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6.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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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씨발. 더럽게 춥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욕이 튀어나왔다.
똑같이 추워도 서울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강원 산간 지역의 추위를 우습게 여긴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나는 잠시 버스 정류장에 서서 개 떨듯이 오들오들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7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휑하고 삭막했다. 버스 정류장 옆에 서 있는 앙상하게 헐벗은 고목나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7년 전 내가 열흘 정도 묵었던 민박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새로 지어진 전원주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누구세요?”
“죄송합니다. 잠시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이 자리에 있던 민박집이 언제 사라졌는지 알고 계십니까?”
물어볼 말이 있다고만 하면 잡상인 취급받으며 쫓겨날 것 같아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안에서 주인이 문을 빠끔히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난 남자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7년 전의 그 민박집 주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 두꺼비 같은 눈만 끔뻑거렸다.
“내가 몇 년 전까지 이 자리에서 민박집을 하긴 했었는데.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저 혹시 기억 못 하세요? 7년 전 이맘때쯤 사장님 민박집에 있다 갔던 학생요.”
“아, 생태 조사인가 뭔가 하러 왔던 그 학생!”
남자가 그제야 손을 마주쳐 짜악 소리를 냈다.
“학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째 똑같네. 그런데 웬일이에요? 또 뭔가 조사하러 왔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요.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얘기해요.”
남자는 7년 전 스쳐 지나가듯 만났을 뿐인 이방인을 아무 의심 없이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눈처럼 새하얀 털을 지닌 개 두 마리가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차를 끓이러 거실로 사라졌다. 벽에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인자하게 웃고 있는 남자와 푸근한 인상의 여자, 남자를 꼭 빼닮은 젊은 사내 둘. 보기만 해도 행복한 기분이 드는 사진이었다.
집 안을 무심코 둘러보다 구석에 숨어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개 두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어 부르자 녀석들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다가왔다. 집주인만큼이나 경계심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의 보들보들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으려니 남자가 찻잔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나왔다.
“첫째 애가 중국 출장 갔다가 사 왔다는 보이차예요. 어마어마하게 비싼 거라는데 확실히 맛은 좋더라고.”
비싼 차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하고 맛이 깔끔해서 좋았다. 개들은 차와 함께 내온 카스텔라에 눈독을 들이고 코를 대고 킁킁댔다. 남자가 개들을 구석으로 몰아내며 물었다.
“그래, 묻고 싶은 게 뭐예요? 뭐가 그리 궁금해서 이런 추운 때에 여기까지 찾아온 거예요?”
“기억하시죠? 두레 식당집 사내애요.”
남자의 표정이 일순 경직됐다.
“7년 전에 제가 여기서 열흘 정도 묵었었잖아요. 그때 두레 식당집 애가 절 매일같이 찾아왔었고요.”
“그래, 그랬지. 녀석이 학생은 참 잘 따랐지. 그런데 그 애는 왜요?”
“좀 그런 사정이 있습니다. 두레 식당집 애를 만나 봐야 할 일이 있거든요. 두레 식당은 아직 거기 있습니까?”
“식당집은 폐가가 된 지 오래됐어요. 이런 말 하기가 그런데…….”
남자는 뜸을 들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좀 듣고 싶습니다. 제가 식당집 아이를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서요.”
남자가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눈치였기에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을 쫓아냈어요. 그게 벌써 7년 전 일인데.”
“네? 쫓아내요? 왜요?”
“아무 이유 없이 그랬던 건 아니고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요. 그 미친 영감이…….”
남자는 두레 식당집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어느 날, 어린 손자와 딸을 데리고 온 노인이 갑자기 마을에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방치되어 있던 빈집에 눌러앉았다. 노인의 말로는 그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된 집과 땅은 아들 명의의 것이라 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찌 됐든 워낙 유동 인구가 적은 촌구석이라 마을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그들을 반겼다.
하지만 노인은 좀처럼 이웃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가도 문도 열어 주지 않고 돌려보내기 일쑤였고 마을 회의에도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좀 이상했어요. 분위기랄까 그런 것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사람이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그 집 딸도 정신 좀 모자라는 여자였고, 손자란 애도 좀 이상했고. 가족들 모두가 이상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영감 딸은 원래부터 그랬고, 남자애는 영감한테 학대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하던데.”
“그 애가 노인에게 학대를 당했나요?”
“그때 걔를 봐서 알잖아요. 애가 멸치 대가리처럼 비쩍 말라 가지고 눈만 부리부리한 게. 미친 노인네가 애 먹을 것도 잘 안 챙겨 주고 허구한 날 욕을 퍼붓고 구박을 했나 봐요.”
“하긴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랐긴 했었죠. 그 애가 그때, 몇 살쯤이었나요?”
“글쎄요.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어요.”
“혹시 이것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7년 전에 사장님이 그러셨잖아요. 두레 식당집 애가 귀신 볼 줄 아는 애라고요. 그래서 좀 꺼림칙하다고…….”
“그랬나? 뭐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그 녀석은 진짜 귀신을 보는 애였거든. 마을 사람들이 애가 불쌍해서 챙겨 주려고 다가갔다가 다 진저리를 치며 떨어져 나갔던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일순 엄마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남편 없이 자식 셋 키우는 여자였어요. 애 키우는 여자다 보니 비쩍 말라서 빌빌대는 그 집 애가 불쌍했겠지.
그래서 어느 날 먹을 걸 잔뜩 싸 들고 그 애 집에 찾아간 적이 있대요. 그런데 그 애가 일순 엄마의 어깨 너머를 보면서 ‘덕일이라는 아저씨가 아줌마한테 애들 잘 키우며 잘 살래요. 그리고 생일 축하한대요’라고 했다는 거야. 일순 엄마의 죽은 남편 이름이 덕일이거든. 그리고 마침 그날이 일순 엄마의 생일이었고. 그 얘기를 들은 일순 엄마는 싸 들고 간 음식들을 내팽개치고 부리나케 도망쳤대요.”
식당집 아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민박집 주인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었던 건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영감님 식구를 쫓아낸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 집 영감이 제대로 미친 짓을 했거든.”
“미친 짓이라니요?”
“학생 서울로 올라가고 얼마 뒤에 그 영감의 딸이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어요.”
“그게 언제입니까?”
“으음, 그게 언제더라. 학생 서울로 올라가고 나서 얼마 뒤였는데.”
그때 마침 현관문이 열리더니 백발이 성성한 노파 한 명이 집 안에 들어섰다.
“엉? 누구시냐?”
“예전에 우리 민박집 할 때 잠깐 머물다 갔던 사람이에요. 왜 있잖아요. 한겨울에 생태 조사인지 뭔지 하러 왔던, 서울에서 왔다던 대학생요. 그런데 어머니, 언제였지요? 두레 식당집 영감네 딸이 죽은 날이요.”
“2월 5일이었잖아. 그다음 주가 설 연휴였던 때라 정확히 기억한다.”
2월 5일. 난 7년 전 1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이곳에 머물렀다.
“여하튼 딸이 그렇게 되고 나서부터 원래도 좀 이상했던 영감이 홱 돌아 버렸어요. 매일 밤마다 야산을 누비고 다니면서 비석도 없이 버려진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어요, 그 미친 영감이.”
“나라도 그런 일을 당하면 제정신으론 못 살았을 거다. 딱한 늙은이.”
노파가 우리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계속 대화에 끼어들 생각인지 노파는 아예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분이 그런 짓을 한 이유가 뭐랍니까?”
“죽은 자기 딸을 살리고 싶어서라나. 영감님 왜 이러시냐고,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리냐고 했더니 아니래. 그런 방법이 있대요. 다들 영감이 딸 잃고 노망이 난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말이야.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그다음부터였어요. 영감이 잠깐이나마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영감이 갑자기 그 끔찍한 짓 하는 걸 관뒀는데 정작 사건은 그 이후에 터졌죠.”
남자의 목소리가 저절로 가라앉았다. 마치 엄청난 중대 기밀을 말하는 분위기라 덩달아 나까지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심마니들이 산에서 엄청나게 끔찍한 걸 봤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거예요. 글쎄 어떤 사내들이 산속에서 무리를 지어 앉아 있기에 뭘 하고 있나 봤더니 들짐승을 잡아서 먹고 있더래요.”
“들짐승을 잡아먹는 게 왜 이상한 겁니까? 다른 사람들도 산에 가면 토끼나 꿩 같은 걸 잡아서 먹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그래도 불에 익혀 먹거나 요리를 해서 먹잖아요. 그런데 그 사내들은 잡은 짐승을 산 채로 씹어 먹고 있더란 거야.”
귀면이다.
심마니들이 산에서 봤다는 사내들의 무리는 귀면들이 분명할 터였다.
“그 영감이 무덤에서 파헤친 시체를 살려 낸 거라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노파가 또 예고도 없이 끼어들었다.
“어머니, 대체 왜 이러세요? 그 영감이 신도 아니고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려 내요!”
남자는 언성을 높여 신경질을 냈다.
“죽었다 살아난 시체들은 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먹어. 생전에는 인간이었을지 몰라도 부활한 시체는 그냥 악귀가 되어 버려. 처음엔 들짐승을 잡아먹지만 나중엔 사람도 잡아먹어, 그놈들은.”
“어머니, 제발 좀 그만하세요!”
“시끄러워, 이놈아. 총각도 이놈처럼 내 얘기를 헛소리라고 생각하면 이제부터 입 다물고 있을게.”
“아뇨. 더 듣고 싶습니다. 어르신이 없는 얘길 만들어 내실 분 같진 않아 보이시는데요.”
“이것 봐. 이 총각은 내 얘기를 더 듣고 싶다고 하잖아. 듣기 싫으면 넌 주방에 가서 과일 좀 가져와라.”
남자가 아이고, 아이고 미쳐, 하며 가슴을 팡팡 치며 일어섰다. 개 두 마리도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 주방으로 사라졌다.
“내가 어렸을 때였어. 윗동네 사과나무 집에 살던 아기 엄마가 있었거든. 마을 청년들처럼 그 집 아저씨도 전쟁터에 끌려갔어.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거든. 끌려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와도 아줌마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지.
다들 아줌마한테 남편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죽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아저씨가 돌아온 거야.
거지꼴을 하고 있긴 했어도 그게 뭐 대수였겠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돌아와서 반갑고 기쁘긴 한데 어째 살아 돌아온 아저씨가 좀 이상한 거야.
사람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고 영 매가리가 없는 게 바람만 불어도 픽 쓰러질 것 같았지. 아줌마는 먹고살기 위해서 산에서 캔 약초 같은 걸 장에 내다 팔아 근근이 식구들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어. 그러던 어느 날, 아줌마가 장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집 안이 너무나도 조용하더라는 거야. 늘 아기가 울고 보채는 소리가 동리 밖까지 들려오곤 했었는데.
집에 들어섰는데 주위에 꼭 소나 돼지 잡은 뒤에 나는 피비린내 같은 게 나더래. 방 안에선 쩝쩝거리며 뭔가를 먹는 소리가 들리고. 아줌마가 여보, 나 왔어요, 하면서 방문을 연 순간 아줌마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실성해 버리고 말았대. 방 안에서 남편이 아이를 씹어 먹고 있었다는 거야.”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전쟁터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50년대 이야기다. 그 당시에도 귀면은 존재했던 것인가.
“어머니 얘기는 곧이곧대로 믿을 거 없어요. 어머니가 직접 보신 것도 아니고 어른들한테 들은 얘기라니까. 워낙 그 당시엔 세상 전체가 뒤숭숭하다 보니 온갖 잡스러운 소문들이 나돌곤 했을 거예요.”
남자가 귤을 한 바구니 담아 가지고 와 아까 앉았던 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럼 넌 산 채로 짐승을 잡아먹는 그놈들을 뭐라고 생각하냐? 넌 가까이에서 그놈들을 본 적이 있잖아.”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셨습니까?”
바구니에서 귤 하나를 집어 들고서 물었다.
“예전에도 집 뒤에서 개 두 마리를 키웠었거든요. 텃밭에 나갔다 왔는데 개 한 마리가 집 밖에서 컹컹 짖고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웬 시꺼먼 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개집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우리 집 누렁이를 잡아먹고 있더라고요.”
“산 채로요?”
“네, 산 채로요. 소리까지 내면서 야무지게 씹어 먹고 있었어요. <동물의 왕국> 보면 사자 같은 맹수가 들짐승을 잡아서 으득으득 소리를 내면서 먹어 치우잖아요. 들키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숨어서 쳐다봤었죠.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오금이 다 저려요.”
남자의 민박집은 두레 식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민박집에서 보면 두레 식당이 올려다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식당집 꼬맹이가 와서는 그놈을 데리고 나가는 거예요. 개를 산 채로 먹던 놈이 순한 양처럼 꼬맹이가 가자고 하는 소리에 일어나서 따라가고. 어디로 데려가는가 싶어서 몰래 따라가 봤더니 두레 식당집 지하 창고로 데려가 안에 가두고 문을 잠그데요? 문고리는 두꺼운 쇠사슬을 감아서 자물쇠로 잠갔고요.”
폐공장에 귀면들을 보관했던 것처럼 무학 도사는 자기 집 지하 창고에 놈들을 가둬 뒀을 것이었다.
“그놈의 얼굴은 보셨습니까?”
“아뇨. 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 몸에 상처라도 있는지 얼굴이며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 부위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더라고요.”
“대체 왜 그 노인은 그런 놈들을 지하 창고에 가둬 뒀을까요?”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그 이유를 모르니 더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그냥 이상한 사람들도 아니고 들짐승을 잡아먹는 미친놈들을 왜 지하 창고에 가둬 놔요? 그 사람들이 무슨 가축도 아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한테 제가 본 사실을 전했어요. 그리고 마을 이장 대표로 나서서 그 영감에게 마을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통보했어요. 영감은 자기가 이 마을에서 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 버티고, 마을 사람들은 지금 당장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리치고, 한데 뭉쳐서 언성을 높여 싸우다가 영감이 다치고…… 완전히 개판 5분 전인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날 밤, 영감을 떠밀어서 다치게 했던 마을 사람이 괴한에게 피습당했어요.”
“그 집 지하 창고에 갇혀 있던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던 사내들 짓이었습니까?”
“부상당한 사람이 말하길 주위가 어두워서 잘 보진 못했다지만 인상착의가 그렇다네요.”
“그래서 그 이후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요. 마을 사람들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그 집에 쳐들어가 지하 창고에 들어갔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식당 같은 데서 쓰는 업소용 냉장고 몇 대만 놓여 있고. 그동안 마을에서 없어진 닭이며, 개며, 고양이며. 먹다 남은 동물 사체들만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요.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게 여겨서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알아요?”
귀면들이었겠지. 무학 도사는 그 당시 식당을 하고 있었으니 업소용 냉장고 몇 대씩을 들여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체였어요, 시체! 영감이 무덤에서 파헤친 시체들을 냉장고 안에 보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냥 시체가 아니라니까. 살아서 움직이는 시체지. 그놈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가축들을 잡아먹었던 거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목에 핏대까지 올려 흥분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노파가 심드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결국 그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합심해서 영감네 식구를 마을에서 쫓아냈다, 이 얘기였다. 하지만 무학 도사는 쫓겨난 게 아니라 제 발로 나간 거다.
죽여도 죽지 않는 최강의 부하들을 거느린 노인이 뭐가 무서워서 마을 사람들이 쫓아낸다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겠나. 더 이상 이 마을에 머물 이유가 없으니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떠난 것이겠지.
“그 노인이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었나요?”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물어볼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하루라도 빨리 어디론가 사라져 줬으면 싶었는데. 가축을 잡아먹던 미친놈들이 언제 홱 돌아 버려서 마을 사람들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남자는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시체가 가축들을 잡아먹던 미친 종자들과 같은 존재란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하긴 그렇다. 살아서 움직이는 시체 따위는 절대로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믿고 사는 게 속 편한 일일 거다.
나는 얘기 잘 들었다고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지기 전에 두레 식당이 있던 곳을 둘러봐야 할 터였다.
“아마 임동추라는 깡패 새끼가 있는 곳으로 간 걸 거야.”
현관 앞에 걸터앉아 신발을 꿰어 신고 있는데 노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속을 후벼 팠다. 내 어깨가 움찔했다. 심장이 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았다.
“영감 딸을 죽인 게 임동추라는 서울에서 온 깡패 새끼라고 하더라. 그놈을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라고 하던데.”
“어머니, 그건 또 어디서 들은 소리예요?”
“그 집 애한테 직접 들은 얘기야. 영감이 미쳐서 야산으로 싸돌아다닐 때 그 집 애가 우리 집에 쌀을 빌리러 왔던 적이 있잖아.”
“아, 들은 적 있어요. 그때 어머니가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면서요?”
“애가 무슨 죄겠어. 졸지에 누나 잃고 유일한 보호자인 할아버지는 미쳐서 저러고 다니고. 꼭 피난민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진 꼴을 해 가지고는 먹고살아 보겠다고 남의 집에 구걸을 하러 왔는데 어떻게 쌀만 달랑 들려 보내? 그래서 얼른 밥을 해 먹였지. 사실은 그전에도 너 없을 때 종종 밥 해 먹여서 보냈어. 네가 그 애를 하도 싫어해서 말이다.”
“그거야 걔가 워낙 이상했잖아요. 입만 열면 무서운 소리를 해 대고.”
“밥을 먹여 줘서인가 걔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말하더라고. 자기 누나를 죽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어르신, 그 애는 왜 임동추라는 사람이 자기 누나를 죽였다고 생각한답니까? 직접 봤다고 합니까?”
그렇게 묻는 내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들었대.”
“무슨 소리를요?”
“누나랑 슈퍼에 가려고 길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봉고차 한 대가 오더래. 갑자기 웬 남자들이 뛰어나와서 자기랑 누나를 차 안에 억지로 태우고 어디론가 데려가더라는 거야. 놈들한테 얻어맞고 잠시 기절해 있다가 전화벨 소리를 듣고 깨어났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이 ‘네, 임동추입니다. 일은 잘 해결됐습니다’라고 하더래.”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그럴 수밖에. 사내애와 그 누나를 납치한 건 내가 아니니까.
대체 누군가, 내 이름을 사칭한 그놈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 이름을 사칭해 그런 짓을 벌인 것인가.
“그 어린 것이 눈에 독기를 품고 그러더라. 누나를 죽인 그 자식을 죽여 버리겠다고. 두레 식당집 영감도 그 사실을 알게 됐을 테고, 딸을 죽인 놈들에게 복수하러 갔을 거야. 어쩌면 임동추라는 그놈은 이미 죽은 목숨인지도 모르지.”
그 임동추라는 놈이 자기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노파는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 밖으로 나와 두레 식당이 있던 곳을 향해 올라가는 발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발끝에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두레 식당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집 안의 유리창은 그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게 없었다.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했고 야트막한 담장은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방문이며 대문은 누가 떼어 간 모양이었다. 달랑 하나 있는 방 안에는 신문지며, 걸레짝이 된 옷가지들, 이불 뭉치들이 나뒹굴었다. 이 집 사내애가 사용했을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어디서 주워 온 게 분명할 전래 동화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콩쥐 팥쥐>, <혹부리 영감>, <선녀와 나무꾼>. 그 옆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것은 <탈무드>다. 어린애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나 있었을까. 책장을 펼치자 바짝 마른 네 잎 클로버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형, 이거 받아.>
이 집 아이는 날 보면 말린 네 잎 클로버 잎을 내게 불쑥 내밀곤 했었다. 내가 그걸 받고서 “행운의 네 잎 클로버네. 고맙다” 하고 좋아하는 척해 주면 사내애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 수줍게 웃곤 했다.
문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웬 누런색 똥개 한 마리가 코를 킁킁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서 집 밖으로 나갔다. 개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대며 지하실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계단 아래에 있는 것이 무학 도사가 귀면들을 보관하던 지하 창고일 터다.
“총각!”
외쳐 부르는 소리에 난 고개를 쳐들었다. 민박집 노파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총각! 핸드폰 놓고 갔어!”
노파는 핸드폰을 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제야 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맙습니다. 핸드폰을 놓고 온 줄도 몰랐네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가까이 다가선 노파에게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이 집 꼬마 애 말이야. 총각이 서울 올라가고 나서도 한동안 매일 아침마다 우리 집 앞을 기웃댔어.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서 ‘서울 형아, 왔어요? 서울 형이 꼭 다시 돌아와서 나 서울로 데려가 준댔는데’ 이러더라. 그 애한테 그런 약속을 했었어?”
“네.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하니까 애가 가지 말라고 끈질기게 달라붙어서요.”
“뭐 하러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애라 총각이 친절하게 대해 주니까 완전히 마음을 연 모양이던데. 어른들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몹쓸 짓이 애들을 상대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거야.”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서울로 올라간 뒤에 워낙 바빠서 목 빠지게 절 기다리고 있을 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하긴 총각한테 무슨 잘못이 있어.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어린 손자를 방치한 영감이 나쁜 거고, 깡마른 사내애가 늘 굶주린 채로 마을 여기저기를 쏘다녀도 수군대며 피하기만 했던 어른들이 나쁜 거지. 아무도 그 불쌍한 애를 보듬어 품어 주질 않았지. 나도 할 말 없어.”
지금처럼 뼛속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 때. 산에서 마주쳤던 헐렁한 스웨터 차림에 낡은 운동화를 신은, 창백하고 비쩍 마른 사내애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혼자서 마을 회관 옆에 쭈그려 앉아 놀던 가느다란 뒤태가 떠올랐다.
친구 하나 없이 그 추운 날에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녀석.
내가 건넨 초코바를 쪽쪽 빨아 먹던, 각질이 일어나다 못해 터져서 피딱지가 말라붙은 작은 입술. 발갛게 튼 뺨. 얼굴의 반을 덮고 있던 덥수룩한 머리칼.
아이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숲속 풍경처럼 희미한 잔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르신, 혹시 그 아이 사진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찾아보면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뭐였지요?”
“걔 이름은 아무도 몰라. 걔 할아버지도 걔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야, 이놈아, 이런 식으로만 불렀거든. 이름을 물어봐도 대답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그 애 사진이 있는지 찾아봐 줄까?”
“급한 일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가 봐야 돼서요. 그 애 사진을 찾으시면 연락 좀 부탁드립니다.”
당분간 백수 신세가 된 참에 그동안 미뤄 왔던 강릉행을 결행한 오늘 아침, 박천수에게서 단체 문자가 날아왔다. 오늘 밤 도사 연합 양반들께서 그때 잡은 귀면들을 보러 오기로 했으니 웬만하면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지하 도살장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도 없었다. 두레 식당은 폐허가 되어 있고, 대충의 이야기는 떠벌리기 좋아하는 옛 민박집 사장에게 사정을 들은 상태다.
나는 노파의 핸드폰 번호를 물어 그쪽으로 전화를 했다.
“제 전화번호가 어르신 핸드폰에 찍혀 있을 거예요. 그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노파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선 채 황폐해진 두레 식당 터를 바라보기만 했다.
“총각도 내가 미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네?”
“시체가 살아서 움직인다, 어쩌고 했던 얘기 말이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파는 허리가 아픈지 주먹 쥔 손으로 허리께를 통통 두들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를 만나게 되면 꼭 좀 전해 줘. 최고의 복수는 상대를 용서하는 거라고.”
스스스, 스스스, 음산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흩날린 나뭇잎이 발끝을 스치고 날아갔다. 지하 창고로 내려가 보기 위해 발걸음을 뗐을 때였다.
뭔가 발목을 움켜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뜩한 기운에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었다. ‘형. 형아. 서울 형아’ 하고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는 듯해서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보이는 건 메마른 겨울바람에 말라붙은 황폐한 풍경뿐이다. 주위를 어슬렁대며 냄새를 맡던 똥개만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동수 놈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퇴근 시간이라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워낙에 큰 놈이라 놈의 머리가 바글대는 사람들 틈 속에서 비죽하게 솟아 나와 있었다.
놈이 벽에 기대선 나를 발견하고는 헤벌쭉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형! 형! 형! 헤헤, 형!’ 하면서 미친 듯이 펄떡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똥개 같다.
“어. 형, 어디 갔다 왔어요?”
가까이 다가온 놈이 내가 메고 있는 가방을 보더니 물었다. 혹시 몰라 아침에 가방을 둘러메고 출발했던 거다.
“잠깐 강릉에 갔다 왔다.”
“강릉엔 왜요? 오늘 학원 안 나갔어요?”
“강릉에 숨겨 놓은 애인 만나러 갔다 왔다. 그리고 나 백수 됐어, 자식아.”
“어어억! 진짜예요? 진짜 강릉에 애인 숨겨 놨어요? 그럼 멸치 대가리는 뭔데요? 그 자식은 현지처야? 형 양다리 걸치고 있는 거예요!”
놈의 귀에는 백수 됐다는 말은 들리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오, 이 자식아. 농담을 다큐로 받아들이지 좀 마!”
짜증이 확 치밀어서 호들갑을 떠는 놈의 머리통을 빠악 후려쳤다.
“진짜 농담이에요?”
“그럼 진짜겠냐? 빙신아. 넌 인마, 형이 백수 됐다는데 위로는 못 해 줄망정 개소리나 하고 있냐?”
“어…… 형. 백수 됐어요? 뭐야? 학원에서 잘린 거예요?”
“내가 스스로 사표 쓰고 나왔는지도 모르는데 왜 꼭 잘렸다고 확신을 하냐?”
“잘린 게 뻔하지, 뭐. 형 성격에 잘도 학원 선생 노릇하고 산다 싶었다니까요. 근데 왜 잘렸어요? 멸치 대가리랑 연애하다가 딱 걸렸죠? 그렇죠?”
“생각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내가 남한테 들킬 정도로 그렇게 허술하게 행동했을 것 같냐?”
“역시 멸치 대가리랑 연애하는 거 맞네! 맞아!”
“이름이 있는데 왜 자꾸 걔를 멸치 대가리라 불러? 그리고 걔, 멸치 대가리라 불릴 정도로 마르진 않았어. 벗겨 보면 의외로 튼실하다.”
“버, 버, 벗겨 보면? 벗겨 보면? 으아!”
지랄 발광을 한다, 아주.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동수 놈에게서 슬쩍 몇 발짝 떨어졌다.
“그 자식이랑 자, 잤어요?”
비장하게 일그러진 동수 놈의 옆얼굴을 보자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래, 잤다. 사귀는 사인데 뭐가 문제야?”
“어린애랑 그러는 거 범죄 아니에요!”
“이 새끼. 입 못 닥쳐? 누가 들으면 내가 미친 변태 새끼인 줄 알잖아. 그리고 난 걔한테 먼저 손 안 댔다. 오히려 걔가 나한테 먼저 손댔지.”
나를 바라보는 동수 놈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놈은 성난 황소처럼 콧구멍을 벌름벌름대며 콧김을 쌩쌩 내뿜었다.
“그 새끼가 형을 더, 더, 덮쳤어요?”
“뭐 덮친 것까진 아니지만 걔가 나한테 먼저 손을 댄 거긴 하지.”
아오! 형! 갑자기 옆에서 빽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고막이 지잉 하고 울렸다.
“왜 갑자기 소릴 지르고 난리야!”
“형은 쫀심도 없어요? 형이 뭐가 모자라서 그 비린내 풀풀 나는 건어물 자식한테 대 줘요, 대 주길! 또 그 새끼는 거시기에 털도 제대로 안 난 새끼가 감히 누구 엉덩이를…….”
난 얼른 놈의 뚫린 주둥이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놈이 욱욱대며 긴 팔을 붕붕 휘저었다. 그대로 놈을 끌고 근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형, 진짜 너무해요.”
건물 입구 문을 닫고서야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어 주니 시뻘게진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울먹거린다.
“그런 젖비린내 나는 새끼랑 비교해 봤을 때 내가 더 몸도 좋고 아랫도리도 실해 보이지 않아요? 나 남는 건 체력뿐인데. 나라면 형이 기절할 때까지 해 줄 수 있는데.”
남는 건 체력뿐인 건 나민이도 마찬가지더라. 그 녀석도 한번 하면 사람 기절할 때까지 해 댄다. 그리고 나민이 녀석, 의외로 아랫도리도 실하다니까? 아랫도리 크기는 딱 그 정도가 좋아. 그것보다 더 크면 어떻게 감당하라고. 이런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하고 입으론 한숨만 푸우욱 내쉬었다.
“개소리 좀 그만해라. 이건 아랫도리 크기나 테크닉 문제가 아니잖아. 난 걔를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좋았던 거야. 걔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랫도리를 잘라 버렸을 거다. 너도 내 성격 잘 알잖아.”
“어떻게 내 앞에서 좋아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형, 진짜 잔인한 거 알아요?”
“야, 울지 마. 울면 죽여 버린다!”
목에 핏대를 세워 호통치기가 무섭게 놈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 자식은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게 생긴 놈이 왜 저렇게 눈물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귀엽지 않은 게 내 탓인가. 태어날 때부터 이런 꼴로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요. 왜 형은 귀엽고 젊은 애만 좋아해요? 내가 귀엽진 않아도 젊잖아요. 나도 영계잖아요. 귀여운 거 말고 멋지고 야성적인 남자 취향으로 좀 바꿔 봐요. 귀엽고 보송보송하기만 한 게 뭐가 좋다고.”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는데도 저놈의 입은 닫히는 법이 없다. 그리고 저 자식, 자기 입으로 자기가 멋지고 야성적인 남자라고 자랑하는 것 좀 봐라.
“나민이가 귀엽고 보송보송해서 좋아하는 거 아니다. 걔가 나이는 어리지만 남자다운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애야. 아주 오랜만이야, 이런 기분. 한 사람한테 푹 빠져서 미쳐 버릴 것 같은 이 기분.”
남은 오랜만에 찾아온 정열적인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며 흐뭇해하고 있는데 옆에선 “흐어어어엉!” 하고 목 놓아 운다.
“누가 죽기라도 했냐? 왜 이래? 미친놈아!”
“나도 처음인데.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거 처음이라고요.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던 영숙이한테 고백받았을 때도 거절했고, 여자애들이 손바닥만 한 미니스커트 입고 앞에서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나한텐 형밖에 없었어요. 몇 년째 형만 좋아했다고요.”
“야, 한똥수. 나랑 잘래?”
놈이 축축하게 젖은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결국은 너 나 못 따먹어서 그런 거잖아. 너랑 한 번 자 주면 포기할래?”
내가 듣기에도 황당한 개소리인데 듣는 쪽은 어떨까. 동수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히끅히끅 딸꾹질을 해 댔다.
“응? 한 번 자 줄까?”
“싸나이의 순정을 이런 식으로 더럽히지 마세요!”
그제야 놈이 꽤액 소리를 지르며 반응했다.
“왜? 싫냐?”
“시, 싫은 건 아니고. 물론 형이랑 하, 하고는 싶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 자식이랑 형이랑 사귀는 중이잖아요. 만약 지금 나랑 형이 그, 그런 짓을 하면 형이 그 자식 몰래 바람을 피우게 되는 건데 그건 싫어요. 공정하지가 못하잖아요. 내가, 내 힘으로! 내 매력으로 형을 정정당당하게 뺏을 거예요!”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난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했다.
“그래요. 지금은 실컷 비웃어요. 언젠가 형은 나라는 늪에 푹 빠져서 허우적대게 될 테니까.”
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듯이 쭈그려 앉아 웃어 댔다. 동수 놈은 씩씩대면서 문을 열어젖히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저 자식 저거 대체 언제 철들려나. 역시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 좀 되려나. 네놈 생각대로 사람 마음이란 게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겠냐.
밖으로 나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동수 옆에 다가서서 놈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둘렀다.
“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저녁 먹고 가려고 일찍 만난 거 아냐?”
놈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날 흘겨봤다. 그새 보송보송 말라 있는 놈의 볼을 꼬집어 쭈욱 잡아당겼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장갑 없어요, 장갑?”
그런데 이놈이 곰 발바닥 같은 커다란 자기 손으로 얼어붙은 내 손을 슥슥 문질렀다. 아무리 손으로 문질러도 따뜻해지질 않자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끼워 주려 한다. 놈이 꺼내 든 건 폼 나는 가죽 장갑이 아니라 속이 털로 뒤덮인 벙어리장갑이었다.
“됐다. 내가 이 나이 먹고 벙어리장갑 끼고 다니게 생겼냐? 그리고 장갑 꼴이 뭐 이래? 어디서 이런 걸 구해 왔냐?”
“잘 어울리지 않아요?”
“어, 그래. 곰 발바닥 같은 게 제법 귀엽다.”
그 말을 칭찬으로 들었는지 녀석이 씩 웃으며 볼을 장갑 낀 두툼한 양손으로 감쌌다. 울다가 웃다가. 버럭 화를 내다가 금세 풀어져서 헤헤 웃고. 외모는 절대로 취향이 아니지만 하는 짓을 보면 귀엽기도 하고 어쩔 땐 한심하기도 하고 그렇다. 저 나이 먹어서 저렇게 단순해 빠져서는 이 더러운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돼지갈비 먹으러 가요. 오늘 금영이 형이 저녁 사 준대요.”
“금영 형이? 그 짠돌이가 웬일이래냐.”
동수는 근처의 돼지갈빗집으로 날 데려갔다. <우돼지 돼지갈비>라는 상호가 어째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 이 가게, 언제 한 번 와 본 적 있지 않냐?”
동수에게 물었더니 아니란다,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단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와 본 기억이 없는 가게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가게 이름이 낯이 익은 것일까.
“금영 형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동수의 말대로 가게 안 구석 쪽 테이블에 노금영과 기식이, 천달봉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서서 당혹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리랑헌터다.
난 그제야 이 가게가 아리랑헌터의 가게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한 거 아닌가? 남의 가게에 와서 이게 무슨 행패인가?”
“이봐요, 아저씨. 우리가 지금 행패 부리는 걸로 보여요? 우린 고기 먹으러 온 손님이야. 이거 왜 이래요?”
노금영이 전형적인 건달 포즈로 비스듬히 앉아 아리랑헌터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얌전히 고기나 먹고 가게. 돈은 안 받을 테니까.”
“이 아저씨가 누굴 거지새끼로 아나. 돈을 왜 안 받아요? 우린 손님이라니까, 손님!”
하지만 노금영은 누가 봐도 시비를 걸러 온 깡패 새끼로 보였다. 얼굴 자체가 흉기인 기식이도 분위기 잡는 데 한몫했다. 천달봉은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고 있었다. 참다못한 아리랑헌터가 자리를 뜨려 하자 노금영이 아저씨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어허. 어딜 가시나, 사장님. 여기 앉아서 우리랑 얘기 좀 하자고요.”
“자네들이랑 할 얘기 없어.”
“어, 그래요? 우린 형님이랑 할 얘기 더럽게 많은데?”
그러면서 노금영은 아리랑헌터를 억지로 빈 의자에 끌어다 앉혔다. 나와 동수도 테이블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리랑헌터는 핏발 선 눈으로 우리들을 휘둘러보았다. 노금영은 태연하게 점원 아줌마를 불러 돼지갈비와 소주를 시켰다.
“사장님, 거기 왜 그러고 계세요? 그 손님들 아는 분들이세요?”
“네. 아는 사람들이니까 얼른 술 좀 가져다줘요.”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처럼 손님 테이블에 웅크려 앉은 사장 꼴이 신기한지 점원 아줌마들이 다 한 번씩 힐끔거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주문한 소주가 나오자 노금영이 마개를 따 아리랑헌터에게 한 잔 따라 주었다.
“아저씨. 무학 도사 영감한테 우리가 그 폐공장에 간다고 일러바친 거, 아저씨 맞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일러바치다니. 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단숨에 소주 한 잔을 들이마신 아리랑헌터가 빈 잔을 노금영에게 돌려주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려서 자네들에게 폐공장 위치를 알려 준 거지, 자네들 편이 되겠다고 한 적은 없어.”
“무학 도사는 사이비라고요. 당신들은 그 사이비 영감탱이한테 속고 있다니까요.”
“난 도사님을 믿어.”
“그럼 왜 우리한테 폐공장 위치를 가르쳐 준 거예요?”
“자네들한테 매운맛 좀 보여 주려고.”
방금 전까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우리들 눈치만 살피던 것과는 달리 아리랑헌터는 담담한 어조로 지껄였다. 소주잔을 든 채로 노금영이 “허! 허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매운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그럼 결국 함정이었단 거네?”
“무학 도사님을 직접 만나 봤으니 알겠지. 그분은 자네들의 상대가 아니란 걸. 이 정도쯤 하고 이번 일에서 손 떼. 이번엔 도사님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네들을 무사히 보내 준 거지 다음에도 자네들이 무사할 거라고는 장담 못 해.”
노금영을 바라보는 아리랑헌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지금 이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무학 도사는 신이다. 죽은 아들을 살려 낼 수 있는 신.
“내가 그때 얘기했잖아요. 귀면, 아니, 꼭두각시란 걸 어떻게 만드는지. 무학 도사가 아저씨 아들을 살려 내 준다고 해도 그 애는 아저씨 아들이 아닐 거라니까요?”
“무학 도사님은 다 방법이 있다고 하셨어. 임충식의 뼈는 거의 다 모았으니 이제 머리 부분만 찾으면 된다고 하셨다. 머리 부분만 찾아서 뼈를 끼워 맞추면 어떻게든 죽은 이들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하셨어.”
입만 뚫려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건 지껄이기 바쁜 노금영이 어째 이번엔 조용했다.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무조건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테니까. 무학 도사가 말하는 그 ‘방법’이란 게 진짜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란 거다. 그리고 임충식의 뼈에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힘이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임충식의 머리는 어디에 있대요?”
“아마 김태민이 가지고 있겠지.”
김태민, 김태민, 하고 중얼거리던 노금영이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를 거는 상대방은 백단영일 터였다.
“야, 빽가. 너 지금 어디냐? 아니, 다른 게 아니라 김태민을 찾았나 해서. 네놈이 며칠 내로 그놈을 잡아 준다고 호언장담했잖냐. 어. 그래, 알았다.”
노금영이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쥐고 떠드는 중, 숯불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점원이 가져온 돼지갈비를 불판 위에 올렸다. 두툼한 살점이 치이이익 끝내주는 소리를 내며 익기 시작했다.
통화를 끝냈는데도 노금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금영이 왜 이러는지 알기에 우리들도 잠자코 입 다물고 있었다.
“김태민을 찾은 건가?”
역시 궁금증을 참다못한 아리랑헌터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그렇죠, 뭐. 그때 아저씨를 붙잡은 까맣고 인상 더러운 놈이랑 뱀처럼 음흉하게 생긴 놈 있죠? 그놈들이 해결사거든요, 해결사. 그놈들은 뭘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말거든요.”
“그럼 김태민이 임충식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건가? 놈이 임충식의 뼈를 해체해서 사방으로 배달 보낸 의도가 뭐라던가?”
“궁금해요?”
천달봉은 동생들 대신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봐요. 오늘 밤에 지하 도살장으로 데려올 것 같은데. 그리고 무학 도사가 얘기해 주지 않던가요? 우리가 귀면 두 마리를 포획했다는 얘기.”
“뭐! 그게 진짜인가? 꼭두각시들이 자네들 손에 붙잡혔다고? 그럴 리가!”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보시라니까요. 그리고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귀면들은 무적 최강이 아니라고요. 그놈들도 결국은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단 말이죠. 죽지 않고 고통을 느낄 수 없다 뿐이지, 부서지고 망가져요.”
아리랑헌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금영을 흘겨보았다. 노금영에게 향한 불신의 눈초리. 하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아리랑헌터의 눈빛 속에 숨은 의구심을. 저놈이 하는 말이 진짜인가? 진짜 그런 것일까?
이 남자는 무학 도사를 신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얘기를 듣게 된 이후 무학 도사를 신으로 추앙하던 어리석은 신도의 마음속에 어떤 불꽃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불신의 불꽃. 의구심의 불꽃.
그랬기 때문에 이 남자는 우리들에게 폐공장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던 것일 테고,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무학 도사에게 고해바친 것일 거다.
노금영은 능수능란하게 아리랑헌터의 뱃속에서 꿈틀대는 불꽃에 불을 놓았다.
“하지만…….”
“왜요? 무학 도사를 배신하게 되는 것 같아서 꺼림칙해요? 오늘 밤에 보고 듣게 될 모든 걸 무학 도사에게 일러바쳐도 상관없어요. 동영상을 찍어 가서 보여 주시든 사진을 찍어 가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아저씨에게 진실을 보여 주고 싶어요. 무학 도사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감은 절대로 좋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 영감이 신이 아닌 사이비란 걸 보여 주고 싶어요. 그 인간은 악당이에요, 악당. 그 영감은 우리들한테 임충식의 뼈를 모으는 이유가 임충식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어차피 아저씨는 우리가 뭐라고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아리랑헌터가 인상을 팍 쓰고는 잠시 생각을 했다. 말로만 듣기에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노금영이 데려가려 하는 지하 도살장은 우리들의 아지트다. 미쳤다고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겠는가. 그러나 저놈들은 날 죽일 생각이라면 진작 죽였을 거다. 저놈들은 전에도 날 무사히 놔줬다. 그래도 좀 위험하지 않나. 빠르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사장님, 사모님 전화예요.”
카운터에서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점원이 아리랑헌터를 불렀다.
“금영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저자를 데려가려는 거야? 저 남자 무학 도사의 끄나풀이라며?”
남자가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조용히 고기만 굽던 천달봉이 입을 열었다.
“달봉 형님, 저 아저씨 표정 봤어요? 저 아저씨는 지금 흔들리고 있어요. 자기 입으론 무학 도사를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 중에서 저 아저씨가 그나마 가장 성격이 유해요. 폐공장에 갔을 때 다른 놈들을 만났었는데 그놈들은 우리를 아주 죽일 기세로 덤벼들더라니까요? 그놈들은 우리들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했어요. 오늘 도사 연합 할배들도 온다고 했잖아요. 그 영감들한테 무학 도사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만신창이가 된 귀면을 보면 저 아저씨는 크게 흔들릴 게 분명해요. 그렇게 되면 굳이 피를 보지 않고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저번처럼 무학 도사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고해바치면 어쩌냐?”
“감시할 사람을 붙여서 이번 기회에 무학 도사의 아지트까지 찾아내야죠.”
노금영은 잘 익은 돼지갈비를 질겅질겅 씹으며 지껄였다. 우리들도 불판 위의 고기를 주워 먹기 시작했다. 동수 놈이 고기 몇 점을 내 앞에 놓인 쌈장 접시에 담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놈은 멋쩍게 웃으며 커다랗게 만 야채 쌈을 입 안에 무식하게 욱여넣었다.
“얼핏 들으면 굉장한 계획처럼 들리는데 사실 엄청나게 허술한 계획인 거 알고는 있지? 만만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라 해서 성격까지 유하란 법은 없지.”
천달봉은 평온한 어조로 정곡을 푹 찔렀다.
“그래도 저 아저씨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고요.”
“어쨌든 네가 저 사람을 데려가는 거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네가 다 책임져야 한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노금영이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여전히 천달봉의 표정은 어두웠다.
노금영은 남들에 비해 눈치가 빠른 인간이지 머리가 좋은 인간은 아니다. 그 주제에 무리의 리더가 되고 싶어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돋보이고 싶어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노금영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백단영이 우리들 뒤에 단단히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재수 없는 인간이긴 해도 백단영은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지닌 인간인 건 확실하다. 놈은 눈치도 빠르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상황 판단 능력 또한 뛰어나다. 노금영이 사고를 친다 해도 백단영이 버티고 있는 이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 나는 노금영 몰래 핸드폰을 꺼내 백단영에게 노금영이 아리랑헌터를 거기로 데려가려 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자네들이랑 함께 가겠어.”
전화를 끊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아리랑헌터가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내 눈으로 꼭두각시를 보고 싶어. 한 번도 꼭두각시들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거든.”
“잘 생각했어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술이나 마시면서 친목을 도모하죠!”
노금영은 껄껄껄 웃어 대며 친구에게 하듯 아리랑헌터의 깡마른 어깨에 팔을 둘렀다. 노금영에게서 술잔을 받아 든 아리랑헌터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을 내 눈은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