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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날씨가 추우니 다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서 기어들어 온 모양이다. 1층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해 2층으로 올라갔다. 습관처럼 만나기로 한 녀석의 것까지 커피 두 잔을 시켰다. 녀석과 사이좋게 커피 나눠 마시며 수다를 떨 상황도 아닌데.
창가 구석 자리가 하나 빈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잡았다. 목에 둘둘 감았던 머플러를 벗어 놓고 우선 커피부터 마셨다.
훤칠한 젊은 놈 하나가 올라왔다. 풍성한 털로 뒤덮인 후드가 달린 아이보리색 패딩 점퍼를 입은 사내 녀석.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쫙 빠진 뒤태만 봐도 보기 드물게 잘생긴 녀석이란 걸 알 수 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아이보리색 패딩 점퍼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딱 마주쳤다.
놀랍게도 녀석은 한나민이었다.
내가 잠시 얼이 빠져 있는 사이 녀석은 맞은편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죄송해요. 좀 늦었죠.”
옷차림 때문인가. 목소리나 분위기도 변했다.
“뒷모습을 보고도 너 아닌 줄 알았다. 변했구나, 너.”
“선생님이 촌스러운 걸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선생님처럼 세련되게 꾸미지는 못해도 나름 신경 썼어요. 이상한가요?”
“아니.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러고 있으니 누가 봐도 잘생긴 대학생이네. 여후배들 끌고 다니면서 술 마시러 다니는 날라리 대학생.”
나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녀석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잔의 커피 중, 하나가 당연히 자기 건 줄 알고 자연스럽게 들어서 마신다.
“이런 모습으로 종종 술 마시러 다니긴 했어도 여자애들 끌고 다니진 않았어요. 주로 아는 형들이랑 같이 다녔어요.”
“아는 형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발발이 놈들?”
“네. 그 형들요.”
“오늘따라 아주 솔직하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거짓말만 늘어놓는 것도 그렇잖아요.”
녀석의 말에 난 입술 끝을 비틀어 비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거 많이 늦은 건 알지만, 정말 죄송해요.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선생님한테 맞은 충격이 커서 그만…….”
“처음이 아니었어.”
더 이상 듣기 싫어서 난 녀석의 말을 딱 잘랐다. 녀석이 눈썹 하나를 위로 추켜올렸다. 녀석의 긴 앞머리가 늘 신경이 쓰였는데 오늘은 공들여 머리칼을 빗어 넘겼다. 사나워 보인다고 늘 가리고 다니던 눈을 훤히 드러내고서 녀석이 나를 보았다.
“네가 내 목을 조른 거.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어.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어. 너랑 나랑 처음으로 엉겨 붙었을 때. 그때에도 넌 내 목을 졸랐었지.”
그때에는 성적 쾌락에 다다를 때 나오는 일종의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도 녀석에게 졸렸던 목을 어루만지며 온갖 생각을 다 했었지만, 녀석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애써 그날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너 사실은 나 미워하냐?”
“선생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왜 선생님을 미워해요?”
“너랑 나, 좋았잖냐. 그렇지? 서로 아주 좋아 죽었잖아.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진. 근데 한나민, 너 날 죽이고 싶었어?”
“어디 아프세요? 아까부터 자꾸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지. 그럼 목을 조르는 게 사랑의 행위냐? 그건 아니잖아.”
“그땐 정말 갑자기 이성이 날아가 버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그냥, 뭐? 실수였다? 너무 화가 나서 너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땐? 너랑 내가 첫 관계를 했을 때. 그때에도 쾌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고?”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바엔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다.
녀석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놈은 고개를 아래로 숙여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다. 조금의 떨림도 없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약간씩 흔들릴 뿐이다.
“그랬을 수도 있어요.”
이윽고 녀석이 입을 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살심이 일었을지도 몰라요. 가끔씩 너무 흥분해서 이성이 날아가 버리면 제가 아니게 되거든요. 그때에는 제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어져요. 제가 무슨 얘길 해 봤자 선생님 귀에는 변명으로 들리겠죠.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믿어 주세요. 절대로 본심은 아니었어요. 선생님을 미워하거나, 죽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같은 거. 정말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이거 하나만은 믿어 달라는 부분에서 녀석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 보며 눈빛으로 호소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말하는 내용에 딱 어울리는 표정과 눈빛.
“후회 많이 했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난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건가. 계속 후회하고 반성했어요. 내가 한 바보 같은 짓으로 선생님을 영영 잃게 될까 봐 무서웠어요. 선생님이 절 버리실까 봐…….”
녀석의 목소리가 떨렸고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보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던 내 마음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됐다. 지난 1주일간 밤잠까지 설치며 고민했건만 이제야 답을 찾은 듯했다.
난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터억, 내려놓았다.
“나민아, 우리 여기서 끝내자.”
녀석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무리 해도 너랑 나, 안 될 것 같다.”
“그런 문제를 이렇게 쉽게 결정 내리시는 거예요?”
“쉽게 결정한 거 아냐. 1주일 내내 고민했다. 너 만나기 전까지도 계속 고민했는데 너랑 얘기해 보고, 네 얼굴을 보니 확신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나한테 한 짓이 용서가 안 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어.”
“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두 번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요.”
“뭐든 처음 시도하는 게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쉬워진다. 두 번이 세 번 되고 세 번부터는 습관 되는 거, 순식간이야. 네놈이 이성 잃고 날뛸 때마다 매번 내가 모든 걸 이해하고 감싸 줄 수도 없고 그럴 여력도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난 더 이상 널 못 믿겠어.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지만.”
바로 그게 문제다. 난 처음부터 녀석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녀석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설쳐 댔다. 그게 말이 되나. 넌 대체 뭐냐?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본모습을 드러내라고 추궁하는 관계가 연인 사이라 할 수 있는 건가. 무슨 스파이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남들이 볼 때 난 순진한 애 꼬드겨서 갖고 노는 파렴치한이겠지, 싶어서 계속 찝찝했어. 하긴 나도 내 친구가 여덟 살이나 어린 여자애랑 사귄다면 미친 새끼라고 욕을 퍼부었을 테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난 순간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핑글 돌았지만 간신히 버티고 섰다.
나민이는 곧바로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말 한 마디 해 주지 않아도 녀석은 묵묵히 나를 쫓아왔다. 가만 놔두면 집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집에 도착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이 녀석을 집 안에 들이면 녀석은 그때처럼 또 이성을 잃고 나를 몰아세울지 모르는 일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싫다. 무섭다. 하지만 더 싫은 건, 난 결국 녀석에게 휘둘리고 말 것이란 사실이다. 녀석이 예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한다면. 자길 혼자 두지 말라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날 붙잡는다면. 녀석을 와락 끌어안게 될지도 모른다.
무 자르듯 인연의 끈을 뎅겅 끊어 낼 순 있어도 감정이란 놈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으니까.
난 건널목 앞에서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나민이가 내 옆에 다가와 섰다.
“저, 어쩌면 감옥 가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난 녀석을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맞받아쳤다.
“박하신 아버지도 그 영상을 봤어요. 가만 안 둔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든 저, 콩밥 먹게 하실 거래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거래요. 저도, 제가 일하는 데도요.”
“일하는 데라면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말이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벌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사이트에 뜬 아르바이트 모집 글을 보고 지원했어요.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독립하고 싶었으니까요.”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움직이게 되면 또 대화가 끊길 텐데 그게 싫었다.
“돈이 필요했으면 다른 건전한 아르바이트틀 해도 될 거 아냐. 또래 친구들 때려잡고 다니는 일로 돈을 벌고 싶었냐, 인마? 아무리 그 일이 다른 일보다 돈벌이가 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왜 그러면 안 되는 건데요? 박하신 같은 놈들도 죄 없는 애들 때리고 괴롭히고 다니는데 왜 저는 그 새끼들을 때려잡고 다니면 안 되는데요?”
누가 누구를 욕한단 말이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지. 나 역시 지금까지 남에게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일을 하며 산 놈인데. 누가 누굴 훈계하려 드나.
“어쨌든 거기서 나와라. 너한테 득 될 거 하나 없는 데다.”
“하지만 적어도 거기는 돈을 벌게 해 줘요. 그리고 거기 사람들은 아버지처럼 절 없는 놈 취급하지 않는다고요.”
어느새 파란불은 빨간불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멈춰 서 있던 차들이 다시 움직였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했어요. 머리 좋은 놈이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강해졌어요. 아버지가 머리 나쁘고 약한 애를 싫어하셨으니까, 인정받고 싶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절 없는 놈이 아니라 자식으로 인정해 주셨으면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결국 전 없는 놈이더라고요.”
잠시 말을 멈춘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까지 절 없는 놈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옆에서 들리는 기가 팍 죽은 목소리에 내 배 속이 꿈틀거렸다.
신호등 불빛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꼭 길을 건너고야 말 것이다. 내가 움직이자 녀석도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기도 싫었다. 빨리 집으로 가고만 싶었다. 따뜻한 침대 속에 기어들어 가서 자고 싶었다. 누워도 쉬이 잠들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두 발 뻗고 눕고만 싶었다.
큰길을 건너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동네 풍경이 펼쳐졌다.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집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방치된 자전거, 폐지가 가득 쌓인 낡은 리어카가 늘 있던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쓰레기봉투가 나뒹구는 대문.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내가 문을 열 때까지 계단참에 서서 기다리던 녀석도 얼른 뒤따라 들어왔다.
곧장 신발을 벗고 주방으로 가 음료수를 꺼내 마셨다. 건조한 날씨 탓인지 아까부터 계속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넌 왜 들어왔냐. 나가.”
녀석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한동수랑 사귀시는 거예요?”
입 안에 가득 들어 있던 음료수가 입술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저랑 끝낸 뒤에 한동수랑 본격적으로 사귀시려는 거죠? 그렇죠? 그 자식, 선생님 좋아하는 거 빤히 보였으니까. 선생님을 쳐다보는 그 자식 눈빛이 얼마나 뜨겁던지. 아주 핥아 먹겠던데요.”
“야, 한나민.”
“저한테는 선생님밖에 없었는데 선생님은 아니었죠? 저랑 사귀는 중에도 다른 놈하고 바람피우셨지요? 그렇겠죠. 전 어리니까요. 어리고, 돈도 없고, 남자답지도 못해서 선생님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했을 테니까요.”
“입 닫아라. 뚫린 구멍이라고 오물이나 쏟아 내면 그게 하수구지 주둥이냐!”
“그 덩치만 커다란 새대가리가 좋으세요? 그 새끼는 덩치가 크니까 거기도 크겠다. 선생님은 말 좆같이 커다란 거에 박히고 싶으셨구나. 죄송해요. 제 게 작아서.”
너 이 새끼! 씩씩대며 녀석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손을 쳐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가만히 맞아 주지 않았다. 녀석은 들어 올린 내 손을 덥석 힘을 주어 움켜잡았다.
나를 노려보는 녀석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녀석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질투하고 있다. 동수가 한 거짓말을 믿는 건가. 그래서 내가 동수 놈과 사귀기 위해서 자기와 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 녀석은?
오해를 풀어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너무도 기가 막혀서 웃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난 신경질적으로 어깨 전체를 비틀어 놈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이게 네 본모습이구나, 한나민. 끔찍하게 추하다, 진짜.”
녀석의 고운 얼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솜털이 보송하게 남아 있는 하얀 볼이 씰룩일 때마다 움푹 패는 저 볼우물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넌 지금까지 나를 남자 좆에 환장하는 그런 놈으로 생각했다는 거지. 차마 내가 널 건드릴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깔려 줬더니, 뭐? 하하하!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선생님…….”
녀석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난 진저리를 치며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꺼져, 새끼야.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내가 게거품 물고 쓰러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목에서 피거품이 일 정도로 소리를 쳤는데도 녀석이 움직이지 않자 난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집어 던졌다. 문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사방으로 튄 유리 파편에 녀석의 매끈한 볼이 긁혀 핏방울이 맺혔다.
나는 씩씩대며 신발장 위에 장식해 둔 도자기 인형을 들어 올렸다. 누가 갖다 버린 걸 주워서 처박아 둔 거다.
녀석은 손등으로 유리 파편에 긁힌 볼을 문질렀다. 핏줄이 도드라진 하얀 손등에 핏물이 묻어났다. 그러고는 피가 묻은 손을 천천히 뒤로 뻗어 문을 잡아 열고는, 뒤돌아서서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내가 들고 있던 도자기 인형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욕설 섞인 웃음이 픽픽 비어져 나왔다. 바짝 마른 칼바람이 깨진 유리창 사이로 사정없이 새어 들어왔다. 순식간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바닥에 내팽개쳐 둔 외투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수일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동수 놈이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집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다 귀찮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리자 믿을 수 없게도 잠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지금이라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눈을 감았다. 위잉위잉거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가 엄마가 불러 주는 자장가 소리처럼, 잠깐. 자장가 소리? 웃기네. 난 엄마 얼굴도 모르는데. 난 코웃음을 픽 치며 이불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
*
젠장. 날을 잘못 잡았구먼. 클럽 입구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바로 후회했다. 오늘은 지금의 클럽 러스트를 있게 한 스트립쇼가 열리는 목요일 밤이었다. 주위에 물 좋은 클럽들이 몇 개나 생겼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러스트의 스트립쇼는 인기가 좋은 모양이었다.
김명진과 할 얘기도 있고, 온 김에 술 한 잔 마시면서 가볍게 기분 전환이나 하려고 왔건만. 쇼를 볼 기분도 아니고,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부대끼기도 싫고. 다른 가게로 가기로 마음먹고 돌아선 순간이었다.
“동추 형!”
날 부르는 소리에 자동적으로 고개가 휙 돌아갔다. 클럽 입구 옆 전봇대 아래에서 담배를 꼬나문 진기 놈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웬일이야? 쇼 보러 왔어?”
가까이 다가온 놈이 허공에 담배 연기를 후욱 내뿜으며 물었다.
“명진 형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안에 사람 많냐?”
“줄 서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안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숨통이 턱 막혀서 잠깐 담배 피우러 나온 거야. 근데 오늘 수질, 장난 아냐. 완전 쩔어.”
“그러냐. 그럼 명진 형도 정신없이 바쁘겠네. 그럼 나중에 한가할 때 다시 와야겠다. 명진 형한테는 나 왔다 갔다는 말 하지 마.”
“어, 가게? 왜? 오늘 물, 쩐다니까? 아주 타입별로 다양해. 형 입맛에 맞게 골라잡을 수 있을 텐데?”
“됐어. 오늘은 그러려고 온 거 아냐.”
“에이, 아니긴 뭐가 아냐. 쫙 빼입고 온 거 보면 맞구먼. 나랑 들어가면 줄 설 필요 없어. 오늘 기분 끝내주니까 맥주 한 병 서비스로 줄게.”
진기 놈은 기어이 날 잡아끌었다. 가게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사내놈들이 질질 끌려가는 나를 희귀 동물 바라보듯 쳐다봤다. “아무리 진기 형 친구라도 티켓 사 가셔야죠” 하면서 입구에서 티켓값을 받고 신분증 확인을 하던 덩치 큰 직원이 우리들 앞을 가로막았다.
“이 형, 사장님 친구야. 괜찮아.”
진기가 어깨를 툭툭 치며 웃어 보이자 직원은 마지못해 앞을 터 주었다.
“저 친구 신분증 검사를 꽤 꼼꼼하게 하네.”
“꼬맹이들 들여보냈다가 영업 정지 당하면 우리만 손해니까. 우리 가게 스트립쇼가 하도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호기심 많은 강아지들이 자꾸만 찾아오거든. 그나저나 동추 형, 형 요즘 좀 이상한 애 사귀고 있는 거 아냐?”
계단을 내려가며 진기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랑 같이 일하는 놈 있잖아. 테리라고. 그 자식 하는 말이, 어떤 애가 그놈한테 돈까지 몇 푼 쥐여 주면서 형이 클럽에 오면 자기한테 바로 알려 달라고 했다던데? 넌 누구냐고 물었더니 형 팬이라고 했대. 근데 형이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형이 클럽에 오면 알려 달라니. 형, 새끼 스토커 키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내가 테리한테 그 얘길 들은 건 얼마 안 됐긴 한데. 테리 놈한테 직접 물어봐.”
문을 열자 안에 갇혀 있던 후끈한 열기가 우리들을 덮쳤다. 진기 말대로 숨통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가게 안에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바로 이동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잠깐의 휴식 시간 뒤 다시 직원으로 돌아간 진기는 맥주 한 병을 내줬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부어도 여전히 더웠다.
외투를 벗어 어디 맡겨 놓고 싶어도 또 저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물품 보관소까지 가야 할 테고. 이대로 버티자니 찜통 안에서 푹푹 삶기는 기분이고.
“맥주나 한 병 더 줘. 무조건 차가운 걸로. 그리고 아까 말한 테리란 놈은 어디 있어?”
맥주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진기에게 술을 시켰다. 진기는 바에 기대서서 손님들과 얘기 중인 커다란 놈을 불렀다. ‘테리’라는 이름표를 단 놈이 다가왔다. 이 녀석이 여기에서 일할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능글능글 웃는 저 얼굴은 절대로 한국 사람 얼굴이 아니다. 분명 저놈의 몸속에는 외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거다.
“동추 형, 오랜만이네요. 요새 잘 지내죠?”
“내가 요즘 안녕치가 못하다. 그런데 아까 진기 놈이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무슨 소리요?”
“내가 여기 올 때마다 네가 어떤 새끼한테 바로 일러바친다는 소리.”
놈은 여전히 얼굴에서 느끼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아, 그거? 그게 뭐 어때서? 되레 내가 유난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어떤 새끼냐? 너한테 돈 쥐여 주고 그런 짓을 하라고 한 놈이.”
“단순한 형 팬인 것 같던데요. 보송보송한 게 꽤 어려 보이던데. 어려 보이다 못해 아기 티가 나기에 미성년자 아닌가 싶어서 식겁했는데 다행히 성인이더라고요. 형은 유독 어린애들한테 인기 많잖아요.”
미성년자로 보일 정도의 앳된 얼굴…….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어서 난 핸드폰을 꺼내 기계 안에 저장된 사진을 열었다.
“혹시 이 녀석이냐?”
예전에 학원 앞에서 나민이를 괴롭히던 박하신과 패거리를 찍었던 사진이다. 손가락으로 하신이 놈을 가리켜 보였다. 테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사진을 응시했다.
“아뇨, 이 녀석 아니에요. 이 녀석이 아니라 이놈 뒤에 있는 녀석 같은데.”
놈의 긴 손가락이 액정 화면의 어느 한 점을 가리키려는 순간, 모여 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점원을 불렀다. “잠깐만요” 하며 놈은 자신을 부른 손님들에게 달려갔다.
박하신이 아니다? 테리한테 그런 일을 해 달라고 돈까지 쥐여 주며 부탁한 놈이 이 사진 속에 있다는 거지?
핸드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이 술이 나왔다. 하지만 내가 주문한 맥주가 아니라 얼음을 띄운 칵테일이다.
이거 내가 시킨 거 아닌데? 진기에게 묻자 녀석이 눈짓으로 오른쪽 방향을 가리켰다. 바에 기대 선 사내놈들 사이로 어떤 놈이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미안하지만 넌 내 취향 아니다. 얼굴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넌 커도 너무 크다.
괜히 알은체했다간 귀찮게 집적댈 것 같아서 술만 홀짝홀짝 마셨다.
“젠장, 이 죽일 놈의 인기. 난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몰라. 오늘은 조용히 술 한잔하려고 왔는데.”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확 주둥이를 꿰매 버릴까 보다.”
진기가 들고 있던 맥주병을 던질 기세로 욕을 내갈겼다. 난 킬킬대며 달고 진한 칵테일을 물처럼 들이마셨다.
“혼자 왔어?”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술을 사 준 놈은 기어이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기 정도 되는 킹카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을 보내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으니 오기가 생겼겠지.
“사람이 질문을 했으면 대답 좀 해 주지?”
“보면 모르냐. 그래, 혼자 왔다.”
“혼자 왔으면 나랑 술이나 마시자. 나도 혼자 와서 심심하거든.”
“가까이에서 보니까 너 엄청 크네. 너 키 몇이냐?”
“나? 188센티.”
자랑스럽게 목에 힘 딱 주고 대답할 만하다. 저 정도 외모에 이 정도 키라면 목에 힘 좀 줘도 된다.
“전보다 좀 마른 것 같은데. 설마 다이어트하는 거 아니지?”
“예전에 나 본 적 있냐?”
“임동추, 당신 여기서 꽤 유명하잖아. 내가 한 번씩 놀러 올 때마다 늘 당신도 있던데. 기생 끼고 노는 한량처럼 조그만 치와와 같은 애들 옆에 끼고 재밌게들 놀던데. 자기도 야들야들 귀여운 주제에 강아지 같은 애들만 끼고 노는 게 웃겨서 눈여겨봤었지.”
“너 안과 좀 가 봐라. 시력에 문제 있는 게 분명해. 내가 귀여……, 미친 거 아냐?”
“난 정상인데. 시력도 좋아. 당신, 아주 귀여워. 온몸으로 방방 뛰면서 난 이렇게 귀여우니까 예뻐해 달라고 왈왈대는 치와와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엽지.”
그러면서 놈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씨익 웃었다.
“술 잘 마셨어. 난 가 봐야겠다.”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자 놈이 내 팔을 움켜쥐었다.
“벌써 가게? 아직 쇼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속이 안 좋아져서. 너나 실컷 보고 와.”
“하긴 이 안에 공기가 안 좋긴 하다. 그럼 나갈까?”
“꼭 대놓고 너 내 취향 아니라서 싫다고 말해야 알아듣냐? 난 너 마음에 안 든다고. 너랑 놀기 싫다고. 난 너 같은 도베르만 말고 작고 귀여운 치와와들이랑 놀고 싶다고. 알았냐?”
“너 정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작고 귀여운데 성질은 더럽고.”
그러면서 놈은 손가락으로 내 손목 안쪽을 긁었다. 성적인 의도가 철철 넘치는 노골적인 유혹인데도 어째 불쾌하지가 않다. 저 녀석의 얼굴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뽀얀 얼굴. 날 보고 웃는 저 얼굴. 나민이를 닮았다. 풍기는 분위기나 생김새가 나민이를 연상케 한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만족스러운 섹스를 한 게. 갈색 가면 놈이 내게 했던 강간에 가까운 행위 말고. 살짝 맛이 가서 동수와 뒤엉켰던 그 짓 말고. 머릿속이 하얗게 빌 정도의 쾌감을 느껴 본 게.
“너, 아래에 깔릴래? 그럼 생각해 보지.”
“리키라고 불러. 근데 난 깔리는 건 싫고 널 깔고 싶은데.”
그럼 됐다. 딴 놈 알아봐라. 이렇게 말하려던 때, 놈이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입술을 갖다 댔다. 내가 뒤늦게 놀라 바동거릴 틈도 없이 혀를 불쑥 밀어 넣는다. 입 안을 가볍게 훑고 혀를 뿌리째 감아쥐어 빨아들이는 테크닉은 가히 수준급이다. 굳어 있던 몸의 근육이 천천히 이완되었다. 놈은 팔로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서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내 입술을 정신없이 빨아 잡수셨다. 말 그대로.
이러면 안 되는데.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되는 건데. 이성은 안 된다고 말해도 몸은 그렇지가 않았다. 거칠지도, 그렇다고 한없이 부드럽지도 않은 키스에 몸이 흐물흐물 녹았다. 머릿속이 푸딩처럼 말랑말랑해졌다. 눈을 살짝 감고 내쉬는 한숨까지 놈의 입술은 농밀하게 빨아들였다. 이 자식, 진짜 키스 한번 끝내주게 잘한다.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문 뒤에 놈은 입술을 슬며시 떼어 냈다. 번쩍거리는 무대 조명에 반사된 놈의 얼굴이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나민이를 닮은 얼굴이 웃는다. 하지만 내 얼굴을 만지는 손은 뜨거웠다. 나민이의 하얀 손은 언제나 차가운데.
“나가자.”
놈은 내 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어깨를 슬며시 감싸 쥐어 잡아끌었다. 난 자석에 달라붙는 철 조각처럼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진기 놈이 입을 떡 벌리고 날 쳐다보는 게 보였다. 주로 예쁘장한 애들 옆에 끼고 놀던 내가 웬 커다란 놈한테 폭 안겨서 끌려가니 놀랍기도 하겠지.
“호텔로 갈까? 아니면 우리 집으로 가도 되고.”
놈이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건물 너머로 보이는 호텔을 쳐다보았다. 나민이를 닮은 얼굴로 호텔 운운하는 게 어쩐지 웃겼다. 녀석과는 퀴퀴한 냄새 나는 녀석의 자취방이나 모텔에서 일을 벌이곤 했는데.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으면 너희 집으로 가자.”
이 근처에서 일을 벌이긴 싫어서 놈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술 한 방울 안 마셨으니까 음주 운전 걱정은 하지 마. 아, 그리고 내 핸드폰에 번호 좀 찍어 줄래?”
자신의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며 놈은 핸드폰을 내게 던졌다.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기게 될까 싶어서 전혀 다른 번호를 입력했다. 핸드폰을 가져가서 품에 넣으며 “나중에 전화해도 돼?” 하고 묻는 말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배 속까지 울리게 만드는 엔진 음과 함께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런데 너 사귀는 사람 없어?”
놈은 한 손으로 여유 있게 핸들을 조작하며, 다른 한 손으론 내 허벅지를 슬슬 만지면서 물었다.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널 왜 따라가겠냐.”
“애인이 있어도 상관없지 않나?”
그러면서 놈은 손가락 끝으로 노골적으로 내 성기를 건드렸다. 그새 술이 깬 건가. 허벅지에 거대한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술기운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면서 잠시 가출했던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미안한데 차 좀 세워 줘.”
“왜? 속이 안 좋아?”
“그게 아니라, 너랑 그 짓 할 마음이 안 들어. 난 그냥 내려야겠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놈이 잘생긴 얼굴을 팍 구기며 짜증을 냈다.
“이건 아닌 거 같아. 내가 얼마 전에 사귀던 놈이랑 헤어졌는데 아직은 안 되나 보다.”
“애인이랑 헤어졌든 말든 알 게 뭐야! 이럴 거면 왜 따라왔어!”
“분위기에 취하기도 하고, 술에 좀 취해서 알딸딸하기도 했고. 음…… 네가 키스 하나만큼은 죽여주게 잘해서.”
“내가 잘하는 게 어디 키스뿐인 줄 알아?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헤어진 애인 때문에 못 하겠다 어쩌고 하는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냥 가. 옛 애인 따위 기억도 나지 않게 끝내주는 밤을 보내게 해 줄 테니까.”
“끝내주는 밤이고 자시고 너랑 못 하겠다니까? 하기 싫다니까? 차 세워, 좀.”
“안 세워. 못 세워!”
리키가 목에 핏대까지 세워 빽 소리를 지른 순간. 오토바이 한 대가 부아앙,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지르며 순식간에 우리들이 탄 차를 추월했다.
운전하는 놈, 그리고 뒤에 탄 한 놈. 앞에 탄 놈은 헬멧을 쓰고 있지만 뒤에 탄 놈은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았다.
이거 어째 익숙한 상황인데.
오토바이 한 대가 또 빠르게 우리들의 시야에 나타났다. 오토바이도 검은색, 타고 있는 놈들 둘도 온통 검은색. 뒤에 탄 검은 헬멧 놈은 은색 지휘봉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우리들의 눈앞에서 알짱대는 저 시꺼먼 까마귀 같은 놈들이 뭐 하는 것들이겠는가. 사냥하러 나온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이지.
“저 새끼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리키가 핸들을 짓뭉갤 듯이 쥐고는 소리쳤다. 놈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액셀을 꾸욱 밟았다. 차는 포효에 가까운 엔진 소리를 뿜어내며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앞서 달려 나간 오토바이 두 대를 따라잡은 리키 놈이 차창을 열어 외쳤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네놈들이 도로 전세 냈냐!”
그 소리를 들은 검은 오토바이가 약간 속도를 늦춰 우리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고는 뒤에 탄 놈이 은색 삼단봉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리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뒤로 빼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저것들이 미쳤나!”
리키 놈이 핏발 선 눈으로 헐떡였다. 저놈들이 단순한 폭주족이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백미러에 두 대의 오토바이가 우리 뒤로 바짝 따라붙는 게 보였다. 놈들은 우리를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야, 더 이상 상대하지 말고 차 세워.”
“저 새끼들, 오늘 다 죽었어!”
“죽고 싶지 않으면 차 세워! 새끼야!”
언성을 높여 소리쳤지만 흥분해 이성을 잃은 놈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일 처음 우리들을 추월했던 두 놈이 탄 오토바이가 한강 둔치로 이어지는 도로로 빠졌다. 검은 오토바이도 그 뒤를 쫓았다.
리키도 핸들을 확 틀어 검은 오토바이 꽁무니를 따라갔다. 나는 백미러를 흘끔 쳐다보았다. 바이크 두 대가 조용히 우리 뒤에 따라붙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노금영에게 지금 이 상황을 알려 주어야 한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무실에 경찰이 들이닥친 뒤 놈들은 그늘 아래로 숨었다. 아마 이대로 사이트 자체가 사라지거나, 경찰들의 관심이 사라질 때까지 숨어 지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경찰이 놈들의 사무실을 급습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꺼내 든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부재중 통화가 열 통이나 쌓여 있었다. 전부 노금영과 기식이, 동수의 전화번호였다. 클럽 안이 워낙 시끄러워서 벨 소리가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노금영의 꽥꽥대는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임똘추! 이 새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가방 안에 넣어 둬서 소리가 안 들렸어요. 무슨 일이에요?”
[풍기 문란 똥개 새끼들이 빽가의 집에 쳐들어왔단다. 빽가가 놈들 추격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고 전화가 왔었고. 지금 우리는 빽가 도와주러 가고 있다.]
“임충식의 머리뼈는요? 아니, 그보다 백단영은 무사하답니까?”
[사지 멀쩡히 붙어 있으니까 빽가, 그 새끼가 임충식이 머리뼈를 들고 꽁지 빠져라 도망치고 있지. 넌 지금 어디야?]
“놈들의 뒤를 쫓고 있어요. 우연히 놈들이 일진 양아치 놈들을 사냥하는 걸 발견해서요.”
[뭐? 왜 네놈이 그걸 쫓아가? 헛짓거리하지 말고 당장 XX 대로로 와서 빽가나 도와!]
순간 리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크게 내 상체가 흔들리며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떨어진 핸드폰에서 노금영이 꽥꽥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들어 올리는 그 짧은 순간, 리키 놈은 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 유리창 너머로 씩씩대며 팔을 걷어붙이고 걸어가는 리키 놈의 뒷모습. 저 멀리 자기들 오토바이를 내팽개치고서 달아나는 양아치 애들 둘. 그리고 멈춰 선 검은 바이크에서 내리는 시꺼먼 놈들 둘. 바이크를 운전하던 놈은 달아난 양아치 둘을 잡기 위해 달렸고, 뒤에 타고 있던 놈은 그 자리에 서서 리키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한 손에 삼단봉을 들고서.
[야. 뭐야? 대체 뭐야? 방금 전 그거 무슨 소리야?]
“금영 형, 전 그쪽으로 못 가겠는데요.”
[거기서 뻘짓 하지 말고 당장 이리로 튀어오라니까! 뭘 어쩌려고? 그 새끼들한테 쫓기는 양아치 애들,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노금영이 욕을 하며 악을 쓰건 말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뒤를 따라온 두 대의 까만 오토바이가 저 멀리 멈춰 서서 조용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풀 속에 숨어 먹잇감의 목을 단번에 물어뜯어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맹수들 같다.
저것들은 귀면일까. 귀면이라면 달리는 오토바이에서도 뛰어내려 우리들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제 놈들이 먼저 잘못해 놓고 항의하는 사람한테 그딴 걸 휘둘러?”
적은 눈앞의 놈뿐이 아니라 등 뒤에도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키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야, 그냥 가자. 별것도 아닌 일에 흥분할 필요 뭐 있어. 빨리 집에나 가자.”
난 재빨리 달려가서 리키의 팔을 붙잡았다.
“좆질은 이 새끼 잡아 족치고 나서 기절할 때까지 해 줄 테니까 저리 비켜! 씨발, 짜증 나게 굴지 말고!”
놈은 차마 입에 담기도 욕을 씨불이며 내게 붙잡힌 팔을 거칠게 떼어 냈다. 난 놈이 휘두른 팔꿈치에 턱을 맞고 휘청거렸다.
“너 내가 누군지나 알아? 내가 한때 복싱으로 날렸던 몸이야. 너 오늘 죽었…….”
리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앞에 서 있던 검은 헬멧은 삼단봉을 부웅 휘둘렀다.
리키가 복싱 기본기를 취해 보기도 전이었다. 빠악, 소리와 함께 리키가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머리를 움켜쥔 리키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철철 흘렀다. 검은 헬멧이 삼단봉을 다시 높이 쳐들었다.
“그만해! 이 새끼는 그냥 지나가던 일반인이다. 게다가 이 자식, 빽이 장난 아니라서 잘못 건드렸다간 비린내 올라오도록 콩밥 처먹게 된다!”
콩밥 처먹게 된다는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삼단봉을 쳐든 검은 헬멧의 손이 멈칫했다.
이놈들은 우리가 때려눕혀도 되는 적인가? 리키의 앞에서 삼단봉을 쳐들고 있는 놈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거다.
그사이 난 리키에게 다가가 놈의 상태를 살폈다. 피범벅이 된 놈의 손을 억지로 떼어 내자 이마 한쪽에 검붉은 속살을 드러낸 상처가 보였다.
“이거 몇 개로 보이냐?”
리키의 눈앞에 대고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개.” 손가락 개수가 제대로 보이는 걸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진 않은 모양이다. 난 리키를 부축해 일으켰다.
“네놈들은 도망간 양아치 새끼들이나 잡아. 이 자식은 네놈들 적이 아니니까. 네놈들도 지금 같은 때에 쓸데없이 일을 벌이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놈은 순순히 우리를 보내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검은 헬멧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놈의 운동화 신은 발끝이 보였다. 군청색 오리털 패딩 점퍼에 청바지. 손에는 폼 나는 가죽 장갑이 아니라 알록달록한 무늬가 박힌 천 장갑을 끼고 있다. 옷차림만 봐도 꽤 젊은 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비켜라. 이 자식, 엄청나게 무거워서 어깨 빠질 것 같으니까.”
내가 입을 연 순간. 검은 헬멧이 손에 든 삼단봉을 부웅 휘저었다. 바로 옆에서 삼단봉이 사람 머리를 깨트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액체가 내 얼굴에 팍 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터진 리키가 정신을 잃고 스르륵 미끄러졌다. 바닥에 쓰러져 걸레짝처럼 널브러진 리키를 내려다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리키 놈의 얼굴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했다.
설마. 이 자식, 갈색 가면인가.
바닥에 커다란 피 웅덩이가 생기는 걸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뒤를 이은 생각은 ‘이 자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였고.
갈색 가면은 귀면들을 부리는 새끼 도사다. 그런 놈이 겨우 양아치 두 놈 잡는 데 투입되었을 리가. 임충식의 머리뼈를 가지고 도망치고 있는 백단영의 뒤를 추적하는 팀에 합류했어야 정상이지.
“너, 뭐냐?”
검은 헬멧을 쓴 놈의 얼굴을 보고 질문했다. 앞에 버티고 선 놈이 ‘전보다 더 섹시한데? 임동추?’ 이따위 개소리를 지껄여 주길 바랐다. 차라리 이놈이 갈색 가면인 게 나았다. 하지만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은 헬멧을 벗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훤히 드러난 놈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한나민.”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웃었다. 녀석의 웃는 얼굴이 너무도 해맑아 보여서 마치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듯한 기분이었다.
“나민이, 네가 왜 여기 있냐?”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왜 네가 여기에 있어? 왜 네가 이런 짓을…….”
“토끼를 때려잡는 게 제 일이라서요.”
횡설수설하게 말을 얼버무리는 나와는 달리 녀석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녀석이 말하는 토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때려잡아야 할 토끼는 곧 적이란 뜻이다.
“이 자식은 네놈들 적이 아니라고 했잖아.”
“선생님과 함께 있었잖아요. 그럼 이 사람도 같은 밤일꾼 아닌가요?”
나민이는 그렇게 말하며 발끝으로 기절한 리키의 머리를 툭 쳤다. 사람이 아니라 짐짝을 걷어차는 듯한 행동이었다.
아까부터 저 뒤에서 숨죽이고 우리들을 지켜보던 두 대의 오토바이가 헤드라이트를 켰다. 놈들을 등지고 선 나는 괜찮았지만 나민이는 눈이 부신지 인상을 쓰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곧이어 두 대의 바이크가 부아앙, 괴성을 내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한 대는 그냥 우리들 옆을 스쳐 지나갔고 나머지 한 대는 나민이 옆에 멈춰 섰다. 커다란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놈이 나민이의 팔을 움켜쥐어 몇 번 흔들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 신경 쓰지 말고 형은 아까 도망친 그 새끼들이나 잡으러 가세요. 저번처럼 병신같이 놓치지 말고요. 이쪽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바람막이 점퍼의 헬멧 쓴 얼굴이 말없이 나민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바람막이 점퍼는 나민이를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더니 다시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차나 한잔하실래요? 저기 한강 전망대 카페가 있는 것 같은데.”
방해꾼이 신경질적인 엔진 소리를 내며 사라지자 나민이가 웃는 얼굴로 지껄였다. 나민이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 등대처럼 솟은 건물 하나가 보였다. 매번 차만 타고 지나갔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데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건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녀석은 어쩌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거지. 자기가 때린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피를 콸콸 쏟고 있는데.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기는 글렀다. 간다고 해도 얌전히 보내 줄 놈도 아니다.
“병원부터 가. 이 자식 이대로 놔뒀다간 정말 죽는다. 나민이 너도 살인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
나민이는 별말 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동료에게 전화를 해서 리키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듯했다. 나는 녀석이 전화를 하는 사이 무릎을 굽혀 리키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일그러진 놈의 얼굴은 너무도 괴로워 보였다.
미안하다. 괜히 나랑 얽혀 이런 꼴을 당하게 해서. 그런데 내가 숱하게 다쳐 봐서 아는데 이 정도 상처로는 안 죽는다. 병원 가서 몇 바늘 꿰매고 푹 쉬면 낫는 상처다. 그러니 그냥 오늘 하루 재수 더럽게 없었다고 생각해라.
나는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리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손으로는 뻗어 누운 피해자를 위로하듯 쓰다듬으며 눈으로는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든 가해자를 올려다봤다.
“그럼 선생님, 갈까요?”
나민이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웃었다. 녀석의 달콤한 목소리가 녹은 엿가락처럼 귓가에 찐득하게 들러붙었다.
*
*
“미리 말해 두지만 너랑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딱 한 시간이다.”
전망대 카페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난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참 동안 차가운 강바람을 쐬고 있어서인지 목이 간질간질했다.
“사실 이렇게 허투루 쓸 시간이 없지만, 기왕 이렇게 만난 거 너랑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올라가는 거다.”
“전망대 카페는 처음 와 봐요.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선생님이랑 왔네요. 야경 보면서 커피 마시면 기분 끝내줄 거 같아요.”
한나민은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딴소리만 지껄였다. 새끼야, 내 말 좀 들어라, 이렇게 말하려던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따뜻한 실내가 우리를 맞이했다. “우와. 창가 자리가 비었어요” 하면서 나민이는 부모 손 잡고 놀러 나온 애처럼 신이 나서 창가 쪽 빈자리로 뛰어갔다.
내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점원이 재빨리 다가와 메뉴판을 턱 내밀었다.
“따뜻한 핫초코랑 피자 하나 주시고요. 선생님은 뭐로 하실래요?”
선생님이란 소리에 점원이 나를 흘끔 쳐다봤다. 선생과 제자가 사이좋게 차나 한잔 마시러 올 시간이 아니긴 하다. 실제로 주위에는 야경을 보며 데이트하러 온 커플들뿐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시죠.”
주문을 받은 점원이 조용히 메뉴판을 수거해 갔다. 나민이는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을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입을 살짝 벌리고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다.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순수하고 맑았던 녀석. 나도 시선을 돌려 창밖의 야경을 감상했다. 차가운 냉기에 감싸인 새까만 강. 아련하게 빛나는 도시의 불빛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일 텐데도 도시의 밤은 아직도 밝다.
“때릴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가장 먼저 나온 소리가 이거였다. 내가 누구 얘기를 하는지 녀석이라면 알아들었을 거다.
“그 자식이 했던 행동을 보면 모르겠어? 그놈은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일반인이었다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자식 옆에 탄 선생님 얼굴을 발견한 순간, 우리 뒤를 쫓아온 밤일꾼들이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우연히 도로에서 네놈들을 마주쳤던 거다.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던 거고.”
“선생님이 제 입장이었다면 제 말을 믿으셨겠어요?”
녀석의 한마디가 내 입을 다물게 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서 나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꾸욱 눌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네 행동은 너무 과했어.”
“형들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럼 공평하게 내 머리도 깨부수지 그랬냐? 형들한테 의심 안 받게?”
“어떻게 선생님한테 그런 짓을 해요. 그리고 저희들한테 먼저 욕을 하고 시비를 걸어 온 건 그 자식이었어요.”
“넌 너한테 시비 걸고 욕하는 놈들은 다 그렇게 두들겨 패냐? 병원 신세를 지게 할 정도로? 넌 하신이랑 애들한테도 그랬지. 아무리 걔들이 널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어도,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하고 욕을 했어도 정도가 너무 심했어. 정신 번쩍 들게 할 정도로 끝냈어야지. 사람을 중환자실에 실려 갈 정도로 팬다는 게 말이 돼?”
나민이는 박하신과 걔 친구들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때려눕혔었다. 울면서 애원하는데도 녀석은 걔들을 아주 피 곤죽을 만들어 놨다. 그리고 리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음 한 번의 기습 공격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 본능이라고 치자. 그런데 이미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두려움에 떠는 리키에게 향했던 두 번째 공격은 뭔가. 이미 쓰러진 적을 확인 사살하는 짓과 다를 게 뭐란 말이냐.
게다가 더 끔찍한 건 그런 짓을 하고도 이 녀석의 얼굴에서 죄책감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식이 선생님을 때리고 욕했잖아요. 그 개새끼……. 죽여 버리려다가 참은 거예요. 선생님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요.”
난 할 말을 잃었다. 죄책감은커녕 죽여 버리려다가 참은 거란다. 그것도 내가 곤란해질 것 같아서.
“넌 어쩌면 그렇게 죽여 버린다는 말을 쉽게 하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한텐 아무것도 아냐?”
“그 새끼, 선생님이랑 무슨 사이예요? 선생님이랑 무슨 사인데 그딴 개소리를 지껄여요?”
“말 돌리지 마.”
“보나 마나 뻔하죠. 클럽에서 낚은 놈이죠? 전 선생님이랑 그렇게 싸우고 헤어진 뒤에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민했는데 선생님은 클럽에 남자나 낚으러 가신 거네요.”
“야, 한나민.”
“됐어요. 지금은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이랑 저랑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잖아요.”
한나민, 그럼 네가 나와 하고 싶은 얘기는 뭐냐. 박하신과 관련된 이야기들? 한숨 섞인 하소연? 미안한데 지금은 다 듣기 싫다. 이제는 너에 관련된 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너에 대해 더 이상 아는 게 겁이 난다.
점원이 기척도 없이 조용히 다가와 주문한 음료와 음식을 내려놓았다. 나민이가 하얀 치즈가 눈처럼 쌓인 피자 조각 하나를 빈 접시에 덜어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한 조각 들고는 오물오물, 맛있게도 씹어 먹는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녀석은 순식간에 손에 든 피자 한 조각을 먹어 치웠다.
나도 내 앞에 놓인 피자 조각을 들어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입을 움직이기 위해 먹고는 있지만 고무 조각을 씹는 것만 같았다.
“저, 그동안 정말 많이 생각해 봤어요. 역시 전 선생님이 아니면 안 돼요. 선생님이 없으면 전 엉망진창으로 망가져서 쓰레기가 되어 버릴 거예요.”
녀석은 입에서 달짝지근한 코코아 냄새를 풍기며 속삭였다. 예쁜 얼굴이다. 이 얼굴에 혼이 팔렸었지. 저 뽀얀 피부에, 저 눈동자에 넋이 나가 허우적댔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곱상한 얼굴에 또 넋을 잃는다.
백단영과 임충식의 머리뼈, 동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내 눈에는 날 바라보는 녀석의 예쁘장한 얼굴만이 보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읽은 것인지 녀석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살며시 쥐었다.
“선생님이 좋아요. 아직도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해야 선생님이 절 용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용서? 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해. 내가 널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넌 날 우습게 보고 또 그런 짓을 하겠지.
“사과해. 무릎 꿇고 빌어. 무조건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빌고 또 빌어.”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이 모양이다.
“그렇게 하면 절 용서해 주실 거예요?”
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넋을 잃고 길을 걷다 빙판길에 미끄러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쳤구나, 임동추. 난 팔을 흔들어 녀석에게 잡힌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꺼내 음식값을 계산하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 뛰어 내려갔다.
내 뒤를 쫓는 녀석의 발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택시라도 잡아타려면 주차장이 있는 도로 쪽으로 가야 할 텐데. 나는 아무것도 없는 한강 둔치를 향해 정신없이 걸었다. 혹독한 강바람이 내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귓바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콧속까지 꽁꽁 얼어붙어 숨을 쉬기도 힘이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뒤에서 날 부르는 나민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녀석은 뛰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금세 녀석은 날 따라잡았다. 녀석이 내 팔을 움켜잡았다. 난 욕을 내뱉으며 붙잡힌 팔을 들어 올렸다. “선생님!” 녀석이 다시 내 팔뚝을 잡으며 외치듯이 날 불렀다. 내가 또다시 팔을 비틀어 벗어나려 하자 녀석은 양손으로 날 붙잡고 매달렸다.
“선생님.”
“놔, 네놈 머리통을 깨 버리기 전에.”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다시는 그때 같은 일은 없도록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더 이상 난 널 좋아하지 않아. 꺼져.”
녀석이 두 손으로 내 팔을 쥔 채로 주저앉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악을 쓰며 녀석의 목을 움켜쥐어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기어이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흉하게 구겨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애원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딱 한 번만 더요.”
고개를 돌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붙잡힌 팔을 떼어 내고 가던 길 계속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눈을 뗄 수가 없는 건 녀석이 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까만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을 뚝뚝 쏟았다. 앙다문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물에 빠진 사람이 필사적으로 물 위에 뜬 널빤지를 움켜잡고 있는 것처럼 내 팔에 매달려서.
녀석은 흐느꼈다.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기가 싫은지 고개를 수그리고서 어깨를 떨며 울었다.
웃기지 마. 넌 또 연기하고 있는 거잖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놈인 척 연기하면서 내 마음을 흔들려는 거잖아. 다 알아. 네놈이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는 날 비웃고 있는 거. 이런 식으로 날 손바닥 위에 놓고 네 멋대로 휘두르려는 거.
“일어나. 다 큰 사내자식이 무릎 꿇고 질질 짜는 거 꼴 보기 싫으니까. 너도 이렇게까지 해서 날 붙잡을 필요 없잖아.”
“선생님이 절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신다면 옷 다 벗고 한강에 뛰어들 수도 있어요. 제가 문제 있는 놈이라서 싫으신 거예요? 폭력적인 놈이라서 끔찍하세요? 저도 제게 문제가 있다는 거 알아요. 제가 이상하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검은 괴물에게 산 채로 조금씩 잡아먹히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대로 매정하게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기라도 할까 봐 녀석은 더욱 섧게 흐느꼈다. 그러면서도 목이 꽉 메고 코가 막혀 발음도 불분명한 소리로 쉴 새 없이 떠든다.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졌다.
“선생님, 절 혼자 두지 마세요. 절 내치지 마세요. 무서워요. 무서워 죽을 것 같아요. 제 자신이 무섭고, 혼자 있는 시간이 무서워요.”
나도 내가 아니게 될 때가 있다. 가끔씩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적으로 변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도 검은 짐승이 날 잡아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녀석과 나는 물감을 묻힌 종이를 접어 만든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닮아 있다.
바람이 사정없이 불었다. 매서운 강바람에 한나민이 입고 있던 얇은 껍질이 날아가 버렸다. 내 눈앞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뚱이가 되어 오들오들 떠는 어린애가 있었다. 나민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녀석의 알몸뚱이를 볼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도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잔뜩 경계하고 긴장했던 몸의 근육이 서서히 풀렸다. 녀석이 붙잡고 있는 부분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한나민.”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예쁜 게 신기하다. 난 자유로운 한 손으로 녀석의 젖은 뺨을 후려쳤다. 녀석이 놀랄 새도 없이 반대쪽 뺨도 한 번 더 때렸다.
“다음에 또 그런 짓 했다간 죽여 버릴 거다.”
녀석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맞아서 빨개진 녀석의 볼에 미소가 확 번졌다.
“그때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예요. 절대로 선생님한테 손대지 않을게요.”
“그리고 지금 하는 일, 당장 관둬. 나도 이번 일만 끝나면 밤일꾼 일은 그만둘 테니까.”
“네, 알았어요. 저도 곧 관둘게요.”
“당장 그만둬. 사람 때려잡는 일 따위 관둬. 피 냄새라면 지긋지긋해.”
“절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녀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어나. 꼴 보기 싫다.”
나는 대답 대신 녀석에게 붙잡혀 있던 팔을 빼내고는 강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그놈의 선생님 소리 좀 그만해라. 학원도 관둔 마당에 웬 선생이냐?”
“네. 선생…… 아니, 형. 동추 형.”
용서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는 거다. 이번에 딱 한 번만. 두 번째는 없다. 어차피 난 이 녀석, 못 잊는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순정적인 놈이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그 감정을 쉽게 끊어 내질 못한다. 이 녀석이 내 앞에서 알짱대는 이상 난 계속 흔들렸을 거다.
저 녀석을 감당할 수 있겠어? 다시 한번 내가 내 자신에게 질문한다. 감당해야지 어쩌겠나. 내가 먼저 저 외로운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이제 혼자는 무섭다고 어린애처럼 우는 애를 어떻게 내칠 수 있나. 녀석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빤히 아는데.
무엇보다 나 역시 아직도 저 녀석을 좋아하는데.
녀석이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차가워진 뺨을 내 목에 비벼 대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형. 절 버리지 않아 줘서요. 절 없는 놈 취급하지 않아 줘서요.”
형이란 말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단어였나. 녀석의 목소리가 새어든 고막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아래로 축 처져 있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오랜만에 녀석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어서였다. 뺨을 간질이고 있는 녀석의 머리칼에 막 손이 닿으려던 때, 품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렸다. 동수에게서 온 문자였다.
[우리 지금 경찰서에 잡혀와써요. 형 어디 이써요? ㅠoㅠ]
핸드폰 화면을 보는 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문자 내용 때문에도 그랬지만 맞춤법. 이놈의 맞춤법! 똥수, 이 자식아. 넌 대체 학교에서 뭘 배웠냐. 급하게 문자를 입력하느라 오타가 난 것일 수도 있지만 네놈 전적을 보건대 넌 분명 한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거다.
[형! helf me! ㅜㅜ]
그사이 동수놈에게서 문자 하나가 더 날아왔다. 문자를 본 순간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한글도 제대로 못 쓰면서 영어 따위 쓰지 마! 한글도 모르니 영어 철자도 과감하게 틀리게 쓴다 이거냐. 오냐, 그래. 일관성 있어서 아주 좋구나.
통화 버튼을 꾸욱 누르자 익숙한 수신 음 대신 노랫소리가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내게는 소음 공해일 뿐인 노랫소리가 다시 반복이 되기 직전, 수화기 너머에서 동수 놈의 걸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난 핸드폰을 다잡아 쥐고서 빼액 소리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어디 경찰서야!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