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7. 검은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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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칼바람이 오늘따라 유독 매서웠다.
목과 턱을 어루만지는 차가운 손끝의 감촉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어린 연인의 손에선 비린내가 났다. 아무리 씻어도 지울 수 없는 피비린내.
“선생님, 저 오늘 진짜 힘들었어요.”
나민이가 내 어깨에 자기 얼굴을 비비며 녀석답지 않게 애교를 부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하면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할 것이다. 평소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터다. 하지만 난 아무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축 늘어진 두 손은 약하게 경련하기까지 했다.
“선생님, 추우세요? 왜 이렇게 떨어요?”
녀석도 내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내가 본 영상. 핸드폰 화면에 들어차 있던 나민이의 얼굴만이 계속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녀석은 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한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부드럽고 상냥해서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배 속이 꿀렁꿀렁 소리를 내며 뒤집어지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서서 녀석을 마주 보았다.
나민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두 개의 까만 눈은 환하고 맑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분위기 잡으세요? 무섭잖아요.”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 녀석이 실실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녀석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녀석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핸드폰 좀 봐라.”
“핸드폰은 왜요? 고장이라도 났어요?”
그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녀석에게 핸드폰에 저장된 방금 전 보았던, 두 번 다시는 보기 싫은 영상을 꺼내 보여 주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기계 속 영상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일시에 굳었다. 웃음을 띠고 있던 녀석의 두 눈이 경직되었다.
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녀석의 얼굴. 웃음기가 사라져 냉기마저 흐르는 두 눈. 굳게 다물린 입술.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녀석의 표정에선 아주 약간의 당혹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 영상이라도 보는 듯 녀석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 영상에 찍힌 거, 너지?”
이건 대체 누구예요? 이런 대답 따위가 돌아오길 기대하며 물었다. 차라리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네, 제가 맞네요.”
하지만 녀석은 순순히 인정했다. 영상 속에서 미쳐 날뛰는 짐승이 자기라고. 녀석은 내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 다시 한번 영상을 돌려 보았다.
“그 새끼, 영상은 다 지웠다고 하더니. 도망치는 사이에 박하신한테 전송했나 보군. 멍청한 새끼들이 이런 쪽으론 머리가 홱홱 돌아간단 말이야.”
녀석은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는 영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얼음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내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누군가, 저 녀석은. 내가 아는 한나민인가? 내가 사랑하는 그 애가 맞나?
할 말은 많았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 핸드폰을 쥔 녀석의 하얀 손을 바라만 봤다. 관절이 도드라진 녀석의 하얀 손등은 뭔가에 베이고 찢긴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상처로 뒤덮인 녀석의 손등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저 상처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잘 알면서도.
“나민아.”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줄래?”
내 목소리는 꼴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을게요. 선생님이 보신 것 그대로예요. 제가 그놈들을 구타했고 병원에 입원시켰어요.”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왜라뇨? 그러지 않았으면 오히려 제가 당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을 지켜 주고 싶었어요. 박하신, 그 야비한 새끼가 절 불러내서 협박했어요. 제가 하고 다니는 짓을 학교에 알리겠다고요. 그건 상관없었어요. 하지만 그 새끼가 선생님을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을 땐 진짜 못 참겠더라고요.”
“날 경찰에 신고해? 무슨 죄로?”
“선생님이 밤에 하신다는 그 ‘밤일꾼’이라는 거, 불법이라면서요. 그 새끼가 선생님을 경찰에 신고해 버리겠다고 실실 웃는데……. 진짜 눈에 뵈는 게 없어지더라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저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요.”
녀석이 내 어깨를 붙들고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자기는 원래 그런 놈이 아닌데 상대방이 자꾸만 위협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단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아무리 순한 개도 자기를 위협하는 사람은 문다. 물지 못하면 크게 짖기라도 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런 짓을 한 녀석처럼 보이지가 않더라.”
나민이의 눈썹 한쪽이 움찔 떨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에 너희 집 욕실에서 <우돼지 돼지갈비>라는 상호가 쓰인 라이터를 발견했어. 신기하게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장사를 하는데, 그 가게 이름이 <우돼지 돼지갈비>거든.”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아끼고 있지만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까지 제어하긴 힘든 모양이다.
“돼지갈빗집을 하는 그 사람은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의 운영진 중 한 사람이야. 그런데 어째서 그 집 라이터가 너희 집 욕실에 있는 걸까?”
‘박하신이 갖다 놓은 걸 거예요. 그 자식은 담배를 피우니까.’ 이런 빤한 변명이라도 할 것이지. 하지만 녀석은 침묵했다.
“널 믿어 달라고 했지? 그래. 믿으려고 했어. 믿고 싶었다. 너만은 꼭 믿고 싶었어.”
꽉 쥔 내 주먹이 약하게 떨렸다.
“그런데 이젠 안 되겠다. 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그래서요? 이대로 끝내자고요?”
그렇게 묻는 나민이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절 버리시겠다고요? 절 내팽개치시겠다고요?”
“그런 뜻이 아냐.”
“그런 뜻이 아니면요. 절 믿을 수가 없다면서요? 절 믿지 못하니까, 제가 지긋지긋해졌으니까 끝내자는 거잖아요.”
“지긋지긋해지다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했잖아.”
“이럴 거였으면 왜 저한테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왜 저한테 친절하게 대해 줬어요? 이렇게 버릴 거였으면 처음부터 관심조차 주지 말 것이지, 왜! 대체 왜요!”
녀석의 입에서 터져 나온 날카로운 외침에 온 집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절 버리지 마세요, 선생님. 끝내자는 말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급기야 녀석은 내 양팔을 꽈악 움켜쥐고 애원했다. 언젠가 TV에 나온 다중인격 환자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열한 미소를 띠며 빈정대다가 젖은 목소리로 호소하고, 입으로 불을 뿜어내듯 흥분해 소리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한다.
녀석이 짧은 시간 안에 보여 준 모습들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나민의 모습은 없었다. 녀석은 연기를 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만해라. 진짜로 네가 끔찍해지려고 하니까.”
내 팔을 움켜쥔 녀석의 하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나민, 아무리 네가 눈물 뚝뚝 흘리면서 연기를 해도 난 안 속아. 처음부터 안 속았어. 내가 그랬지? 네가 뒤집어쓴 껍데기는 너무 얇아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이제 그만해. 더 이상 사람 바보 취급하지 말고!”
바짝 말라붙은 내 목구멍에서 불덩이 같은 외침이 터져 나갔다. 이런 때에 얼굴 위로 당연히 드러나야 할 당혹감, 놀라움의 감정은 녀석의 얼굴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어떻게 하면 나를 속일 수 있을까, 빠르게 회전하는 녀석의 머릿속이.
“애초에 너한테 다가가면 안 되는 거였어.”
입 밖으로 나오는 내 목소리는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몸을 비틀어 아직도 내 팔을 쥐고 있는 녀석의 품에서 벗어났다.
“실수는 실수로 끝내고 너한테 관심을 끊었어야 했는데. 너도 나랑 이런 관계가 되지 않았다면 네 나이에 맞는 애랑 사귈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넌 완벽하게 네 본모습을 숨기고 예쁘고 귀여운 연애를 할 수 있었을 테고. 이렇게 널 집요하게 추궁하고 죄인으로 몰아가는 놈이랑 하는 어둡고 찜찜한 연애 말고.”
나민이의 떨리는 입술이 살짝 열렸지만 음성을 내뱉지 못하고 다시 굳게 닫혔다.
난 몸을 틀어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지럽게 널린 신발들 사이에서 벗어 둔 내 구두를 찾아 대충 꿰어 신으려던 때였다.
등 뒤에서 강한 힘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나민이었다. 녀석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내 얼굴을 틀어쥐어 돌려 입술을 들이밀었다. 입술 살점을 뜯어먹을 듯이 빨고 핥으며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몸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치밀어 올랐던 짜증이 분노로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어 녀석의 얼굴을 후려쳤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이 새끼야!”
난 나민이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녀석에게 욕을 내갈겼다. 머릿속까지 점령한 분노로 시뻘게진 눈을 하고서 짐승처럼 씩씩댔다. 충혈된 두 눈에까지 열이 올라 눈알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섹스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다니. 대체 이딴 더러운 짓은 어디서 배워 왔어, 새끼야!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녀석은 얻어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녀석이 혀를 내밀어 터져서 피가 배어 나온 입술 끝을 핥으며 코웃음을 치는 것을 난 분명히 들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퍼억, 소리를 내며 터졌다. 저절로 힘이 들어간 주먹을 다시 한번 허공에 뻗었다. 하지만 뻗어 나간 손목은 녀석의 손아귀에 움켜잡혔다. 방금 전 나를 등 뒤에서 껴안았던 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악력이 내 손목뼈를 옥죄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에 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네, 맞아요. 전 지금까지 선생님 앞에서 연기를 했던 거예요. 선생님은 순진하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손목을 움켜쥔 녀석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맨손으로 귀면들을 상대하던 내가 겨우 손목을 붙잡힌 걸로 꼼짝 못 하고 쩔쩔매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놔라. 놓고 얘기해라.”
녀석은 움켜쥔 내 손목을 휙 꺾었다. 무리하게 근육이 뒤틀리는 통증에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을 속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선생님을 좋아하는 제 마음은 진짜예요. 선생님이 좋아서, 곁에 있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이것만은 믿어 주셔야 해요.”
“그래. 날 좋아하는 네 마음까지 가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난 그저…….”
“절 좋아하세요? 절 사랑해요?”
연속된 질문이 내 말허리를 잘랐다.
“왜 아무 말씀 못 하세요? 절 사랑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녀석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던진 지 약 몇 초 후, 녀석의 다른 한 손이 뻗어 나와 내 목을 감쌌다. 감싼 게 아니라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거다.
목을 조르는 압박감에 나는 눈을 치떴다. 또 하나의 손이 내 목을 덮었다. 내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그 무시무시한 힘이 내 목을 무지막지하게 짓눌렀다. 숨통이 턱 틀어막힌 괴로움에 난 두 팔을 허우적대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필사적으로 힘을 줘 목을 조른 녀석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버둥거릴수록 하얀 두 손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괴로움에 일그러져 있을 내 얼굴을 바라보는 녀석의 커다란 두 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저 눈앞에 있는 뭔가를 응시하는 새까만 동공일 뿐이었다. 소름 끼쳤다. 박하신이 보내 주었던 핸드폰 영상 속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이.
“택배입니다. 안에 아무도 안 계세요!”
문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2층 어딘가에서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녀석이 갑자기 들려온 소음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힘이 풀린 다리로 현관으로 달려가 아무 신발이나 구겨 신고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
대문 앞에 서 있던 택배 직원을 밀쳐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두 다리를 움직였다.
굽이진 골목 어귀에서 달려 나온 배달 오토바이와 부딪칠 뻔하고서야 난 멈춰 설 수 있었다. 오토바이가 잘 피해 준 덕분에 정면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중국집 배달부가 내게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지나갔다.
내 두 다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무릎이 꺾여 바닥에 거의 주저앉다시피 했다. 배 속이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꺽꺽대며 신 위액을 바닥에 토해 냈다. 위액이 할퀴고 지나간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불에 달군 쇳덩이를 집어삼킨 듯했다. 아니다. 사실은 이렇게 목이 아픈 건 토해 낸 위액 때문이 아니다.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근육 속으로 파고들던 손가락의 느낌. 불시에 숨구멍을 틀어막아 산 채로 쥐어짜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
침을 삼키기가 괴로울 정도로 아픈 목에 손을 갖다 댔을 때, 난 그제야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베리아 벌판 위에서 속옷 한 장 달랑 입고 서 있는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입술이 제멋대로 경련하고 이가 다각다각 소리를 내며 떨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형편없이 떨고 있는 주제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무서웠다. 내가 그토록 보여 달라고 외치던 ‘진짜 한나민’의 모습을 한 그 녀석이.
파주로 과일 상자 배달을 가던 날 밤, 우리를 습격했던 귀면들과 조우했던 때보다도 더.
조금의 자비도 없이 내 목을 조르던 그 녀석은 귀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더 두려웠다. 좋아했고 사랑했고,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릴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했던 존재였기에 더 무서웠다.
“미친 새끼…….”
난 욕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양손에 카스텔라 세트, 홍삼 드링크 한 박스씩을 들고서 박하신이 입원해 있다는 병동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복도가 나를 맞이했다.
히터를 튼 것 같지도 않은데 병실 안은 뜨끈뜨끈했다. 네 명의 환자가 사용하는 병실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쪽 자리가 놈의 자리였다. 놈은 침대에 드러누워 입까지 쩌억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사 가지고 간 빵과 음료수를 보호자용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먹다 남은 과자 봉지와 빈 캔 같은 것이 널려 있는 개인 사물함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놈이 읽으려고 놔둔 건 절대로 아닐 테고, 아마 놈의 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반성과 후회>라는 제목의 책이다. 제발 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후회하라는 의미로 가져다 놓은 것이겠지만, 글쎄. 입 쩍 벌리고 침까지 질질 흘리며 잠든 저 자식이 이 책을 펼쳐 보기나 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놈이 움찔, 몸을 한 번 떨더니 게슴츠레 눈을 떴다.
“어어, 꼰대 아냐? 꼰대가 여기 웬일이야?”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묻는 놈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병문안 오라고, 안 오면 후회할 거라고 병원 이름과 병실까지 알려 준 게 누군데.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몇 번이나 똑같은 내용의 문자 폭탄을 보내면서.”
“진짜 올 줄은 몰랐지. 꼰대 성격이라면 내가 아무리 문자를 날려도 개무시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상반신을 일으킨 놈이 간이 침상에 놓인 빵과 음료수를 발견했다. “저거 나 먹이려고 사 온 거야?” 하면서 입맛을 쩝쩝 다신다.
“할배도 아니고 웬 카스텔라에 홍삼 드링크? 누가 노인네 아니랄까 봐. 쯧.”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자식아. 사 와 줘도 지랄이냐, 지랄이.”
“누가 안 먹는대? 그리고 선생이 막 욕해도 돼? 상스럽게.”
“난 이제 선생 아니니 욕해도 된다. 천천히 좀 먹어, 인마. 안 뺏어 먹는다. 병원에서 너 굶기냐?”
“밥은 꼬박꼬박 주긴 하는데 밥이 더럽게 맛없어. 밥도 맛없고 할 일도 없고. 가만히 누워서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노트북으로 드라마 보는 짓도 하루 이틀이지.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 퇴원하고 싶어 죽겠는데 아버지는 집에 가도 돌봐 줄 사람 없다고 병원에 그냥 있으라고 하고.”
놈은 끊임없이 구시렁대며 순식간에 카스텔라 한 봉지를 다 먹어 치웠다. 유일하게 병실에 남아 있는 화장실 쪽 벽면 자리의 환자가 우리들을 빤히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가자. 답답하다. 너랑 할 얘기도 있고.”
“안 그래도 덥고 짜증 나서 미쳐 버리겠어. 이놈의 병실은 이 시간만 되면 찜통이야.”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유리창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쬐고 있다 보니 등에 땀까지 맺혔다. 휠체어를 가지고 와 놈을 태우고 병실 밖으로 나섰다. 놈이 발끝을 덜덜 흔들면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천몇백 원이면 살 수 있는 아이스크림 콘 따위가 아니라 스푼으로 떠먹는 고급 아이스크림이.
‘이놈 자식아! 사 주는 대로 처먹어!’ 하면서 목을 붙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싸가지 국밥 말아 처먹은 애새끼한테 물어봐야 할 게 있으니까.
“초코! 난 하겐다즈 초코 아니면 안 먹어!” 하며 외치는 녀석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꾹 참고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서 계산했다.
사다 안겨 줬더니 녀석은 고맙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잘도 퍼먹는다. 나도 놈의 맞은편에 앉아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었다. 단게 싫어서 녹차 맛으로 골랐는데 맛이 제법 괜찮았다.
“그 새끼가 뭐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놈이 먼저 질문했다.
“뭐가?”
“한나민. 그 새끼한테 내가 보내 준 영상을 보여 줬을 거 아냐. 그 새끼 반응이 어땠어? 그건 절대로 자기가 아니라고 잡아뗐어? 아니면 날조된 영상이라고 지껄이면서 눈물 뚝뚝 흘리면서 매달렸어? 자기 좀 믿어 달라고. 자긴 절대로 그런 짓 할 사람 아니라고?”
“아니. 쿨하게 자기가 한 짓이라고 시인하더라.”
박하신의 부어터진 눈이 확 떠졌다.
“네놈이 날 감방에 잡아 처넣겠다고 했다며? 그 말을 듣고 눈에 홱 뒤집혔다고 하던데. 넌, 이 새끼야. 어린놈의 자식이 어쩌면 그렇게 비열하고 추잡하냐?”
“누가 불법적인 일 하래? 선생이란 인간이 말이야.”
나는 참다못해 손으로 놈의 머리통을 빠악,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아, 씨발!” 녀석이 욕설을 내갈기며 눈을 부릅뜨기에 이번엔 반대쪽 머리통을 쳤다. 놈이 시뻘게진 얼굴로 욕을 내뱉기에 휠체어 발판에 내 발을 올려놓고는 조용히 협박했다.
“한번 죽도록 맞아 볼래? 겨우 붙기 시작한 뼈, 또 박살 내 주리? 내가 충분히 그런 짓 할 수 있는 놈이란 거 잘 알 텐데. 이 형, 눈 뒤집히면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이다.”
“씨, 씨발……. 깡패라는 거 자랑하는 거야, 뭐야?”
눈을 부릅뜨고 왈왈대며 짖어 봤자 저놈은 어차피 휠체어 신세 못 면한다. 난 웃으며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는 녀석의 뺨을 탁탁 쳤다.
녀석이 짜증을 내며 내 손을 쳐 냈다. 욕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면서 아이스크림을 퍽퍽 퍼먹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동글동글한 놈의 머리통을 다시 한번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얌전히 대답 잘해 주면 밖에 나가서 네놈이 먹고 싶어 하는 거 사다 주마.”
대답은 없었지만 놈은 흘끔, 나를 바라봤다. 굶주린 애는 먹을 걸로 꼬드기는 게 최고다.
“하신이 너, 전에 나민이 집에 몰래 들어와서 뭘 찾았지 않냐? 그때 네가 그랬지? 증거를 찾고 있었다고. 그게 무슨 증거였냐?”
“무슨 증거겠어. 한나민이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소속 딸랑이라는 증거지.”
욕실에 있던 돼지갈빗집 라이터 얘기를 꺼냈을 때. 한나민이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꼰대랑 꼰대 친구들이 풍기 문란 놈들인 척하고 우리들 뒤를 쫓아왔을 때. 그때 그놈들이 나타났잖아. 귀면인지 뭔지 하는 놈들.”
“그래, 나타났지. 타이밍 죽여주게.”
“난 분명히 봤어. 한나민, 그 자식 말이야. 그 자식이 귀면인지 뭔지 하는 괴물 같은 새끼들 사이에 껴 있었어.”
나민이가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멤버라는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 아수라장 속에 녀석도 있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네 눈으로 직접 본 거냐?”
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그날 밤, 뒤늦게 나타난 ‘진짜’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은 모두 검은 헬멧을 쓰고 있었다. 아니, 쓰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놈들 모두를 본 건 아니니까. 내가 마주친 건 몇 마리의 귀면 놈들, 그리고 나를 흙바닥에 깔아 눕히고서 조롱하고 욕보이던 갈색 가면뿐이었다.
“직접 놈의 얼굴을 본 건 아냐. 놈들은 하나같이 검은 헬멧을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놈이 있었어. 한나민이 있었다고.”
“헬멧을 쓰고 있었다면서? 헬멧을 벗은 민얼굴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확신하냐?”
“꼰대, 당신보다 내가 더 오랫동안 한나민을 지켜봐 왔어. 병신같이 그 새끼가 좋아서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지켜본 나야. 그래서 놈의 걸음걸이나, 사소한 버릇 같은 것도 다 꿰고 있단 말이야. 커튼 뒤에서 실루엣만 비춰 줘도 그놈이란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녀석이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서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벌게진 얼굴로 씩씩댄다. 내 말 좀 믿어. 거짓말이 아냐. 날 좀 믿어 줘! 내게 향한 핏발 선 두 눈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내가 석진경을 열렬히 사랑했던 때. 난 귓가에 뿜어지는 숨소리만 듣고도 녀석이란 걸 알아맞힐 수 있었다. 똑같은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해도 난 어렵지 않게 석진경을 찾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집요하게 지켜봤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박하신의 말대로 나민이가 거기에 있었다면. 왜 나는 녀석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도 정신이 없어서 녀석이 있었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 그건 핑계다. 아마 나민이가 바로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해도 난 몰라봤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늘 어깨를 구부리고 다니는 힘없이 비척거리는 나민이다.
내게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며 목을 조르던 한나민은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며칠 사이에 키가 확 커 버리거나 덩치가 좋아진 건 아닐 텐데. 단지 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녀석은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였다. 얼굴도, 신체 구조도, 예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도 녀석은 순식간에 다른 누군가로 변신했다.
바로 눈앞에서 그런 녀석의 민얼굴을 보고도 ‘대체 이 녀석은 어디의 누구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검은 헬멧까지 뒤집어쓴 상태였다? 녀석이 내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췄다 해도 난 절대로 녀석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 확신한다.
“그래. 네가 하는 말 믿으니까 그만 좀 씩씩대라.”
“믿긴 뭘 믿어. 당신은 그 새끼 편이잖아. 당신 귀에는 내가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로 들리지?”
난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목덜미에 난 피멍을 보여 주었다. 박하신이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 스푼을 떨어뜨렸다. 놈은 입을 벌려 뻥긋뻥긋하다가 이내 낯을 확 구겼다.
“그거, 그 새끼가 그런 거야?”
나는 대답 없이 피곤이 쌓여 뻑뻑해진 눈을 깜빡였다.
“미쳤다, 그 새끼. 진짜 제대로 미쳤어. 또라이 같은 새끼. 아무리 그래도 꼰대한테 그러는 건 진짜 아니잖아. 나야 맞을 짓을 했으니까 뒈지게 얻어터진 거지. 그런데 꼰대는 그 자식한테 엄청 잘해 줬잖아. 꼰대랑 그 새끼,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어?”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평일 오후인데도 병원 로비에는 환자와 병원을 찾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 이 녀석을 끌고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와아. 그 새끼, 진짜 사이코네. 둘이 아주 딱 달라붙어서는 깨를 들들 볶더니. 뭐 그렇고 그런 감정이 처음 같진 않겠지만 그래도 사귀고 있는 사람한테 이딴 짓을 해?”
나민이를 좋아했다면서 집요하게 괴롭힌 너도 똑같은 놈이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나까지 시끄럽게 떠들어 댈 필요는 없지. 옆자리에 앉은 환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꼰대, 당신도 참 그렇다. 저번에 보니까 그 나이치고는 아주 날고 기던데. 그 새끼가 그딴 짓을 한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었어? 하긴. 그 새끼, 사람 두들겨 패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긴 해. 한두 번 그런 짓 해 본 솜씨가 아니더라.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 들어가서 양아치 일진 새끼들 신나게 때려잡고 다녔을 테니, 뭐.”
“거기는 대체 사람 뽑는 기준이 뭐냐?”
“모르지. 죄책감 없이 사람 존나 잘 패는 새끼? 한나민도 생긴 건 그따위여도 사람 존나 잘 패더라. 한나민 그 새끼, 학교 다닐 때 아무도 안 건드렸어. 공부 잘하고 얌전하고 내성적이고 비실비실하고. 딱 봐도 한 대 치고 싶게 생긴 호구 새끼인데도. 왜겠어? 다 이유가 있는 거지. 간 크게 그 새끼 건드린 건 나밖에 없어.”
“자랑이다, 자식아.”
박하신이 킬킬킬 웃다가 옆구리를 움켜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웃느라 통증이 도졌나 보다.
“확 일을 저질러 버려서 속은 시원한데, 씨발, 왜 이렇게 무섭냐. 꼰대, 그 새끼가 날 죽이러 오면 어쩌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겠냐?”
“그러고도 남을걸? 한나민을 보면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아무 짓이나 막 하고 다니는 막장 인생 같지 않아? 거짓말 안 보태고 놈한테 두들겨 맞을 때 이 새끼, 기어이 날 죽이려고 하는구나 싶었거든.”
나 역시 나민이에게 목이 졸렸을 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목이 뜨끔하게 아파 오는 듯해서 난 차가워진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한나민이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멤버라서 날 지목한 건지, 아니면 다른 개새끼가 날 1급 신고란에 신고한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난 놈들의 사냥 대상이잖아? 아직 놈들은 날 공식적으로 처리한 게 아니잖아. 만약에 그때 봤던 귀면인가 하는 놈들이랑 한나민이 날 찾아오면, 그때는 어쩌지?”
녀석은 웃고 있었지만 날 바라보는 두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눈앞의 이 녀석은 패거리를 만들어 약한 애들 괴롭히고 다니던 양아치가 아니라 두려움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린애였다.
그런데 난 이 어린애에게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답을 해 주지 못하겠다.
“나민이, 걔가 그래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애야. 아무리 네가 미워도 병원까지 찾아와서 해코지를 하진 않을 거다. 엄밀히 말하자면 걔가 아무 죄 없는 친구를 두들겨 패서 병원에 입원시킨 것도 아니고. 네놈들이 걔를 불러내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니까 걔가 위기감을 느끼고 그런 거 아니겠냐. 만약 나민이가 얌전히 있었으면 어땠겠냐? 얘기 좀 하다가 넌 가라, 우리도 집에 가마, 이러면서 얌전히 보내 줬겠냐? 네놈들이?”
“꼰대, 미쳤어? 어떻게 그 새끼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그 새끼 편을 드냐.”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 사실이!”
지금까지는 용케 잘 참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어서 빽 소리쳤다.
“너는 반성이란 게 뭔지는 아냐? 넌 어떻게 지금까지 걔한테 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네놈이 당한 것만 생각하면서 억울해하냐? 두들겨 맞는 게 무서웠으면 애초에 얻어터질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새끼야. 네놈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밤낮없이 일하는데, 아들이란 새끼는 똑같은 종자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온갖 개망나니 짓은 다 하고 다니고. 내가 네놈 아버지를 만나서 면담 좀 해 볼까? 네놈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낱낱이 고하랴?”
“거기서 아버지가 왜 나와!”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네놈 아버지가 불쌍해서 그런다!”
로비에서 어떤 미친놈들이 싸우고 있다고 말해 줬는지 사설 경비 업체 마크가 박힌 조끼를 입은 한 남자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병원에서 이러시면 어쩝니까. 계속 싸우시려면 나가세요. 다른 환자분들에게 폐가 됩니다.”
결국 나는 남자에게 등이 떠밀려 밖으로 쫓겨났다. 남자는 일단 날 먼저 내보낸 뒤에 휠체어를 직접 밀어 박하신까지 쫓아내 버렸다.
“에이, 씨발. 기분 좆같네! 꼰대, 담배 있어? 있으면 하나 줘 봐.”
에라이, 미친놈아. 난 뻔뻔하게 담배 타령하는 정신 나간 놈의 뒤통수를 뻐억 후려갈겼다.
“안 되겠다. 내가 당장 풍기 문란 사이트 들어가서 1급 신고란에 글 올려야겠다. XX 고등학교 2학년 양아치 일진 박하신, 아직 정신 못 차리고 대가리 쳐들고 지랄 발광 하고 있는데 빨리 좀 처리해 달라고.”
핸드폰을 꺼내 들고 곧바로 사이트에 접속하는 시늉을 하자 놈이 기겁을 했다. 휠체어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펄쩍펄쩍 뛰며 내 손에서 핸드폰을 뺏으려 한다.
“미쳤어? 그딴 짓 하기만 해 봐!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글 올리지 마. 올리지 마. 으아아! 하지 말아 주세요. 글 올리지 말아 주세요오오오!”
진짜로 죽도록 무서운지 놈은 존댓말까지 쓰면서 징징댔다.
“글 올리지 마. 나 진짜 죽어. 안 그래도 한나민 새끼가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을 텐데 1급 신고란에 글까지 올라가면…… 나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내 친구들까지 다 죽어. 그 새끼가 똘마니들 다 끌고 와서 우리를 다 죽일 거야.”
“그러니까 헛짓 좀 그만하라고, 자식아.”
“그래도 그 새끼들 곧 된통 당할 거야. 아빠가 그 새끼들 경찰에 신고한대.”
“경찰?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아빠 아는 분이 경찰 높으신 분이래. 아빠가 나 이렇게 만든 새끼들 싹 다 죽여 버릴 거랬어.”
녀석은 목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지껄였다. 놈의 머리통을 또 한 번 후려치고 싶은 걸 참았다.
“야, 박하신. 아버지한테 그런 짓 하지 마시라고 해라.”
“왜?”
“넌 인마, 네 잘못은 생각도 안 하냐? 네놈이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야? 맞을 짓 했으니까 맞은 거 아니냐고. 그냥 얌전히 있어. 괜히 그 새끼들 들쑤셔 놔서 좋을 거 하나 없어.”
“또 한나민, 그 새끼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 새끼도 같이 조져 버려야 한다니까!”
아오, 이 자식! 놈의 머리를 후려치려 하자 녀석이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
“때리지 좀 마. 자꾸 때리면 머리 나빠져.”
“더 이상 나빠질 머리가 어디 있다고. 너, 이 자식. 내가 분명 경고했다.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마라. 그 새끼들 무섭다며. 한나민이랑 귀면이 찾아올까 봐 무서워 죽겠다며?”
“그러니까 그 새끼들 조져 버리겠다는 거잖아.”
“조진다고 조져질 놈들이 아냐. 너도 그것들한테 당해 봐서 알잖아. 그것들이 경찰한테 순순히 당할 것들 같냐? 괜히 섣불리 쑤셨다간 더 위험해진다. 살고 싶으면 내 말 들어. 알았냐?”
녀석은 말없이 날 노려보았다.
“다 먹었으면 들어가라, 자식아. 잘 쉬고 잘 먹어야 빨리 낫지.”
난 픽 웃으면서 녀석의 이마를 찰싹 후려쳤다. 놈이 욕을 중얼거리며 휠체어 바퀴를 열심히 굴려 돌아서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 안은 그렇게 따뜻했는데 바깥은 영하의 날씨를 자랑하고 있다. 날 선 칼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나는 몸을 움직였다.
병원 주차장을 막 벗어난 순간 품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발신인은 한나민이다. 그날 이후 며칠간 녀석은 하루에도 몇십 번씩 내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전화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문자도 몇 통씩 날아왔다. 날아온 문자 메시지 내용은 대부분 이랬다. 전화 좀 받아 주세요, 할 얘기가 있어요, 우리 얘기 좀 해요, 선생님…….
전화벨 소리는 집요하게도 울렸다. 나는 액정 화면 왼쪽 아래에 있는 빨간 버튼을 길게 늘여 수신을 차단해 버렸다.
*
*
“놈들 사무실에 경찰들이 급습한 모양이더라. 누가 경찰에 신고라도 한 걸까?”
“이해가 안 되는 게 그 사이트를 이용하는 애들 대부분이 경찰보다 그놈들을 더 신뢰하잖아요. 오히려 사이트가 경찰에 알려질까 봐 불안해하는데 말이에요.”
“놈들에게 당한 피해자가 신고한 게 아닐까 싶어.”
노금영의 말에 기식이가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을 만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애들한테 이번 일에 대해 뭐 들은 거 없어요?”
반쯤 졸고 있느라 기식이가 묻는 말은 듣지도 못했다. 노금영이 “야, 임똘추!” 하고 꽥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대체 밤에 뭐 하느라 잠도 못 자고 대낮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냐? 애인이랑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이라도 보냈냐? 응?”
노금영이 음흉하게 웃으며 팔꿈치를 쿡쿡 찔렀다. 놀고 있네. 애인이랑 불타는 밤을 보내느라 잠을 설쳤다면 기분이라도 상쾌하지.
“고민거리가 생겨서 요즘 계속 밤에 잠을 못 자요.”
“고민? 대체 무슨 고민인데 백발 마녀한테 정기 쪽 빨린 미라처럼 홀쭉해졌냐? 이 형님한테 말해 봐라. 내가 다 해결해 주마.”
“형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나저나 기식아, 아까 뭐라고 했냐?”
기식이가 내게 귤을 하나 던지며 다시 물었다.
“학원 애들한테 뭐 들은 거 없냐고 물었어요.”
“야, 기식아. 임똘추 백수 됐잖냐.”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형, 학원에서 잘렸다고 했었지!”
배려라고는 쥐뿔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동료가 회사에서 잘렸는데 따뜻한 위로 한 마디는 못 건네줄망정.
어제 오후 1시경, 경찰들이 서울 시내의 간판도 없는 지하 사무실을 급습했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이트의 임시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안에서 짜장면과 짬뽕을 먹고 있던 사내들이 붙잡혀 갔고 오늘 오전에 풀려났다. 인터넷 사이트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놈들의 사무실을 찾아내 쳐들어간 것까진 좋은데, 놈들을 잡아 둘 만한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사무실 안에 있던 노트북을 조사해 봤는데 안에는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각 나라별로 분류한 수많은 포르노 영상들만 가득 들어 있더란다. 그 외에도 국내 서버, 외국 서버,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듣긴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컴퓨터 관련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놈들을 경찰에 신고한 건 제가 아는 놈일 거예요, 아마.”
컴퓨터 관련 지식이 없어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경찰에 놈들을 신고한 건 박하신의 아버지일 것이다.
노금영과 기식이가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쳐다봤다.
“아는 놈이라고? 누군데?”
“그놈들한테 당한 피해자요. 학원에서 일할 때 알던 애인데,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애들 괴롭히고 다니다가 얼마 전에 놈들에게 된통 당한 모양이더라고요. 그 자식 아버지가 자기 새끼 그렇게 만든 놈들 가만 안 둔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거든요.”
“자기 자식 잘못한 거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 부모에 그 자식이지. 에이, 쯧쯧! 하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놈들한테 당한 애새끼들이 한둘도 아닐 텐데, 당한 놈들이 언제까지 발발 떨고 있지만은 않겠지. 뒤늦게나마 자기가 친구들한테 한 짓이 잘못된 건지 알고 반성했을 놈이 몇 명이나 되겠어.”
박하신 그놈도 자기가 한 짓은 생각지도 않고 당한 것만 억울해하며 복수심만 불태웠었지. 그 결과가 이렇다. 네놈이 반성은 개나 줘 버리고 헛지랄을 한 덕분에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조직 자체가 네놈 적이 됐다. 이젠 한나민 개인이 아니라 그 조직 놈들 전체가 네놈을 날로 회 쳐 먹으려고 칼을 갈게 생겼다 이 말이다. 일이 이렇게 돼서 속 시원하냐? 이 철딱서니 없는 애새끼야?
경찰이 놈들 사무실에 쳐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엔 졸리고 피곤해서 아무 생각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야 짜증과 분노가 활화산에서 뿜어 나오는 마그마처럼 폭발했다.
“아악! 그 새끼! 경찰이 끼면 골치 아파지는 건 그놈들이나 우리들이나 피차 마찬가지라고! 가뜩이나 내 일만으로도 골이 쾅쾅 울리는데 왜 지랄이야, 왜!”
“동추 형이 구석에 놔둔 쥐약 처먹었나 봐요”, “저 새끼 한 번씩 저런 짓거리 할 땐 그냥 미친놈 같은 게 아니라 100퍼센트 리얼 또라이 같아” 노금영과 기식이가 번갈아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니 더 짜증이 나서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는 빵 껍질이며, 휴지 뭉치 같은 것들을 마구 집어 던지고 “악! 아아악!” 괴성을 지르면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지난 1주일간의 수면 시간은 서른 시간 정도. 자정이 되기 전부터 이불을 덮고 드러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고, 두 시간 잠들었다가 다시 깨서 몇 시간을 뒤척이다 다시 한 시간 내지는 두 시간 정도 잠드는 밤의 연속이었다. 부족한 잠을 낮에 보충하면 될 텐데도 해가 떠 있는 낮 시간에는 도저히 잘 수가 없어서 퀭한 눈을 해서는 폐인처럼 싸돌아다니고.
천천히 미쳐 가는 기분이었다. 신경이 뾰족하게 날이 서서 누군가와 가볍게 부딪친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고, 살심까지 치밀었다.
그 와중에도 나민이는 집요하게 전화를 했다. 하신이 놈 병문안을 다녀온 밤부터 문자 내용도 바뀌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이런 내용이 ‘저 힘들어요. 힘들어 죽겠어요. 선생님’ 이따위 내용으로 말이다.
으아아! 끄아악! 머리털 다 쥐어 뽑으며 괴성을 지르면서 소주 광고 포스터가 붙은 문을 향해 귤을 집어 던졌다.
“형들! 놈들 사무실이 습격당했다면서…….”
날아간 귤 두 개는 때마침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동수의 안면을 강타했다. 몇 초 사이의 간격을 두고 날아든 귤에 얼굴을 얻어맞은 동수 놈이 “끄억!” 창자 튀어나온 개구리 같은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으어어어. 나, 나한테 불만 있으면 말로 해요. 말로.”
날아든 귤 두 개에 얻어맞은 신장 190짜리 사내놈이 얼굴을 감싸 쥐고서 끄으응,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미안하다. 동수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내가 갑자기 짜증이 좀 나서 발광하다 보니까…….”
동수가 날아든 귤 폭탄에 정통으로 맞은 한쪽 눈두덩을 감싼 채로 주위를 흘끔 살펴보았다. “아, 짜증이 좀 나서 발광하셨군요” 자기 나름대로 방금 전까지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야, 똥수야. 똘추가 미쳤어. 꼭 무슨 접신한 무당처럼 갑자기 날뛰면서 지랄 발광을 해 대는데.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동추 형, 왜 저렇게 됐냐? 동추 형이 허세기 심하고 성격이 좀, 아주 많이 이상하긴 했어도 저 정도로 미치진 않았었는데.”
노금영과 기식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동수에게 쪼르르 달려가 짹짹짹, 주둥이를 놀려 댔다. 두 놈이 작당이라도 한 듯이 날 보면서 저 눈 풀린 것 좀 봐, 정상이 아냐, 또라이 다 됐어, 이러고 수군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야상 점퍼를 걸쳐 입고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그러고 나가는 걸 보고도 가만있을 동수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곧 내 뒤를 따라왔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쐬며 천불이 끓었던 속을 다스리고 있는 내 옆에 가만히 다가와 선다.
“괜찮아요?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얼굴 꼴이 왜 그래요?”
걱정이 가득 담긴 놈의 낮은 목소리에 목구멍이 꽉 메어 왔다. 그래도 날 걱정해 주는 건 이놈밖에 없다.
“요새 계속 잠을 못 자.”
“호, 호, 혹시 제가 한 짓 때문에 그런 거…….”
“너 때문은 아니니까 안심해라.”
안심하라고 했는데 동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내심 내가 이 꼴이 된 게 자기 때문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모양이다.
“나도 요즘 계속 밤잠을 설쳐요.”
얼른 왜 그러냐고 물어봐. 물어보라고. 눈 말똥말똥 뜨고서 빤히 바라보면서 대놓고 바란다.
“넌 또 왜 그러는데?”
“형 때문에요.”
말똥말똥 눈빛 공격에 마지못해 질문을 던져 줬더니 놈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준비했던 대사를 읊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에 힘 팍 주고서. 난 아예 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놈이 지껄일 소리는 뻔하다.
“매일 밤 꿈에 형이 나와서 섹시한 몸을 비틀면서 날 막 유혹한다고요. 형 때문에 거의 매일 팬티가 흥건히 젖어서 한밤중에 엄마 몰래 빨래하느라고 얼마나 힘든데요. 중학생도 아니고, 이 나이 먹어서 몽정이라니. 잠잘 때뿐만 아니라 밥 먹을 때도, TV 볼 때도, 게임할 때도 하루 종일 형 생각만 나서 미칠 것 같은데 형은 진짜 괜찮아요?”
미안한데 난 네놈 생각할 여유가 없거든. 저번에 그 일은 대수롭지 않은 실수였고, 나민이 덕분에 그때 그 일은 뇌 속 뒷방 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거든.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이 녀석은 ‘너무해요, 너무해요!’ 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자위라도 해서 배출해. 쓸데없이 쌓아 두니까 밤에 그러는 거 아니냐.”
“형!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소리 지르지 좀 마. 나 지금 상태 진짜 별로니까.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나도 너처럼 밤에 네놈 알몸뚱이 떠올리면서 팬티를 적셔야 하는 거냐? 네놈 알몸은 내 취향도 아닐 뿐더러, 정신 나가서 네놈이랑 그런 짓 좀 했다고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을 만큼 순진한 놈도 아냐.”
동수는 말이 없었다. 입술을 쭉 내밀고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멸치 대가리 때문에 그래요? 형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 멸치 대가리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형이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서요.”
“나민이가 너한테? 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형 핸드폰에서 보고 혹시 몰라서 적어 놨대요. 형이랑 같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있다고 했어요. 계속 같이 있었다고 거짓말했어요. 그 새끼가 미쳤는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데요? 왜 네놈이 선생님이랑 같이 있냐고. 제가 무슨 형 남편도 아니고. 갑자기 열이 확 받아서 ‘나 형이랑 사귄다, 우리 지금 동거 중이다, 새끼야!’ 이러니까 그 새끼가 막 욕을 하면서 ‘너 이 새끼 죽여 버린다’ 이러는 거예요. 허! 기가 막혀서!”
기가 막혀서 뒷덜미 잡고 쓰러지고 싶은 건 나다. 수면 부족으로 연두부처럼 흐물흐물해진 골이 웅웅 울렸다.
“제가 그랬잖아요. 그 자식, 양가죽 뒤집어쓴 호랑이 새끼라고. 그게 그 새끼 본성이라고요. 이제 그만 눈 좀 떠요. 눈 크게 뜨고 잘 좀 보란 말이에요. 그 새끼가 어떤 새끼인지.”
동수가 자기 욕하는 걸 근처에서 듣기라도 한 듯 한나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너무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 소름이 끼쳤다. 지금까지 계속 그랬던 것처럼 전화를 받지 않자 곧바로 다른 곳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동수가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드는 걸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액정에 찍힌 번호를 확인한 놈의 얼굴이 화악 구겨졌다. 저 일그러진 표정만 봐도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 알겠다.
“이 새끼, 왜 또 전화질이야? 그래, 옆에 있다. 형이랑 옷 홀딱 벗고 이불 덮고 누워서 맛있는 거 먹고 있다, 왜!”
수화기 너머 상대방을 씹어 먹을 듯이 꽥꽥대는 동수 놈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선생님 바꿔, 당장. 미친 새끼야.]
나민이는 동수 놈 핸드폰을 내가 쥐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욕을 갈겼다.
“동수한테 욕하지 마라. 너보다 형이다.”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내 목소리에 녀석이 허업,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진짜 그 새끼랑 같이 있는 거예요? 그 새끼랑 무슨 짓 했어요?]
“욕하지 말라고 했다. 동수, 너한테 이 새끼 저 새끼 욕 들어먹을 만큼 우스운 놈 아냐.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알았어요. 지금 선생님 댁으로 갈게요.]
“올 거 없어. 집에서 만나기 싫으니까. 40분 뒤에 XX역 앞 카페 2층에서 만나.”
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돌려주려 하자 동수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같이 가 줄까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따위 말을 지껄인다. 난 코웃음을 치며 동수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냈다.
“내가 유치원생이냐? 보호자 대동하고 다니게? 안에 들어가서 금영 형이랑 기식이한테 나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회의에 참석 못 한다고 전해라. 어차피 회의에 한 사람 빠진다고 문제될 것도 없을 테니까.”
두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돌아섰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동수가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요. 그 새끼, 좀 이상해졌어요.”
난 대답도 하지 않고 녀석에게 손만 휘휘 저어 보이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동수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놈은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를 지켜볼 것이다. 외출하는 주인 뒷모습 바라보는 똥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