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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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식,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어떻게 된 일이래?”

“누가 그 새끼를 1급 신고란에 신고했나 보더라고. 난 솔직히 안 믿었거든. 양아치 새끼들 때려잡아 봤자 이득 되는 게 뭐 있다고 그런 짓을 하나 싶었는데 말이야.”

휴게실에서 사내놈 두 명이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바람 좀 쐬려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온 참이었다. 나는 자판기에서 탄산음료 세 개를 뽑아서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인지 뭔지 하는 놈들한테 너희 학교 애가 당했나 봐? 누군데? 당한 놈이?”

난 녀석들 눈앞에 캔을 내밀며 끼어들었다. 녀석들은 어른이 뭘 사 주는데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냉큼 받아 들었다.

“있어요. 개양아치 같은 새끼가. 되지도 않는 새끼가 어깨에 힘주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더니.”

“너, 그 녀석한테 빵 좀 사다 바쳤나 보다?”

“누가요? 제가요? 제가 왜 그 새끼한테 빵을 사다 바쳐요? 그 새끼가 나한테 빵을 사다 바치면 모를까!”

난 속으로 픽 웃었다. 아까부터 내 눈치만 살살 살피면서 조용히 음료수만 홀짝대고 있는 안경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야, 내가 어디 그 새끼 앞에서 빌빌거리는 거 봤어? 아니잖아, 그렇지?”

“어? 어어. 그렇지. 네가 왜 그 좆도 아닌 일진 새끼한테 설설 기겠어. 그 새끼보다 네가 더 센데.”

“그렇지? 이것 봐요. 선생님, 내가 그 새끼랑 먼저 맞짱 뜨려고 했다니까요. 내가 맘먹고 맞짱 떴으면 그 새끼, 한주먹 거리도 안 됐을 텐데.”

사내새끼들의 허세란. 눈앞에 ‘개양아치’ 놈이 있기라도 한 듯이 여드름 놈이 슉슉, 입으로 소리를 내 가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옆에서 그 꼴을 지켜보고 있는 안경 녀석의 표정이 썩어 들어 갔다.

“그런데 진짜 그 사이트에 있는 1급 신고란에 신고하면 무서운 형님들이 그 애들을 처리해 준대냐?”

“그렇다니까요. 솔직히 우리도 안 믿었는데 이번에 우리 반 개새끼가 당한 거 보니까 진짜더라고요.”

“대체 왜? 그 사람들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런 짓을 하는 건데?”

여드름이 눈만 깜빡이더니 음료수를 호로록 마셨다. 계속 손으로 캔을 만지작대며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만 찾던 안경 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요. 어쩌면 무서운 형님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랑 같은 10대들일지도 모른대요.”

“뭐?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그 새끼들이? 에이이,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소문이라는 거지. 그 사이트를 만든 게 일진 놈들한테 왕따 당하던 놈이었대. 처음엔 그냥 자기하고 처지 비슷한 애들끼리 모여서 신세 한탄하고 자기들 괴롭히는 애들 욕하던 공간이었는데. 어느 날 누가 익명으로 게시판에 글을 올리더라는 거야. 자기가 그 새끼들을 잡아 족쳐 줄 수 있다고…….”

안경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같은 반 급우인 여드름의 낯짝을 훑었다.

“뭐야? 그럼 그 새끼들은 돈 받고 그 짓을 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너 이 새끼, 왜 지금까지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냐?”

“나도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된 거야. 동호회 회원들끼리 채팅하다가 누가 그러더라고.”

“아, 그 오따쿠 새끼들 모임?”

여드름이 코웃음을 치자 안경 녀석의 낯이 살짝 일그러졌다. 난 설탕 덩어리 탄산음료를 홀짝이며 안경 녀석이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덕후 새끼들끼리 모여서 한 편의 소설을 썼겠지. 그만 지껄여라. 됐다, 됐어.”

“아냐, 계속해. 선생님은 뒷얘기가 궁금해 미치겠는데? 떠도는 헛소문이라 치부하기엔 꽤 그럴듯한 얘기 아니냐?”

선생이란 직함을 달고 있는 어른의 지지를 받게 되자, 안경 녀석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여드름도 앉아서 코웃음만 픽픽 치기만 할 뿐, 자리를 뜨진 않았다.

“뭐, 밑져도 본전이다 싶어서 거기 회원들끼리 돈을 모아서 익명 회원한테 줬나 봐요. 모이면 꽤 큰돈이지만 개인이 낸 돈은 겨우 1, 2만 원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돈을 송금한 며칠 뒤에 진짜로 사이트 운영자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일진 새끼가 피 떡이 됐대요. 그 새끼 패거리들도 함께요. 그 익명 회원이 일진 새끼들을 잡아 족치던 사진을 게시판에 올려서 인증을 했는데, 다들 그때에서야 ‘이거 진짜구나!’ 싶었던 거죠. 사이트 회원들이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놈들을 족쳐 달라고 의뢰를 했고,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거래요.”

“여전히 처음으로 그 사이트를 만든 애가 사이트를 운영하는 거고?”

“아뇨. 지금은 ‘사냥꾼 레벨’인 애들로 운영진이 물갈이 됐대요. 그러니까 지금은 사냥꾼 레벨들이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거라네요.”

“그럼 그 사냥꾼인지 뭔지 하는 운영진들도 다 고등학생이라는 거야?”

“뭐, 일단 소문상으로는 그래요. 고등학생 아닌 형도 있는 것 같긴 하고.”

“고삐리들이 고삐리한테 돈 받아 처먹고 그딴 짓을 한다 그거지. 좆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거친 욕설로 뒤덮인 내 중얼거림에 안경 녀석도, 귓구멍을 파던 여드름도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놀랄 만도 했다. 나는 학원 내에서 그럭저럭 상냥하고 자상한 선생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굳어 있는 아이들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뿌지직, 소리를 내며 손안의 알루미늄 캔이 우그러졌다.

“너희들은 절대로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용돈을 그딴 데 쓰면 안 된다?”

“제가 왜 그딴 데에 헛돈을 쓰겠어요? 요즘엔 우리 집 박 여사가 용돈도 잘 안 줘서 게임하러 PC방 갈 돈도 없는데.”

“그딴 데 돈 쓰지 말라는 건 PC방 가는 돈도 포함된다, 짜식아.”

난 여전히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여드름 녀석의 개기름 번들거리는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녀석이 “아오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벌떡 일어섰다. 분노로 이글대는 눈으로 노려보는 녀석의 얼굴을 후려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녀석은 “아오! 아오! 아오오!” 하면서 가슴을 쾅쾅 치고, 까치집 같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퇴장했다.

“선생님한테 그 사이트 주소 좀 알려 줄래?”

슬쩍 일어서는 안경 녀석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네에?”

“네가 취미 맞는 애들끼리 모여서 채팅도 하고 그런다는 사이트 말이야.”

“거긴 철저한 회원제라서 일반인한테 사이트 주소를 외부로 유출하면 강퇴당해요.”

“일반인?”

“그,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우리들은 이상한 짓 안 해요. 다들 건전하게 놀아요.”

“그래? 그럼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사이트 주소는 알려 줄 수 있지?”

“네, 거기 주소는 알려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긴 매번 주소가 바뀌는 유령 섬이라 아직 이 주소로 접속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녀석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얼마 안 있어 내 주머니 속 기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꺼내서 확인해 보니 방금 전 안경 녀석이 보낸 사이트 주소를 알려 주는 문자였다.

“어, 고맙다. 그런데 내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얼마 전까지 과외하셨었잖아요. 선생님한테 과외받던 학생 중 한 명이 우리 형이었어요. 선생님 덕분에 형이 D 대 입학했다고 부모님이 되게 좋아하셨었거든요. 우리 형이 알아주는 꼴통이었는데. 전 선생님 따라서 이 학원 온 거예요. 다음 달부터 선생님 수업 들으려고 수강 신청하러 왔어요. 아마 아까 걔도 선생님 수업 들을걸요?”

알아주는 꼴통이라 하니 누군지 알겠다. 예전에 가르치던 애들 중에서 똥수 놈 수준의 돌머리가 한 놈 있었다. 아니, 그 무리 자체가 꼴통 집합소였다. 엄마들이 어떻게 입소문을 듣고 연락을 해 와서 맡게 된 애들이었는데, 솔직히 끔찍했다. 머리는 더럽게들 나쁜 주제에 허구한 날 과외 선생한테 욕하면서 대들고, 수업 빼먹고 놀러나 다니고, 고등학생 자식이 몰려다니며 술이나 처마시고.

저 안경 녀석은 알까 모르겠다. 내가 그 대책 없는 꼴통 자식들을 어떤 식으로 짓뭉개서 공부를 하게 만들었는지.

“우리 형한테 하셨던 것만큼만 가르쳐 주세요. 전 꼭 형보다 더 좋은 대학 가야 돼요, 선생님.”

너희 형한테 했던 것만큼 하면 넌 죽을 거다, 인마.

안경 녀석은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에 잰걸음으로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또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휴게실로 몰려들어 왔다. 나도 엉덩이를 떼 자리를 떴다.

안경 녀석이 떠들어 댄 얘기가 과연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헛소문인 것일까? 적어도 떠도는 소문의 50퍼센트 이상은 진실일 터였다.

승강기 문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닫혔다가 1층에 도착해 또다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 밖으로 내려선 순간 나는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애와 마주쳤다.

한나민이었다. 녀석도 나를 알아보고는 비스듬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녀석은 상태가 영 시원찮았다. 입고 있는 옷은 먼지투성이고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데다, 입술은 터져서 피가 흐르고 얼굴은 흙이 묻어 지저분했다. 하고 있는 꼴만 보고도 녀석이 어떤 몹쓸 짓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해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민아, 너 얼굴이 왜 그러냐?”

말이 없었다. 녀석은 고개를 수그린 채로 그새 문이 닫혀 위로 올라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박하신인가, 그때 봤던 그 녀석이 이런 거야?”

“그때 왜 제가 보낸 문자에 답하지 않으셨어요?”

나민이가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단순한 질문이 아닌 나를 비난하려는 듯한 어투였다.

그때, 그날 밤, 형님들과 함께 귀면 놈들이랑 한판 붙으러 가던 날. 나민이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물어볼 게 있다는 단순한 문자였다. 일이 바빠 답 문자를 보내지 못했더랬다.

“전화 걸어서 도움을 청할 데가 선생님밖에 없었는데. 선생님이라면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의 눈에 물기가 축축하게 고이는 게 보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늘에 맹세코, 그게 도움을 청하는 문자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워낙 바빠서. 도저히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할 정신이 없었거든.”

녀석의 축 처진 어깨가 경련하듯이 떨렸다.

이 녀석, 운다. 곰같이 커다란 녀석이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쏟는다.

동수 놈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을 때는 사내자식이 쯧쯧, 하면서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이 녀석의 눈물에는 가슴이 저몄다.

안쓰럽고,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비바람을 맞으며 오들오들 떠는 작은 동물처럼 보듬어 안아 주고만 싶었다. 녀석은 아이도 아닌데.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려 나민이의 어깨를 감쌌다. 건드리면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감싸서 토닥였다.

“나민아,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할까?”

누가 이 꼴을 보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녀석은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녀석과 나란히 서 보니 나보다 반 뼘 정도가 더 컸다. 근육이라곤 하나 없는 비쩍 마른 녀석이라 생각했건만, 감싸 안은 어깨가 탄탄하다는 것도 의외였다.

녀석을 데리고 학원 근처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평일 오후인데도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한나민은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의 은총을 받지 못한 구석진 곳, 벽에 달라붙은 안쪽 소파에 주저앉았다. 의자에 앉아서도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는 바닥만 쳐다보았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역시 대답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뒤돌아서서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녀석에게도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한 법. 나는 커피와 핫 초콜릿, 커다란 초코 칩이 잔뜩 박힌 쿠키를 사서 위로 올라갔다.

“자, 마셔. 기분 더러울 땐 단게 최고다. 맛있는 거 다 사 주고 싶은데 선생님이 돈이 없다, 돈이. 물가는 미친 듯이 오르는데 월급은 그대로라서 먹고살기가 참 힘들다. 이러니까 내가 장가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거지.”

“선생님은 남자 좋아하잖아요.”

분위기 좀 띄워 보겠다고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여 댄 보람이 있었다. 한나민이 입을 열었다.

녀석은 내가 사 온 핫 초콜릿 잔을 두 손으로 쥐고는 뚜껑 입구에 입술을 갖다 댔다. 입술을 뾰족하게 세워 안에 든 음료를 마시는 모습이 꼭 먹이 받아먹는 펭귄 같았다.

꽤 맛있는지 녀석은 호록호록, 소리를 내며 단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음료를 마시고 쿠키까지 오독오독 씹어서 먹어 치웠다. 꽤 배가 고팠던 듯 나민은 한동안 말도 없이 마시고, 씹기만 했다.

“이제 보니 배가 고파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부터는 배고프다고 징징 짜지 말고 나한테 찾아와. 언제든지 밥은 사 줄 테니까.”

녀석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에 과자 부스러기를 잔뜩 묻히고서. 날 바라보는 눈이 참 크고 예쁜데 저놈의 머리칼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는다. 당장 저 머리칼 좀 잘라 버렸으면 좋겠는데.

“선생님, 지금 내 꼴이 우스워 보이죠?”

“그래. 우습다, 인마. 웃겨 미치겠다. 이건 뭐 삽살개도 아니고.”

난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사무용 집게를 꺼냈다. 나오기 전까지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와서 주머니 안에는 펜과 클립까지 들어 있었다. 한 손으로 녀석의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들어 올려, 노란색 사무용 집게로 고정했다. 녀석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좀 낫다. 눈도 예쁜 녀석이 왜 그렇게 가리고 다녀? 그거 빼지 마라. 그거 빼면 당장 미용실로 끌고 간다.”

짜증을 내면서 집게를 빼려고 하기에 웃는 얼굴로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을 해 댔다. 녀석은 인상을 쓰면서도 머리칼을 고정한 집게에서 손을 뗐다. 잔뜩 부은 얼굴로 남은 초콜릿 음료를 홀짝거리는 얼굴이 귀여워 죽겠다.

“넌 타고난 생김새가 밝은 애야. 그런데 왜 그렇게 어두워 보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좀 밝고 가벼운 이미지가 되면 지금보다 훨씬 보기 좋을 텐데. 장담할 순 없지만 이미지를 바꾸면 아마 지금보다 친구가 더 많이 생기고, 좋은 쪽으로 변할걸? 음침하고 어두워서 보기만 해도 기분 더러워지는 놈보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찍찍 갈기고 허구한 날 실없이 웃고 다니는 경박한 놈이 훨씬 살기 편해.”

나민이가 나를 쳐다보는 눈매에 힘을 팍 주었다. 꼰대가 지껄이는 잔소리라 이거다. 구겨진 눈꺼풀 아래, 동그란 눈동자는 축축했다. 눈 전체가 살짝 충혈되어 있고 광대뼈 부근까지 발갛게 부어 있다. 광대뼈 부근의 저건 긁힌 상처다.

“전 친구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애도 아니고 성인인데요.”

눈앞의 녀석이 피딱지가 말라붙은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지껄였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이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성인이라고 해서 친구가 필요 없는 건 아니잖아. 혼자는 외롭지 않아?”

“됐어요. 친구 같은 거. 외로운 게 나아요.”

난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 부분을 톡톡 두들겼다.

학창 시절, 우리 반 담임 선생의 기분도 이러했을까. 고2 때 담임 선생이 어느 날 나를 조용히 불러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일단 나한테 우유와 소보로빵을 먹이고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었다. ‘지금 널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뭔지 선생님한테 말해 줄래?’

“나민아, 지금 널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뭐냐?”

나는 그때, 그분과 똑같은 것을 물었다. 그때 나는 그분께 이렇게 대답했었다. ‘이 좆같은 세상요.’ 그리고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리지도, 나이 들지도 않은 여물다 만 녀석이 대답한다.

“사람들요.”

한나민은 짧은 대답을 토해 내고 눈과 눈 사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길게 한숨까지 내쉰다.

“그날 밤, 도서실에 갔다가 오니까 집 안이 돼지우리처럼 발칵 뒤집어져 있더라고요. 순간 너무 당황스럽고, 무섭기도 해서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던 거예요.”

“뭐? 도둑이 들었던 거 아냐?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런 상황에서 뭐 좀 물어보겠다고 문자를 보내면 어떻게 하냐?”

“바쁘실 것 같아서요.”

“이 바보야! 그럴 땐 그냥 전화를 했어야지!”

저절로 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남의 시선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경찰에 신고는 했고?”

“아뇨,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어요. 아니, 못 해요. 경찰에 신고라도 했다간 더 심한 짓을 할 테니까요.”

“설마 박하신, 그놈 패거리가 그런 거냐?”

녀석은 대답 없이 미간에 힘을 주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우욱 내쉬고서야 녀석은 힘없는 목소리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누가 하신이를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1급 신고란에 신고했나 봐요. 그 자식한테 괴롭힘당한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 자식이 내가 자길 신고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집 안을 그 꼴로 만들고 때리고 그러는 거예요.”

얘기를 하는 동안 녀석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 마지막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또다시 나민의 커다란 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이기가 싫은지, 녀석은 손을 들어서 앞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집게를 뺐다.

“저 되게 병신 같죠? 나보다 어린놈들한테 병신같이 당하기나 하고.”

“아냐, 그렇지 않아. 그것들은 애들이 아냐, 악마지. 집에 아무도 없었던 거야? 부모님은?”

“저 혼자 자취해요. 집이 1층이라 창문을 통해서 들어올 수도 있고요. 평소엔 창문도 잘 잠그고 다니는데 마침 그날은 잠그는 걸 깜빡했었나 봐요. 그 자식들이라면 창문이 잠겨 있었다 해도, 유리창을 깨고서도 들어왔을 테지만요.”

꽉 막힌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나민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만 같았다.

녀석들의 도를 넘어선 악랄함에 치가 떨렸다.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지내 왔다고는 하지만 나민이가 형 아닌가.

얼마 전 학원 앞 골목에서 한나민을 에워싸고 발길질을 해 대던 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대자 나를 노려보며 욕을 해 대던 못생긴 낯짝들. 그래도 다른 녀석들은 덜떨어졌지만 순박한 데가 있긴 했다.

하지만 박하신, 그 덜떨어진 어린 깡패 놈들의 대가리 격인 놈. 그놈은 확실히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나를 노려보던 눈에서 번쩍이던 노련한 살기.

“미친 새끼.”

뽀드득, 소리를 내며 갈리는 잇새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한나민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미친 애새끼들한테는 몽둥이질이 최곤데. 어쨌든 누가 풍기 문란인지 뭔지 하는 사이트에 놈들을 신고했다니까 곧 신나게 두들겨 맞겠구나.”

“진짜 그 사람들이 와 줄까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거기 사람들이요.”

“어차피 돈으로 움직이는 놈들이야. 누가 신고했는지는 몰라도 그 녀석이 거기 놈들한테 돈만 제대로 줬다면 곧 그 새끼들을 손봐 주러 올 거다.”

“그 사람들, 돈을 받고 일하는 거예요?”

“뭐 그렇다더라. 나도 어디서 들은 얘기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요.”

한나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그럴 만도 하다. 확실히 밝혀진 건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누가 사이트에 박하신과 똥개들을 신고했는지. 신고한 녀석이 풍기 문란 놈들과 제대로 접선하긴 했는지. 놈들에게 확실하게 일을 의뢰했는지.

<친구 따라 억지로 클럽에 끌려갔었다는 그 사람이요. 그 사람, 사실 형 친구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요.>

윤영이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지껄였던 말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해 먹던 놈이 있었다. 그 녀석은 피아노 학원을 하는 엄마를 둔 여자애를 유독 지독하게 괴롭혔다. 이유야 별거 있었을까. 여자애를 좋아해서 괴롭혔던 거지.

나는 불안하게 눈알을 도로록 도로록 굴리면서 빈 종이컵만 만지작대는 뽀얗고 마른 녀석을 쳐다보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을 뒤덮은 참혹한 폭력의 흔적을 보고 있으려니 눈알 안쪽이 쓰렸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을까. 앞뒤 꽉 막힌 시꺼먼 상자 속에 갇힌 채로 내게 도움을 청하는 녀석을.

“부모님께는 말씀드렸어?”

“아뇨, 새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거든요.”

새엄마. 나는 그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여러 의미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우리 집으로 와.”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말부터 끄집어냈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아니, 그게, 이상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집에 너 혼자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서. 그 새끼들이 또 너희 집에 몰래 들어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고.”

“알아요. 선생님이 이상한 뜻으로 하신 말씀 아니란 거. 하지만 그럴 순 없죠. 선생님께 폐 끼치고 싶진 않아요.”

횡설수설 되는대로 지껄여 대는 내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나민의 말투는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너 말이다. 지금도 충분히 나한테 폐 끼치고 있거든?”

“죄송합니다…….”

“미안한 줄 알면 당장 짐 싸들고 우리 집으로 와. 너 이대로 보내고 나면 내 성격상 신경이 쓰여서 밤에 제대로 자지도 못해.”

“아뇨. 정말 됐어요. 정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일어나. 당장 너희 집에 같이 가서 짐 챙겨서 나오자. 집이 어디야? 여기서 머냐?”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일단 몸부터 일으켰다. 테이블 가득 놓인 종이컵이며, 쿠키 봉지 같은 것을 플라스틱 그릇 위에 담고 일어나 정리대 쪽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가방과 옷가지를 챙겨 달려 나온 한나민은 아예 매달리듯이 애원했다.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 됐다니까요. 저도 남이랑 같이 지내는 거 불편해요. 선생님. 저기요, 선생님! 옆에서 앵앵대는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서 나는 지하철역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 나갔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선생님, 마을버스 타셔야 돼요!”

나민이가 등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버스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와 나민이는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를 움켜쥐고서 차체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선생님.”

녀석이 팍 가라앉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난 여전히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차창 밖 풍경만 바라보았다.

“저한테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말이야?”

“그때 그 일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괜찮다고요.”

그때 그 일. 게이 클럽에 끌려온 이 녀석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지우개로 벅벅 문질러 지우고 싶은 과거의 일.

“내가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생각해?”

옆얼굴에 나민이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래, 처음엔 죄책감 때문이었어. 네 입을 막으려던 것도 있었고. 월급 몇 푼 안 되는 직장이지만 내 소중한 일터니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셨어도 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알아. 네가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거.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애였으면 진작 그랬겠지. 사실 내가 뭐든지 물어보라고 전화번호 가르쳐 줬을 때만 해도, 네가 진짜로 연락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 네 성격이 그래 보였거든.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자? 이런 말처럼 마음에도 없는 빈말에 가까웠지.”

“그런데 제가 진짜 문자를 보내서 실망하셨겠네요.”

“실망했다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었다는 게 맞겠지. 네가 문자를 보냈던 날 밤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거든. 그 이후로 계속 컨디션이 거지 같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오늘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러는 거다. 그때 네 문자를 귀찮다고 씹었던 것도 미안하고, 지금까지 전화 한 번 해 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선생님이 저한테 미안해하실 거 없는데요.”

“너야 어떨지 몰라도 난 미안해. 그러니까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고 죄책감이고 싹 다 날려 버릴 기회를 줘.”

나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이해했다.

마을버스는 거의 90도 각도 가깝게 꺾어진 비탈길을 힘겹게 기어 올라갔다. 이러다가 시동이 꺼지기라도 하면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마침 잘됐어. 요즘엔 나도 집에 혼자 있으면 좀 무섭거든. 자꾸 가위가 눌려서. 자다가 숨이 턱 막혀서 눈을 떠 보면 귀신이 내 배 위에 올라타서 날 노려보고 있다고.”

“진짜요?”

“그렇다니까. 내 얼굴 좀 봐라. 피부도 푸석푸석해지고 눈 밑도 시꺼멓지? 요즘 통 잠을 못 자서 이래. 내가 우리 학원 F4 멤버잖아. 그런데 오늘 애들이 선생님도 이제 늙었다고 구박을 하더라. F4에서 탈퇴하라고 하더라? 솔직히 외모순으로 따지면 내가 우리 학원 F4 리더급인데 내가 탈퇴한다고 해서 그게 F3가 되겠냐? 순식간에 J3가 되는 거지.”

“J3는 뭔데요?”

“진상 3.”

나민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픽 웃었다.

“네, 맞아요. 선생님 잘생기셨어요.”

“그래. 내가 좀 잘생겼지.”

우리 앞에 앉은 여학생이 오만상을 쓰고서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쳤기에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어 주자 여자애는 창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민이와 나는 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우리들은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시멘트를 치덕치덕 발라 대충 만든 계단이 좁은 골목 사이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골목길을 누비고, 또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접어든 마지막 골목은 서울의 정돈된 아파트촌과는 달리 어수선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무엇 하나 정리되지 않아 너저분하게 널리고 깔린 골목의 풍경이 푸근하고 정겨워만 보였다.

대체 몇 가구가 사는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다세대 주택의 녹슨 철문은 훤히 열려 있었다. 철문 앞에 놓인 낡은 의자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생기라곤 하나 없는 회백색 눈으로 나와 나민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철진아, 밥은 먹었냐?”

노인이 부르는 이름은 철진인데 나민이 녀석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뇨, 이제 먹어야죠.”

“어멈이 닭백숙을 만들어 놨더라. 냉장고에서 꺼내 먹어라.”

네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나민이는 철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구신데 널 철진이라고 부르시냐?”

“윗집 할아버지신데 절 손자라고 착각하시나 봐요.”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문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고 초라한 노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칵달칵, 문을 여는 소리에 이어 끼이익, 기름칠하지 않은 불쾌한 쇳소리가 들렸다. 내가 1층 구석, 반쯤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엔 나민이는 방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과 방 하나. 구석에 처박힌 주방. 1층이라곤 하지만 볕이 잘 들지 않아 텁텁하고 축축한 공기가 내려앉은 집. 좁아터진 공간 안에 있을 만한 건 다 있는 것 같았지만 거의 낡고 오래된 물건들뿐이었다.

거실에 있는 TV마저 뒷면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제품이었고, 냉장고는 또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위이잉, 위이잉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따뜻한 기운이라곤 하나 없고 삭막하고 칙칙하고, 차갑기만 하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어느 정도 훈훈한 온기라도 남아 있게 마련인데 이놈의 집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거실 한복판에 연보라색의 긴 쿠션이 나뒹구는 게 보였다. 아마 벽에 붙여 두고 등을 기대앉아 TV를 보는 용도일 것이다. 그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정리될 건 정리되어 있고, 들어갈 건 제대로 들어가 있다.

TV 위의 벽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세계 지도가 붙어 있었다. 코팅된 끝부분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는데 그 사이로 시꺼먼 얼룩이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준 지도를 들어 올리자, 그 아래의 벽이 온통 시꺼멓다. 곰팡이 얼룩이었다.

자세히 보니 벽뿐만이 아니라 천장까지 곰팡이들이 떠억하니 자리 잡고 있다.

온 집 안에 떠도는 퀴퀴한 가난의 냄새. 이런 집구석에 사니까 애가 매가리가 하나도 없지.

“나민아, 갈아입을 속옷이랑 옷 몇 개만 챙겨.”

나는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집주인도 다른 사람이 방 안에 들어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옷장 안에서 뭔가를 찾는 데에만 열중했다. 열린 옷장 문에 가려져 사람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공과금이나 월세 같은 건 아버지가 내 주셔?”

“전세라 월세는 안 나가요. 아버지가 매달 돈을 보내 주셔서 그걸로 공과금도 내고, 식비도 해결하고 그래요.”

“그런데 너, 안 춥냐? 볕이 들지 않는 집이라 그런가, 추워도 너무 춥다.”

“난방비가 비싸서요. 웬만하면 보일러 안 틀어요. 두툼하게 껴입으면 버틸 만하고요.”

옷장에서 꺼낸 것들을 욱여 담은 가방을 들고서 녀석은 옷장 문을 닫았다. 문짝이 뒤틀려 아귀가 맞지 않아 자꾸만 벌어지는 문과 문 사이에 두툼하게 접은 신문지 조각을 끼우고서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민다.

“딱 며칠만이에요. 며칠간만 선생님 집에서 지내면서 이것저것 알아볼게요.”

“알아보긴 뭘 알아봐? 풍기 문란 어쩌고 사이트에 언제 찾아와서 그 녀석들을 손봐 줄 건지 물어보기라도 하려고?”

나민이는 말없이 돌아서서 흙 묻은 재킷을 벗고, 셔츠를 벗고, 또 그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까지 훌렁 벗었다. 문간에 서서 문 옆에 놓인 산세베리아 잎을 만지작대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젊은 여자가 남자 앞에서 옷을 훌렁 벗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만큼이나 녀석의 등은 뽀얗고 매끄러웠다.

녀석이 옷걸이에 걸린 옷을 빼내기 위해 손을 뻗자, 등뼈를 중심으로 넓게 퍼진 잔근육이 물결처럼 넘실댔다. 허리의 움푹 팬 부분부터 등, 목에 이르기까지의 쭉 뻗은 곡선이 무척 보기 좋았다. 한번 손을 대 쓸어 보고 싶을 정도로.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미쳤다, 미쳤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쫄쫄 굶은 짐승 새끼도 아니고. 아예 보질 말아야지. 보질 않아야 미친 생각도 안 하지. 고개를 돌려 끝부분이 말라서 갈색으로 변색된 산세베리아 잎만 열심히 만지작댔다.

“저기…… 선생님.”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녀석이 아직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까는 그래도 등짝이었지, 이젠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어 가슴을 활짝 펼쳐 보이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 뽀얄까. 뽈록하게 올라붙은 유륜 위, 앙증맞게 달린 작은 젖꼭지도 옅은 갈색이다. 양팔에 티셔츠의 소매 부분을 꿰어 넣고서는 왜 입질 않는 거냐.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면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몰라도 일단…….”

“고맙습니다. 정말로요.”

‘옷부터 입자. 응? 제발 좀’ 하려던 말이 중간에서 뚝 끊겼다. 녀석은 고맙다고 말했다. 입꼬리에 수줍은 미소를 걸고서. 녀석의 한쪽 뺨에 깊은 볼우물이 생겼다. 흘러내린 머리칼 아래의 눈가도 복숭아색으로 수줍게 물들어 있는 듯했다.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녀석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볼우물도 한층 더 깊게 패었다.

“어, 어어……. 그래.”

나는 바보같이 웅얼대기만 했다. 눈앞의 어린 녀석이 웃었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뚝뚝 쏟으면서 바르르 떨던 병아리가. 온몸으로 웃는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하면서.

잠시나마 저 어린 녀석의 덜 영근 몰랑몰랑한 육체를 눈으로나마 탐한 자신이 엄청나게 부끄러워졌다. 순수함 따위 약에 쓰려 해도 없는, 시꺼멓게 타락한 자신이 싫어졌다.

“나 그렇게 좋은 놈 아닌데…….”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녀석은 다시 돌아서서 입다 만 티셔츠를 꿰입었다. 그 위에 아가일 무늬 스웨터를 걸치고, 유행 한참 지난 떡볶이 단추 코트를 받쳐 입었다.

나와 녀석은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며 걸어 올라왔던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전문 산악인처럼 능숙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가는 나민이와는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서 묵묵히 저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나민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주위가 뿌옇게 흐려지는 듯했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살금살금, 소리 없이 다가오는 물안개가 주위를 뒤덮었다. 안개가 짙어질수록 나민이의 뒷모습은 점점 옅어졌다. 녀석이 점점 사라져 갔다.

사방을 감싼 뿌연 안개. 콧속으로 파고드는 눅눅한 습기. 축축한 거미줄이 피부에 감기는 것만 같은 감촉.

나는 갑자기 밀려든 소름 끼치는 한기에 그 자리에서 멈춰 서고야 말았다.

“선생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주위를 뒤덮고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위의 모든 것이 정상대로 돌아왔다. 암흑으로 뒤덮인 방 안에 들어서면서 전기 스위치를 켠 것처럼.

나민이는 벌써 계단 저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하얀 얼굴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남은 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내가 확실히 몸이 안 좋아지긴 했나 보다. 방금 전 엄청나게 이상한 경험을 했어.”

녀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꿨지 뭐냐. 그 짧은 순간에. 갑자기 주위에 안개가 쫙 깔리면서 나민이 네가 안개 속에 파묻히는 거야. 그리고 거미줄이 온몸에 감기는 것 같고…….”

“어, 마을버스 왔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민이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 우리들이 내린 정류소 앞에 초록색 버스가 서 있었던 것이다. 나도 녀석의 뒤를 따라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거의 네 발로 기듯이 버스 안에 올라타자마자 버스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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