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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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버거 세트 세 개, 아니, 여섯 개 주세요.”

계산대의 여자애가 버거 세트 여섯 개 가격을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현금으로 계산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신용 카드를 꺼냈다. 일을 하고 있는 이상 다음 달에도 월급은 나올 테니까, 다음 달 카드 결제 대금도 어떻게든 메꿀 수 있을 터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참했다. 다음 달 월급날까지는 아직 보름이나 남았는데 있는 돈이라곤 달랑 10만 원이다. 누가 그랬지 않나. 월급은 통장을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주문한 버거 세트가 나왔다. 나는 양손에 버거와 감자튀김, 콜라가 가득 든 접시 하나씩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난 새우 버거 싫은데.”

일부러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그릇을 내려놓자마자 한 놈이 하는 소리가 그거였다. 개기름 번드르르한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선생님.”

그나마 덕진이가 모여 앉은 세 놈 중 유일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학원 휴게실에서 내게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주었던 녀석이다.

아까부터 세 놈이 노트북으로 열심히 보던 것은 애니메이션이었다. 내가 왔는데도 세 놈은 화면 속 애니메이션 영상을 보며 자기들끼리 키들거리고 있었다.

“얘들아, 만화 영화는 그만 보고 내가 부탁했던 것부터 좀 해 줘라. 내가 시간이 많지가 않아.”

“이미 게시판에 글은 남겨 놨어요.”

아까 새우 버거가 싫다며 인상 팍 쓰던 멍게 얼굴 놈이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쪼옥 빨며 말했다.

동수의 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나는 노금영의 말대로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를 쑤시기로 했다. 일단 학원 아이에게서 알아낸 사이트 주소로 들어가 봤더니 게시판의 모든 글이 회원전용이었다. 하는 수 없이 회원가입을 하려고 봤더니. 10대가 아니면 가입조차 할 수가 없는 시스템이었다.

10대인 척하고 가입할 수도 있는 방식이었다면, 피 같은 돈을 써 가며 애들을 이런 데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다.

본명은 물론이요, 학교 이름·반·출석 번호·얼굴을 가린 학교 교복을 입은 인증 사진·스캔한 이름표·학교 전화번호·집 전화번호까지. 일단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써넣어 가입했다 해도, 운영자가 일일이 학교와 집에 전화해서 회원으로 가입한 학생이 그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정회원으로 승격된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때 학원 휴게실에서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던 아이, 덕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덕진이는 흔쾌히 날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이미 덕진이와 친구 놈들은 그 사이트의 정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 뭐라고 썼는데?”

“우리 학교 일진 클럽 놈들 전부를 다 손봐 줄 수 있냐고 썼어요.”

“일진 클럽 놈들이 몇 명인데?”

“1학년부터 3학년 놈들까지 다 합해서 스무 명 정도요?”

“한꺼번에 스무 명은 좀 많지 않아?”

“그쪽에서 한 놈을 처리해 주면서 받는 돈이 40만 원이거든요. 한꺼번에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요?”

“한 놈에 40만 원이나 받는다고? 비싸잖아.”

“그래도 사이트 가 보면 의뢰 글이 수두룩해요. 그런 놈들을 처리해 주는 데 40만 원이면 싼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그런 새끼들이 우릴 얼마나 악랄하게 괴롭히는지 알아요? 돈 뺏고, 물건 뺏고,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에요. 전 이틀 동안 창고에 갇혀 본 적도 있었어요.”

“난 물고문도 당해 봤는데.”

“난 1학년 때 뭣도 모르고 돈 뺏으려는 3학년 일진 형한테 덤비다가 담배 빵까지 당했다?”

한 녀석이 일진 놈들에게 당한 얘기를 꺼내자 나머지 두 녀석이 동시에 입을 모아 짹짹댔다. 이게 어디 10대 애들이 할 소리인가. 이틀 동안 창고에 갇혀 있었다니. 물고문이라니.

그 학교 애들이 얼마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어차피 이번 일이 아니라도 제가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 일진 클럽 놈들을 신고할 생각이었어요.”

“두당 40만 원에 스무 명이면 800이다. 덕진이, 네가 그 많은 돈이 어디 있어?”

“아버지가 그 돈은 마련해 주신댔어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덕진이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남은 햄버거를 모조리 입 안에 쑤셔 넣어 씹어 삼켰다. 탄산음료를 마신 뒤에야 녀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틀 동안 창고에 갇혀 있다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기절했다 깨어 보니 병원에 있더라고요. 엄마는 막 울고 있고, 아버지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내 손을 꼬옥 붙잡아 주셨었어요. 그 이후에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가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봤지만, 절 창고에 가둔 일진 클럽 멤버 몇 놈만 정학 처분을 당했을 뿐이에요.

일진 클럽 대빵이란 3학년 형들이 찾아와서 절 옥상으로 끌고 가서는 죽여 버린다고 협박하더라고요? 내가 겨우 그깟 일로 교장한테 일러바쳐서 자기 클럽 애들이 그렇게 됐다면서.

그때 알았어요. 아, 저 새끼들은 나랑 같은 인간이 아니구나. 그리고 결심했어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에 놈들을 신고하자고요. 아버지께 사실을 말씀드리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10대 아이의 말에 나는 참담한 심경을 느껴야 했다.

장사를 하려면 일단 수요가 있어야 한다.

일진 양아치 때려잡기 사업의 주 고객은 10대 아이들이다. 이 시장에선 이미 수요가 넘쳐나고 있다.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자는 하나뿐이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이트의 1급 신고란에는 매일같이 수십 건의 의뢰 요청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정말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를 운영하는 사냥꾼인지 나발인지 하는 놈들이 10대들일까?

절대로 아니라는 데 내 전 재산을 건다. 돈 냄새를 풀풀 풍기는 장소에 떠억하니 사업장을 차리고서 애들 코 묻은 돈을 갈취하는 놈들이 애들이라고? 그 사이트를 운영하는 놈들은 일개 양아치가 아니다. 한 놈 처리해 주는 데 40만 원이란다. 한 놈 처리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리겠는가. 무장한 귀면 놈들이 목표물이 된 양아치 애들을 적당히 협박하고, 적당히 두들겨 주는 건 몇십 분이면 끝난다.

어차피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귀면 놈들이야 인간이 아니라 지치지도 않을 테니 하루에 적게는 다섯 건, 많게는 열 건씩의 일을 처리한다 치자. 그럼 하루에 2백에서 4백의 수익을 올리는 대박 사업이란 얘기다.

지난밤, 우연히 마주쳤던 갈색 가면이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갈색 가면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했었다. 아마도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인터넷상에만 존재하는 회사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놈일 터다.

“아리랑헌터가 글을 남겼어요!”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하고 있던 멍게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아리랑헌터? 그건 또 누구야?”

“1급 신고 게시판을 관리하는 운영진 중 한 명이에요.”

나도 노트북 앞에 모여 앉은 녀석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핑크색, 보라색 머리를 한 미소녀 만화 캐릭터가 배경에 깔린 게시판 목록 가장 위에 비밀글로 ‘아리짱 님, 게시판에 남겨 주신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라는 제목의 글 하나가 떠 있었다. 멍게가 게시글 목록을 클릭했다.

<아리짱 님, 과거에도 XX 고등학교에 있는 일진 클럽의 대장인 유X상이란 자의 처리 건이 여러 번 접수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처리비를 완납해 주시지 않으면 일을 진행할 수가 없다고 공지에 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유X상이란 자의 처리 건을 접수해 주신 분들 중 아무도 처리비를 입금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리짱 님은 유X상이란 자를 포함한 일진 클럽 멤버 스무 명 모두의 처리를 의뢰해 주셨는데요.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자들을 처리해 달라는 의뢰는 처음이라 저희도 당황하고 있습니다. 일단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를 남겨 주시면 저희 쪽 상담원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글 내용 속의 ‘유X상이란 자’라는 표현과 ‘처리’라는 표현에 소름이 끼쳤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은 1급 신고란에 접수된 애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멍게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해 영문 모를 작업을 했다.

“주소가 대충 나왔어요. 선릉역 쪽에 있는 짱구 PC방이라고 뜨네요.”

“어…… 어어? 잠깐. 선릉역 쪽 짱구 PC방? 이게 누구 주소인데?”

“아리랑헌터요.”

난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러니까 선릉역 짱구 PC방으로 가시면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이트 운영진 중 한 명인 아리랑헌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멍게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손을 마주쳐 ‘짝!’ 소리가 나게 쳤다.

“우와, 대단해. 너 진짜 머리 좋구나! 끝내준다.”

“별거 아니에요. 제 나이 또래 애들이라면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해요.”

과장된 어조로 칭찬을 해 주자 멍게가 낯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선생님, 그 사이트 운영진을 만나 봐서 뭐 하시게요?”

덕진이가 감자튀김을 씹으며 물었다.

“아는 형한테 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 그 사이트 운영진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랑 어울려 다니다가 가출했다고 해서. 그 형이 나한테 애타게 부탁하더라고. 넌 고등학생 애들하고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니까 걔들한테 한번 물어봐 달라는 거야.”

덕진이에게 이 일을 부탁하기 전부터 생각해 둔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애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날 쳐다봤다. 도저히 못 믿겠다는 눈치다.

“선생님, 경찰에 신고하시려는 건 아니죠?”

“응? 미쳤어? 경찰에 신고하게.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어.”

이건 진심이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쨌든 고맙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음에 더 근사한 데서 맛있는 것을 사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패스트푸드점을 나섰다. 녀석들이 또 애니메이션을 보는 모양인지 등 뒤에서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김치 부침개가 먹고 싶었다. 적당히 입은 김치에 오징어랑 채소 송송 썰어 넣고 노릇노릇 구운 김치 부침개. 똥수가 부침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굽는데. 집에 김치가 남아 있던가. 천둥이 치는 배를 움켜잡고 주방에 있는 낡은 냉장고를 떠올렸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 왔다. 원장의 호출인가! 깜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 들었더니 원장이 아니라 똥수 놈이다.

“너, 진짜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지금 딱 네가 만들어 준 김치 부침개 생각하고 있었는…….”

[뽀뽀해 줘요!]

동수 놈이 대뜸 소리쳤다. 이놈은 갑자기 왜 또 이 지랄인가. 약 먹을 때가 다 된 건가.

“또 무슨 개소리야?”

[그때 뽀뽀해 준다고 했잖아요!]

안 그래도 목청 큰 놈이 꽥꽥 소리를 지르니까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그때 너 기절하지 않았었냐?”

[기절했어도 들을 건 다 들었어요. 뽀뽀해 줘요.]

네놈은 무슨 초능력자냐? 기절해서도 들을 건 다 듣게? 똥수 놈이 핸드폰에 대고 “뽀뽀! 뽀뽀! 뽀뽀오오오오!” 연이어 꽥꽥거렸다.

“개 짖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 새끼야!”

[진짜 개 짖는 소리가 어떤 건지 들려줘요? 컹컹컹! 컹컹컹컹컹!]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옆구리에 칼침 한 방 맞더니 안 그래도 덜떨어진 애가 아예 바보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놈이 쉬지도 않고 컹컹 짖어 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동수야. 아니, 휘림아. 왜 이러냐? 아직 많이 아프냐? 이러지 마라. 나, 네가 좀 무서워지려고 한다.”

갑자기 녀석의 개 짖는 소리가 뚝 멎었다. 개 짖는 소리를 내는 대신 동수 놈은 다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거라고요.]

“뭐? 잘 안 들린다. 크게 말해.”

[더럽게 쪽팔려서 이런 미친 짓 하는 거라고요.]

마지막은 씨발, 욕으로 마무리했다.

난 픽 웃었다. 나 때문에 그런 부상을 당한 건데 날 원망하지는 않는 거냐. 나였다면 원인 제공을 한 사람에게 욕도 하고 원망도 했을 텐데.

“너 몸은 좀 괜찮냐?”

[이 정도 부상은 부상도 아니죠. 내가 어떤 놈인데. 괜찮다 못해 펄펄 뛰어다녀요. 난 괜찮은데 울 어무이가 요즘 계속 진흙 맛 나는 약물을 먹여요. 형한테도 좀 갖다 줄까요?]

“네놈이 진흙 맛이 어떤 맛인지 어떻게 아냐. 먹어 봤냐?”

[형은 안 먹어 봤어요? 사내놈이라면 어릴 때 다 한 번씩 진흙도 먹어 보고, 개미랑 지렁이도 먹어 보고 그러지 않아요? 난 엄청 먹었는데.]

“야, 미친놈아. 그딴 걸 왜 먹어?”

[생각보다 고소하고 맛있어요. 형도 한번 먹어 봐요. 아, 형, 형! 오늘 저녁에 형 집에 갈게요. 우리 집에 먹을 게 막 넘쳐나요. 세상에, TV 홈쇼핑에 요즘 유행하는 메이커 운동화가 나와서 아무 생각 없이 저거 갖고 싶다고 했더니 울 아부지가 주문해 준 거 있죠? 엄마는 내가 먹고 싶다는 거 다 해 주고. 하여튼 요즘 울 엄마 아빠 서비스가 장난 아니에요. 한번 아플 만하더라니까요?]

철딱서니 없는 미미네 치킨집 아들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안 돼. 오지 마. 상처 다 아물 때까진 우리 집 출입 금지다.”

[이젠 괜찮다니까 그러네요.]

“실밥 풀고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이제 진짜 괜찮다고 말하면 그때 와.”

[진짜 괜찮아요. 나 정말 멀쩡한데.]

심통 난 애처럼 꽁알대던 놈이 갑자기 “잠깐만요, 형. 누가 왔어요!”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냈는데도 고막이 아파 난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쑤셔야 했다.

곧이어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동수 놈이 반창고가 붙은 자신의 옆구리를 찍어 보낸 사진이었다. ‘봐 봐요. 나 진짜 괜찮아요’ 하는 문자까지 함께 보냈다.

똥수야. 넌 내가 그렇게 좋냐?

난 핸드폰 화면에 가득 찬 놈의 옆구리 사진을 보며 소리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날처럼 날 위해서 그딴 짓을 하다간 또 다칠 텐데. 이번엔 옆구리를 살짝 스치는 정도가 아니라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텐데.

머리는 좀 나빠도 덩치 좋고, 남자답게 생긴 데다 성격도 그 정도면 괜찮고. 너 좋다는 애들 꽤 많을 텐데. 나 같은 놈이 뭐 그리 좋다고 이러는 거냐. 너처럼 젊디젊은 애가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만큼 가치가 있는 인간이야? 내가?

나는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대로 피시시식, 소리를 내 웃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선생님, 즐거운 일 있으신가 봐요?”

한 발자국 뒤 정도에서 나민이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나민이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즐거운 일은 무슨. 그냥 좀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었다. 그래,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박하신이 1주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어요.”

나와 동수, 기식이가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흉내를 내 빨간 패딩 패거리의 뒤를 쫓았던 것이 1주일 전의 일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놈은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사람이 녀석을 처리해 준 거겠죠?”

나민이도 너무도 당연하게 그 사이트 운영진처럼 ‘처리’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응? 고맙다니, 뭘?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제가 가장 힘들 때 절 도와주셨잖아요. 오늘 밤에 시간 괜찮으세요?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에이, 됐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아뇨. 아버지한테 이번 달 용돈 받았거든요. 용돈 받으면 하신이 패거리가 따박따박 빼앗아 갔는데, 이번 달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저 지금 부자예요.”

나민이가 환하게 웃었다. 얼굴 한쪽의 보조개가 옴폭 패었다. 보는 사람까지 다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였다.

처음으로 자신이 벌인 짓이 바보 같은 짓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민이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일을 벌였던 것이니,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는 성공이 아닌가.

며칠 내내 흐렸던 날씨가 순식간에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환하게 웃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애를 보면서 난 새삼 깨달았다.

난 이 녀석을 좋아하는구나.

지금까지는 희미한 연기처럼 내 주위를 감싸던 감정의 공기가 확실한 형태가 되어 내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처음, 클럽에서 나민이를 본 순간부터 나는 이 애한테 홀딱 반해 있던 거였다.

“선생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오늘은 제가 뭐든지 사 드릴게요.”

귓가에 들려오는 나민이의 쾌활한 목소리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난 아무거나 괜찮아. 김밥도 괜찮고.”

“삼겹살 먹으러 가요. 선생님 고기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삼겹살, 그거 먹으러 가자.”

“그럼 선생님 수업 다 끝나면 저한테 전화하세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을게요.”

응. 그래. 알았어.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나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나민이를 쳐다보았다. 녀석의 이마 위로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살랑이는 게 보였다. 웃음 띤 얼굴은 하얗고 깨끗했다.

녀석은 나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싱싱하고 풋풋한 향기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걷던 나민이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씨익 웃었다. 나이 스물여덟에 첫사랑에 빠진 10대처럼 가슴이 미치도록 두근거렸다.

“선생님, 저 차 봐 봐요. 장난감 같다.”

나민이가 내 팔을 툭툭 쳤다. 녀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나민이의 말대로 장난감 같은 파란색 차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차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사람이 내렸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차의 모양처럼 타고 있던 사람도 젊고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남자는 작은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었다.

그럴 수밖에. 파란색 미니 쿠페 앞에 비스듬히 서서 날 노려보는 건 윤영이었으니까.

*

*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윤영이는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거렸다.

“그동안 잘 지냈어? 어째 더 마른 것 같네.”

무거운 침묵에 숨이 막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윤영이가 나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무섭다, 야.”

“형은 지금 웃음이 나와요?”

분위기 좀 환기해 보려고 억지로 웃어 본 것이었는데. 윤영이는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보았다.

“형이 먼저 전화해 주길 계속 기다렸어요. 문자라도 보내서 미안하다고 하겠지. 미안하다는 문자가 오면 못 이기는 척 화해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매일매일,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전화는커녕 문자 하나 보내지 않았어요, 형은. 그냥 그런 식으로 나랑 끝낼 생각이었어요? 형한테 나는 이제 단물 빠진 껌 같은 놈이에요?”

“아냐, 그런 게. 단물 빠진 껌이라니…….”

“그럼 왜 그런 거예요? 나랑 계속 관계를 이어 나갈 생각이었으면 형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줬어야 하는 거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사귀는 사람한테 연락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윤영이의 귀에는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녀석의 말이 맞다. 그깟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귀찮았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그래. 난 나쁜 놈이다. 빌어먹을 새끼다. 무슨 욕을 들어도 싼 새끼다.

“미안하다.”

난 솔직히 내 잘못을 시인했다. 그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으니까.

“내가 가장 화가 나는 게 뭔지 알아요? 형이 나한테 보여 주었던 모든 모습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거예요. 사실 나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어요. 하지만 형을 좋아하니까 에이, 설마, 하면서 믿었던 거였어요. 근데 전부 가짜였네요. 형이 입고 다니던 브랜드 옷들, 구두, 시계…… 형이 걸치고 다니던 것들. 아니다, 형 자체가 짝퉁이었어요. 정말로.”

“미안하다. 정말.”

“가짜 명품 옷을 입고 가짜 부자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거, 쪽팔리지도 않아요? 기분 좋았어요? 내가 형의 가짜 모습에 홀랑 속아 넘어가서 형한테 달라붙는 모습을 지켜보는 거?”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굴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발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쪽이 나을 터였다.

“지랄 같아, 진짜. 한때나마 이런 구질구질한 인간을 좋아했다니. 나도 미쳤지.”

윤영이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커피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형은 평생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요.”

진심 어린 저주였다.

“명진 형,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돈도 많고, 또 널 진심으로 좋아해.”

나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탓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가 막힌지 윤영이가 코웃음을 쳤다.

“형은 대체 왜 그렇게 사는데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전 도무지 형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 넌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넌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있어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난 아냐. 내 모습을 과장되게 꾸미지 않으면 아무도 날 봐 주지 않아. 내 진짜 모습은 네 말대로 구질구질하고 초라하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다면서 왜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그렇게 인색해요?”

“겁이 나.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매달리면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나 버릴 테니까.”

윤영이는 여전히 날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애초에 녀석과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윤영이의 핸드폰이었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은 ‘곰팅♥’이다. 난 까만 하트 표시가 붙은 그 이름을 보고 대번에 명진 형에게 걸려 온 전화란 것을 알아챘다.

“공부하고 나와서 친구랑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떨어요. 오늘 저녁? 그래요. 저녁 같이 먹어요. 알았어요. 이따 봐요.”

명진 형과 통화하는 윤영이의 웃는 얼굴에선 설탕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웃는 녀석은 예뻤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양 볼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인 얼굴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전화를 끊은 윤영이는 다시 아까의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앞으로 잘 지내라, 행복해라 따위의 상투적인 인사도 없이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테이블 한구석에 놓인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거의 반쯤 얼이 빠졌다. 그 상태로 학원 수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겨우 그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겨 퇴근했다.

학원 앞에 나민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늘 밤, 수업이 끝나고 함께 식사하기로 했던 게 그때에서야 기억이 났다.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지 왜 이러고 있어? 감기 걸릴라.”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민이의 얼굴은 파랗게 얼어 있었다. 난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녀석의 하얀 목에 감아 주었다. 커다란 머플러에 폭 감싸여 눈만 내놓고 있는 얼굴이 귀엽다.

“아까 그 사람 누구예요? 선생님 친구분이세요?”

“아니, 전에 사귀던 녀석.”

난 사실대로 말했다.

“사귀던 사람이라면 지금은 헤어진 사이죠? 그런데 왜 선생님한테 찾아온 거예요?”

“완벽하게 끝을 내기 위해서겠지. 지금까지는 사귀는 것도, 헤어진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였거든.”

나민이는 고개를 수그려 머플러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득 이마 위로 흘러내린 녀석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참았다. 지금의 상태로는 한번 녀석의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만지면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나민아, 먹을 거 사 가지고 그냥 우리 집에 가서 먹지 않을래? 날씨도 추운데.”

“그럼 우리 집에 가요. 집에 고기랑 먹을 거 잔뜩 있어요.”

“그래? 그럼 너희 집으로 가자.”

난 애써 쾌활하게 말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 조용히 걷는 녀석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녀석이 흘끗 눈을 돌려 날 쳐다보았지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띤 채로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나민이는 얼른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손으로 귓바퀴를 만지작대면서 녀석이 날 불렀다. 여전히 녀석을 쳐다본 채로 “응?” 하고 대답해 줬다. 그러자 녀석은 이번엔 자기 볼을 긁었다.

“선생님을 만나서 정말 행복해요.”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선생님이랑 이렇게 얘기하면서 걷는 거, 같이 집에 가서 고기 구워 먹고 노는 거, 정말 좋아요. 제 곁에 선생님이 있어 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대신 나민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수줍게, 정말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면서 녀석이 날 흘끔 쳐다봤다.

“고맙습니다. 정말로요.”

평소에 잘하던 억지로 웃는 것조차 되질 않았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게 끓어올라 목구멍이 꽉 막혔다.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앙다문 입술이 약하게 떨렸다.

“나도……. 나도 고맙다.”

“고맙다니, 뭘요?”

이런 때에 내 곁에 있어 줘서. 날 만나서 행복하다고 말해 줘서. 날 하찮게 보지 않아 줘서. 이런 날 보면서 환하게 웃어 줘서.

“그냥 이것저것. 그리고 나도 너랑 이렇게 얘기하는 거, 너랑 밥 먹고 TV 보고 그러는 거 좋아.”

“이런 말 주고받는 거 되게 간질간질하고 부끄럽다……. 그렇죠?”

웃는 녀석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대신 난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나는 녀석의 딱딱한 어깨 근육을 음미하듯이 만지고는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나민이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더 이상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거나, 어깨를 만지거나 하지 않았다.

*

*

며칠 굶은 거지새끼처럼 고기를 구워서 흡입했고, 남은 밥까지 싹싹 다 긁어 먹었다. 과일이며, 아이스크림이며, 나민이가 갖다 주는 대로 다 먹어 치웠다.

생활비가 없어서 요즘 좀 부실하게 먹긴 했지만, 구멍 뚫린 것처럼 끊임없이 음식물이 들어가는 위장이 오늘따라 정말 대단해 보였다. 무엇보다 옆에서 “선생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이것도 드셔 보실래요?” 하면서 계속 먹을 것을 갖다 바치는 나민이가 문제였다.

녀석이 웃는 얼굴로 “이것도 드셔 보세요오.” 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선생님, 술 한잔하실래요?”

이제 더는 못 먹는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팡팡 치며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데 이번엔 녀석이 와인을 가져왔다.

“웬 와인이냐?”

“하신이 놈 패거리가 저희 집에서 죽치고 놀 때 가져다 놨던 거예요. 그놈이 자기 아버지 몰래 가지고 나온 양주도 몇 병 있어요.”

“새끼들. 어린놈들 주제에 와인?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원래 그 자식이 허세 빼면 시체인 놈이죠.”

나민이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와인 코르크 마개를 따 커다란 맥주 컵에 와인을 한가득 부었다. 그러고는 유리 컵 하나를 들어 올리고 “저도 한 잔 주세요” 한다.

“나민아, 너 술 약하지 않아?”

“와인이 술인가요, 뭐.”

하긴. 나는 픽 웃으며 녀석이 들고 있는 유리컵에 와인을 반만 따랐다.

“선생님, 우리 건배해요.”

애교 있게 웃는 녀석이 귀여워서 나도 맥주 컵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잔 두 개가 챙, 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녀석은 컵에 든 와인을 단숨에 홀랑 마셔 버렸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시면서 자기 스스로 와인 병을 들고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저기, 나민아. 너무 많이 마시진 마.”

“저 다른 술은 별로 안 좋아해도 와인은 좋아해요. 집에 있을 때 잠 안 오거나 하면 혼자서도 마시고 자는데요.”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나민이는 컵을 입에 대고 술을 홀짝였다.

“나민아, 너 좀 변한 것 같다?”

“선생님이 전에 이미지를 좀 바꿔 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름 이미지 변신을 해 보려고 노력 중인데…… 별로예요?”

“아니, 좋다. 밝아 보여서.”

녀석은 웃는 얼굴로 잔을 비웠다. 이번에도 또 자기 잔에 술을 따르려 하기에, 난 와인 병을 낚아채 녀석의 컵에 따라 주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와인 한 병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나민이는 아예 남아 있는 술을 전부 가지고 나왔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위스키, 맥주, 소주. 종류 한번 다양하기도 하다. 나민이의 집은 박하신 놈 패거리들의 술 창고였던 모양이다.

남은 레드 와인을 몽땅 다 마셔 버리고 내가 화이트 와인 마개를 땄을 때, 나민이는 덥다면서 위에 입고 있던 후드 재킷을 벗었다. 그러고는 안에 입은 티셔츠까지 훌렁 벗어 던졌다.

“그러고 있다간 감기 걸린다!”

나는 깜짝 놀라 녀석이 벗어 던졌던 후드 재킷을 녀석에게 던졌다.

“하지만 더워요.”

취해서 혀 풀린 소리를 내며 녀석은 내가 입으라고 던져 준 후드 재킷을 휙 내던졌다. 난 마개를 딴 화이트 와인 병만 만지작댔다. 눈 둘 곳이 없었다. 눈 둘 곳이 없으면 쳐다보지 않으면 되는데 시선을 돌리긴 싫은 게 또 이상한 일이다.

나민이의 상반신은 매끈매끈했다.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인데도 은근히 잔 근육이 붙어 있는 게 보기 좋았다.

넓은 어깨에, 일자로 뻗은 반듯한 쇄골, 긴 팔, 가슴, 취기가 올라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흰 피부. 그리고 추위 탓인지, 취기 탓인지 끝부분이 도드라져 있는 갈색 유두.

빨아 보고 싶다.

불현듯 밀려든 강렬한 욕구에 하반신에 열이 확 몰렸다.

저 갈색 젖꼭지를 손으로 만지고 비비고 싶다. 저 매끄러운 목을 빨고 싶고, 허리를 끌어안아서 내 아랫도리를 저 녀석의 다리 사이에 마구 비비고 싶어. 저 발그스름하게 물든 피부를 핥고, 등을 쓰다듬고, 탱탱한 엉덩이를 주물러 벌려서…….

“선생님도 옷 벗으세요. 덥지 않아요?”

“어? 어어…… 그, 그래. 좀 덥네.”

한번 시작된 음란한 상상은 여간해선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음란한 상상 속의 주인공이 눈앞에서 반라의 모습으로 알짱대고 있으니 더 그렇다.

난 어색하게 팔랑팔랑 손부채질을 하며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하하, 근데 벗으니까 또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술에 덜 취한 탓인지 부끄러웠다. 엄청나게.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민이도 내 벗은 가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서 더더욱. 녀석의 시선은 내 양쪽 가슴에 붙은 유두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기 것보다 좀 크고 돌기 부분이 도드라진 모양이 신기한 걸까. 지금까지 관계했던 놈들도 신기해했다.

윤영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녀석들은 젖꼭지 모양 따위보다 내 성기의 모양과 크기에 더 관심을 가졌지만.

위험하다, 위험해. 역시 내가 먼저 옷을 입고, 저 애한테도 옷을 입혀 줘야겠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난 짐승이 될 거다.

“저, 선생님.”

옷을 입으려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선생님 젖꼭지, 빨아 봐도 돼요?”

깜짝 놀라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아, 안 돼…… 너 그때도 그렇고 술버릇이 좀 이상해. 이러는 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마개를 딴 와인 병이 쓰러져 방바닥에 술이 콸콸콸 쏟아졌다.

난 쏟아진 와인 위로 쓰러졌다. 정확히는 녀석이 날 쓰러트린 거였지만. 벗은 등이며, 뒤통수, 하반신, 바닥에 닿은 부분은 죄 축축하게 젖었다.

내게 달려들어 쓰러트린 놈은 내 배 위에 올라타서 가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빨아 봐도 되냐는 말 그대로 녀석은 내 젖꼭지를 빨았다.

“나민아, 하지 마라. 하지 말라고 했…… 하앗!”

녀석의 머리칼을 움켜쥐어 달라붙은 얼굴을 떼어 내려 하자, 녀석이 이로 내 오른쪽 유두를 가볍게 씹었다. 여린 살점이 씹히는 찌릿한 고통에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꽈악 씹힌 부위를 살살 달래듯이 혀끝으로 핥는데, 그게 또 죽여주게 아팠다. 상처에 소금물을 뿌린 것 같은 고통이라 해야 하나. 쾌감이고 나발이고 아프기만 했다. 진짜로.

“그, 그만해. 진짜 장난이 아냐. 아파, 아프다고.”

난 필사적으로 바르작댔다. 아파 죽겠다고 바르작대든 말든, 나민이는 입술을 뾰족하게 세워 욱신대는 돌기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한쪽 손으론 반대쪽 가슴을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테크닉도 뭣도 없다. 녀석은 성욕이 끓어 넘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발정기를 맞은 어린 짐승 같았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술 때문인가? 저번처럼 술에 취해서 이러나? 이 녀석은 술만 마시면 사람을 이런 식으로 덮치나?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필사적으로 바르작대는 것처럼 녀석도 필사적으로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일전에 녀석이 술에 취해서 내 위로 올라탔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녀석은 의외로 힘이 세다.

하얗고 하늘하늘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녀석이 발휘하는 힘은 성인 남자의 것이다. 아니다. 평범한 성인 남자의 기준을 넘어섰다. 있는 힘껏 꿈틀대는데도 녀석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 보면.

“선생님, 선생님…….”

나민이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복부 아래에 녀석의 묵직한 살덩어리가 짓눌리는 게 느껴졌다. “하아아, 선생니임” 새된 소리로 속삭이며 녀석이 자기 아랫도리를 내 복부에 비볐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그저 끙끙대며 비벼 대기만 하는 움직임에 내 하반신에도 열이 몰렸다.

“나민아.”

이름을 부르자 내 가슴에 달라붙어 있던 녀석이 얼굴을 쳐들었다.

날 바라보는 녀석의 눈동자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반쯤 열린 입술은 잘 익은 과일처럼 발갛게 익어 있었다. 녀석의 두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번들거리는 성욕이었다.

“너 지금 술에 취한 거 아니지?”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멀쩡한 거지? 전에 내 방에 몰래 들어왔을 때도 그랬을 거고.”

대답 대신 나민이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분명히 얘기했었지? 나한테 이럴 필요 없다고. 이런 식으로 나한테 뭘 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게 아니에요.”

녀석의 입술 사이로 꽉 막힌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런 게 아니면. 왜 이러는 건데? 날 놀리는 거야? 장난으로 이러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요. 그냥…… 그냥 하고 싶었어요. 선생님하고 이런 거 하고 싶었어요. 줄곧 이러고 싶었어요.”

잠시 머뭇대며 방황하던 녀석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좋아해요, 선생님.”

몽롱해졌던 정신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젖은 머리칼, 젖은 등, 젖은 하반신에서 나는 독한 와인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 정말 너무너무 좋아져서요. 선생님만 보면 막 뽀뽀하고 싶고, 선생님 몸을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그랬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절 그냥 어린애로 보시는 것 같고…….”

녀석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날 좋아한단다. 이 녀석이, 날 좋아해서 줄곧 이런 짓을 하고 싶었단다.

지금의 네 감정은 너보다 강한 어른에 대한 단순한 동경이야, 사랑 같은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며 녀석을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어떤 본능이 내 안에 존재하던 반듯한 이성을 아무렇지 않게 덮어 버렸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민이가 좋았다. 녀석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기특했다. 내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좋아한다고 속삭이는 녀석의 고백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성욕으로 가득 찬 녀석의 두 눈이. 손을 놓으면 내가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나를 짓누르고 있는 녀석의 몸이. 딱딱하게 발기해 내 아랫배를 짓누르는 녀석의 성기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좋아해요, 선생님. 정말로요.”

녀석이 다시 한번 입을 열어 말했다.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절…….”

“좋아해.”

나민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난 선생이고, 넌 내 학생이고.”

“왜요? 제가 선생님 제자이긴 해도 전 다 컸어요. 미성년자가 아니에요. 법적인 성인인 걸요. 선생님도 절 좋아하시고 저도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뭐가 문제예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민아. 너한테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더럽게 느껴진다.”

“그런 게 어딨어요. 왜 절 좋아하는 게 죄스럽고 더러워요? 제가 더러워서 그래요?”

“그런 게 아냐. 네가 왜 더러워? 그 반대야. 네가 너무 순진하고 깨끗해서 그래.”

“제가 먼저 선생님을 건드렸잖아요. 제가 선생님을 건드리는 것도 안 되는 거예요?”

“나하고 엮여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 나민아.”

나는 애써 녀석의 가슴을 밀어냈다. 녀석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난 더 힘껏 녀석의 가슴팍을 밀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서. 더 이상 버텨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녀석은 순순히 떨어졌다. 내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것을 녀석은 빤히 바라보았다.

난 일부러 녀석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성큼성큼 욕실로 걸어갔다. 환기를 하기 위해 창문을 훤히 열어 놓은 탓에 욕실 안은 바깥처럼 추웠다.

창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난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반신이 한껏 부풀어 있어서 욕실까지 걸어오는 것조차 힘들었다. 바지 단추를 풀어 살짝 끌어 내리자 팬티 앞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하, 진짜 미치겠네.”

말 그대로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 흥분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손끝으로 살짝 젖은 앞부분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마치 성욕을 들끓어 오르게 하는 약이라도 흡입한 것 같았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가 찌릿찌릿 울렸다. 나는 아예 팬티 밖으로 발기한 성기를 끄집어내 손에 감싸 쥐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두 손으로 기둥을 꽈악 움켜쥐어 흔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흥건하게 젖은 귀두를 꽈악꽈악 누르면서. 터져 나오는 신음은 이를 악물어 참았다.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배 속이 뜨거워졌다. 흥분이 더해져 갈수록 몸이 극도로 예민해져 나민이 녀석에게 씹힌 유두가 찌릿거리며 아파 왔다.

“읏…… 으흐윽…….”

쏟아져 나오는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갔다. 한밤중에 식구들 몰래 포르노 영상을 보며 자위하는 10대 소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포르노 영상의 주인공은 당연히 한나민이었다. 내 위에 올라타 유두를 짓씹고 핥던 입술. 아랫배를 묵직하게 누르던 발기한 성기. 축축하게 젖어 있던 예쁜 눈. 예쁜 입술. 젠장. 나민아, 어쩌면 좋으냐. 네가 정말 좋다. 좋아 죽겠다.

욕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나민이는 내게 곧장 달려들었다. 내 얼굴을 꽈악 움켜쥐고 무작정 입술을 밀어붙였다. 키스가 아니라 먹어 치우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제가 선생님을 건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요.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덮치는 거니까.”

괜찮죠? 네? 그렇죠? 선생님? 몇 번이나 녀석은 내게 대답을 구했지만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입은 녀석의 입술에 막혀 있었으니까.

녀석의 키스는 지독히도 어설펐다. 이대로 선생님을 잡아먹고 싶어요. 선생님이랑 미치도록 하고 싶어요. 어설픈 만큼 끓어오르는 욕망이 그대로 느껴져서 내 몸도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젠장.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널 잡아먹고 싶다, 이 녀석아. 나도 너랑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선생님, 선생니임. 좋아요. 정말 좋아요. 열에 들뜬 환자처럼 반복해 중얼거리며 입술을 갖다 비벼 대고, 씹고, 핥아 대는 노골적인 행동에 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도덕관념이고 나발이고 들끓는 성욕 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녀석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녀석이 깜짝 놀라 얼굴을 떼어 내기에 이번엔 내 쪽에서 얼굴을 들이밀어 녀석의 입술을 훔쳤다. 입술을 강하게 밀착하고 벌어진 녀석의 입술을 가르며 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혀로 뜨겁고 축축한 녀석의 입 안 내부를 훑었다. 녀석은 숨이 막혀 끄응끄응대면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정신없이 허리를 쓰다듬는 차가운 손끝의 감촉에 난 반쯤 정신을 잃고 헐떡였다. 녀석의 손끝이 닿는 부분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으읏!”

녀석의 손이 허리를 지나 속옷 위로 비어져 나온 내 성기를 쥐었을 때, 난 튕기듯 몸을 떨며 소리를 내질렀다. 더 이상 나오는 소리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건 녀석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짐승처럼 헐떡이면서 가끔씩 서, 선생니임……,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부르며 녀석은 날 만졌다.

그리고 나도 녀석을 만졌다. 정신없이 손으로 녀석의 바지를 끌어 내리고 속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뜨거운 살덩이를 움켜쥐었다. 나민이가 내 목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듯이 신음했다. 허리를 움찔움찔 떨면서도 허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금세 내 손바닥 안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더…… 더 만져 줘요, 선생님. 흐으윽…… 좋아요. 진짜…… 하으으으…… 진짜 기분 좋아요.”

귓속으로 파고드는 흐느낌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파르르르 떨리는 녀석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예 녀석은 나를 품에 끌어안고서 흐느껴 울었다.

녀석이 내 품 안에서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선, 그 어떤 감정이 누군가의 손아귀가 되어 내 심장을 꽈악 움켜쥐는 듯했다.

녀석은 내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내 손바닥 안에서 사정했다. 젊은 녀석답게 색이 짙고 냄새가 강한 체액이 내 손바닥이며 배, 가슴팍을 적셨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정액 냄새에 내가 사정을 한 것도 아닌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칠고 길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민이가 내 목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아래에서 풍겨 오르는 정액 냄새 때문인지 날 쳐다보는 녀석의 예쁜 얼굴이 굉장히 음란해 보였다.

시선으로 강간당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면 좀 우스울까.

이미 내 손안에서 한 번 정액을 분출했음에도 녀석의 눈동자 속 성욕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 뜨거워졌다. 그거 한 번으로 만족할 리가 없지. 한창 성욕 왕성할 나이인데. 아까 내가 한 짓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행동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녀석은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머리 위에 어설프게 매달아 놓은 선반이 무너져 그 위에 놓여 있던 비누며, 휴지 같은 것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나는 깜짝 놀라 녀석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넌 나랑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은 거냐? 나랑 섹스하고 싶은 거냐?”

노골적인 내 질문에 녀석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익었다.

“잘 봐. 난 너랑 똑같은 몸을 가진 사내놈이야.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사내놈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냐? 사내놈이랑 섹스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나 알아? 나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서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난 곧추서 있는 내 성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나민이가 속삭이듯 말하며 나를 응시했다. “내가 왜 후회를 해요.” 아까보다 좀 더 작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하고는, 녀석은 손으로 내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을 가까이해 볼에 키스하고, 입술을 미끄러뜨려 턱을 핥으며 속삭였다.

“그냥 좋아요. 선생님이란 사람 그 자체가요. 그것만으론 안 될까요?”

내가 가진 것 하나 없는 놈이라도? 화려한 껍데기 속에 숨은 별 볼 것 없는 알맹이를 지닌 놈이라도?

나는 손으로 녀석의 얼굴을 밀어냈다. 거부당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어린애 같은 표정이다.

“방으로 가자. 여긴 춥고 좁잖아.”

나는 변기 위에서 일어났다. 욕실 밖으로 나가 자꾸만 미끄러져 내리는 바지를 아예 벗어 버렸다. 골반까지 내려온 팬티도 마저 벗었다. 완전히 알몸이 된 등에 녀석의 노골적인 시선이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녀석은 걸을 때마다 움직이는 내 엉덩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따라오고 있을 거다.

방에는 며칠 내내 치우지 않았을 담요가 늘어진 개의 모습처럼 뭉쳐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뒤따라오던 녀석이 내 어깨를 힘껏 움켜잡아 날 돌려세웠다.

여름철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처럼 키스가 퍼부어졌다. 나는 어린애의 불타오르는 격정에 정열적으로 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키스를 쏟아붓는 어린 녀석의 머리를 두 팔로 감쌌다. 방법을 몰라 무조건 내 입 안을 휘젓는 어린 짐승의 혀를 옭아매 뿌리째 뽑아 버릴 듯이 빨아들였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녀석의 타액은 꿀처럼 달짝지근했다.

*

*

<네 아비는 살인자다. 그리고 네 몸속에도 살인자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라.>

나를 거둬 준 여자는 한 번씩 나를 불러 앉혀 놓고 그런 말을 했다. 여자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난 정말로 비참해졌다.

마을 사람 중 유일하게 나를 죄 없는 어린애로 봐 준 게 그녀였다. 분노에 찬 어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했고, 그들에게 학대당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날 진창에서 끌어 올려 준 게 그녀였다.

적어도 그녀 앞에선 난 다른 집 애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애이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자는 한 번씩 그 짐승 같은 작자의 얘기를 꺼내 날 비참하게 했던 것일까.

<언제나, 매 순간 그 사실을 자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어째서요? 그냥 영원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면 안 돼요?>

<네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인간이 네 아비니까.>

어렸던 나는 그 당시 여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했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목소리가 굵어지고 아랫도리에 털이 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느 날 같은 반 애들과 싸움이 붙었다. 상대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었고, 언제나 일관되게 녀석들을 무시하던 나도 그날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너 데리고 사는 이모라는 그 여자, 창녀지? 어디서 실컷 몸 팔다가 병이 나서 여기로 온 거라더라. 퇴물 창녀랑 살인자 자식 새끼랑, 끼리끼리 아주 잘 만났네. 조심해라. 너도 슬슬 좆에 털 나기 시작할 텐데, 그 여자가 언제 널 덮칠지 모른다.>

발단은 늘 내게 시비를 걸어 오던 패거리들 중 한 놈이 지껄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야말로 눈이 홱 돌아가서 낄낄대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킬킬대던 그놈은 피투성이가 돼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움켜쥐고서 씩씩거리고 있었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저대로 뒀다간 저 애새끼도 사람 죽이는 새끼가 될 게 분명해. 싹을 확 잘라 버려야 돼.>

<그냥 산속에 파묻어 버려. 굶은 멧돼지 새끼한테 잡아먹히든 말든!>

얻어터진 놈 부모가 찾아와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사람들은 내게 발길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여자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네년이 그때 저 새끼 사람 만든다고 했니? 안 했니? 이 미친년아, 내 새끼 죽으면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퍼부어지는 욕설과 발길질에도 여자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여자는 벌게진 눈으로 씩씩대는 내 머리를 있는 힘을 다해 짓눌렀다.

그때 알았다. 여자가 어린 날 붙들어 앉혀 놓고 했던 말의 의미를.

여자의 말대로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부모란 자가 바로 살인자인 내 아버지였다. 아버지란 새끼는 날 임신한 어머니 배를 걷어차 나와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 간신히 나는 살아남았지만 그 인간은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를 키워 준 것은 그딴 새끼라도 자식이라고 데리고 살던 할머니였다.

나는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온갖 폭력을 휘두르고 욕설을 퍼붓던 모습을 보고 자랐다.

도박에서 진 빚 독촉을 하던 마을 사람들을 죽인 아버지를.

언제나 아버지의 눈 속에서 이글거리던 광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자란 것이 바로 나였다. 무시무시한 광인의 피를 물려받은 것 또한 나였고.

사람들이 모두 잠든 야밤에 여자는 나를 깨워 집 앞에 서 있던 차에 태웠다.

차 안에는 덩치 좋은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여자는 그들과 함께 서울로 가라고 했다. 싫다고 해도 소용없으니까 무조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서울에 가서 ‘서울 삼촌들’ 말 잘 듣고 살라고 했다.

그날 밤, 차창 밖으로 보았던 여자의 초췌한 얼굴. 시퍼렇게 멍이 든 그 얼굴이 내가 본 여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이후 여자가 어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생지옥 같던 마을에서 야반도주하듯 떠나와 ‘서울 삼촌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 한구석에 둥지를 틀고 사는 동안 나는 가끔씩, 아니, 거의 매일 여자 생각을 했다.

그녀는 행복할까.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해졌을까. 나 같은 건 이미 잊었겠지. 여자와 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니까.

뜨끈하게 젖어 든 내 눈가를 누군가 손으로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슬며시 눈을 뜨니 나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이 보였다.

“왜 울어요? 선생님?”

“몸이 아파서 운다, 자식아.”

꿈을 꾸면서 운 게 쪽팔려서 대충 둘러댄 말에 나민이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구겨졌다.

이윽고 “죄송해요” 다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녀석은 내 볼을 슬슬 만졌다. 녀석의 손은 차가웠다.

나는 그나마 담요를 둘둘 말고 있지만 녀석은 이불도 깔지 않은 방바닥에 그냥 드러누운 채였다. 녀석은 옆으로 누워 내 얼굴을 만지작대면서 빤히 쳐다본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녀석은 웃었다.

이 귀여운 얼굴을 한 놈이 자기 고추로 내 엉덩이를 쑤시려 했었지, 건방지게. 내가 깜짝 놀라서 “나, 나민아. 코, 콘돔 없이 하면 병 생겨 죽어!” 이딴 소리를 해 댔는데도 이놈이 자기 걸 내 허벅지 사이에 마구 비벼 댔다. 그야말로 발정 난 수컷 강아지였다.

“히히. 좋다, 이런 거.”

“좋기도 하겠다.”

“다음에 콘돔 사 오면 끝까지 하게 해 주실 거예요?”

“웃기지 마라. 건방지게 어디 감히 선생님 엉덩이를 뚫으려 들어?”

툴툴대는 소리에 녀석은 이를 드러내 빙긋 웃어 보였다.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라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녀석이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일러를 틀기나 했는지 바닥이 완전히 냉골이다.

“추운데 왜 그러고 있어? 이불 꺼내지.”

“빨려고 세탁기 안에 넣어 놨는데 귀찮아서 아직 안 빨았거든요.”

“진작 좀 빨아 놓지. 이리 와. 춥다.”

담요 품을 들춰 보이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난 담요를 녀석의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씌워 주었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알몸이었던 것 같은데 깨어 보니 옷을 입고 있었다. 세제 냄새밖에 나지 않는 긴팔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 잠들기 전에 씻은 기억이 없는데 머리칼이 젖어 있고 몸이 보송보송한 걸 보면, 녀석이 기절하듯이 먼저 잠든 날 깨끗이 닦아 주고 옷까지 입혀 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방 안인데도 왜 이렇게 추워? 보일러는 튼 거냐?”

“아뇨. 전 웬만하면 보일러 안 틀어요.”

하긴 가스비가 부담스러워서 집에서도 외투를 입고 있는 내 신세도 다를 바가 없다. 녀석은 내 품 안에 곰 인형처럼 안겨서 나를 빤히, 아주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선생님은 체온이 높아서 되게 따뜻해요. 따끈따끈 기분 좋다.”

품 안의 아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내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난 녀석의 샴푸 냄새가 나는 보드라운 머리칼 속에 코를 묻었다. 웃기게도 녀석의 머리에선 막 씻긴 강아지 같은 냄새가 났다. 강아지처럼 보송보송 귀엽긴 한데 어째 자꾸만 녀석의 숨이 거칠어진다.

담요 안에서 꿈틀거리며 은근슬쩍 내 다리 사이에 자기 다리 하나를 끼워 넣고 하반신을 바짝 밀어붙인다. 행동이 어설프면서도 노골적이었다. 아까 몇 번이나 사정했는데 아직도 하고 싶은 거냐.

내 등허리 근처를 만지작대던 녀석의 손이 슬며시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는 조심스럽게 주물럭댔다.

“저기 선생님, 지금이라도 나가서 콘돔 사 올까요?”

기어이 오늘 밤 안에 끝까지 가 보겠다는 건가. 녀석의 집요함에 코웃음이 나왔다.

“다음에. 다음에 하자. 피곤해 죽을 것 같아. 그만 자자.”

난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달랬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피곤했다. 요새 제대로 챙겨 먹질 못했더니 확실히 체력이 떨어졌다. 못내 아쉬운 듯 내 엉덩이를 만져 대고 다리 사이를 비벼 대던 수컷 강아지는 곧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이 들었다.

몸은 피곤한데 쉬이 잠이 오질 않는다. 늘 혼자 자던 버릇이 있어서 남과 함께 자는 게 불편하기도 했고, 딱딱한 바닥에 등이 배겨 아프기도 했다. 찰싹 달라붙은 어린 녀석이 귀엽긴 하지만 귀찮게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불빛에 비쳐 만들어진 천장 위의 기괴한 무늬가 사람 얼굴처럼 보였다. 가끔 밤에 혼자 누워 있으면 천장 위에서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어째 오늘은 천장 위의 저 무늬가 사람 얼굴처럼 보여도 전혀 무섭지가 않다. 오늘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까. 오늘 밤은 진짜 귀신이 나타나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의 숨결은, 사람의 맨살은, 사람의 체온은 얼마나 따뜻한가. 난 너무 오랫동안 이 따뜻함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품 안의 이 사랑스러운 녀석에게 뭐든 다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석진경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었듯이.

첫사랑이었던 석진경은 그렇게 떠나보냈지만 이 애는 절대로 잃지 않을 거다. 내가 이 애를 지켜 줄 거다. 다치지 않게 내가, 이 손으로 지킬 거다.

벌어진 창틈에서 매서운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와 나는 담요 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바닥. 먼지 냄새가 나는 낡은 담요.

그 안으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려 만 나는 촌스러운 티셔츠에 추리닝을 입고 있다. 멋진 옷도, 시계도, 구두도 없다. 담요 안에선 짙은 향수 냄새 대신 나와 나민이의 체향만 폴폴 난다.

반짝거리는 껍데기를 벗고 초라한 본모습 그대로 웅크려 누운 채인데도 나는 웃으며 잠이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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