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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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친놈이 경찰서 안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며 난동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창의적인 욕 퍼레이드만 들어도 저 미친놈이 노금영이란 걸 알겠다.

“실례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들어섰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경찰서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그야말로 지랄 발광을 떨고 있는 미친개 한 마리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빙 둘러선 경찰들 틈으로 시뻘게진 얼굴로 꽥꽥대고 있는 노금영의 얼굴이 보였다.

동수가 필사적으로 노금영의 지랄 발광을 막고 있었지만 놈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노금영이 제대로 미치면 아무도 감당 못 한다.

“니미! 우린 법 없이도 살 선량한 시민이야! 그런데 왜 우리 같은 착한 시민을 잡아! 잡으려면 아까 그놈들을 잡아야지. 당신들이 놔준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나쁜 새끼들인데!”

“제발 조용히 좀 하세요! 법 없이도 살 선량한 시민이 술 퍼마시고 운전대를 쥡니까!”

경찰이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술을 퍼마시긴 누가 퍼마셔! 생맥주 5백, 딱 한 잔 마셨다니까 그러네!”

“한 잔을 마셨건 두 잔을 마셨건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셨으니 처벌을 받으셔야죠.”

“이 나라는 음주 운전 좀 했다고 사람 모가지를 잡고 경찰서에 끌고 오나!”

“음주 운전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유치장에 처넣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아셔야죠!”

“아오! 시발 좆같네!”

노금영은 두 발을 허공에 붕 띄우고서 파닥거렸다. 동수가 노금영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저 미친개가 기어이 경찰을 물어뜯었을 게 분명하다.

노금영은 “아오! 아오오올!” 계속 괴성을 지르면서 온몸을 이용해 펄떡펄떡 날뛰었다. “강 형사! 뭐 하는 거야? 당장 저 자식 유치장에 처넣어!”, “그래, 죽여라! 죽여!”, “금영 형. 제발 이러지 좀 마세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새된 고함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내가 나서야 할 타이밍인 듯했다.

“금영 형!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대체 왜 이러세요! 아무리 인생사가 좆같아도 훌륭한 나랏일 하시는 경찰분들한테 화풀이를 하시면 돼요?”

난 빠르게 경찰들 틈을 뚫고 노금영에게 달려갔다. 노금영이 ‘이 새끼 이거 왜 이래?’ 하는 듯한 눈으로 날 노려봤다.

“우리 형이 원래 이런 분이 아닌데 오늘 술 좀 드셨나 봅니다. 몇 년 전에 잘 다니던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되고, 돈 좀 모아 둔 걸로 작은 떡볶잇집을 개업했는데 동업하던 놈이 돈 떼먹고 달아나고 어머니까지 충격 먹고 쓰러지셨어요. 형수님은 애들 데리고 친정 가서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얼마 전에 형수님이 전화를 해서 이혼하자고 하데요. 사는 게 이렇게 좆같은데 우리 불쌍한 형이 술이라도 퍼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요.”

금방이라도 눈물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 표정은 기본이고 거기에 깊은 한숨까지 덧붙였다.

“임똘추, 너 미쳤어? 어디서 그딴 개소리……! 으읍!”

머리는 나빠도 눈치는 빠른 동수가 얼른 핏발 선 눈으로 짖어 대는 노금영의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형. 왜 이래, 정말. 애들 생각해서라도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나도 억지로 우는 시늉을 하며 힘을 주어 턱뼈를 부수기라도 할 기세로 두 손을 이용해 노금영의 입가를 눌렀다. 노금영이 “억억, 크허헉!” 괴로움에 찬 신음을 토해 내며 바동거렸다.

“사정이 딱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경찰서에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형을 대신해서 이렇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경찰 앞에서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였다.

“저희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요즘 누구나 다 살기 힘들죠. 그런데 한 번씩 형님 같은 분들이 술 드시고 저희들한테 화풀이를 하고 가시는데 그럴 때마다 진이 다 빠져요.”

“네, 압니다. 그런 사람들 일일이 다 상대하려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우리 형님 상대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이거 좀 드시죠.”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건강 음료를 꺼내 경찰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그토록 길길이 날뛰며 발광을 하던 노금영이 얌전해졌다. 동수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아예 숨구멍까지 틀어막아서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다.

“그런데 금영 형님이랑 동생이 왜 경찰서에 끌려온 겁니까?”

“형님 분이 음주 단속을 하던 교통경찰을 폭행하셨습니다. 운전을 하시던 노금영 씨가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혈중 알코올 농도 0.1퍼센트가 나왔는데도 교통경찰을 협박하고 난동을 피우셔서요.”

경찰이 빨대로 음료를 쪽쪽 빨아 마시며 말했다.

“형님한테 맞으셨다는 경찰분, 많이 다치셨습니까?”

“노금영 씨한테 주먹으로 얼굴 몇 대 맞았다고는 하는데, 병원에 가서 진단서 떼 봐야죠.”

아이고, 머리야. 노금영, 이 바퀴벌레 곱등이 같은 인간아. 어쩌자고 경찰을 때리냐. 당신 밤일꾼 일한 지 몇 년째야? 나보다 이 짓 더 오래했잖아. 밤일꾼 수칙 중 하나가 뭐야. ‘웬만하면 경찰은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야. 천수 형님이 늘 입 아프게 하던 말이 경찰하고 얽히면 좋은 꼴 못 보니까 저 멀리서 경찰차 불빛만 보여도 무조건 피하라는 얘기였어.

그리고 한동수, 넌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노금영이야 원래 미친개니까 그렇다 치고 네놈은 노금영이 미쳐 날뛰면 무조건 말렸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씹어 죽일 듯한 눈으로 동수를 노려보자, 놈은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공무 집행 방해죄로 벌금을 내셔야죠.”

벌금이 얼마가 나오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일을 저지른 건 노금영이니까.

“물론 저희가 잘못했어요. 잘못은 했는데 진짜로 나쁜 놈들은 경찰 형들 때문에 놓친 그 새끼들이라고요. 그 새끼들이 누군지 알기나 해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이란 말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모양인지 동수가 갑자기 목에 핏대까지 세워 짖었다.

“풍기 문란…… 풍기……, 어째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아! 애들 코 묻은 돈 받고 일진 양아치 애들 때려잡아 준다는 그놈들요? 현장에서 도망쳤다던 오토바이 폭주족 놈들이 그 자식들이었어요?”

동수가 콧김을 뿜으며 킹콩처럼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런 나쁜 놈들을 잡아 처넣어야 하는 게 경찰 형들이 할 일 아니에요?”

“죄도 없는 사람들을 왜 잡아 처넣어요? 속도위반이나 오토바이를 불법 개조한 걸로 잡는 거면 또 몰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얼마 전에 경찰들이 그 자식들 사무실에도 쳐들어갔다면서요? 그때 그 자식들 잡으러 간 거였잖아요. 그런데도 그 자식들이 죄가 없어요?”

“그 건이라면 다 해결됐어요. 놈들에게 당한 피해자 모임인가 뭔가에서 단체로 그놈들을 고소하긴 했었는데, 서로 합의하고 좋게 좋게 끝났어요. 우리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어쨌든 서류는 깨끗해졌으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을 잡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이건 또 무슨 제주 조랑말 전복 씹어 먹는 소리인가.

피해자 모임이라면 분명 학교 애들 삥이나 뜯어 처먹는 일진 양아치 새끼들을 자식으로 둔 부모들이 만든 모임일 터인데. 박하신의 아버지가 그 모임 멤버인 건 확실할 테고. 그렇다면 하나같이 자기 새끼 그렇게 만든 놈들 잡아 족치겠다고 이를 갈고 있을 텐데, 그런 양반들이 그렇게 쉽게 합의를 해 줬다고?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이 어마어마한 합의금을 떠안기기라도 한 건가. 그놈들한테 그럴 돈이 어디 있어서?

뭔가 엄청나게 구린 냄새가 난다. 경찰 높으신 양반까지 나서서 벌였던 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해결될 리가 있나.

동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찰서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음료수를 다 마신 경찰관이 빈 병을 들고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이미 다른 경찰관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짧은 적막을 깨고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경찰관의 입에서 몇 마디 깍듯한 존댓말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실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다행히 통화 시간은 짧았다.

“거기, 아까 우리한테 음료수 주신 분. 저기 두 분 데리고 댁으로 돌아가세요.”

중년의 경찰관이 땀도 나지 않은 것 같은데 손으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네? 이렇게 보내도 되는 겁니까?”

“너는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어.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까. 뭐 하고 있어요? 집으로 가셔도 된다니까요. 빨리 가세요.”

동수가 벌떡 일어나 축 늘어진 노금영을 질질 끌고 왔다. 나는 나오기 전 허리를 숙여 “수고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지만 아무도 내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동수는 밖으로 나와 축 늘어진 노금영을 등에 업었다. 이 인간 진짜 기절한 모양이다.

“아까 누구한테 전화가 왔기에 저러는 걸까요?”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경찰서에 전화한 사람이 우리 편이란 거다. 중년의 경찰관이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걸 보면 윗선에서 걸려 온 전화였을 테고.”

“전화 한 통만으로 우리를 빼내 준 높으신 양반은 누굴까요? 하하, 살다가 빽을 다 써 보네. 빽이란 건 별나라 애들한테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동수는 허허 웃었지만 나는 큰 거 싸고 뒤 안 닦고 나온 것처럼 기분이 영 찜찜했다. 그렇다고 머리 싸매고 고민한다고 전화를 한 상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골치 아픈 생각은 더 이상 하기가 싫어서 난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야? 백단영은 무사해?”

“해결사 형님들이 몰려와서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일을 해결한 모양이더라고요. 우린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던 잔당들을 쫓다가 이렇게 된 거고요. 백 형이 좀 다치긴 했는데 심한 부상은 아닌가 봐요.”

“임충식의 머리뼈는?”

“다행히 안 뺏겼대요. 백 형이 진짜 목숨을 걸고 지켰나 봐요.”

“재수 더럽게 없는 인간이긴 해도 그런 거 보면 대단하긴 하다니까.”

“근데 금영 형은 백 형이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 그러는 거라고 하던데요.”

동수의 등에 업힌 노금영이 꼼지락대며 움직였다. 놈은 남의 등짝 위에서 입을 쩝쩝 다시고 태평하게 머리까지 벅벅 긁었다. 이 인간은 기절을 한 건가. 잠이 든 건가.

“형은 어떻게 됐어요? 형도 놈들 뒤를 쫓아간다고 했잖아요.”

“어어? 아아아! 그거? 놓치고 말았다. 놈들이 어찌나 빠른지 말이야. 오토바이를 개조했는지 빠르기가 제트기급이더라니까?”

“그런데 뭘 타고 그놈들 뒤를 쫓아갔어요? 형은 차도 없잖아요.”

“어, 그게, 치, 친구 차를 빌렸어. 기분도 꿀꿀해서 강원도 여행이나 하려고 출발했는데 어떤 씹어 죽일 오토바이 폭주족 새끼들이 내 차를 추월하는 거야. 근데 알고 보니까 일진 양아치 놈들과 풍기 문란 놈들의 쫓고 쫓기는 레이스였던 거지.”

동수 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봤다.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봐?”

“형, 멸치 대가리랑 같이 있었던 거죠?”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걔랑 같이 있어?”

“놀라는 거 보니까 맞네, 맞아. 형, 그때 그놈이랑 만난다고 나갔던 거 어떻게 됐어요? 그날 제가 계속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 그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새끼랑 제대로 끝내고 온 거 맞아요?”

“내가 언제 끝내려고 간다고 했었나. 얘기하러 간다고 했었지.”

“형, 진짜 미쳤어요? 나가서 그 새끼, 따끔하게 혼내기나 했어요? 안 그랬죠? 못 했죠?”

“실컷 야단치고 욕도 해 줬다. 금영 형도 있는데 우리 이런 얘기 그만하자.”

난 동수의 등에 침을 질질 흘리며 잠이 든 노금영을 흘끔 보았다.

“형은 대체 왜 그렇게 그 자식한테 절절매요?”

“절절매다니, 누가? 이 얘기는 그만하자고 했잖아.”

“말 돌리지 마요. 난 할 말은 해야겠으니까. 형,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 형도 그 새끼가 아주 많이 이상하다는 거 알고 있죠?”

난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형도 알다시피 제가 한때 좀 막 나갔잖아요. 사람이 막 나가 봤자 다 거기서 거기인데, 그 새끼는 보통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 것 같다고요. 그 새끼가 형이랑 내가 사귀는 줄 알고 나한테 전화해서 욕을 하고 지랄 지랄 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좀 무서웠어요. 단순한 질투 수준이 아니라, 집착? 광기? 그런 게 느껴져서요.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는데, 진짜 칼 들고 찾아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한동안 꽤 불안했다고요. 나한테야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이지만 엄마, 아빠만 있을 때 가게에 찾아와서 해코지라도 할까 봐요. 형도 걱정되고.”

“미안하다. 너한테 그런 걱정까지 하게 해서. 하지만 그 정도까지 막돼먹은 짓을 할 녀석은 아냐.”

“이거 봐, 이거 봐. 콩깍지가 씌어도 자이언트 사이즈 콩깍지가 씌었어. 사람 죽인 자식새끼 부모가 우리 애가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닌데, 이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 들려서 더럽게 짜증 나는 거 알아요?”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이젠 이런 말 듣는 거 지겹겠지만 제발 눈 좀 뜨라니까요?”

눈 떴어. 눈에 씌었던 콩깍지는 벗겨진 지 오래야. 내 눈에도 더 이상 나민이가 사랑스럽기만 한 강아지로 보이지 않아. 그럼 동수, 넌 묻겠지. 그런데 형은 왜 아직 그 새끼랑 만나요?

구구절절 내 속마음을 말해 줘 봤자 이해할 수나 있겠냐. 부모한테 듬뿍 사랑받고 자란 넌 나를 손톱의 때만큼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니까.

“됐다, 됐어. 아무리 입 아프게 말해 봤자 뭘 해. 형은 어차피 어디서 웬 놈의 개새끼가 이리도 시끄럽게 짖어 대나, 이러고 있을 텐데.”

동수가 인상을 쓰며 짜증을 냈다. 에취잉! 노금영이 갑자기 깜찍하게 기침을 하더니 눈을 떴다.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여기가 어디냐?” 이딴 소리나 해 댄다.

“집에 가는 중이에요. 깨어났으면 내려와요.”

어어, 그래.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노금영은 순순히 동수의 등에서 내려왔다. 땅바닥에 버티고 서서 찬 바람을 쐬던 노금영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콧구멍에 찬 바람이 들어가니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내가 어쩌다가 잠이 든 건가 싶었더니 이 새끼 때문이었네! 너 이 새끼, 날 죽일 작정이었지!”

자고 있을 땐 천사, 까진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귀여워 보이던 양반이 깨어나니 다시 짐승이 되어 날뛴다. 노금영이 동수의 등짝과 뒤통수를 마구 후려치며 악을 쓰자 가뜩이나 나와의 언쟁으로 짜증이 날 대로 난 동수도 지지 않고 악다구니를 부렸다.

“형이 미쳐서 날뛰니까 그랬던 거잖아요! 사람이 그 정도 나이가 들었으면 지랄 발광 하는 것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도 알아야지. 다른 데도 아니고 경찰서에서 그 지랄을 떨면 돼요? 안 돼요!”

“이 자식 말하는 꼴 좀 보게? 형한테 지랄? 지라알?”

노금영의 주먹질이 더 과격해졌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주먹질을 반은 막고 반은 맞아 주며 동수는 열심히 짖었다. 두 짐승 놈이 서로 물고 뜯다가 쓰러지든 말든 나는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아 세웠다. 택시가 멈춰 서자 서로 죽일 것처럼 싸워 대던 노금영과 동수도 부리나케 뛰어왔다.

“기사님, XX동으로 가 주세요.”

나를 구석으로 밀며 기어들어 온 노금영이 말했다.

“XX동? 이 밤에 거긴 왜 가요? 거기에 누가 있다고.”

“빽가, 그 새끼 집으로 간다.”

난 집에 갈 거다. 피곤해 죽겠다. 그 소리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노금영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빽가, 그 새끼가 자기가 나서서 임충식의 뼈를 지키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임충식의 뼈를 지키는 건 우리 일인데 왜 해결사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느냐 이거야. 그전에는 우리가 무슨 짓을 당해도 나 몰라라 했던 양반들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니까.”

뼈라는 말에 운전기사가 깜짝 놀라 백미러로 우리들을 쳐다봤다. 노금영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시트에 등을 기대앉았다.

꿍꿍이라니, 대체 무슨? 임충식의 뼈 전체도 아니고 머리뼈 하나로 무얼 한단 말인가.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천달봉의 카페에서 노금영의 20년 지기이자 해결사인 백단영과 용천 도사를 처음 만났던 때. 백단영은 용천 도사에게 물었다. 귀면들을 부리는 도사를 잡으면 놈들을 무력화할 수 있지 않냐고. 이미 처음 만났던 그때, 백단영은 자신의 속셈을 내비쳤었다.

“백단영은 임충식의 뼈로 귀면을 만들려는 걸까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노금영은 굳게 다문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생각에 잠겨 있었고, 항상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고 머리를 들이밀던 동수도 오늘따라 조용했다.

택시가 적막한 밤거리를 달렸다. 택시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의 눈치를 살피느라 운전기사는 라디오도 켜지 않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나민이의 하얀 얼굴이 그려졌다. 피가 묻은 삼단봉을 들고서 웃던 녀석의 얼굴. 웃음 띤 얼굴만 보자면 내가 지금까지 사귀었던 철없고 밝기만 했던 녀석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해사하게 미소 띤 녀석의 얼굴 뒤에 도사리고 있던 어둠. 그것은 무형의 존재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물이었다. 녀석은 자신이 검은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놈에게 완전히 잡아먹히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검은 괴물에게 잡아먹힌 내 아버지는 결국 살인자가 됐다.

이모님의 한없이 자애로운 품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았던 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완전히 정신을 놔 버리기 전에 누군가 도와주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아버지가 구석까지 내몰려 사람을 죽이진 않았을 텐데. 이모님이 없었다면 나 역시 마을 사람들의 부당한 비난과 학대에 못 이겨 아버지처럼 광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

옆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노금영은 그새 입까지 쩌억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인간이었다.

*

*

백단영의 집은 비어 있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 봐도 안에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새끼, 집에 있으면서 없는 척하는 거야.”

노금영이 발로 문을 차고 욕을 해 댔다.

“부상을 당했으니 병원에 간 걸지도 몰라요.”

난 지극히 정상적인 말을 했는데 노금영은 넌 왜 이렇게 생각이 없냐면서 화를 버럭 냈다.

“빽가 그 새끼가 좀 다친 걸로 병원에 갈 놈인 줄 아냐? 그놈은 학교 다닐 때 축구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어도 꾹 참고 끝까지 수업 듣던 놈이야. 분명 지금쯤 백단영은 해결사 놈들과 빙 둘러앉아 뭔가 일을 꾸미고 있을 거라고. 넌 대학까지 나온 놈이 머리통은 장식이냐,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노금영은 쉼 없이 따다다다 쏘아붙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만 뻐끔대고 있자 노금영은 “대학까지 나온 새끼가 생각하는 꼬락서니 하곤. 헛똑똑이라니까, 헛똑똑이” 이러면서 혀를 찼다.

그때 생각을 떠올리니 갑자기 내 뒤통수가 찌르르 울렸다. 그때 미친 척, 나불대는 노금영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어야 했는데.

어쨌든 그날, 우리는 별 소득 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가 다 되어서야 백단영이 노금영에게 전화를 했단다.

전날 밤에는 줄기차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던 인간이. 노금영이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어젯밤엔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왜 전화도 받지 않았냐고 캐묻자 백단영은 태연하게 “집에서 자고 있었다”라고 했다.

노금영은 튀어나오는 욕을 참으며 “아무래도 불안하니 지금 당장 너희 집에 찾아가서 임충식의 머리뼈가 무사히 잘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백단영이 평소답지 않게 당황을 하더란다. 지금 집에 있는 게 아니니 찾아와도 만날 수 없을 거라면서. 임충식의 뼈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노금영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뼈를 우리에게 맡겨. 어쨌든 우린 한 팀인데 너한테만 위험부담을 지울 순 없다” 돌아온 백단영의 반응은 이러했다고 한다.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거다. 미안한데 너희들은 도저히 못 믿겠다.”

그 말을 전하며 노금영은 온갖 쌍욕을 옵션으로 붙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노금영은 당장 밤일꾼들을 소집했다. 우리는 천달봉의 가게에 모여 앉아 심각하게 얘기를 나눴다.

“해결사 놈들은 우리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해. 하지만 사실 나도 그 사람들을 믿지 않았어.”

그 말을 한 것은 우리 중에서 가장 성격이 유한 천달봉이었다. 천달봉이 말을 꺼내자 여기저기서 나도, 실은 나도 그랬어, 이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놈들과 우리는 하나로 융합될 수가 없는 조직이었다. 필요에 의해 급조된 팀일 뿐. 이번 일이 끝나면 망설임 없이 돌아설 남남이었다.

“그 사람들은 어쩌면 무학 도사나 귀면들보다 더 악랄한 적일지도 몰라. 밤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해결사들을 욕하고 무서워하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테지.”

노금영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달봉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팔짱을 끼고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노금영이 입을 열었다.

“임충식의 머리뼈는 우리가 가지고 있자.”

하지만 노금영의 의견은 모두에게 공감받지 못했다.

“그걸 왜 우리가 가지고 있어? 그런 걸 가지고 있으면 위험해지기만 하잖아.”

박천수가 노금영의 말에 반박했다.

“그럼 해결사 새끼들이 가지고 있게 놔두자고요? 놈들이 그걸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금영아.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할 일은 무학 도사가 벌이려는 일을 막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 무학 도사 일당에게 임충식의 머리뼈를 뺏기지 않으려는 거고. 해결사들이 그걸로 무슨 짓을 하든지 알 게 뭐야. 우린 할 일 하고 돈만 받으면 되는 거야. 지금까지 그래 왔잖아. 왜 쓸데없이 일을 만들려고 들어?”

“하지만 그 새끼들 때문에 일이 틀어지게 되면요? 그렇게 되면 피똥 싸도록 고생만 하고 돈을 못 받게 될 수도 있어요.”

돈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에 박천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돈 얘기에 눈이 휘둥그레진 게 박천수뿐이랴. 돈 받으면 대출금부터 갚겠다고 하던 천달봉, 낡고 오래된 부모님 치킨 가게 리모델링을 해 주겠다던 동수. 그리고 나 역시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워 두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계획들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니 다들 눈이 홱 돌아갔다.

“금영이 말대로 임충식의 머리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나은 것 같다.”

결국 밤일꾼 서울 지역 대표 박천수가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도 굳은 얼굴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형식적이나마 하나의 덩어리를 유지하던 팀이 완벽하게 분열했다. 적 리스트에 무학 도사 일당들뿐만 아니라 백단영과 해결사 놈들도 포함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임충식의 머리뼈를 우리 손에 넣는다? 내놔, 한다고 얌전히 줄 놈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뺏길 놈도 아닐 테고.

난 머리를 굴리며 언젠가 사 두고 싱크대 구석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생선 구이용 팬을 불 위에 올려 두었다.

냉동된 굴비 두 마리를 그 위에 놓고 뚜껑을 닫고. 잘라 둔 김치찌개 재료들을 냄비에 투하. 미리 준비해 두었던 육수를 집어넣고 끓이기만 하면 끝. 밥이 잘되고 있나 전기밥솥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온 집 안에 생선 굽는 냄새와 찌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상을 차렸다. 갓 지은 밥에 맛있는 반찬들을 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시장에서 사 왔던 고추 장아찌를 꺼내고. 명란젓은 비싸니까 딱 먹을 양만큼만 잘라 놓고. 오늘은 사치 좀 부려 볼까 싶어 김까지 꺼냈다.

상에 예쁘게 담은 반찬들과 수저를 올려놓는데 누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벽시계를 흘긋 봤다.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

아침부터 누구지? 문 앞에 서서 “누구세요?” 하고 묻자 아침 일찍 찾아온 손님이 대답했다. “형, 저예요” 하고.

문을 열자 양손 가득 커다란 봉투 하나씩을 든 나민이가 서 있었다. 녀석은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집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 벌써 밥하고 계셨네요? 아침 만들어 드리려고 왔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온 녀석은 곧바로 주방으로 가서 들고 온 봉투를 턱 내려놓았다.

“와, 반찬 많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무슨 아침을 이렇게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리셨어요.”

“아침부터 마트에 다녀온 거냐? 지금 문 연 마트가 있긴 해?”

“어젯밤에 사다 놓은 거예요. 아침 일찍 찾아와서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리려고요. 형 좋아하는 고기도 사 왔어요.”

녀석은 봉투에서 고기가 든 팩을 꺼내서 자랑하듯이 보여 주었다. 한우 등심이다. 평소에는 비싸서 사 먹지도 못하는.

“근데 벌써 아침 다 만들어 놓으신 것 같으니까 이건 점심에 먹어요. 저녁때 먹어도 되고.”

결국 이 집에서 점심, 저녁까지 먹고 가겠다 이거다.

“어쨌든 앉아라. 밥이야 수저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 거지.”

“제가 뭐 도와 드릴 일 없어요?”

“그냥 앉아 있어. 방해만 된다.”

알맞게 익은 굴비와 김치찌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내갔다. 어쩐지 오늘은 아침부터 굴비를 두 마리나 구워 먹고 싶더라니. 녀석은 내가 먼저 숟가락으로 찌개 국물을 맛보자 그제야 자기도 수저를 들었다.

“우와, 엄청 맛있어요.”

“그러냐? 많이 먹어라. 밥은 많으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어. 굴비도 한 마리 발라 먹고. 너, 못 보던 새에 얼굴이 많이 상했다.”

녀석이 밥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따뜻한 밥, 오랜만에 먹어 보는 것 같아요.”

밥과 반찬을 볼이 터지도록 욱여넣어 씹으며 뼈에서 발라 낸 생선 살을 녀석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내가 원래 이런 닭살 돋는 짓 하는 놈이 아닌데 말이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었냐?”

“계속 빵이나 과자 같은 것만 먹었어요.”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배가 고프질 않아서요. 근데 이상하게 아까 문밖에서 음식 냄새를 맡으니까 갑자기 배가 고파지더라고요.”

녀석은 내가 숟가락 위에 올려 둔 생선 살과 밥알을 야무지게 입 안에 욱여넣었다. 상 위에 놓인 반찬들을 골고루 하나씩 집어서 맛있게도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라고 딱히 말로는 표현 못 할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고 목구멍도 뜨끔거렸다.

밥상머리 앞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이 녀석을 어째야 하나 싶다. 녀석에게 향한 내 감정은 이제 사랑이라는 단순한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른 것 같다.

예전에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귀엽고 사랑스럽고 좋았는데. 이제는 귀엽지만 불쌍하고, 사랑스럽기도 한데 처량해 보이고, 좋긴 한데 밉기도 하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형은 왜 안 드세요?”

“나민아, 너 나랑 병원에 가자.”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병원엘 왜 가요? 아픈 데도 없는데요.”

“너, 환자야. 정신에 문제 있는 환자. 요즘엔 우울증 때문에 많이들 병원에 가서 상담도 받고 약도 타 먹는다더라.”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에요.”

“네가 그랬잖아. 한 번씩 너 자신이 아니게 될 때가 있다고. 그거 정신병 시초야.”

“전 미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상은 아니잖아.”

녀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널 용서하고 받아들인 이유가 뭔지 알아? 네가 너 자신한테 문제가 있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어서야. 진짜 미친 사람들은 자기가 미친 줄도 몰라. 내 아버지도 처음엔 너처럼 그랬어. 미쳐 날뛰긴 했어도 나중엔 후회하고 용서를 빌었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완전히 정신을 놨는데, 그땐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란 것도 모르더라. 자식새끼고 뭐고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때리고 부쉈지.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서 하나뿐인 자식새끼 죽일 셈이냐고 호통을 쳐도 ‘저건 내 새끼가 아니다. 나 잡아먹으려는 귀신이다’ 이딴 헛소리나 해 대며 날뛰었어.”

갑자기 관자놀이가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파 왔다. 영원히 잊고 싶은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나민이는 나를 흘끔 바라봤다. 나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겠지. 절대로 자기는 그렇게 될 리가 없다고 대체 사람을 뭐로 보냐고 따지고도 싶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버지나 너나 똑같다. 아버지도 미치기 전에는 나를 나름 사랑해 줬었다. 애정의 표현이 남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게 문제였지만.

“한나민. 너, 날 좋아하냐?”

“네에. 좋아해요.”

“나랑 헤어지는 건 싫지?”

“싫어요.”

“그럼 무조건 내 말대로 해. 날 위해서, 너 자신을 위해서.”

대답은 없지만 싫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싫다고 해도 녀석의 목을 잡아끌고라도 병원에 데려갈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내 한 몸 추스르면서 살기도 버거운데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 널 쫓아내고 모두 없던 일로 하고 싶다.”

“그럼 왜 절 용서하신 거예요?”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서. 네 말대로 내가 먼저 너한테 접근했으니까.”

“사실 형은 제가 불쌍한 거죠?”

“그래, 불쌍하다. 더럽게 불쌍해. 그런데 생각해 봐라. 직업도 없는 백수에, 부모 형제도 없고, 모아 둔 돈도 얼마 없고, 나이도 많은 내가 더 불쌍하냐? 그래도 부모 있고 나이도 어린 네가 더 불쌍하냐?”

“형…… 이요.”

“그렇지? 내가 훨씬 더 불쌍하지? 인생 더럽게 우울한 불우이웃한테 돈이나 적선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농담이랍시고 지껄이며 난 낄낄 웃었다. 근데 분위기 전환을 하려고 꺼낸 농담이었는데 진짜로 울적해졌다. 생각해 보니 나 진짜로 불쌍한 놈이구나.

“그건 그렇고 오늘 날씨가…….”

이러다간 더 우울해지다 못해 밥이고 뭐고 냉장고에서 남은 소주를 꺼낼 것 같아서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하지만 녀석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허벅지를 덥석 움켜잡았다.

“형, 키스해도 돼요?”

“안 돼. 하지 마.”

안 된다고 했음에도 녀석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곧 입술에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닿는 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폭신하고 말캉했다. 살짝 닿은 녀석의 입술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처음으로 키스하는 사내애처럼 풋풋하고 어색했다. 키스가 아니라 애들 수준의 뽀뽀다. 그런데도 이 어색한 뽀뽀에 가슴이 뛰었다. 맞닿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내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의 떨림에 배 속까지 따뜻한 뭔가로 꽉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가볍게 닿기만 했던 입술이 떨어졌다. 녀석의 젖은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나를 보는 두 눈도 웃는다.

다시 한번 입술이 닿았다. 벌어진 내 입 안으로 따뜻한 혀가 밀려들어 왔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의욕 없이 축 처진 내 혀를 휘감아 끌어당기는 힘에 관자놀이 부분이 찌릿, 울렸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올 때처럼.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건 두통이 아니라 쾌감이었다. 계속되는 찌릿찌릿한 느낌에 난 녀석의 팔뚝을 꽈악 쥐었다. 그러자 키스는 더욱 야해졌다.

부서지기라도 할세라 조심조심, 머뭇대던 혀 놀림이 갑자기 과격해졌다. 혀를 뿌리째 뽑아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빨아들이며 녀석은 내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천천히 움직여 바지 앞섶 부분을 건드렸다. 손가락 끝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했는데도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관자놀이 부분에서부터 불붙은 불꽃이 순식간에 온몸을 태웠다.

입술 사이로 신음 섞인 달착지근한 숨결을 흘리며 난 녀석의 청바지에 감싸인 탱탱한 허벅지 위를 더듬었다. 손끝에 녀석의 중심이 닿은 순간. 녀석도 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앞섶 부분을 힘을 주어 눌렀다. 그리고 우리 둘은 동시에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크게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가가 입술만큼이나 붉었다. 아마 녀석을 바라보는 내 눈가도 붉게 상기되어 있을 것이다.

“저, 형. 아침밥은…….”

“나중에 먹자.”

우리는 서로의 바지 앞섶에 손을 갖다 댄 채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단어 선택은 달라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의 내용은 똑같을 터였다.

*

*

“꼭두각시들을 직접 본 적이 있어요.”

나민이는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식었다. 나는 밀려드는 한기에 바르르 떨면서 담요를 끌어 올렸다. 숨을 쉴 때마다 부어오른 항문이 벌름대며 불쾌한 통증을 선사했다. 아직도 녀석의 성기가 안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그것들은 진짜 시체더라고요.”

섹스 후에 나눌 대화는 아니지만 난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불쌍했어요. 죽어서도 편히 눈 감지 못하고 도구로 이용만 당하는 게요. 죽은 자기 가족들을 살려 내 줄 거라면서 무학 도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그렇고.”

“무학 도사를 만나 본 적 있어?”

이러고 있으니 적의 품에 안겨 들어 정보를 캐내는 스파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녀석도 자기 품에 안긴 젊은 첩의 젖가슴을 주물럭대듯 능숙한 손길로 내 유두 주변의 살점을 지분거렸다.

“그 인간은 사람 껍질을 뒤집어쓴 악귀 같더라고요. 하긴 보통 사람이 아니니 꼭두각시 같은 것들을 만들어 냈겠죠.”

“나도 무학 도사를 본 적이 있어. 내가 보기에도 그 영감, 정상은 아니더라. 그나저나 그 영감한테는 손자가 한 명 있다고 하던데. 꼭두각시들을 부리는.”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놈은 늘 꼭두각시들처럼 늘 가면이나 헬멧을 쓰고 있어서요. 아무도 놈의 민얼굴을 본 적이 없대요.”

“근데 그 자식 목에 좀 문제 있는 것 같지 않아? 목소리가 영 이상하던데.”

“아마 변조된 음성이라서 그럴 거예요. 그 자식이 늘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건 얼굴이며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래요.”

“헬륨 가스라도 마시는 건가?”

“목소리를 바꾸는 술법 같은 게 있다던데요.”

“음성을 변조하는 술법이라. 그런 것도 있나? 하긴 땅속에 묻혀 있던 시체로 귀면을 만든 영감인데 그 정도 술법쯤이야.”

도사로서의 능력을 쓰지 않아도 음성 변조 기계 정도는 마우스 클릭 몇 번만으로도 구입할 수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대놓고 온갖 형태의 도청기도 파는 세상인데.

왜 난 음성 변조라는 생각을 못 했던 걸까. 웅웅 울리는 놈의 목소리에는 확실히 변조된 음성 특유의 어색함이 존재했다.

“그럼 그 자식 이름이 뭔지 알아? 몇 살이나 먹었대?”

“이런 때 다른 놈 얘기하지 마세요. 싫어요.”

중얼거리면서 녀석은 바늘로 쿡쿡 찔린 듯이 아픈 내 유두에 입술을 갖다 댔다. 축축한 혀끝이 극도로 예민해진 돌기에 닿자 허리께가 바르르 떨렸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에 달라붙은 녀석의 머리를 밀어냈지만 집요하게 달라붙어 핥아 댔다. 혀로 핥는 정도는 괜찮았지만 입술로 유두를 세게 빠는 건 참을 수 없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그만 좀 해라. 진짜 아파…….”

내가 앓는 소리를 내든 말든 녀석은 두 손으로 엉덩이 살점을 꽈악 움켜쥐었다. 굵은 손가락이 항문 주름을 열고 안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의 격한 삽입으로 풀어진 구멍은 녀석의 손가락을 날름 먹어 치웠다.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너 벌써 두 번이나 했잖아. 그리고 콘돔도 다 썼어. 이런 말을 하며 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녀석의 배에 딱 달라붙은 내 성기는 벌써 꼿꼿하게 서서 투명한 액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까. 녀석의 손가락을 먹어 치운 아래 구멍도 더 크고 뜨거운 걸 원하며 탐욕스럽게 입을 빠끔대고 있었다. 내가 이 녀석을 버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이놈의 속궁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누가 날 이 정도로 미쳐 버리게 만들 수 있을까.

난 다리 한쪽을 들어 녀석의 허리를 감았다. 고무 막을 씌우지 않은 뜨거운 기둥이 구멍 안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크기가 딱 맞을까 싶다. 쓸데없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구멍 안을 꽉 채우는 적당한 크기. 녀석의 것이 안에서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를 때 항문이 찢어질 것처럼 넓어지는 느낌도 정말 좋다.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순 없어도.

녀석은 내 목에 코를 파묻은 채 뜨거운 숨을 토했다. “형, 좋아요?” 헐떡이면서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항문에 힘을 주어 녀석의 것을 꽈악 조였다.

녀석이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쳐올리는 것으로 보답해 주었다. 단숨에 뿌리 끝까지 처박는 힘에 나는 쾌감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녀석의 것이 강하게 쑤셔 올릴 때마다 전립선이 자극되어 몸속에서 불꽃이 펑펑 터졌다. 여자도 아닌데 구멍이 질척해져 녀석의 것이 들락거릴 때마다 찌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녀석의 음낭이 엉덩이뼈를 철썩철썩 치는 느낌 또한 말도 못 하게 좋았다. 나민이의 폭력적인 성향이 싫으면서도 이렇게 짐승이 교미하듯 퍽퍽 쑤셔 대는 게 너무 좋아서 눈에서, 성기 끝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좀 더, 좀 더 깊게, 거칠게 다뤄 줬으면 하고 바란다.

난 언제 이런 상종 못 할 변태가 되어 버린 건가. 언제부터 이런 섹스에 익숙해진 거지?

계속되는 지독한 자극에 머릿속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세 번째 삽입 이후 한 번도 빠져나가지 않던 성기가 쑤욱 미끄러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벌어진 구멍 사이로 녀석이 찔끔 싸 놓은 정액도 함께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녀석은 나를 엎드려 눕히더니 엉덩이만 위로 추켜올리게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넓어질 대로 넓어진 항문을 잡아 벌리더니 곧장 쑤셔 박았다. 체위 탓에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박혀 들어왔다.

“앗! 흐윽! 그, 그만! 그만해. 아파. 아파…… 읏!”

신음을 하며 발버둥을 치는데도 녀석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아팠다. 엎드려 엉덩이만 쳐들린 자세로 푹푹 꽂히다 보면 배 속 내장까지 밀려 숨이 턱턱 막힌다. 계속 아프다며 신음하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녀석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박아 댔다. 괴롭고 힘들어 죽겠는데 끊임없이 자극 점을 쑤시는 탓에 눈물이 펑펑 흘러서 얼굴 아래 짓눌린 담요가 축축이 젖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굶은 건 나뿐만이 아닌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발딱발딱 서는 나이에 강제 금욕을 했으니 얼마나 쌓였을까. 녀석의 성격상, 자위를 하지도 않았을 테니.

“하으윽. 형. 혀엉. 좋아요. 정말 좋아요. 흐으읏. 형도 좋아요? 형도 나처럼 느껴요?”

“그, 그래. 좋아. 좋아 죽겠다. 그러니까 으으, 그만, 그만 좀…….”

결국엔 입에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끊임없이 성기가 들락거리는 항문은 조여들 틈도 없었다. 늘어져서 꽉 씹어 물지도 못하는 구멍 맛이 그렇게 좋은 걸까. 무아지경의 상태로 박아 대며 형, 좋아요, 끝내줘요, 잠꼬대처럼 중얼거린다.

이윽고 녀석의 것이 크게 부풀더니 내벽 안에 뜨거운 정액을 분출했다. 좁은 구멍 가득 뜨끈한 체액이 가득 차 녀석의 성기가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오므라들지 못한 채 훤히 열린 구멍에서 녀석이 싸 놓은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리를 쥐고 있던 녀석의 손이 사라지자 난 그대로 푹 엎어졌다. 엎어져 누운 순간 눈이 감길 만큼 난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항문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작열감 탓에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겠다. 그런데도 아직 만족을 못 했는지 엉덩이를 주물럭대는 손길에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부탁이다.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은 죽어도 못 해.”

“우리, 이러는 거 진짜 오랜만이잖아요.”

오랜만이라서 평소보다 더 흥분하기도 했지만 안 하다가 해서 더 죽을 것 같다. 내가 이 녀석의 끓어넘치는 혈기를 우습게 봤지. 하룻밤에 세 번은 기본이요, 사람 기절할 때까지 하는 놈 아니었던가.

나는 녀석이 엉덩이를 주물럭대며 젖은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희롱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콘돔도 없이 한 번은 해 줬어도 두 번은 못 해 준다. 아무리 건드려 봐도 반응이 없자 녀석도 포기한 모양인지 땀에 흠뻑 젖은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던 손을 뗐다.

“이대로 주무실 거예요? 씻고 주무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야 당연하지. 이대로 네놈 체액을 몸속에 넣고 잤다가 나중에 무슨 끔찍한 꼴을 보려고.

“누워 계세요. 얼른 씻고 나와서 수건으로 몸 닦아 드릴게요.”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알몸을 한 채로 일어서려는 녀석의 팔뚝을 붙잡았다.

“나도 씻을 거야. 부축해 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으니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든 꼴이다. 녀석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어야 했다. 죽어도 싫다고 발악해 보기도 전에 녀석은 나를 번쩍 안았다. 가녀린 여자도 아니고 자기와 비슷한 몸집을 한 성인 남자인데. 너무도 가뿐하게 나를 안아서 욕실로 데려가는데, 기가 막혀서 욕을 할 타이밍도 놓쳤다.

“이렇게 안겨 있으니까 되게 귀엽네요, 형.”

“죽는다! 이게 감히 누구한테!”

난 뒤늦게 악을 쓰며 발버둥 쳤다. 녀석이 크게 소리 내 웃으며 발로 욕실 문을 걷어찼다.

욕조 따위 존재하지 않는 좁아터진 욕실 안에서 녀석은 날 변기 위에 터억 앉혔다.

“가만히 앉아 계세요. 씻겨 드릴게요” 하면서 녀석은 샤워기를 들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온수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탓에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냥 무학 도사를 죽여 버리는 게 어때요?”

따뜻한 물이 언제 나오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손을 대고 있던 녀석이 중얼거렸다. 마치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데 어쩔까요?’ 하고 묻는 것 같은 어조였다.

“뭐?”

“무학 도사가 일을 벌이기 전에 처리해 버리는 게 어떻냐고요.”

그런 소리를 하는 녀석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쓰레기처럼 ‘처리해 버린다’라는 표현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 정신 나간 영감이 죽은 자의 뼈를 모아서 임충식이란 자를 부활시키려 한다면서요. 형들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부활하게 될 임충식은 꼭두각시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괴물이 될 거라던데요. 그 노인네가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내기 전에 해치워 버려야죠.”

“그래, 그게 우리가 할 일이긴 해. 하지만 우리 밤일꾼은 절대로 사람은 죽이지 않아. 그 영감을 해치워 버리는 건 해결사 놈들이 할 일이지.”

“무학 도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너무도 확신에 찬 어조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 노인네는 보통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너한테 이런 말까지 하는 건 좀 그렇지만, 해결사 쪽이 보수를 우리보다 두 배 이상 더 받기로 했어. 우리들 중 아무도 그거에 대해선 뭐라 하지 않았어. 사람 죽이고 돈 더 받으면 뭐 하나 싶어서.”

“그렇게 물러 터져서 어쩌려고 그래요. 무학 도사는 형 쪽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 버릴 생각인 것 같던데. 얼마 전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던 해결사가 큰일을 당할 뻔했죠?”

따뜻한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난 녀석의 손에서 샤워기를 빼앗았다.

“무슨 소리야?”

“무학 도사가 사람들 몇 명을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있는 해결사 집에 보냈다고 들었어요. 우리 조직에 있는 사람 중에서 운동 좀 한 형들이 몇 명 있는데, 그 형들을 보냈나 보더라고요. 갑자기 집 앞에서 덩치 큰 젊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덮치는데, 해결사가 아니라 중무장 한 특수 부대원이었다 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본론부터 말해. 서론이 너무 길다.”

“무학 도사는 해결사에게 했던 식으로 형의 동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처리해 갈 거라고요. 형들은 하나로 뭉쳤을 때는 정말 강해요.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 다 끌어모은 데가 아니라 몇 년 이상을 밤일만 하던 분들이니 수준 자체가 다르죠. 하지만 덩어리에서 흩어져 나와 각자의 일상생활로 돌아갔을 땐 어떨까요? 해결사들은 돈 받고 살인까지 하는 사람들이지만 형 같은 밤일꾼들은 아니잖아요.”

만약 박천수가 운영하는 연신마트나, 동수네 치킨 가게, 기식이네 정육점, 천달봉의 카페에 놈들이 침입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들도 백단영처럼 무사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혼자 몸도 아니고 나이 든 부모, 어린 자식, 병약한 마누라의 안전까지 책임지면서?

따뜻한 물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데도 온몸이 차가워졌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영상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어두운 구석에 쭈그려 앉아 뭔가를 씹어 먹고 있는 귀면들. 바닥에 널린 사람들의 해체된 몸뚱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오열하며 욕을 퍼붓는 박천수. 천달봉. 기식이와 동수……. 망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무학 도사가 사라지면 돼요. 그럼 모두 행복해지지 않겠어요? 형도, 형의 동료들도, 그리고 그 미친 영감을 믿고 따르는 불쌍한 사람들도요.”

나민이는 힘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내게서 다시 샤워기를 가져갔다.

녀석의 말이 맞긴 하다. 무학 도사만 사라지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다수의 적들과 싸우며 시간 끌 필요 없이 그 노인네만 처치해 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따뜻하게 데워진 녀석의 손이 근육이 뭉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형한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하고 계속 생각해 봤어요. 어차피 선물 같은 걸 사 드려도 받지 않으실 테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마침 제가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잖아요. 지금의 제 상황을 이용해서 형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말도 안 돼. 너무 위험해. 너한테 그런 일을 시키고도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꼭두각시들은 빠르게 썩어 가고 있어요. 아마 그것들은 곧 완전히 썩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될 거예요. 무학 도사는 꼭두각시들의 썩은 육체를 대체할 시체를 찾고 있는 것 같지만 쉽지가 않나 봐요. 열한 마리 중 두 마리를 태워 없애기도 했고.”

“맞아. 그게 늘 궁금했어. 왜 놈들을 태운 거냐? 아니, 어떻게 태운 거야?”

“방법까지는 모르고요. 놈들이 인질로 잡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이용당할까 봐 아예 없애 버린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형도 알고 계시죠? 박하신, 그 새끼 아버지가 풍문위 피해자 모임 사람들과 함께 단체로 우릴 고소한 거요.”

“풍문위 피해자 모임? 그건 또 뭐야?”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모임요. 그 사람들이랑 합의해 주느라 돈이 엄청나게 깨진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순순히 합의해 주긴 했어?”

“그쪽에서 제시한 합의금이 워낙 엄청났나 봐요. 아마 이번 일로 노인네가 자랑하는 금 두꺼비 가득 들어 있다던 금고가 텅텅 비었을 거예요. 그래서 무학 도사는 지금 마음이 엄청 급한 것 같아요. 꼭두각시들은 썩어 가고 있지, 돈은 없지.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 데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서 일거리는 계속 줄고 있지. 무학 도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형들한테서 임충식의 머리뼈를 빼앗으려 할 거란 말이죠. 그 노인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자기 피붙이까지 죽여 버릴 인간이에요.”

나민이의 말이 맞다. 살아 있는 자기 손자를 그릇으로 쓸 순 없으니 죽은 딸의 시체를 이용하겠다던 인간이다, 무학 도사는.

“그러니까 더 위험한 거잖아. 그런 짓을 하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그 영감이 널 가만히 내버려 두겠냐?”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스파이 짓을 한다고 생각이나 할까요?”

“하지만 그때, 한강 둔치에서 너희 쪽 놈들이 봤잖아. 너랑 나랑 함께 있는 거. 내 얼굴을 알아본 놈들이 있을 텐데.”

“아, 그건…… 한밤중이라 못 알아보지 않았을까요.”

“그건 네 생각이고. 어쨌든 안 돼. 벌써부터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위험해지지 않게 알아서 처신 잘할게요. 지금까진 절 믿어 달라고 말만 했는데 이젠 행동으로 보여 드리고 싶어요.”

“행동으로 보여 주고 싶으면 당장 거기 일 그만두고 착실하게 공부나 해. 곧 병원도 예약해 줄 테니까 착실하게 치료받으러 다니고. 알았지? 내 말대로 할 거지?”

난 녀석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보챘다. 녀석은 마지못해 네에, 팍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안다. 말 잘 듣고 순종적인 애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고집 센 녀석이란 거. 입 밖으로 꺼내 말했다는 건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얘기겠지.

그렇다 해도 내게 잘 보이려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고 스파이가 되길 자처하는 애를 호랑이 굴에 밀어 넣어야 하나. 하지만 나민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학 도사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똥줄이 바짝 타다 못해 궁둥짝 홀랑 다 태워 먹게 생긴 영감이 온갖 구리고 더러운 짓은 다 할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한 일.

임충식의 머리뼈를 누가 가지고 있네 마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얘기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나민이는 거품을 잔뜩 낸 스펀지로 내 몸 구석구석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욕실 안에 은은한 꽃향기가 가득 찼다.

“오늘 형 집에서 자고 가도 돼요?”

녀석은 거절당할 게 겁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든지. 저녁에 고기 구워 먹자며.”

녀석의 만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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