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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도 노금영은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덕진이의 친구에게 들은 정보를 말해 주었더니 노금영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렇게 외쳤다. “당장 쳐들어가자!”
아리랑헌터인지 하는 놈이 글을 썼다는 짱구 PC방으로 쳐들어가자는 얘기였다. 그때 시간이 새벽 2시였다.
노금영이 당장 쳐들어가서 잡아 족쳐야 한다느니 꽥꽥대기에, “일단 오늘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 자고 내일 가요, 내일!” 하면서 달래고 얼러서 재웠었다.
오늘은 수업이 빨리 끝나는 날이라 먼저 선릉역 근처의 카페에서 노금영과 기식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박천수와 천달봉은 이번 일에서 제외했다. 하루 종일, 휴일도 없이 가게에 붙어 있어야 하는 그 형님들과는 함께 움직이기가 힘들다.
빵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난 손가락을 쪼옥 빨고는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볼펜을 끼워 넣었던 페이지를 펼치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글자들은 이것이었다.
<강원도 두레 식당. 석진경. 민간인 피살 사건. 여자의 시체―사라졌다.>
그 아래에 얼마 전 이런 문장을 휘갈겨 써넣었다.
<석진경이 죽인 여자. 갈색 가면의 누나. 갈색 가면은 내가 자기 누나를 죽였다고 오해하고 있다. 녀석의 누나를 죽인 건 석진경인데.>
‘석진경’이란 이름에 난 굵게 동그라미를 쳐 놓았었다.
<왜? 어째서 놈은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옆에 물음표를 몇 개씩이나 달아 놨다. 그 당시 얼마나 답답했으면.
갈색 가면은 자기 누나가 두 번이나 죽었다고 했다. 가장 소름 끼치는 점이 바로 그 부분이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다. 석진경이 갈색 가면의 누나를 죽였다. 하나뿐인 여자의 목숨은 그때 날아갔다. 하지만 갈색 가면은 내가 자기 누나를 두 번째로 죽였다고 한다.
<여자의 시체―사라졌다.>
다이어리 위에 적힌 이 부분의 글자가 솟아오르는 흙먼지처럼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석진경이 말했던 그 장소에 가 보았지만 여자의 시체는 없었다. 하지만 그 주위에 여자의 흔적이 남아 있긴 했다.
찢어진 꽃무늬 원피스 조각들, 여성용 샌들 같은. 분명히 여자가 그곳에 묻혀 있었다는 증거였다.
누가 그 여자의 시체를 누가 파낸 것일까.
산에 올라가 텅 빈 구덩이를 발견했을 당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석진경과 함께 여자의 시체를 이곳에 파묻었다는 군 고참이라는 새끼, 그 자식이 이런 짓을 한 거라고.
누군가에게 들킬 게 두려워 여자의 시체를 옮겨 다른 곳에 묻은 게 분명하다고.
하지만 그 당시, 석진경도 고참 놈도 군인이었다. 군인이 소속 부대에서 이틀 내내 자유롭게 산속을 누비고 다니는 게 가능했을까?
여자의 시체를 옮긴, 혹은 구덩이에서 파낸 것이 석진경의 고참 놈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나나 석진경이 모르는 제삼의 인물이 여자의 시체를 파냈다.
두 번째, 여자 혼자 스스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두 번째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사람에게 이 얘기를 했다간 미친놈, 정신 나간 소리 지껄인다는 소리나 듣겠지만 말이다.
난 귀면이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귀면이 어떤 놈들인가. 죽여도 죽지 않는 징글징글한 것들. 그리고 그 징글징글한 놈들을 똥개처럼 부리는 놈이 누구던가.
바로 갈색 가면이다. 강원도 두레 식당 아이, 석진경이 죽인 그 여자의 남동생.
그렇다면 그 여자도 귀면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용천 도사는 혼 덮어씌우기를 해서 시체를 살려 낸 것이 귀면들의 정체라고 했다. 어떤 도사 놈이 썩은 시체에 민란을 일으키려다 처형당한 임충식의 부하들의 혼을 덮어씌운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혼 덮어씌우기를 한 놈도, 귀면들을 부리는 놈도 모두 갈색 가면이라고 생각했다.
갈색 가면, 즉, 죽은 여자의 남동생인 놈이 혼 덮어씌우기를 해서 누나를 살려 낸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놈이 말했던 ‘누나를 두 번째로 죽였다’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결국 석진경이 죽인 누나를 간신히 살려 냈더니 내가 그녀를 다시 한번 죽여 버렸다는 거다.
물론 그 여자를 죽인 건 내가 아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갈색 가면, 그놈은 내가 자기 누나를 죽였다고 믿고 있다.
<어째서?>
난 다이어리에 의문문 하나를 써넣었다.
<왜 갈색 가면은 내가 자기 누나를 죽인 것이라 의심하지?>
볼펜 끝으로 의문 부호 끝부분을 톡톡 두들겨 점을 찍었다.
강원도로 내려가 봐야겠다.
답은 분명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답을 찾을 순 없어도 답을 도출해 낼 수 있는 힌트라도 주워들을 수 있겠지.
빵 봉지 옆에 내팽개쳐 둔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만 보고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어. 나민아.”
[지금 뭐 하고 계세요? 선생님? 저녁 같이 먹을까 하는데.]
녀석의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귓구멍을 간질였다.
“미안. 선생님이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거든.”
[네에. 그러시구나. 그럼 오늘 밤에 몇 시에 들어오시는데요? 선생님 집에서 음식 만들어 놓고 기다릴까요? 오늘 닭볶음탕 만들어 먹을 생각인데요.]
“안 그래도 돼. 몇 시에 들어갈지 모르거든. 너무 늦게 집에 가면 그렇잖아.”
[그냥 선생님 집에서 자고 가면 되죠, 뭐.]
하하하, 요 녀석.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인다, 보여. 어떻게 해서든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구실을 만들고 싶은 거구나. 딴에는 머리를 굴린다고 하는 것일 텐데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냥 다음에 와, 다음에. 오늘은 친구들 데려갈지도 몰라.”
[다음에, 언제요? 언제 선생님 집에 가도 되는데요?]
“이번 주 주말쯤?”
주말이라면 아직 며칠이나 남았는데. 녀석이 실망해서 축 처져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럼 이번 주 주말에 선생님 집에 갈게요. 이번 주 토요일, 일요일에는 아무 약속도 잡지 마세요.]
“알았어.”
[내일 학원에서 봬요, 선생님.]
“그래, 알았다. 아, 그리고 저녁 굶지 말고 꼭 챙겨 먹어라. 혼자서라도 뭐든 만들어서 꾸역꾸역 먹어. 또 빵 쪼가리나 컵라면 같은 걸로 배 채우지 말고. 내가 나중에 너희 집에 가서 쌀이 얼마나 줄어들었나 검사할 거야.”
[네, 혼자서도 잘 먹을게요.]
“잘 땐 전기장판이라도 틀고 자. 요새 감기가 독해서 한번 걸리면 잘 낫지도 않아. 잘 때라도 따뜻해야지 건강하게 잘 살지.”
[선생님, 꼭 잔소리 심한 아내 같아요.]
녀석은 소리 내 웃는데 난 표정이 딱 굳었다. 잔소리 심한 아내? 남편도 아닌 아내? 생전 처음 들어 본 말이라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러니까 선생님이랑 저랑 진짜로 사귀는 사이처럼 느껴져서 되게 좋네요.]
사귀는 사이가 맞긴 하다. 좋아한다고 서로에게 고백한 날, 이미 키스하고 부둥켜안고 별의별 짓을 다 했으니. 순서상으로 볼 때 녀석과 난 애인 사이가 된 거지.
나도 너랑 이런 대화하는 거 좋아, 하고 맞받아쳐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윤영이를 비롯한 사귀던 애들한테는 좋아한다, 사랑한다, 너랑 함께 있어서 정말 좋다, 이런 말들을 입에 버터를 처바르고 지껄였으면서.
진짜로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는 입에 버터를 바르고 싶어도 바를 수가 없나 보다.
전화를 끊은 후에도 나민이의 쾌활한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
좋구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란 건.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은데도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아오! 씨발. 깜짝이야!”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누군가 창에 찰싹 달라붙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런 짓을 할 놈이 또 누가 있겠는가. 똥수 놈밖에 없지.
놈은 내가 자기를 발견하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는 꼴을 보고는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갈색 패딩 점퍼를 입고 있는 놈은 그야말로 한 마리 야생 곰이었다.
“누구랑 통화하는데 그렇게 침을 질질 흘리면서 웃어요?”
“침을 흘리긴 누가 흘려? 그리고 네놈이 여기 왜 와?”
침 흘린 적이 없는데도 나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놈은 아껴 가며 마시던 내 커피를 홀랑 다 마셔 버렸다.
“금영이 형이 전화했어요. 오늘 짱구네 집으로 쳐들어가서 쓰리랑헌터를 잡으러 간다면서요?”
망할 노금영. 동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자기가 알아서 놈에게 쓸데없는 일은 알리지 않는 센스를 발휘해야지.
“짱구네 집이 아니라 짱구 PC방이고, 쓰리랑헌터가 아니라 아리랑헌터다. 새끼야.”
“아무려면 어때요. 아리랑인지 쓰리랑인지 잡아서 족치면 되는 거지. 그나저나 아까 누구랑 통화한 거예요? 아주 좋아죽던데. 형, 연애해요?”
“내가 연애를 하건 말건 네놈이랑 무슨 상관이냐?”
“왜 나랑 상관이 없는데요!”
갑자기 놈이 꽥 소리를 지르면서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점원이 깜짝 놀라 달려와 봤을 정도로 놈이 내지른 소리가 가게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 자식아, 갑자기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형이 화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웃기는 자식이네, 이거? 내가 너한테 지금부터 연애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신고라도 해야 되냐? 너야말로 짜증 나게 왜 이래?”
녀석은 말없이 인상만 팍 구겼다.
“형, 나 알고 보면 진짜로 괜찮은 놈이거든요.”
“그래. 너 제법 괜찮은 놈이야. 그건 인정해.”
“오늘 나, 되게 멋지지 않아요? 새 옷 입고, 새 신발도 신고, 오랜만에 형 만나러 나온다고 미용실에도 갔다 왔는데요.”
“그래. 잘 꾸민 러시아 불곰 같다. 야성적이고 거친 매력이 풀풀 풍기는 게 좋다. 매력적이야.”
“근데 왜 나랑은 안 돼요?”
이놈에게 몇 번을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해 줘야 내 마음을 이해할까. 제발 귀찮게 달라붙지 좀 말라고 두들겨 패기라도 해야 포기할까.
난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녀석을 쳐다보기만 했다. 평소와는 달리 내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자 동수 놈은 휴우, 한숨을 쉬면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형, 나 배고파 죽겠어요. 빵이나 사 줘요.”
난 가난뱅이야, 먹고 죽을 돈도 없어. 앓는 소리를 하려다가 동수 아버지에게 받은 돈이 생각이 나 군소리 없이 일어섰다. 먹고 싶은 빵을 자기가 고르고 싶었던 건지 녀석이 곧 쪼르르 뒤따라와 쟁반을 들고 내 옆에 섰다.
“이 빵집은 슈크림 빵이 대빵 맛있어요. 형도 한번 먹어 봐요.”
놈은 그렇게 말하면서 슈크림 빵 두 개를 들어 쟁반 위에 올려놓으며 바보처럼 헤벌쭉 웃었다.
그동안 얼마나 잘 먹고 뒹굴었는지 녀석의 얼굴엔 피둥피둥 살이 올라 있었다. 미용실에 갔다 왔다더니 덥수룩하게 자라 있던 머리칼이 싹 정리된 건 보기 좋긴 한데 머리칼이 짧아지니까 경찰서 앞에 붙어 있는 흉악범 사진 속 인물 같아서 좀 무섭다, 솔직히.
“형이 사귀고 있는 사람이요. 전에 만났던 멸치 대가리, 그놈은 아니죠?”
계산대에서 쟁반 위의 빵들을 계산하고 있는데 동수 놈이 갑자기 물었다. 정곡을 찔려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계산대의 아가씨에게 카드를 꺼냈다.
“아냐. 걔가 아니라 다른 애야.”
“맞구나, 멸치 대가리. 그때 둘이 있는 꼴을 보니 언젠간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것 같더라니.”
“아니라니까.”
계산을 끝내자마자 동수 놈이 빵이 든 쟁반을 들고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하긴 멸치 대가리, 걔가 딱 형 취향이긴 하지. 하얗고 마르고 보송보송한 게.”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빵 하나를 집어 들어 우걱우걱 씹었다.
동수 놈의 말대로 슈크림 빵이 진짜 맛있었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정말 최고다. 급하게 먹다 보니 안에 든 노란 크림이 입 밖으로 흘러내린다. 그 꼴을 보던 동수 놈이 “더럽게 흘리지 좀 말고 먹어요” 하며 티슈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 자식 생긴 거랑은 다르게 은근히 성질 더럽던데요.”
“누구? 나민이가? 에이, 걔가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데.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애야, 걔가.”
“벌레 한 마리 못 죽이기는. 욕 잘하던데.”
나는 남은 슈크림 빵을 입 안에 쑤셔 넣으며 눈만 깜빡였다.
“무슨 소리야? 나민이가 너한테 욕을 왜 해?”
“그때 형 집에 가서 고기 구워 먹었던 적 있잖아요. 내가 멸치 대가리 붙잡고 술을 먹였었고. 취해서 늘어진 놈을 내가 방에 옮겨다 줬고요.”
나민이와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동수 놈을 만났던 적이 있다. 동수 놈이 “나도 한우! 한우!” 발광을 하면서 기어이 집까지 따라왔었던 날. 동수 놈이 나민이한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해서 애를 취하게 만들었다. 술 몇 잔에 취해서 뻗어 있는 나민이를 부축해서 방으로 옮겨 준 게 동수였다. 난 화장실에 간 사이였고.
“방으로 옮겨서 이불까지 덮어 줬는데, 그놈이 글쎄 내 팔뚝을 붙잡더니 ‘선생님 앞에서 깝죽대지 마, 씨발 새끼야’ 이러는 거예요. 나를 꼭 태워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눈빛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너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웃음만 터져 나왔다.
“나민이가 취해서 주정을 한 거겠지. 그때 너희들 꽤 취해 있었잖냐.”
“아, 글쎄. 취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니까요.”
“그런데 그 얘길 왜 지금에서야 하냐?”
“내가 형한테 혀어엉, 저 새끼가 나한테 씨발이래요오, 하면서 일러바칠 수 있었겠어요? 형이 그 자식을 귀여워하는 거 뻔히 다 아는데?”
“어찌 됐든 나민이는 그럴 애가 아냐. 취해서 주정한 걸 거야.”
동수가 “아오, 미치겠네. 그때 그 새끼 면상을 핸드폰으로 찍어 뒀어야 됐는데. 아오오!” 하며 자기 가슴을 팡팡 쳐 댔다.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빵이나 처먹어, 자식아.”
“T 대학 나온 사람이 대체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요? 형 사, 사, 사랑…… 아오, 씨발. 사,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바보 멍청이가 되는 타입이었어요? 언제 한번 그 자식 얼굴 자세히 봐 봐요. 그 자식 눈빛이 진짜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나한테 욕할 때 보니까 눈에서 아주 살기가 철철 흘러넘치던데. 걔가 왜 앞머리를 길러서 눈을 가리고 다니겠어요.”
“나민이가 사람들이랑 시선 마주치는 걸 싫어해. 나도 걔 나이엔 그랬으니까 잘 알아. 나나 나민이처럼 부모한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애들은 사람이 싫은 법이거든.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엮이는 게 두렵기도 하고.”
“어오 씨, 왜 갑자기 형의 아픈 과거사를 꺼내고 그래요? 욕도 제대로 못 하게. 그 자식이 살벌한 눈빛을 감추기 위해서 앞머리로 가리고 다닌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박하신의 쨍알대는 목소리였다.
<당신이 그 자식을 몰라서 그래. 당신이야 지금 눈에 대형 콩깍지가 씌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겠지만. 그 자식 내숭에 속지 말라고. 외모에 속지 마. 생긴 거는 하얗고 마른 게 순한 강아지 같지? 그런데 한번 자세히 봐. 그 자식 눈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 당시 나는 박하신이 악에 받쳐 되는대로 지껄인다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었다. 나민이 눈이 무서워? 얼마나 크고 맑은 눈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네, 하면서.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무서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딱 한 번, 진짜로 딱 한 번. 허공을 바라보던 나민이의 눈이 잘 벼린 칼날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으니까.
“형도 애들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잘 알잖아요. 내 고등학교 동창 녀석도 사귀던 여자애한테 뒤통수 맞았어요. 알고 보니 그 여자애가 고등학생이었는데, 미성년자랑 관계했다고 신고하기 전에 입막음 조로 돈 내놔라. 이래서 3백만 원이나 뜯겼어요. 그 여자애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순진하게 생겼다고요. 멸치 대가리, 걔처럼. 하얗고 하늘하늘한 것도 똑같네.”
“비교를 해도 그런 질 나쁜 꽃뱀이랑 비교를 하냐? 새끼야?”
“사람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법이라고요. 형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제발 닥치고 빵 처먹어라. 한 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진짜 맞는다, 너?”
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삭이며 동수 놈의 주둥이에 빵을 쑤셔 넣었다.
그래. 그 애가, 나민이가 순진함과는 거리가 먼 애일지도 모른다.
그날 밤. 나민이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취한 척, 노골적으로 나를 유혹했다. 그리고 내가 미쳐서 덮친 게 아니라 걔가 날 덮쳤다. 숫기 없는 순진한 애가 할 행동은 절대로 아니었다.
나를 보고 수줍게 웃으며 볼을 붉히는 나민이. 선생님, 좋아해요, 하면서 배시시 웃는 강아지 같은 나민이. 당장 나가서 콘돔 사 올까요? 하면서 간밤에 이불 속에서 다리 사이를 얽어 오며 속삭이던 나민이. 동수에게 욕을 하던 나민이. 살기 흐르는 눈빛으로 동수를, 박하신을 노려보던 나민이.
혹시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순수한 나민이의 모습은 가짜가 아닐까.
갑자기 알 수 없는 한기가 몸을 감쌌다. 불어닥치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맞는 것 같았다.
“형 기분 나빠 하지 말아요. 난 진짜 형이…….”
“닥치라고 했다.”
정말로 주먹이 나갈 것 같아서 난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다. 동수 놈이 입을 다물고 빵을 우물우물 씹었다.
“워우우. 더럽게 춥다.”
곧 노금영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나타났다.
“기식이 형은요?”
“그 자식은 오토바이 대 놓고 온다고 했어.”
동수가 묻는 소리에 대답하며 노금영은 빵 하나를 덥석 주워 먹었다.
“빵 쪼가리 주워 먹고 힘이나 쓰겠냐, 어디?”
“힘쓸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요?”
“야, 한똥수. 우린 지금 어디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적의 본거지에 쳐들어가는 거다. 오늘은 결전의 날이야, 자식아.”
노금영이 또 허풍을 떤다. 웃기고 있네. 누가 적의 본거지라고 했냐. 거기 가면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이트 운영진들 중 한 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난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적의 본거지였어요? 짱구네가? 우, 우와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연장 좀 챙겨 올 걸 그랬네.”
“적의 본거지가 아냐. 그냥 PC방이라고. 아리랑헌터란 놈이 PC방에 와서 글을 쓰고 간 거라니까. 가도 놈을 만날 수 없을지 몰라.”
이미 결전의 날이라는 비장함에 심취된 동수와 노금영은 내가 하는 소리를 듣지도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똥수야. 형이 누구냐? 연장은 나랑 기식이가 알아서 챙겨 왔다.”
노금영이 입가에 온통 빵 부스러기를 묻히고선 크크크 웃었다.
“아, 진짜. 금영 형, 내가 언제 거기가 적의 본거지라고 했어요? 흉기 같은 거 들고 갔다간 대번에 신고당해요.”
“돈 월리. 돈 월리. 이 형님이 이 천재적인 머리를 굴려서 계획을 세워 왔으니까 너희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돈 월리는 어느 집 똥개 이름이에요? 돈 워리도 제대로 발음 못 하는 양반이, 무슨.”
“돈 워리든 돈 월리든 뜻만 통하면 된다.”
노금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히죽 웃었다. 동수 놈도 따라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큰형님만 믿을게요.”
“야, 한똥수. 지금 그 대사 느낌이 아주 좋아. 한쪽 얼굴만 찌그러뜨리고서, 그러니까 침 찍 뱉는 얼굴로 방금 한 말 다시 해 볼래?”
동수 놈은 노금영이 시키는 대로 한쪽 얼굴을 힘을 주어 구겼다.
“큰형님만 믿습니다.”
조폭, 그 자체였다. 노금영은 동수 녀석의 그런 모습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똥수야, 이제부터 머리카락 너무 짧게 자르지 마라.”
너 지금 그 꼴로 밤에 나다니다간 앞서 걷는 여자들한테 백발백중 강도라고 오해당한다. 곰 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의외로 여린 심성의 소유자인 녀석을 위해 그 뒤의 말은 생략했던 것이건만.
“왜요? 왜요? 전 머리카락 긴 게 어울려요? 하긴 오늘 미용실 갔을 때 아주머니가 저보고 연예인 닮았다고 했어요. 팔다리도 길쭉길쭉한데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겨서 아가씨들 여럿 후리고 다니겠어? 이러시는데 전 그냥 어유, 저 아주머니, 사람 보는 눈 있으시네,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후후후 웃고 말았죠.”
“더럽게 재수 없는 새끼일세, 이거.”
노금영이 짜증을 내며 동수 놈에게 돌돌 만 휴지 뭉치를 집어 던졌다. 동수는 재수 없는 새끼라고 욕을 먹어도 신이 나서 창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 보았다.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느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씩 웃는다.
“아오, 이 야성적인 카리스마. 캬아. 죽여준다, 죽여줘. 난 어쩌면 이렇게 잘생겼을까.”
저 새끼, 저거 한 대 치고 싶다. 진심으로. 움켜쥔 내 주먹이 덜덜 떨렸다.
“이 새끼 이거 머리 확 밀어 버리니까 감옥소에서 막 출소한 조폭 같네?”
검은색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멘 기식이가 들어오면서 드디어 진실을 말했다. 그 소리를 들어도 동수 놈은 싱글싱글 웃었다.
“기식이 형, 저한테서 터프한 남자의 매력이 느껴지지 않아요?”
“터프고 비프고 너 조폭 같다니까?”
기식이가 인상을 팍 쓰고 진실을 말해 주는데도 동수의 귀에는 ‘너 멋있다. 남자답다’라는 소리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기식이도 늘 놈이 꿈꾸는 세련된 도시 청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유행하는 온갖 것들로 치장하고는 있다. 평소보다 꽤 세련되게 잘 차려입긴 했는데 촌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대체 뭘까…… 하고 봤더니. 얼굴이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리고 동추 형, 위에 입은 그 점퍼 좀 입지 말아요. 촌스러워요.”
누가 누구한테 패션 센스를 지적하는 거냐. 말해 봤자 입만 아플 뿐이라 빵만 열심히 씹었다.
“야, 거기 쭈꾸미 두 마리. 지랄 쇼는 그만하고 이리 가까이 와 봐라.”
노금영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우리는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여 머리를 맞댔다.
“우리의 계획은 이렇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노금영이 눈을 빛내며 운을 띄웠다.
*
*
“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생의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삐리리삐리리 벨 소리가 나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난 컴퓨터 칸막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봤다. 안에 들어온 것은 교복을 입은 사내 녀석 두 명이었다. 녀석들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요즘 10대 애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온라인 게임을 했다.
두 놈이 욕을 주고받고 알 수 없는 게임 용어들을 지껄이며 게임에 열중해 있는 사이. 다시 한번 문을 열면 나는 멜로디가 들리더니 손님이 들어왔다.
“형, 오랜만이에요. 요즘 많이 바쁘셨나 봐요?”
일하는 남자애가 알은척을 하는 걸 보니 이 가게 단골손님인 모양이었다.
어떤 게임 폐인인지 얼굴이나 보자 싶어서 고개를 내밀었다. 카운터 앞에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서 점원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작고 왜소한 체구에 등산복을 입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중년 남자였다.
“가게가 좀 바빠서.”
“우와. 요새 다들 장사 안 된다고 죽겠다, 죽겠다 하는데 형네 가게는 장사 잘되나 봐요?”
“그게 아니라 아르바이트생 두 놈이 동시에 관둬서. 나랑 마누라가 계속 가게에 나가서 일했거든. 다행히 사람이 빨리 구해져서 한시름 놨지. 자리 남아 있어?”
“그러시구나. 형님 자리야 물론 비워 뒀죠. 사장님이 형 자리는 늘 남겨 놓으라고 하셨거든요.”
“고마워.”
남자는 자기 아들뻘 되는 점원에게 예의를 지켜 인사하고는 구석진 자리로 걸어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난 모니터 화면에 뜬 인터넷 기사들을 눈으로 대충 훑었다. 옆에 앉은 애들이 쌍욕을 해 대기에 한마디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또 문이 열렸다. 사람 짜증 나게 하는 삐리리리, 멜로디가 들렸다. 그리고 점원의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한데 남아 있는 자리가 없는데요.”
“사장 있냐?”
앞뒤 다 잘라먹고 본론부터 툭 던지는 노금영의 목소리.
왔구나. 난 모니터 화면에 뜬 인터넷 창을 끄고 카운터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누구신데 사장님을 찾으세요?”
“그건 네놈이 알 거 없고. 당장 사장 불러.”
“저기요. 누구신지 알아야 사장님께 말씀드리거나 하죠.”
“팔봉이 형님이 보냈다고 해라.”
박팔봉이 이 지역 상권을 꽉 쥐고 있다는 소문을 밤일꾼 일을 하면서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건달에게 돈을 상납해 가며 장사하냐, 하겠지만 그건 속사정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하는 소리다.
아직도 건달들은 존재한다.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 피를 빨아먹으며 살고 있다. 더럽게 아니꼬운 일이지만 아직도 그런 놈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들 밤 세계 일꾼들도 먹고살 수 있는 거다. 주로 우리들에게 더러운 일들을 맡기는 건 놈들, 아니면 놈들과 관련된 사람들이니까.
평범하게 사는 일반인들이 비싼 돈 들여 가며 밤 세계 일꾼들에게 맡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노금영의 계획은 이랬다.
박팔봉의 똘마니들을 가장해서 PC방 사장, 혹은 점원 애들을 협박해서 무조건 털어 보자고.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결국은 쳐들어가서 되는대로 족쳐 보자, 이거였다. 털면 뭐든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게 노금영의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해도, 확실히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아리랑헌터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혹시 이 PC방에 오는 손님인가요?’ 하고 묻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캐낼 수 있을 터였다.
점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장과 통화하는 동안, 노금영은 짜악짜악 소리 나게 껌을 씹어 댔다.
가게 안의 손님들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카운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평범한 손님인 척 카운터 앞에 선 세 놈을 쳐다보았다.
우중충한 카키색 비니에 하얀 안대를 끼고서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있는 동수, 선글라스를 낀 채로 가게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휘파람을 부는 기식이. 카운터에 비스듬하게 기대서서 진열된 과자들을 만져 대는 노금영.
누가 봐도 저놈들은 건달이다. 그래도 진짜 건달은 아니니 어설플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은 기우였다.
“저놈들 깡패야? 우와, 인상 진짜 더럽다. 우리 학교 일진 새끼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네. 잘못 건드리면 품에서 칼 꺼내 들고 막 휘두르는 거 아냐?”
“그런데 저 엄청나게 커다란 놈. 편의점에 붙어 있던 현상 수배범 같아.”
옆에 앉은 두 녀석이 지껄이는 소리에 괜히 내 기분이 다 씁쓸해졌다. 저런 놈들이 내 동료다 이거야.
“사, 사장님이 곧 오신대요. 저기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기다리세요.”
점원이 덜덜 떨면서 노금영과 똘마니들을 카운터 옆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동수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 덜떨어진 놈이 나랑 눈이 마주쳤다고 안대로 가리지 않은 눈으로 찡끗, 윙크를 했다.
“우와아, 겁나 살벌해. 저 새끼, 눈 밑을 파르르 떠는 거 봐. 약물에 중독되면 저렇게 된다던데.”
옆의 놈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물 중독은 개뿔. 저 자식은 그냥 윙크한 거야, 윙크. 저 자식은 진통제 잘못 먹고 탈 난 이후로 웬만하면 진통제도 안 먹는 놈이야.
“너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냐?”
“5개월 정도 됐어요.”
“그 정도 일했으면 웬만한 단골손님들은 다 알겠네?”
“그, 그렇죠. 뭐.”
“그럼 아리랑헌터라는 놈 아냐?”
노금영이 던진 직구에 점원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옳거니! 뭔가 있는 거로구나. 노금영의 눈이 번쩍 빛났다.
“모르겠는데요? 그거, 게임 닉이래요? 이름 한번 촌스럽네.”
점원이 뒤늦게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지만 이미 늦었다.
“야, 그 새끼 어디 있냐?”
노금영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질문을 던진 때.
나는 보았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놈이 슬금슬금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숙여 바닥을 기어가는 것을.
점원이 일부러 자리까지 비워 두었던 아까의 단골손님 아저씨였다.
손님 접대용 테이블이 있는 쪽에선 보이지가 않는지 노금영도, 기식이도, 동수도, 아무도 남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대로라면 남자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비상구로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보다 못한 내가 벌떡 일어났다. 비상구 쪽으로 향하는 날 발견한 동수가 팔꿈치로 노금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동료들이 뒤따라오든지 말든지 난 비상구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비상구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마저 올라가 완전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었다. 나도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간 남자는 인적 드문 골목을 뛰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치고는 꽤 빠른 남자였다.
저 인간, 저거 뭐 저리 빨라? 평소에 달리기 연습이라도 하는 거 아냐?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남자를 따라잡기는커녕 자꾸만 거리가 멀어지는 게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니까 자꾸만 속도는 늦어지고. 남자와의 거리는 자꾸만 멀어질 뿐이고.
“거기서! 거기 서라고!”
꽥 소리를 질렀더니 남자가 딱 한 번 뒤돌아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겁에 질려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남자의 바로 앞쪽 골목에서 동수 놈이 튀어나왔다. 내가 나가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 나와 골목으로 빠진 모양이었다. 신장 190의 동수 놈이 온몸을 던져 달려드는데도 남자는 잡히지 않고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밤일을 쉬는 동안 체력이 떨어졌다곤 해도 아직 20대인 날 따돌린 것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난 동수에게도 붙잡히지 않는다니. 보통내기가 아니다, 저 아저씨. 난 저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가 아리랑헌터라는 것을 확신했다.
동수에게서 빠져나간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자가 좁은 골목 사이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동수가 얼른 남자의 뒤를 따라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불현듯 엄청나게 불안한 예감이 뇌를 관통했다.
“야! 동수야. 쫓아가지 마!”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놈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동수 놈이 피를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던 모습이 떠올랐다.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감던 그 얼굴. 바닥에 생겼던 피 웅덩이.
“동수야!”
두 사람이 사라졌던 골목 안으로 접어들어 나는 다시 한번 동수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그 소리는 벽과 벽에 부딪쳐 내 귀에 다시 파고들었다. 쿵쿵 뛰는 가슴을 움켜쥐고, 터져나갈 것 같은 허벅지에 힘을 주어 달렸다. 그리고 쓰레기 썩은 내 풀풀 풍기는 골목이 드디어 끝났을 때.
나는 한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널브러져 누운 누군가의 모습 위로 동수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그때의 모습이 겹쳐졌다. 달리는 것을 갑자기 멈추자 가빠졌던 호흡이 한꺼번에 돌아와 눈앞이 핑 돌았다.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다 들이마시기를 반복하자 주위의 풍경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건 동수가 아니라 우리가 쫓던 남자였다.
표정 없는, 우리나라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한 남자가 중년 남자를 바닥에 단단히 짓누르고 있었다.
동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바닥에 짓눌린 중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얼굴 까만 남자의 옆에는 낯익은 얼굴을 한 놈이 서 있었는데, 그놈은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며 코웃음을 핑 쳤다.
“대체 뭡니까? 중년 남자 한 명을 못 잡아서 쩔쩔매다니요.”
그놈은 백단영이었다.
그렇다면 중년 남자를 누르고 있는 저 얼굴 까만 놈도 해결사일 것이었다. 해결사 놈들이 왜 여기에 있냐? 동수에게 무언의 질문을 던졌지만 놈도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당신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이 남자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이트의 운영진 중 한 명입니다.”
“알아요. 사이트에선 아리랑헌터라는 닉을 쓰는 것 같더군요. 그나저나 당신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뭘 하긴요. 일을 하고 있죠.”
“일요? 무슨 일?”
“의뢰받은 일요. 어떤 단체한테 일을 의뢰받았거든요. 일을 의뢰한 단체가 저희에게 귀면의 정체를 밝혀 달라더군요. 그런데 귀면들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니 놈들이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사이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게 밝혀져서요.”
“귀면들의 정체를 밝혀 달라고 했다고요? 대체 어떤 놈들이요?”
“전국 도사 연합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이건 또 무슨 사이비 냄새 풀풀 풍기는 단체 이름이냐.
“저, 그 단체 이름 들어 봤어요!”
동수가 반갑게 외치며 아는 체를 했다.
“용천 도사님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도사 연합이란 데가 있다고. 말 그대로 전국의 도사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예요. 단체 회원들 중에는 해외에 나가 있는 도사들도 있대요.”
전국 도사 연합이란 이름만 들어도 거기가 뭐 하는 단체인지 알겠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그 단체에서 해결사에게 일을 의뢰했느냐 이거다.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고 도사라는 인간들 아닌가. 도사라는 양반들이 살아 움직이는 시체 똥개 몇 마리 못 잡아서 해결사에게 일을 의뢰해?
“보니까 그때 봤던 용천 도사인지 하는 영감도 제법 용하던데. 도사 연합이라 하면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인간들이 수두룩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자기들 손을 더럽히기 싫은 모양이겠지요.”
백단영이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불댔다.
얼굴 까만 놈이 아리랑헌터를 일으켜 세웠다. 발악하다가 몇 대 맞기라도 했는지 아리랑헌터의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악당의 모습은 아니다. 슬리퍼 직직 끌고 동네에 담배나 사러 다니게 생긴 평범한 아저씨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에 질린 눈을 이리저리 굴려 주위를 쳐다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 때문에 더더욱 그래 보였다.
“가끔 있습니다. 동료 뒤통수를 치는 데 우리를 이용하는 인간들이요. 자기들이 직접 손을 쓰면 나중에 꼬리가 잡혀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데, 우리에게 일을 맡기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적을 해치울 수 있으니까. 우린 맡은 일 하나만큼은 깔끔하고 완벽하게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거든요.”
대놓고 자기들 일 잘한다고 자랑하는 백단영의 말에 난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동료의 뒤통수를 쳐요? 그럼 저, 거시기…… 도사 연합의 동료라면 같은 도사겠고…… 도사 연합의 적이 되는 도사라면 귀면들을 부리는 젊은 우두머리겠고…… 그럼 결국 도사 연합이 귀면들의 정체를 밝히고, 대가리격인 도사 놈을 제거해 달라고 했단 거네요?”
동수가 오랜만에 놀라운 추리를 했다.
백단영은 씨익 웃었다.
“네. 한동수 씨, 당신 말이 맞습니다. 도사 연합 대표들이 우리 사무실로 찾아와 귀면들의 정체를 밝히고, 규칙을 깨고 금지된 술법을 행한 배신자를 처리해 달라고 하면서 어마어마한 거액을 내놓았습니다.”
“배신자라면 귀면들을 부리는 놈요?”
“무학 도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젊은 놈이 아니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귀면들을 부리는 놈은 젊은 놈인데요?”
동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이는 동수와는 달리 나는 백단영이 하는 말의 의미를 대번에 알아챘다.
“그러니까 귀면을 부리는 놈 따로, 귀면을 만든 놈 따로라는 얘기로군요.”
“그런 얘기가 되겠지요. 자세한 건 저희도 아직 모릅니다.”
내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7년 전 강원도에서 만난 그 아이는 할아버지와 정신 이상한 누나와 살고 있다고 했다. 아이의 할아버지란 사람이 운영하던 가게가 두레 식당. 그 영감은 평범한 식당집 사장이 아니라 무학 도사라는 양반이었다는 얘긴가.
나나 다른 사람들은 갈색 가면이 귀면을 만들고 귀면을 조종하는, 모든 일의 핵심 인물이라고 믿어 왔다.
<예끼. 이놈아. 놈들을 부리는 도사가 20대 젊은이라고? 분명 네놈이 잘못 본 거겠지.>
일전에 용천 도사가 동수에게 핀잔을 주던 말이 떠올랐다. “귀면을 부리는 도사가 있었을 텐데?”라는 질문에 동수가 “네. 제가 봤습니다. 그놈은 저와 비슷한 20대로 보였어요” 하고 대답했던 때였다.
어째서 용천 도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동수의 눈을 의심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용천 도사는 단순히 귀면들을 ‘부리기만 하는’ 도사가 아니라 놈들을 ‘만들고 부리는’ 도사를 말했던 것이었을 거다.
어느 정도 도력을 쌓은, 즉 나이가 좀 있는 도사만이 귀면 같은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
일전에 갈색 가면이 누군가와 통화하던 목소리를 떠올려 보자.
갈색 가면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썼다.
놈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마치 어른한테 혼나는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들린다고 생각했지 않은가.
그때 갈색 가면이 통화하던 상대는 혹시 자신의 할아버지, 무학 도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그 당시 갈색 가면의 목소리가 어른한테 혼나는 아이가 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들렸던 것인지 이해가 된다.
백단영이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 사람을 탐색하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우리에게 의뢰인에 대한 정보를 밝히는 이유가 뭡니까? 맡은 일이나, 의뢰인에 대한 정보는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 이게 우리들 밤 세계 일꾼들의 기본적인 규칙일 텐데요.”
나는 쳐다보는 놈의 불편한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도사 연합 대표들이 당신들한테도 일을 의뢰하러 갈 테니까 굳이 숨길 이유가 없죠.”
“그 양반들이 왜 우리한테까지 일을 맡기려 들겠습니까. 당신들한테 일을 의뢰했으면 됐지.”
“이번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당신들의 도움이 꼭 필요할 테니까요.”
“겨우 이 정도 일을 처리하는 데 우리 같은 놈들 도움까지 필요하겠습니까? 잘난 당신네들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텐데요.”
“물론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도사 연합 양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 이유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임동추 씨.”
아까의 그 기분 더럽게 만들던 백단영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내 얼굴에 고정되었다.
역시 저놈은 뭔가 알고 있는 거다. 어느새 동수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인상 더럽기로 따지자면 아리랑헌터를 붙잡고 있는 얼굴 까만 놈도 만만치 않은데, 동수 놈의 인상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덩치 커다란 사냥개가 주인을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서 든든하긴 하다.
“우리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다.”
지금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아리랑헌터가 입을 열었다. 겁에 질려 있는 모습과는 달리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나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우리 쪽에는 꼭두각시들이 있어. 그건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만.”
“꼭두각시? 당신네 사람들은 귀면을 그런 식으로 부르나 봐?”
내가 묻는 말에 아리랑헌터는 퉁퉁 부은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당신네 풍기 문란 단속 어쩌고 하는 것들은 우리를 무슨 거대한 악의 집단, 악의 축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우릴 건드린 건 그쪽이야. 알아? 그쪽이 먼저 싸움을 걸어 왔다 이거야.”
“우린 그냥 그분의 뼈를 되찾고 싶었을 뿐이야. 너희들은 그분의 뼈를 훔쳐 간 놈과 한통속이잖아. 그분의 뼈를 몇십 조각으로 해체해 영원히 태워 버리려 한 너희들이 악당이 아니면 뭔가!”
아리랑헌터가 크게 일갈했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래요? 이 아저씨?”
동수가 왜 저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동수 놈과 똑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저 양반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분의 뼈를 훔쳐 간 놈과 한통속? 그분의 뼈를 해체해서 영원히 태워 버리려 해? 누가? 우리가?
우린 돈 받고 맡은 일, 박스를 배달한 죄밖에 없다.
나중에서야 박스 안에 든 것이 인간의 뼈이며, 그 뼈가 임충식이란 자의 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박스 배달을 의뢰한 김태민이 뭐 하는 놈인지, 어떻게 생긴 놈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인적이 뚝 끊긴 골목길의 어둠을 뚫고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노금영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면 놀랄 법도 하건만 그는 태연했다.
“천수 형님한테 전화가 왔다.”
노금영이 던진 그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파악됐다.
팔자걸음으로 우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온 노금영은 백단영을 바라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노금영은 웃는데 백단영의 표정은 코 푼 휴지처럼 구겨졌다.
“빽가야, 너희 쪽 단체 회장이 우리랑 잘 협력해서 일을 처리하라고 했다며? 이그그, 우리 빽가 불쌍해서 어쩌나. 평소에 그렇게 하찮게 보던 쌀벌레, 바퀴벌레, 나방 같은 우리랑 일하게 됐는데. 기분 겁나게 더럽지? 회장이고, 뭐고 확 다 죽여 버리고 싶지 않냐?”
“그래, 기분 겁나게 더럽지만 어쩌겠냐? 윗놈이 까라면 까야지. 그러니까 주둥이 좀 닥쳐라. 노금영. 네놈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으니까.”
백단영이 순식간에 성난 양아치로 돌변했다.
노금영은 켈켈켈, 같은 편인 나도 저놈 뒤통수 한 대 후려갈겼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야비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천수 형님. 아리랑헌터는 빽가 놈이랑 해결사 놈 하나가 잡은 모양이에요. 네네. 그렇게 하지요. 그럼 30분 뒤에 거기서 만납시다.”
통화는 간단했다. 통화를 끝낸 노금영에게 동수가 “거기가 어딘데요?” 하고 물었다. 노금영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휘휘 후벼 파면서 시큰둥한 어조로 지껄였다.
“도살장.”
동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시뻘건 얼굴로 씩씩대던 아리랑헌터의 면상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리더니, 곧 히끅히끅거리며 딸꾹질까지 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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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도살장이지 그곳은 기식이네 가게가 있는 건물 지하실이다.
한창 IT산업이 부흥할 때 젊은 놈들 몇 명이 자기들 사업을 해 보겠답시고 이 건물 지하를 사무실로 임대했다.
하지만 사업이란 게 어디 애들 장난인가.
경험도 없이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든 젊은 놈들은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순식간에 수억의 빚더미에 올라앉은 젊은 사장은 실의에 빠져 술만 퍼마시더니 목을 매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난 아직 젊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되지!’ 하고 벌떡 일어서서 남은 인생 열심히 살았으면 됐을 텐데.
젊은 사장이 지하 사무실에서 자살한 이후, 몇 번이나 세입자가 들어왔건만 다들 몇 달도 채 살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다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밤만 되면 목이 옆으로 홱 꺾이고 혀가 가슴까지 내려온 젊은 남자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직도 이 건물 지하는 텅 빈 상태다.
건물 주인인 기식이네 할아버지조차 들어오려 하지 않는 곳이다. 물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넓은 공간을 확보한 우리는 제법 이곳을 들락거렸지만.
기식이가 이중 삼중으로 감아 놓은 쇠사슬을 풀어 문을 열자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던 쾌쾌한 공기가 우리를 덮쳤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냄새가 시체 썩는 냄새 같아서 나는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희한한 게 여기는 올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지하치고는 지상으로 통하는 창문도 있어서 통풍도 잘되는 편인데.”
“사람이 죽은 데라 그런 거야.”
나처럼 코를 막고 웅얼거리는 기식이의 말을 노금영이 얼른 받아쳤다.
뒤에서 아리랑헌터가 또 딸꾹질을 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금영의 입에 악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이 인간은 저 비쩍 곯은 중년 아저씨를 놀리는 게 재밌는 건가.
안으로 들어가 가죽 표면이 찢어져 솜이 다 튀어나온 소파에 아리랑헌터를 앉혀 놓았을 때, 박천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달봉 형님은요?”
“오늘 제사라서 못 온대. 저 양반이 그, 거시기냐?”
“네, 형님. 저 양반이 거시기예요.”
“근데 어째 거시기 같지가 않고 꾀죄죄한 게, 왜 저렇게 빈티가 잘잘 흐르냐.”
나와 박천수가 주고받는 거시기 타령에 백단영이 눈썹 사이에 힘을 빡 주고서 우릴 쳐다보았다.
“그런데 도사 연합 대표란 사람이 직접 형님한테 전화해서 일을 의뢰한 거예요?”
“아니, 직접 찾아왔더라. 다리에 쫙 붙는 일자바지에, 옆이랑 뒷머리는 빡빡 밀고 위에만 바짝 세운 머리칼에, 한겨울에 선글라스를 끼고, 혀 내밀고 있는 입술 그려진 스웨터 입은 영감이 우리 가게에 찾아왔더라. 처음 보고는 웬 미친 영감인가 싶었지. 그런데 ‘밤일꾼 서울 지역 대표자시죠?’ 하면서 명함 한 장을 내미는데, 전국 도사 연합 대표란 직함이 떠억 박혀 있는 거야.”
“그분이 좀 개성이 넘치는 복장을 좋아하긴 하시죠.”
옆에서 듣고 있던 백단영이 한 마디 껴들었다.
“가게를 마누라한테 맡겨 놓고 둘이서 근처 커피숍에 가서 대화를 나눴지.”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일단 묻더라. 귀면들을 없애고 싶지 않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했지. 그놈들 때문에 밤 장사가 안돼서 죽을 맛이라면서 엄살도 좀 떨고. 그랬더니 우리한테 일을 의뢰하고 싶다는 거야. 귀면들에 대한 얘기도 해 주고. 귀면들을 만든 게 무학 도사란 영감이라는데, 무학 도사란 놈이 자기가 만든 귀면들로 100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서 세계를 정복할 생각이라는 거야. 세상에!”
흥분한 박천수가 외치는 소리에 “헉!”, “헐……”, “오마이갓”, “끄으응” 온갖 의성어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난 듣는 것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부끄러워져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노금영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있고, 기식이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팡팡 쳐 댔다. 평소엔 이런 얘기가 나오면 신이 나서 듣던 똥수 놈도 오만상으로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서울을 날려 버릴 놈이라 하시던데 말이죠. 솔직히 그분이 사무실에서 나가신 뒤에 회장님이랑 저희들이랑 미친 영감이라고 한참을 욕했었습니다.”
“완전히 미친 영감이잖아. 전국 도사 연합인지 뭔지 하는 데, 사이비 종교나 뭐 그런 거 아냐? 아가 동산 같은 거.”
노금영이 자기도 생각을 떠올릴수록 기가 막힌 모양인지 허허허 웃는 백단영에게 물었다.
“도사 연합이란 데가 사이비 종교 단체면 어떠냐. 그 단체 대표가 정신 나간 늙은이면 또 어때? 그런데 말이다, 노금영. 어차피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잖냐. 귀면들을 처리해야 옛날처럼 일이 들어올 테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려 했던 일을 돈 받고 하게 됐다는 거야.”
“그것도 꽤 큰돈을 받고 일하게 됐다는 거지.”
백단영의 말에 박천수가 한마디 거들어 말을 완전히 끝맺었다.
갑자기 노금영이 슬금슬금 나와 박천수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동수와 기식이도 가까이 다가와 껴들었다.
“그 미친 영감탱이가 얼마를 준답니까?”
“큰 거 한 장.”
노금영이 “에게게? 백만 원?” 하니까 박천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럼 천만 원?”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다. “그, 그, 그, 그럼…… 1억?” 노금영이 마지막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박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어어억! 누구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괴성이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그럼 열 명이서 같이 일해도 한 사람당 천만 원씩 가져갈 수 있다는 거네요?”
동수의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녀석은 그야말로 사지를 벌벌 떨면서 박천수를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우리끼리 한다. 나, 달봉이, 동추, 금영이, 동수, 기식이. 일이 마무리되면 정확히 6등분 할 거야.”
“다른 밤일꾼들은요?”
“연락되는 밤일꾼들한테 전화를 걸어 봤더니 위험하다고 안 한다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박천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챘을 것이었다. 어차피 박천수는 다른 밤일꾼들에겐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아무도 그래도 그러면 안 되죠, 그래도 같은 일하는 동업자들인데…… 이따위 헛소리는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귀면들을 잡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고생한 건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우리끼리 해결하고 의뢰비를 나눠 가지는 게 옳다.
이 일을 무사히 처리하면 2천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이 각자의 손에 들어온다. 지폐 다발을 만져 볼 생각에 다들 잠시 단꿈에 젖어 들었다.
“그런데 왜 우리한테 그렇게 많은 돈을 준대요?”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동수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백단영이었다.
“찢어발겨도 다시 살아나는 귀면이 열한 마리. 놈들을 만든 무학 도사. 그리고 놈들을 개처럼 부리는 젊은 도사 한 명. 우리는 그놈들을 상대해야 하는 겁니다. 사지 멀쩡한 채로 이번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내가, 혹은 당신들이 일을 하던 중에 죽기라도 하면 받기로 한 돈은 땡전 한 푼 못 받는 겁니다. 우리가 일을 처리하면 그쪽에선 돈은 좀 들겠지만 일이 해결돼서 좋은 거고, 우리가 죽기라도 하면 이번엔 자기들이 직접 나서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그쪽에선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거죠.”
백단영의 말에 동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우리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면 되는 거잖아? 겨우 그깟 놈들 상대하면서 목숨을 걸 생각이었냐, 빽가야? 너도 나이 들더니 많이 기가 많이 약해졌다? 장어나 한 마리 푹 고아 먹어라, 인마.”
노금영이 실실 웃으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빽가 너희들은 귀면 놈들이랑 안 싸워 봤지? 그놈들 별거 아냐. 그래 봤자 썩은 고름 줄줄 흘리는 시체들이라고. 그리고 무학 도사나 그놈 꼬붕인 새끼 도사는 사람일 거 아니냐. 사람이면 찌르고 쑤시면 되는 건데 뭘 그리 걱정하냐? 돈 월리. 비 패삐.”
“돈 워리 비 해피다, 새끼야.”
백단영은 짜증을 내며 자신의 어깨를 감싼 노금영의 손을 쳐 냈다.
“그런데 형님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죽거나 다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죽여야 된다는 거 아닐까요?”
“엉? 사람을 죽이래요?”
또다시 슬그머니,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동수의 질문에 기식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박천수에게 물었다.
“죽여? 누굴? 그냥 귀면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무학 도사란 영감을 처리해 달라고만 하던데?”
그게 결국 죽여 달라는 말이잖아! 형님이고 뭐고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되레 우리에게 묻는 박천수의 면전에 대고 빽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신자를 처리해 달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겠습니까, 박천수 씨.”
“허억! 우린 사람은 안 죽이는데!”
뒤늦게 ‘처리’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은 박천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걱정하지 마요, 천수 형님. 어차피 사람 두 놈, 쓱싹 해치우는 건 해결사 놈들이 알아서 할 거니까. 우린 귀면 놈들만 해치우면 되는 거고. 안 그러냐, 빽가? 그러려고 그쪽에서 우리보다 두 배는 더 많은 돈을 받았지?”
백단영은 노금영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람 안 죽인다면서요?”
“제가 언제 해결사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해결사 모두가 사람을 죽이거나 하진 않지만 간혹 그런 악랄한 짓을 하며 돈 받아먹고 사는 놈도 있다고 했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처치해야 할 놈들이 서울을 초토화할 악당이라는데, 서울을 지키려면 없애야죠.”
내가 툭 던진 말을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백단영은 아리랑헌터가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백단영이 의자 앞에 멈춰 서자 까만 놈이 아리랑헌터의 어깨를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기다리느라 지루하셨지요? 피차 시간 낭비할 거 없이 빨리빨리 처리합시다. 좋은 말로 할 때 아는 거 다 불어 보시죠.”
“응? 으, 음주 단속기 불라고? 나 딱 매, 매, 맥주 한 잔 마셨는데?”
저렇게 처절하게 들리는 농담은 또 처음이었다.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새마을 개그를 해 대는 쓸데없는 용기 하나만큼은 높이 사 줘야겠다. 의자 뒤에 선 까만 놈이 아리랑헌터의 어깨를 꽈아악 움켜쥐었다. 아리랑헌터가 악을 쓰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아까 하던 얘기라도 계속해 보시죠. 지금부터 30초 안에 말하지 않으면 피 좀 흘릴 겁니다.”
백단영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것 같냐? 이놈들아!”
아리랑헌터는 대답 대신 악을 쓰며 발악을 해 댔다. 몸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도 신기하게도 악을 쓰는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이런 짓이라니요. 우린 아직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는데요. 30초 다 됐습니다. 봉아, 시작해라.”
얼굴 까만 놈, 봉이가 아리랑헌터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동수와 비슷한 체격을 한 남자의 손에 붙잡힌 아리랑헌터는 무력한 어린 남자아이 같았다. 봉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가볍게 한 번 휘두르는 정도였지만 퍼억, 소리가 나며 아리랑헌터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봉이는 상대가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반대쪽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봉이는 겨우 두 대 맞은 걸로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진 아리랑헌터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아까 그러셨지요? 우리들이 임충식의 뼈를 해체해서 영원히 태워 버리려는 악당이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임충식의 뼈를 가진 자와 한패가 아닙니다. 우리들, 아니지, 저 뒤쪽에 있는 밤일꾼 친구들이 김태민이 의뢰한 일을 했던 것뿐입니다. 저 사람들은 일을 의뢰한 김태민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거짓말…….”
의자 위에서 축 늘어져 있던 아리랑헌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희들이 김태민을 모른다고?”
“네. 모릅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란 거야?”
“당신이 믿건 말건 우리와는 상관없습니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니까요. 그럼 그쪽 질문에 내가 대답했으니 이제 내 질문에 그쪽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당신들은 왜 10대 애들 코 묻은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우리는 돈이 필요하고, 애들은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니까.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은 없는 시장이야. 그래서 최근에 동종 업체가 몇 군데 생긴 모양인데, 우리들의 일 처리 방식은 절대로 따라 할 수가 없지.”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아리랑헌터의 입에서 순순히 튀어나왔다. 대답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웃겼다.
그래 봤자 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나약한 애들 돈을 긁어내는 질 나쁜 장사꾼 주제에. 내가 보기엔 양아치 짓 하고 다니는 일진 새끼들이나 애들 상대로 장사하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새끼들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다.
“두 번째 질문을 하죠. 무학 도사는 임충식의 뼈로 뭘 하려는 겁니까? 도사 연합 대표의 말처럼 임충식을 부활시키려고요? 세계 정복을 위해서? 서울을 초토화하기 위해서?”
아리랑헌터가 코웃음을 치고는 입 안에 고인 핏물을 퉤, 뱉었다.
“미쳤어? 웬 세계 정복? 그 정신 나간 영감의 말을 진짜로 믿는 건 아니겠지? 세계 정복을 해서, 서울을 초토화해서 뭐 하게? 나뿐만 아니라 다들 딸린 식구들이 있어. 우리도 이 나라 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여기가 우리의 생활권이야. 게다가 우리가 무슨 수로 세계를 정복해?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순식간에 나라 하나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세상인데.”
“그럼 뭡니까? 무학 도사가 임충식의 뼈를 모으는 이유가.”
“그분의 죽은 따님을 다시 살려 내기 위해서지.”
낮게 읊조리는 아리랑헌터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그의 대답에 이렇게 놀란 것은 나뿐이었다. 그렇기에 난 동요하는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뒤로 슬쩍 빠졌다.
무학 도사의 딸이라면 그 여자 아닌가. 갈색 가면의 누나라는 그 여자.
임충식의 뼈를 이용해 갈색 가면의 누나를 다시 살려 낸다고?
석진경이 그 여자를 죽였을 때 귀면들을 만들어 낸 무학 도사가 그녀를 살려 냈던 게 아닌 건가?
어차피 추측에 불과했다. 그 당시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은 무학 도사와 갈색 가면뿐이다.
“그리고 죽은 내 아들. 나를 포함한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이트의 운영진들도 전부 가족이나 형제를 잃은 사람들이야. 무학 도사님은 임충식의 뼈를 다 모으면 기이한 힘이 생겨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하셨어.”
약 몇 초간 침묵하던 아리랑헌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 중 가장 아리랑헌터가 하는 얘기에 열중하고 있던 박천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도 자식 키우는 부모라 아리랑헌터의 참담한 심경을 공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신들은 그 말을 믿는 겁니까?”
“당신도 자식을 잃어 봐.”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아리랑헌터의 그 한 마디에 백단영도 우리도 입을 닫았다. 아리랑헌터는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 우리한테 돈이나 뜯어 가려는 사이비 도사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무학 도사님의 꼭두각시들을 봤지.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시체가 살아서 움직이는데? 아, 저분이라면 정말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실 수 있겠구나 싶지 않겠냐고. 그 얘기를 아내한테 해 줬어. 그랬더니 아들이 죽고 난 후부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누워만 있던 아내가 금방 멀쩡해지는 거야. 우울증에 걸렸던 딸도 옛날처럼 쾌활해졌고. 희망이 생긴 거지.”
부어터진 아리랑헌터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무학 도사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어. 그리고 돈도 벌게 해 주시지.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쪽 사람들을 우리는 악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저쪽 인간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죽은 가족들을 살려 낼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도 피해자이지만 저 사람들도 피해자인 셈이다.
“너희들이 진짜 김태민과 한통속이 아니라면 그냥 우릴 내버려 둬. 부탁이야.”
그는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작고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럴 순 없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백단영의 목소리도 덩달아 잦아들었다.
“무학 도사님과 우리를 다 죽일 건가? 그럼 우리도 너희들을 해칠 수밖에 없어.”
“저희도 의미 없는 살생은 하기 싫습니다.”
“아까 너희들이 하는 얘기 다 들었어. 너희들은 우리 때문에 밤일을 하지 못하게 돼서 우리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거잖아. 우리가 원하는 건 임충식의 뼈야. 임충식의 뼈만 온전한 형태로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너희들 앞에 나타날 일도 없어. 너희들이 정말 김태민과 한패가 아니라면 우리가 너희들에게 김태민이 가지고 있는 임충식의 뼈를 찾아 달라고 의뢰하면 안 되나? 도사 연합한테 의뢰받은 일은 거절하고 말이야. 도사 연합이 주기로 한 돈은 우리가 줄 테니까. 그럼 서로 험한 꼴 안 보고 끝날 일 아닌가.”
박천수가 손을 짜악 마주쳐 소리를 냈다.
“괜찮은 방법 같지 않아?”
그리며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그러게요.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도사 연합이 주기로 한 것과 똑같은 액수의 돈을 받을 수 있다면야, 뭐…….”
동수와 기식이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박천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대답 없는 나와 노금영을 쳐다보았다.
“형님은 저 인간이 하는 말을 믿어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생각에 잠겨 있던 노금영이 입을 열었다.
“도사 연합 대표 할배가 하는 말이나 저 새끼가 하는 말이나, 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데요. 빽가야, 넌 저 자식 말을 믿냐?”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사실 같지만 문제는 무학 도사지.”
즉각 나온 백단영의 대답에 노금영의 입에 비웃음 같은 미소가 번졌다.
“이봐요, 아저씨. 당신들은 정말 무학 도사가 죽은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들의 죽은 가족들을 살려 내 주기 위해서 임충식의 뼈를 모은다고 생각해요?”
힘없이 늘어져서 숨만 내쉬던 아리랑헌터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무슨 소리냐, 그게?”
“아저씨, 당신 아들이 죽은 지 몇 년 됐어요?”
“3년 전에 죽었어.”
“화장했겠지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 도사는 혼 덮어씌우기라는 술법을 이용해서 귀면들을 살려 낸 겁니다. 혼만 임충식의 부하들이고, 몸은 다른 이의 시체라 이 말입니다. 몸뚱이가 없는데 혼을 어디로 끌어오겠어요? 결국 아드님의 혼을 다른 사람의 시체로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리랑헌터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무학 도사는 그에게 아무 얘기도 해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원한에 가득 차서 구천을 떠도는 혼령이어야 끌어올 수 있답니다. 그렇게 혼을 끌어다 와 봤자 살아난 시체는 원한으로 똘똘 뭉친 괴물이 되는 거고요. 꼭두각시들을 봐서 알잖습니까. 그놈들이 어디 사람처럼 보입디까?”
“하지만 놈들은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있고, 움직이기도 하던데…….”
“아저씨, 놈들과 한패인 당신이 어째 우리보다 더 몰라요? 우린 놈들과 직접 싸워 봐서 알아요. 그놈들 탈을 벗겨 보기도 했고요. 놈들은 인간이 아닙디다. 생각도 못 하고 말도 못 하고 어떤 놈들은 앞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썩어서 고름이 줄줄 흐르는 시체였어요. 아드님이 임충식의 부하들처럼 원한에 가득 찬 채로 죽진 않았을 테고. 만에 하나 혼을 끌어올 수 있다고 해도 살아생전의 아드님 모습은 절대로 아닐 거라는 얘기죠.”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을 살려 낼 수 있다면…….”
헛된 희망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남자가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의 어리석음을 욕할 수도 없었다. 내가 저 사람의 처지였더라도 저런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그럼 아드님을 두 번이나 잃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실지 몰라요.”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팔짱을 끼고서 상황을 지켜보던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리랑헌터의 치뜬 두 눈이, 다른 이들의 시선들이 일제히 화살처럼 내 몸뚱이 여기저기에 박혔다.
“그냥 아드님을 편히 쉬게 놔두세요.”
아리랑헌터의 얼굴이 경련하듯이 일그러졌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쏟아졌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수도 삐죽이 내민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눈가를 훔쳤다. 코까지 훌쩍거리면서.
나는 지하실에 가득 찬 무거운 분위기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담배 한 개비가 절실한 밤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 건강에는 좋지만 이럴 때는 매번 아쉽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삭이는 데엔 담배만 한 게 없는데.
무학 도사가 정말 아리랑헌터나 다른 이들의 가족들을 살려 내 주겠다며 그들을 이용한 것이라면, 놈은 정말 나쁜 새끼다.
7년 전 강원도에서 만났던 아이.
돌봐 주는 어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버려진 들개처럼 꾀죄죄했다.
아이는 서울에서 온 나를 오리 새끼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자기한테 친절하게 대해 줬으니까. 먹을 것도 주고,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웃어 줬으니까.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애는 주위의 어른이 베푸는 조그만 친절에 아주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나도 그랬다. 사랑이 너무나도 고파서, 사람들의 관심이, 어른들의 넉넉하고 따뜻한 품이 너무도 그리워서, 내가 불쌍하다며 먹을 것을 챙겨 주는 옆집 아저씨를 쫓아다녔다.
그러다가 아저씨가 도시에 사는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마을을 떠났을 때, 난 담벼락 뒤에 숨어 아저씨가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는 걸 보면서 소리 죽여 울었었다.
그 애도 그랬을까. 친절한 서울 형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며 울었을까.
어린 손자를 돌봐 주지 않는 할아버지, 정신 이상한 누나. 자기편이라곤 하나 없는 차갑고 삭막한 그곳에서 혼자서. 그 작은 몸을 웅크리고서 매일 밤 울었을까.
그렇게 좋아했고, 그렇게 기다렸던 친절한 서울 형이 자기 누나를 죽였다니.
내가 갈색 가면이었더라도 날 죽이고 싶겠다. 산 채로 껍질을 벗겨 버리고 싶겠다.
식당에 갔을 때 가지고 나온 사탕을 꺼내 입 안에 던져 넣었다. 사탕을 이로 까드득까드득 씹으면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최근 통화 목록에 있는 나민이의 번호를 눌렀다. 최근, 통화 목록에는 나민이의 이름만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지금까지는 핸드폰 요금에 서비스되는 무료 음성 통화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다음 달로 넘어가기 일쑤였는데, 이번 달은 무료 음성 통화 시간을 꽉 채우겠다.
“나민아. 잤어?”
[아뇨. 잠깐 누워 있었어요.]
목이 잠겨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저녁은 먹었고?”
[네. 김치 볶음밥 해서 먹었어요.]
“그래. 잘했다. 별일 없지?”
[별일 있었어요. 고양이 한 마리가 제 방 창문으로 들어왔어요. 근처에서 키우는 고양이인지 창문으로 들어와서 막 애교를 부리다가 제 무릎 위에서 잠들었어요. 진짜 귀여워요.]
“신기한 일도 다 있네.”
무릎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쓰다듬는 나민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세요?]
“사람들이랑 술 마시다가 잠깐 찬 바람 쐬러 나왔어.”
[재밌어요?]
“아니, 별로. 나민이 너랑 있는 게 더 재밌어.”
지금까지 사귀던 애들한테 아무렇지 않게 하던 말이었다. 그때는 주로 상대방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했던 소리였지만, 이번엔 진심이었다. 당장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곳을 떠나 나민이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살거리는 아이가 있는 곳으로.
나민이가 낮은 목소리로 선생님, 하고 불렀다. “응, 왜?” 하고 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민이가 바로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이.
[좋아해요.]
웃음기 띤 목소리로 몇 번이나 했던 고백의 말을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목이 꽉 메어 왔다.
“나민아…….”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나민이도 내가 했던 것처럼 보들보들, 포근한 목소리로 “네, 선생님” 한다.
“죽지 마라. 그리고 변하지 마라.”
나는 답답해진 가슴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죽지 말고, 변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쭉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줘라.”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선생님은 절 못 믿으세요?]
“아니. 믿어.”
널 믿고 싶다, 진짜로.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널 믿는다, 나민아.”
나는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하듯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르게 숨만 내쉬며 한참 동안 침묵했다.
누군가 건물 지하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잘 자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보통 내가 잘 자라는 말을 하면 선생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같은 소리가 날아왔지만 이번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전화가 끊겼다.
걸어 올라오면서 꺼내 물었는지 노금영이 담배 연기를 풀풀 풍기며 나타났다.
“아리랑헌터는요?”
“좀 더 정보를 캐낸 뒤에 집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래도 돼요?”
“그렇다고 사람을 지하실에 가둬 놓을 순 없잖냐. 빽가가 아저씨를 설득하고 있어.”
“폭력을 동반한 협박이 아니고요?”
“빽가도 폭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그렇게 하려고 하지. 놈도 뭐 좋다고 저런 불쌍한 아저씨를 두들겨 패고 싶겠냐? 남 괴로워하는 거 보고 즐기는 변태도 아니고.”
노금영의 입에서 흰 담배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얻어 입술 사이에 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입 안에서만 맴돌다가 콧구멍과 입으로 빠져나갔지만, 니코틴 맛을 혀끝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상야릇했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근데 난 어째 이번 일이 영 내키지가 않는다. 느낌이 안 좋아. 도사 연합 대표란 영감이나, 무학 도사란 사기꾼이나, 도사 나부랭이들이랑은 얽히는 것 자체가 싫어. 꺼림칙해.”
노금영의 말에 난 담배 연기만 입으로 후욱 내뿜었다. 갑자기 콧잔등 위로 차가운 뭔가가 떨어져 고개를 쳐들었더니 하늘에서 눈송이들이 팔랑대며 내려오고 있었다. 따뜻한 알탕에 소주 한 잔이 그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