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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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금영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노금영의 손에서 플라스틱 라이터를 홱 낚아챘다.

“왜 이래? 새끼야.”

놈이 지랄 발광을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손에 든 라이터를 노려보았다.

<우돼지 돼지갈비>라는 상호가 적힌 싸구려 판촉용 라이터다. 난 그때에서야 깨달았다. <우돼지 돼지갈비>라는 상호가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난 분명 이 라이터를 보았다. 아리랑헌터의 가게 이름이 적힌 라이터.

그걸 본 건 나민이의 집 욕실에서였다.

창틀에서 라이터를 발견했을 때부터 ‘담배도 피우지 않는 녀석이 웬 라이터지?’ 싶었다. 녀석의 집을 아지트 삼았다던 박하신이 놔두고 간 건가 싶기도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일이다.

우연일 수 있다. <우돼지 돼지갈비>라는 가게가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참으로 소름 끼치는 우연의 일치 아닌가.

“야, 임똘추. 내놔. 왜 남의 라이터를 빼앗고 지랄이야?”

노금영은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기어이 라이터를 빼앗아 갔다.

“형, 저 라이터가 탐나요? 형 담배도 안 피우잖아요. 내가 다시 가게로 가서 가져다줄까요?”

옆에서 보고 있던 동수 놈이 상호명이 적힌 라이터가 탐나서 그러는 줄 알고 쫑알거렸다.

“그런 거 아냐. 먼저 가라. 난 곧 뒤따라갈게.”

“볼일 있어요? 어디 갔다 가는 거면 같이 가요.”

“눈치 없는 자식아. 애인한테 전화하고 갈 거다. 빨리 꺼져.”

난 그러며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동수의 등짝을 후려쳤다.

놈이 “애, 애, 애인? 허허! 애인!” 콧방귀를 뿡뿡 뀌며 가슴을 탕탕 치든 말든 난 걸음을 늦춰 일행들에게서 벗어났다.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난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전화를 해 보았자 추궁하듯 캐묻는 질문을 퍼부어야 할 텐데. 내 목에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벼 대며 중얼거리던 나민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선생님만은 절 좋아해 주셔야 해요.>

목덜미와 턱에 닿던 녀석의 보드라운 머리칼, 나를 보던 뽀얀 얼굴,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던 애타는 목소리.

꼭 전화를 해서 차갑게 몰아붙여야 하나. 그런 얘기는 얼굴을 보면서 해도 될 텐데. 녀석의 눈을 보고, 녀석의 숨결을 느끼면서 조용히, 나긋한 어조로 물어도 될 텐데. 난 결국 핸드폰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우리들의 아지트인 지하 도살장이 있는 건물 주차장에는 주위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외제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골 빈 재벌 2세 양아치들이나 타고 다니게 생긴 차다. 백단영과 봉이가 타고 온 차이거나 도사 연합 영감탱이가 타고 온 것이리라.

지하실 문을 열자 썩은 악취와 더불어 끼이익, 녹슨 철문이 내지르는 괴성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뻥 뚫린 지하 공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백단영, 봉이, 박천수, 노금영, 동수, 기식이, 아리랑헌터. 그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힙합 패션으로 쫙 빼입은 노인 한 명과 영화배우 뺨치게 생긴 쫙 빠진 미남 한 명.

난 내 시력을 의심했다. 썩은 잡초밭에 웬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냐.

시내에 가도 보기 힘들 멋진 미남 덕분에 우울했던 기분까지 확 밝아졌다. 구석 기둥에 묶인 귀면들의 썩은 면상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저 끝내주는 미남은 누구시래요? 설마 저분도 해결사신가?”

노금영에게 다가가 슬쩍 묻자 미남 본인이 끝내주게 상큼하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김태민이라고 합니다.”

백단영과 봉이를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모두들 저 미남이 김태민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된 모양이었다.

다들 한동안 말을 잃고 생글생글 청량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김태민? 저 기생오라비 같은 새파랗게 젊은 놈이 김태민이라고?

내가 생각하던 김태민은 50, 60대의 돈 좀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의 이미지였다. 물론 눈앞의 저 남자도 돈은 있어 보인다. 다만 너무 젊고 가볍다 못해 경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라 그렇지.

“김태민? 이놈이 김태민이라고? 강남에서 온 호스트가 아니라?”

노금영처럼 노골적으로 비아냥대지는 못해도 사실 모두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였다.

“하하하.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학비 벌려고 호스트 아르바이트 좀 했었습니다.”

심지어 김태민은 성격까지 좋았다. 노금영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돌려 말할 거 없이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 김태민이 아닙니다. 김태민은 제 부친이시죠. 전 김수민입니다. 처음 해결사 사무소에 관에 담긴 임충식의 뼈를 배달 의뢰했던 분은 제 아버지이십니다. 그 뒤, 해체한 뼈를 과일 박스에 넣어 전부 다른 사람인 척 심부름꾼 여러분들에게 배달을 부탁드렸던 것도 아버지 본인이시고요.”

힙합 패션으로 중무장한 노인이 기둥에 묶인 귀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게 보였다.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돌 복장 같은 옷차림을 보건대, 저 영감이 전국도사 연합의 대표일 터였다.

김태민의 아들인 김수민이 찌푸린 얼굴로 귀면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 중이시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나저나 대체 그 뼈들은 어디로 배달하려던 거였어요?”

“아무 데나요. 그냥 그 뼈들을 우리 손에서 떠나보내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애초에 수취인은 없었습니다.”

아…… 하는 짧은 탄식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랬구나. 역시 그랬어. 언젠가 동수가 했던 말이 일시에 떠올랐다.

<형들은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박스를 받을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요.>

동수는 또 이렇게 쫑알거렸었다. 김태민은 상자 속에 든 뼈를 뺏겨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만약 상자 속 뼈가 중요한 물건이었다면 귀면들에게 물건을 뺏긴 우리에게 다시는 일을 의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민은 다시 일을 맡겼다. 뼈를 뺏는 귀면이란 존재가 나타났는데도 말이다.

동수 놈의 말에 따르면 용천 도사가 그랬더란다. 임충식의 뼈를 일반인이 가지고 있었더라면 온갖 악재가 겹쳤을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동수는 김태민이 일부러 뼈를 배달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었다.

그때 우리들은 동수 놈의 생각에 하나같이 공감했다. 아리랑헌터의 말대로 김태민이 임충식의 뼈를 불태워 버릴 작정이었다면 뼈를 배달시킬 이유가 있었겠는가, 하고.

“그럼 우린 결국 받는 사람도 없는 물건을 배달하느라 그 헛지랄을 한 거란 말이군? 일이 실패하면 위약금 물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니미, 당신들 손에서 임충식의 뼈를 떠나보내는 게 목적이었으면 어디 갖다 버리고 오면 되는 일이지. 대체 왜 사람 개고생을 시켜? 당신들은 당신들대로 돈 쓰고.”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면 타인의 도움을 받지도 않았겠지요.”

남자의 그림 같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 드리워졌다. 니코틴이라도 빨아들이고 싶은지 그는 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처음 아버지가 임충식의 뼈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의 병실에서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큰아들인 저희 아버지만 따로 부르시더니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어떤 물건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랍니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김태민이 물건을 찾아왔는데 세상에.

나무 상자에 사람 뼈가 들어 있는 거다. 나무 상자 옆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기분 나쁜 가보의 취급 방법을 적어 둔 문서도 함께 있었다.

상자 속에 든 물건의 정체에 기겁을 한 김태민이 당장 집안 어르신들에게 여쭤보니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으로 “우리 집안이 죄가 많아서……”라고만 하시더란다.

알고 보니 상자에 든 뼈는 100여 년 전 민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동료의 밀고로 열한 명의 심복들과 함께 참수당한 임충식이란 자의 것이었다. 김태민은 임충식을 밀고한 바로 그 집안의 사람이었다.

후일, 배신자의 집안에는 온갖 우환이 끊이지가 않더란다.

임충식을 밀고한 배신자는 술에 취해 저잣거리를 걷다가 칼부림을 당해 객사하고, 그 가족들이 병에 걸려 픽픽 쓰러지고, 가축도 피를 토하고 죽고…….

이러다가 식구들 다 잡겠다 싶어서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더니 임충식의 한 때문에 그렇단다. 남은 식구들이 무당 말대로 임충식의 뼈를 긁어모아 정성 들여 만든 오동나무 함에 넣어 매일같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랬더니 시름시름 앓던 식구들의 병이 낫더란 거다. 굿을 한 무당은 이런 식으로 평생을 임충식의 한을 달래고 어르는 일만이 당신들이 그나마 비명횡사하지 않고 사는 길이라고 했다.

김태민 가문의 그러한 의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김태민은 그의 부친과는 달랐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지 100여 년이나 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상자 속 뼈는 너무도 멀쩡했다. 바로 몇 달 전 죽은 사람의 것처럼 반질반질하고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인 김태민은 평생을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사고를 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실제로도 세상은 그랬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탐구했다. 굳은 신념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왔고 그런 자신의 인생이 김태민은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조상이 지은 죄다. 내가 아니라. 그런데 어째서 조상이 지은 죄를 내가 떠안아야 하는가. 어째서 아직까지 참회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미 지난 일이지 않은가.

100여 년 전 일이다.

1년도, 10년도 아닌 100년 전 일이란 말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사람을 죽인 건 내 조상이지 내가 아니다.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도 비논리적인 일이란 말인가. 아버지는 자식인 나를 위해서라도 이제 이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했어야 했다. 아비가 자식에게 물려줄 게 없어서 이딴 걸 물려주나.

김태민은 나무 함에 든 임충식의 뼈를 받아 온 이후 단 한 번도 기도를 올리지 않았다. 기도를 올리기는커녕 뼈가 든 나무 함을 박스에 처넣어 내다 버렸다.

그때만 해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나무 함의 존재를 잊어버린 김태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오니 아내가 택배가 왔다면서 상자 하나를 건넸다. 송장도 뭣도 붙어 있지 않은 상자였다. 아무 생각 없이 박스를 열어 보았던 김태민은 주저앉을 듯이 놀라고 말았다.

상자에 들어 있던 것은 임충식의 뼈가 든 나무 함이었다.

분명히 버렸을 텐데 어떻게! 김태민은 한밤중에 인근 야산까지 차를 끌고 나가 박스를 버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어김없이 다음 날 저녁 박스는 집 안 신발장 위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매일 같이 박스를 들고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시곤 했다는군요. 아버지가 박스를 들고 나가시면 다음 날 저녁에는 늘 그 박스 하나가 현관문 앞에 놓여 있더랍니다. 꼭 살아 있는 생물이 때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요. 솔직히 전 그때만 해도 두 분이 대체 왜 이러시나 싶었죠.”

김태민의 아들 김수민은 아버지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부모님 집에 찾아갔다. 아버지는 몇 달 새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눈두덩이 깊게 파이고 윤기라곤 하나 없는 피부는 싯누렇게 떠 있었다.

<버려야 돼……. 버려야 돼. 제발 돌아오지 마. 돌아오지 마…….>

김태민은 아들이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눈물 바람으로 아들을 맞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저 상태가 된 게 벌써 1주일째라고 했다.

<버려야 된다니 대체 뭘 말하는 거예요?>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그녀가 박스 하나를 가지고 왔다. 박스 안에 든 건 커다란 나무 함이었다. 이게 대체 뭐기에 아버지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나 싶어서 김수민은 나무 함의 뚜껑을 열었다.

“나무 함에 든 것은…… 사람 뼈더군요.”

김수민은 나무 함을 열어 보았던 당시의 충격이 새삼 떠오르는지 참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더라도 물을 건 물어야 했으니까요. 대체 왜 이런 게 집에 있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떨리는 어조로 다 말씀해 주시더군요.”

“버려도 버려도 다시 되돌아왔다고요?”

“네. 아버지 말씀이 차로 몇 시간 거리의 지방까지 내려가서 버려도, 호수에 빠뜨리고 늪에 빠뜨리고 흙 속에 파묻어도 다음 날 저녁만 되면 돌아오더랍니다.”

“차라리 망가뜨려 보지 그랬어요?”

“그거라고 안 해 보셨겠습니까. 차바퀴로 뭉개 보고, 중장비까지 동원해서 짓뭉개 보고, 불에 태워 봐도 소용없었답니다. 나무 상자에 흠집만 조금 생길 뿐이었다네요. 아버지 대신 제가 갖다 버리고 와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자 속 뼈는 버려도 다시 돌아올 뿐더러 망가뜨릴 수도 없었죠.”

“그래서 우리들 사무소에 배달 의뢰를 하셨던 겁니까?”

백단영이 물었다.

“네. 인터넷에 찾아보니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지 해 주는 데가 있다고 해서요. 그런데 해결사 사무소에선 단칼에 의뢰를 거절하더군요.”

“우린 그런 꺼림칙한 종류의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긴 그렇지요. 다 이해합니다.”

김수민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문득 내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연기처럼 솟아났다.

“그런데 어째서 임충식의 뼈를 관으로 옮긴 겁니까? 처음 상태 그대로 나무 함에 있었더라면 해결사 사무소에서도 배달 의뢰를 수락했을지도 모르는데. 관이라서 더 수상해 보인 거잖아요.”

백단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흘겨보는 걸 무시했다.

“어머니가 어디서 데려온 무당이란 양반이 자기가 가져온 관에 뼈를 옮겨 담아서 굿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람들 수법이죠, 뭐. 그런데 무당이 굿을 하다가 갑자기 시퍼렇게 질려서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습니다.

냉수 한 사발 먹고 정신 차리더니 이렇게 원한 깊은 영혼은 처음이라고, 이런 굿 더 이상 하다가 사람 잡겠다면서 굿도 제대로 해 주지 않고 돈만 챙겨서 내뺐습니다.

그 이후 해결사 사무소에서 의뢰를 거절당한 뒤, 이번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심부름꾼 분들에게 일을 의뢰하고서 우리 식구들은 얼른 미국에 있는 친척 집으로 도피했습니다.”

백단영이 ‘김태민이 외국으로 뜬 게 아니라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더니 진짜로 김태민과 그 식구들은 외국으로 피한 거였다.

“김태민이 해결사 사무소에서 일을 받아 주질 않으니까 뼈를 하나씩 넣어서 우리들한테 배달 의뢰를 했던 거라고 했잖냐. 우리들 생각이 맞아떨어졌구먼.”

노금영은 우리들의 추측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어지간히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노금영이 또 쫑알거리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라, 이놈아!”

새된 외침이 지하실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여 우리들 얘기를 듣고 있던 아리랑헌터였다. 작고 마른 중년 남자는 온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눈에 핏발까지 세워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단지 임충식의 뼈를 다른 데로 옮기려고 그런 짓을 했다고? 네놈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었다고? 네놈들이 그분의 뼈를 훔쳤잖아! 네놈들이 훔친 그분의 뼈를 영원히 불태우려 했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아저씨는 저러다 성대가 다 상하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날카롭게 외쳐 댔다. 김수민은 어이가 없는 듯 눈만 깜빡거렸다.

“대체 이분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뼈를 훔쳐요? 대체 왜요? 뼈를 훔쳐서 뭐에 쓰게요? 그리고 뼈를 불태운다고요?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겁니까? 그게 불에 타긴 해요? 가능한 거라면 그 방법 좀 알려 주십시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아저씨가 급기야 김수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김수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리랑헌터를 제압해 바닥에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달려든 초라한 중년을 메다꽂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섹시한 모습에, 상황의 심각성을 잊고 잠시 시선을 뺏겼다.

“이분이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알려 주실 분 계십니까. 한국어로 지껄이시는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하기에 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상황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하는 건 내 특기다.

“귀면의 존재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네. 저기 계신 백단영 씨가 지금까지의 상황은 대충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둥에 묶여 있는 인간 같지 않은 저게 귀면이란 게 맞죠?”

“네. 보시는 그대로와 같이 저것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시체지요. 즉, 죽은 시체를 살려 놓은 놈들이란 겁니다. 저놈들은 상처가 나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지도 않습니다.”

“차바퀴로 뭉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던 임충식의 뼈처럼요?”

“뭐 비슷하지요. 그런데 저 귀면들을 만들어 낸 도사가 있습니다. 무학 도사라는 영감요. 그 영감이 방금 전 당신이 바닥에 메다꽂았던 저 아저씨네 대빵입니다. 무학 도사가 임충식의 뼈를 가지고 있는 김태민, 당신 부친을 자기 쫄따구들한테 악당이라고 말한 모양이에요. 당신 부친이 임충식의 뼈를 훔쳐서 불태우려 한다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피해자이십니다. 의사로서 평생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왔던 양반이 이 일로 병까지 얻으셨어요.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가 악당이라는 욕을 들어야 합니까? 할아버지도 참 너무하시네요. 물려주려면 재산이나 물려주시지. 줄 게 없어서 그딴 물건을 물려주시나.”

듣고 있다 보면 구구절절한 가정사까지 줄줄 읊을 기세라 얼른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저씨, 아까 이 사람이 하는 얘기 다 들으셨잖아요. 거짓말을 해서 속이는 데 굳이 그렇게 복잡한 사연까지 만들 필요가 있겠어요?”

“사람 하나 속여 먹으려면 그 정도 사연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아리랑헌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아저씨 말대로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칩시다. 임충식의 뼈를 불태워서 없앨 거였으면 왜 뼈를 외부로 유출했겠습니까? 태울 거면 한꺼번에 모아서 태우는 게 더 효율적이었을 텐데요.”

아리랑헌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독기 품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아니, 제발 좀 가져가 주십시오. 아마 머리뼈가 남아 있을 겁니다. 머리뼈는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서 손도 못 댔습니다. 집 주소를 불러 드릴 테니 당장 좀 가져가 주시죠.”

“무슨 속셈이지?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지!”

아리랑헌터가 소리쳤다.

“제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릴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저, 엄청나게 바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이 망할 놈의 일로 제 소중한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요.”

김수민은 품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내 주소를 갈겨써 아리랑헌터에게 내밀었다. 중년 남자가 얼떨결에 종이를 받아 들었을 때. 끼이이이익, 기둥에 묶인 귀면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소리다.

“영감, 그 자식들 조용히 좀 시켜요. 고막 터지겠네. 고막 터지겠어!”

노금영이 온갖 짜증을 내는데도 영감은 짓궂은 사내애처럼 눈앞의 귀면을 이리저리 살피고 찔러 보았다.

“그런데 저것들, 귀면이라 하셨지요? 귀면들은 왜 갑자기 나타난 거랍니까?”

찌푸린 낯으로 귀면들을 쳐다보며 김수민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모두에게 물었다.

“귀면들의 목적은 임충식의 뼈였다면서요? 임충식의 뼈를 빼앗는 게 목적이었다면 할아버지가 뼈를 가지고 계셨을 때 빼앗아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랬다면 지금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지금에야 나타난 걸까요?”

“어어, 듣고 보니 그렇다. 왜 하필 놈들은 지금 나타난 걸까. 임충식의 뼈가 필요했다면 진작 갈취해 갔으면 됐을 텐데.”

귀면이 아까보다는 작은 소리로 온몸을 비틀며 끼이익댔다. 귀면의 울음소리 속에 경박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지금까지는 찾고 싶어도 숨어 있는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게지. 무학이 놈, 아마 지난 7년 동안 좆에 땀 맺히게 찾아다녔을 게다. 낄낄낄.”

전국 도사 연합 대표, 호연 도사가 저속한 욕설을 남발하며 야비하게 웃었다.

“거기 젊은 아가, 임충식의 뼈가 나무 함에 들어 있었다고 했지?”

젊은 아가라는 호칭이 자신을 부르는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 김수민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뒤늦게 아차 싶어 호연 도사의 질문에 답을 했다.

“네, 짙은 갈색의 나무 함이었습니다. 오래된 것인지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긴 했지만 꽤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물건이더군요.”

“잘 만들어진 정도가 아니라 100년이나 버틸 정도면 예술품의 경지에 이른 물건이지.”

“그 나무 함이 100년이나 된 상자라고요?”

“그래. 옛날 네 선조들이 나무 함에 담았던 때부터 줄곧 그 안에 임충식의 뼈가 잠들어 있었을 테니까.”

호연 도사가 끄으응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젊은 애들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노쇠한 육체는 어쩔 수 없는지 무릎 관절이 뚜두둑 뚜두둑 비명을 질러 댔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 구부리고 앉아 있어서 허리까지 아픈지 노인은 허리께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아마 오래전 임충식의 뼈를 나무 함에 봉인한 사람은 동네 무당 나부랭이가 아니라 도력이 높은 도사였을 게다. 워낙에 원통하게 죽은 영혼이라 온갖 악귀가 꾀어들었을 게야. 귀신도 급이 있는데 임충식처럼 원한이 절절한 영혼에는 급수 높은 악귀들이 꼬이게 마련이거든. 그래서 도사는 나무 함 안에 이중 삼중으로 결계를 쳐 두었겠지.

요즘 나오는 밀폐 용기 있지? 이중 삼중으로 밀폐해 줘서 냄새를 막아 주고 국물이 흐르는 걸 막아 주는 그런 거. 그것과 같은 이치야. 도사가 가진 도력을 거의 다 쏟아부어서 나무 함을 완벽하게 봉인하는 데 성공한 거지. 그래서 지금까지 안에 든 뼈의 냄새가 새어 나가질 않았던 거야.

조상이 부도덕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지만 그래도 그 후손들은 조상이 저지른 죄를 끊임없이 참회하며 살아왔는데, 젊은 아가, 네 아비가 어리석은 짓을 해서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만 게다.”

김수민의 낯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청한 무당이 돈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나무 함을 열었고, 결계가 깨진 거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냄새가 사방팔방 다 퍼지게 된 거고. 그게 왜 갑자기 귀면들이 지금에서야 나타난 건가에 대한 답이다.”

“그럼 뼈를 관에 담았던 그때도 기회는 있었잖아요.”

“아마 나무 함이 근처에 있었을 게야. 워낙에 강한 결계를 쳐 놓은 상자라 냄새가 어느 정도 차단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뼈를 상자에 넣어 외부로 내보낸 순간 똥개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든 게지.”

철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아리랑헌터는 사라지고 없었다.

무학 도사에게 임충식의 머리뼈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고 고해바치며 계단을 뛰어올라 갈 게 틀림없었다. 텅텅텅거리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무학 도사한테 임충식의 머리뼈를 줘도 되는 겁니까?”

내 얘기에 백단영이 코웃음을 픽 쳤다.

“누가 그걸 쉽게 내준답니까?”

“그럼 아까 김수민 씨가 적어 준 주소는…….”

백단영과 김수민이 서로 합의하에 손을 써 놓은 건가 싶었건만. 김수민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까 김수민 씨의 집에 갔을 때 가지고 나왔습니다. 호연 도사님께 미리 얘기를 듣고 나무 함에 넣어서 가지고 나왔죠. 아리랑헌터 일행이 그 집에 가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창고 한구석에 나무 함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김수민이 “아!” 하면서 그것을 알아보았다.

시간이 되자 박천수도 합류했다.

늦게 와서 죄송하다며 박천수는 음료수며 맥주 같은 것들을 한가득 가져왔다.

동수가 따로 부모님에게 부탁해 놓았는지 박천수는 미미네 치킨 특제 훈제 치킨까지 가지고 왔다. 박스를 몇 개 엎어 놓아 상을 만들어 그 위에 한 상 푸짐하게 차렸다. 우리들은 각자 박스며, 드럼통 같은 데 앉아 자리를 잡았다.

박천수가 쓸데없이 흥에 겨워 맥주 캔을 들어 올려 “건배!” 하고 외쳤다. 동수네 아버지가 온갖 정성을 다해 구운 치킨 맛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호연 도사도 웃으며 “건배!” 했다. 연말 단합 대회를 방불케 하는 사내들의 소리가 음침한 창고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 덩치 큰 곰이 폐공장에서 찍어 온 영상을 봤다. 무학이 놈, 아주 재밌는 방법으로 귀면들을 보관하고 있더구나. 곰 새끼가 아주 잘 찍어다 줬어.”

호연 도사가 동수를 보며 껄껄 웃었다. 덩치 큰 곰, 동수가 히죽 웃으며 맥주를 호로록 마셨다.

“다들 감탄을 했지. 기발하구나, 기발해, 하면서. 냉동고를 이용해서 그것들을 보관하다니 말이다. 무학이 놈이 어떻게 술수를 부려 귀면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을 했다고 쳐도, 그것들은 계속해서 썩어 가니 말이야. 움직이지 않을 땐 차갑게 얼려야 될 테지. 아니면 썩어 문드러져서 못쓰게 될 테니.”

열한 개의 시체가 든 냉동고가 놓여 있던 폐공장 내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창고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천장에 있던 스프링클러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더니 힘없이 처져 있던 놈들이 다시 팔팔해졌단 말이죠.”

노금영이 치킨 다리를 잡아 뜯으며 말했다.

“그것들은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사람의 피와 고기면 더 좋고.”

“허억! 그, 그, 그럼 그때 그거 혹시 사람 피였어요?”

동수가 마시던 맥주를 턱 아래로 주르륵 흘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 피라는 말에 덩달아 나까지 당황했다.

“그 정도 되는 양의 사람 피를 어디서 구하겠느냐. 아마도 그건 개 피였을 게다. 돼지 피는 귀신들이 싫어하니 그렇고, 개 피야 개 도축장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개고기가 인육과 비슷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노금영이 사방으로 침을 튀기며 그때 폐공장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멋지게 활약했는지를 떠벌렸다.

“내가 거금을 들여서 퇴마 용품을 사 오지 않았더라면 형들은 다 죽은 목숨이었어요.”

동수 놈이 눈치도 없이 끼어들어 지껄였다가 노금영한테 머리통을 얻어맞았다.

“근데요. 영감님이 그러셨잖아요. 무학 도사가 임충식의 뼈를 모으는 이유가 세계 정복, 서울을 초토화하기 위해서라고. 근데 아니던데요?”

“미친놈. 그 말을 진짜로 믿냐? 초등학생도 그딴 개소리는 안 믿겠다.”

호연 도사가 코웃음을 치며 대놓고 노금영을 비웃었다. 노금영의 얼굴이 벌게졌다.

“뻔하지. 그놈이 임충식의 뼈를 모으는 이유는 죽은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서나,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기 똥개들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아닌데요? 임충식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라는데요?”

“그게 그거지. 부활하는 임충식이 썩지도, 망가지지도, 죽지도 않는 완벽한 귀면 그 자체가 될 테니까. 그 미친놈이 어떻게 귀면을 만들어 낸 건지. 잔재주가 많은 놈이긴 했어도 실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호연 도사는 눈앞에 보이는 귀면들을 바라보며 맥주를 들이마셨다. 귀면들은 우리가 생포해 온 그때부터 줄곧 저 상태로 축 늘어져 있었다. 악취를 풀풀 풍기면서 양분도 섭취하지 못하고 썩어 가고 있다. 지하실에 들어온 순간엔 토기가 치밀어 오르게 하던 악취에도 이젠 적응이 됐다.

“너희들 잘 들어라. 무학이 놈은 임충식의 머리뼈를 빼앗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하는 건 너희들이 알아서 잘할 테고, 이거 하나만 부탁하마. 무학이 놈이 허튼짓을 하기 전에 놈을 처리해. 우리들 생각으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무학이 놈이 임충식을 부활시킨다면…… 그땐 모두 다 그 괴물한테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동수는 딸꾹질까지 했다. 잡아먹힌다는 표현보다 ‘괴물’이라는 표현이 더 소름이 끼쳤다.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웃긴 건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열심히 먹고 있다는 거다. 백단영이나 김수민은 배가 부른지 손을 놨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욱여넣었다. 마치 지금 먹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하나 남은 닭 조각을 노금영이 낚아챘고 다들 아쉬운 듯이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철문 밖에서 퉁퉁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깜짝 놀라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기요! 안에 아무도 안 계세요?”

철문 밖에서 들린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동수가 쪼르르 문가로 다가가 문밖 여자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안에 계시네. 문 좀 열어 봐요. 도우미 부르셨죠?”

“아닌데요. 아무도 안 불렀는데요.”

“안 불렀는데 왜 우리가 왔겠어요. 아, 짜증 나. 불러 놓고 웬 내숭이야, 내숭이. 당장 문 열어요. 마음이 바뀌었으면 돈이라도 줘요. 다른 데 갈 수도 있었는데 이리로 온 거니까!”

문밖의 여자가 철문을 발로 차며 짜증을 냈다. 동수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리들을 쳐다봤다. “형들. 어쩌죠? 저 여자들 잘못 찾아온 모양인데.” 동수가 그러는 사이에도 문밖의 여자들은 욕을 하면서 문에 발길질을 해 댔다.

“비켜 봐.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노금영이 닭 소스 묻은 손가락을 휴지에 문질러 닦으며 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봐요. 아가씨들” 하며 문을 연 순간. 우리들은 볼 수 있었다. 문밖에 선 오토바이 헬멧을 쓴 시꺼먼 사내놈들을.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여자들은 사내놈들 뒤에 숨듯이 서 있었다.

“금영 형!”

동수가 외친 순간, 선두에 선 시꺼먼 놈이 삼단봉을 휘둘렀다.

노금영은 짐승 같은 몸놀림으로 부웅, 위력적인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삼단봉을 가까스로 피했다.

헬멧을 쓴 놈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지하 창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난 가장 먼저 의식적으로 아까 임충식의 머리뼈가 들었다던 나무 함이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나무 함은 이미 봉이가 품에 안고 있었다.

박스로 만든 상이 뒤집어졌다. 맥주 캔이며 음료수 캔, 싹 다 뜯어먹은 닭 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추 형! 동수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서 허공에서 은색 막대기 하나가 날아왔다. 헬멧 놈들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삼단봉이었다. 심부름꾼 사람들이 하나같이 들고 있는 걸 보면 박천수가 공금으로 공용 무기를 사 온 모양이었다.

똑같은 삼단봉을 쥔 양쪽 진영이 잠시 대치했다.

“아가, 네놈들은 사람이냐? 귀신이냐?”

백단영이 호위하듯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호연 도사가 헬멧 놈들에게 물었다. 놈들은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아니면 내가 너희들을 귀신으로 생각하고 지옥 불로 태워 버릴 테니 말이다.”

그때 헬멧 놈들 중 하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태워 버린다는 말이 어지간히 무섭게 들린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내 뒤로 피해 있어라.”

호연 도사가 그러며 앞으로 나섰다.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한 왜소한 몸집의 노인네가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헬멧 놈들이 그제야 삼단봉을 높이 쳐들고 호연 도사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노인네가 품속에서 꺼낸 부적을 허공에 휘익 던지며 알아듣지도 못할 주문을 외웠다.

화르르륵.

사방에 엄청난 불꽃이 일었다.

으아악! 끄아악!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들이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헬멧 놈들이 활활 불타오르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놈들의 몸을 불태우던 불꽃은 곧 사그라졌고, 놈들도 멀쩡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연 도사가 부적으로 만들어 낸 불꽃은 귀신은 태워도 사람은 태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노인네의 엄청난 능력이 별거 아닌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란 걸 깨달은 놈들이 삼단봉을 부웅부웅 휘두르며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들은 귀면들이 아니라 별 볼 것 없는 일반인이었다.

공격이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무학 도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귀면들이 아닌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을 보낸 걸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호연 도사가 또다시 불꽃 부적을 쓰기 전 놈들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내게 달려드는 놈들을 빠르게 때려눕혔다. 사람을 태울 수 있건 없건 두 번 다시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타며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들을 상대로 열세에 밀릴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놈들은 미리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뭔가 회색 사과 같은 것이 바닥을 도로록 굴러가는 게 보였다. 그걸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나였다.

“최루탄이다!”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소리를 쳤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순식간에 사방이 매운 연기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최루탄이 굴러가는 것을 눈으로 봤던 난 그나마 얼른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지만,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격하게 기침을 해 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뿌연 연기 속에서 손을 휘저어 가며 출구를 찾았다.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올라 가까스로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멈췄던 숨을 뿜었다. 한참을 눈물을 줄줄 쏟으며 기침을 해도 콧속을 파고들었던 매운 기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망할 놈들. 이젠 하다 하다 최루탄까지 쓰냐. 자기들도 군대에 갔다 왔으니 화생방 훈련의 끔찍함을 몸소 경험해 봤을 텐데.

콜록콜록 기침하는 소리가 계단 아래에서부터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도 그 지옥 속에서 용케 출구를 찾아 위로 기어올라 오는 모양이었다.

지하 창고 바로 위가 기식이네 가게니까 화장실에 가서 세수라도 해야지, 하고 생각한 참이었다. 기척이 느껴졌다. 어떤 기척이라고 딱 표현할 수는 없지만 뒷덜미를 서늘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뒤를 돌아보니 웬 시꺼먼 덩어리 하나가 건물 뒤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난 까만 덩어리의 뒤를 쫓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시꺼먼 인영을 놓친 것은 골목 어귀에 있는 유료 주차장에서였다.

주차된 차들 사이를 방황하며 나는 놓친 인영을 찾아다녔다. 주차장 담벼락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녹색 눈으로 그런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 인간은 왜 이 야밤에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오래된 벤츠와 중형 세단 사이의 비어 있는 주차 공간을 살피던 때였다. 아까 느껴졌던 오묘한 기척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가 뒤에서 손을 뻗어 뻣뻣하게 긴장한 내 목을 조르듯이 감쌌다. 끔찍하게 차가운 손의 감촉에 뒤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 선 존재가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임동추. 내 손길이 그립지 않았어?”

음란한 손길로 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오늘은 또 검은 헬멧을 뒤집어쓴 갈색 가면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 더럽게 그리웠다.”

놈이 내 뒤에 바짝 몸을 들이댔다. 엉덩이 부근에 자기 아랫도리를 밀착하고 다른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꼴로 한다는 소리가.

“오랜만이니 한번 할까?”

미친놈. 이놈은 진짜 나를 죽이고 싶도록 사랑하는 게 맞다. 나만 보면 발딱발딱 세우고서 박아 대고 싶은 걸 보면.

“야, 변태 가면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이름을 가르쳐 주든가. 이름을 가르쳐 줄 때까지 네놈을 변태 가면으로 부른다. 야. 변태 가면. 나 얼마 전에 강원도에 갔었다.”

목덜미를 지나 옷 속으로 기어들어 와 쇄골을 훑던 놈의 손이 움찔 떨렸다.

“이제 이런 말 지겹겠지만, 내가 아냐. 네놈이 들었다던 그놈 목소리. 잘 생각해 봐. 그때 그놈 목소리와 내 목소리가 일치하는지. 그때 놈들한테 머리를 얻어맞은 상태라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서 착각을 했던 걸 수도 있어. 어떤 씹어 죽일 새끼가 나를 사칭해서 네 누나를…….”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놈에게 머리채가 잡혀 벤츠의 차체에 체포당한 범인처럼 몸통째로 짓눌렸다. 놈이 내 머리를 차창에 꽈악 누르며 귓가에 지껄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내가 그랬잖냐. 난 내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새끼야. 화만 낼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그때 그놈의 얼굴을 봤어? 네 누나를 죽인 그놈이 정말 나였냐? 그놈의 목소리가 지금 네놈 귓구멍에 들리는 이 목소리가 맞아? 확실해?”

머리채를 움켜쥔 놈의 손이 약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넌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 내가 너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넌 무의식적으로 네 누나를 죽인 놈이 나라고 믿어 버리게 된 걸지도 몰라.”

“그럼 누가 당신을 사칭한 거지? 누가 당신을 사칭해서 내 누나를 죽인 걸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나오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왜냐면 나도 그 답을 모르니까. 누가 나를 사칭했는가. 무슨 목적으로. 그에 대한 답은 나를 사칭해서 갈색 가면의 누나를 죽인 그 새끼만이 알고 있을 터.

내가 말이 없어지자 놈은 “사람을 회유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최고라니까” 하면서 웃었다.

난 눈을 꿈뻑이며 백미러에 비친 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검은 헬멧을 쓴 놈의 얼굴. 헬멧 속의 공기에 짓눌려 이상하게 억눌린 목소리. 헬멧 속 놈의 진짜 얼굴은 어떨까. 놈의 진짜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나를 사칭한 새끼를 찾아낼 거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그 새끼를 찾아내서 네놈 앞에 대령하마. 찢어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

놈은 코웃음을 치며 자기 아랫도리를 슬쩍 내 뒤에 문질렀다. 남의 엉덩이에 몇 번 대고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딱딱하게 선다. 오랜만이니 한번 할까? 놈이 지껄이던 멍멍이 소리가 떠올라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새끼 설마,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 했다. 놈이 한 손으로 내 바지 버클을 철컥철컥 풀었다. 지퍼를 내려 속옷까지 한꺼번에 쭈욱 잡아 내리는 손길에 거침이 없다.

“하, 하지 마라. 미친놈아. 너 진짜 미쳤냐?”

“내 귀에는 얼른 박아 달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미친놈아. 죽일 새끼야. 하지 마.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윽!”

놈의 손이 엉덩이 살을 쫘악 잡아 벌려 갑작스러운 추위에 고집스럽게 입을 닫은 구멍을 노출시켰다. 난 입술을 깨물며 비어져 나오는 소리를 집어삼켰다. 늦은 시간인 데다 인적이 드문 곳이고, 차와 차 사이의 공간이라 보이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미친 짓이다. 이 미친놈은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더 신이 나서 미친 짓을 더 해 대겠지.

등 뒤에서 찌익, 바지 지퍼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뜨겁고 딱딱한 뭔가가 엉덩이 살점을 때렸다. 놈의 발기한 성기일 것이다. 놈은 발기한 성기를 내 엉덩이 살점 사이에 끼워 넣고 느릿하게 위아래로 문질렀다.

“거짓말만 해 대는 당신 윗입은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도 아랫입은 아주 좋아. 뜨겁고 음란하고 퇴폐적이고…….”

“야, 변태 가면아. 내가 그때도 그랬지. 이런 짓 할 거면 모텔이라도 데려가라고. 날 끔찍하게 미워하지만 끔찍하게 사랑하기도 한다며? 그럼 모텔에 데려가서 제대로 하라고. 네놈 배 속이 텅텅 빌 때까지 박고 싶으면 박아. 새끼, 너 혹시 조루냐? 딱 한 번 넣고 싸면 그걸로 끝…… 윽…….”

느릿하게 구멍 근처를 애무하듯 간질이기만 하던 놈의 귀두가 예고도 없이 푹 꽂혔다. 놈은 일부러 끝까지 넣지 않고 끝부분만 살짝 넣은 채, 갑작스러운 삽입의 이물감에 내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즐겼다.

“더 깊게 박아 줄까? 임동추? 내장 속까지 쑤셔 줄까?”

“미, 미친…….”

끝부분만 들어왔던 놈의 성기가 순식간에 쑤욱 빠져나가더니 구멍이 닫히기도 전에 또다시 푹 꽂혔다. 역시 아까처럼 끝부분만 살짝 집어넣고서 놈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린 구멍 주위를 손가락으로 꾸우욱 눌렀다. 삽입이 된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놈의 것을 받아들이느라 한껏 늘어난 구멍 주위를 건드리니 절로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괴롭다. 그러자 일순 구멍 근육에 힘이 들어갔는지 놈이 하아악대면서 허리를 떨었다.

놈의 것이 다시 한번 빠져나갔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시작임을. 아까와는 달리 놈의 물건은 단번에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내장까지 위로 밀려 올라가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혔다. 터져 나오는 소리를 눌러 삼키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는 터라 코만으로 숨을 쉬려고 하니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어때? 내장 속까지 쑤셔 박힌 느낌이? 끊임없이 조이면서 씹어 무는 걸 보면 꽤나 좋은 것 같은데.”

놈이 내 목을 움켜쥐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게 했다. 등줄기가 휘면서 삽입이 더욱 깊어진 탓에 숨쉬기만 더 괴로워졌다.

“주, 죽어. 새끼야.”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갖은 힘을 쥐어짜 내 딱 두 마디를 씹어 내뱉었다. 놈은 내 표정과 반응에 대단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갑자기 전구가 핏, 나가서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인 걸 보면. 테크닉도 애무도 상대에 대한 배려도 없다. 어느 한쪽의 정욕만 배출하면 되는 섹스다. 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처럼 거짓 신음을 흘릴 필요도 없고, 쾌감을 느끼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 난 그저 괴로워하기만 하면 된다. 날 고문하려고 놈은 이 짓을 하는 거니까.

두꺼운 기둥이 퍼억퍼억 처박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할 때마다 나는 벤츠에 텅텅 소리를 내며 몸을 부딪쳤다. 드러난 성기는 발기하지도 못하고 볼품없이 늘어진 채로 몸이 부딪칠 때마다 덜렁거리며 흔들렸다. 내가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지려 하면 놈이 내 머리를 차체에 짓눌러 고정했다. 엉덩이가 아래로 내려가면 배를 움켜쥐어 다시 엉덩이를 쳐들게 해 쑤셔 넣는다.

놈은 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일부러 구멍만 존재하는 더치와이프 취급을 한다. 나를 고문하기 위해서. 나를 벌주기 위해서.

쓸데없는 반항은 힘만 뺄 뿐이란 걸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은 바 있다. 내 힘으로는 이놈을 못 당한다. 내가 아무리 발악해 봤자 놈은 날 깔아뭉갤 거고 난 결국은 놈 밑에 깔리게 될 거다. 어쩔 수 없이 당하고 있지만 마음까지 짓밟힌 건 아니다.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가까스로 눈을 부릅떠 백미러로 보이는 놈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불쌍한 놈이다. 동정해야 할 놈이다. 하지만 이런 짓을 한 이상 넌 죽는다. 넌 꼭 내가 내 손으로 죽인다, 새끼야.

쉴 새 없이 아래를 쑤셔 대던 놈의 것이 안에서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놈이 내 안에서 쌌다. 내벽이 뜨거운 놈이 싼 뜨거운 액체로 가득 찼다. 놈의 것이 빠져나가자 미처 닫히지 못한 구멍 사이로 놈의 정액이 질질 흘렀다. 구멍이 벌름거릴 때마다 찔끔거리며 쏟아져 나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려 속옷을 적셨다.

“맛있게 잘 먹었어, 임동추. 역시 당신 구멍 맛은 최고야.”

나를 더욱 치욕스럽게 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냈을 경박한 싸구려 말들.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게 쉽지가 않다. 내벽 안에서 놈의 정액을 하나도 남김없이 긁어내기 전까지는 계속 내 귀에 달라붙어 내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할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체액으로 뒤덮인 성기를 휴지로 대충 닦고 바지 안에 쑤셔 넣는 놈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또 한 명의 검은 헬멧이 놈의 옆에 서 있었다. 놈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귀면일 터다.

“널 좀 불쌍하게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다. 그냥 처음 생각대로 네놈을 죽여야겠다.”

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대해라. 죽이기 전에 내 걸로 네놈 구멍도 실컷 쑤셔 박아 줄 테니까. 1주일 내내 시골 창고 어딘가에 감금해 두고서 매일같이 쑤셔 주마.”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하는 말이 우스운가 보다. 어디 한번 보자. 네놈이 기절했다가 눈을 떴을 때, 사지가 결박당해 감금당한 걸 깨달았을 때에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나.

“나를 증오해, 임동추. 내가 당신을 증오하는 것만큼. 나를 증오해 봤자 당신은 결국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할 테고 그러면 그럴수록 당신은 더 괴로워할 테니까. 괴로워서 발광해 봐. 미쳐서 발악해 봐. 사람들이 당신을 떠나도 난 당신을 버리지 않고 거둬 줄게. 당신 말대로 시골 창고 어딘가에 당신을 감금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당신 구멍 맛은 꽤 좋으니까.”

입만 열면 개소리. 이젠 내가 웃을 차례다. 지껄이는 소리가 하도 기가 막혀서 허허허 나왔다. 놈도 웃었다. 두 놈이 미친놈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킬킬거리며 웃는다. 이 미친 꼴을 지켜보는 놈이 귀면 놈 말고 한 놈 또 있었다. 나를 보며 웃던 놈의 검은 헬멧을 뒤집어쓴 머리 위로 둥근 머리 하나가 나타났다. 갈색 가면이 등 뒤의 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린 순간, 놈의 뒤에 서 있던 커다란 몸집의 사내가 주먹을 날렸다. 빠아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놈의 헬멧 쓴 얼굴이 홱 돌아가며 휘청댔다. 헬멧을 쓰고 있는데도 저 정도로 휘청댈 정도면 주먹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 가능했다.

곰 같은 엄청난 덩치의 사내, 한동수는 놈이 휘청댄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공격을 감행했다. 놈도 빠르게 날아든 동수의 주먹을 피하려 했지만 조금 늦었다. 이번엔 헬멧 정면을 얻어맞고 뒤로 크게 휘청대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귀면이 동수의 엄청난 공격에 맥을 못 추고 당하는 갈색 가면 앞으로 나섰다.

동수는 품에서 삼단봉을 꺼내 허공에 휘익 휘둘러 편 뒤, 달려드는 귀면에게 사정없이 휘둘렀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제아무리 귀면이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귀면이 쓰고 있던 헬멧이 박살이 났다. 헬멧이 박살이 난 순간 훤히 노출된 귀면의 머리도 터졌다.

‘동수야, 뒤!’ 하고 외칠 필요도 없었다. 휘청대는 귀면을 발로 차 쓰러뜨린 뒤 동수는 몸을 휙 돌려 동수 놈의 등 뒤에서 공격하려던 갈색 가면에게 삼단봉을 휘둘렀으니까. 동수가 덩치가 커서 몸놀림이 둔할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날아든 삼단봉을 피한 갈색 가면이 손에 든 칼로 동수 놈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갔다. 동수는 몸을 틀어 갈색 가면의 뒷덜미를 치려 했지만, 놈은 빠르게 앞으로 빠졌다.

놈이 손에 든 칼을 보자 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전에 동수가 저 칼에 당했다. 이번에도 동수가 전처럼 쉽게 저 칼에 찔리지는 않겠지만 또 모른다. 실제로 갈색 가면, 저놈은 동수 놈과 비교해서 체격만 좀 작을 뿐이지 어느 것 하나 밀리지가 않는다. 아니, 동수보다 체격이 좀 더 작기 때문에 몸놀림은 더 빠르다.

이러고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속옷과 바지를 대충 끌어 올려 입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갈색 가면의 발이 날아와 내 복부를 쳤다. 내가 휘청대며 다시 주저앉자 갈색 가면이 발끝으로 내 허벅지를 발로 꾸욱 눌렀다.

“형한테서 더러운 뒷발 떼라, 새끼야. 발목을 콱 잘라 버린다.”

“너 임동추 애인이냐?”

누가 내 애인이야. 저놈이랑 나 그런 사이 아냐. 그렇게 말하기도 뭣한 상황인 게 입술을 깨물고 침묵하는 동수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 보였다.

“그런데 어쩌냐. 네놈 애인을 내가 두 번이나 따먹었는데.”

“주둥이 찢어 버리기 전에 입 닥쳐라, 개자식아.”

“근데 댁이랑 종류는 다르지만 어쨌든 나도 이 인간을 사랑하거든? 얼굴만 보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주아주 끔찍하게?”

동수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놈은 눈으로 묻고 있었다. 형, 지금 저 새끼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예요? 난 고개를 약간 내려 놈의 시선을 외면했다.

“너 이 새끼, 동추 형이랑 어떤 관계야?”

“아주 오래전부터 증오와 애정으로 얽힌 관계.”

“개소리야. 저거 다 개소리니까 들을 필요 없어!” 내가 악을 쓰자 허벅지를 누르던 놈의 발이 다리 사이 성기를 꾸우욱 힘을 주어 눌렀다. 급소가 눌리자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넌 알고 있어? 임동추가 어떤 인간인지? 이 인간이 무슨 짓을 한 개새끼인지나 알고 좋아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동수가 벌게진 얼굴로 외치는 나를, 그리고 갈색 가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누나를 죽였어. 임동추, 이 인간이. 네가 나한테서 그렇게나 지키고 싶어 하는 이 새끼가. 우리 누나를 죽였다고, 내 착한 누이를!”

갈색 가면이 피 끓는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뒤이어 소리 내서 웃었다. 동수의 충격받은 표정이 마음에 든 건가. 동수 놈의 얼굴이 저렇게 창백해진 건 오랜만에 본다. 그때 갈색 가면이 휘두른 칼에 찔려 쓰러졌을 때만큼이나 허옇다.

동수가 나를 본다. 이번에는 놈의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놈의 시선을 마주했다. 핏발이 선 동수의 눈이 묻는다. 아주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 묻는다.

어딘가에서 화재경보기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어디서 불이 난 모양이었다. 갈색 가면이 내 다리 사이에서 발을 뗐다. 운동화를 신은 발. 끝이 조금 닳은 청바지. 모자에 털이 달린 카키색 야상 점퍼. 점퍼를 탁탁 터는 희게 질린 손. 학원에 다니던 애들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이다. 대학생들이 자주 입는 복장이기도 하고. 주의 깊게 보려 하지 않아도 바로 눈앞에 있기에 꼼꼼하게 보게 된다.

“네놈 할아버지는 죽을 거다.”

뒤돌아섰던 놈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그때 네놈도 같이 죽여 주마.”

웃지도 않고, 비꼬는 말도 없이 놈은 잠깐 동안 날 쳐다보기만 하더니 곧 뒤돌아서서 귀면과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화재경보기 소리가 계속해서 고막을 뚫을 듯이 울려 퍼졌다. 대체 어디서 불이 났기에 저럴까.

나는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쉽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일어서려 하자 누가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줬다. 동수였다. 얼굴의 창백한 기운은 가셨지만 표정은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 버티고 서자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집에 가서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벗고 놈이 구멍 안에 싸 놓은 체액을 싹싹 긁어내 버리고 싶었다.

동수가 “형……” 하고 운을 뗀 순간 난 얼른 놈의 말을 잘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 말해 줄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말해 줄 테니까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하자.”

그러면서 나는 동수를 데리고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

*

놈들은 우리가 생포했던 귀면들을 불태웠다.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지하에서 우리들이 빠져나간 사이 놈들은 기둥에 묶인 귀면들을 태우고 사라졌다.

그날 밤 들렸던 화재경보기 소리는 우리들의 아지트가 있던 건물에서 나던 소리였다. 다행히 임충식의 머리뼈가 담긴 나무 함은 봉이가 품에 안고 나온 덕분에 뺏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새까맣게 탔다.

지하 창고에 굴러다니던 고장 난 모니터, 컴퓨터 본체들, 박스들, 그리고 귀면들도. 놈들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귀면들을 태운 것일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불태울 수 없었던 놈들이었다. 그 방법은 놈들과 무학 도사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건물 전체를 태울 뻔했다며 기식이는 아버지한테 죽도록 얻어맞았다.

맞아서 팅팅 부어터진 얼굴로 “그래도 나 혼자서 지하실에서 담배 피우면서 야동 보다가 그랬다고 했어요” 이러면서 씨익 웃는데, 다들 의리 있는 자식이라며 기특해했다고 한다.

아예 사건이 있던 그날 밤에 난 노금영에게 최루탄 연기가 눈에 잘못 들어와서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아 동수의 부축을 받아 병원에 갔다고 문자를 보내 둔 터였다. 그렇게 해 둬야 나중에 별말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에 동수에게 모든 걸 얘기해 줬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석진경에 대한 존재.

그 녀석이 군대에 가서 저지른 사건. 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강원도에 갔던 얘기. 식당집 아이를 만나 쓸데없이 과한 친절을 베풀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온 일. 내가 서울에 있는 사이 누가 나를 사칭해 식당집 아이의 누나를 살해한 일. 빼고 더할 것도 없었다. 무슨 얘기를 빼고 어떤 얘기를 더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일 자체가 피곤했다.

<난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너한테 믿어 달라고 강요는 하지 않으마.>

그리고 마지막은 이런 말로 끝을 맺었다. 주스에는 손도 대지 않고서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동수는 말이 없었다.

녀석은 내가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날 보지 않고 장판 바닥만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녀석이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며 물었다.

<형. 그 새끼가 형을 사랑한다는 거, 진짜예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한동수, 이 새끼. 너 설마 아까 희게 질려서 충격받은 것도, 지금까지 무게 잡고 고민하던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냐?

<말해 봐요. 진짜냐고요. 그 가면 쓴 새끼가 형을 사랑한다는 거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주아주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거. 진짜예요? 네?>

대답 좀 해 보라면서 동수 놈은 날 붙잡고 털털 흔들기까지 했다. 그제야 코웃음이 픽픽 터져 나왔다.

갈색 가면이 지금도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 더 우스웠다. 그 새끼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동수 놈이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놈은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할 생각조차 하질 않는다.

동수의 귀에는 갈색 가면이 자기 누이를 죽였다고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을 게 분명하다.

동수에게 중요한 건 나와 갈색 가면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 관계의 유무. 그것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소리는 개소리로 들렸지? 새끼야?>

<형이 죽인 거 아니잖아요. 누가 형을 사칭해서 그 새끼 누나를 죽였다면서요. 그럼 형을 사칭한 그 새끼를 잡아 족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예요? 그건 그거고 빨리 대답해요. 형도 그 새끼 사랑해요? 그 새끼가 형을 사랑하는 것만큼 형도 그 새끼를 사랑하냐고요!>

바람난 남편 추궁하는 아내처럼 집요하게 들러붙어 캐묻는 동수를 발로 쳐서 밀쳐 냈다. 놈은 엎어진 자세 그대로 콧김을 쌩쌩 내뿜으면서 핏발 선 눈으로 날 노려봤다.

<사랑? 미쳤냐? 너 같으면 그딴 새끼를 사랑할 수 있겠냐? 만날 때마다 엎어 놓고 쑤셔 박는 새끼를? 그 새끼가 날 범할 때 어떤 취급을 하는지 아냐? 돈 주고 사는 윤락녀도 그 정도로 험하게 다루진 않을 거다. 그 사이코 새끼는 그냥 복수심에 미쳐서 날 괴롭히는 거야. 내가 가장 괴로워하는 방법으로 날 고문하는 거야.>

그제야 나를 노려보는 동수의 눈에서 독기가 사라졌다. 혼자 멋대로 흥분해서 헐떡거리던 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이 차분해지자 나한테 사과할 생각도 든 모양이다.

<형, 미안해요.>

녀석이 슬금슬금 나한테 다가왔다. 이 자식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다가오나 싶어서 잔뜩 긴장했더니, 다가와서는 흐트러진 무릎 담요를 다시 펴서 내 다리에 덮어 주고, 괜히 어깨도 슥슥 쓸어 주고, 옷매무새도 만져 주고 했다.

그러고는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서 “오늘 밤에야말로 그 새끼 대가리를 박살 낼 수 있었는데. 그 새끼 짖어 대는 개소리에 미쳐서 넋이 나가 버렸어요. 미안해요. 형” 하고 중얼거린다.

<그 새끼 죽이는 건 내가 한다. 넌 나서지 마.>

놈은 이렇다 한 말이 없었다. 바로 앞에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동수의 얼굴은 예쁘진 않다. 선이 굵고 거칠다.

아마 놈이 나이가 들어 아직 풋내 나는 거칢이 좀 더 푹 삭으면 사방으로 진동하는 수컷의 냄새에 수많은 여자들이 꾀어들 거다. 하지만 풋내 나는 지금도 놈은 꽤 멋지다. 이 정도면 자기 입으로 난 좀 멋져, 하고 자랑하고 다녀도 된다.

놈이 얕게 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얼굴을 만지려나 싶었는데 커다란 손으로 내 목을 감쌌다. 평소였다면 발광을 하며 손을 떼어 냈겠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놈의 손이 크고 따뜻해서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나를 바라보는 동수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굳었다. 저절로 눈이 감겨 잠시 무거운 눈꺼풀을 닫은 순간.

입술에 뜨거운 뭔가가 닿았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동수의 입술이었다.

거친 생김새와는 달리 놈의 입술은 부드럽고 말랑했다.

<야. 한동수. 하지…….>

하지 마, 하고 말하려는 순간 벌어진 입 안으로 녀석의 두꺼운 혀가 밀려들어 왔다. 바르작대며 벗어나려 하자, 녀석이 내 목을 감싼 손에 더 힘을 주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밀착된 놈의 몸이 뜨거웠다. 그야말로 절절 끓었다.

녀석이 정신없이 내 입술을 물고 빨며 헐떡였다. 한 손으로 내 다리 사이를 주무르고 문지르며 “형, 혀엉. 하아아” 저 혼자 잔뜩 흥분해 신음을 흘렸다. 입술 살점을 뜯어먹을 듯이 탐욕스럽게 빨고 씹는다. 난 있는 힘을 다해 동수의 얼굴을 밀어내고 뺨을 후려쳤다.

<정신 차려, 한동수!>

기어이 한 대 맞고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녀석이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으아아. 혀어어엉! 죄, 죄송해요. 형이 약해져 있는 틈을 타서 이런 짐승 같은 짓을……. 죄송해요. 제가 미쳤나 봐요!>

<됐다. 꺼져. 새끼야. 꼴도 보기 싫어.>

난 놈에게 깨물린 입술을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혀어엉.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내가 왜 그랬지? 용서해 주세요. 제가 미친 새끼예요.>

<꺼지라고, 좀!>

<진짜 죄송해요! 형, 배고프죠? 밥 해 줄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참치 넣고 김치찌개 해 줄까요? 뭐든 할게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동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정했다.

됐다. 네놈이 내 눈앞에서 꺼져 주는 게 날 위하는 일이다.

아니에요. 형. 내가 뭐든지 해 줄게요. 내가 진짜 형한테 몹쓸 짓을 했어요. 꺼져라. 싫다. 오늘 밤은 옆에서 형을 지켜 주겠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내가 지쳐서 네놈 마음대로 하라고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 야밤에 김치찌개랑 밥을 손수 만들어 대령했다. 배 터지게 먹고 금방 누워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동수 놈은 집에 가고 없었다.

그게 벌써 며칠 전 일이다.

그동안 동수에게선 문자 한 통 오질 않고 집에 찾아와 보지도 않았다. 평소엔 나한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먹을 걸 잔뜩 들고 찾아오거나 했을 녀석이.

아마 며칠 내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방구석을 데굴데굴 굴러다녔겠지. 내가 왜 그랬을까, 이 빙신 같은 새끼. 어쩌자고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아오오! 소리를 지르다가 아줌마한테 슬리퍼로 등짝을 얻어맞고서 낡은 스쿠터를 타고 치킨 배달을 다니고 있겠지.

어차피 평생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조만간 밤일 때문에라도 보게 될 텐데 그때 얼굴 보고 얘기하면 되지.

하지만 문제는 나다. 동수 놈도 예전 같은 태도로 날 대하지 못하겠지만 나도 동수를 더 이상 예전처럼 마냥 철없는 애새끼 보듯 바라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동수 놈은 남자였다. 사고만 치고 다니던 미친 망아지 같은 미성년자가 아니라 어느새 남자가 됐다.

그날 밤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쿵쿵 뛰고 배 속이 근질거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동수 놈을 상대로 이래선 안 되는 거고, 나민이를 위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데. 난 나만 바라보고 나만 좋아하는 그 애에게 몹쓸 짓을 한 거다. 다행히 끝까지 가진 않았고 일방적인 접촉이긴 했지만 외도는 외도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갈색 가면에게 당한 것도 외도가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난 절대로 나민이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거로군.

오랜만에 나민이의 집으로 가기 전, 마트에서 식료품들을 사며 머릿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나민이에게 언젠가 받아 둔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여전히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이다.

사 온 식료품 봉지를 싱크대에 던져두고 방에 들어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좀 추워도 방을 환기하려면 할 수 없다.

시계를 보니 나민이가 슬슬 돌아올 시간이었다.

녀석은 내가 학원에서 잘리자 학원에도 나가지 않았다. 녀석은 학원에 다니던 목적이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으니 더 이상 거기에 쓸데없는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드니 처음 보는 번호가 액정 화면에 떠 있다. 지역 번호로 시작하는 일반 전화라면 스팸 전화인가 싶어 무시하겠지만 이건 핸드폰 번호다. 받아서 스팸 전화면 바로 끊으면 그만이지 싶어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임동추 선생님 핸드폰 맞습니까?]

귓가로 흘러드는 목소리는 아직 앳된 기가 남아 있는 사내놈의 것이었다. 선생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학원에서 가르치던 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는데. 너 누구냐?”

[꼰대, 나야.]

공손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건방진 말투로 바뀌었다. 박하신이다. 그놈밖에 더 있나. 나를 꼰대라고 부르며 반말 찍찍 날리는 놈이.

“하신이냐, 너?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학원에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바로 가르쳐 주데? 근데 꼰대, 학원 관뒀어?]

“그래, 관뒀다. 넌 또 무슨 일이 있어서 나한테 전화까지 하냐?”

[꼰대, 나 병원에 입원했어. 앞니 몇 개 털리고, 갈빗대 나가고, 다리 부러지고, 머리는 터져서 꿰매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어. 눈떠 보니까 아빠가 막 울고 있더라? 눈이 토끼 눈처럼 시뻘게져서. 아빠가 울면서 내가 너한테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내 손을 잡아 주는데 와아, 씨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더라니까.]

“평소에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애들 괴롭히고 다니니까 벌을 받은 거지. 이제부터라도 아버지 생각해서라도 착하게 살아라, 자식아.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한테 당한 거냐?”

놈이 낄낄 웃다가 격하게 기침을 해 댔다. 갈비뼈가 부러진 놈이 기침을 해 대니 얼마나 아플까. “으아, 나 죽겠다. 간호사 누나, 간호사 누나!” 너스콜을 눌렀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은 병원에서도 요주의 인물인지 “박하신 환자님, 그러게 한동안 전화 통화는 금지라고 했지요? 다음에도 이러시면 진짜 핸드폰 뺏을 거예요” 간호사가 낭랑한 목소리로 짜증을 낸다. 참 가지가지 한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안 새랴.

급한 용건 아니면 나중에 자기가 또 전화하겠지 싶어 전화를 끊으려던 때였다. 놈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꼰대가 직접 확인해. 꼰대 보여 주려고 일부러 동영상을 찍어 뒀으니까. 덕분에 동영상 찍은 놈은 수술까지 하고 아직 중환자실에 있어.]

“뭘 확인해? 뭘 찍었는데?”

[나랑 내 친구들이 복날 개 패듯 쥐어 터지는 영상.]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곧이어 동영상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난 대수롭지 않게 메시지를 눌러 확인했다.

핸드폰으로 찍은 동영상인지 화질은 그리 좋지 않았다.

주위는 어두웠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두런두런대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박하신과 놈의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일 것이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가끔 욕설이 들렸고 가래침을 뱉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더러운 새끼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이것들은 왜 꼭 침을 뱉을까.

[온다. 온다.]

그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동영상을 찍고 있는 놈이 장소를 이동했다. 들키지 않게 숨어서 찍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전봇대 아래에 애들 몇 놈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삐딱하게 서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 저편에서 걸어왔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커다란 점퍼를 입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한 사내놈이었다.

모자를 눌러쓴 놈과 박하신과 똘마니들이 얘기를 나누는 듯했다.

박하신이 분명할 놈이 “개새끼야!” 하면서 큰 소리로 욕설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놈이잖아, 이 새끼야!]

뒤이어 박하신이 째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야구 모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저 야구 모자 녀석, 한 대 얻어맞겠다 싶은 순간.

야구 모자가 아닌 박하신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박하신이 주먹을 날리기 전에 야구 모자가 먼저 주먹을 날린 것이다.

[이 새끼가! 너 오늘 뒈졌다!]

박하신과 똘마니들이 악에 받쳐 한꺼번에 야구 모자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은 하나같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고 있었다.

커터 칼이나 과도 같은 걸 꺼내 들었을 테지만 여러 놈이 한꺼번에 휘두르면 꽤 위력적인 무기가 될 터.

야구 모자는 맨손이었다.

하지만 야구 모자는 놀라울 정도로 잘 싸웠다. 잘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격투기를 배우는 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짓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에 비해 박하신이 똘마니들은 쓸데없이 기합만 들어갔다. 그저 우르르 몰려다니며 두들겨 패고 발길질을 해 대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놈들이다.

야구 모자는 순식간에 한두 놈씩 때려눕혔다.

놈들은 가져간 커터 칼로 야구 모자의 손등 한 번 찔러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다. 뻐억, 빠악, 두들겨 터지는 소리만 이어졌다. 아악! 으억!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 소리는 비지엠이었다.

이미 놈들이 무기를 뺏기고 나가떨어졌는데도 야구 모자는 한 놈씩 공을 들여 자근자근 짓밟았다. 쓰러진 놈들의 멱살을 잡아 억지로 잡아 일으켜 두들겨 패고,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발길질을 해 댔다.

얻어맞는 놈들의 입에선 “제발 살려 줘”, “제발 그만둬” 훌쩍거리면서 애원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박하신은 비명 소리를 내지를지언정 절대로 살려 달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결국 피 곤죽이 돼서 죽은 듯이 쓰러져 기절할 때까지도 놈은 야구 모자에게 빌지 않았다.

야구 모자는 박하신이 기절했는데도 놈을 잡아 일으켜 주먹을 쳐들었다. 저 상태로 더 쳤다간 진짜 죽는다.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쟤들은 아직 애들인데. 야구 모자의 가차 없는 잔인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몰래 숨어 영상을 찍던 놈이 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기절한 박하신의 멱살을 틀어쥐고 주먹을 쳐들었던 야구 모자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영상을 찍던 놈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겠지만 영상을 보는 나도 깜짝 놀랐다. 거리가 너무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잔인한 눈빛이 번쩍이는 듯했다.

야구 모자가 박하신을 짐짝처럼 내팽개치고 정면을 향해 척척 걸어왔다.

영상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뒤로 이동했다. 찍는 놈이 덜덜 떨며 뒷걸음질 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야구 모자가 빠르게 뛰어왔다.

놈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야구 모자가 손을 뻗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주 잠깐 야구 모자 아래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으아악! 영상을 찍는 놈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매타작하는 소리가 들려오려던 때.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이웃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경찰 사이렌 소리가 잠시 울려 퍼지더니 “거기, 너희들 뭐 하는 거냐!” 경찰 두 명이 플래시로 비추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야구 모자가 재빨리 일어나는 모습이 찍힌 것을 마지막으로 동영상은 끊겼다.

영상을 다 본 뒤에도 난 손에 든 핸드폰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겨우 몇 분에 불과한 짧은 영상을 본 건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핸드폰을 쥔 손이 약하게 떨렸고 귀에서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내가 뭘 본 거지. 방금 전에 그 얼굴. 액정 화면을 가득 메웠던 그 얼굴. 야구 모자 아래의 그 얼굴. 낯설지가 않았다. 낯설 리가 있겠는가.

그건 바로 한나민의 얼굴이었는데!

설마. 아닐 거야.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하지만 영상을 다시 돌려 봐도, 다시 돌려 보고 몇 번이고 돌려 보다가 야구 모자 아래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찬 순간 정지 버튼을 누르고 눈을 부릅떠서 쳐다봐도.

나민이의 얼굴이었다. 내가 그토록 맑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두 눈은 싸늘하게 빛나고, 날 보며 해사하게 웃던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창백하게 굳어 있고,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생기던 매끄러운 뺨에는 핏방울을 묻힌 채로. 영상을 찍던 놈에게 손을 뻗었다. 그 희고 예쁜 손을. 그놈도 다른 놈들처럼 신나게 두들겨 패서 피 곤죽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핸드폰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손으로 눈을 감쌌다. 이렇게 하면 망막에 저장된 영상을 지울 수 있기라도 할까 봐. 하지만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영상 속의 녀석은 내가 아는 나민이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나민이는 착하고 순진하고 상냥한 아이다. ‘선생님, 좋아해요’ 하면서 수줍게 웃는 애다.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 애인데.

하지만 내 안의 이성은 말한다. 현실에서 도망치려 하지 마, 임동추. 솔직해져라. 너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지 않냐. 한나민이 어떤 본성을 숨기고 있는지. 그래서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았더냐. 녀석을 좋아하지만 난 널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추궁했지 않았는가. 네 본모습을 내 앞에서 드러내 보이라고.

나민이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 마음엔 조금의 의심도 없다. 그랬기에 나민이의 알맹이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책임지고 녀석의 옆에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럼 지금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묻는다.

임동추, 넌 한나민을 사랑하나? 녀석의 본모습이 어떤 것인지 밝혀진 지금도 책임지고 녀석의 옆에 있어 줄 수 있는가?

답을 망설이는 사이. 갑자기 양어깨 사이로 뭔가가 뻗어 나와 내 목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목에 닿는 끔찍하게 차가운 느낌에 난 눈을 번쩍 떴다. 목을 감은 것은 차갑게 질린 하얀 손이었다.

곧 등 뒤에 묵직한 몸뚱이가 닿았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뒷덜미를 간질였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나민이의 달콤한 저음이 귓속으로 감미롭게 스며들었다. 녀석은 어리광을 부리듯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목에 닿는 숨결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내 몸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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