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Ch5. 전국 도사 연합) (13/28)

#Ch5. 전국 도사 연합

- 01~03

01 -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팝콘 박스를 들고서 벗어 두었던 머플러를 주섬주섬 챙겨 일어섰다.

“저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 뒤에 보너스 영상이 있다고 했었는데.”

뒤따라 나온 나민이가 귀엽게 툴툴댔다. 나도 그 말은 들었다. 저 영화는 꼭 마지막까지 봐야 한다고.

하지만 어쩌겠나. 생리적인 배설 욕구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데. “나 잠깐 화장실” 하고 나민이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화장실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손을 씻을 때 노금영에게 온 문자였다.

[오늘 밤 9시까지 지하 도살장으로 와라.]

도살장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기분 나쁘게 보일 수도 있다니.

지금까지 지하 도살장에 모이라는 문자를 받으면 거기서 술 퍼마시며 놀 생각에 신이 났었는데.

[오늘 못 가요. 일이 있어요.]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는 답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이 날아왔다.

[너 오늘 쉬는 날인 거 다 안다.]

저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인간은 오늘 내가 쉬는 날이란 걸 어떻게 아는 거야. 간다, 못 간다 답도 보내지 않고 난 핸드폰을 다시 품 안에 쑤셔 넣었다.

나민이는 영화 팸플릿들이 꽂혀 있는 곳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다음엔 이 영화 봐요.”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이 개봉 예정 영화 팸플릿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그래. 개봉하는 첫날에 예매해서 보자.”

“이 영화는 아이맥스 3D로 봐야 된대요.”

“그럼 거기로 예매하지 뭐.”

“아이맥스 3D 영화, 비싼데.”

“돈 걱정하지 마.”

난 웃으면서 나민이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박천수가 도사 연합에게 받은 계약금을 5등분으로 나눠 계좌로 이체해 주었으니까.

“밥이나 먹자. 뭐 먹을래?”

“영화는 보여 주셨으니까 밥은 제가 사야 하는데요.”

“나중에 돈 벌면 그때나 사 줘.”

“그래도 죄송해서요.”

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웅얼대는 녀석을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여기 비싸지 않아요?”

“매일 이런 데서 사 줄 수 있는 거 아냐.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사 주는 거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먹고 싶은 거 시켜.”

“특별한 날요?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너랑 내가 첫 번째 데이트하는 날.”

나민이가 이를 드러내고 실실 웃으면서 날 쳐다봤다.

“날 보지 말고 메뉴판이나 봐.”

“전 어차피 봐도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이런 데 많이 와 보셨을 테니까 알아서 시켜 주세요.”

“그럼 진짜 내가 알아서 시킨다?”

대답도 없이 나민이는 아예 메뉴판을 엎어 놓고서 나를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실없이 웃는 얼굴이 좀 모자라는 애처럼 보이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난 손을 뻗어 눈썹 아래까지 자란 녀석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눈까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

“넌 눈 모양도 예쁘고 이마 모양도 보기 좋아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 더 멋질 거다.”

“그런데 애들은 제 눈매가 무섭대요.”

나민이가 살벌한 눈빛을 감추기 위해 앞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거 아니냐고 했다. 동수 놈은. 빨간 패딩, 하신이 놈은.

“그냥 쳐다만 보는 건데도 애들이 싫어하더라고요. 눈빛이 무섭다면서요. 그래서 앞머리를 길러서 가리고 다녔더니 이젠 음침해서 싫다네요.”

“그럼 웃어. 넌 웃으면 귀여워.”

“그게 잘 안 돼요. 선생님 말씀대로 밝은 성격으로 고쳐 보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요. 웃긴 웃는데 어색한 웃음이 돼서 오히려 역효과더라고요.”

“내 앞에선 이렇게 생글생글 잘 웃는데 말이야.”

“선생님 앞에선 잘 웃게 되고, 어린애처럼 막 떠들게 되고, 평소 저답지 않게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그런데 다른 사람 앞에선 그게 안 되네요.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그런가 봐요. 선생님이랑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전 자꾸만 망가져 가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여전히 멋지신데요.”

“망가지면 좀 어때. 귀엽기만 한데.”

가게 안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 갔다.

지나가는 점원을 불러 난 겨울 한정 특별 메뉴를 주문했다. 사진으로 보기에도 양이 상당히 많아 보였으니 둘이 먹기엔 충분할 터였다.

“선생님, 손금 봐 드릴까요?”

점원이 메뉴판을 수거해 사라지자 나민이가 갑자기 내 손을 보여 달라고 했다. 속셈이 빤히 보였지만 모른 척, 난 손을 터억 내밀었다.

예상대로 손금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녀석은 내 손을 조물조물 만져 댔다.

손가락 끝으로 손바닥 여기저기에 움푹 팬 손금 선을 긁기도 하면서. 따뜻한 실내에 있는데도 나민이의 손은 차가웠다. 손이 차가워서인지 녀석의 손이 오늘따라 유난히 희게 보였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네요. 선생님도 그동안 힘드셨겠어요.”

간지러워서 손을 빼내려는 순간 자못 진지한 얼굴로 내 손바닥을 바라보던 나민이가 입을 열었다.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묘하게 걸리는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내가 나민이에게 부모님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

“형제는 없고, 선생님 혼자시고요. 쭉 XXX에서 사시다가 서울로 올라오셨죠?”

“그런 것까지도 손금으로 알 수 있는 거냐?”

의도치 않게 목소리 끝이 떨렸다. 녀석이 굳은 내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기억 못 하시는구나. 선생님이 예전에 클럽에서 절 꼬셨던 때 저한테 얘기해 주셨던 내용이에요.”

내가 과거 얘기를 했다고? 클럽에서 만난 하룻밤 상대에게?

그 당시의 나민이는 그저 클럽에서 낚은 하룻밤 상대에 불과했을 뿐이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난 내 진짜 모습을 숨기는 데 도가 튼 인간이다.

“이상하다. 내가 너한테 그런 얘기를 했을 리가 없을 텐데.”

나민이가 시무룩해졌다.

“선생님은 정말 절 못 믿으시나 보네요.”

“아니, 널 믿고 못 믿고를 떠나서 내가 웬만하면 남한테 내 얘기를 잘 안 하거든. 물론 지금은 너한테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다 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냥 클럽에서 만난 사이였잖아.”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 선생님이 저한테 해 주신 얘기예요. 그게 아니면 제가 어떻게 선생님 부모님 일이나, 고향까지 알겠어요?”

“거짓말이 아닌 거 알아. 내가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네가 나에 대해 어떻게 알았겠어? 다만 좀 이상하단 거지. 내가 남을 믿지를 못해. 누군가와 친해져도 그 사람한테 내 얘기를 하지 않아. 내 과거가 남들과는 좀 다르거든. 남한테 내 아버지나 고향에 대한 얘기를 하면 대부분 날 무조건 동정하거나 피할 테니까.”

나민이는 변명을 하듯이 말을 늘어놓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던 두 눈이 날 바라본다. 머리칼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까만 동공 가운데에서 빛나는 두 개의 빛을 본 순간, 서늘하고 축축한 손이 목덜미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 믿어 주시면 안 될까요?”

각질이 살짝 일어난 녀석의 입술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난 대답도 하지 않고 눈만 커다랗게 떴다.

“전 선생님을 믿어요. 선생님의 과거가 어떻든 전 진짜로 아무 상관 없어요. 지금의 선생님 모습으로 제 옆에 있어 주시기만 하면 돼요.”

“지금의 내 모습이 진짜 모습이 아니라 만들어진 거라도?”

“선생님, 저도 남을 믿지 않아요. 절대로요. 전 어릴 때부터 계속 배신만 당했거든요. 선생님의 과거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유년 시절도 만만치 않게 구질구질하고 처참해요. 전 제 식구들조차 믿지 않아요. 그런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이에요, 선생님은. 제 앞에서 보인 선생님의 모습이 모두 가짜였다면 이렇게 선생님이 좋아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 모두 가짜는 아니었다.

이 녀석 앞에선 어느 정도 내 진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허세 부리며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녀석은 날 멋지다고 해 줬다. 내 모든 걸 얘기해도 이 녀석은 조용히 날 바라보면서 내 손을 만져 줄 것이다. 적당히 내 처지를 동정도 하고, 동감도 하면서.

주문한 음식이 차례대로 나왔다.

금세 테이블에 음식 그릇들이 가득 찼다. 나는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나민이의 앞에 전부 갖다 놓았다.

“선생님, 저만 다 주시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도 드세요.”

내가 먹지 않으면 녀석도 먹지 않을 것 같아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먹는 걸 보고서야 나민이도 포크를 들었다. 모양 좋은 앙증맞은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스테이크가 맛있는지 녀석은 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고깃점을 씹었다.

“맛있냐?”

“네. 진짜 맛있어요. 사실 이런 데에서 이런 거 먹는 거 처음이거든요. 친구들이 부모님이랑 이런 데 가는 거 보고 되게 부러웠는데. 저런 데에서 먹는 스테이크는 무슨 맛인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이런 맛이었구나.”

핏기가 돌아 발그스름해진 녀석의 입술에 미소가 퍼졌다.

남은 고기 한 점까지 소스를 삭삭 발라 입 안에 넣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나도 그랬다. 나도 고등학교 때 그 흔한 패스트푸드점 한 번 가 보질 못했었다. 돈도 없었고 같이 갈 친구도 없었으니까.

“너희 아버지랑 어머니, 이혼하신 거야?”

이제는 이런 걸 물어도 될 사이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뇨.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7년 전에요.”

“그렇구나. 7년 전에…….”

7이란 숫자가 어느 순간부터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숫자가 됐다.

모든 일이 7년 전에 일어났다. 그런데 녀석의 어머니도 7년 전에 돌아가셨다니. 이 녀석에게도 7이란 숫자가 행운의 숫자만은 아닐 것이다.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채소 덩어리를 찍어 먹었다. 흐물흐물한 게 맛은 별로였다.

“너희 어머니도 되게 미인이셨을 것 같아.”

“네. 참 예뻤어요. 동네에서도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어요.”

“너희 아버지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바로 재혼을 하신 거야?”

“그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계속 저랑 사시다가 최근에야 재혼하신 거예요. 사실 같이 살았을 때부터 그렇게 상냥한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많이 엄하고, 무뚝뚝하고, 절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죠.”

나민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는 절 싫어하셨어요.”

나민이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테이블 어딘가를 멍하게 바라보는 두 눈에는 분명히 그게 보였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향한 분노.

오래 쌓인 분노는 살기의 덩어리가 되어 몸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게 된다. 그건 기생충이다. 몸속에 자리 잡은 덩어리는 살아서 꿈틀대며 조금씩, 천천히 몸을 갉아먹는다.

“나민아, 우리 밥 먹고 어디 갈까?”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데가 어디야?”

“수족관요. 물고기가 보고 싶어요.”

수족관이라. 예전에 딱 한 번 데이트할 때 가 봤던 적이 있다. 그때 잠깐 만났던 녀석이 놀이동산이나 수족관 같은 데 가는 걸 좋아하던 녀석이라 매주 데리고 다니며 노느라 월급을 몽땅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수족관 좋지. 난 상어가 참 귀엽더라.”

“상어가 귀여워요?”

“입을 벌리면 사나워 보이는데 평온하게 헤엄치며 다니는 걸 보면 되게 귀엽던데. 특히 콧구멍이랑 입 있는 데가. 막 쓰다듬어 주고 싶더라고.”

녀석이 볼을 가득 부풀려 음식을 씹으면서 푸흐흐 소리를 내 웃었다. 나도 씩 웃었다.

만족스러운 식사 후, 기분 좋게 음식값을 계산하고 나오자 나민이가 편의점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 얼마 후 밖으로 나온 녀석은 양손에 캔 커피 두 개를 사 들고 와서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선생님이 비싼 밥 사 주셨으니까 전 후식을 쏠게요.”

“고맙긴 한데, 내 이 남산만 한 배 좀 봐라. 커피가 들어가게 생겼나.”

“하하. 선생님 배, 뽈록해서 되게 귀엽다.”

녀석이 웃으면서 내 배를 쓰다듬었다. 온몸이 간질간질한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하나. 막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려고 하고 팔다리가 배배 꼬이는 이 포근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을.

나도 장난치듯이 녀석의 배에 손을 갖다 댔다. 하지만 뱃살은커녕 딱딱한 근육만 만져졌다.

“그런데 넌 어째 그렇게 먹어도 배가 안 나오냐. 먹인 보람도 없이.”

자기는 아무렇지 않게 남의 배를 주물럭대더니 내가 만지니까 녀석은 꺄흐흑,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길 한복판에서 이상한 데 만지지 마세요.”

“먼저 만진 건 너다. 그리고 배가 왜 이상한 데야? 거참, 이상한 녀석이네.”

“선생님 손길이 야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잖아요.”

성욕 하나만큼은 철철 흘러넘치는 녀석이었지. 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아랫도리를 발딱 세울 나이긴 하다.

난 약간 붉어진 녀석의 단정한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저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발정 난 짐승처럼 헐떡이면서 덤벼든단 말이지.

“선생님,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세요.”

지하철역으로 향해 승강장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녀석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민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날 보는 녀석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진지하긴 한데 당당하진 못해서 볼우물이 팬 뺨을 씰룩인다. 직설적이고 야하긴 한데 음란함이 부족한 녀석의 이런 점이 내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왜? 콘돔 사다 놨냐?”

느끼하게 웃으며 묻자 녀석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늘 팬티 이상한 거 입고 와서 좀 그런데.”

“괘, 괜찮아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녀석은 진지하게 외치는데 듣는 사람은 웃음만 터져 나온다. 이 녀석은 내가 구멍 난 팬티를 입고 있어도, 거지꼴을 하고 있어도 멋있다고 해 줄 거야, 아마.

지하철이 승강장에 들어섰다.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며 난 무심코 손을 점퍼 안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안에 든 나민이가 사 준 캔 커피. 아직도 식지 않고 따뜻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

*

“죄송해요, 형. 오늘은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요.”

[일? 무슨 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노금영은 짜증이 난 듯했다. 하지만 나도 짜증이 났다.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어느 정도의 사생활은 보장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봤자 여자애랑 데이트나 하는 거겠지. 넌 데이트가 중요하냐? 우리가 중요하냐?]

“저한테는 둘 다 중요해요. 그리고 제가 언제 우리 일을 소홀히 한 적 있었어요? 저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귀면이 나타난 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쉬어 보지도 않고 뛰어다녔어요.”

[너만 그랬냐? 응? 너만 그랬냐고. 우리들 모두 귀면 새끼들 잡겠다고 발바닥에 물집 터지도록 뛰어다녔어. 너만 힘든 거 아니니까 앓는 소리 하지 마.]

“앓는 소리 하려는 거 아니에요. 그냥 하루만 쉬게 해 달라는 거죠.”

[네 멋대로 해! 새끼야!]

노금영이 고함을 꽥 지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저놈의 성질 하고는.

말은 저렇게 해도 노금영은 오늘 하려던 일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사람들에게 연락해 줄 게 분명하다. 요즘엔 조직 폭력배들 사이에서도 통하지 않는 그놈의 ‘패밀리 정신’이 투철한 인간이니까.

노금영은 적어도 박천수나 천달봉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보다는 믿을 수 있다는 거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란 뜻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고 모든 걸 맡길 수 있었던 인간은 날 거둬 키워 준 여자뿐이었다. 그리고 내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내 첫사랑, 석진경.

난 가끔 생각해 보곤 했다. 석진경이 살아 있었다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석진경을 잃고 미친놈처럼 방황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쯤은 나아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석진경이 살아 있었더라면 젊고 찬란한 시절을 그딴 식으로 허비하진 않았을 거였다.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비웃겠지. 서른도 안 된 놈이 벌써 인생 다 산 늙은이 같은 소리나 한다고.

하지만 열심히 사는 것도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가능한 거다. 나한테는 목표란 게 없었다. 출세하고픈 욕망이 없었다. 살다 보니 살아졌고,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 보니 남들 못지않게 치열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내게도 목표가 있었다.

알아주는 대기업에 취직해서 멋진 집을 사고, 멋진 차를 굴리며 으스대며 살고 싶었다. 성공해서 날 거둬 키워 준 여자에게 찾아가고 싶었다. 몇백만 원씩 하는 명품 백, 홍삼 선물 세트 같은 걸 싸 들고서.

명절 때마다 자식들이 선물 짊어지고서 부모님께 찾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석진경이 죽은 그날. 난 인생의 목표를 잃었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아름다운 세상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마트에 잠깐 식료품을 사러 들어갔던 나민이가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다. 아직도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잿빛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렇게 평소보다 세상이 더 빛나 보이는 건 나민이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 제가 야식으로 소시지 볶음 만들어 드릴게요.”

“그거 술안주 같은데, 오늘 또 술 마실 작정이냐? 오늘은 절대로 안 된다.”

난 나민이의 손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받아 들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는지 봉지가 제법 묵직하다.

“에이, 술 한 잔 정도 뭐 어때요.”

“한 잔도 안 돼. 너 은근히 술이 세서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한 병 되는 거 순식간이더라. 그리고 너, 공부는 언제 할래? 언제까지 입시생으로 살 건데? T 대학 가고 싶다면서?”

녀석이 눈을 깜빡깜빡거리면서 날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잠깐 잊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셨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그건 그냥 호칭이잖아요. 누구 씨, 누구 형, 하고 부르는 것처럼. 말 나온 김에 저만 부를 수 있는 호칭 하나 만들까 봐요. 학원 애들 다 선생님한테 선생님이라고 부를 거 아니에요. 짜증 나게. 이제부터 똘추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

“죽는다.”

한 손으로 녀석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자 녀석이 까르륵 웃어 댔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까르륵,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소리로.

“그냥 형이라고 불러. 나도 네가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좀 그렇더라.”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선생님한테.”

“나 형이라 부르는 소리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남자들이 오빠 소리 듣는 거에 환장하는 것만큼. 그러니까 형이라고 불러 봐. 아이잉 동추혀엉 하고.”

장난을 치려고 일부러 눈을 반쯤 감고 입술을 삐죽이 내밀어 콧소리를 냈다. 녀석이 또 까르륵거리며 웃을 걸 기대하면서.

그런데 녀석은 웃질 않았다. 입을 꾸욱 다물고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날 보더니, 갑자기 내 손목을 움켜쥐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어느 빌라의 주차장이었다. 재활용 쓰레기통이 있는 주차장 뒷부분은 빛이 비쳐 들지 않아 깜깜했다.

녀석이 날 이런 데로 데려온 이유가 뭐겠는가. 갑자기 나랑 키스가 하고 싶었던 거겠지.

나민이가 날 벽에 밀어붙이곤 입술을 들이댔다. 녀석이 손에 쥐고 있던 봉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맞닿은 말캉말캉한 입술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설프게 머뭇대며 혀를 끄집어내 내 입술을 핥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를 이런 으슥한 데로 끌고 오긴 했어도 키스 하나 제대로 할 줄 몰라 할짝대며 핥기만 하는 녀석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난 들고 있던 봉지를 손에서 놓았다. 그러고는 녀석의 목에 팔을 단단히 감고서 깊게 입술을 포갰다.

먹어 치울 듯이 핥고 깨물고, 혀로 녀석의 순진한 입 안을 희롱했다. 딱딱하게 경직되었던 녀석의 몸이 움칫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풀어졌다.

깜짝 놀라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던 녀석이 내 얼굴을 감싸 쥐고는 깊게 빨아들였다. 내 입술, 내 혀, 내 숨소리, 내 모든 것을.

“서, 선생님…….”

낮게 헐떡이는 녀석의 붉어진 귓바퀴에 콧날을 비비며 난 감미롭게 늘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그게 스위치였던 모양이다. 녀석이 갑자기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녀석은 모닥불에 휘발유를 들이부은 것처럼 화르륵 불타올랐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뒤덮인 피부는 하얗지만 뜨거웠다. 나를 껴안은 녀석의 몸은 단단했다. 근육으로 뒤덮인 운동선수의 몸처럼 견고했다.

나민이는 예쁘다. 귀엽다. 하얗고 보송보송하다. 하지만 내면까지 말랑말랑하지는 않다. 순진하고 어설프지만 야하고 저돌적이다. 녀석의 그 엄청난 차이가 날 미치게 했다. 난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한나민이란 녀석에게 미치도록 빠져들고 있었다.

스쿠터 한 대가 빌라 앞에서 멈춰 서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녀석이 깜짝 놀라 얼굴을 떼어 냈다. 벌어진 입술은 붉게 부어올라 축축하게 젖어 있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흐리멍덩하게 흐려져 있었다.

나민이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진 봉지를 주워들었다.

“콘돔 사 놨다고 했지?”

녀석이 고개를 번쩍 쳐들어 날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끄덕 몇 번이나 흔들었다. 보나 마나 집 근처 편의점에 가서 가격대 적당한 콘돔 박스 하나 집어 들었겠지. 계산하는 사람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돈만 쓰윽 내밀었을 거고.

저 녀석은 콘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남자와 관계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알기나 할까.

“먼저 들어가 있어라. 약국 갔다 올게.”

“약국에는 왜요? 어디 아프세요?”

녀석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진짜로 아플까 봐 걱정을 하는 건지 아프다는 핑계로 섹스를 못 하게 할까 봐 걱정하는 건지.

“아픈 건 아니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살 게 좀 있거든.”

“필요한 게 뭔지만 알려 주세요. 제가 사 갈게요. 뭔데요?”

“러브젤.”

녀석이 사 온다기에 당당하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워하면 그게 어디 임동추이겠는가. 나 대신 녀석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됐다.

“야, 약국에도 팔아요? 그걸?”

“팔아. 종류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왜? 아무래도 네가 사러 가긴 좀 그렇지?”

“아, 아뇨. 제가 사 올게요. 먼저 들어가 계세요.”

내민 봉지를 내가 받아 들자 녀석은 점퍼에 붙은 후드를 뒤집어쓰고서 큰길로 뛰어갔다. 후드는 또 왜 뒤집어써? 누가 약국에서 러브젤을 사는 자길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저러다가 약국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그냥 돌아오는 거 아냐?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테니.

난 나민이의 집으로 가는 내내 술 취한 사람처럼 킬킬대며 웃어 댔다. 뭐가 이렇게 우스운 건지. 뭐가 이렇게 흥겹고 신이 나는 건지.

사방에 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데 그 노인은 이 집에 왔던 첫날,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문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난 고개를 까딱여 노인에게 인사했다. 노인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멍한 눈으로 어둠 저편만 멍청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난 문 앞에 서서야 중요한 사실을 알아챘다. 나민이에게 집 열쇠를 받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약국에 간 거니까 곧 돌아오겠지 싶어서 문 앞에 봉지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잠겨 있어야 할 문이 빠끔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거미줄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난 바스락거리며 소리가 나는 봉지를 문 앞에 내려놓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언제나처럼 어두컴컴했고 조용했다. 난 빠르게 눈으로 집 안 곳곳을 살폈다. 노출된 공간인 주방과 거실엔 아무도 없다.

문이 열린 방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질 않았다.

난 신발을 벗고 성큼,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보같이 ‘거기 누구 있어요?’ 따위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집 안에 누군가 있다면 안으로 들어선 내 존재를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등 뒤에서 덮칠 수 있으니까.

방 안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까이 다가가 반쯤 열린 문 뒤에 숨어 방 안을 쳐다보자 어떤 시꺼먼 형체가 옷장을 뒤지고 있는 게 보였다.

옷장을 뒤지고 있는 도둑은 찾던 물건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인지 “씨발”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난 그 도둑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더 이상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난 내 몸으로 문 앞을 막고 서서는 불을 켰다.

“야, 뭐 하냐?”

박하신이 소스라치게 놀라 흠칫했다.

녀석의 이마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눈가며 입술 근처에 얼룩덜룩한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꼬, 꼰대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그러는 넌 여기서 뭐 하냐?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냐?”

“씨발. 조, 좆같네.”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놈이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전처럼 패기에 넘쳐 보이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욕을 내뱉는 녀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상처투성이 얼굴은 허옇게 질렸다.

“꼰대, 당신이었지? 처음에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인 척하며 우리를 따라오며 겁주던 놈.”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부정은 하지 않으마. 그런데 어떻게 난 줄 알았냐?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당신 꼬붕 중에서 더럽게 덩치 큰 놈이 동추 형은 어디에 있냐고 하는 걸 들었어. 꼰대, 당신 이름이 임동추잖아. 임똘추.”

나는 사정 봐주지 않고 싸가지 없는 애새끼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평소였다면 욕을 갈기며 달려들었을 놈이 어째 오늘은 조용하다.

“꼰대, 그 새끼들…… 뭔지 알아?”

박하신의 목소리에 힘이 쭉 빠졌다. 녀석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그렇게 물었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을 하고서. 난 대번에 파악했다. 녀석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때 굴러다니던 각목으로 한 놈의 등을 후려쳤어. 맞은 충격으로 휘청대는 틈을 놓치지 않고 각목을 마구 휘둘렀다고. 머리는 헬멧을 쓰고 있어서 괜찮다 해도 등이고, 다리고, 팔이고, 다른 부분은 맞으면 아파야 정상이잖아. 그 정도로 맞았으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어디 한 군데 부러져서 나뒹굴어야 정상이잖아. 그래, 부러지긴 했지. 손가락도 부러져서 뒤로 꺾이고 팔 한쪽도 덜렁거렸어. 그런데 그 새끼는…….”

“뼈가 부러져 덜렁거리면서도 일어나서 움직였지?”

박하신의 충혈된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나랑 같이 있던 놈이 칼로 그놈을 쑤셨는데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어.”

“머리가 터져도 팔다리가 사라져도 몸뚱이만으로도 움직이는 놈들이다.”

“대, 대체 뭐야? 그 새끼들?”

“우린 놈들을 귀면이라 부른다.”

“귀면? 귀신 할 때 그 귀?”

“그래. 가면을 뒤집어쓴 귀신.”

녀석의 울긋불긋 멍이 든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럴 만도 하다. 귀신이라니. 꼰대, 술 취해서 주정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비아냥댈 법도 하다. 하지만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손톱을 깨물어 씹었다. 어깨를 떨면서.

“그, 그럼 당신은 뭐야?”

“학원 선생.”

“구라 까고 있네. 학원 선생이 헬멧 쓰고 삼단봉 휘두르면서 학생을 두들겨 패? 그리고 ‘우리’라고 했잖아. 우린 그놈들을 귀면이라고 부른다고.”

“그냥 쥐꼬리만 한 월급만으로는 살기 어려워서 밤에도 일하는 불쌍한 어른이라고만 알아 둬.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라. 다친다.”

“당신들, 풍기 문란 놈들과는 관계없는 거야?”

“그래. 그놈들은 우리의 적이다. 그나저나 아까 내가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냐고 물었는데 아직 대답 안 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는 거냐?”

“갑자기 종로가 왜 나와?”

“왜 엉뚱한 데서 화풀이를 하느냔 말이다. 나민이가 풍기 문란 사이트에 너흴 신고했다고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거야? 나민이가 분명히 그랬잖아. 그 사이트에 너흴 신고한 건 자기가 아니라고. 그리고 만약 사이트에 신고한 게 녀석이라 해도 너흴 쥐 잡듯 두들겨 팬 건 나민이가 아니잖아.”

박하신은 잠시 옷장에서 끄집어낸 옷가지들로 엉망이 된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옷장 속에 들어차 있는 옷들도 모두 나민이가 입고 다니는 것처럼 낡고 해진 것들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하신의 발아래 널려 있는 옷가지는 깨끗한 새것이었다. 비닐도 뜯지 않은 티셔츠와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바지, 점퍼들.

박하신이 가격표가 붙은 점퍼 하나를 들어 올렸다. 옷에 달랑달랑 매달린 상표는 나도 아는 브랜드였다. 저 브랜드 점퍼가 보통 얼마더라. 얼마 전에 쇼핑하러 갔을 때 봤던 점퍼가 200만 원대였다.

“꼰대. 내가 한나민을 왜 그렇게 괴롭혔는지 알아?”

나는 어째서 나민이가 저런 비싼 옷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생각하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난 놈이 무서웠어.”

“무슨 소리야, 그게?”

“놈은 처음부터 내 눈길을 잡아 끌었어. 꼰대가 그때 물었었지? 한나민을 좋아하냐고. 그래, 그 자식한테 마음이 갔어. 잘생겼잖아. 예쁘고, 나보다 나이 많은 형인데도 귀엽고. 그래서 난 늘 녀석을 주시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 녀석이 자기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본 거야. 한나민의 본모습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처럼 코웃음을 치며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여야 할 상황이건만. 당장 저 녀석의 입을 틀어막아, 하고 외치는 나와 녀석이 하는 말을 더 듣고 싶다고 바라는 내가 머릿속에서 공존했다.

“그때부터였어. 그동안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도 인식하지 않던 놈이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자기의 시꺼먼 본모습을 알아본 내 입을 틀어막겠다 이거였던 거지. 난 그래서 패거리를 만들었어. 악랄한 골목대장이 돼서는 놈을 괴롭히기 시작했어. 여전히 놈이 좋은데, 좋은 만큼 무서웠으니까. 지금까지 한나민은 얌전히 당하고만 있었지. 맞으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애원하지도 않고, 날 가만히 노려보면서. 그런데 이제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 마음먹은 게 분명해.”

“하지만 그건 전부 네 생각 아니냐? 그냥 너 혼자 멋대로 만들어 낸…….”

“당신은 한 번도 놈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

말허리를 끊고 박하신이 질문을 던졌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입은 벌어져 있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눈앞의 어린놈은 침묵을 긍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히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있을 거야. 대체 이놈의 정체가 뭘까? 진짜 모습은 어떤 걸까? 하는 생각.”

이번에도 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꼰대. 당신은 내가 여기 왜 있냐고 물었지? 난 증거를 찾으려고 기어들어 왔어.”

“증거?”

“그래, 증거. 그 자식이…….”

박하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문 앞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박하신이 흠칫 놀라 재빨리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들짐승처럼 날랜 몸놀림이었다.

나도 서둘러 방바닥에 널린 옷가지들을 옷장 안에 쑤셔 넣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옷장 문을 닫고 열린 창문까지 닫으려는 순간 나민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뭐 하세요? 창문은 왜 열어 두신 거예요?”

“공기가 텁텁해서 환기 좀 하려고.”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으나 나민이는 딱히 의심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집이 오래돼서 그런지 아무리 환기를 해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나민이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말하며 내게 등을 보이고 서서는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녀석이 늘 입고 다니는 낡고 촌스러운 옷. 비싸고 좋은 옷들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늘 저런 촌스러운 것들만 입고 다니는 걸까.

겉옷을 벗은 녀석이 고개만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내가 아는, 내가 좋아하는 나민이었다. 내 취향에 꼭 들어맞는 귀엽고 순진한 점 때문에 녀석에게 끌렸다. 하지만 녀석이 귀엽고 순진하기만 했다면 난 이렇게 저 애에게 빠져들었을까.

박하신이 발견했다던 네 본모습은 어떤 거냐. 네 여리고 보들보들한 껍데기 속에 숨은 알맹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냐, 나민아.

“저녁…… 만들어 드릴까요?”

나를 보는 녀석의 두 눈은 노골적인 성욕으로 번들거렸다. 난 소리를 내 웃으며 점퍼를 벗었다.

“밥은 나중에 먹자.”

중얼거리며 카디건을 벗고 안에 입은 셔츠 단추를 풀었다. 녀석이 숨소리도 죽이고 단추를 하나씩 푸는 내 손끝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뭔가에 홀린 듯한 눈이었다.

“손이 미끄러워서 단추 풀기가 쉽지 않은데. 나민이 네가 풀어 줄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속삭이듯 말했다. 녀석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내게 다가왔다. 약하게 떨리는 손을 뻗어 반쯤 열린 셔츠 깃을 붙잡고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 내렸다. 나는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은 녀석의 하얀 목덜미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으로 움찔거리며 떨리는 근육의 감촉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며 얼굴을 가까이해 벌겋게 익은 귓바퀴를 혀로 핥자, 녀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채로 벽에 밀어붙였다. 창문에 머리가 부딪쳐 쿠웅, 하는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부딪친 충격에 유리 창문이 바르르 진동했다.

나도 모르게 부딪친 뒤통수가 아파서 신음을 흘렸던 모양이다. 녀석이 깜짝 놀라 입술을 떼어 냈다. 들끓어 오르는 성욕과 당혹감, 그리고 걱정이 들어찬 눈이 날 바라봤다. 녀석은 손으로 창문에 부딪친 내 뒤통수를 애무하듯이 쓰다듬으며 “죄송해요. 아프게 해서” 뜨겁게 녹인 설탕물 같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이를 달래듯이 젖은 입술로 내 이마에 키스하고 날 바라봤다.

“더 아프게 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보드랍고 푹신한 감정을 가득 실어 휘어진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묻는다.

심장의 힘찬 박동이 들렸다. 내 것과 녀석의 것이 섞인 두 사람분의 심장 소리가.

“날 안고 싶냐?”

“네……. 선생님을 안고 싶어요. 안게 해 주세요.”

녀석의 목소리는 간절하다 못해 필사적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으며 녀석의 얼굴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형이라고 불러 봐. 동추 형이라고.”

“동추 형…….”

“동추 형. 좋아해요, 하고 말해 봐.”

“동추 형. 좋아해요.”

“‘사랑해요’는?”

“동추 형. 좋아해요. 사, 사, 사랑해요…….”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녀석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단추가 모두 풀린 셔츠를 벗어 던지고 버클을 풀어 바지까지 내던졌다. 그 자리에서 속옷까지 끌어 내리자 나민이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벗은 몸을 감쌌다.

“어디 한번 해 봐. 안든지 죽이든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한 손으로 성기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몸을 휘감는 한기 탓인지 약간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한나민은 짐승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

*

창틈으로 찬 바람이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몸에선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불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펄펄 끓어올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땀투성이가 된 몸에 얇고 끈끈한 막 같은 게 씐 느낌이었지만 몸의 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민감해졌다. 뿜어내는 나민이의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나와 녀석은 그야말로 진흙 반죽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얽혀 있었다. 천장 위에 매달린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불을 끄러 가고 싶어서 몸을 바르작대자 녀석은 내 허리를 꽈악 감싸 안았다.

“나민아, 불은 끄는 게 낫지 않겠어?”

“싫어요.”

언제나 내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던 녀석이 처음으로 꺼낸 부정의 표현이었다.

“불 끄면 선생님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이제 그만 형이라고 부르지 그러냐. 이 상황에서 잔소리를 할 수도 없어서 난 귀여운 투정을 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모습 흉할 텐데.”

“흉하지 않아요.”

“시뻘겋게 익은 얼굴로 오만상 다 찌푸리고 눈물 콧물 다 쏟아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이 손으로 내 한쪽 유두를 꼬집었다. 신음이 튀어나오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봐요. 흉하지 않잖아요. 귀엽기만 한데요, 뭘.”

“이 자식이 날 막 갖고 노네.”

녀석이 이를 드러내 씨익 웃고는 새가 부리로 모이를 쪼듯이 키스했다. 쪼옥쪼옥, 입술을 뾰족이 세워 닿기만 하는 키스를 반복하며 내 가슴을 쓰다듬고 유두를 만지작댔다. 녀석의 손톱 끝이 유두를 찌를 때마다 허리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그때에도 느꼈던 거지만 이 녀석은 내 젖꼭지를 참 좋아한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애들이 가슴에 유난히 집착을 한다는데. 남들보다 내 유두가 커서 그런가.

“난 가슴은 별로…… 윽!”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말 듣기 싫다는 듯이 녀석이 내 목에 입술을 묻으며 유두를 잡아 뜯듯이 꼬집어 올렸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맞다. 가슴은 별로긴 개뿔. 난 성기를 애무할 때보다 더한 짜릿한 쾌감에 몸을 떨며 헐떡이기 시작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유두로는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윤영이가 유두를 애무해 주면 숨넘어가도록 악악대면서도 아랫도리를 꼿꼿이 세웠던 거구나. 이런 때에 옛 남자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녀석은 내 젖꼭지를 씹어 먹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아래가 축축하게 젖었어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자, 잠깐…… 깨물지 마. 아파. 흐윽!”

손가락으로 희롱당해 벌겋게 부어오른 돌기를 녀석이 이로 살짝 짓씹어 물었다. 목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희롱당하는 유두를 중심으로 약한 전류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녀석은 자기 허벅지로 열이 몰리기 시작한 내 성기를 꾸욱 눌렀다. 눌러서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며 애무했다. 아직 녀석은 바지를 입고 있는 상태라 청바지의 까칠한 촉감이 그대로 느껴져서, 그야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선생님. 선생니임…….”

숨을 헐떡이며 녀석은 딱딱하게 선 아랫도리를 내 배에 문질렀다. 한 손으로 거치적거리는 바지와 속옷을 반쯤 끌어 내리자 발기한 성기가 용수철 인형처럼 튀어나왔다. 이미 투명한 액으로 번들거리는 녀석의 성기 끝에선 젊고 싱싱한 수컷 냄새가 났다.

“선생님, 해도 돼요?”

훌륭하게 발기한 성기를 남의 허벅지 안쪽에 대고 문지르며 녀석이 물었다. 허벅지 안쪽을 온통 축축하게 적셔 놓은 녀석의 성기는 갈라진 둔덕 사이로 파고들었지만 굳게 닫힌 근육의 좁은 틈이 그리 쉽게 열릴 리가 없다. 난 끄응대며 빨리 어디든 넣고 싶어 떨리는 손으로 내 허리며, 가슴을 쓰다듬는 녀석의 몸을 밀어냈다.

“내가 사 오라는 거 사 왔지?”

녀석은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둔 외투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꺼내 왔다. 봉지 안에서 상자를 끄집어내는 동안 녀석은 골반에 걸린 바지와 팬티를 순식간에 벗어 내던지고는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플라스틱 용기를 쥐어짜 끈끈한 액을 손바닥 가득 쭈욱 쏟아 냈다.

“하기 전에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 주지 않으면 거기가 찢어져. 섹스란 게 서로 기분 좋자고 하는 거니까. 서로 즐기면서 하는 게 좋잖아.”

웃기다. 이런 때에 애들을 가르치는 듯한 어조라니. 벌거벗고 아랫도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내 얘기를 경청하는 녀석도 웃기고.

무릎을 세워 벌리고 윤활제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으로 살점 사이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이물감이 느껴져 숨이 턱 막혔다. 세 번째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자 고집스럽게 닫혀 있던 구멍이 열려 밀려들어 오는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흐으…….”

앙다문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긴장해서 굳은 허벅지와 직각으로 세운 무릎까지 경련하듯 떨렸다.

“으…… 젠장. 아프네…….”

조금도 완화되지 않는 압박감에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왜 다리를 벌리고 내 손가락으로 엉덩이 사이를 쑤시고 있는 거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내 다리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저 녀석이 한나민이 아니었다면 이런 짓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기 위해 난 한 손으로 성기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으로 기둥을 잡고 흔들며, 엄지손가락으로 투명한 액이 나오는 끝부분을 긁듯이 문지르면서. 애널 안으로 삽입한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이며 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흥분할수록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사라졌다. 절정을 맞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시뻘겋게 익은 얼굴로 날 바라보는 저 녀석과 함께.

녀석이 갑자기 달려들어 날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 쪽의 서랍장에서 콘돔 박스를 끄집어내 입으로 포장을 뜯어 성급하게 자신의 성기에 씌웠다. 저러다간 하는 도중에 찢어질 텐데. 열에 들뜬 머리로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여자도 아닌데 어떤가 싶었다. 손가락이 빠져나와 다시 오그라든 구멍 속으로 비닐 막을 씌운 살덩어리가 뚫고 들어왔다. 터져 나온 비명은 녀석의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나 미치게 하지 말아요.”

녀석의 달뜬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누르며 녀석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박혀 있던 녀석의 끝부분이 천천히, 아주 서서히 안으로 밀려들었다. 난 입 안을 짓씹어 물며 머리를 뒤로 젖혀 숨을 토해 냈다. 녀석이 드러난 목울대를 이로 긁으며 으르렁대듯이 속삭였다.

“선생님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아요.”

녀석의 차가운 손이 내 목을 쓰다듬었다가 감싸 쥐었다. 목을 감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순간 난 깜짝 놀라 녀석을 쳐다보았다. 날 바라보는 녀석의 예쁜 눈매가 일그러져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남의 엉덩이 사이에 자기 걸 쑤셔 놓고서 지을 표정은 아니잖냐. 손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녀석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눈을 드러나게 했다.

“밤새도록 이러고 있을 거냐? 슬슬 힘들어지는데.”

“선생님, 날 좋아해요?”

난 대답 없이 녀석의 땀 맺힌 이마에 키스했다. 손으로 녀석의 얼굴, 목, 가슴, 긴장으로 수축된 배를 쓸어내리곤 음모 아래 내 엉덩이 사이에 박힌 성기의 뿌리 부분을 건드렸다. 녀석의 복부가 꿈틀댔다.

“널 좋아하지 않았다면 잘라 버렸을 거다.”

잔인한 협박을 농담처럼 속살거렸다. 녀석은 잇새로 낮게 욕설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성기를 쑤욱 잡아 뺐다. 그러고는 벌어진 구멍이 다시 오그라들기도 전에 다시 뿌리 끝까지 단번에 삽입했다. 몸 전체로 밀어붙이는 힘에 난 벽에 꼼짝없이 짓눌렸다.

이성이 날아간 녀석은 거의 정신을 잃고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난 그런 녀석을 말리지 않았다. 잇새로 비명 섞인 신음만을 내뱉으며 밀어붙이는 대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퍼억퍼억, 소리가 날 정도로 격렬하게 밀어붙일 때마다 음낭이 엉덩이뼈에 처덕처덕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이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간드러졌다. 마치 한 편의 포르노를 찍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로에게 어떤 감정도 없이 삽입당하면서 앙앙대고, 삽입하면서 헐떡이는 배우들. 나는 팔을 뻗어 나민이의 목을 감쌌다. 내가 먼저 키스하기 전에 녀석이 입술을 겹쳤다. 녀석의 상반신이 내 쪽으로 끌어당겨지며 삽입이 더욱 깊어졌다. 내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뜨거운 살덩어리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꼈다.

아주 오랫동안 굶주린 들짐승처럼 내 아래의 구멍은 탐욕스럽게 움찔거리며 녀석의 것을 씹어 물었다. 욕심 많은 애널은 찢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태로 한계치까지 늘어났다가 수축했다. 항문 주름 하나하나에 모든 통각, 모든 성감대가 붙어 있는 듯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불꽃처럼 튀었다.

난 나민이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녀석의 땀투성이가 된 목에 키스하고, 이를 박아 씹으면서 애원했다. 더, 좀 더…….

“흐으…… 미치겠어.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 선생님도 좋아요? 네? 나처럼 선생님도 미칠 것 같아요?”

“그래. 미칠 것 같아…… 젠장. 같이 미치자. 으으읏.”

한 손으로 내 성기 끝을 애무하며 녀석의 떨리는 턱을 핥았다. 뿌리 끝까지 푸욱, 박힌 성기가 내 안에서 부르르 떨리며 커지는 게 느껴졌다. 녀석이 고개를 크게 뒤로 젖혀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내부에서 녀석의 것이 폭발하며 정액과 함께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녀석과 동시에 절정을 맞이한 나는 일순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인 엄청난 쾌감에 몸을 떨며 생각했다.

엉덩이 사이로 녀석의 정액이 흐르는 걸 보니 하는 도중에 콘돔이 벗겨진 거로군.

녀석이 허억허억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나를 바라봤다. 한 발 시원하게 빼냈음에도 여전히 두 눈은 음험하게 빛났다.

“도중에 콘돔이 벗겨졌나 봐요.”

쉬어 터져서 발음도 분명히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녀석은 손끝으로 아래 구멍을 문질렀다. 손가락이 들어온 듯했지만 고통도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은 경련하듯 떨리는 내 허벅지를 휙 잡아 벌려 처참한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나게 했다.

내 눈으로 봐도 굉장한 꼴을 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자극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찍힌 허벅지, 정액이 뒤덮여 죽은 물고기처럼 늘어진 성기, 정액이 여기저기 튄 까만 음모, 움찔거릴 때마다 흰 체액을 조금씩 쏟아 내는 애널. 불빛이 환한 탓에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도 보였다.

녀석이 손가락으로 정액이 비어져 나오는 애널을 잡아 벌렸다.

“하지 마. 아파.”

“선생님 안, 굉장히 뜨거워요.”

내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안으로 집어넣은 손가락을 구부려 내벽을 긁는다. 폭풍처럼 휘몰아 닥쳤던 쾌감의 기운이 걷히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탈력감이 찾아들었다. 난 녀석의 어깨에 내 머리를 툭 얹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 자세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예고도 없이 녀석이 자기 걸 푸욱 쑤셔 넣었다. 이미 한 번 녀석의 것을 받아들인 구멍은 이번엔 아무 거리낌 없이 침입을 받아들였다. 단번에 기둥 전체를 깊숙이 박아 넣고는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선생니임” 하고 부른다. 귓가로 스며드는 그 목소리에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배 속이 또다시 뜨거워졌다.

아주 천천히 허리를 돌려 자기 걸로 한껏 예민해진 내벽 전체를 샅샅이 긁듯이 애무한다. 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꼿꼿이 선 성기를 내 몸 여기저기에 비벼 대며 쩔쩔매던 애가 맞나 싶다. 애들은 뭐든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배운다. 내벽을 원을 그리듯 훑는 성기의 움직임에 정액이 들어찬 구멍에서 찌그덕,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너무도 확실하게 들려서 얼굴이 다 벌게졌다.

“콘돔 써. 이제 안에다 하지 마라.”

단내 나는 숨결을 내뿜으며 말했더니 녀석이 한다는 말이.

“싫어요.”

이 한 마디였다. 싫단다. 하하. 싫단다, 이 녀석이. 황당해서 웃음만 비죽비죽 나왔다.

“선생님 몸 안에 계속 싸고 싶어요.”

“자식아, 그러다 임신한다.”

머리를 거치고 나오지 않고 튀어나온 말이란 게 이렇다. 웬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 나조차도 어이가 없어 킥킥 웃었다. 내 목을 핥아 올리던 녀석도 키들거리며 웃는다. 녀석은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을 입술을 내 목과 어깨 사이에 눌렀다.

그러고는 손으로 내 허벅지를 더욱 넓게 벌리고는 애널 사이로 저절로 미끄러져 나온 성기를 다시 한번 깊게 박아 넣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할게요.”

절대로 이번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지.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난 코웃음을 쳤다. 흘끔 벽에 달린 시계를 봤더니 아직 9시다. 이제야 겨우 고기 맛을 봤으니 이제부터 아주 환장하고 덤벼들 게 분명하다. 겨울밤은 더럽게도 길다. 발정기를 맞은 종마 같은 녀석에게 밤새도록 시달릴 생각에 벌써부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