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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프다고? 그래. 아프면 쉬어야지. 푹 쉬어, 임 선생. 그냥 평생 푹 쉬어.]
잔뜩 화가 나서 한 마디 쏘아붙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반응이 돌아왔다.
“네?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내일 나가서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안 나와도 된다니까. 어차피 이번 달 수업은 오늘이 끝이잖아. 월급은 계좌로 넣어 줄 테니까 나오지 않아도 돼.]
장난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학원 일을 관두고 밤일에 전념해야 하지 않나, 싶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
“네. 최근 들어 계속 아프다면서 결근하고 그런 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 몸 관리 못 한 제 잘못이죠.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을 만큼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때 학부모들한테 고액 개인 과외 메일 보낸 거, 임 선생, 당신이라며?]
원장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일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때 분명히 내가 아니라고 말했다. 원장의 호출을 받고 달려가 직접 학부모들에게 해명했고, 원장도 납득한 줄 알았다.
[임 선생, 당신도 참 대단해. 자기가 그런 짓을 하고서도 어떻게 그렇게 시치미를 뚝 뗄 수가 있어. 난 임 선생이 하도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하기에 신영 선생이 범인인 줄로만 알았다니까.]
원장이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이 됐다. 신영 선생, 그 망할 놈의 인간 짓이로군. 나는 이를 뽀드득 갈았다.
[임 선생, 그러는 거 아냐. 내가 그동안 임 선생한테 얼마나 잘해 줬어. 그런데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치나, 그래? 개인 과외 하는 거, 다 좋아. 그럼 따로 학생을 모집해야지 왜 우리 학원 애들을 빼 가겠다는 건데? 그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 아냐?]
나는 원장이 지껄이는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 이 인간.
그동안 지각, 결근을 하기는커녕 다른 선생들 땜빵 수업, 원장이 시키는 잡일까지 군말 없이 해 줬다. 그런데 원장, 당신이야말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몸 다 나으면 천천히 짐이나 가지러 와.]
“네. 그러죠.”
난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제 밤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던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 욕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라도 하려고 거울을 봤더니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나마 어제는 휴일이라 하루 종일 쉴 수가 있었지만, 하루 쉰다고 엉망으로 망가졌던 몸 상태가 좋아질 리가 없다.
거울 속에 웬 외계 생물 한 마리가 눈을 끔뻑이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아, 난 왜 이렇게 잘생긴 걸까’ 넋이 나가서 머리칼을 매만지곤 했었는데.
갈색 가면에게 얻어맞은 머리통은 혹이 나서 건드릴 때마다 아파 비명을 지를 정도고, 얼굴은 퉁퉁 부어 있는 데다, 귀면 놈들한테 씹히고 물린 부분엔 붉은 멍이 들었다. 그나마 귀면들의 이빨이 날카롭지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세수만 하려고 했는데 꼴도 추한데 냄새까지 풍길 순 없어 아예 샤워까지 했다. 퉁퉁 부은 얼굴에 정성껏 화장품을 바르고 옷장에서 야구 모자도 꺼내 쓰고, 터진 입술에 립밤을 꼼꼼하게 바르고 향수까지 칙칙 뿌렸다. 야구 모자에 어울리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운동화까지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서자니 나오는 게 욕이었다.
제기랄, 신영 선생. 이렇게까지 더티하게 나온다 이거지. 내가 당신 앞에서 실실 웃고 다니니까 사람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당신은 잠자는 사자 코털을 건드린 거야.
학원 앞에 있는 분식집에서 순두부찌개를 시켜 퍼먹으며 신영 선생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개인 과외에 대해 문의하고 싶은데 학원 앞 카페에서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이런 내용의 메시지를 전화번호를 바꿔 보내자, 10분도 지나지 않아 놈이 학원 밖으로 기어 나왔다.
나는 밥값을 계산하고 나가서 카페로 향하는 놈에게 다가갔다. 놈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신영 선생님.”
어슬렁어슬렁 다가가 놈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놈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숨을 흐읍, 들이마셨다.
“이, 임 선생? 꼴이 왜 그래? 어디 아프다더니 교통사고라도 당한 거야?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역겨우니까 걱정하는 척은 집어치우시죠. 왜 원장한테 거짓말을 했습니까?”
“추운데 커피나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지? 커피는 내가 살게, 임 선생.”
놈은 주위를 둘러보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길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마지못해 카페로 따라 들어가 줬다. 물론 놈이 산다고 했으니까 가장 비싼 커피를 시켰다.
“학부모들한테 개인 과외 메일을 보낸 거, 신영 선생님이시죠?”
나는 놈이 사 가지고 온 내 몫의 커피를 냉큼 받아 챙기며 물었다.
“솔직히 임 선생도 원장이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 정도 되는 강사가 그 돈 받고 일한다고 말하면 다들 놀라. 그런데 원장은 이 정도 대우해 주는 데 없다면서 온갖 생색은 다 낸다고.”
“질문에 대답부터 하시죠.”
“그래, 내가 보냈어. 학원 때려치우고 개인 과외 하려고.”
“그런데 왜 당신이 한 짓을 저한테 뒤집어씌웁니까?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셨어요?”
“아니, 임 선생이 만만해 보여서가 아니고. 원장이 어떻게 자기를 배신하고 그럴 수 있냐고 길길이 날뛰면서 협박을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학부모들한테 내가 학력 위조한 거 다 말하겠다고. 임 선생도 알다시피 다들 내가 T 대학 출신이라고 알고 있잖아. 그런데 사실 내가 지방 대학 출신이야. 미국에서 학위 따 온 것도 아니고 1년 어학연수 갔다 온 게 전부야. 학력 위조 사실이 들통 나면 개인 과외는커녕 이 바닥에서 영원히 퇴출당할 거라고. 임 선생도 알잖아. 블랙리스트에 한번 오르면 어디 가서도 강사 노릇 못 한다는 거.”
“그래서 제가 그 짓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신 거군요.”
“미안해, 임 선생. 내가 바보같이 주식으로 전 재산 홀랑 말아먹은 탓에 빚만 산더미야. 돈 버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내가 돈을 못 벌면 우리 네 식구, 이 엄동설한에 거리에 나앉게 될지도 몰라.”
“당신 사정 딱한 건 잘 알겠는데 그럼 제 인생은요? 졸지에 직장 잃은 전 뭐가 됩니까?”
“그래도 임 선생은 혼자잖아. 나처럼 학력 위조를 한 것도 아닐 테니 개인 과외를 해도 되고, 또 학원 일 그만둬도 따로 돈 버는 일이 있잖아.”
둔탁한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내가 학원 일과 밤일을 병행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저런 말을 지껄이는 건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다 알고 있어. 임 선생이 밤일한다는 거. 알고 지내는 동생이 등록금 벌려고 밤일꾼 아르바이트를 해. 어쩌다가 내 입에서 임 선생 이름이 나왔는데 이름만 듣고도 바로 알더라고.”
세상 참 좁다는 걸 이럴 때 실감하게 된다. 얼굴 근육이 약하게 떨려 와 얼른 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미안해, 임 선생. 내가 할 말이 없네.”
말은 그렇게 해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잘못은 했지만 너도 당당할 거 없는 놈이지 않냐, 이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더럽고 비열한 새끼였다.
“그럼 5백만 원으로 퉁 치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커피를 마시던 놈이 인상을 팍 썼다.
“한 천 만원 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고.”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임 선생?”
“당장 5백만 원 내 계좌에 입금시키라고, 새끼야.”
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원장 입은 막았을지 몰라도 내 입은 못 막지. 이틀 내로 돈 입금 안 하면 내가 직접 당신 학력 위조 사실 다 까발릴 줄 알아.”
“이 양아치 건달 같은 새끼가. 어디서 감히 협박질이야? 네놈이 그런 짓을 하면 난 가만 있을 것 같아? 네놈이 밤일꾼인지 뭔지를 한다고 말하면…….”
난 놈이 지껄이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놈이 깜짝 놀라 앉은 자세 그대로 펄쩍 뛰었다.
“그러시든지. 어차피 난 상관없어. 당신 말대로 난 딸린 처자식도 없고, 이미 학원에서 잘린 몸인데 무슨 상관이야?”
놈의 낯이 불그죽죽해졌다가 곧 퍼렇게 질렸다. 마지막 카드가 먹히지 않자 놈은 동정심 유발 작전으로 돌아섰다.
“아까도 말했듯이 빚만 산더미야. 당장 살고 있는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고.”
“원장이 그러던데 처가댁이 엄청나게 부자라면서? 당신 부인한테 5백만 원만 달라고 하면 되겠네. 사모님이 기분 울적할 때마다 백화점에서 몇백만 원짜리 명품 백을 산다던데. 그런 사모님한텐 돈 5백이면 껌값 아닌가?”
원장이 아니라 학원에 찾아온 원장 부인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신영 선생 부인이 명품 매장에서 쇼핑백을 주렁주렁 매달고 나오는 걸 봤다고. 놈은 더 이상 칭얼대지 않고 입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빠르게 회전하는 머릿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핸드폰으로 계좌 찍어 줄 테니 이틀 내로 입금해. 기일 내에 돈이 입금 안 되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난 치졸한 협박으로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돈을 주면 더 이상 이 일로 날 괴롭히지 않을 건가?”
“하는 거 봐서.”
난 바닥에 침을 내뱉듯 말을 찍 뱉었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그야말로 양아치 건달 같을 것이다. 그 사실이 기분을 더 더럽게 했다.
“말을 뭐 그렇게 하나. 하는 거 봐서라니. 뭔가 확답을 줘야 내가 믿고 돈을 입금할 거 아닌가.”
“성질 같아선 당장 끌고 가서 야산에 파묻어 버리고 싶은 걸 참는 거니까 자꾸 건드리지 마라, 새끼야.”
놈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내가 일어서는 기색에 움찔하며 떠는 놈의 모양새가 웃기고도 한심했다.
난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걷다가 편의점 앞에 내놓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볼에 닿는 바람은 차가워도 하늘은 끝내주게 맑은 그런 날이었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더 약해진 건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세상천지에 내 편이라곤 하나 없는 인생이 갑자기 엄청나게 딱하고 불쌍하게 생각되어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저려 왔다.
언제는 내 편이 있었나. 이럴 때 날 위로해 주고 보듬어 안아 줄 사람이 있었던가. 난 언제나 혼자서 울음을 참곤 했다. 엄마가 옆에 있었더라면. 할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넌 잘못한 거 없다, 그 사람들이 나쁜 거라고 다독이며 위로해 줬을까. 석진경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술을 사 주며 같이 신영 선생을 욕해 주었을까.
정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난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참을 수 없이 우울하고 힘들 때 그랬던 것처럼 전화번호 목록을 뒤졌다. 지금까지는 늘 목록을 뒤지다가 결국 누구한테 전화 한 통 하지 못하고, 문자 하나 보내지 못하고서 핸드폰을 내려놓곤 했었다. 하지만 목록에서 나민이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생님?]
나민이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뭐 하고 있어?”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웬일이세요?]
“아무 일도 아냐. 그냥 해 봤어. 이따가 같이 저녁이나 먹자.”
[지금 어디세요? 제가 지금 그리로 갈까요?]
“됐어. 공부해라.”
[목소리 들으니까 보고 싶어요, 선생님 얼굴. 어디 계세요? 가르쳐 주세요. 어차피 지금은 공부도 안 될 것 같아요. 네?]
괜찮지 않을까. 한 번쯤은.
나는 녀석의 집요한 부탁에 못 이기는 척, 지금 있는 곳의 위치를 말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민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뭘 그렇게 뛰어와.”
“선생님이 빨리 보고 싶어서요.”
나민이가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부끄러운 녀석.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얼굴은 또 왜 그러냐?”
“그러는 선생님은 얼굴이 왜 그래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녀석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이 웃자 한쪽 볼에 자리 잡은 보조개가 오늘따라 더 깊고 예쁘게 패었다. 보조개가 생긴 볼을 쓰다듬고 싶어 무심코 손을 올렸다. 그러자 녀석은 애교 피우는 고양이처럼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선생님, 무슨 일 있죠?”
내 손에 볼 한쪽을 기대고는 눈을 위로 뜨고 묻는다. 머리칼 사이로 반짝거리며 빛나는 눈이 무섭도록 맑고 예뻤다.
“목소리가 축축했어요. 아까요.”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했었건만 실패한 모양이다.
“저한테 할 말 있죠?”
“그러는 너도 나한테 할 말 많아 보인다.”
녀석이 피식,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힘없이 웃었다. 박하신 패거리가 다시 녀석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걸까. 아니면 박하신이 사라지자 다른 녀석들의 먹잇감이 된 건가. 지나가는 사람들 시선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어서 난 녀석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녀석도 모자 쓴 내 머리를 둥글게 쓰다듬었다.
“선생님 냄새 맡고 싶어요.”
나를 보며 상큼한 얼굴로 한다는 말이 이렇다.
“그래? 어디 냄새가 맡고 싶은데?”
난 느끼하게 웃으며 농을 지껄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농담을 하면 얼굴이 벌게져서는 쩔쩔매던 녀석이었건만.
“선생님 젖꼭지 냄새요. 우유 냄새가 나서 좋아요.”
이제는 나만큼이나 느끼하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지껄인다.
“그만 좀 씹어 먹어라. 네가 하도 쭉쭉 빨고 씹어 먹어서 색깔이랑 모양이 이상해졌어, 인마.”
“그럼 선생님도 제 젖꼭지 빨게 해 줄게요.”
우유 냄새 풀풀 풍길 것처럼 하얗기만 하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나.
“내 걸 빨든 네 걸 빨든 일단 집에나 가자. 사실 나 지금 몸 상태 최악이라 쓰러질 것 같거든.”
난 그렇게 말하며 녀석의 어깨에 슬쩍 몸을 기댔다.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을 줄 알았건만 녀석은 자연스럽게 내 팔을 감싸 안고는 길가로 데려갔다. “지하철역은 저리로 가야 하는데?” 중얼거리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녀석이 한쪽 팔을 번쩍 쳐들어 택시를 잡았다. 빈 택시 한 대가 우리들 앞에 멈춰 섰다.
“어? 택시 타게?”
“택시비는 제가 낼게요. 몸도 안 좋으시면서 어떻게 지하철 타고 가려고 그래요.”
“택시 타고 갈 정도는 아닌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녀석은 날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택시 기사에게 말하는 목적지는 자기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좀 주무세요.”
난 시트에 몸을 기대고서 나민이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너 그 얼굴, 누구한테 맞았냐? 박하신이 그랬냐?”
“그 자식이 그런 거 아니에요. 걔 요즘 뜸해요. 잠수 타나 봐요.”
“그럼 누가 우리 나민이 잘생긴 얼굴에 손을 댔냐.”
“아버지요. 좀 대들었더니 막 두들겨 패더라고요.”
“의외다. 넌 아버지한테 찍소리 못 하고 살 줄 알았는데.”
“지금까진 그랬어요. 아버지한테 큰소리를 치면서 대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갑자기 정신이 홱 나갔던 거죠, 뭐.”
그대로 입을 다물 줄 알았던 녀석이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시트에 머리를 기대자 잠이 스르륵 몰려왔지만, 다시 들려온 녀석의 낮은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전 아버지가 무서워요.”
눈을 슬며시 뜨고 쳐다보니 녀석은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저러고 있으면 멀미 날 텐데.
“아버지가 좀 정상이 아니거든요.”
“핏줄 혈연 같은 거에 연연하지 마라, 나민아.”
나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불쑥 끄집어냈다.
“핏줄 같은 거 다 필요 없어.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이라고 그 피가 따뜻하기만 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자기 피붙이에게 무조건 따뜻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인간들도 분명히 있거든. 오히려 누군가와 같은 피를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족쇄가 돼서 네 발목을 붙잡을 날이 오게 될지도 몰라.”
조용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나민이가 후우우, 얕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차갑게 식어 있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전체로 녀석의 손을 꼬옥 감쌌다. 손바닥 안에서 녀석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아버지한테 아무 기대도 하지 마. 그 양반한테 따뜻한 부모의 사랑 같은 걸 기대하지 마. 그 인간이 제대로 된 부모였다면 애초에 널 이렇게 방치하지도 않았어. 그 인간한테는 아버지로서의 삶보다 자기 인생이 더 소중한 거다. 그러니 헛된 기대를 버려. 희망도 버려. 너 혼자 살아남는 일에 몰두해.”
“아뇨. 전 옛날부터 아버지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한테서 뭔가를 바라거나 희망하지도 않아요. 전 그냥…… 무서운 것뿐이에요.”
맞잡은 하얀 손이 약하게 떨렸다. 녀석의 옆얼굴이 경련을 일으키듯 푸르륵 뒤틀리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란 존재는 늘 그랬어요.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 무서워도 도망칠 수가 없었어요. 어렸을 땐 몸이 커지고 힘이 세지면 아버지 곁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는 머리 위에서 절 조종하고 있어요.”
녀석은 잠시 힘겹게 숨을 고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싶어요.”
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에선 이 상황에서 당연히 드러나야 할 살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눈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처럼 물기 하나 보이지 않는 버석버석한 눈이었다.
오래된 분노와 살기는 말라붙는다. 심장을 불태우던 처음의 격렬했던 감정의 색은 사라지고 무채색의 덩어리만 덜렁 남는다. 마치 누군가에게 향한 살의를 아주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살아온 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눈.
“나민아.”
난 나직한 목소리로 녀석을 불렀다. 녀석이 날 바라봤다.
“행복해지자, 우리.”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도 버석버석 말라 있었다.
“이제 너나 나나 행복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
하지만 뒤이어 입 밖으로 새어 나간 목소리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이러다간 꼴사납게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올 것 같아 난 나민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제가 얘기했던가요? 선생님을 만나서 행복하다고.”
“그래.”
“선생님만 제 곁에 있어 준다면, 늘 이렇게 선생님이랑 함께 있기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아요.”
“정말 겨우 그 정도로 행복해지겠냐?”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내 손을 마주 잡는 힘이 들어간 녀석의 손끝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얘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나민이의 집 앞이었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지 늘 집 앞에서 장승처럼 버티고 있던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집 앞의 풍경에 가뜩이나 심란했던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우리 어디 멀리 떠날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나민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떠나요? 어디로요?”
“아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들어가. 들어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잠이나 자자. 피곤해 죽겠다.”
“떠나요. 어디든지 좋으니까. 선생님도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신 거잖아요. 저 바다 보고 싶어요. 바다 보면서 파도 소리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아요?”
뼛속까지 스며드는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 귓속으로 파고드는 파도 소리. 차갑게 얼어붙은 저 너머의 수평선. 생각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잠시 언젠가 보았던 겨울 바닷가 풍경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사이, 나민이는 내 손목을 움켜쥐고 집 안으로 데려갔다.
“얼른 옷 갈아입고 짐 챙길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녀석은 나를 거실에 세워 두고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짐은 왜 챙겨? 안 간다니까. 야, 나민아.”
“겨울 바닷가는 엄청나게 춥죠? 옷 두껍게 입고 가야겠다. 선생님도 그런 옷차림으론 추우실 텐데 제 옷 아무거나 걸쳐 입으세요.”
분명 내가 말하는 걸 들었을 텐데도 못 들은 척 무시하고는 좁은 방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티셔츠에 스웨터, 카디건까지 차례대로 꿰어 입으면서 실실 웃기까지 한다. 부모님이랑 놀이공원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애 같다.
“저 파카 입을 건 아니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시꺼먼 파카에 손을 뻗던 녀석이 하던 행동을 멈췄다.
“왜요? 이상해요?”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보기 흉해. 어디서 저런 촌스러운 솜 패딩 파카를 구해 와서는.”
“솜 아니에요. 오리털인데. 보기보다 꽤 따뜻해요.”
“저번에 보니까 옷장 안에 좋은 옷들도 많던데. 왜 그런 옷들 놔두고 이런 촌스러운 꼴로 다니냐?”
나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옷장 꼴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던 거예요? 도둑이 들었는 줄 알았는데.”
“도둑이 들었으면 집 전체를 들쑤셔 놨겠지 옷장만 뒤졌겠냐. 옷장 문이 열려서 옷이 다 흘러나와 있기에 대충 쑤셔 넣었던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한 거짓말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숨겨 둔 비밀 금고라도 들킨 것처럼 난감한 표정으로 옷장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다 아버지가 사 준 옷들이에요. 집에 한 번 찾아와 보지도 않는 주제에 옷이나 신발 같은 것만 택배로 보내 주더라고요. 용돈 주고, 좋은 옷, 좋은 신발 사 주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래서 이렇게 좋은 옷들을 입지도 않고 쌓아 둔 거야? 아버지가 사 준 옷들이라서?”
난 가격표까지 그대로 붙어 있는 점퍼 하나를 옷장 안에서 끄집어냈다.
“이제부터 새 옷 입고 다녀. 늘 입고 다니던 걸레짝 같은 옷들은 당장 내다 버리고. 일단 저 거지 같은 파카부터 갖다 버리자.”
“안 돼요. 아직 멀쩡한 옷을 왜 버려요. 아깝잖아요.”
“이게 네 눈에는 멀쩡해 보이냐? 노숙자한테 입으라고 줘도 안 입을 거다. 제발 이제부턴 이런 것 좀 입지 마.”
여행 갈 생각에 신이 났던 녀석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내가 옷장 안에서 꺼내 떠안기듯이 건네준 새 점퍼를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내 애인이 촌스러운 모습을 하고 다니는 거 보기 싫어서 그래.”
난 보들보들한 머리털로 뒤덮인 녀석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우는 애를 달래듯이 말했다. 녀석이 날 가만히 쳐다봤다. 그 얼굴이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귀여워서 난 나민이의 입술에 쪼옥, 가볍게 키스했다. 키스 한 번에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물흐물 풀어졌다.
“얼른 옷 입어. 기차 타고 바다 보러 가자. 그리고 안에 입은 옷도 싹 다 갈아입어.”
“안에 입은 것도요?”
“그래. 이거랑 이거 입어. 바지는 이걸로 입고.”
말이 나온 김에 얼른 옷장 안에 쌓인 옷들을 꺼내서 안겨 줬다. 빨리 나가고 싶은지 녀석은 군말 없이 입은 옷들을 훌렁훌렁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까 우리 나민이 진짜 잘생겼다.”
사심 없이 칭찬을 퍼붓자 녀석이 볼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나도 씨익 웃으며 녀석에게 다가가 방에서 가지고 나온 머플러를 녀석의 목에 둘둘 감아 주었다.
“겨울 바다가 얼마나 추운지 알아? 아무리 찾아봐도 장갑은 보이지 않던데…….”
터미널에서 장갑도 사자, 하고 말하려던 때. 녀석이 재빨리 내 입에 도둑 키스를 했다.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애들 장난 같은 뽀뽀를 하고서는 이를 훤히 드러내고선 환하게 웃는다.
내가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있자 녀석은 다시 한번 입술을 갖다 댔다. 이번 것은 아까보다 좀 더 길고 깊었다. 녀석의 혀는 벌어진 내 입술을 핥아 낸 뒤 떨어졌다.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 그건 어린애의 눈이 아니라 남자의 눈이었다. 웃음기를 머금어 촉촉하게 젖은 커다란 두 눈에서는 순수함과 섹시함이 공존했다. 난 손을 뻗어 녀석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손가락 끝이 닿자 예쁜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 손을 자연스럽게 이동시켜 녀석의 귀밑머리를 쓸어 올렸다.
“얼른 가자.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야지.”
“그런데 선생님, 내일 학원에 안 나가셔도 돼요?”
“괜찮아. 나 백수 됐거든.”
그러며 난 나민이 녀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
*
때가 때이니만큼 해안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에서는 강아지 두 마리만이 뒤엉켜 놀고 있을 뿐이었다. 쭈쭈쭈, 하고 부르니까 두 놈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달려왔다. 오랜만에 보는 낯선 사람이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새까만 코를 들이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서 한 마리를 덜렁 안아 올렸다. 낯선 사람 품에 안겼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녀석은 짧은 꼬리를 흔들며 내 손을 마구 핥아 댔다.
“역시 똥개가 최고로 귀엽다니까.”
“똥개가 아니라 진돗개 같은데요.”
남은 한 마리와 놀아 주던 나민이가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아예 배를 까뒤집고 누웠다. 배를 살살 긁어 주는 나민이의 손길이 너무 좋아서 오줌이라도 질질 쌀 기세다.
“이 녀석들이 어딜 봐서 진돗개냐. 꼬리도 축 처진 게 딱 봐도 똥개인데.”
“진돗개면 어떻고 똥개면 어때요. 어차피 얘들은 아무 생각 없을 텐데.”
“하하. 하긴 그렇다.”
나민이가 가방에서 먹던 빵을 꺼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강아지가 먹을 걸 보자 눈이 홱 돌아가서는 필사적으로 바동거렸다.
바닥에 내려놔 주자 녀석은 나민이 발밑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북숭이 두 마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빵을 찹찹 먹어 치웠다.
빵을 다 먹은 강아지들이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나민이를 빤히 올려다봤다.
“미안. 이젠 없어.”
나민이가 빈손을 흔들어 보이자 강아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미안하지만 나한테도 먹을 게 없어.
나도 빈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녀석들은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아지들하고 놀아 주느라 쭈그리고 있었더니 무릎이 다 쑤시다. 아이고오오, 앓는 소리를 내면서 저리는 무릎을 퉁퉁 두들기니까 나민이가 다리를 조물조물 주물러 줬다.
“아이고, 시원타. 아가, 거기 좀 더 세게 주물러 봐라. 오야오야. 그래, 거기.”
“그러지 마세요. 시골 할아버지 같잖아요.”
“그럼 내가 노인이지. 애냐.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삭신이 다 쑤시지.”
“아직 서른도 안 되신 분이 왜 이러세요.”
녀석이 정색을 하며 싫어하는 게 웃겨서 난 낄낄거리며 웃었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난 대답도 하지 않고 수평선 너머만 쳐다봤다.
“왜 이렇게 다치셨는지 말 안 해 주실 거예요?”
“술 퍼마시다가 동네 양아치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20 대 1로 싸웠어.”
“농담하지 마시고요.”
난 웃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민아, 밤일꾼이라고 들어 봤어?”
“네, 들어 본 적 있어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이트에 누군가 ‘밤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얘기를 써 놓은 글이 있어요.”
“그럼 대충은 알겠네. 밤일꾼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나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밤일꾼 일을 하고 있었어. 낮에는 학원 강사 일을 하고, 밤에는 밤일꾼 일을 하고. 말 그대로 투잡을 뛰었던 거지. 얼굴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밤일을 하느라 이렇게 된 거다.”
녀석은 조용히, 숨소리까지 죽이고서 내 얘기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은 심드렁했다. 이 나이 대 애들한테는 ‘밤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력적으로 들릴 텐데 말이다.
“전혀 안 놀라네.”
“놀랄 이유가 있나요?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나니까 확실히 보이던데요. 선생님의 이중성이요.”
직설적으로 툭 던지는 듯한 녀석의 말에 난 허공에 웃음을 내뱉었다.
“나도 나민이 너랑 친해지고 나니까 보이더라. 네 말랑말랑한 얼굴 뒤에 숨은 이중성.”
나민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었다. 정곡을 찔린 사람 특유의 반응이었다. 차라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웃어 주면 좋겠는데.
“난 나민이 네 앞에선 나약한 내 모습, 어깨에 잔뜩 넣고 있던 어깨 뽕 다 빼고 작고 초라한 모습, 다 보여 줬다. 그런데 넌 언제까지 어깨 뽕 잔뜩 넣은 모습만 보여 줄 거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거 아냐? 넌 네가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가 완벽하다고 믿고 있겠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조악하다는 거. 네가 뒤집어쓴 껍데기는 반투명한 재질이라 속이 다 비쳐.”
나민이는 입을 닫았다.
녀석은 무릎을 굽혀 끌어안고서 깨진 조개껍질들이 파묻힌 축축한 모래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나도 더 이상 재잘대지 않고 주홍색으로 물들어 가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지다 못해 눈이 스르륵 감겼다.
“사실은 제가 박하신에게 거기에 가자고 한 거였어요.”
조개구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말하려던 때, 나민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디에 가자고 했다고?”
“<러스트>라는 클럽에요.”
소로록 밀려들었던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난 눈을 번쩍 잡아 뜨고는 나민이를 쳐다봤다. 녀석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손톱 끝만 깨물었다.
“클럽 홈페이지에서 선생님 사진을 봤어요. 선생님이 무대 위에 올라가서 춤추는 사진요.”
그런가. 내 사진이 클럽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다는데 정작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진을 보고 선생님한테 반했어요. 딱 제 이상형이었거든요. 그래서 박하신한테 클럽에 가자고 한 거예요. 클럽에 가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말하는 사람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백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놀라울 것도 없는 고백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애초에 나민이도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애였다는 사실이다.
“클럽에 가서 선생님이랑 그런 일이 있은 이후, 학원에 등록했어요. 늦은 나이지만 대학엔 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 학원에 선생님이 계시는 거예요. 놀랐어요. 기뻤어요. 선생님을 또다시 만나게 돼서요. 그래서……. 그래서 순진한 척했어요. 선생님은 학원 강사시니까 순진하고 착한 모범생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럼 박하신 패거리에게 괴롭힘당했던 일도 다 꾸며 낸 거였어?”
“그건 아니에요! 그 자식들은 진짜로 절 지긋지긋하게 괴롭혔어요!”
그제야 날 똑바로 바라보곤 목에 핏대까지 세워 언성을 높였다.
“죄송해요……. 전 그냥…….”
날 바라보는 녀석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쏟을 기세다.
“전 그냥…… 선생님이 좋아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빤히 보였다.
아까도 말했듯이 한나민이 뒤집어쓴 껍데기는 형편없이 조악하고 얇아서 속이 훤히 비쳐 보인다. 설마 녀석은 내가 겨우 이 정도 어설픈 연기에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믿어 주세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제발 믿어 주세요.”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두 눈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는다.
“거꾸로 뒤집어서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어 낸 거야?”
“네?”
“할 말은 그것뿐이냐고.”
“선생님은 정말 절 믿지 않으시네요.”
이윽고 나민이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내 몸속에서 찌르르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귀여운 아이가 우는 모습은 만들어진 영상처럼 너무나도 예뻤다. 검은 동공에서 찰찰 흘러넘치는 눈물. 액체 방울이 맺힌 속눈썹. 눈물에 젖은 창백한 뺨. 붉은색 입술.
저절로 손이 뻗어 나갔다. 나는 손으로 나민이의 젖은 뺨을 감쌌다. 그러자 녀석은 내 손에 얼굴을 살며시 기대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사냥꾼을 홀려 자신의 동굴 속으로 데려가 먹어 치우는 숲속 악령의 모습이 이러할까. 신기하게 순식간에 사방이 희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스멀스멀 기어와 사방을 메운 안개가 나민이의 모습까지 감췄다. 나는 미간에 힘을 주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망상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주위를 메웠던 안개의 환상은 사라졌다. 대신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두 눈 속에서 일렁거리는 뭔가가 보였다. 위태롭게 출렁거리는 어둠이었다. 이것 역시 지나친 생각이 만들어 낸 환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녀석을 바라보는 내 눈은 깨끗하고 맑기만 할까. 내 눈 속에서도 시꺼먼 어둠이 출렁거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누가 누굴 욕하겠는가. 나 역시 가증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
“선생님이 정말 좋아요.”
어린 연인이 보드라운 입술을 열어 달콤하게 속삭였다. 일순 배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갑자기 불이 지펴진 성욕이었다. 손가락으로 녀석의 말캉한 입술을 꾸욱 누르며, 녀석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녀석의 입술에선 젖은 눈물 맛이 났다.
“하러 가자.”
입술을 맞댄 채로 속살거리자 녀석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녀석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먼저 일어나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내 손을 슬며시 잡고 일어섰다.
*
*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방이에요. 창문에서 바닷가가 보이거든요. 성수기 때는 예약까지 걸어 두는 방인데 때가 때인지라 엄청나게 싸게 드리는 거예요.”
민박집 주인 남자는 직접 우리를 2층 방으로 안내했다. 여름 성수기 이후, 계속 방치해 둔 방인지 남자가 문을 열자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확 풍겼다. 남자는 서둘러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이불 한 채는 좀 이따 가져다 드릴게요.”
옷장 겸 이불장을 열어 안에 든 이불을 확인한 뒤에야 남자는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혹시 아가씨 필요하세요?”
남자가 문 앞에 서서 슬리퍼를 신으며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여유롭게 방 안을 돌아보는 나와는 달리 나민이는 깜짝 놀라 남자를 쳐다봤다.
“필요하시면 바로 연결해 드릴 수 있는데.”
“필요 없으니 나가요, 나가.”
짜증이 치밀어서 난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별도로 돈 내시면 저녁 식사도 가능한데요.”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체크아웃 시간은 내일 오후 12시…….”
남자의 등을 떠밀어 쫓아내곤 얼른 문을 쾅 닫았다.
젊은 남자 두 명이 왔으니 당연히 여자를 부를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방금 저 아저씨가 아가씨 필요하냐고 왜 묻는데요?”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순진한 녀석이 물었다.
“그런 게 있다. 넌 그냥 모르고 사는 편이 좋아.”
“영화에서 본 적 있어요. 여관이나 모텔 같은 데서 남자주인공이 어딘가에 전화하면 여자가 찾아오는 장면요. 그런 거예요?”
“더러운 얘기는 그만하자. 먼저 씻을래? 아니면 내가 먼저 씻을까?”
점퍼를 벗으면서 묻자 녀석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선생님 먼저 씻으세요” 한다.
욕실로 들어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니 머리카락이 두피에 착 달라붙어 있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충 달라붙은 머리칼에 물을 묻혀 정리했다. 거울에 비친 꼬락서니가 그나마 사람답게 변했을 때에야 나는 윗옷을 훌렁 벗었다.
벗은 상반신에는 울긋불긋한 멍과 상처가 가득하다. 귀면들에게 씹히고 깨물린 상처들이다.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부분도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꼭 격렬하게 정사를 치른 모습 같아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 꼴을 보여 주면 나민이는 어떤 얼굴을 할까. 나는 욕실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창가에 선 나민이를 불렀다. 창밖 풍경을 멍하게 응시하던 녀석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날 쳐다봤다.
“안으로 들어와. 같이 씻자.”
장난기 섞인 내 목소리에 낯을 발갛게 물들이긴 하지만 쪼르르 달려오는 게 녀석다웠다. 욕실 안으로 들어온 녀석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선생님, 몸이 왜 이래요?”
“씹히고 깨물렸지.”
“어떤 새끼가 이딴 짓을 했어요?”
녀석이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내 목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인상을 구겼다.
“그건 왜 물어?”
“찾아가서 죽여 버리게요.”
“놈들을 찾아갔다간 네가 먼저 껍질 홀랑 벗겨져서 잡아먹힐 거다.”
“제가 잡아먹히긴 왜 잡아먹혀요.”
농담이랍시고 한 말에 녀석은 정색을 하며 성질을 낸다. 상처를 매만지는 녀석의 솜털 같은 손길이 간지러워서 나는 몸을 배배 꼬았다.
“그만두시면 안 돼요? 밤일하시는 거요.”
“학원에서도 잘렸는데 어쩌겠냐. 밤일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지.”
“다른 학원을 알아보시면 되잖아요. 선생님 학력 정도면 어디서든 일하실 수 있을 텐데요.”
“그렇기야 하겠지. 하지만 한동안 낮 세계에서 일하고 싶지가 않다. 사람이 싫어졌어.”
굳이 밤 세계, 낮 세계를 구분하는 내가 이상해 보이는지 녀석은 나를 비스듬히 기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밤일은 위험하잖아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이번에 맡은 일이 좀 특이해서 이런 거지.”
“당장 관두세요.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일 따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은 내 어깨뼈를 움켜쥐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듯이 인상을 구기고서 잇새로 말을 씹어 내뱉었다.
“겉보기에는 이래도 제법 멀쩡해, 나.”
“싫다고요! 선생님이 이런 꼴 당하는 거. 선생님 이렇게 만든 새끼를 쳐 죽이고 싶어서 미쳐 버릴 것 같단 말이에요!”
녀석이 급기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소리쳤다. 어찌나 고함 소리가 큰지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아플 정도였다.
몸에 난 상처를 보고 놀라는 애한테 ‘굶주린 개한테 뜯어 먹혔다, 이거?’ 따위 농담을 해 대며 낄낄거릴 생각에 녀석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건만. 두 눈에 분노의 불꽃을 활활 불태우며 씩씩대는 네 얼굴을 보니 어째 기분이 되게 좋다, 나민아? 이러면 너무 유치할까. 나는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는 대신 녀석의 입술에 쪼옥 입을 맞췄다.
“밤일은 그만두세요, 선생님.”
어어, 그래. 대수롭지 않게 웅얼거리며 난 깊게 보조개가 팬 녀석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만두실 거죠?”
“그래. 생각해 볼게. 일단 이번에 맡은 일만 끝내고.”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시고요. 지금 당장 그만두세요. 이번 일이 특별히 위험하다면서요. 지금보다 더 다치면 어떻게 하시게요?”
“설마 죽기야 하겠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 일을 계속하는 이상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손을 녀석의 뒤로 뻗어 수도꼭지를 돌렸다. 세면대 옆에 매달려 있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세면대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녀석이 물을 온통 뒤집어썼다.
“한나민, 정신 좀 차려. 왜 이렇게 흥분해서 이래?”
물에 젖어 달라붙은 녀석의 머리칼 사이로 시퍼런 안광이 빛났다.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녀석은 나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입술 살점을 자기 것으로 덮더니 힘껏 빨아들였다. 여린 입술 살점이 빨리는 통증에 바르작대자 나를 끌어안은 녀석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녀석은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에?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민이와는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는 사이지만 가끔씩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방금 전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제발 날 좀 믿어 달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리던 애와 지금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입을 맞추는 이 녀석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내 목에 얼굴을 파묻어 쭉쭉 빨아 대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대체 뭣 때문에 화가 난 거냐?”
“화 안 났어요.”
낮게 옹알거리면서 녀석은 남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아얏, 짧게 신음하자 꽉 깨문 부분을 혀로 달래듯이 핥는다.
“나민아, 네 진짜 모습은 뭐냐?”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에 코를 박고는 숨만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제가 싫어지셨어요? 선생님이 생각하던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애가 아니라서?”
내 안의 본능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끔 수면 위로 떠올랐던 나민이의 본모습을 마주했을 때,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쾌감을 느꼈다. 저 애가 강아지처럼 커다란 눈에 귀여운 모습을 하고서 노련한 바람둥이 같은 퇴폐적인 모습을 보였을 때, 속된 말로 아주 환장할 것 같았다.
제과점에서 동수 놈과 빵을 먹으며 대화했을 때 혹시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순수한 나민이의 모습은 가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묘한 한기에 몸을 떨었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 나는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나민의 모습은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마치 내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 하나의 나를 만들었듯이. 녀석도 또 다른 자신을 만든 것이었다.
나를 좋아해서. 내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녀석에게 실망했냐고? 녀석이 싫어졌냐고? 천만에. 겨우 그 정도로 식을 감정이 아니다. 난 이 녀석에게 푹 빠져 있다. 첫사랑이었던 석진경보다도 더. 지금까지 사귀었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녀석들에게 향했던 감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난 이 녀석에게 미쳐 있었다.
“절 버리지 마세요.”
내 품 안에서 어린 녀석이 울먹인다.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손은 필사적이었다.
“선생님한테 버림받으면 전 죽어 버리고 말 거예요.”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살거리면서 녀석은 하반신을 바짝 밀어붙인다. 허벅지에 닿는 녀석의 아랫도리는 벌써 딱딱하게 부풀어 있었다. 난 목구멍 안으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손바닥 안쪽으로 녀석의 중심을 꾸욱 눌렀다. 예민해진 성기에 가해지는 부드러운 압박감에 녀석이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내가 널 왜 버리냐. 네가 날 버리면 몰라도.”
“제가 왜 선생님을 버려요.”
“넌 아직 젊잖아. 대학에 가면 나보다 훨씬 더 멋지고 좋은 놈들이 수두룩할 텐데, 아마 나 같은 아저씨는 꼴도 보기 싫어질걸?”
“아저씨라뇨. 선생님도 젊어요.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멋져요. 매일매일 보고 또 봐도,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절대로 질리지 않을 자신 있어요.”
“누구나 말은 그렇게 하지.”
“절 버리지 마세요.”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 녀석은 어울리지 않게 내 목에 코를 비벼 대며 애교를 떨었다.
“선생님만은 절 좋아해 주셔야 해요.”
굶주린 들개 같다. 나를 끌어안고 목에 얼굴을 묻고 있는 이 녀석은 사랑에 굶주린 들개다. 난 녀석의 아래에 갖다 댄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살덩어리를 애무하듯이 바지 위로 툭 불거진 성기를 살살 주물렀다. 손가락을 바지춤 사이에 넣어 버클을 풀어 청바지를 쭈욱 끌어 내렸다.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탓에 드러난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팬티까지 끌어 내리려 하자 녀석은 깜짝 놀라 허리를 뒤로 뺐다.
“가만히 있어. 좋은 거 해 줄게.”
낮게 속삭이며 녀석의 팬티를 내리자 발기한 녀석의 성기가 퉁 튕겨 나왔다. 난 경직돼 굳은 녀석의 하얀 허벅지에 손을 대고 타일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빳빳하게 곧추선 성기 끝을 입술 사이에 파묻었다. 녀석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여러 놈들을 사귀어 봤지만 상대방의 성기를 빨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내 다리 사이에 굴욕적인 자세로 무릎을 꿇고 내 것을 입으로 애무하던 것은 주로 파트너 상대였다.
혀끝을 내밀어 투명한 액이 흘러나와 반들거리는 귀두를 핥다가 기둥 전체를 입 안 깊숙이 물고는 쭈욱 잡아 뺐다.
녀석은 흐으으, 으으으, 허벅지를 잘게 떨며 기분 좋게 울었다. 녀석의 것을 입에 문 채로 눈을 들어 올려다보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을 엄청난 쾌감에 흐리멍덩하게 흐려진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녀석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선생니임…….” 듣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간드러진 소리가 녀석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만의 착각이었다. 이런 돌발적인 행동으로 녀석을 내 마음껏 요리해 펑펑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젖은 살덩어리를 다시 입 안에 문 순간, 녀석이 내 머리칼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성기를 내 목 깊숙이 처박았다. 목구멍까지 콱 막혀 괴로움에 헐떡이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녀석은 내 얼굴을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무리하게 벌어진 입 사이로 타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래턱에 음낭이 퍽퍽 부딪쳤다. 녀석의 허벅지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손톱까지 세워 단단하게 굳은 허벅지를 긁어도 소용없었다.
녀석은 허벅지를 부르르 떨면서 결국 내 입 안에 정액을 분출했다. 입 안에 질펀하게 싸 놓은 녀석의 허연 정액이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칼을 몽땅 뽑아 버릴 듯이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난 벌떡 일어나 켁켁대며 세면대에 정액을 뱉어 냈다. 아무리 사랑하는 녀석의 체액이라도 똑같이 비리고 역했다.
“너 이 자식, 너무한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짓을…….”
몇 번이나 입 안을 물로 헹궈 낸 뒤에야 욕이라도 퍼부어 줄 요량으로 뒤돌아선 순간, 벌어진 입에 녀석의 입술 살점이 말 그대로 부딪쳐 왔다. 물어뜯을 것처럼 입술 살점을 잘근잘근 짓씹고 혀를 옭아매 쭈우욱 빨았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팔을 버둥거렸다. 입술이 떨어져서 말을 할 타이밍이 왔다 싶으면 다시 입술을 밀어붙여 숨소리까지 빨아들였다.
실수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정신 나간 놈처럼 입을 맞추며 급하게 내 바지를 속옷과 함께 벗겨 내리는 이 녀석은 이성을 잃은 짐승이다. 분명 전에도 이랬었다. 능숙한 섹스 기술을 가진 연상의 연인이 순진한 녀석을 바닥에 깔고 앙앙 울게 만들겠다, 이런 생각으로 애무를 시작했으나 결국은 내가 바닥에 짓눌려 앙앙 울고 말았다.
녀석은 드러난 엉덩이 살점을 쥐어 터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드러난 성기를 애무해 줄 생각도 없이. 굵은 엄지손가락이 긴장 탓에 꿈틀거리는 엉덩이 살점 사이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굳게 맞물린 항문 주름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온몸에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자, 잠깐. 잠깐만!”
나는 녀석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쳐 냈다. 녀석은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입으로 한 번 뿜어내게 해 줬는데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성기를 당당하게 드러내고서.
“여기서 할 생각은 아니지?”
“그럼 안 돼요?”
“여긴 너무 좁아. 그리고 말이다. 콘돔이나 윤활제 같은 것도 없잖아.”
“그럼 나가서 할까요? 콘돔이랑 러브젤은 가져왔으니 안심하세요.”
남자끼리 1박 여행을 가는데 왜 배낭까지 둘러멘 건가 싶었더니, 그딴 것들을 바리바리 챙겨 온 거냐. 내가 그러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욕실 밖으로 나갔다. 욕실 문 앞에서 젖은 윗옷과 반쯤 벗다 만 바지를 훌렁훌렁 벗은 뒤, 녀석은 알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옷장 문을 열어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러고는 이불 위에 앉아 가방을 열어 가져온 것들을 끄집어낸다. 아예 작정을 하고 챙겨 왔구나. 나도 헛웃음을 치며 바지와 속옷을 벗어 던졌다.
녀석은 알몸으로 자기에게 다가가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서자 녀석의 흰 손이 내 팔목을 붙잡아 이불 위에 앉혔다.
욕실 안에서 벌이던 행위가 이어졌다. 입술 살점을 가볍게 빨던 녀석의 입술은 턱 끝을 지나 목덜미를 쓸어내려 유두를 덮었다. 혀끝으로 살살 핥다가 입술로 빨아들이며 다른 한 손으론 반대쪽 유두를 빙글빙글 돌린다. 젖꼭지에 유난히 집착하는 어린애인 덕분에 난 유두를 빨리는 것만으로도 헐떡일 수 있게 되었다. 배 속이 뜨거워지고 성기에 심지가 섰다.
계속되는 애무에 극도로 예민해진 돌기에 덮이는 뜨거운 혀. 약한 고통을 수반한 저릿한 쾌감에 내 입에서 들쩍지근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선생님. 젖꼭지 빨아 주는 거, 좋아요?”
녀석이 혀끝으로 유두를 살살 굴리며 묻는다. 관계 중에 천박한 소리를 지껄이는 건 내 전문인데.
“음……좋아.”
난 솔직하게 반응했다. 낯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건 내 적성에 안 맞는다.
내 반응에 힘을 얻었는지 녀석의 손은 본격적으로 다리 사이로 뻗어 왔다. 음낭 아래에 뻗어 온 손가락이 곧장 좁은 구멍을 쑤셨다. 언제 손에 윤활제를 바른 건지 손가락이 빨려들듯이 구멍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 두 개가 입을 꾹 닫은 구멍을 억지로 잡아 벌렸다. 벌어진 구멍 사이에 닿는 뜨거운 살덩어리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녀석은 성기를 구멍 안에 퍼억 꽂아 넣었다. 터져 나온 비명 같은 신음은 녀석의 입 안에서 사라졌다. 단숨에 쑤욱 박혀 들어온 성기가 내벽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녀석은 이제 겨우 두 번째 섹스를 하는 쑥맥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한 허리 놀림으로 내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과연 이번이 두 번째일까. 어쩌면 내가 나민이를 만나기 전에 그랬듯 이 녀석도 여러 명과 사귀어 봤을지 모른다.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피스톤 운동에 나는 “앗, 앗, 앗!” 하는 짧은 신음을 허공에 흩뿌렸다.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가 녀석이 퍼억, 박아 넣을 때마다 덜렁거리며 복부에 부딪쳤다. 들리는 소리라곤 나와 녀석이 헉헉대는 소리와 맞닿은 아랫부분에서 들리는 찌그덕거리는 마찰 소리가 전부였다.
어느 순간 녀석이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내 상반신을 이불 위에 눕혀 엉덩이만 높게 쳐들게 한 채로 잡아 뺐던 물건을 박아 넣었다. 단숨에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덜렁거리는 성기 끝에선 투명한 눈물이 뚝뚝 흐르고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 이불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쾌감이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무진장 좋았다. 몸뿐만 아니라 뇌 속까지 범해지는 기분이었다.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는 자위 도구로 구멍이 끊임없이 쑤셔지는 듯했다. 지치지도 않고 구멍 깊숙이 쑤셔 대는 녀석의 꼬챙이가 내 몸속에 있는 전립선을 건드린 건지도 몰랐다. 입에서 엄청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애꿎은 이불만 짓씹었다.
등 뒤에서 녀석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내벽을 샅샅이 훑던 성기를 잡아 뺐다. 내 엉덩이에 정액을 뿜었다. 이 배은망덕한 녀석은 선생 엉덩이에 대고 정액을 분출했다.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살점 위에 뿜어졌다가 주르륵 흘렀다.
나는 이불 위에 추욱 늘어져 숨만 헐떡였다. 구멍이 벌름거릴 때마다 느껴지는 작열감마저 쾌감으로 느껴지는 묘한 순간이었다.
그때처럼 밤새도록 달라붙어 괴롭힐 것이라 생각했지만 녀석은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가 젖은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내 앞에 앉아 늘어져서 할딱거리기만 하는 내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닦아 준다.
“죄송해요. 몸도 안 좋으신데.”
“미안하냐?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네. 뭐든지 부탁하세요. 배고프세요? 식당에 가서 밥 사 올까요?”
“무릎베개 좀 해 줘라.”
“딱딱할 텐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녀석은 내 머리를 살며시 들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다.
어렸을 때 이모님 다리를 베고 누웠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던 이모님의 다리와는 달리 녀석의 다리는 조금의 부드러움도 없이 딱딱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잠이 소로록 밀려들었다. 이모님 다리를 베고 누우면 언제나 그랬듯이.
녀석이 차갑게 질린 하얀 손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창밖에서 파도 소리가 엄마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이 세상에 녀석과 나 단둘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최근 들어 이렇게 평화로웠던 때가 있었던가.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전쟁을 치렀다.
“한숨 자고 회 먹으러 나가자. 바다에 왔는데 회를 먹어야지.”
반쯤 잠에 빠져 웅얼대는 소리에 녀석은 네, 저 회 좋아해요, 한다.
“백수 돼서 시간이 남아도는 김에 우리 이것저것 많이 하자. 여행도 가고, 유원지도 가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도 하고. 전망대에 도시 야경도 구경하고, 기념품도 사고…….”
“동물원에도 가요. 저 사자랑 호랑이 좋아해요.”
“그래. 가서 선생님이 호랑이 인형 사 줄게.”
녀석은 “펭귄 인형도요” 하고 한마디 덧붙인다.
“그래. 펭귄 인형도 사 줄게. 추로스도 사 주고 주스도 사 줄게. 루돌프 머리띠도 두 개 사서 커플 사진도 찍고 별의별 짓을 다 해 보자.”
녀석이 싱글싱글 웃었다. 나도 낄낄 웃었다. 덩치 큰 사내놈 둘이 루돌프 머리띠를 하고 유원지 안을 활보하고 다닐 생각을 하니 실없는 웃음만 계속해서 비어져 나왔다.
*
*
우우웅, 우우웅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웅웅대는 소리의 정체는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이었다. 잠이 덜 깨 퉁퉁 부은 눈을 하고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니 김명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이 인간이 웬일인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여보슈. 웬일이에요?”
[임동추, 너 요즘 뭐 하고 사냐?]
“설마 약 올리려고 전화한 거예요? 진짜 너무하네.”
[야,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유치한 짓을 하겠냐. 그냥 어떻게 살고 있나 소식이 궁금해서 해 본 거야.]
귀신을 속여라, 이 인간아. 네놈이 언제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한 적이 있었냐.
“윤영이랑 뭔 일 있어요?”
놈이 합죽이가 됐다. 역시 그럼 그렇지. 대체 이 인간은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가. 아무리 애인이랑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애인 옛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가.
[윤영이, 프랑스로 유학 간대.]
“나랑 사귈 때도 유학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어요, 걔는.”
[나 어떻게 해야 하냐?]
“어쩌긴 뭘 어째요. 잘 갔다 오라고 해 줘야지.”
[외국 나가면 나 같은 놈은 금방 잊어버리고 새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을까? 외국 애들, 멋지잖아.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이목구비 뚜렷하고.]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언제 나간대요?”
[내년 2월에 출국할 거라고 하더라.]
“별수 없죠, 뭐. 유학 간다는 애를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고. 그래 봤자 추할 뿐이에요. 그냥 쿨하게 보내 줘요.”
[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한다?]
놈의 비꼬는 어조에 짜증이 빠악 치밀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이러나.
“그러는 형이야말로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전화해서 연애 상담을 하는 거예요? 윤영이한테 내가 학원 강사라고 얘기해 준 거 형이죠? 그 녀석 지난번에 학원 앞까지 찾아왔었어요.”
[뭐? 진짜? 윤영이가 진짜 그랬어?]
“그럼 내가 없는 얘기를 만들어 냈겠어요? 찾아와서 무서운 얼굴로 온갖 폭언을 퍼붓고 갔어요, 그 녀석.”
[애가 하도 집요하게 물어보기에 가르쳐 준 거긴 한데,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미안하다.]
김명진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사과했다. 나는 눈을 굴려 시꺼먼 어둠이 가득 찬 주위를 돌아보았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벽에 매달린 시계의 야광 칠을 해 놓은 시침, 초침뿐이었다. 내가 잠들기 전까지 무릎베개를 해 주었던 나민이를 찾았다. 오늘도 녀석은 나를 방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녀석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여기서는 그때처럼 밤거리를 배회할 만한 데도 없을 텐데.
[어쨌든 그거는 그거고. 동추야, 너 선아 알지? 박선아.]
머릿속에는 나민이 생각이 가득한데도 김명진의 입에서 나온 ‘박선아’라는 이름을 한 누군가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박선아.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길게 찰랑이는 머리칼을 늘어뜨린 예쁘장한 여자.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한 사람 중 박선아를 기억 못 하는 인간은 없을 터다.
이성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그 찬란하게 빛나던 미모를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선아 선배요? 물론 알죠. 동기 놈들 대부분이 선아 선배를 좋아했었거든요. 워낙 에뻤잖아요.”
[얼마 전에 대학 동창회에 갔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들어서 말이야. 선아랑 진경이랑 사귀는 사이였단 거 알고 있었냐?]
나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석진경과 난 유난히 친한 사이였다. 오래된 죽마고우처럼 우리 둘은 늘 붙어 다녔다. 석진경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기에 녀석의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사실을 몰랐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거 근거 있는 소문이에요?”
[진경이 장례식 때, 선아도 왔던 거 기억하지? 나는 잠깐 갔다가 나와서 몰랐는데 거기 있던 동기들은 다 봤대. 선아가 꼭 자기 식구 죽은 것처럼 넋을 잃고 펑펑 울더라는 거야.]
그건 나도 기억한다. 선아 선배는 거기 있던 그 누구보다 더 슬프고 서럽게 울었었다.
[진경이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면서 용서를 구했다던데. 그때 다들 이해를 못 했대. 쟤가 대체 왜 저러나 하고. 그런데 알고 보니 진경이 군대 가기 전까지 두 사람이 사귀던 사이였다는 거야. 아주 근거 없는 소문도 아닌 게 진경이가 선아 자취방에 드나드는 걸 본 놈들도 있더라고.]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쉴 새 없이 입방아를 찧는 김명진에게 쏘아붙일 수도 노릇이었다.
석진경의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폈지만 그렇다고 스토커처럼 쫓아다녔던 건 아니니까. 학교 밖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뭔지 아냐? 선아가 글쎄 진경이의 아이를 뱄었다는 거야. 선아가 아이를 배고, 진경이는 도망치듯이 군대에 간 거라고…….]
“그만 좀 해요!”
도저히 참고 들어 줄 수가 없어 소리를 빽 내질렀다.
“진경이한테 원수진 일이라도 있어요? 대체 왜 이래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아니, 난 그냥 들은 얘기가 너무 충격적이라서. 너도 모르고 있을 것 같아 알려 주려고.]
“오랜만에 다들 모였으면 자기들 사는 얘기나 나눌 것이지 죽은 후배에 대한 헛소문을 떠벌리며 낄낄댄 거예요? 징그러운 인간들.”
[낄낄대다니. 누가 낄낄댔다고 그래? 징그러운 인간들? 어째 말이 좀 심하다?]
“대체 누굽니까? 그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인 인간이!”
[선아 친구였던 김연진. 어쩌다가 석진경 얘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연진이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해 준 거야. 선아가 혹시 자기 때문에 진경이가 죽은 게 아닌가 싶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냐고.]
머릿속이 하얀 페인트를 쏟아부은 것처럼 온통 뿌옇게 흐려졌다. 자꾸만 석진경의 장례식 때 본 박선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숨넘어갈 것처럼 오열하던 그 모습. 넋을 잃고 늘어진 진경이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해요’ 하면서 눈물을 뚝뚝 쏟던 그 모습.
‘선아 선배. 참 예쁜 것 같아.’ 어느 날 학생 식당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점심 식사를 하던 박선아를 보며 중얼거리던 석진경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언제나 내가 석진경의 모습을 눈으로 찾듯이 석진경도 박선아를 늘 눈으로 좇았었다.
희뿌연 증기가 뿜어져 나올 것처럼 펄펄 끓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전화 통화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진경이가 자살한 건 선아 선배 때문은 아니니까 죄책감 가지지 말고 자기 인생 살라고 해요.”
[뭐? 너 혹시 진경이가 자살한 이유를 알고 있는 거야?]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김명진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 입 싼 참새에게 진실을 말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선아 선배, 연락처 알아요?”
[선아 건 모르겠고. 연진이 번호는 알아. 둘이 아직도 친하다니까 연진이한테 전화하면 선아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선아 핸드폰 번호는 왜 물어? 전화해서 직접 물어보게?]
뭐라도 하나 건질까 싶어서 캐묻는 놈의 목을 쥐고 흔들고 싶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시꺼먼 인영 하나가 안으로 불쑥 들어와 불을 켰다. 점퍼에 붙어 있는 후드를 뒤집어쓴 나민이었다.
나는 못된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흠칫 놀라 얼른 전화를 끊었다.
“누구랑 전화하고 계셨던 거예요?”
“어,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넌 이 밤에 어딜 갔다 온 거야?”
“선생님 배고프실 것 같아서요. 먹을 것 좀 사 왔어요.”
녀석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든 것들을 꺼냈다. 기껏해야 김밥이나 빵 같은 걸 사 왔겠지 싶었는데 안에 든 것은 회였다. 잠들기 전에 회 먹으러 나가자고 한 말을 기억하고 사 온 모양이었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이런 걸 사 와? 나가기 전에 나한테 말을 해서 돈 받아 가지.”
“저 돈 꽤 많아요. 얼른 드셔 보세요.”
녀석이 웃으며 나무젓가락을 내밀었다. 난 젓가락을 받아 들고 얼른 회 한 점을 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죽인다,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게. 너도 얼른 먹어 봐.”
녀석은 웃는 얼굴로 손을 뻗어서 내 입가를 문질렀다. 입가에 초장이 묻어 있던 모양이었다. 내 얼굴에 확 열이 몰렸다. 상대방에게 향한 애정이 존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란 걸 알기 때문일까.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수그리고 회만 열심히 주워 먹었다. 서비스로 준 건지 파 쪼가리 몇 개 든 밍밍한 부침개도 우걱우걱 씹어서 먹어 치웠다. 나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음식을 먹는 나민이의 동그란 머리통이 귀여워 슥슥 쓰다듬었다. 녀석은 눈을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어 줬다.
“선생님, 밖에 눈 와요.”
“그래? 이거 다 먹고 산책하러 나갈까?”
“괜찮으시겠어요? 밤이 돼서 그런지 엄청나게 추운데.”
“여기까지 왔는데 눈 오는 밤바다를 보고 가지 않으면 서럽지.”
우리 둘은 배가 부를 때까지 음식들을 먹어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칼바람이 불어 닥쳤다. 세찬 바람에 눈발이 정신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애처롭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와 나민이는 조심스럽게 백사장에 내려섰다. 차마 축축하게 젖은 모래 바닥에 앉지는 못하고 선 채로 눈 내리는 밤바다를 멍하게 응시했다.
시꺼먼 물이 시꺼먼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경계선에 불빛이 명멸하는 게 보였다. 마치 날 좀 알아봐 줘, 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선아가 진경이의 아이를 뱄었다는 거야. 선아가 아이를 배고, 진경이는 도망치듯이 군대에 간 거라던데.>
끊임없이 계속되는 파도 소리에 김명진의 짜증 나는 목소리가 섞였다.
과연 사실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알던 석진경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면.
녀석은 이미 죽었기에 더 이상 내 앞에서 연기도 하지 못한다. 물속에 푸욱 잠겨 있던 진실이라는 시체가 수면 위로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진실이란 시체를 거둬들이고 처리하는 건 산 자, 아니, 오롯이 내 몫이다.
김명진이 주워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난 한 인간의 겉모습에 현혹되어 엄청난 짓을 저지른 멍청한 놈이 된다.
스스로 자처한 멍청한 짓이 얼마나 많은 오해를 낳았나.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려면 모든 문제의 근원인 석진경이란 인간을 파헤치는 수밖에 없다.
난 흘끔 시선을 돌려 옆에 선 나민이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하얀 얼굴을 하고 새까만 바다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기가 들어 몸을 부르르 떨자 녀석이 내 손을 붙잡았다. 맞잡은 손의 따뜻한 온기는 만들어진 가짜가 아닌,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