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3. 밤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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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로 몇 번이나 전화가 걸려 왔다.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전화이려니 생각하고 무시했지만 무려 세 번이나 연이어 전화벨이 울렸다.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 아예 전원을 꺼둘 생각으로 핸드폰 버튼을 조작하는 사이, 벨 소리가 끊겼다. 뒤이어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나 김명진이다. 전화 좀 받아라. 새끼야.]
김명진? 이 양반이 웬일인가. 무대에 올라갈 놈이 없으니 쇼에 나와 달라고 부탁하려는 전화일까. 아무렇지 않게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그 양반과 난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 형. 웬일이에요?”
[더럽게 바쁜 척하네, 새끼.]
전화를 받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렇다. 또 밤새 술을 퍼마신 건가.
“목소리는 또 왜 그래요? 또 밤새 술 퍼마신 거예요? 술 좀 작작 마셔요. 나이 생각해야죠. 이젠 젊지도 않은 양반이.”
[시끄럽게 짖어 대지 말고. 너 요즘 바쁘냐?]
“왜요? 무대 위에 올라갈 놈이 없어요? 그럼 이번 쇼에 내가 한번 나가 볼까요? 요새 밤일도 못 해서 돈도 없는데.”
[그런 거라면 대환영이다. 네가 무대에 서 준다고 하기만 하면 내 널 위해 특별히 핫핑크색 팬티 맞춰 놓으마. 엉덩이에 하트 무늬 구멍 뚫린 걸로.]
“기왕 하는 거 등에 날개도 달아 주지, 왜?”
번쩍번쩍 빛나는 핫핑크색 팬티에 천사 날개까지 단 내 모습을 상상하니 아주 미치겠다.
[너한테 아주 잘 어울리겠네. 머리에 왕관까지 씌워 주지. 미스 유니버스 수상자처럼 무대 위에서 행진을 해라, 행진을.]
“나야 뭐, 쌀자루를 입혀 놔도 모델감이지.”
아주 지랄 옆차기를 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잔뜩 쉰 음성으로 꿍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낄낄낄 웃으며 철제 카트를 밀었다. 수화기를 반대쪽 귀에 갖다 붙이며 늘 먹던 콘플레이크를 카트 안에 담았다. 마트에 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카트 안은 쓸데없는 뭔가로 가득 차 있었다.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뭐 하나 묻자. 너 요즘 윤영이랑 계속 만나고 있냐?]
윤영이, 하는 소리에 일회용 스틱 포장으로 된 곡물 라떼 상자를 집어 들던 손이 멈칫했다. 대답 없이 침묵을 지키자 눈치 빠른 게이 클럽 사장은 한숨을 푸우욱 내쉬었다.
[윤영이가 혼자서 클럽에 왔었다. 그것도 쇼가 열리던 목요일 밤에.]
어어,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스트립쇼가 열리는 목요일 밤에 그 녀석이 클럽에 찾아갔단다. 그것도 혼자서. 쇼가 열리는 날 밤, 혼자서 클럽에 간다는 건 현장에서 파트너를 구하겠다는 뜻이다.
헐벗은 미남들이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흔들면, 그걸 지켜보는 관객들도 댄서들의 섹시한 분위기에 한껏 취해 버리게 된다. 당연히 쇼가 끝나면 잔뜩 흥분한 사내들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파트너를 물색하고 서로 눈만 맞았다 하면 손잡고 나가기 바쁘다.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윤영이는 늑대 무리 속에 오도카니 선 양 한 마리였을 게 분명하다. 다들 아주 환장을 하고 찝쩍댔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뽀송뽀송한 양에게 껄떡대던 늑대들 중 한 마리였다.
“이상한 놈들한테 걸리진 않았어요?”
[안 그래도 이상한 새끼들한테 걸릴까 봐 내가 딱 붙잡아 놓고 술 사 줬다.]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김명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그가 일부러 내게 전화를 걸어 윤영이 얘기를 꺼낸 것부터가 이상했다.
[나 그날, 윤영이랑 잤다.]
그래. 내가 예상했던 말은 바로 이런 거였다. 본론부터 간단하게 말하는 방식은 마음에 든다. 하지만 말의 내용이 문제다.
[윤영이 놔줘라. 진지하게 사귈 거 아니면.]
“지금 대놓고 나랑 싸우자는 소리로 들리는 거 알아요?”
[유치하게 굴지 좀 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 하는지 알 거 아냐.]
“그래서 어른답게 무조건, 쿨하게 이해하라 이겁니까?”
[너 말이다. 지금 애인을 다른 놈한테 뺏겨서 질투하는 거냐? 아니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소유물이 다른 데로 가 버려서 화가 나는 거냐?]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합니까?”
[맞잖아. 너 윤영이를 좋아하기나 했냐? 너한테 있어서 윤영이란 존재는 그냥 어리고 귀여운 섹스파트너였을 뿐이잖아. 진짜 명품 하나 사질 못하고 짝퉁으로 치장하는 저질 인생, 그나마 있어 보이게 해 주는 값비싸 보이는 액세서리. 그뿐이었던 거잖아. 안 그래?]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시죠.”
[야, 임동추. 이 새끼야. 너 인마,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냐? 왜 이렇게 빈티가 나냐, 너?]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쉬어 터진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팠다. 구질구질하게, 빈티 나게, 이 말이 대못이 되어서 심장에 쑤셔 박혔다.
[똑바로 살아, 새끼야. 인생 자체가 구질구질하면 행실이라도 똑바로 하라고. 쥐뿔도 없는 주제에 허세에 가득 차서 똥폼 재고 다니는 거, 쪽팔리지도 않냐? 그 나이에?]
김명진은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독설을 묵묵히 들으며, 김명진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목이 졸린 김명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가 흙빛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 여전히 김명진은 지껄여 대고, 나는 인스턴트식품 가득 든 카트를 끌고 마트 한구석에서 이러고 있다.
[너, 클럽에 올 때마다 한껏 꾸미고 어깨에 잔뜩 힘주고 와서 애들 꼬시지? 애들이 다 네 겉모습에 껌뻑 속아서 네가 엄청 잘나가는 놈일 거라고 생각하는 줄 알지? 그런데 애들도 다 안다. 네가 입고 다니고 하고 다니는 짝퉁 명품들, 애들 다 알아봐. 걔들도 눈 있어. 겉모습만 봐줄 만하지 속은 텅 빈 쭉정이라고 다들 수군대면서 욕해.]
“알아요. 제가 나쁜 놈이란 거. 형 말대로 저, 인생 자체가 구질구질한 놈입니다. 인생 자체가 반짝반짝 빛나고 싶은데 쥐뿔도 없어서 금색 반짝이 잔뜩 달린 옷 좀 뒤집어썼습니다. 그게 그렇게 추했어요? 그게 그렇게 꼴 보기 싫었어요?”
그렇게나 귀 아프게 떠들어 대던 김명진이 침묵했다. 아마 인상 팍 구기고서 담배 하나를 빼물었을 것이다. 매캐한 담배 연기 냄새가 수화기 사이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윤영이한테는 조만간 만나서 확실하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끝낼게요. 안 그래도 이런 마음으로 윤영이를 계속 만나는 것도 몹쓸 짓 같아서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걔가 마음이 너무 여려서 상처 많이 받았을 테니까, 형이 앞으로 잘해 주세요. 앞으로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 주세요. 애정이 부족한 녀석이니까.”
[미안하다……. 내가 말이 좀 심했다.]
“아뇨. 다 옳은 말 하신 건데요, 뭘.”
[언제 술이나 한잔하러 와라. 내가 양주 한 병 뜯어 줄게.]
병 주고 약 주냐. 망할 새끼. 속으로 이를 뿌드득 갈면서 입으로는 “양주 좋죠. 조만간 쳐들어갈 테니 기다려요” 과장되게 킬킬 웃으며 지껄였다. 바보같이.
김명진, 이 빌어먹을 새끼. 돼지고기 수육을 해 먹어 버릴 새끼.
충고라는 건 누가 봐도 대단한 사람, 훌륭한 사람한테 들어도 기분 나쁜 거다. 그런데 자기가 뭐라고. 자기가 대체 뭐라고 함부로 지껄여, 지껄이길.
그래. 윤영이한테는 확실하게 잘못했다. 그건 인정한다. 가볍게 사귀다 가볍게 헤어질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걔는 나와 진지해지려고 했는데 내가 밀어낸 건 사실이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에게 상처를 준 건 맞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욕할 건 욕하자.
마트 어디론가 사라졌던 나민이가 나타났다. 손에 콩나물이며, 호박 같은 게 든 채소 봉지들을 가득 들고서.
“오늘은 채소가 싱싱하더라고요. 호박전이랑 콩나물 무침 해 드릴게요.”
“우와. 너,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굽고, 양념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되는데요.”
가식 없는 내 칭찬에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녀석의 뽀얀 뺨 위에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그 얼굴을 보니까 부글부글 끓어 넘치던 화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또 이런 것만 잔뜩 사셨네.”
녀석은 채소 봉지를 카트 안에 집어넣으려다, 안에 가득 찬 인스턴트식품들을 보면서 작게 고시랑댔다.
“이런 것 좀 그만 사 드시고 직접 만들어 드세요. 뭐 좋은 거라고 이런 걸 자꾸 드세요.”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나민이는 카트 안에 들어 있던 즉석 수프며, 즉석 카레, 짜장 같은 것들을 전부 빼냈다.
부부가 함께 마트에 온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옆에 붙어서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잔소리 늘어놓는 것도 귀여워 죽겠다.
“고기 살까? 오늘 고기나 구워 먹자. 슬슬 배 속에 기름칠 좀 할 때가 되지 않았냐.”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기 코너로 카트를 밀었다.
“선생님, 우리 그냥 삼겹살이나 구워 먹어요.”
한우 코너 앞에서 알짱대며 고민하는 내가 신경이 쓰였던지 나민이가 돼지고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돼지고기 가격을 보고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요즘엔 돼지고깃값도 만만치 않다. 돈 없는 사람들은 닭다리가 뜯어라 이거다. 닭 한 마리 값을 그나마 싸게 치니까.
“고기 드시고 싶으면 닭 한 마리 사서 닭볶음탕이나 만들어 먹어요, 선생님.”
옆에 선 녀석의 생각도 그러했다. 재빨리 머릿속에서 계산기 두드려 본 뒤에 돼지고기, 소고기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닭으로 결정을 본 것이다.
“그냥 소고기 먹자. 갑자기 한우가 미치도록 먹고 싶네.”
나는 간당간당한 생활비 걱정은 잠시 머릿속에 접어 두기로 했다. 이틀 전인가. 나민이와 함께 뭘 만들어 먹을까 냉장고를 뒤지다가 꽁꽁 언 소고기 덩어리를 발견했다. 나민이는 그걸 녹여서 떡국을 만들어 주었다. 떡이며, 고기며, 건더기며 내 몫의 그릇에 거의 다 퍼 주고는 자기는 허연 국물만 가득한 걸 퍼먹던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보다 못해 “난 물속에 잠수한 고기는 별로야” 하면서 내 그릇 속에 있던 고기 살점들을 전부 퍼 주었다. 물속에 잠수했던 거고, 까맣게 태워 먹은 거고 소고기라면 환장을 하는 주제에. 그때 나민이는 고맙다고 배시시 웃으며 고기 살점들을 참 맛있게도 오물오물 씹어 먹었었다.
“소고기 싫어하진 않지?”
“저 싫어하는 거 별로 없어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나민이는 카트 손잡이를 붙잡고 내 뒤에 섰다.
“남자 둘이서 배 터지게 구워 먹으려고 하거든요. 알아서 담아 주세요.”
“이 정도면 두 분이서 충분히 드실 거예요.”
정육 코너 점원이 가격표를 붙인 봉지를 내밀었다. 겨우 이게 몇만 원어치다. 남자 둘이서 한자리에 앉아 쓱싹 해치울 게 분명한 이 덩어리 하나가. 고기 봉지를 받아 들고 속으로는 피눈물을 줄줄 흘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맛있겠다, 그렇지?” 하면서.
그래. 김명진의 말대로 난 인생 자체가 구질구질한데 똥폼만 재고 다닌다. 이 나이에 허세에 가득 차서 겉으로는 있는 척, 여유로운 척, 그러고 다닌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비참해서 어찌 사나. 겉모습이라도 반드르르해야 그나마 사람들이 붙지. 인생 자체도 구질구질, 겉모습도 빈티가 뚝뚝 흘러 봐라. 누가 내 옆에 오려고 하겠는가 말이다.
“마트에 누군가랑 같이 와서 오늘은 뭘 해 먹을까 의논하고 그러는 거 되게 부러웠었어요.”
“그것도 여자 친구나 부인이랑 같이 와서 장을 봐야 재미있는 거지.”
“전 선생님이랑 장 보는 것도 재밌어요. 되게 좋다, 이런 거.”
좋다는 말이 내게 향한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철이 빨리 들어서 귀염성 하나 없던 애늙은이였건만, 어느 정도 친해지니까 이젠 이런 모습도 보인다. 그런 녀석이 귀여웠다.
이대로 계속 같이 살자고 해 볼까 싶기도 했다. 생활비도 줄이고, 식비도 줄일 겸. 물론 지금이야 생활비고, 식비고, 다 내가 부담하고 있지만 함께 살게 되면 반반씩 부담을 할 수 있을 테고.
게다가 이 녀석이 요리를 참 잘한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 버릇해서 집안일도 알아서 잘한다. 녀석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집에 머리칼 한 올 떨어진 걸 본 적이 없었다. 밥통에는 늘 따뜻한 밥이 있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찌개나 국이 든 냄비가 놓여 있고.
그런 게 좋았다. 집에 누가 있다는 거.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진다는 거. 밥상머리에 앉아 같이 밥 먹을 상대가 있다는 거. 그래서 나는 요즘 행복했다. 실타래처럼 엉킨 일들 중,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게 없지만 적어도 내 집에서는 늘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남자들이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는 거구나, 싶다.
나민이 아버지도 아들이 어른과 함께 산다고 하면 반대하진 않으실 테고. 문제는 내 성적 취향인데. 한나민이 완전히 내 입맛에 맞는 보송보송한 애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 붙어서 따라오던 나민이가 어디로 사라졌는가 싶었더니, 주류 코너 끝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바라보고 있는 건 늘씬하게 잘빠진 도우미 아가씨가 신상품 과자를 홍보하며 시식하게 해 주는 부스였다.
“왜? 과자 사 줄까?”
가까이 다가가서 묻자 녀석이 픽 웃었다.
“됐어요. 제가 뭐 애인가요.”
“그런데 왜 저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 도우미 누나가 예뻐서?”
“아니에요, 그런 거. 저도 옛날에 저 애처럼 엄마한테 과자 사 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서요.”
시식 코너 앞에서 과자 사 달라고 엄마한테 조르는 아이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렸을 때 매번 가게에 갈 때마다 사 달라고 졸랐었는데 절대로 안 사 줬어요. 우리 집이 많이 가난했었거든요. 어느 날은 과자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서 가게 앞에서 드러누워서 막 울어 봤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아예 저를 놔두고 가 버리더라고요. 그때 정말 얼마나 서러웠는지 몰라요.”
“나는 어렸을 때에도 부모님한테 뭔가를 사 달라고 해 본 적이 없어.”
“철이 빨리 드셨나 봐요.”
“그렇기도 했고. 사 달라고 조를 부모가 없었으니까.”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다. 나민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괜한 말을 꺼냈구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 가득 담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을 거다.
“아버지란 인간이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 엄마는 어린 나를 버려두고 집을 나갔지. 내가 너무 어릴 때라 엄마 얼굴은 기억도 안 나. 엄마 사진은 아버지가 몽땅 불태워 버렸고. 아버지는 엄마가 집 나가고 나서 밖으로만 나돌아 다녀서 동네 아줌마가 날 데려다가 돌봐 주셨어. 엄마랑 언니, 동생 하면서 지냈던 아줌마였거든.”
“죄송해요.”
“네가 왜 미안해하는데?”
“저 때문에 괜히…….”
머뭇대며 말꼬리를 흐리는 녀석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과자 시식 코너로 다가가 과자 상자를 번쩍 들었다. 도우미 아가씨가 서비스라고 초코 과자 두어 개를 덤으로 줬다. 엄마한테 과자를 사 달라고 조르던 꼬맹이가 눈물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과자를 사고, 덤까지 받은 내가 부러운 모양이다.
나는 덤으로 받은 초코 과자 하나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과자를 냉큼 받아 든 아이는 “엄마아!” 하면서 신이 나서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나를 가리켜 보였다. ‘저 아저씨가 줬어!’ 하며 자랑하는 듯하다. 애 엄마가 고맙다며 내게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선생님, 참 귀여우세요.”
나민이 녀석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어?”
“선생님은 늘 멋있으신데 가끔씩 귀엽기도 하세요.”
나는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얘는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하는 거다. 녀석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녀석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잘생겼다, 남자답다는 말도 아니고 귀엽다는 말을 들은 건데도.
난 어렸을 때부터 귀엽다는 말 한 번 듣지 못하고 자랐다. 다른 애들과는 다른 가정 환경 탓에 철이 빨리 든 나는 도무지 귀엽지가 않은 애였다. 누군들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귀여운 애가 되고 싶지 않았겠는가. 나도 귀여운 애이고 싶었다. 나도 어른들한테 마음껏 애교를 피우며 예쁨받는 애이고 싶었다.
“선생님한테 귀엽다니, 말하는 것 좀 봐라. 그러는 네가 훨씬 더 귀엽거든.”
녀석의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난 하하하, 웃었다. 녀석도 웃었다. 자알 하는 짓이다. 뭐 하는 짓이냐, 이게. 대낮에 마트 한복판에서 ‘너 귀여워’, ‘너도 귀엽거든?’ 이러고서 하하 호호, 낄낄대고 있으니.
이 꼴을 노금영이 봤으면 몇 년 내내 나를 놀려 먹을 테지. 똥수 놈이 봤다면 두 눈 치켜뜨고서 ‘그 새끼는 또 누구예요오오!’ 이러면서 길길이 날뛸 테고.
동네 마트라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잔뜩 긴장을 해야 하는데 녀석의 머리에서 손을 떼기가 싫다. 분명 우리 집에서 똑같은 샴푸를 쓰는데 어쩌면 이 녀석 머리카락은 이렇게 부드러울까. 윤영이 머리카락도 보들보들해서 기분 좋았는데 얘 머리카락 느낌은 정말 최고다.
“놀고들 있다. 놀고들 있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금영과 똥수 생각을 떠올려서인가. 방금 전 소름 끼치는 환청이 들린 것 같은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벌건 대낮에.”
허억! 또다. 또 환청이 들렸다. 그것도 똥수 놈 목소리와 비슷한 환청이.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건 환청이 아니었다. 놈이 있었다. 우리들의 등 뒤에. 한똥수, 그 자식이 우리들 뒤에 서서 음산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환청 따위도 환각 따위도 아닌 현실이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등 뒤에 서 있던 똥수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었다.
흐어억! 소리가 절로 나왔다. 똥수 놈은 질투로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흘겨보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놈은 손에 시루떡 하나를 통째로 들고서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팥고물을 줄줄 흘리면서.
“너, 너, 또, 똥수. 이 자식. 여긴 웬일이야?”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놈이 마트에 장 보러 올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좋아요? 아주 침까지 잴잴 흘리면서 좋아하네.”
놈은 시루떡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눈을 돌려 나민이를 흘겨보았다. 갑작스러운 놈의 등장에 나민이는 딱딱하게 굳어서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너, 인마. 형한테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침을 잴잴 흘린다니. 내게 언제 침을 흘렸다고.”
“이 새끼는 또 누구예요?”
“네놈이 얘가 누군지 알아서 뭐 하게?”
“그때 봤던 그 계집애 같은 새끼는 어쩌고 이번엔 또 어디서 표백한 멸치 대가리 같은 새끼를 데려와선. 허어어, 이것 봐라? 1등급 한우?”
놈은 팥고물 잔뜩 묻은 손으로 카트 안에 있는 식료품들을 휘휘 저으며 빈정댔다.
“그만해, 자식아.”
“형,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피 같은 고기를 주물럭거리는 놈의 등짝을 후려치자, 놈이 울분에 차서 꽥꽥댔다. 입에 물고 있던 팥고물을 몽땅 내 얼굴에 튀기면서.
“내가 집에 놀러 가면 누룽지나 끓여 주던 사람이, 이 멸치 대가리 같은 놈한테는 1등급 한우도 사서 구워 주고 그래요? 형 진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아오, 이 자식! 일단 밖으로 끌고 나가서 두들겨 패든, 욕을 하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잡아끈 때였다.
“전 한나민이라고 합니다. 표백한 멸치 대가리가 아니라요.”
나민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똥수 놈이 손으로 주물러 터뜨리고 있던 고기 봉지를 빼앗아 들기까지 하고서.
“동추 선생님 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내게 멱살을 붙잡힌 똥수 놈이 눈을 부라리며 나민이를, 그리고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잘 알겠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미성년자? 형, 미성년자랑 사귀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형, 미쳤어요?”
놈이 입 밖으로 꺼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
“네놈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그리고 얘, 법적 성인이야. 사정이 있어서 잠깐 같이 살고 있는 거야.”
“가, 같이 살아요? 도, 동거를 하고 있다고요? 우와, 형 진짜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일단 나가자. 나가서 얘기하자, 좀!”
시루떡을 손에 든 곰 새끼 팔뚝을 끌고서 질질 잡아끌었다. 카트에 가득 든 물건들을 계산대 위에 쌓아 놓고 초조하게 계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지막 채소 봉지 하나를 바코드 기계로 꾸욱 찍는 것으로 계산을 끝낸 줄 알았더니, 점원이 똥수 놈이 들고 있는 작은 봉지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시루떡이 든 떡 봉지였다.
“그 떡도 함께 계산하시는 거죠?”
네에! 점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냉큼 계산대 위에 먹던 떡 봉지를 올려놓는 똥수였다.
내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민이는 착실하게 물건들을 비닐봉지에 집어넣었다. 그걸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똥수 놈은 계산된 자기 떡 봉지만 홀랑 챙겼다. 그것뿐인가. 놈은 나민이가 봉지에 집어넣으려는 주스 병도 낚아챘다. 그러고는 얼른 마개를 따서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시는 거다.
“왜 남의 걸 함부로 먹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짜증 낸 적 없던 나민이가 인상을 팍 썼다.
“동추 형이 나한테 남인 줄 아냐? 동추 형이랑 나는 엄청 엄청 어어엄청! 나게 친한 사이란 말이다. 멸치 대가리야.”
“멸치 대가리가 아니라 한나민이에요, 한나민.”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어디서 감히 눈을 부라려? 너 몇 살이야?”
주스 병 하나를 더 끄집어내 마개를 따는 동수 놈의 뒤통수를 짜악, 후려쳤다.
“왜 자꾸 남의 걸 먹어? 먹으려면 돈 내, 새끼야.”
“얘한테는 1등급 한우도 사 주면서 나한테는 주스 두 병도 못 사 줘요? 우와, 우와아. 진짜 너무하다. 서러워 못 살겠다,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덩치도 큰 놈이 옆에서 계속 쫑알거리니 귀가 아파 죽겠다. 나민이가 봉지 두 개를 전부 들고 있기에 하나를 받아 들려고 했다. 그랬더니 녀석은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됐다면서 봉지 든 양손을 뒤로 뺐다.
“무겁지 않긴. 충분히 무거워 보이는구먼. 팔목도 가는 애가 괜히 무리하지 말고 이리 줘.”
“사내새끼가 계집애같이 빌빌대기는!”
무슨 말만 하면 이 지랄이다. 나민이가 언제 약한 척을 했냐. 손에 든 게 무겁다고 엄살을 피웠냐. 똥수 놈이 나민이의 손에서 봉지 두 개를 홱 낚아챘다.
“그래, 너 힘 한번 세다. 더럽게 힘세서 좋겠다. 멋지다, 한똥수.”
빈정대는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는지 동수 놈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봤냐? 멸치 대가리. 동추 형이 나보고 힘이 세서 멋지다고 하잖아. 이렇게 말하듯 거만하게 고개 빳빳이 들고서 나민이를 쳐다봤다. 동수 놈을 쳐다보는 나민이의 얼굴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을까, 하면서 진심으로 동정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자, 이제 가죠.”
“가긴 어딜 가?”
“형 집으로 가서 고기 구워 먹어야죠. 오늘 저녁에 고기 구워 먹을 거 아니에요?”
“집 앞까지만 짐 들어 주고 넌 집에 가. 너까지 먹을 고기 없어.”
“으아악! 동추 혀엉!”
“옆에서 소리 좀 지르지 마. 귀청 떨어지겠다, 자식아!”
“이러지 말아요. 진짜 이러는 거 아니잖아요. 내가 그동안 형한테 갖다 바친 고기만 해도 몇 근인데. 이럴 거면 그동안 먹은 고기 다 토해 내요. 반찬이랑 김치랑 전부 내놔요. 울 아부지 몰래 훔쳐 왔던 치킨이랑 그때 먹었던 장어, 그것도 토해요. 얼른.”
“너 이런 식으로 더티하게 굴기냐?”
“더티하게 나온 게 누군데 그래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동안 그렇게 얻어먹고 형이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요. 내가 그동안 말 안 하고 꾹 참았는데요. 형은 정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진짜 더럽게 서러웠나 보다. 동수 놈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여덟 살이나 어린 놈이 양 볼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도 전혀 귀엽지 않다는 게 놀랍다. 하는 짓은 딱 애새끼인데 커도 너무 컸다. 얼굴이랑 덩치만 보면 누가 이 녀석을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온 스무 살 꽃띠 청년이라고 볼까.
“울면 죽인다.”
“안 울어요. 핏덩이 같은 애새끼 앞에서 내가 왜 울어요?”
“야. 쟤, 저래 봬도 성인이거든? 애 아니거든?”
“그래도 저 녀석은 아직 입시 공부나 하는 놈이잖아요. 난 어엿한 사회인이고.”
어엿한 사회인? 웃기고 자빠졌다.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놈이 무슨. 그래도 아버지 가게긴 하지만 배달 일도 열심히 하고 있고, 간간이 밤일도 하면서 자기 용돈은 벌어 쓰고 있으니 일단은 사회인이라고 해 주마.
“그래. 집에 가서 고기 구워 먹자. 밥이랑 같이 먹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동수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놈은 온 이를 드러내고서 히히히, 이상한 소리를 내 웃었다.
일전에 육체적,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탈이 나서 집 안에 처박혀 있었을 때, 집까지 찾아와 준 건 그래도 똥수 놈밖에 없었다. 나 먹으라고 그 추운 날 수산 시장까지 가서 장어를 사다가 구워 주고, 반찬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 안 그래도 그때 일이 마음에 걸려 계속 언제 한번 녀석한테 밥이나 사야 할 텐데, 이러던 참이었다.
“나민아. 괜찮지?”
“아, 네에. 저야 뭐…….”
우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던 나민이가 말끝을 흐리며 동수 놈 뒤통수를 흘끔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동수 놈을 볼 때 거의 대부분 저런 식으로 올려다본다. 이 녀석처럼 키가 큰 데다 덩치까지 좋은 놈은 흔치 않으니까.
놈의 점퍼 주머니에 떡 봉지가 비어져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멋대로 봉지를 끄집어내 시루떡을 꺼냈다. 뒤따라오는 나민이에게 떡을 내밀자 녀석은 고개를 부웅부웅 저었다. “전 떡 별로 안 좋아해요” 하면서.
“이상한 놈이네. 이 맛있는 걸 왜 싫어해?”
건수 하나 잡을 기회를 놓칠 동수가 아니었다.
“그럼 우리끼리만 먹어요, 동추 혀엉.”
녀석이 동추 혀엉, 이 부분에 콧소리를 넣어서 발음하며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잘라서 먹여 달라는 건가. 나는 일부러 내가 먹던 부분을 잘라 놈의 입 안에 처넣어 주었다. 남이 먹던 걸 줬는데도 쩝쩝거리면서 잘도 받아먹는다.
“형, 근데 용천 도사님이 꼭 한 번 형을 데리고 오라고 하시던데요.”
“용천 도사?”
“그때 뵈었던 어르신요. 형한테 귀신이 많이 붙어 있다고, 귀신 떼 주는 부적을 써 주시겠대요. 귀신이 붙어 있어서 형한테 계속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 하시면서요.”
사이비 도사가 돈 받아 처먹으려고 헛짓을 하는 거라고 대놓고 빈정거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영감은 가짜가 아니었다. 돈에 미친 사기꾼도 아니었다. 그 영감은 ‘진짜배기’였다. 동수 놈의 말대로. 하지만 진짜는 진짜인데 그 영감한테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그때, 우리에게 귀면에 대한 정보를 준 영감은 우리들이 밤일 두 번 하는 정도의 돈을 받아 챙겼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끼리 백날 머리 맞대고 있어 봤자 얻을 수 없는 귀한 정보이긴 했다. 그래도 비싸. 비싸도 너무 비싸다.
박천수 말을 들어 보니 부잣집 사모님들이 영감한테 지폐 다발 싸 들고 점을 보러 간다고 하더라. 그것도 몇 달 전에 예약을 해 놓지 않으면 영감을 만나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도사라고 하더라마는.
<내가 돈을 가져가니까 내 앞에서 지폐를 하나하나 세면서 내가 그래도 너희들한테는 많이 DC 해 준 거야, 이러더라니까? 그런데 그 영감,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더라. 외제 차를 몰고 온 사모님들이 영감한테 점 좀 보겠다고 몇 시간씩을 기다리더라고.>
영감에게 직접 돈을 가져다주었던 박천수가 하는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빽가도 인정하더라. 그 영감 진짜 용하다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토 달기 좋아하던 노금영도 노인의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옆에 동수 놈이 있었다면 그거 봐요, 어르신은 진짜라니까요 하면서 잘난 척했을 게 틀림없었다.
“부적 하나 써 주고 또 얼마나 받아 챙길 생각이래?”
“글쎄요. 저도 모르죠. 얼마나 받으실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부적 하나 써 달라고 돈을 쌓아 두고 애원을 하는데도 잘 안 써 주신대요.”
“어째서? 그렇게 돈 좋아하는 영감이?”
“아무한테나 부적을 써 주면 부적의 효험이 떨어진다나 뭐라나. 그래서 진짜로 부적이 필요한 사람한테만 부적을 써 주신다네요.”
진짜로 부적이 필요한 사람. 그게 나란 말이냐.
영감은 그랬다. 귀신이 나한테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고.
<가만 보니 네놈 게 아니라 네놈 아비한테 붙어 있던 놈들이구먼? 자기들을 그렇게 만든 네놈 아비가 죽어 버렸으니 아들인 네놈한테 철썩 붙어 있는 게로구나.>
나는 지독하게도 평범한 놈이라 귀신이고 영이고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날, 영감이 내 머리 위에서 소매 단을 펄럭이며 뭔가를 쫓는 시늉을 했던 날 밤 이후. 왠지 늘 어깨를 짓누르던 통증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머리가 맑아졌고. 며칠 못 가 다시 어깨가 무거워지기 시작했지만.
귀신은 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그것들이랑 싸워 봐서 안다.
아버지에게 붙어 있던 귀신들이 내게 들러붙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아버지가 직접 그 사람들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저지른 일로 인해 그 사람들이 죽었다. 아버지는 인간 망종이었다. 짐승보다 못한 악귀 같은 인간이었다. 나는 그 짐승 같은 새끼의 자식이었고.
내가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나는 죄인이었다. 개쌍놈 새끼의 자식. 그게 내 이름 앞에 붙는 호칭이었다.
이게 무슨 연좌제인가.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닌데 왜 그 자식한테 죄인의 낙인을 찍느냐. 자식한테는 죄가 없는데. 내가 당한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기가 막혀 하겠지만 내가 나고 자란 마을에선 그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던 곳이었다, 그곳은.
“그런데 왜 형한테는 귀신이 그렇게 많이 들러붙어 있대요? 혹시 형, 전생에 오랑캐였던 거 아니에요?”
“이 새끼가 말을 해도 꼭. 오랑캐가 뭐냐, 오랑캐가.”
천연덕스럽게 오랑캐 운운하는 동수 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사정없이 찔렀다. 유난히 간지럼을 잘 타는 녀석이 끼햐하하하, 요상한 소리로 웃으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양손에 봉지 하나씩 들고 대낮에 사람 다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몸 배배 꼬며 웃는 190의 덩치라니. 그 꼴 보기 무서워서라도 다시는 옆구리를 찌르거나 하지 말아야겠다.
“엇, 그러고 보니 휴대용 버너 가스를 안 사 왔다.”
집 앞에 와서야 나는 가장 중요한 걸 사 오지 않았다는 걸 깜빡했다. 고기는 자고로 휴대용 버너에 불판 올려놓고 바로바로 구워 먹어야 제맛인데. 다른 고기도 아니고 1등급 한우를 프라이팬에 구워서 먹을 순 없다.
“제가 사 올게요.”
눈치 빠른 나민이가 자기가 사 오겠다고 나섰다.
“그래 줄래? 여기 돈.”
“아뇨. 저도 돈 있어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내밀었더니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홱 돌아서서 왔던 길을 뛰어갔다. 종종종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귀여워라. 머리카락 살랑살랑 흔들면서 뛰는 저 모습 좀 봐라.
“쟤랑 진짜 사귀는 거 아니죠?”
그 꼴을 가만 지켜만 보고 있을 동수 놈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녀석이 불쑥 퉁명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아니라니까. 어떤 몹쓸 새끼들이 쟤네 집까지 쳐들어와서 미친 짓을 해 대서 내가 잠깐 데리고 있는 거야.”
“형이 왜 데리고 있어요? 쟤네 부모님은 어쩌고요.”
“사정이 있어서 혼자 사는 애야. 너도 알다시피 요즘 양아치 애들, 진짜 막 나가잖냐. 혼자 집에 뒀다간 그 새끼들이 쟤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래서 언제까지 형이 쟬 데리고 있을 건데요?”
“어떤 놈이 그 몹쓸 새끼들을 풍기 문란 사이트에 신고한 모양이더라고. 곧 그 사이트에서 사람이 나와서 걔들을 손봐 주지 않겠냐? 그럼 놈들도 좀 얌전해질 테고. 그때 봐서 집으로 돌려보내야지. 지금은 걱정이 돼서 집에 보낼 수가 없어.”
말없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형, 쟤 좋아하죠?”
동수 놈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날 흘겨보면서 한다는 말이 이랬다. 난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쯤 되니 짜증이 나려고 한다. 그런 거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도 이젠 지친다.
“야, 한동수. 나 진짜 화낸다.”
“아닌 척하지 말아요. 쟤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 내 눈에는 다 보이니까. 형 말이에요. 아주 그냥 예뻐 죽겠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쟬 쳐다봐요. 그때 만났던 윤영이인가 하는 계집애 같은 놈, 걔도 그렇게 흐물흐물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서. 형, 저 멸치 대가리한테 푹 빠졌죠?”
“그래.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성격도 좋아서 예쁘다. 귀여워 죽겠다. 그런데 뭐? 내가 쟤한테 푹 빠져? 쟬 흐물흐물한 눈으로 쳐다봐? 애가 아무리 귀여워도 내가 저런 젖비린내 나는 애한테 푹 빠져서 해롱거릴 놈으로 보이냐? 이게 날 뭐로 보고!”
“딱 보니까 형 취향이구먼요, 뭘.”
물론 뭐, 취향이긴 하다.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취향에 딱 맞으니까 내가 클럽에서 나민이한테 껄떡댔던 거겠지.
“난 애는 안 건드린다.”
“쟤, 성인이라면서요?”
“성인이라도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애지.”
“윤영이, 걔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애던데. 나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예요.”
“하여튼 말이 그렇다는 거야. 자꾸 토 달지 마라. 그리고 넌 인마, 아가라기엔 너무 크고 징그럽다.”
“너무하네. 진짜.”
동수가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 툴툴거렸다.
“근데 멸치 대가리도 형 좋아하는 거 같던데.”
동수 놈이 구시렁대며 덧붙인 말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나민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안다. 하지만 그건 사랑 같은 게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단순한 호감일 거야. 나는 녀석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테니까. 그러니까 나민이 앞에서는 사귄다, 좋아한다, 이런 말 좀 하지 마라. 나는 더러워도 녀석은 깨끗하고 맑아. 그래서 녀석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형이 왜 더러워요. 그렇게 말하지 좀 말아요.”
뒤에서 작게 중얼대며 동수 놈은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서 대문을 발로 차 열었다. 동네 똥개가 목에 피거품이 일도록 짖어 댔다. 동수 놈도 짖기 시작했다. 컹컹컹컹! 똥개가 우는 방향을 쳐다보면서 사납게도 짖어 댔다. 누가 누가 더 사납게 짖어 대나 시합이라도 하듯이.
저런 미친…….
동수 놈이 미친 짓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건만. 저놈이 미친 짓을 할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잠시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옷깃으로 얼굴을 가렸다. 동네 사람들이 허공에 대고 짖어 대는 저 미친놈이 내 지인이란 걸 알아볼까 봐.
*
*
한 번씩 그럴 때가 있다. 잘 자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눈이 뜨일 때가. 이번에 내가 눈을 잡아 뜬 것은 온몸을 감싸는 한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뱀 같은 것이 목 위로 지나가는 것 같은 한기였다. 깨긴 했지만 완전히 잠에서 깬 상태는 아니라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손으로 주위를 더듬었다. 이불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손끝에 이불의 폭신한 감촉이 아닌 물컹한 뭔가가 닿았다. 손끝에 닿는 이질적인 느낌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잡아 떴다.
그러고는 눈을 잡아 뜬 채로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눈앞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두 개의 눈알로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는 두 개의 눈알은 한 번도 끔뻑이지 않았다. 까만색 동공 주위의 흰자위가 어슴푸레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 나민이……?”
내 입에서 나민이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주위가 어두워서 날 바라보고 있는 형체가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데 머리로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자 나를 바라보던 놈은 두 개의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민이, 네가 이 밤중에 왜 이러고 있어?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뜨면서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나민이가 손으로 내 가슴을 짓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왜? 나민아, 나한테 뭐 할 얘기 있어?”
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녀석이 갑자기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순식간에 녀석의 매끈한 상반신이 눈앞에 드러났다.
“너 왜, 왜 이래? 나민아.”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더니 이번에는 녀석이 내 배 위에 터억 올라탔다. 양다리를 벌려 배 위에 올라타서는 손을 내 셔츠 안으로 슬슬 밀어 넣는 것이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손길에 온몸에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나민아. 자, 잠깐만.”
티셔츠 안으로 기어들어 온 손이 복부를 지나 가슴께를 넓게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끝에 긴장과 한기 탓에 빳빳하게 일어선 유두가 쓸려 나는 이를 악물어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너 취한 거지? 그렇지? 이러지 마라. 이러면 안 돼. 난 나민이 너랑……. 으윽.”
녀석의 손가락이 유두를 비틀었다. 나는 인상을 쓰며 소금 뿌린 새우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눈물이 찔끔 비어져 나온 내 눈가를 축축한 뭔가가 핥는 느낌이 들었다. 나민이의 혀였다. 녀석은 혀로 내 눈가를 핥고 콧날, 그리고 벌어진 내 윗입술·아랫입술, 턱선을 차례로 핥았다.
녀석의 몰캉한 입술은 내 입술에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녀석이 핥아 대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나민이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 야릇하게 빛났다. 나를 쳐다보는 두 눈과 날름대는 혀, 그리고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비쳐 은은한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몸. 군살이라곤 하나 없는 복부 양옆의 움푹 팬 선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까만 음영.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순식간에 배 속이 뜨거워졌다.
힘을 주어 밀쳐 내면 그만인 일이었다. 녀석의 가슴을 밀어내면서 거부하면 그만인 일. 하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내 배 위에 올라탄 녀석은 매력적이었다. 숨이 막히도록 관능적이었다.
그 나이 또래 애들다운 싱그러움과 풋풋함은 없지만 반듯반듯하게 잘생긴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섹시한 애였던가, 얘가.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나민이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또 얼굴을 핥으려는 거다. 나는 손으로 녀석의 턱을 밀었다.
“너 역시 취한 거 맞지? 아까 동수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시더니.”
얼마 안 되는 한우를 거의 다 처먹었던 동수 놈한테 한 소리 했더니, 놈은 퉁퉁 부은 얼굴로 나가서는 술을 사 들고 왔다. 소주, 맥주, 종류별로 쓸어 담아 와서는 씨이이익 웃는 놈이었다. 술 한잔 마시고 싶어도 애 앞에선 술 마시는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참자, 참아, 하면서 허벅지를 찌르며 참았건만.
그래도 사 온 술이니 맛있게 받아 마셨다. 사 온 걸 마다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되고. 언제나 그렇듯이 술에서 술로 이어지는 술판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어찌나 입에 짝짝 달라붙던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망할 동수 놈이 나민이한테도 술을 먹이려 했다는 거다.
<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술 마시는 게 뭐가 문제예요! 멸치 대가리! 마셔라! 설마 못 마시는 건 아니겠지?>
동수 놈의 도발에 발끈해서 나민이도 동수 놈이 주는 술을 홀랑 받아 마셨고.
결국 취한 거다. 취해서 이러는 거다.
녀석은 대답도 없이 혀로 내 손바닥을 날름날름 핥았다. 얼굴을 옆으로 돌려 내 손목을 쭈욱 핥아 내렸다.
“이러지 마, 나민아.”
“선생님은 제가 싫으세요?”
드디어 녀석이 말을 했다. 이것 봐라. 목소리가 팍 쉬어 있는 게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입에서 술 냄새도 풀풀 나고.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좋아하는 쪽에 가깝지만…….”
“제가 선생님을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이런 걸 바라고서 널 도와준 줄 알아?”
“알아요. 그런 마음으로 도와주신 게 아니란 거. 하지만 제가 뭐든지 해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혹시 제가 예쁘거나 귀엽지 않아서 싫으신 거예요?”
기가 막혀라. 얘가 대체 뭐라는 거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상반신을 잡아 일으켰다. 이번에도 녀석은 내 팔을 꾸욱 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이거 놔라. 너 이러다가 진짜 한 대 맞는다?”
“역시 선생님도 제가 싫으신 거죠?”
허허. 이젠 운다. 주정뱅이가 할 수 있는 짓은 아주 다 하는구나. “절 싫어하지 마세요” 하면서 눈물을 뚝뚝 쏟는다.
“다들 날 싫어해요. 아무도 날 좋아해 주지 않아.”
“싫어하지 않는다니까. 그런데 자꾸 이런 엉뚱한 짓을 하면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역시 싫어하시잖아요…….”
이 주정뱅이를 어찌해야 할까. 녀석은 아예 내 몸 위에 푸욱 널브러졌다.
“저요, 선생님. 외로워요. 너무 외로워요. 혼자서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살아왔는데 사실 힘들어요. 저 너무 힘들어요.”
중얼중얼대면서 남의 가슴팍 위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야밤에 이게 뭐 하는 짓일까. 나는 팍 구겨진 얼굴을 하고서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일단 우는 애 달래고 봐야겠다 싶어서였다.
“야, 한나민. 힘들면 주저앉아도 돼. 힘들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면 아무도 너 힘든 거 몰라. 한 번씩 힘들다고 끙끙 앓는 소리도 해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알아주지.”
나는 쫑알쫑알, 나오는 대로 떠벌렸다.
“내가 너만 할 때에는 주위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었어. 날 키워 준 새어머니는 시골에 계셨거든. 어머니가 자기 남동생 따라 서울 가라고 하시더라. 이런 시골구석에 있으면 성공 못 한다고. 그래서 삼촌 따라서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지. 삼촌은 일하러 다니느라 집에 제대로 들어온 적도 없었고. 나 혼자서 모든 걸 다 했어. 집안 살림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나민이 너처럼. 그래도 넌 참 대단해. 혼자 있다 보면 못된 친구들 만나서 엇나갈 만도 한데. 난 좀 방황했었거든. 그래도 좋은 대학 잘만 갔지만.”
나민이 녀석의 등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찬 바람 때문이다. 오래된 집이라 아무리 창문을 꼭꼭 닫아도 소용없다.
이제 잠들었나? 고개에 힘을 주어 가슴 위에 널브러진 녀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눈만 말똥말똥 뜨고서 날 바라봤다.
“선생님도 외로우셨어요?”
우느라 물방울 촉촉하게 맺힌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묻는다.
“나도 사람인데 안 외로웠겠냐?”
“선생님은 외로운 걸 어떻게 견디셨어요?”
“이미지를 바꿨어. 성격 밝고 쾌활한 녀석이 됐지. 사람은 말이다. 어둡고 칙칙한 사람한테는 다가가기도 싫은 법이야. 반짝반짝 빛이 나는 화려한 사람한테 끌리는 게 인간이다. 칙칙한 알맹이에 화려한 껍데기를 뒤집어썼더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더라.”
일정한 간격을 두어 나민이 녀석의 등을 토닥이다 보니 내가 더 졸리다. 나는 눈을 느릿느릿 감았다 뜨면서 입만 열어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그런데 하나 안 좋은 게, 본성은 바뀌질 않는 거라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믿지를 못한다는 거야. 어차피 저 사람들은 내 거짓된 모습에 반한 거겠지. 내 본모습을 알게 되면 진저리를 치며 달아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누군가를 진지하게 좋아하질 못해.”
하품이 찌익 비어져 나왔다. 눈꺼풀에 본드를 붙여 놓은 것처럼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난 살아오면서 딱 한 번 사랑을 했는데, 아마 두 번 다시 그때 같은 사랑은 못 할 거야.”
내가 왜 술 취한 애한테 이런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녀석은 진지하게 듣고 있지도 않을 텐데. 나도 취하긴 했나 보다. 그놈의 술이 뭔지. 나는 눈을 뜰 노력도 하지 않고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이제 이런 짓 하지 마라.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밥해 주고, 집안일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금까지 은혜는 갚았으니까. 그리고 너, 내 취향이거든. 위험해, 이런 거.”
“그럼 제가 건드리는 거는 괜찮아요?”
“헛소리하지 말고 자라, 자.”
나는 이불을 끌어다 녀석의 몸 위에 덮었다.
바깥에서 드르렁드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동수 놈 코 고는 소리다. 동수 놈이 거실에서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데 남의 방에 살금살금 들어와서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술이 무섭긴 무섭구나. 남의 몸 위에서 쭈욱 뻗은 녀석이 자세가 불편한지, 꼬물꼬물 기어 내려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더듬어 녀석이 움직이느라 끌려 내려간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 덮었다.
“선생님.”
옆에 착 달라붙은 녀석이 조용히 날 불렀다.
“전 선생님이 좋아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응, 그래그래. 나 좋아해 줘서 고맙다. 말을 할 기력도 없어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런데 좋은 만큼 미워요.”
녀석이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뺨에 녀석의 보드라운 머리칼이 닿았다.
“그냥 이대로 선생님을 죽여 버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그럼 더 이상 쓸데없는 감정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혼곤한 잠에 빠져들어 녀석이 속삭이는 소리가 웅얼대는 소리로만 들렸다. 수마의 늪에 한없이 빠져들면서도 나는 손으로 나민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웅얼대는 목소리가 한없이 침울하게 들려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 녀석이 잠이 들 것 같아서였다. 녀석의 얕은 한숨이 귓불의 솜털을 간질였다. 필사적으로 버티던 나를 완전히 잠 속에 빠져들게 한 달콤한 숨결이었다.
*
*
역시 꿈이었나.
창문에선 아침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침대 위에는 나뿐이었다. 나 혼자 침대 위에서 대각선으로 뻗어 자고 있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돌돌 감고서.
그런데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는 게 이상했다. 내 얼굴이며, 턱을 핥던 보드랍고 몰캉한 혀의 감촉이나, 내 피부를 쓰다듬던 차가운 손길, 술 냄새 나던 숨결, 귓가에 울리던 목소리까지 전부 확실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젯밤 나민이가 내 방에 몰래 들어와 내 위에 올라탔다. 내 몸을 여기저기 막 건드리고 핥았다. 그러다가 내 위에 널브러져서는 막 울기도 했지. 꿈이면 좋은 거고 꿈이 아니면 뭐 어떤가. 그 이상 이상한 짓은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습관처럼 이불을 걷어 올려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하반신이 딱딱했다. 자고 일어나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퉁퉁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깜빡이면서 나는 딱딱한 하반신을 손으로 슬슬 문질렀다. 뭘 어떻게 해 보려는 게 아니라 집에 있으면 한 번씩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어 벅벅 긁듯이 그냥 손만 느릿느릿 움직였다. 추리닝 위로 만지다 보니 어쩐지 거기를 벅벅 긁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추리닝 속으로 막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누가 문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저 나민이에요. 들어가도 돼요?”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녀석이 방 안으로 머뭇대며 들어왔다. 나가려는 모양인지 코트까지 챙겨 입고 있다.
“으응, 나민아.”
나는 마치 지금에야 겨우 눈을 뜬 것처럼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침대 앞까지 다가오지도 못하고서 녀석은 문 앞에 서서는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코트 깃만 만지작댔다. 어색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저기, 나민아…….”
“저, 선생님.”
동시에 녀석도 나도 입을 열어 서로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아냐. 별말 아니었어. 추우니까 단단히 껴입고 가라고 말하려던 거였어. 너는?”
녀석은 아, 저기, 저는…… 입술을 열어 말하다가 다시 입을 닫고 저기요, 선생님…… 입을 열었다가 또 닫고를 반복했다. 보는 내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저…… 집으로 돌아갈게요.”
결국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한마디였다. 머뭇대는 꼴을 보고 예상은 했었다.
“아직 위험해서 안 돼. 너 혼자 집에 있다가 그 자식들한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래도 언제까지 이러고 지낼 순 없을 것 같아서요. 집도 너무 오래 비워 두면 안 되고…….”
어젯밤 일 때문이냐?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마. 술에 취해서 그럴 수도 있지, 뭘.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짐 가지고 나갈게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녀석이 90도 각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고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녀석은 나를 한 번 흘긋 쳐다봤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이러고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 거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 네 생각이 그러면 별수 없지. 나도 그동안 고마웠다. 이런 식의 말이라도 한마디 던져 줘야 할 텐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민이 녀석의 입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나온 순간,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에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면서 아무 생각 없이 다리 사이를 문지르다가 깨달았다. 나, 이젠 더 이상 못 참을지도 모르겠구나. 여기까지가 한계구나.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갑자기 미쳐서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모르겠구나.
어젯밤에야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었으니 술에 취해 엉겨 붙는 애한테 손대지 않는 게 가능했던 거지. 만약 내가 어제 이성을 잃고 애를 덮쳐누르기라도 했어 봐라.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머리칼을 쥐어뜯으면서 피를 토할 정도로 괴로워했을 테지.
차라리 내보내자. 우리 집에 머무는 이상 나민이 녀석도 계속 내 눈치를 볼 테고. 그리고 나도 내 자신을 못 믿겠고.
그러려면 일단은 그 자식들이 나민이네 집으로 쳐들어가서 깽판 부리지 못하게 수를 써야 할 텐데.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동수 놈은 아직도 거실을 차지한 채 드릉드릉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담요를 둘둘 감고서 거실 한구석에 처박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놈의 뺨을 찰싹찰싹 쳤다.
“야, 한똥수.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다. 일어나, 인마.”
“어으으, 엄마. 5분만. 5분만 더 잘게.”
놈은 잠꼬대를 하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누가 네놈 엄마야! 일어나!”
나는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번데기처럼 몸을 둥글게 만 동수 놈의 등짝을 후려쳤다. 짜아악, 찰진 소리와 함께 녀석이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지금 형이 때린 거예요?”
“그래.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기에 내가 때렸다.”
“아우우, 뭐예요. 왜 아침부터 깨워요? 좀 더 자도 되는데.”
“아오, 술 냄새. 코가 썩겠다, 짜식아.”
“술 냄새 나는 건 형도 마찬가지거든요.”
기껏 깨워 놨더니 놈은 둘둘 감고 있던 담요 속으로 또 기어들어 가려고 했다.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맨살을 찰싹찰싹 쳤다. 아우! 진짜! 결국 놈은 짜증을 내면서 용수철 인형처럼 튕겨 올랐다.
“왜요! 왜 자꾸 깨우는데요!”
“오토바이 좀 빌려줘라.”
“아침 댓바람부터 웬 오토바이?”
대뜸 꺼낸 말에 동수 놈은 얼굴을 팍 구겼다.
“쓸 데가 있어서 그래. 너희 집에 옛날에 배달용으로 쓰던 오토바이 있잖아.”
“그거 너무 오래돼서 굴러가지도 않을걸요. 그냥 기식이 형한테 빌리는 게 어때요?”
“그 자식이 빌려주려고 하겠냐? 오토바이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녀석인데.”
“그런데 오토바이는 왜 필요한데요? 형, 오토바이 타지도 못하잖아요.”
“탈 줄 알아. 내가 이래 봬도 한때 서울 밤거리를 주름잡던 전설의 레이서였어, 인마.”
한창 방황하던 때 질 나쁜 놈들과 어울려 다니며 오토바이를 타고 밤거리를 누볐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내 오토바이가 없어서 주로 뒤에 타곤 했었지만.
“솔직히 말해야 빌려줄 거예요. 오토바이가 왜 필요해요?”
동수 놈이 눈을 흘기며 물었다. 갑자기 오토바이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꺼내니 수상하기도 할 게다.
“에이, 됐다. 기식이한테 한번 말해 보지, 뭐.”
“왜 필요한데요. 말해 봐요. 오토바이 빌려서 윤영이 자식이랑 데이트하려고 하는 거죠? 그 자식 뒤에 태우고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려고 하는 거죠!”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면 왜 말을 못 해요!”
“이 자식이 왜 어울리지 않게 집요하게 굴어!”
“기식이 형한테 전화해서 형한테 오토바이 절대로 빌려주지 말라고 할 거예요. 동추 형이 형 오토바이로 이상한 짓 하려고 한다고.”
“오토바이로 이상한 짓 하는 게 대체 어떤 건데? 어어, 진짜 전화하는 거냐? 야, 한똥수!”
이 자식 행동 한번 재빠르기도 하다. 동수 놈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기식이 놈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신 음이 울리기도 전에 나는 얼른 놈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이 자식이 미쳤나. 기식이 놈, 아침에 깨우면 엄청나게 포악해지는 거 몰라?”
“말해요, 얼른. 오토바이가 왜 필요한지.”
오늘따라 유난히 끈질기다. 내가 이유를 말해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짓을 그만두지 않을 기세다. 나는 한숨을 푸우욱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사이트 알지?”
동수 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거기 놈들인 것처럼 변장하고 손봐 줘야 할 놈들이 있다.”
“형이 왜 그런 짓을 해요? 그리고 누가 누굴 손봐 준다고요?”
눈을 부릅뜨고 따져 묻는 놈을 앉혀 놓고 대충 사정을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듣는 동수 놈의 눈은 점점 더 가늘어져만 갔다. 저 머리 나쁜 놈도 이상한 점을 눈치챈 거다. 내가 왜 이런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한나민을 도와주어야 하는 건지. 단순히 걔가 학원 수강생이고, 처지가 딱해서라는 이유로는 내가 하려는 일이 설명이 안 될 거다.
“역시 형은 멸치 대가리를 좋아하는구나.”
내 얘기를 듣고 동수 놈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이젠 변명하는 것도 지쳤다. 그래, 나 걔 좋아한다. 생긴 것도 성격도 내 취향이라 좋아한다. 나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사정이 그렇게 됐으니까 오토바이 안 빌려줄 거면 잡소리 하지 마.”
“나도 같이 해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동수가 한마디 했다. 생각도 하지 못한 반응이라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뭘 같이 해?”
“풍기 문란 놈들로 변장해서 그 자식들을 손봐 주는 거요.”
“네놈이 왜?”
“형 혼자 그딴 위험한 짓을 하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 저도 같이 해요. 오토바이는 기식이 형한테 빌리고요.”
“야, 안 그래도 돼. 애송이 몇 놈 상대하면서 다치기라도 하면 쪽팔린 거지.”
“형은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요. 그리고 풍기 문란 놈들은 절대로 혼자서는 안 다녀요. 두 명이나 세 명씩 짝을 지어서 몰려다닌다고요.”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꼴통 한똥수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그럼 그렇게 해라. 네가 하겠다고 했으니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된다?”
내가 딴소리를 왜 해요? 대체 날 뭐로 보고.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와 중얼거릴 줄 알았는데 녀석은 이렇다 할 말 없이 부스스 일어섰다.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북북 긁으며 놈은 발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가 생겼다. 혼자서 그 짓을 하겠다고 마음먹긴 했어도 대체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름 고민했었는데. 혼자 일을 벌였다면 분명히 들켰을 것이다. 동수 놈 말대로 놈들은 2인 또는 3인 1조로 움직인다고 하니까. 내가 알고 있는 건 놈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는 것. 헬멧을 쓰고, 삼단봉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 이 정도가 전부였다.
“야, 한동수. 너 오늘은 좀 멋져 보인다?”
동수 놈이 기어들어 간 화장실 문에 대고 나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