 뿡 뀌며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을 끄집어냈다. 나 역시 총을 쥔 폼 하나만은 <007> 제임스 본드 뺨칠 터였다. 여유롭게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다가오던 놈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미쳤냐?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어디서 모형 총을 들이대?”
“모형 총인지 아닌지 네놈 몸으로 실험해 볼래?”
난 히죽거리며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칼을 쥔 놈의 팔이 크게 경련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칼 내려놔라.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 같은데 사정 봐서 살살 다뤄 줄게. 나도 사람 죽이는 건 내키지 않거든.”
“여기서 총을 쏘면 소리가 너무 커서 사람들이 경찰을 부를 텐데?”
“알 게 뭐야. 넌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쪽에 엄청나게 든든한 빽이 있어서 잡혀가도 금방 나온다. 난 길게 말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다. 셋 센다. 칼 내려놔라.”
“새, 새끼, 모형 총으로 허세 부리기는!”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오다 못해 허리춤에 둘둘 감았나. 놈은 총구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총을 들이댄다고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내릴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내 말대로 했으면 정말 살살 다뤄 줬을 텐데. 난 잇새로 웃음을 흘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손목이 튕기는 가벼운 반동과 함께 엄청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기념이 될 첫 발은 잡초로 뒤덮인 벽에 박혔다. 어차피 위협용으로 쏜 첫 발이었다.
놈이 입을 떠억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총알이 박힌 벽을 한 번 보고, 아직도 자신에게 겨눠져 있는 총구를 보고, 내 얼굴을 봤다.
“그, 그, 그거 진짜였어? 지, 진짜 총이야, 그거? 씨발. 진짜 총으로 쏴? 미친놈아?”
놈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물었다.
주위에 늘어선 집들 창문에 불이 하나씩 들어왔다. 총성을 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대며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창을 열어 댔다. 난 얼른 총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목에 힘을 주어 소리를 질렀다.
“끄아아악! 사람 살려! 사람 살려어! 아이고, 나 죽네!”
내가 갑자기 팔 한쪽을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자 돌처럼 굳어 서 있던 놈의 눈이 더 커졌다.
“저 새끼가 사람 죽이네! 살려 줘요! 도와주세요! 으아아악!”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놈이 시퍼렇게 질린 낯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사람들이 핸드폰을 내밀어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놈의 모습을 찍고, 어디엔가 전화를 했다. 거기 경찰서죠? 여기 XXX인데요. 사람이 죽어 가요! 방금 전에 빵 터지는 소리가 나고 사람 한 명이 막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빨리 좀 오세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더 좁은 골목 안의 어둠 속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겨우 한 사람 정도 드나들 수 있는 골목에서 벗어난 때.
부우웅.
벌 떼가 지나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바퀴 솜털을 간질였다. 내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비튼 순간 은색 막대가 오른쪽 귀 끝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머리통이 박살 났을 위험한 순간이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빠르게 몸을 굴린 덕에 은색 막대는 애꿎은 벽을 때렸다. 이놈은 방금 전의 그놈과는 달리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었다.
“잠깐, 너 이거 안 보여? 움직이면 쏜다. 진짜로 쏜다.”
비장의 카드인 총을 꺼내 들었는데도 놈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삼단봉을 휘둘렀다. 귀면인가? 총을 봐도 주저하지 않는 걸 보면.
삼단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흉기를 쥐고 있지만 사용할 수가 있어야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런 데서 마음 놓고 총을 쏠 수도 없고. 적은 생각 중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가차 없이 퍼부어지는 삼단봉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며 난 문 닫은 미용실이 보이는 쪽으로 냅다 달렸다.
이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술집과 식당 몇 개가 늘어선 대로변이 나온다. 늦은 밤이라도 술집 몇 군데는 아직 영업을 할 테니 거기로 가면 사람들이 있을 테고.
난 한참을 달리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런데 망할.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놈이 도망친 나를 쫓아올 것이라 생각했건만.
텅 빈 길에는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TV 소리도, 애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적막.
헐떡이는 내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저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아까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는 것일까.
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가 쫓아오지는 않는지, 누가 주위에 숨어 있지는 않은지. 얼어붙은 코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가 되어서야 난 돌아섰다. 아까처럼 눈앞에서 뭔가 툭 튀어나오진 않을까 조심하면서.
핸드폰이 울렸다. 동수였다.
[형! 동추 형! 괜찮아요?]
“너도 공격당했냐?”
[역시 형도 당했어요? PC방 갔다가 집에 가는데 새끼들이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어요.]
“다친 덴 없어?”
[갑자기 공격당해서 살짝 긁히고 찢어진 정도예요. 형은요? 다친 데 없죠? 일단은 없을 거라고 믿을게요. 제가 지금 달봉 형네 가게로 가는 중이라 형한테는 못 가거든요.]
“너희 집에 부모님만 계시지 않아?”
[우리 아부지랑 엄마는 온천 여행 갔어요. 어, 잠깐만요 금영 형한테 전화 왔어요. 여하튼 문 꼭 잠그고, 누가 문 두드려도 누군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문 열어 주고요. 알았죠?]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새 집이 보였다. 언제나 열려 있는 대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따뜻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며 편안한 나만의 장소가 나를 반겨 줄 것이다. 지금까지는 늘 그랬다.
하지만 쇳소리 나는 대문을 연 순간, 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시꺼먼 헬멧을 뒤집어쓴 젊은 남자.
다리를 벌리고 계단에 앉아 있던 놈이 날 발견하고는 일어섰다. 입고 있는 옷을 보건대 아까 내게 삼단봉을 휘두르던 놈인 게 분명했다.
내가 대로를 끼고 빙 돌아오는 동안 놈은 지름길을 통해 이곳에 먼저 도착해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엄마 품속 같은 안락함을 주었던 소중한 장소에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내가 가진 열몇 평짜리 공간마저 침범당한 것이다.
놈이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했다.
뒷걸음질하다 뭔가를 밟았다. 빈 음료수 캔이었다. 내 체중에 눌려 캔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엄청난 소음이 되어 사방에 울렸다.
놈이 머리에 쓴 헬멧이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직감이 소곤거렸다.
저 새끼는 귀면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까 총질 한 번에 넋이 나갔던 놈과 같은 부류도 아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떤 놈이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냐? 이젠 스토커 짓도 하냐?”
빈정거리며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너희 대빵이 날 죽이라고 시켜?”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대신 놈은 성큼 다가와 내 팔을 움켜쥐었다.
잡힌 팔을 뿌리치려 팔 근육을 비틀자 놈의 손가락이 더욱 세게 파고들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었다.
가죽 특유의 약품 처리된 누린내 비슷한 것이 콧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난 고개를 들어 놈을 쳐다보았다. 갈색 가면만큼이나 익숙한 검은 헬멧. 머릿속 한구석에 물음표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오늘따라 왜 아무 말도 없냐? 네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지껄이며 난 눈으로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뒤는 뻥 뚫려 있다. 붙잡힌 팔을 뿌리치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상황…….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골목 끝에 검은 덩어리 같은 게 보였다. 검은 헬멧을 쓴 머리통이다. 인간? 귀면? 어느 쪽이든 쉽게 도망치기는 글렀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한적한 데 가서 얘기하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나름 회포도 풀 겸. 여긴 너무 좁고 냄새나잖냐.”
난 애써 태연한 척 웃었다.
옆집 2층 창문이 환해졌다. 난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팔을 세게 비틀었다. 놈은 더 세게 내 팔을 움켜쥐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놈은 나를 가슴에 묻은 채로 벽에 붙어 섰다. 물음표 하나가 더 떠올랐다. 갈색 가면이 이렇게 컸던가. 내 얼굴이 놈의 가슴에 묻힐 정도다. 게다가 놈의 두툼한 가슴팍에선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바짝 마른 흙냄새, 피 냄새만 풀풀 풍기던 놈이었는데.
“너 누구…….”
놈이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는 벽에 세게 짓눌렀다. 턱뼈를 으스러뜨릴 것 같은 악력은 갈색 가면의 것이 맞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짙어진 의문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난 소금 뿌린 민물고기처럼 펄떡이며 입을 틀어막은 놈의 손을 간신히 떼어 냈다. 그리고 놈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비장의 카드를 날렸다.
“왜 넌 네 엄마를 누나라 부르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부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놈이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치사하게 때린 데 또 때리려고 폼을 잡은 순간.
뭔가 놈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엄청난 충격에 놈의 머리통이 흔들렸다.
놈이 고개를 홱 돌린 순간, 이번엔 놈의 뒤통수를 가격한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날아든 묵직한 덩어리에 어깨를 맞은 놈이 크게 휘청댔다. 부서진 벽돌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둠 저편에 야구 모자를 쓴 사내가 벽돌을 높이 쳐든 모습이 보였다.
옆집 2층 창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거기 누구요?” 옆집 노인의 가래 들끓는 목소리에 팽팽하게 당겨진 피아노 줄 같던 공기가 쩌억 갈라졌다.
벽돌에 맞은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검은 헬멧 놈이 후다닥 도망쳤다. 놈이 사라지자 흙 묻은 벽돌을 무기랍시고 쳐들고 있던 야구 모자가 달려와 앞으로 고꾸라지는 날 부축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술에 좀 취해서요.”
난 창문 뒤에 숨어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노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젊은 사람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나 그래. 사람들 잠 다 깨워 놓지 말고 얼른 들어가.”
노인은 그제야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고 들어갔다.
“형, 괜찮아요?”
낯익은 목소리에 낯익은 손길, 낯익은 얼굴이다. 나민이었다. 나민이가 쓰고 있는 야구 모자는 박하신이 보낸 영상 속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형은 올 생각도 하지 않고 연락도 없어서요. 일단 들어가요.”
그러고 보니 이 녀석과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었구나. 나민이는 날 부축해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젠 아무것도 없는데도 난 계단을 올라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 부축해 안아 주는 녀석의 팔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 그 자식, 무학 도사의 손자 같아요.”
하지만 문을 여는 내 옆에 서서 나민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순간, 생선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침을 삼키기가 불편해졌다. 난 문고리를 잡아 쥔 채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녀석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난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하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의 그놈이 무학 도사의 손자 놈이라고?
그놈은 갈색 가면이 아니다. 확신할 수 있다.
그놈이 갈색 가면이었다면 내가 자기 누나 얘기를 꺼냈을 때 조금이라도 꿈틀댔을 것이다. 게다가 나민이는 어떻게 알고 이 시간에 딱 맞춰 날 찾아온 걸까. 마치 멀리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튀어나올 기회만 노리고 있던 놈처럼.
나민이는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야구 모자를 벗어 눌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뒤따라 방에 들어온 날 보며 묻는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 안 드셨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드릴까요?”
“그래. 계란 넣고 맛있게 끓여 봐라. 배고파 쓰러지겠다.”
녀석은 귀엽게 웃으며 점퍼를 벗고 주방으로 나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몰래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장 깊숙한 곳에 총을 밀어 넣었다가, 곧 생각이 바뀌어 다시 끄집어내 속옷과 양말을 넣어 두는 작은 서랍장 밑에 숨겼다.
남은 총알은 열네 개. 뒤늦게 봉이가 총알이 더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