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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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 눈을 뜬 것은 몸을 뒤척인 순간 온몸을 얼어붙게 한 엄청난 통증 때문이었다.

허리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은 통증에 난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하반신이 마비된 것 같았다. 정말 마비된 게 아닐까 싶어 이불을 들추자 이불 안에서 진한 정액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위에는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있지만 이불에 뒤덮인 아랫부분은 맨살이었다.

딱 한 번만, 하더니 녀석은 네 번이나 했다. 아무리 젊어도 그렇지 하룻밤에 다섯 번은 비정상적인 거 아닌가. 요즘 젊은 애들은 영양 상태가 좋아서 건강하다더니 그래서인가. 나는 발끝을 꼼지락대며 움직여 봤다. 다리가 보송보송했다. 기절하듯 잠들기 전에는 온몸이 정액투성이였는데. 녀석이 몸을 닦아 준 게 분명하다.

난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어딘가의 구석에 처박혀 누워 있을 녀석을 찾았다. 하지만 방 안 어디에서도 녀석의 웅크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뭘 사러 나간 건가. 하지만 이런 밤늦은 시간에? 내가 지쳐 쓰러진 게 자정이 좀 덜 된 시간이었으니 적어도 새벽 1시나 2시는 됐을 텐데.

손으로 바닥을 딛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보았다.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지랄 같은 통증에 저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 데 성공했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카디건의 거친 표면에 유두가 쓸려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카디건 자락을 살짝 열어 보니 유두가 벌겋게 부어 있다. 녀석이 집요하게 물고 빤 오른쪽에는 피까지 맺혀 있다. 여자들처럼 브래지어를 할 수가 없으니 상처 입은 유두가 천에 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선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수밖에. 게다가 차가운 바닥에 닿은 항문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며 쓰리다.

“이게 무슨 꼴이냐.”

알몸에 카디건 하나만 걸친 채로 웅크리고 앉은 꼴이라니. 이런 꼴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까지 깔아 눕혔던 애들처럼 내가 사내놈 아래에 깔려서 허리를 흔들며 교태를 떨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은.

이제 갓 성인이 된 핏덩이 같은 애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으로 항문을 쑤셔 대며 유혹했던 것도 모자라, 애한테 엉겨 붙어서 앙앙대며 울기나 하고. 그리고 아마 훌쩍거리면서 애원하기도 했지? 좀 더, 더, 나민아, 더 깊게……? 미치겠네!

미쳤구나. 미쳤어, 임동추. 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아마 상처 입은 유두가 다 나을 때까지, 항문의 쓰라림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매번 이러면서 머리칼을 쥐어뜯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더 미치겠는 건 이런 상태에서도 배가 고프다는 거다. 갑자기 내 팔이라도 뜯어 먹고 싶을 정도로 허기가 밀려왔다. 저녁도 먹지 않고 몇 시간에 걸친 격렬한 운동을 했으니 당연하지.

난 거의 기듯이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남자애 혼자 사는 집인데도 냉장고 안이 먹을 걸로 가득 찼다.

아까 녀석이 마트에서 사 왔던 것들인가. 치즈와 게맛살 같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건 무조건 껍질을 까서 입 안에 쑤셔 넣고 봤다. 목이 막혀서 1리터짜리 우유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문득 차갑고 축축한 한기가 목덜미를 감싸는 걸 느꼈다.

갑자기 서늘해진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목덜미를 꽈악 누르던 손가락의 감촉을 기억해 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내 목을 눌렀었다, 나민이는. 목을 조르는 것처럼.

<분명히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있을 거야. 대체 이놈의 정체가 뭘까? 진짜 모습은 어떤 걸까? 하는 생각.>

박하신이 속살거리던 음산한 목소리가 오른쪽 귓가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난 증거를 찾으려고 기어들어 왔어.>

<증거?>

<그래. 증거. 그 자식이…….>

그 자식이…… 놈이 하려던 말은 무엇일까. 놈은 대체 어떤 증거를 찾기 위해 이 집에 숨어들었던 걸까.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묻는다.

한나민을 의심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그 애와 이성을 잃고 뒹굴었던 주제에 지금 뭐 하는 거냐?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품에 안겨 헐떡이는 애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절대로 이 애를 놓치기 싫다고 생각했었던 주제에.

나는 머릿속의 또 다른 내가 던지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목덜미만 손으로 어루만지며 인상을 썼다.

임동추, 넌 한나민을 사랑하잖아. 좋아하잖아. 네 모든 걸 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 좋아한다. 사랑한다. 내 모든 걸 다 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결국 넌 그 녀석을 좋아하지만 믿지는 않는다는 거잖아.

힐난하듯 쏘아붙이는 또 다른 나의 말에 난 이번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가 뜨거운 물줄기 아래 서 있는데도 춥다. 가만 보니 데워진 수증기가 창문 틈으로 사정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화장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조금 열어 놓은 모양이다.

손을 뻗어 열린 창문을 닫으려다 창틀에서 라이터 하나를 발견했다.

<우돼지 돼지갈비>라는 상호가 박힌 플라스틱 라이터다.

나민이가 담배를 피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담배 냄새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박하신 패거리가 이 집에 드나들었다고 했으니, 놈들이 담배를 피우다 놔두고 간 걸지도.

난 대수롭지 않게 라이터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 뒀다.

씻고 나와 멋대로 옷장을 뒤져 옷을 꺼내 꿰어 입었다. 시간은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민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야밤에 대체 어딜 간 거지?

난 당장 나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람 초조하게 만드는 수신 음만 계속해서 이어지더니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넘어가니, 이런 멘트가 새어 나왔다. 잠시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여섯 번의 수신 음이 이어진 끝에 딸칵,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긴 했는데 어째 아무 말도 없다.

“나민아, 너 지금 어디야? 2시가 넘었는데 어디에 간 거야?”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대답 대신 수화기 저쪽에서 길게 후우우, 내뿜는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숨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나민아, 나민아. 괜찮으면 괜찮다, 말이라도 좀 해 봐. 걱정돼 죽겠으니까.”

[선생님, 괜찮아요?]

축 늘어져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녀석이 되묻는다.

[제가 좀 심하게 해서 힘드실 텐데요.]

“그래. 오늘 넌 한 마리 종마였다.”

힘없이 픽픽대며 웃는 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전화상으로는 녀석의 모습을 볼 수가 없지만, 녀석의 몸을 감싼 메마른 한기와 모든 것이 바짝 얼어붙은 황량한 밤거리의 모습이 느껴졌고 보이는 듯했다.

물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퍼석퍼석한 녀석의 목소리 때문일까. 땀과 정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나를 껴안던 뜨거운 녀석의 몸은 아마 지금쯤 차갑게 식어 있을 것이다.

“지금 어디에 있냐? 이 야밤에 혼자서 어딜 그렇게 쏘다녀?”

[혼자 있는 거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 느낌이 팍 오는데. 너 지금 혼자서 밤거리를 헤매고 있지? 나도 답답할 때 자주 그래서 잘 안다. 가출한 애처럼 길거리 방황하지 말고 얼른 들어와라.”

[제가 가출을 왜 해요. 가출한다고 찾을 사람도 없을 텐데.]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녀석이 웃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내가 없어져 봤자 찾을 사람도 없을 거라고 단정 짓는 녀석의 말에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찾을 사람이 없긴 왜 없어. 내가 있는데. 내가 널 찾을 건데.”

녀석은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오토바이 지나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한나민, 오늘 수족관에 가서 좋았지? 상어 귀여웠지? 펭귄도 귀여웠고? 그리고 나랑 했던 섹스, 정말 좋았지? 끝내줬지, 내 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난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수족관 가야지. 놀이공원도 가야지. 맛있는 스테이크도 먹고, 수족관에서 팔던 펭귄 인형도 사고. 나랑 섹스도 더 해야 하고. 그렇지?”

차 소리와 오토바이 소리 때문에 녀석의 숨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른 들어와라. 사람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여 놓고 몰래 빠져나가는 거, 대체 어느 나라 매너냐? 한 시간 내로 들어오지 않으면 나 도망간다.”

[도망가면 잡아 올 거예요.]

웃기지도 않는 협박에 녀석도 그제야 입을 뗐다. 농담이 아닌 말에는 웃고 농담이라고 한 말엔 진지하게 반응한다.

녀석이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지만 사방을 뒤덮는 차 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빠아앙대는 위협적인 소음이 귓전 가득 퍼지더니 이내 전화가 뚝 끊겼다. 배터리가 닳아서 전원이 꺼진 게 분명했다.

나민이는 동이 트기 전, 깜깜했던 사방이 서서히 옅은 남색으로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깨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선 옷도 벗지 않고 내 옆에 드러누웠다. 창 쪽으로 돌아누워 웅크리고 있던 내 등에 녀석이 얼굴을 기댔다.

난 꿈지럭대며 돌아누워선 배 속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녀석은 잠기운이 덕지덕지 앉아 보기 흉하게 부어 있을 내 얼굴을 조용히 쳐다봤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동틀 녘의 빛에 비친 녀석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뭐 하다 온 거야, 대체?”

녀석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날 껴안고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바깥을 실컷 쏘다니고 들어온 고양이가 주인에게 애교를 피우는 것 같다.

녀석의 옷에선 옅은 비린내가 풍겼다.

이 비린내가 뭔지 지겹도록 맡아 봐서 잘 안다. 피비린내다.

난 미간을 좁히며 나민이의 어깨를 껴안고 녀석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묻고 싶은 게 엄청나게 많았다. 왜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해야 할 너에게서 이런 냄새가 풍기는지. 한밤중에 날 내버려 두고 나가서 뭘 하다 온 건지. 하지만 난 침묵했다. 내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 질문하는 순간, 나는 모든 걸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테니까.

“자라. 자고 일어나서 된장찌개 끓여 줘라. 밤새도록 네가 끓여 준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거든.”

품 안에 안긴 녀석이 웃었다. 추운지 더욱 몸을 둥글게 웅크려 말더니 이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 * *

“놈들을 썩지 않게 보관하려면 냉동 창고가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었어. 아무리 겨울이라도 따로 보관할 장소가 필요하겠구나 싶었거든. 한 놈도 아니고 열한 마리나 되는 놈들인데. 고기 보관 냉동고 같은 그런 게 필요하지 않겠냐?”

노금영이 과자를 우걱우걱 씹으며 종알거렸다. 이미 시트와 바닥엔 놈이 흘린 과자 부스러기로 가득했다. 운전대를 붙잡은 봉이가 백미러로 노금영을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제 싹 다 청소해 놨는데 이게 뭐야, 깨끗하게 좀 못 먹냐?”

“치우면 되지, 새끼. 빽가, 너 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해졌냐? 아줌마 같아졌어. 새끼가. 너도 먹을래? 보기보다 제법 맛나다, 이거.”

“너나 처먹어!”

참다못한 백단영이 결국 폭발했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앙칼진 백단영의 외침에도 노금영은 낄낄 웃으며 과자만 처먹었다.

“과자 찌꺼기 흘리지 마쎄여. 이거 회장님 차임미다.”

지금까지 봉인돼 있던 봉이의 입이 기적과도 같이 열렸다.

왜 놈이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생긴 거나 이름을 봐도 한국인인 게 분명한데 어눌한 저 한국어 실력이라니. 차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운전석을 쳐다보았다.

“차, 더티해지면 회장님한테 아야아야, 맞슴미다.”

소도 맨손으로 때려잡게 생긴 놈이 ‘아야아야’란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노금영, 예의라고는 밥 말아 처드신 놈은 배를 움켜쥐고 숨이 넘어가게 웃어 댔다.

“으하하하하! 빽가, 저 새끼 뭐냐? 저 새끼, 생긴 건 오리지널 토종 한국인인데 말을 뭐 저따위로 하냐! 아야아야 맞아? 크하하! 아이고 배야!”

“봉이, 베이비 때부터 계속 미국에서 살다 와서 한쿡어 잘 못함미다. 웃지 마세요.”

너무 대놓고 비웃으니까 딴에는 화가 난 것 같은데 노금영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지기만 했다.

“애 무안하게 왜 그렇게 웃고 지랄이야? 한국말 못하는 외국인 처음 봤냐?”

“크크크. 쌈장에 고추 찍어서 막걸리 한 사발 거하게 들이켜게 생긴 놈이 미국인이라니까 이러는 거잖냐. 그나저나 미국 놈이 왜 이 짓을 해?”

“미국 국적이긴 한데 반은 한국인이니까. 자세한 가정 사정까지는 알 거 없고. 한국이 좋아서 공부하러 왔단다. 생활비 벌려고 잠깐 아르바이트하는 거지. 해결사 협회 회장의 사돈의 팔촌 되는 어르신의 막내아들이란다. 이번 일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겠다고 해서 데리고 다니는 거지.”

“조아요. 멋져요. 매지션! 위자드! 오리엔탈 매직!”

봉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신이 났다.

“어디 한번 네놈이 귀면 놈들이랑 싸워 보고도 ‘좋아요’, ‘멋져요!’를 외칠 수 있는지 보자. 그리고 꼬부랑말 쓰지 마라, 새끼야. 한국 와서 한국말 제대로 안 쓸 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 양키 고 홈!”

노금영이 꽥꽥거리며 운전석을 발로 찼다.

“백 형. 형 프렌드, 나 싫어함미까?”

“저 새끼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냥 무시해. 저 새끼는 미친개라서 아무나 보고 짖어 댄다. 물리지 않게 조심해라.”

조수석에 앉은 백단영이 봉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저딴 말을 위로랍시고 지껄였다.

차에 탄 이후로 어울리지 않게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동수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김태민이 우리에게 과일 박스 배달을 의뢰했을 때요.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 안 했죠?”

어수선한 차 안의 분위기가 일시에 얼어붙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동수의 시선이 시트에 거의 드러눕듯이 늘어진 노금영에게 향했다.

“그래. 그냥 정해진 장소에 박스를 배달해 달라고만 했다.”

“형들은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박스를 받을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요.”

“물론 해 봤지. 하지만 배달받을 장소에 상자를 놓아두면 나중에 와서 가져갈 생각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요. 김태민은 상자 속에 든 뼈를 뺏겨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잖아요. 만약 상자 속 뼈가 정말 중요한 물건이었다면 놈들에게 물건을 뺏긴 우리에게 다시 일을 의뢰하지 않았을 테고요. 하지만 김태민은 다시 일을 의뢰했죠. 상자를 뺏는 귀면이란 존재가 나타났는데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결론부터 말해.”

“용천 도사님이 그러셨어요. 임충식의 뼈를 일반인이 가지고 있으면 온갖 악재가 겹쳤을 거라고요. 김태민 같은 일반인이 그 물건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김태민이 일부러 뼈를 배달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태민이 뼈가 도난당하도록 일부러 방치했다는 거냐?”

“그렇지 않을까요? 아리랑헌터 말대로 김태민이 임충식이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도록 뼈를 불태워 버릴 작정이었다면요, 왜 뼈를 잘게 나눠 배달시켰겠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동수의 말을 집중해 듣고 있던 백단영이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해결사 단체 회장에게 거는 전화인 듯했다.

“김태민을 잡아 주십시오. 네. 그자가 이번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같습니다.”

통화는 몇 초 만에 끝났다.

“며칠 내로 김태민을 직접 심문할 수 있을 겁니다.”

통화를 끝낸 백단영의 어조엔 확신이 차 있었다. 노금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짜증을 냈다.

“젠장. 그렇게 쉽게 놈을 잡을 수 있는 걸 왜 여태 못 잡았냐?”

“사실대로 말하지. 우리도 계속 놈을 찾았어. 하지만 외국으로 튀어 버리기라도 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

“그럼 지금까지도 못 찾은 놈을 갑자기 어디 가서 찾겠다는 건데?”

“아마 회장이 그쪽 방면 전문가에게 따로 의뢰를 할 거다. 지금까지는 자존심이 상해서 우리끼리 처리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그쪽 방면 전문가? 어디 외국 킬러라도 불러오게?”

“너희들 밤일꾼들은 그쪽 방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없었겠지. 너희들끼리 처리할 수 있는 가벼운 일들을 해 왔을 테니까. 하지만 우린 아냐. 살인, 청부 폭력 같은 일 빼고는 별의별 일을 다 맡는다. 예전에는 청부 살인 일도 했지만 그건 다 옛날 일이고. 어쨌든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쉽게 알아낼 수 없는 기밀 정보가 필요할 때가 있어. 그때 전문가 놈들에게 정보를 사는 거다.”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저번에 네놈이 술 마시면서 해 준 정보 수집가인지 뭔지 하는 놈들 얘기하는 거지?”

“그래. 그 변태 새끼들.”

놈들과 얽힌 좋지 않은 추억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백단영이 이를 뽀드득 갈았다. 노금영과 백단영이 나누는 대화 내용엔 관심이 없는지 동수 놈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저 자식이 웬일일까.

평소였다면 눈을 빛내면서 정보 수집가란 놈들은 또 뭐 하는 놈들인지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싶어 쳐다봐도 이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대시보드 위에 놓인 내비게이션이 상냥한 목소리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는 멘트를 토해 냈다.

“아리랑헌터가 말한 데가 여기가 맞아?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데?”

노금영이 차창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봉이는 커다란 나무 옆 잡초밭 위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춰 서자 다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동수는 둘러멘 커다란 등산용 가방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 나와 노금영에게 주었다. 지퍼가 열린 동수의 가방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애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칼 같은 목검도 들어 있었다.

“웬 목검이냐? 가지고 오려면 식칼이나 가지고 올 것이지.”

“건드리지 마요. 왜 남의 걸 마음대로 꺼내요?”

노금영이 목검을 꺼내 장난스럽게 휘두르자 동수가 신경질을 내며 다시 빼앗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가장 늦게 차에서 내린 봉이가 얇은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던 상반신에 전투기 비행사 유니폼 같은 점퍼를 껴입었다. 그리고 난 보았다. 녀석의 허리춤에 꽂힌 그것을.

“저기 미스터 봉…….”

“노노. 그냥 봉이라고 불러요. 나 이십두 살이에요. 어려요. 젊어요.”

“그래. 봉아. 네 허리춤에 꽂혀 있는 그거 말인데. 혹시 총이냐?”

봉이는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허리춤에서 그것을 빼들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진짜 총이었다. 총기 소유가 법으로 금지되는 나라에서 저걸 대체 어떻게 구한 걸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 묻진 않았다. 돈만 있으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세상이다. 돈으로 사람 장기까지 사고파는 세상인데 총 정도야.

“백 형이 고스트 페이스들은 죽지 않는다고 했슴미다.”

“귀면들은 총으로 쏴도 죽지 않을 텐데.”

“이걸로 고스트 페이스, 머리. 쏠 검미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놈들이라도 머리를 쏴 터뜨리면 움직임이 둔해질 게 분명하다.

사물을 보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모든 기관이 얼굴에 몰려 있으니까. 몸뚱이만 남은 놈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헛발질만 해 대는 신세가 될 거다.

그런 의미에서 봉이가 가지고 있는 총은 무척이나 위협적인 흉기가 될 터. 힘들여 칼이나 쇠파이프 같은 걸 휘두르지 않아도 방아쇠만 당기면 놈들 머리를 터뜨릴 수 있을 테니 얼마나 편리한가.

“봉아, 총 좀 더 구할 수 없냐?”

“오케이. 구해 줄게요. 구하는 데 1주일 걸려요.”

나도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목소리를 죽여 묻자 녀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해 주겠다고 했다.

꼭 외제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걸 구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봉이는 다시 총을 허리춤에 꽂아 넣고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모두 동수가 손전등으로 비추고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손전등 불빛이 다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라비틀어진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폐건물은 공포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우중충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벽에 칠이 벗겨진 ‘㈜삼호’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걸 보면 공장이었던 모양이었다.

“저기에 귀면들을 보관하고 있다고?”

“그래. 아리랑헌터가 알려 준 정보가 사실이라면.”

노금영이 던진 질문에 백단영이 즉각 대답했다. 아무도 섣불리 건물 가까이에 다가갈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동수가 척척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철컥철컥 열어 보더니 힘으로는 열리지 않자 가방에서 공구를 꺼내 자물쇠를 잘랐다. 동수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쇳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미처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동수 놈은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귀면 놈들이 어두운 데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도 동수 놈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고 폼을 잡은 때였다.

컹컹컹! 갑자기 개가 신경질적으로 짖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헤드라이트 불빛이 우리를 확 비추었다.

“거기 누구냐!”

개 짖는 소리에 섞여 사람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어느 정도 불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스쿠터를 탄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백구 한 마리가 노인을 비호하듯 당장이라도 우리들에게 달려들 것처럼 경계 태세를 취한 채 으르렁대고 있었다.

“누군데 이 야밤에 이러고 있는 게냐, 이놈들아!”

노인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근처에 사는 분이십니까?”

백단영이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래. 태어날 때부터 줄곧 이 마을에서 살았다. 행색을 보아하니 서울에서 온 놈들인 모양인데 사내놈들끼리 뭐 하러 이런 데까지 온 게냐? 이 근처엔 술집도 없고, 네놈들 놀 만한 데도 없는데.”

“일이 있어 지방에 내려가는 길인데 갑자기 차에 이상이 생겨서요.”

“그래? 그럼 얼른 차 손봐서 갈 길 가. 여기서 이러고 있지들 말고. 그리고 저 건물은 사유지니까 함부로 들어가지 마라.”

다행히 노인은 백단영의 말을 믿어 주었다. 벌써 자물쇠를 자르고 한 놈이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걸 들킬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노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탈탈거리는 스쿠터 엔진 소리가 한동안 길게 이어졌다. 우리들은 노인과 스쿠터 옆에 바짝 서서 뛰는 백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똥수야. 너도 다 들었지? 니미,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

노금영이 안으로 들어서며 먼저 들어가 있을 동수에게 말을 걸었다.

안은 보기보다 꽤 넓었다. 녹슨 기계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사이로 불빛이 반짝였다. 불빛에 모여드는 벌레처럼 우리들은 기계 무덤들을 헤치고 나갔다.

우리들을 인도했던 불빛은 동수가 들고 있는 캠코더의 불빛이었다.

놈은 장승처럼 우뚝 버티고 서서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풍경을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녀석이 왜 말없이 저러고 서 있는지, 녀석이 눈으로 보고 있던 것들을 우리들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우리들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귀면들이 눈앞에 있었다.

보드라운 담요에 감싸인 아기처럼. 난로 위의 고양이처럼. 양탄자 위의 개처럼.

얌전히 정자세로 누워 잠이 든 놈들이. 놈들은 침대도, 양탄자 깔린 소파 위도 아닌, 마트 생선 코너나 정육 코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냉동 케이스를 침대 삼아 누워 있었다. 얼굴에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서.

얼음 덩어리들이 가득한 냉동 케이스 안에 누운 놈들은 냉동 고기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귀신일지라도 인간의 모습을 한 놈들이 든 냉동 케이스가 총 열한 개.

노금영이 차 안에서 ‘귀면들을 썩지 않게 보관하려면 냉동 창고 같은 데가 필요할 텐데’라고 했었다.

그 말이 맞았다. 놈들은 정말 귀면들을 냉동 케이스에 보관하고 있었다. 평소엔 이 안에 보관해 뒀다가 필요할 땐 꺼내 쓴다, 이건가.

“와우. 어메이징.”

봉이가 중얼거리며 감탄했다. 놈은 그냥 감탄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냉동 케이스로 다가갔다. 캠코더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유리 뚜껑 안을 바라보는 봉이의 모습까지 찍고 있었다.

“꼭 관 같군.”

백단영의 목소리는 긴장과 놀라움 탓에 약간 쉬어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보니 관 속에 누운 시체 같아. 우리가 싸웠던 놈들이 정말 시체였구나 싶어서 기분 더러워지네.”

노금영처럼 내 기분도 묘했다. 놈들은 정말 시체였다.

아니다. 사람들은 시체를 저런 식으로 다루진 않는다. 놈들은 그냥 물건에 불과해 보였다.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고깃덩어리. 저들도 생전엔 우리들 같은 사람이었을 텐데. 저 사람들도 우리들처럼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실 줄 아는 인간이었을 텐데 말이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타액이 썼다.

“이제 어쩌지?”

“동수 씨가 찍고 있는 영상을 도사 연합 대표에게 보여 줘야지.”

노금영의 말에 백단영이 즉각 반응했다.

“그건 그거고. 지금이야말로 이 새끼들을 싹 다 없앨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은데.”

“그거야 그렇겠지만, 이놈들을 무슨 수로 없애? 칼로 찌르고 팔다리를 잘라도 죽지 않는다며?”

“아리랑헌터가 그랬었잖아. 우리가, 아니, 김태민이 임충식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놈의 뼈를 불태우려 한다고. 그럼 우리도 이놈들을 불태우면 되지 않겠냐?”

“하긴 뭐, 밑져야 본전이지. 그럼 놈들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얼른 해치우자.”

노금영과 백단영이 나름의 계획을 세우는 사이. 봉이가 유리 뚜껑을 열고 잠든 귀면의 얼굴에서 탈바가지를 벗기려 했다.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한 동수가 “벗기지 마!” 하고 외치는 순간. 봉이는 귀면의 얼굴에서 탈바가지를 벗겨 냈다.

외국인 담당 백단영이 얼른 달려가 봉이의 손에서 탈을 빼앗았다.

“내가 얌전히 시키는 일만 하라고 했지! 이 자식아!”

“고스트 페이스. 냄새 심하게 난다. 이렇게 썩었는데 어떻게 일어나?”

봉이가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벗겨 낸 탈을 다시 귀면의 얼굴에 씌우는 백단영의 얼굴도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군.”

“그것들이 눈을 떠서 움직이면 더 끔찍해진다. 그나저나 빽가. 차 끌고 나가서 휘발유 좀 구해 와라.”

“휘발유는 왜?”

“이놈들을 태워 없애야지. 빨리 갔다 와. 이놈들이 깨어나면 생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노금영이 담배 하나를 빼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순간. 조용하던 냉동고가 갑자기 일제히 우우우웅, 울부짖듯이 모터 돌아가는 소리를 토해 냈다. 열한 개의 모터가 동시에 돌아가는 소리가 공장 안에 가득 들어찼다.

“젠장. 무슨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이렇게 커? 이건 무슨…….”

“쉿! 조용히 좀 해 봐요!”

나는 노금영의 말을 매정하게 잘랐다. 모터 소리에 섞인 어떤 소리를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리 안 들려요?”

“뭐? 똘추, 너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요. 동물이 헥헥대는 소리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장 안에 ‘컹!’ 하고 크게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앞에 개 한 마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하얀색 털을 지닌 진돗개였다. 그리고 백구의 뒤에는 웬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서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폐공장 밖에서 만났던 노인과 개였다.

우리들이 사유지에 몰래 들어가기라도 할까 봐 되돌아온 것일까. 하지만 이미 우린 안에 들어와 있다. 아까처럼 그럴듯한 거짓말로 속여 넘기진 못할 것이다.

“아까 내 말을 듣고 돌아갔으면 좋았잖아. 젊은 놈들이 왜 그렇게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나 그래!”

노인의 왜소한 체구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깊은 목소리였다.

잔뜩 긴장해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다들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숨소리마저 죽이고 눈을 번뜩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영감, 무학 도사지?”

노금영이 사태 파악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직구를 던졌다.

노인이 크크크,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날벌레처럼 부웅 날아와 귓구멍에 착 달라붙는 소름 끼치도록 음산한 웃음소리였다.

“아리랑헌터. 그 망할 아저씨, 우릴 속인 거군. 어쩐지 순순히 귀면 놈들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불더라니.”

노금영은 바닥에 피우지도 않은 장초와 침을 퉤 뱉었다. 하지만 아리랑헌터가 우리를 완전히 속인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귀면은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그래. 언젠가 영감을 만나서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마침 잘됐어. 영감, 진짜 세계 정복을 하고 싶은 거야?”

누가 저 새끼 입 좀 틀어막아. 백단영이 중얼거렸지만 누가 노금영의 주둥이를 틀어막을 수 있으랴.

“호연 도사, 그 새끼가 그러더냐? 내가 세계 정복을 위해서 이 짓을 하는 거라고? 허허! 아주 노망이 났구먼, 노망이 났어.”

“나도 그 생각을 했어. 도사 연합인지 뭔지 하는 그지깽깽이 사이비 무속인들 집합소 대빵이라고 깝치고는 있는데, 사실 노망난 늙은이 아닌가 싶었다니까. 그런데 그 노망난 늙은이가 금지된 술법으로 어쩌고저쩌고하기에 무학 도사란 영감탱이도 미쳐도 완전히 미친 노인네인 모양이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 영감?”

“그래 보이는 게 아니라 난 정상이다. 난 미치지 않았어. 미친 건 도사 연합, 그놈들이지. 그래. 그놈들이 뭐라더냐?”

“당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악당이니 우리한테 돈다발을 안겨 주면서 없애라는데?”

“꼭두각시들이나 임충식의 뼈는? 나를 없애면서 그것들까지 싹 다 처리하라고는 안 하더냐?”

노금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이 와중에도 동수는 꿋꿋하게 캠코더를 돌리고 있었다. 노금영이 무학 도사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난 눈으로 빠르게 주위를 훑으며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네놈들은 도사 연합 놈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냐? 그놈들이 ‘선’이고, 내가 ‘악’이라 생각하느냔 말이다.”

“아니. 우리들이, 아니, 내가 정의야. 내가 ‘선’이고. 나와 우리들 패밀리를 건드리고 못살게 구는 놈들은 모조리 ‘악’이야.”

무학 도사의 말에 노금영은 조금도,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뭐 그런 당연한 말을 묻느냐고 반문하듯이.

“영감탱이, 당신이랑 도사 연합 노인네들이랑 사이가 무진장 나쁜 건 알겠어.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잘 알겠어. 하지만 난 관심 없어. 알고 싶지도 않아, 그딴 거. 다만 이것만 알아 둬. 우릴 먼저 건드린 건 그쪽이야. 갑자기 나타나서 얌전히 잘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해를 입힌 건 당신이 만든 시체 인형들이라고. 그러니까 당신들은 악당이야. 도사 연합 노인네들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적어도 그 노인네들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진 않았다 이거야! 오히려 돈을 줬으면 줬지!”

노금영은 큰소리를 치며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너 이름이 뭐냐?”

“노금영이다!”

“그래, 노금영. 네놈 참 마음에 든다. 네놈의 시체로 새로운 꼭두각시를 만들어야겠다.”

어둠 속에서 무학 도사의 두 눈이 맹수의 눈처럼 번쩍 빛났다.

생각 탓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엄청나게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내 몸뚱이가 바르르 떨렸다.

모터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모터 소리 사이에 섞인 우우우우, 기분 나쁘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닐 터였다. 백단영과 봉이, 그리고 나는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감이고 뭐고 약에 쓰려 해도 없는 몸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사방을 가득 채우는 무겁고도 불쾌한 공기.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올라 순식간에 온몸을 덮는 차갑게 얼어붙은 습기가 느껴졌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늪지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영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어. 임충식의 뼈를 모으는 이유가 대체 뭐야?”

줄곧 히죽히죽 웃는 낯으로 무학 도사를 상대하던 노금영의 목소리도 불안에 떨리고 있었다.

“뼈를 다 모아야 임충식을 부활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

무학 도사가 노금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괜히 힘들게 뼈를 모을 필요도 없이 임충식도 귀면들처럼 혼 덮어씌우기인가 뭔가로 살려 내면 되잖아.”

“네놈들 주위에 있는 도사 놈들한테 들었겠지만 꼭두각시들은 불완전하다. 놈들은 계속해서 썩고 있어. 썩고 있는 몸뚱이야 새것으로 교환하면 된다고 쳐도, 놈들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자기들을 만들어 낸 나까지도 물어뜯을 본능만 남은 짐승이란 게 문제지. 놈들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새로운 꼭두각시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임충식이다.”

“아리랑헌터나 다른 사람한테는 임충식을 부활시켜 당신의 죽은 딸을 살려 내고 그 사람들 죽은 가족들을 살려 주겠다고 했다며? 다 거짓말이야?”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 혼을 끌어오는 건 문제없으니까. 혼을 끌어올 시체만 있다면야.”

무학 도사가 비열하게 낄낄 웃으며 백구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컹컹컹! 개가 사납게 짖어 대며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우리들이 아니라 귀면들을 넣어 둔 냉동 케이스로. 녀석이 냉동 케이스 앞에서 컹컹컹 신경질적으로 짖어 댔다.

그 순간 열한 개의 냉동 케이스가 동시에 덜컹덜컹거리며 움직였다.

“꼭두각시들아, 일어들 나라!”

무학 도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사방에 웅웅 울렸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냉동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봉이가 갑자기 “오마이갓!” 소리를 내질렀다. 깜짝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까만색 탈바가지를 뒤집어쓴 귀면 한 마리가 뚜껑을 열고 기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씩 유리 뚜껑을 드르륵 열고 천천히 냉동 케이스 밖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기어 나온 놈들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으르렁댔다. 열한 개의 각기 다른 탈을 뒤집어쓴 낯짝들이 어둠 속에서 부자연스러운 광택을 띠고 빛났다.

놈들 사이에서 새까만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백구가 무학 도사에게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알려 주마. 내 딸이 곧 임충식이 될 거다.”

무학 도사는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듯 주인을 올려다보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임충식의 혼을 딸의 몸에 덮어씌울 생각입니까? 당신 딸이지 않습니까!”

언성을 높여 외친 것은 노금영이 아니라 나였다.

무학 도사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7년 전, 강원도에 내려갔을 때. 두레 식당 주인인 무학 도사와 난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내가 저 노인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처럼 저 노인도 날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손자를 죽여서 그릇으로 쓸 수는 없잖느냐.”

여전히 백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지껄이는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난 할 말을 잃었다.

살아 있는 손자라면 갈색 가면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릇이라니. 자기 딸은 죽었으니 그릇으로 쓴다, 이건가.

어떻게 자기 피가 섞인 딸과 손자를 도구 취급할 수 있는가. 분노가 치밀었다. 노인이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 내 눈에는 저 영감탱이가 자기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구나, 귀면들보다도 못한 악귀로 보였다.

무학 도사는 이내 내게서 차가운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입을 열어 외쳤다.

“꼭두각시들아, 밥 먹을 시간이다!”

출발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를 들은 육상 선수들처럼 귀면들이 “캬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당신은 분명 천벌을 받을 겁니다!”

나는 백구와 함께 뒤돌아서는 노인에게 외쳤다. 무학 도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껄껄껄!” 목을 크게 뒤로 젖혀 웃었다. 열려 있던 철문이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난 달려드는 귀면 한 마리를 발로 찼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발길질에 놈이 나동그라진 사이, 동수가 가방에서 꺼낸 손도끼를 던졌다.

보호용 커버를 벗겨 내기가 무섭게 나동그라졌던 놈이 다시 달려들었다. 뭔가 저번과는 달랐다. 공격적이고 포악한 것은 여전하지만 달려든 귀면은 내 손을 덥석 물었다. 깜짝 놀란 나는 손도끼를 휘둘러 달라붙은 놈을 떼어 냈다. 놈에게 물린 손등에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들 조심해! 이놈들, 우릴 잡아먹을 생각인 것 같아!”

백단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피가 배어 나온 손등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고 있으려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배가 고프다 이거지. 네놈들은 우릴 밥으로 보고 있다 이거지. 때려 부수지 않으면 먹힌다 이거지.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맘껏 때려 부숴 주마!

내 손등을 물어뜯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이 다시 달려들었다. 팔 근육에 온 힘을 실어 사정없이 손도끼를 휘둘렀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탈바가지가 쩌억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썩어 문드러진 얼굴이 손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피 곤죽이 되어 갔다. 얼굴이 사라져도 팔다리를 꿈틀대며 나를 붙잡으려 하는 몸짓이 아주 조금 불쌍해 보였다.

나는 양팔을 허우적대며 내 팔을 움켜쥐는 귀면의 목에 도끼날을 꽂았다.

목의 반이 잘려 엉망으로 망가진 썩은 얼굴이 뒤로 홱 넘어갔다. 그 꼴을 하고서도 용틀임을 해 대고는 있지만 아까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뭐야? 이놈들, 영 매가리가 없잖아. 너희들은 겨우 이런 놈들을 상대하면서 온갖 앓는 소리를 했던 거냐?”

바닥에 쓰러진 귀면 놈 하나를 발로 짓이기던 백단영이 지껄였다.

“오늘따라 이놈들이 힘이 없는 거야. 이놈들이 기운 펄펄 넘쳐흘렀을 땐 얼마나 무시무시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새끼야. 주둥이 확 꿰매 버린다.”

노금영의 말에 백단영은 코웃음을 쳤다.

짜증은 났지만 백단영의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오늘 놈들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흐물거렸다. 조금만 쳐도 휙 넘어가고, 부서지고,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놈들의 모가지를 하나씩 따서 활활 태워 버리는 것도 가능한 일일 듯했다.

하지만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다. 무학 도사가 우리가 귀면들을 쥐 잡듯 두들겨 패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을 텐데.

“하긴 전에 용천 도사가 이놈들은 언젠가 썩어서 못 쓰게 될 날이 올 거라고 했잖…….”

노금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천장 위에서 비가 쏟아졌다. 천장이 막혀 있을 텐데 웬 비?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자 눈앞이 시뻘건 색으로 물들었다.

쏟아지는 것은 비가 아니었다. 붉은색 피가 천장에 복잡하게 얽힌 철제 파이프 같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으악! 블러드! 블러드!”

봉이가 호들갑을 떨며 시뻘겋게 물든 얼굴을 문질렀다. 백단영은 넋이 나가 있었고, 노금영은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내 입에서도 맙소사, 세상에, 같은 탄식조의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우리들 중 가장 침착한 것은 동수였다. 놈은 후두둑후두둑 쏟아지는 붉은색의 비를 맞으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들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잠시 정신이 나가 있는 사이, 힘없이 늘어져 있던 귀면들이 비칠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식물에 물을 주면 축 처져 있던 잎사귀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듯이. 놈들은 쏟아지는 핏물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일어섰고, 움직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놈들과 벌인 육탄전은 장난에 불과했음을.

“쒸벌! 일단 밖으로 튀어!”

나와 똑같은 것을 알아챈 노금영이 침을 튀기며 일갈했다.

노금영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백단영도, 동수도, 봉이도, 나도 뛰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무학 도사가 밖에서 문을 잠가 놓은 것이리라.

캬아아아악!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귀면들이 동시에,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열한 마리가 동시에 고무공처럼 튀어 올라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각양각색의 흉기를 든 손을 쳐들고 놈들과 싸울 준비를 했다.

핏물을 뒤집어쓴 놈들은 분명 아까와는 달랐다. 있는 힘껏 손도끼를 휘둘러 살점을 도려내고 찌르고 베어 내도 단 몇 초 정도 휘청대기만 할 뿐이었다.

난 동시에 달라붙은 세 놈을 상대하느라 순식간에 체력이 바닥났다. 점차 도끼를 휘두르는 손에 힘이 빠졌다.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땀방울과 함께 입 안으로 스며드는 핏물의 맛은 정말 지랄 같았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속이 뒤집어졌다.

“으아악!”

움직임이 둔해진 사이를 놓치지 않고 한 놈이 달려들어 내 팔뚝을 물어뜯었다.

난 비명을 지르며 반대쪽 손으로 도끼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부숴 버리려 했다. 하지만 다른 놈 하나가 반대쪽 어깨를 콰악 깨물었다.

내가 목청껏 비명을 지르면서 미친 듯이 꿈틀댄 순간이었다. 도끼를 쥔 쪽의 어깨에 달라붙어 있던 귀면의 뒤통수가 퍼억, 소리를 내며 터졌다.

끼야아악!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중 최고로 소름 끼치는 째지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귀면은 내게서 펄쩍 뛰어 떨어졌다. 그놈의 비명 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절대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게 달라붙어 있던 한 놈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핏물에 섞인 땀이 눈으로 흘러든 탓에 나는 눈을 세게 깜빡였다. 벌건 핏물을 뒤집어쓴 동수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형, 괜찮아요?”

눈앞에 있는 동수의 존재보다 그토록 사납던 귀면들이 우리들 눈치를 살피며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귀면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뭉쳐서 후욱후욱,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동수,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이래요. 악귀 쫓는 데에 이거만 한 무기 없대요. 게다가 용천 도사님이 부적까지 새겨 넣어 주셨는데 진짜 효과 있네요, 이거.”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이란 건 동수가 들고 있는 목검을 말하는 것일 거다. 아까 동수의 가방에서 본 목검이다. 동수 놈은 가방에서 자기가 들고 있는 것의 반 정도 되는 크기의 목검을 꺼냈다.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요. 형 주려고 용돈 탈탈 털어서 산 거니까. 이거 하나에 20만 원씩이나 하는 거예요.”

내 손에 목검을 꼬옥 쥐여 주는 동수 놈을 빤히 쳐다봤다.

덩치만 커다란 막내가 오늘따라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귀신을 상대하면서도 퇴마 용품을 구입할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도끼, 칼, 총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나 상해를 입힐 수 있을 무기들만 챙겼을 뿐이지.

“얼른 가요. 저 뒤에 쪽문이 있어요. 다른 형들은 다 그리로 빠져나갔어요.”

동수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붙잡아 끌었다. 난 손을 뻗어 동수의 어깨를 움켜쥐어 잡아 돌렸다. 그러고는 녀석의 두툼한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대 쪼오옥, 소리가 나게 키스했다.

“뽀뽀해 주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동수 놈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은 내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향해 뛰기 시작했을 때에야 꽥꽥대며 발광했다.

“으악!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런 데서, 이런 꼴로 하는 거 반칙이에요! 반칙! 다음에 겁나게 분위기 있고 겁나게 좋은 데서 한 번 더 해 줘요! 형, 동추 혀어엉!”

무진장 웃겼다. 이런 상황에서, 피 칠갑을 한 꼴을 하고서 콧소리로 애원하는 동수 놈이. 옷이나 구두 같은 게 아니라 귀신 퇴치용 목검을 선물이라고 주는 놈이.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거리를 두고 따라붙는 귀면들이. 우리가 들고 있는 부적을 새긴 목검에 맞을까 봐 섣불리 덤벼들지도 못하는 주제에 캬아악 캬아악 울어 대는 놈들의 꼴이.

나는 달리면서 미친놈처럼 웃었다. 내장이 다 떨릴 정도로 “으하하!” 신나게 웃었다. 허리를 완전히 숙여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 실실 웃어 댔다.

“미쳤냐? 왜 웃고 지랄이야?”

피 묻은 옷을 벗어 허공에 탈탈 털고 있던 노금영이 짜증을 냈다.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동수가 문 앞에 뭔가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귀면들이 문 앞에 모여 서서 키약키약 울부짖으면서 아우성만 쳤다. 가만히 보니 문 앞에 종이 쪼가리 몇 개가 붙어 있었다. 용천 도사에게서 사 온 부적이리라.

“부적은 장당 얼마 받더냐?”

“저 부적은 되게 강력한 거라서 한 장에 만원이에요. 부적값은 나중에 공금으로 처리할 거예요!”

노금영도 들으라는 듯이 동수 놈은 언성을 높였다. 놈들의 우두머리인 하얀 가면 놈이 용기를 냈다.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고 살점이 녹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놈이 용기를 낸 덕분에 부적 한 장이 찢어져 너덜거렸다.

“커억! 5만 원짜리 부적 살걸!”

동수 놈이 꽥 소리를 질렀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용천 도사, 그 영감은 정말 타고난 장사꾼이다.

동수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오늘 일을 교훈 삼아 당장 용천 도사에게 달려가서 악귀 퇴치용 물품들을 사 들일 테니 말이다. 물론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하지만 백단영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사실을 말해 주었다.

무학 도사의 짓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이동 수단이 고물이 되어 버렸다.

주위에는 집 한 채 없다. 보이는 것이라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가로등 불빛 몇 개뿐이었다. 도로로 나가려면 숲길을 한참이나 걸어가야 한다. 이 어두운 밤에, 손전등 하나 달랑 들고.

그렇다고 희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곧 박천수와 기식이, 천달봉이 이리로 올 것이었다.

“금영 형, 천수 형님께 전화해 봐요!”

그때에서야 노금영이 “아, 맞다!” 손바닥을 마주쳐 짜악 소리를 내더니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천수 형님이 이리로 오는 중이란다! 올 때 휘발유도 사 오라고 했다.”

몇십 초간의 다급한 통화 후, 노금영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를 외쳤다.

“박천수 씨가 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이거군요.”

트렁크 안에서 뭔가를 찾던 백단영이 다가왔다. 그가 “필요합니까?” 하면서 내게 내민 것은 총이었다. 봉이도 이미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고 있었다. 트렁크에서 총을 꺼내 들고, 총을 건네고. 외국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광경에 노금영과 동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이거 진짜 총이에요? 끝내준다.”

“그래. 총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꺼내 들어야 해결사 집단이지. 죽인다, 야!”

두 사람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자 백단영의 목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똥수, 넌 안 돼. 넌 퇴마용 목검이나 휘둘러.”

“나도 총 쏠 거예요. 쏴 보고 싶다고요.”

“쏠 줄이나 아냐?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온 새끼가.”

노금영과 동수가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는 사이, 귀면이 다시 한번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서 두 번째 부적을 찢었다. 기왕 아픈 거 한꺼번에 아프고 말자 싶었는지 귀면이 재빨리 마지막 세 번째 부적마저 찢어발겼다. 한 마리의 숭고한 희생으로 통로가 뚫리자, 놈들이 한꺼번에 그 좁은 문에서 기어 나왔다.

한 놈이 입을 쩌어억 벌리고 허공에 튀어 오른 순간,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놈의 머리가 터졌다. 썩은 살점들이 사방에 흩어졌다.

백단영이 쥔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입김처럼 뿜어져 나왔다. 군대에 있을 때에나 맡아 봤던 화약 냄새가 콧속으로 화악 스며들었다.

새삼 느꼈다. 인간은 정말 위대하다는 걸.

‘저놈들, 인간이 아냐, 귀신이야, 귀신!’ 하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우리는 저런 놈들을 상대로 지금까지 잘도 싸워 왔다. 게다가 봐라. 저놈들은 지금 겁에 질려 있다. 무시무시한 흉기를 든 우리들을 경계하고 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저 징글징글한 귀신 놈들이.

“형. 지금 우리들, 겁나게 멋있지 않아요?”

동수가 웃음기 섞인 어조로 속삭였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한똥수다웠다.

“얼른 저 새끼들 조져 버리고 감자탕 먹으러 가자!”

힘내자, 박천수가 올 때까지 버텨 보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 다 끝내고 감자탕 먹으러 가자는 말에 가슴속의 전의가 활활 불타올랐다.

따뜻한 감자탕 생각에 입 안에 침이 고이고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먹을 거 생각에 눈이 홱 돌아갔는지 갑자기 동수가 “감자타아앙!” 하고 외치며 무리 지어 뭉친 귀면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귀면들도 “카아아앙!” 이번엔 꽤나 귀여운 소리로 울며 동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동수는 “감자탕! 감자탕! 감자탕에 소주!” 이따위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굶주린 러시아 불곰에 빙의해 초인적인 힘으로 귀면들을 두들겨 팼다.

귀면들도 ‘너만 배고프냐! 나도 배고파! 네놈 살점을 내놔!’ 하듯이 동수 놈이 휘두르는 복숭아나무 검에 맞아서 휘청대면서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생존, 아니, 누가 먹고 누가 굶느냐. 밥을 건 싸움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

바람이 불었다. 더럽게도 차가운 바람이. 동수가 “에취잉!”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소리를 내며 기침을 했다.

장마철 이불 빨래처럼 온몸이 축 늘어졌다. 진짜 힘이 들어 죽을 것 같았다. 지칠 대로 지쳐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이렇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지쳐 늘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노금영은 아예 차에 기대서서 땀을 죽죽 쏟으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백단영도 힘들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밥을 건 싸움은 실로 대단했다.

피를 뒤집어써 양분을 흡수한 귀면들의 기세도 대단했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갓 스무 살 된 국산 토종 열혈 청춘 한동수와 스물한 살 양키 혼혈 김봉일.

이 두 녀석은 오늘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튀었다.

동수는 밥, 감자탕과 소주를 위해. 김봉일, 봉이는 오로지 재미와 쾌락을 위해. 목검을 휘두르고 총을 쏴 대고,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해 대고, ‘에이, C8!’, ‘퍽큐. 갓뎀!’ 한국 욕과 영어 욕을 현란하게 쏟아 내며 공격을 퍼부었다.

거기다가 백단영과 노금영의 지원 사격, 내가 동수 놈이 준 도목검을 휘두르는 내 공격까지 가세한 우리들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끊임없이 퍼붓는 파죽지세의 공격에 귀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할 줄 아는 공격이라곤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밖에 없는 놈들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총알이란 게 써 버리면 없어지고, 사람은 언젠가는 지쳐 쓰러진다는 게 문제였다.

귀면들의 최대 장점이 바로 이거다. 사람이 아니란 것.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비틀대다가 결국 나는 차체에 몸을 기댔다. 타이어가 펑크 난 해결사 회장의 차는 이 근처에서 유일하게 몸을 기댈 수 있는 물체였다. 옆에서 노금영도 차에 등을 기대고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천수 형님네, 혹시 무학 도사한테 당한 게 아닐까.”

노금영이 꺽꺽대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노금영이 박천수와 통화한 지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 간다. 도중에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 온다 해도 이미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다.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땀에 푹 젖은 백단영도 축 늘어졌다.

“앓는 소리 한다고 욕해도 좋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여기서 아무도 앓는 소리 한다고 욕할 사람 없다. 말꼬투리 잡아 빈정대기 좋아하는 노금영도 이번엔 숨만 쌔액쌔액 몰아쉬었다.

동수가 한 장에 만 원짜리 부적으로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 그 안에 귀면들을 가둬 놓는 게 보였다.

물론 땅바닥에 부적을 깔아 놓은 것뿐이라 귀면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려 발악을 해 댔다. 동수는 원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귀면들을 복숭아나무 검으로 후려쳤다. 그런 똥수의 모습은 포악한 맹수를 철제 우리 속에 가둬 놓고, 발악하는 녀석들은 전기 충격기로 지져 버리는 밀렵꾼을 연상케 했다.

부적으로 그린 원 옆에 서서 꿈틀꿈틀대는 귀면들을 감시하는 동수도, 봉이도 지쳐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우리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저놈들이 우릴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겠죠?”

난 부적으로 만든 원 안에 갇힌 귀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놈들은 엉망이었다. 머리가 날아간 놈들도 여럿 있었고, 하나같이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진 꼴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엉망으로 지쳐 있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때 내려야 할 결론은 하나뿐이다. 그런데도 노금영과 백단영은 입을 꾸욱 다물고 있다. 누가 먼저 약한 소리를 하느냐. 같잖은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지금이라도 후퇴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도 그놈의 꼴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도망’ 대신 ‘후퇴’라는 단어를 썼다. 우리 셋은 암묵적인 눈빛을 교환했다.

“야, 한똥수! 김뽕알!”

나와 백단영의 눈빛에 숨은 ‘튀자!’라는 의중을 읽어 낸 노금영이 소리쳐 애들을 불렀다.

봉이에게 벌써 별명 하나가 붙었다. 김봉일. 그러니까 김뽕알. 노금영이 손짓을 하자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르 달려왔다.

“천수 형님은 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오늘은 후퇴한다.”

“걸어서요?”

“그래. 걸어서. 별수 있냐.”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동수 놈을 두고 노금영은 차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고는 오는 도중 입이 심심하다며 편의점에 들러 사 온 간식거리가 든 봉지를 꺼내 나왔다.

“가다가 식당 나오면 밥 사 줄게. 일단 이거라도 먹어.”

노금영은 동수에게 가장 큰 과자 봉지와 우유를 던져 주고, 자기는 초코바 하나를 꺼낸 뒤에 안에서 먹고 싶은 걸 꺼내 먹으라며 봉지째로 내게 내밀었다.

백단영은 트렁크에서 꺼낸 검은색 천 가방을 어깨에 짊어졌다. 내가 마지막 남은 과자를 내밀자 놈은 냉큼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과자 봉지를 품에 안은 백단영은 무리의 선두에 섰다. 백단영이 든 손전등이 시꺼먼 어둠이 깔린 흙길을 비추었다.

이름 모를 잡초들이 무성하게 뒤덮인 흙길. 이정표도 뭣도 없다.

차를 타고 오면서 본 거라곤 길옆으로 뻗은 앙상한 나뭇가지, 말라붙은 나뭇잎으로 감싸인 산뿐이었다. 차를 타고 와도 으스스했던 그 길을 이제는 두 발로 걸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저놈들은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아까 보셨던 것처럼 싸구려 부적이라 놈들이 발악을 하면 금방 찢어져요.”

동수의 말에 우리들 모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원 안에 갇힌 열한 마리의 귀면 놈들이 고막 찢어지는 괴성을 지르면서 펄떡펄떡 뛰어 댔다.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먹잇감을 놓치게 생겼으니 미쳐 날뛸 만도 하다. 놈들의 발악에 벌써 부적 몇 개가 찢어졌다.

“부적은 얼마나 남았냐?”

“없어요. 가지고 온 건 다 썼어요.”

“총알은?”

“없다. 나, 봉이, 그리고 내 거. 각자 가지고 있는 총 안에 든 총알이 다야.”

백단영의 대답 역시 절망적이었다. 튀기로 마음먹은 것은 무진장 잘한 짓이었다. 그사이 놈들이 부적 하나를 또 찢었다.

“서두릅시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선두에 선 백단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놈의 젠체하는 리더십의 발현이 고마웠다.

‘감자탕, 소주!’를 외치며 뛰어다녔던 동수는 과자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새 울음소리, 그리고 동수 놈이 과자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소리가 섞였다.

한동수는 과자를 우걱대며 씹고, 가끔 가다 콧물도 흐읍 빨아들이고, 목이 막혀 컥컥 기침을 해 대고. 발아래가 보이지 않아 돌부리에 걸려 “엄마야!” 소리를 지르면서 휘청대고. 혼자서 쉴 틈도 없이 온갖 소음을 만들어 냈다.

녀석은 코를 훌쩍훌쩍거리고, 뽀시락뽀시락 소리를 내면서 과자 봉지를 열어 우걱우걱 씹는다.

“아오, 새끼야! 과자를 처먹든지 콧물을 처먹든지. 하나만 해, 하나만!”

“거참, 한동수 씨. 조용히 좀 합시다. 조용히!”

“아, 새끼. 거 진짜 더럽게 시끄럽네!”

결국 참다못한 노금영과, 백단영, 내가 동시에 동수 놈을 돌아보며 빽 소리쳤다. 과자를 씹던 동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우! 왜 먹는 걸로 그래요! 오늘 나, 진짜 멋지게 활약했잖아요. 나 없었으면 공장 안에서 잡아먹혔을 건데, 형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먹는 걸로 뭐라 그러더냐? 먹는 건 좋은데 제발 조용히 좀 처먹으라고.”

“형들 무서울까 봐 일부러 소리 내는 건데, 배려 넘치는 막내의 맘을 왜 몰라줘요!”

“배려 좋아하네. 네놈이 무서운 거겠지!”

바로 옆에서 듣는 노금영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청각이 마비될 지경이어도,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이번엔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임신한 치와와처럼 짖어 대던 노금영도, 바락바락 대들던 동수도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앞에 선 백단영도 걸음을 멈추고는 빳빳하게 굳었다.

끝도 없이 뻗어 있을 것 같은 어둠 속 길 저편에서 부아아앙, 하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기식이인가?”

노금영이 그렇게 말한 것은 들려오는 소리가 오토바이 엔진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불빛은 빠른 속도로 우리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엔진 소리도 더욱 커졌다. 아주 짧은 순간 희망을 품었다. 다가오는 저놈이 자기 애마를 끌고 나온 기식이일 것이라고. 하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불빛이 하나 더 늘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세 대의 오토바이가 동시에 내뿜는 울부짖음에 공기가 진동했다.

“피해!”

백단영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우리들은 길옆의 수풀 사이로 몸을 던졌다. 딱 한 명. 봉이만이 길 위에 남아 다가오는 놈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서 있었다.

“봉아!” 백단영이 외쳤다.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봉이를 비추었고, 봉이는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은 순간, 한 대의 오토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난 검은색 광택으로 뒤덮인 오토바이는 굶주린 짐승처럼 봉이를 덮쳤다. 다행히 봉이는 놀랍도록 재빠르게 수풀 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토바이는 빠른 속도로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 대의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나머지 두 대의 오토바이는 길 저편에 멈춰 섰다. 오토바이 두 대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번쩍이며 몸을 던진 수풀 밖으로 기어 나오는 우리들을 거만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부릉부릉, 언제든지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오토바이를 노려봤다. 내 눈에는 아주 똑똑히 보였다. 오른쪽 오토바이 위에 탄 갈색 가면을 뒤집어쓴 놈의 얼굴이.

“저놈이지? 귀면들을 부리는 젊은 도사 놈.”

노금영의 질문에 나도, 동수도 대답하지 않았다. 동수가 “크흠크흠!” 헛기침을 하며 목을 좌우로 돌리고 손가락 관절을 꺾어 댔다.

시선이 느껴졌다. 저놈은 분명 날 보고 있다. 가면 속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비릿한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백단영의 시선이었다.

놈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저놈은 대체 뭘 알고 있지? 갈색 가면과 나의 관계? 갈색 가면이 내게 들끓는 적의를 품고 있다는 것? 석진경과 무학 도사의 딸, 갈색 가면, 그리고 나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관계도까지 꿰고 있는 것일까.

“저놈들까지 나타난 걸 보면 역시 우릴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이번에도 역시 그 누구도 노금영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두 대의 오토바이가 약 몇 초간의 시간 차를 두고 고막이 울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우리들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갈색 가면과 검은 헬멧이 한 손으로 뭔가를 척 펴 들었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의 트레이드마크인 삼단봉이었다.

백단영이 총을 꺼내 들었지만 한발 늦었다. 총을 꺼내 든 순간 검은 오토바이가 백단영의 팔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백단영이 “억!” 소리를 내며 총을 떨어뜨린 순간 그 뒤에 있던 노금영도 어깨 쪽을 얻어맞고 크게 휘청댔다. 몇 초 정도 늦게 출발한 나머지 오토바이 한 대, 갈색 가면은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나는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디 한번 해 보자, 새끼야!

갈색 가면이 삼단봉을 든 손을 쳐들었다. 나도 목검을 쥔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 때문에 눈을 깜빡인 아주 짧은 순간. 놈을 태운 오토바이는 나를 덮쳤다.

빠악! 퍼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휘두른 각자의 흉기에 놈은 어깨를, 나는 머리를 얻어맞았다.

후두부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과 함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내가 비틀거리는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발이 바닥에서 붕 뜬다 싶더니 어느새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흙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바닥에 쓰러져 누운 상태로 나는 귀면들이 굶주린 들개 떼처럼 달려오는 걸 보았다.

놈들은 시뻘겠다.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 빨간 페인트를 들이부은 것처럼 핏물에 푹 젖어 있었다. 아까 먼저 저리로 간 놈이 놈들에게 핏물을 쏟아부은 것이리라.

동수가 포효하며 달려오는 귀면들에게 목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총성이 몇 번 이어졌고, 곧 봉이가 영어로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금영의 굽어진 뒷모습, 백단영이 떨리는 왼손으로 총을 들어 마지막 총알까지 소진하는 모습. 달려들고 또 달려드는 핏물을 뒤집어쓴 귀신들. 그리고 그런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는 두 대의 오토바이 불빛.

마지막 희망이었던 박천수는 오지 않는다. 퇴로는 놈들이 막고 있다. 우리들의 체력은 점점 고갈되어 간다. 이를 악물며 깡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죽을 순 없잖은가. 이런 데서, 이런 시골구석에서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귀신들에게 잡아먹히라고?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몸에 힘을 주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썩은 시체한테 잡아먹히는 짓은 못 하겠다.

두 다리로 욕 나올 정도로 힘겹게 버티고 선 순간.

어느새 다가왔는지 하얀 가면을 쓴 귀면이 바로 내 눈앞에 서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놈의 하얀 가면을 쓴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깨진 가면 틈 사이로 그르릉그르릉대는 불쾌한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숨을 멈추고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또 한 발 물러서려는 때.

하얀 가면이 갑자기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감싸 쥐어 들어 올렸다. 발끝이 붕 떴다. 난 목을 움켜쥔 귀면의 손을 잡아떼려 애쓰며 버둥댔다. 허공에 뜬 발이 우스꽝스럽게 파닥파닥 움직였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켁켁대는 와중에도 난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쳐다봤다.

아까 바닥에 쓰러지면서 놓친 물건이다. 저것만 있으면. 저것만 있으면 놈의 머리통을 부술 수 있을 텐데.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귀면의 새하얀 가면이 번쩍 빛났고, 가면의 깨진 틈 사이로 보이는 썩은 입이 나를 먹어 치우기 위해 쩌억 벌어졌다.

나는 손을 뻗어 놈의 얼굴을 만졌다. 정확히는 깨진 틈 사이로 드러난 놈의 맨살이다.

썩어서 말랑거리는 놈의 턱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놈의 썩은 턱이 바스러졌다.

힘이 더 남아 있다면 이대로 놈의 하관을 통째로 뭉갤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놈이 입을 쩌억 벌리고 내 목을 물었다.

목에 박히는 날카로운 이빨의 감촉. 내 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이 크게 뒤틀렸다.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퐁퐁 샘솟아 흐르는 핏물이 옷깃을 적셨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정말 죽을 텐데. 유백색으로 흐려지는 눈앞에 놈이 보였다.

저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오토바이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갈색 가면의 얼굴.

나는 떨리는 손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놈에게 도움을 요청하듯이.

이대로 내가 이 더러운 놈한테 잡아먹히는 걸 보고만 있을 거냐. 산 채로 껍질을 까 주겠다며. 손발톱을 뽑아 주겠다며.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증오하는 놈이라며.

“살려 줘라. 새끼야…….”

내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차피 저놈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들릴 리가 없다.

하지만 갈색 가면이 움직였다.

놈과 한 몸이 된 오토바이가 빠르게 달려왔다. 날카로운 엔진 소리가 웅웅 울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일순 새하얀 빛에 감싸였다.

곧 얼굴이며 목에 뭔가가 쏟아졌다. 부서진 귀면의 머리통 파편이었다.

얼굴의 반이 날아간 충격에 귀면이 허우적대는 사이, 갈색 가면은 나를 낚아챘다. 내 허리를 낚아채듯 감싸 안고는 그대로 귀면들과, 내 동료들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성인 남자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조작해 오토바이를 운전한다? 이건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런 상태로 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놈은 오토바이를 멈춰 세우고는 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흙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숨을 쉬려 하자 쿨럭쿨럭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핏물이 타액과 함께 쏟아졌다.

“왜 구해 줬냐?”

놈에게 물었다. 저 앞에 서서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놈에게.

“짜증 났어. 당신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서 말이지.”

“시체한테 산 채로 잡아먹히는 게 쉽게 죽는 거냐? 미친놈.”

코웃음을 치며 난 입 안으로 들어온 흙을 뱉었다.

“너, 왜 그런 미친 영감이랑 사냐? 그 영감, 죽은 네 누나의 시체를 이용해서 임충식을 부활시킬 모양이던데. 어떻게 자기 딸한테 그럴 수가 있냐니까, 살아 있는 손자를 죽일 순 없지 않냐고 하더라.”

“그런 사람이라도 유일한 내 가족이니까.”

나는 상반신만을 겨우 일으킨 채로 오토바이 위에 탄 놈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누나의 시체가 임충식의 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영감은 널 죽여서 그릇으로 쓸 거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반박하지 않는다.

갈색 가면은 침묵했다.

놈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 할아버지가 어떤 인간인지.

비쩍 말라비틀어진 소년의 모습이 놈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소년은 굶주려 있었다. 사랑에, 친절에, 관심에. 소년은 고아가 아니었다. 돌봐 주는 보호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강원도 두레 식당의 사내애는 온몸으로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 짓 그만두고 미친 영감 곁에서 떠나라.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 거다, 너.”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이지?”

“네놈이 갑자기 더럽게 불쌍해져서.”

“당신이 내게 그런 개소리를 지껄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놈의 목에서 핏덩이를 토해 내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당신이잖아. 당신이 내 누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어!”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면 속이 좀 편해지냐?”

“시끄러워.”

“네 누나가 살아 있었다 한들 네놈 생각이 그따위인데 뭐가 변했겠냐. 네 누나가 살아 있었다 해도 그 영감은 네 누나를 죽였을 거다. 아니면 네놈이 죽었겠지!”

“닥쳐!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그 영감이 무섭냐? 무서워서 벗어날 수가 없냐? 그럼 그 영감을 죽여. 영감탱이를 죽여서라도 벗어나. 귀신들 우두머리 노릇 같은 거 때려치우고 지금부터라도 네놈 인생을 살란 말이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래. 몰라. 모른다. 네놈 이름이 뭔지, 네놈이 몇 살이나 처먹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그런데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네놈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짓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거.”

꽥꽥대며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악을 쓰던 놈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어린놈이다. 하는 짓도 어리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다. 녀석은 학원에서 만나는 천방지축 똥개 같은 애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거 하나도 확실하지. 당신이 내 누나를 죽였다는 것. 당신은 내 인생을 망쳤어.”

곧 녀석의 음산한 목소리가 밤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한 길 위로 깔렸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빼앗을 거야.”

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노금영과 동수의 얼굴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확실하게 처리해 주지.”

이번에는. 그 단어가 얇은 칼날이 되어 귓속을 후벼 팠다. 난 바닥을 디딘 팔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했다. 허리에 힘을 주어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외쳤다.

“그 인간들한테 손만 댔단 봐. 죽인다.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릴 거다, 새끼야!”

“역시 당신은 얼굴을 그따위로 구기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제일 섹시해.”

놈의 손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을 내 얼굴을 쓸었다.

“당신 눈빛을 보니까 아래가 불끈 섰어. 당신 입 안에 내 걸 쑤셔 넣었다간 잘리겠지.”

“그래, 새끼야. 잘근잘근 씹어서 먹어 치울 거다.”

볼을 쓸던 손가락이 내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내가 입을 쩌억 벌려 손을 물려고 하자 놈은 얼른 손을 떼어 냈다.

“당신 동료들 앞에서 당신을 알몸으로 만들어서 뒷구멍에 내 걸 쑤셔 넣으면 얼마나 짜릿할까? 그때 당신을 억지로 범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걸 탐욕스럽게 먹어 치울 테지?”

“미친놈…….”

갈색 가면 속에서 낮게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놈이 오토바이 핸들을 쥐었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인간들한텐 손대지 마. 네놈이 증오하는 건 나잖아. 날 괴롭혀.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야, 미친놈아! 이 새끼야! 죽여 버린다, 너. 죽인다, 진짜!”

갈색 가면과 한 덩어리가 된 검은 오토바이는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길 저편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귀면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크고 소름 끼치는 울부짖음이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제히 푸드덕 날갯짓을 해 밤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으아아악!”

나도 허공에 피맺힌 소리를 내지르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이가 부서질 정도로 깨물며 일어서려 했지만 팔에 힘이 빠져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두 발로 걸어갈 수가 없으니 온몸을 이용해 기어갔다. 입에선 연신 욕이 새어 나오고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비어져 나왔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놈이 이런 내 꼴을 보며 실컷 비웃어 주려고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앞쪽이 아니라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놈이 사라진 방향은 분명 저 앞쪽인데 말이다.

“동추 형? 형이에요?”

이윽고 귓속으로 날아든 그 목소리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멜로디만큼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 앞에는 기식이가 있었다.

나를 보고 달려오는 녀석의 못생긴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껴안고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식아, 도와주러 가야 돼. 금영 형이랑 동수…….”

“천수 형님이랑 달봉이 형님이 먼저 가 있을 거예요.”

기식이는 나를 부축해 오토바이로 데려가 뒤에 앉혔다. 나는 기식이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서 축 늘어졌다.

기식이의 오토바이는 내가 온몸으로 기어가려 했던 그 길을 빠르게 달렸다. 뭔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뭘 태우는 거냐?”

기식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차 물을 필요도 없었다. 곧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

인간 대 귀신들의 격전이 벌어졌던 곳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이 빠져나가서 타오르는 불꽃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뻘건 혀를 날름대는 불길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귀면 두 마리. 놈들은 불 속에서도 꿈틀대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불에 타고 있는 것은 놈들이 입고 있는 옷가지뿐. 썩어서 너덜거리는 몸뚱이는 불에 타지 않았다.

“천수 형님네가 오는 걸 보고 다른 놈들은 다 도망갔어요.”

절뚝거리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동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녀석의 얼굴은 말라붙은 핏물과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했지만 눈빛만은 강렬했다.

“다음엔 꼭 다 죽여 버려요.”

‘죽여 버릴게요’가 아니라 ‘죽여 버려요’란다. 난 대답하지 않고 동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런데 저것들 태우는 냄새가 어째 고기 굽는 냄새 같지 않냐?”

노금영이 피우던 담배를 불 속에 던지며 우리들에게 물었다. 동수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불 속에서 지치지도 않고 꿈틀대는 귀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것들 뜯어먹으면 숯불갈비 맛이 날까요?”

먹잇감을 바라보는 굶주린 맹수의 눈빛을 하고서 입맛까지 쩝 다시는 놈이었다. 농담이 아니다. 이 자식, 진짜로 귀면들을 뜯어 먹을 기세다.

“밥 먹으러 가자, 밥!”

노금영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박천수가 툭 끼어들었다.

“저놈들은 어쩌고? 저대로 놔두고 갈 거냐?”

“미쳤어요? 기껏 잡은 대어를 다시 놔주게요? 야. 뽕알, 똥수! 불 꺼, 불! 저 새끼들 우리가 데려간다!”

빨리 일을 끝내야 밥을 먹으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팀의 막내 두 명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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