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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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다. 주르륵 콧물이 흘러내리는 순간 얼어 버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내가 좀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인간인지라 지금까지 아무리 추워도 내복 따위에는 손도 대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난 집으로 돌아가면 당장 발열 내복을 주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옷을 몇 겹씩 껴입고 털모자에 장갑, 머플러까지 둘둘 말고는 있지만 추웠다. 진짜 더럽게 추웠다.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고 코끝에 감각이 사라지고 이가 덜덜 떨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털 부츠를 신고 왔다는 거다.

하지만 아무리 발이 따뜻하면 뭐 하나. 추운 건 추운 거다. 발만 따뜻하고 전신이 다 얼어붙었다.

“아으으으.”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성대하게 기침도 몇 번 했다.

이 추운 날씨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최대한 몸을 둥글게 감싸고서 벽 안쪽, 재활용 쓰레기통 사이에 숨었다. 구석진 곳에 들어가 있으면 덜 춥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어디에 좀 들어가 있고 싶어도 평범한 주택가라 커피숍 같은 데도 없다. 나는 그야말로 복날 개 떨듯이 덜덜 떨면서 맞은편 건물을 노려보았다.

맞은편의 빌라가 박하신의 집이 있는 곳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박하신네 아버지는 새벽 출근에 밤 퇴근이라 저 집은 놈과 패거리들의 아지트로 쓰이고 있단다.

놈들이 저 집에서 기어 나오는 것을 뒤쫓아 가서 덮친다, 하는 게 일단 우리들의 계획이었다. 놈들을 집에서 기어 나오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박하신에게 문자를 보내는 거다. ‘할 얘기가 있어. 잠깐 나와라’ 요런 식으로. 물론 번호는 나민이의 핸드폰 번호로.

계획도 세웠고 나름 구체적인 방법까지 생각해 둔 데다 목표물의 집 앞까지 찾아온 건 좋은데, 문제는 아직까지 나 혼자라는 거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인 오토바이도 없고, 얼굴을 가릴 헬멧·삼단봉 이런 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덜렁 이곳까지 찾아와서 이러고 있는 거다.

“망할 새끼, 대체 왜 안 와?”

동수 놈은 기식이에게 오토바이를 빌려서 이곳으로 온다고 했었다. 혹시 몰라 핸드폰을 꺼내 봤지만 전화 한 통 걸려 온 것도 없고, 문자도 온 게 없었다. 혹시 기식이에게 오토바이를 빌리지 못한 건 아니겠지? 무조건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 빵빵 치더니.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손바닥 위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똥수였다.

“어디야? 왜 안 와?”

[사거리 앞에 보면 편의점이 하나 있을 거예요. 거기에 같이 있으니까 그리로 와요.]

같이 있어? 누구와? 묻기도 전에 놈이 전화를 끊었다.

도착했으면 이리로 모시러 올 것이지. 어디 감히 형님한테 이리 오라고 시켜. 구시렁구시렁대면서 사거리 앞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편의점 옆, 자전거를 세워 두는 공간에는 윤이 반들반들 나는 멋진 오토바이 한 대와 누가 줘도 가져가지 않을 낡은 스쿠터 한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걸 보는 내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저 스쿠터는 동수 놈의 딸딸이 아닌가. 그리고 그 옆에 세워 둔 눈부시게 광이 나는 저 오토바이는 분명…….

“동추 형, 호빵 먹을래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자 동수 놈이 양손에 호빵 두 개를 들고서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놈의 뒤로 컵라면을 먹고 있는 기식이가 보였다. 역시 저 오토바이는 기식이 거였구나.

“야채 호빵 먹을래요? 아니면 피자 호빵 먹을래요?”

아무렇지 않게 야채 호빵 피자 호빵 운운하는 동수 놈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쳤다. 나름 힘을 줘서 친 건데도 놈은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눈만 깜빡였다.

“그럼 형은 호빵 안 먹는 거죠?”

천연덕스럽게 말하면서 양손에 든 호빵값을 계산하러 갔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여기 있냐?”

라면을 맛있게도 처잡수고 계신 기식이 놈한테 다가갔다. 국물 냄새 한번 죽인다. 갑자기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져서 동수 놈에게 라면 하나 사 오라고 시켰다. 호빵을 우물우물 씹으면서도 먹을 게 없나 과자 진열대 앞을 어슬렁대던 동수 놈이 진열대 위로 손만 흔들었다.

“똥수 놈이 찾아와서는 우리 애기를 빌려 달라고 하잖아요.”

미친놈. 오토바이를 ‘우리 애기’란다. 오토바이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더니 이젠 아예 사람처럼 대하는구나. 따뜻한 실내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못 빌려준다고 하면 되지. 내가 궁금한 건 왜 네놈이 여기 있냐 이거다.”

“똥수, 저 미친 새끼가 오토바이 안 빌려주면 절대로 안 나간다면서 가게에 아예 드러눕더라고요. 손님들이 찾아왔다가 동수 놈 보고 깜짝 놀라서 나가 버리고. 저 새끼를 확 회 쳐서 냉동고에 매달아 버릴까 하다가 한번 물어봤죠. 오토바이를 왜 빌리려고 하냐고. 그랬더니 놈이 되게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기식이가 잠시 말을 멈추고 라면 국물을 호로록 소리 내 들이마셨다.

“밤 사냥꾼들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형이랑 똥수가 그 자식들인 척하고 양아치 새끼들을 사냥하러 갈 거라니. 이런 재밌는 일에 내가 빠질 수 있나 싶어서 얼른 따라온 거예요.”

“밤 사냥꾼이라고 하냐?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그놈들을?”

“운영진 놈들 자체가 자기들을 밤 사냥꾼이라 부르는데요, 뭘. 하여튼 유치한 새끼들. 밤 사냥꾼이 뭐야, 밤 사냥꾼이. 호스트도 아니고.”

동수 놈은 컵라면에 뜨거운 물까지 부어서 내 앞에 갖다 바쳤다. 나와 기식이 사이에 불쑥 끼어든 녀석은 호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뭐 대단한 일 한다고 너까지 와?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재밌잖아요.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기식이가 못생긴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히죽 웃었다.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특이한 놈이라니까. 이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직 3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급하게 라면 뚜껑을 열었다.

설익은 면은 내버려 두고 일단 따뜻한 국물부터 후루룩 마셨다. 얼어붙은 배 속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에 저절로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나는 순식간에 라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먹을 게 들어가자 허기가 아프리카 초원의 물소 떼처럼 밀려와 도시락까지 사서 먹었다. 특별히 기식이 놈과 동수 놈한테도 도시락을 사 줬다. 자기는 재미 삼아 왔다고는 하지만 아끼는 오토바이를 끌고 여기까지 와 준 기식이 놈과, 자기 일도 아닌데 발 벗고 나서 준 동수 놈이 기특해서였다.

“미안하다. 형이 돈이 없어서 일단 편의점 도시락으로 만족해라. 나중에 술이랑 고기 쏠게.”

“에이, 됐어요. 뭐 얻어먹겠다고 온 것도 아닌데.”

“계란이랑 소시지도 먹어도 돼요?”

도시락 하나씩 사 주며 현재의 처절한 주머니 사정을 밝혔더니 반응이 이렇게나 다르다. 그래도 똥수 놈보다 나이 한두 살 더 먹은 기식이 놈이 그나마 어른스럽다.

똥수 놈은 계란이며, 김치며, 핫바며 먹을 것을 품 안 가득 쌓아 두고서 우적우적 먹어 치웠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였다. 겨울잠 자러 들어가는 곰도 아니고. 저놈의 자식은 뭐 저렇게 많이 처먹나. 덩치가 있어서 원래 대식가이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치킨집 아들이 못 먹어서 굶주린 건 아닐 테고.

“그런데 동추 형,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웬 털 신발?”

기식이 놈이 볼 빵빵하게 부풀리고 밥알을 씹으며 지껄인 말이다. 자기가 세련된 멋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놈이다. 이놈은 자기 SNS에 온갖 허세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어느 커피숍에서 거만하게 다리 꼬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찍은 사진 밑에 ‘커피 한 잔의 여유. 휴우. 사는 게 힘들다. 힘들어도 웃어야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요따위 손발 오그라드는 멘트를 적어 놓기도 하고.

오토바이 동호회에선 꽤 유명 인사라 따르는 여자애들도 꽤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등학생처럼 커다란 메이커 패딩에 딱 달라붙는 일자바지 입고 형광 노란색 운동화를 신은 네놈이 지금 내 옷차림을 지적하냐.

“어. 진짜 그러고 보니까 동추 형, 오늘 털 신발 신고 왔네요? 울 엄니도 요즘 춥다고 털 부츠 신고 다니던데.”

“동추 형, 내가 볼 때 지금 옷차림에 그 부츠는 영 아니에요. 언제 한번 나랑 쇼핑이나 하러 가요. 내가 형 스타일 쫙 바꿔 드릴게.”

“형, 형. 이거 어디 브랜드 거예요? 따뜻해요? 벗어 봐요. 벗어 봐. 나도 한번 신어 보자.”

“내가 그동안 말 안 하고 참았는데 형은 옷을 너무 날라리처럼 입어요. 형은 그래도 인물이 괜찮으니까 센스 있게 옷만 잘 입어도 멋질 텐데요.”

기식이랑 동수, 두 놈이 번갈아 가며 양옆에서 짹짹짹 잘도 재잘댄다. 새끼들아, 조용히 좀 해라. 내가 네놈들 때문에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겠다. 우리 때문에 점원 아가씨가 불안해하는 거 안 보이냐. 밥알 사방으로 튀기면서 계속 “벗어 봐요. 네? 네?” 끈질기게 달라붙는 동수 놈의 발을 꾸우욱 짓밟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서 빨리 문자를 보내서 빨간 패딩 패거리를 집 밖으로 기어 나오게 해야지 안 되겠다. 남의 영업장에서 뭐 하는 짓인가, 이게. 명색이 애들을 가르치는 학원 선생이란 놈이.

[잠깐 나와라. 할 얘기가 있어. 지하철역 앞 XXX에서 기다린다.]

정성 들여 문자를 한 자 한 자 입력한 다음 발신인 변경을 눌러 나민이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서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동추 형. 오늘 우리가 족쳐야 할 놈들, 저 새끼들 아니에요?”

기식이가 젓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젓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에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빨간 패딩과 똘마니들이었다.

“맞아. 저 자식들이야.”

“문자 보낸 거예요?”

나는 창밖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문자도 보내지 않았는데 저 자식들이 왜 벌써 기어 나왔지?

놈들은 편의점 맞은편에 있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등의 불빛이 파란불로 바뀌자 놈들이 어기적어기적, 걷기 시작했다.

“우리도 나가자.”

나는 재빨리 먹던 도시락 그릇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는 편의점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수와 기식이도 곧 내 뒤를 따라 나와 허둥지둥 각자의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다. 부릉부르릉, 탈탈탈탈, 외양만큼이나 비교되는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 타요!”, “형. 얼른 타요!” 기식이와 동수가 동시에 소리쳤다. 똥수 놈에게는 미안하지만 네놈 스쿠터에는 죽어도 못 타겠다.

기식이가 내민 헬멧을 뒤집어쓰고 놈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자, 뒤에서 동수 놈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쟤들을 어디 으슥한 데로 몰아넣어야 할 거 아니에요.”

“으음, 그래야겠지?”

“뭐야? 설마 구체적인 계획도 안 세워 둔 거예요?”

아니, 계획은 세워 뒀다. 내가 나민이 번호로 박하신에게 문자를 보내고, 그놈이랑 패거리들이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오토바이를 탄 우리들이 나타나서 녀석들을 인적 없는 곳으로 끌고 가기로 했지. 마침 이 근처엔 꽤 큰 공원이 있으니까.

그런데 저놈들이 먼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먼저 나와서 사람들 많은 큰길로 사라져 버릴 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지? 이제?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동수 놈을 태운 스쿠터가 고약한 엔진 소리를 내며 우리들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 자식은 또 왜 저래? 생각이란 걸 해 본 뒤에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한똥수, 저 그지 같은 자식. 나보고 자기 뒤를 따라오라고? 건방진 새끼.”

구시렁대며 기식이도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이 계획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팀의 우두머리가 아니면 뭐 어떤가. 나는 팀의 리더, 뭐 이런 게 싫은 사람이었다.

그래, 네놈들 멋대로 해라.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건 난 열심히 끌려가 주마. 이런 생각으로 나는 기식이 놈의 등짝에 따악 달라붙었다.

기식이가 애지중지하는 ‘우리 애기’는 순식간에 동수의 스쿠터를 따라잡았다. 방금 전 박하신 무리들이 사라졌던 골목으로 접어든 순간 오토바이 두 대가 우리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걸 발견했다. 달려오는 파란색 오토바이에 탄 것은 박하신이었다. 놈도 그렇고, 그 뒤에 탄 녀석도 헬멧도 쓰지 않은 채였다. 그 뒤를 이어 동수 놈이 탄 것과 비슷한 스쿠터에도 두 놈이 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헬멧도 쓰지 않고서.

놈들을 알아본 우리들이 잠시 멈춰 선 순간, 빨간 패딩과 똘마니들은 빠르게 우리들 옆을 스쳐 지나갔다. 놈들은 우리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딱 한 놈. 박하신만이 나와 기식이를 흘겨보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어쭈, 저놈 봐라? 감히 날 노려봐?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놈이!”

기식이가 빽 소리를 지르며 방향을 틀어 빨간 패딩 무리들을 뒤쫓았다. 똥수 놈도 낡은 스쿠터로 용케 우리들 뒤를 열심히 쫓아왔다.

차라리 잘됐다. 놈들도 오토바이를 타고 있으니 인적 드문 곳으로 몰아넣기도 쉬울 터였다.

뒤따라오는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인지 앞서 달려가는 스쿠터 뒤에 탄 놈이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놈의 겁먹은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놈들은 우리를 밤 사냥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스쿠터 뒤에 탄 놈이 운전하는 놈 옆구리를 찌르며 지껄이는 것까지 똑똑히 보였다. 스쿠터가 부아앙, 소리를 내며 속도를 높여 은색 승용차 앞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기식이도 앞서 달려 나간 스쿠터의 행로를 똑같이 따라갔다. 시야가 트이자 저 앞으로 스쿠터와 파란 오토바이가 보였다. 난데없는 오토바이 레이싱에 멀쩡히 갈 길 잘 가고 있던 승용차들이 빠앙빠앙, 클랙슨을 울려 대며 난리가 났다.

신호 대기가 걸렸는지 차들이 멈춰 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쿠터와 파란 오토바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기식이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이 먼저 차들이 정지선 앞에 모두 멈춰 선 경계선을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뒤따라오는 동수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냉큼 도로에서 벗어나 일반 주택가로 빠졌다. 물론 우리도 놈들의 뒤를 쫓았다. 완전하게 어둠이 깔린 주택가 도로는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나다니는 이가 별로 없어 행인들이 장애물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야, 기식아. 동수가 못 따라온 모양이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우리 뒤를 따라오던 녀석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건지 기식이는 말이 없었다. 늦게나마 따라오겠지 싶어서 다시 한번 뒤돌아봤지만 동수 놈의 스쿠터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앞서 달리는 두 대의 오토바이가 방향을 틀어 잠깐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뭔가 엄청나게 무거운 쇳덩이가 아스팔트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와장창창 깨지는 소리, “으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들이 거의 동시에 사방에 울려 퍼졌다.

코너를 돌아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확인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쿠터 한 대와 파란색 오토바이 한 대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애들 네 명도 사이좋게 저쪽에 두 놈, 이쪽에 두 놈씩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앞에 동수 놈을 태운 스쿠터가 있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

동수 놈이 골목으로 들어가 놈들을 앞지른 것이다. 골목 밖으로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아서 놈들을 멈춰 세우려던 계획이었던 듯하다. 저 바보 자식, 오토바이가 달리는 속도가 있는데 그렇게 쉽게 멈춰 설 리가 있나.

기식이가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나는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들에게 뛰어갔다. 매운맛 좀 보여 주려던 것뿐이지 저 정도로 다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다.

하지만 헬멧을 쓴 내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자 놈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어섰다. 녀석들이 비칠거리며 일어서서는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리 크게 다친 건 아닌 듯했다. 아예 일어나질 못하는 녀석도 있었는데, 그 녀석은 인도에 바짝 붙어 덜덜 떨고만 있었다.

나는 도망치는 녀석들은 내버려 두고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다친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다가가는 나를 보며 히끅히끅 딸꾹질을 해 댔다.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많이 다쳤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기식이가 도망친 녀석들을 쫓아가는 게 보였다. 저 자식의 성격을 잘 안다. 자기를 공격하는 귀면들의 손가락까지 물어뜯었던 놈이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놈이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나는 기식이의 뒤를 쫓았다.

가까스로 따라잡아 보니 기식이 놈은 품에서 삼단봉까지 꺼내 든 채였다.

“야, 그만둬. 쟤들 다쳤잖아.”

“그래서요? 저 자식들 콱 죽여 버리려던 거 아니었어요?”

“쟤들 아직 고등학생이야. 그냥 적당히 매운맛 좀 보여 주면 되는 거였어.”

“그럼 가서 매운맛을 확실히 보여 줘야 할 거 아니에요. 저대로 도망치게 놔두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잖아요!”

하긴 기식이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해 두는 편이 좋겠지.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벌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겁먹은 애들을 쫓는 건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즐겁기는커녕 기분 한번 더러웠다. 또래 애들 앞에선 거들먹거리며 폭력을 휘두르던 놈들이 퍼렇게 질려서 도망치는 꼴을 보니 딱하기도 했다.

쫓기는 놈들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아는지 놈들은 좁고 어두운 골목을 잘도 뛰어다녔다. 헬멧을 쓴 채로 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느라 헬멧 안은 축축한 사우나 안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따위 걸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잠시 속도를 늦춰 헬멧을 벗고 숨을 몰아쉬었다. 찬 바람을 얼굴에 쐬니 좀 살 것 같았다.

후욱 후우욱,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조용한 골목 어귀에 가득 찼다. 현대식 건물들과 아파트가 들어찬 동네와는 달리 70, 80년대를 연상케 하는 낡은 집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골목이었다. 머리 위에서 빛나는 가로등 불빛도 불안하게 깜빡였다. 나와 함께 달리던 기식이와 도망치던 녀석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머리칼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집들이 늘어선 골목에 있으면 여지없이 들리는 TV 소리나 사람들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동네였다. 사람이 살긴 하는 건가. 바로 옆, 회색 담벼락에 둘러싸인 집을 쳐다봤지만 안은 어두웠다. 사람이 사는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달리느라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은 움직임을 멈추자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파도처럼 밀려든 한기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저벅저벅, 육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어느 집 담벼락 너머로 까맣게 윤이 나는 머리통이 보였다. 헬멧을 뒤집어쓴 머리 부분일 터였다.

“동수냐? 기식이한테 전화 좀 걸어 봐라. 대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대답이 없었다. 놈은 말도 없이 발소리만 내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는 건가. 그래도 알았다는 말이라도 할 것이지. 핸드폰을 끄집어내 봤지만 역시 배터리 잔량 표시 부분이 깜빡이고 있었다. 버튼 하나 누르는 것만으로도 핸드폰이 꺼졌다.

“야, 내 핸드폰 꺼졌다. 전화기 좀 내놔 봐라.”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만 척 내밀었다. 하지만 놈은 아무리 기다려도 핸드폰을 건네주지 않았다. 이 자식이 왜 이래? 짜증이 나서 뒤돌아보았더니 어느새 녀석은 내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녀석은 까만색 광택이 나는 본체에 덮개 부분이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헬멧을 쓰고 있었다. 목까지 꽉 잠근 까만색 패딩 점퍼에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뭔가 이상했다. 동수 자식이 오늘 저런 옷을 입고 있었던가. 저런 헬멧을 쓰고 있었던가. 게다가 키는 크지만 어째 체구가 왜소하다. 늘씬하게 쭉 빠진 몸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 놈은.

“너…… 누구냐?”

입을 열어 질문하는 목소리가 약하게 떨렸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놈은 똥수가 아니다. 저놈은 위험한 놈이다. 무조건 피해라!

하지만 본능이 외치는 위험 신호에 따라 몸이 움직이기도 전에, 눈앞의 검은 놈은 내게 팔을 뻗어 왔다. 바로 눈앞에 위치하고 있던지라 놈이 뻗은 손이 순식간에 내 목을 틀어쥐었다. 목을 틀어쥔 손의 힘은 그다지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금방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너 혹시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거기서 나온 놈이냐?”

나는 슬슬 뒷걸음질 치며 질문을 던졌다. 검은 놈은 대답이 없었다.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내 몸 어딘가를 움켜잡으려 했다.

나는 확신했다. 저놈은 ‘밤 사냥꾼’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이 야밤에 헬멧을 쓴 저런 꼴로 골목을 어슬렁거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단단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잠깐만. 당신들이 잡으려는 놈이 박하신 맞지? 그럼 여기서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걔들을 잡으러 가야지 않겠어?”

이번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끌어내진 못했다. 검은 놈이 상체를 낮춰 내게 총알처럼 슝, 달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말이 통할 양반이 아닌 듯한데, 이런 좁은 골목에서 맞붙어 싸우다간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를 할 게 분명하다.

검은 놈은 역시 내 뒤를 쫓아왔다. 쫓아오는 속도가 엄청났다.

대체 왜! 대체 왜 날 쫓아오는 건데! 속으로 외치며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내가 방향을 튼 오른쪽 골목에서 한 놈이 튀어나왔다. 물론 목표는 나였다. 내 뒤를 쫓아오던 놈과 마찬가지로 시꺼먼 헬멧에 시꺼먼 점퍼를 입은 놈은 럭비 선수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나는 달려든 놈과 함께 어느 집 대문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잠겨 있던 대문이 달려드는 남자 두 놈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와 내게 달려든 놈은 한 덩어리가 되어 문이 열린 집 마당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나를 덮친 검은 놈은 재빨리 몸을 추슬러 일어섰지만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말로 하자고, 말로. 꼭 이렇게 쓸데없는 짓에 에너지를 낭비해야 돼?”

나는 젖은 흙냄새 나는 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들고 있던 헬멧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검은 헬멧, 검은 점퍼를 입은 두 놈이 반쯤 열린 대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쉽게 내보내지 않겠다 이거다.

흘끗, 눈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이 집 역시 불이 꺼진 채였다. 마당 한가득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인 폐가였다.

“내가 당신들을 따라서 애들한테 돈 받고 이런 짓 하는 짝퉁, 뭐 그런 건 줄 아나 본데. 그런 게 아냐. 사정이 있어서 그 애들을 쫓고 있었던 거야.”

내가 들어도 궁색한 변명이긴 하다. 검은 두 놈 중 한 놈이 품에서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놈이 손에 든 그것을 휙 휘두르자 은색 봉이 길게 늘어났다.

밤일하러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10대 애송이들 손봐 주는데 무기가 어디에 필요하겠나 싶어 빈손으로 나온 날 밤이었다, 하필! 기식이 놈한테서 삼단봉이라도 건네받았어야 됐는데.

저거에 제대로 맞으면 멍들고 타박상 입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한 번 제대로 맞아 봐서 안다. 삼단봉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기엔 너무도 위협적인 무기다.

검은 놈이 삼단봉을 펼쳐 들고서 내게로 달려왔다. 나는 되는대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판자를 들어 올렸다.

빠아악, 소리와 함께 검은 놈이 휘두른 삼단봉에 나무판자가 박살 났다. 두 동강 난 나무판자 대신 또 다른 방패를 찾기도 전에, 놈은 이미 내 등 뒤에 위치해 삼단봉으로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등 뒤에 달라붙어 삼단봉을 이용해 상대방의 목을 조르는 폼이 확실히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는 아니었다.

“나, 날 죽일 셈이야? 이러지 말자고……!”

팔을 허우적대며 중얼거리자 목을 조르는 팔에 더욱 힘이 들어왔다.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서 나는 팔을 버둥대며 목을 조른 놈의 팔뚝을 움켜잡아 긁었다. 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을 손톱으로 긁어도 목을 조른 팔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과 나 사이엔 확실히 뭔가가 있나 봐. 계속 이렇게 마주치는 걸 보면.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건가? 자석처럼?”

등 뒤에서 웅얼대는 목소리에 숨이 턱 멎었다. 헬멧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 목소리는 웅웅 울렸지만 이 말투는 분명…….

“아니면 날 못 잊어서 계속 내 뒤를 쫓아다닌 거야? 그날 맛봤던 내 좆 맛이 꽤 좋았나 봐?”

확실하다. 착각 따위가 아니다. 내 귀에 대고 이런 말을 씨불일 놈은 그 새끼밖에 없다. 갈색 가면. 그 새끼다, 분명히! 하지만 이 자식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오늘 나는 임충식의 뼈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너 갈색 가면이냐?”

대답 대신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전업했냐? 갈색 가면에서 깜장 헬멧으로? 하긴 열한 마리나 되는 강아지들 끌고 뼈다귀나 모으는 짓은 돈이 안 되긴 하지?”

“나도 돈을 벌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않겠어? 열한 마리 강아지 사료도 사 먹여야 하고 말이야.”

나는 킥킥킥거리며 웃었다. 내가 귀면들을 강아지라고 하니까 자기도 열한 마리 강아지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강아지들 사료 사 먹이기 위해서 이 짓을 한다는 표현도 무진장 웃겼다.

그동안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일까. 분명히 엄청나게 충격을 먹어야 할 상황인데도 나는 신기할 정도로 멀쩡했다.

“그럼 풍기 문란 어쩌고 하는 사이트도 네놈이 운영하는 거였냐? 새끼, 너 의외로 머리 좋다? 어떻게 이런 사업을 벌일 생각을 했냐?”

나는 정신 나간 놈처럼 낄낄 웃다가, 발뒤꿈치에 온 힘을 실어 놈의 발을 있는 힘껏 짓밟았다.

발가락 뼈 부분을 체중을 실어 짓누르면 어떤 놈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게 돼 있다. 원하는 비명은 터져 나오지 않았지만 놈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뒤로 휘청거렸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의 사정권 안에서 벗어났다. 아까부터 봐 둔 각목을 집어 들자마자 우선 대문 앞에 선 까만 놈의 머리통부터 후려갈겼다. 빠아악,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뒤이어 휘청대는 놈의 어깨 부분을 후려쳤다. 역시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앉았을 텐데 헬멧 안에선 그르르르, 사람의 것이 아닌 소리만이 비어져 나왔다.

역시 귀면이다. 이 자식. 그렇다면 놈이 정신 차릴 순간도 없이 공격을 퍼붓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세 번째의 공격을 위해 각목을 휘둘렀다. 놈도 팔을 들어 올렸다. 놈의 팔뚝에 부딪친 각목은 맥없이 부러져 버렸다. 제길! 난 부러진 각목을 버리고 다른 무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바깥쪽 담벼락 위로 기어 올라와 나를 노려보는 까만색 헬멧을 쓴 얼굴을.

그리고 곧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까만 헬멧 쓴 얼굴 하나가 더 나타났다. 탈바가지가 아닌 헬멧을 뒤집어쓴 놈들은 얼굴에서 무지갯빛 광채를 내뿜으며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벌어진 입에서 실없는 웃음만 비어져 나왔다.

망할 새끼들 같으니라고.

등 뒤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후욱후욱, 숨을 내쉬면서. 차가운 손이 등 뒤에서 뻗어 나와 내 턱을 움켜쥐어 위로 쳐들었다.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헬멧을 쓴 머리통이었다. 마치 목덜미를 애무하듯 헬멧을 쓴 머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당신이 그리웠어, 임동추. 당신도 내가 보고 싶었지?”

놈이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다마다. 매일 밤 네놈을 산 채로 찢어 죽이는 꿈을 꿨을 정도였다.”

“그렇게나 날 그리워해 줘서 고마운데?”

미친 새끼. 나는 앙다문 잇새로 비웃음을 흘렸다.

놈은 남의 엉덩이에 대고 딱딱하게 선 아랫도리를 문질렀다. 발정 난 개처럼 발기한 아래를 비비면서 하악하악,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놈의 손이 내 몸 여기저기를 만져 댔다. 눈앞에서 세 개의 까만 머리통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얌전히 바라보고만 있지만 내가 허튼짓을 하려 했다간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자기들 주인이 사내놈 뒤에 달라붙어서 아랫도리를 비비적대며 헐떡이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떨까. 아, 저놈들은 인간이 아니니 아무 감정도 느낄 수가 없는 거겠지.

“너, 나랑 7년 전에 만났었지?”

내 팔뚝을 주무르던 놈의 손이 멈칫했다.

“7년 전, 산에서 만났던 애가 너지? 정신 나간 여자랑 성격 이상한 할아버지랑 살던 식당집 아들.”

짧은 침묵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냐? 네가 날 미워할 일은 조금도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시치미 떼는 것도 수준급이군. 임동추,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거야? 당신이 한 짓이?”

“내가 한 짓? 너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당신이 내 누나를 죽였잖아!”

놈의 외침이 사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놀랄 새도 없이 놈이 내 어깨를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일어나려는 시도도 하기 전에 발길질이 퍼부어졌다.

나는 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서 쏟아지는 공격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 냈다. 무자비하게 계속되던 발길질이 어느 순간 멈췄다.

나는 옆구리를 움켜쥐고서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꿈틀댔다. 눈물에 젖어 뿌옇게 변한 시야에 나를 내려다보는 놈의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무지개색으로 뒤덮인 헬멧의 덮개 부분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였다.

놈이 내게 퍼붓는 분노는 어찌 보면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놈이 내게 쏟아붓는 분노의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저 녀석의 누나를 죽여?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늘에 맹세코 난 절대로 그런 짓은 한 적이 없었다. 식당집 정신 나간 여자를 본 적도 없었다. 7년 전, 열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나는 아무 소득 없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사라진 여자의 시체를 찾지도 못했고, 여자의 시체를 옮긴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지도 못한 채로.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얼어붙은 하얀 손끝이 내 얼굴을 틀어쥐었다.

“당신을 당장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 임동추.”

헬멧 사이에서 높낮이 없는 밍밍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하겠어. 산 채로 당신의 모든 걸 한 꺼풀씩 벗겨 내 줄게. 피부를 한 겹씩 벗겨 내고, 손가락·발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짓이겨 줄게.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 어디 한번 실컷 발버둥 쳐 봐. 비명을 지르면서 목에서 피가 끓을 정도로 울부짖어 봐.”

놈은 엄지손가락으로 벌어진 내 입술을 훑었다. 헬멧 덮개 너머로 웃는 입술 모양이 보이는 듯했다.

“당신을 사랑해, 임동추. 아마 이 세상에서 나만큼 이 정도로 당신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놈은 없을 거야.”

여전히 무감동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놈의 손은 떨어지기 아쉬운 듯 내 뺨, 이마, 머리칼을 연신 매만지고 쓰다듬었다. 놈의 손가락에선 흙냄새와 피비린내에 뒤섞인 옅은 비누 향기가 났다. 머리가 아팠다. 놈을 노려보는 눈알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배 속이 뒤집혀 속에 있는 걸 죄 게워 내고 싶었다.

놈의 검은 머리통 뒤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달이 보였다. 옛날 엄마들이 하고 있던 금가락지 같은 초승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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