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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는 이성애자라면서요. 그런데 친구 때문에 게이 클럽에 억지로 끌려왔는데, 거기서 누가 작업을 걸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 사람이 막 걔한테 추근댔다면서요. 어떻게든 해 보려고 데리고 나가기도 했고. 그럼 거의 도망친 거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대요?”
오물오물, 해바라기 씨 갉아먹는 햄스터처럼 달싹이는 윤영이의 앙증맞은 입술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렇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 사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거예요, 분명. 나도 고등학교 때 과외 선생한테 당할 뻔했거든요. 내가 심하게 반항해서 미수로 끝나긴 했는데, 한동안 되게 힘들었어요. 그런데도 그 망할 놈의 과외 선생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요. 그 새끼한테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으니까요.”
“개새끼네. 어떻게 자기 제자한테 그딴 짓을 할 생각을 하냐? 게다가 평범한 남자가 여자애도 아니고 남자애를 덮치냐? 보통?”
“제가요. 고등학교 때엔 웬만한 여자애보다 예쁘장했거든요.”
목에 딱 힘을 주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환장하게 귀여워서 아까부터 계속 눈에 밟히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댔다. 촉촉하다 못해 흥건하게 젖은 녀석의 입술에선 딸기 사탕 맛이 났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고는 입술을 떼자 녀석이 말랑말랑한 미소를 띤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아까 형이 아는 사람 일이라고 했던 얘기요.”
윤영은 말을 꺼낸 사람조차 잊고 있었던 화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그 사람, 형 친구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응? 무슨 말이야?”
“친구 따라 억지로 클럽에 끌려갔었다는 그 사람이요. 그 사람, 사실 형 친구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도 그 과외 선생을 좋아했었거든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그 사람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나간 옛 추억을 떠올리며 스무 살 애송이는 약하게, 아주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강아지 눈 같다고만 생각했던 커다란 동공이 투명한 유리가 되어 얇은 거죽 아래 시꺼먼 속살이 죄 비쳐 보이는 듯했다.
어쩌면 보기보다 머리가 좋은 이 녀석은 눈치채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는 사람 이야기라며 늘어놓았던 장황한 얘기가 사실은 내 얘기란 걸. 눈앞에 존재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이미지 전부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단 것을.
“형, 나 사랑해요?”
만난 지 겨우 한 달 된 어린 연인이 묻는다. 난 대답 없이 두 눈 가득 진심 어린 애정을 담아 녀석을 보며 웃었다.
입 안에 쓴 타액이 고였다. 미소 띤 입술이 경련하기 전에 난 어린 연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배고프다아.”
“그래? 밥 먹으러 나가자.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콧소리를 내며 투정하던 녀석이 신이 나서 튀어 올랐다.
윤영이 녀석의 자취방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날이 밝았는데 어느새 온 세상이 시꺼멓게 변했다. 겨우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이렇다. 윤영이가 으으, 추워, 하면서 내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뭐 먹을래?”
“무조건 고기! 고기! 고기는 진리야!”
커다란 후드가 달린 점퍼에 푹 파묻히다시피 한 녀석이 고기 타령을 외쳤다.
“그래. 고기 먹으러 가자. 형이 한우 사 줄게.”
“그럼 그때 갔던 거기 가요. 그 집 고기, 참 맛있던데.”
녀석은 둘이 먹어도 10만 원은 너끈히 넘는 식당으로 아무렇지 않게 날 인도했다. 뼛속부터 도련님이라 경제관념 자체가 나 같은 서민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녀석 앞에서 나는 투잡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20대 후반의 학원 강사 임동추가 아니라, 잘나가는 아버지를 둔 준재벌집 아들이다. 내 구질구질한 본모습을 알게 된다 해도 넌 지금처럼 나를 좋아해 줄까.
만난 지 겨우 한 달 된 연상의 애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네가 그럴 리가 없지.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 것만큼이나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는 것도 쉬울 거다. 나는 너의 과시욕을 충족시켜 주는 명품 액세서리일 뿐이지.
그 누구도 내 팔에 달라붙은 윤영이 녀석의 존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 둘이서 평범한 연인처럼 찰싹 붙어서 걷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시선 한 번 던지는 사람이 없다. 내 옆에 붙어 있는 녀석은 키 큰 여자애로만 보였다. 간혹 지나가는 남자들이 홀린 눈으로 녀석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품속에 넣어 둔 전화기가 울렸다. 동수 놈이었다. 옆에서 윤영이가 ‘똥수’란 이름이 뜬 액정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똥수는 또 누구예요? 이렇게 묻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어, 동수야. 웬일이냐?”
옆얼굴을 뚫을 것 같은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이렇게 헐떡여? 장난 전화 하는 거면 끊어, 새끼야.”
[내가 형한테 왜 장난 전화를 걸겠어요? 집에서 뛰어나오느라 숨이 차서 그런 거지.]
“보니까 또 아저씨랑 한판 붙었군. 내가 그랬지? 너네 아부지 화 풀리실 때까지는 쥐 죽은 듯이 있으라고. 근데 그새를 못 참고 또 부모님 앞에서 되지도 않는 헛소리 지껄이면서 지랄 발광 했지?”
[아, 씨! 아니라니까요!]
“아, 씨이? 이 새끼가 너 나한테 욕했냐? 욕했어?”
[아우우! 지금 내가 욕을 했냐 안 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김태민한테 전화가 걸려 왔대요!]
응? 김태민? 그건 또 누구야? 고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녀석의 외침에 낯을 찌푸리며 몇 초간 머리를 굴렸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 이름 석 자를 잊어버릴 리가 없지. 너무도 평범한 이름이라 잠시 헛갈렸던 것뿐이다.
“뭐? 김태민? 그 새끼……, 그 사람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언제?”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통화 내용을 듣고 있는 윤영이를 흘끔 쳐다보면서 난 목소리를 낮췄다.
[한 시간 전쯤에요. 금영이 형이 전화를 받았어요. 그때 부탁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의뢰하고 싶다고요. 금영이 형이 천수 형님한테 바로 연락했고, 오늘 시간 비는 형님들 다 모일 거예요.]
“다 같이 모여서 뭘 하려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탈바가지 뒤집어쓴 새끼들 때려잡을 거예요. 우리들이나 다른 형님들이나, 그 새끼들 잡아 쳐 죽인다고 이만 북북 갈고 있었잖아요. 형은 지금 어디예요? 학원이에요?]
“난 XX동에 있다. 잠깐 친구 좀 만난다고 나와 있어.”
[알았어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그럴 필요 없다. 장소만 알려 줘. 내가 그쪽으로 갈 테…….”
사람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똥수 자식은 전화를 툭 끊었다. 망할 자식. 성질 급한 건 제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어차피 다시 전화를 해 봤자 받지도 않을 게 뻔하다.
“가야 되는 거예요?”
옆에서 윤영이가 흰 입김을 뿜으면서 물었다.
“응. 미안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네. 정말 미안하다. 한우는 나중에 사 줄게.”
“난 상관없어요. 급한 일이라면 가 봐야죠. 친구분이 이리로 데리러 온다고 했죠? 그럼 친구분 올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날씨도 추운데 먼저 집에 가.”
제발 부탁이니 먼저 좀 가 줄래?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내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넋이 반쯤 나간 것 같은 얼굴로 녀석은 밤거리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아, 배고프다” 입술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저거 사 줄까?”
마침 눈앞에 잉어 빵을 파는 노점이 있기에 물어봤다. 녀석은 말도 없이 잉어 빵 노점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발 늦게 따라갔더니 이미 녀석이 천 원짜리 두 개를 노점 주인에게 내밀고 있었다. 윤영은 종이봉투 안에 가득 담긴 손가락 크기만 한 잉어 한 마리를 꺼내 내게 먼저 내밀었다.
“얘는 뭐냐? 미니 사이즈네?”
“미니 잉어 빵 처음 봐요? 난 큰 거보단 작은 애가 더 맛있던데.”
“하하하. 귀엽다, 야.”
난 손가락 사이에 쥔 빵을 입 안에 탁 털어 넣어 우물우물 씹었다. 확실히 작은 녀석이 더 바삭하고 고소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잉어 빵은 밀가루 맛밖에 나지 않는 것도 있던데. 둘이 나란히 서서 순식간에 봉투 안에 든 잉어를 다 먹어 치웠다. 일곱 개 천 원이니까 2천 원어치면 열네 개. 분명히 녀석보다 내가 두 개 정도는 더 먹었을 텐데도 어째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 입맛만 쩝 다시며 잉어 빵 노점을 쳐다보았다.
“왜요? 더 먹고 싶어요?”
“아냐. 난 단거 별로 안 좋아해.”
차마 먹고 싶어 환장하겠다는 말은 못 하고 침만 꼴깍 삼키면서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예쁘게 진열된 잉어들이 눈앞에 보이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애써 시선을 돌려 지하철역 출구 쪽을 바라봤다. 생긴 것도, 나이 대도 다양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하에서 쏟아져 나왔다.
“형, 무대 위에 올라간 적 있다면서요?”
옆에서 새어 나온 뜬금없는 질문에 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안다. 클럽 러스트의 스트립쇼에 출연한 적 있냐는 얘기다. 이 녀석에게 나불나불 떠들어 댄 건 클럽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놈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응. 명진 형이 딱 한 번만 무대에 올라가 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말이야.”
“전 그런 거 별로예요. 몸 파는 짓이나 다를 바 없잖아요. 돈 몇 푼 받고 무대 위에 올라가서 엉덩이 흔들어 대는 사람들, 솔직히 좀 천박해 보여요.”
“몸을 파는 건 아니지. 그 녀석들은 돈을 받고 사람들한테 쇼를 보여 주는 거야. 돈을 주는 건 거기 사장이지 손님들이 아니잖아.”
“쇼가 끝난 뒤에 손님한테 돈 받고 2차 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사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무대 위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 않아요?”
“그럼 무대 위에 올라갔던 나도 몸 파는 남창이었던 거네?”
“누가 그렇대요? 난 그냥 내 생각이 이러니까 형이 두 번 다시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형은 이제 내 거잖아요!”
발끈해서 꽥꽥대는 게 귀엽기만 하다. 좋아, 좋아, 진짜 좋아!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좋아하는 강아지 같다, 이 녀석은.
“알았어. 윤영이, 네가 그러라면 그래야지. 네가 하지 말라는 건 절대로 안 해.”
실실 웃으며 녀석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서 나를 흘겨봤다. 평소였다면 저 불룩 튀어나온 입술에 키스해 줬을 텐데. 본능에 따르기엔 구경꾼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윤영아. 우리 잉어 빵, 딱 2천 원어치만 더 먹을까?”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을 하고 있던 녀석도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못 말려, 우리 형.”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면서 노점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5천 원짜리 지폐를 멋지게 내밀었다. 노점 주인은 잉어 서른다섯 마리에, 서비스라며 세 마리를 더 넣어서 두 개의 종이봉투에 담아 주었다. 나는 봉투를 품에 꼬옥 껴안고서 조그만 빵 덩어리 두세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먹어 치웠다. 그 작은 걸 반씩 나눠서 오물오물 씹던 윤영이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난 그냥 바보처럼 씨익 웃었다. 삐친 애 달래는 데엔 그저 웃는 게 최고다.
볼을 가득 부풀려 빵 쪼가리를 씹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동수 놈이 나를 찾아 역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전화였다. 바로 역 앞에 있다고 해도 이놈이 “어디? 어디라고요? 어디 있는데? 대체 어디 구석에 숨어 있어요? 아우우!” 하면서 오히려 짜증을 낸다.
“역 앞이라고! 자식아! 커다란 감자탕 집 앞! 잉어 빵 노점 맞은편!”
빵 부스러기를 사방으로 튀기며 소리를 빽 질렀다. 옆에서 윤영이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내 이런 모습은 처음 볼 거다. 난 녀석 앞에선 언제나 쿨하고 멋진 모습만 보여 줬으니까. 헛험! 흐흐흐흠! 헛기침을 하면서 핸드폰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얼른 닦았다.
“이 녀석이 심각한 길치라서. 매번 짜증 나 죽겠다니까. 어떨 땐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도 못 찾아요, 이 자식은.”
“그런데 만나기로 한 사람, 저 사람 아니에요?”
녀석이 손가락으로 내 뒤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 미친 새끼…….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잇새로 비집고 나오는 소리가 이거였다. 녀석이었다. 똥수였다. 눈앞에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드는 저놈은.
치킨 배달할 때 쓰는 조그만 스쿠터에 쪼그려 앉아서 탈탈탈, 덜떨어진 엔진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데 정말로 모른 척하고 싶었다. 눈앞의 저놈이 그냥 지나가는 치킨 배달부였으면 싶었다. 진심으로.
“형! 동추 혀어엉!”
그런데 이놈이 내가 자길 못 알아본 것이라 생각했는지 헬멧까지 벗고 외치는 거다. 뭐가 그리 좋은지 찬 바람에 노출되어 벌겋게 익은 얼굴엔 빙구 같은 웃음이 한가득이다. 탈탈탈탈, 엔진 상태가 심히 걱정스러운 소리가 멈췄다.
동네 최고의 간판집 아저씨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미미네 치킨 로고 스티커가 떠억하니 붙은 배달용 박스를 뒤에 실은 스쿠터 위에서 똥수 놈이 씨익 웃었다.
“오래 기다렸죠? 형?”
이 자식은 지금 자신이 엄청나게 멋져 보일 거라고 착각하는 게 분명하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할리 데이비슨을 탄 근육발 끝내주는 미남이 늘씬하게 쭉 빠진 미녀들을 보며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내고 ‘굿모닝’ 하고 인사하는 그런 모습.
“그런데 옆에 계신 미인은 누구세요?”
어쩐지 오늘따라 만면에 번진 미소가 부담스럽다 싶었다. 옆에 선 윤영이를 여자애로 착각한 거다.
“안녕하세요. 박윤영이라고 해요. 동추 형 후배고요.”
윤영이가 먼저 살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여자치고는 낮은 목소리를 듣고도 녀석이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동수 자식은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두 손으로 윤영이의 손을 공손하게 잡았다.
“저는 한휘림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작은 치킨 가게를 하고 있고요. 나중에 치킨 한 마리 주문하시면 윤영 씨한테는 추가 금액 받지 않고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튀겨 드리겠습니다. 무도 팍팍 넣어 드리고 콜라 서비스도 해 드리고요.”
중얼중얼,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면서 녀석은 얼른 허리에 찬 가방에서 쿠폰 몇 개를 꺼내 윤영이의 손에 꼬옥 쥐여 주었다. 단골손님들한테나 나눠 주는 탄산음료 무료 쿠폰이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죽을 맛이었다. 윤영이 녀석이 분명 ‘동추 형 후배’라고 했는데도 네놈 눈에는 얘가 아직 여자애로 보인단 말이냐, 이 해태 눈깔아. 그리고 저 굵은 목젖을 봐라. 아무리 뽀얗고 예쁘장한 녀석이라 해도 자세히 보면 인중에 수염 민 자국도 보인다.
“하하, 네에. 나중에 꼭 배달시킬게요.”
윤영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동수 놈에게 붙잡힌 손을 슬쩍 잡아 뺐다. 그러고는 한 손에 쥐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저, 이거 좀 드세요. 아직 따뜻해요” 속살거리듯이 말하면서.
“아이고, 고맙습니다. 얼굴도 예쁘신 분이 마음도 비단결이셔. 예쁜 분이 주신 거라 그런지 꿀맛이네요. 꿀맛이야!”
커다란 입에 빵 덩어리들을 밀어 넣고 우적거리는 모습은 꿀단지 품에 안고 퍼먹는 한 마리 곰이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볼일 보세요.”
윤영이는 동수 놈한테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내게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웃음 띤 눈으로 날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전화해요.’ 앙증맞게 움직이는 입술이 전하는 말은 그거였다. 나도 웃으며 손가락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귓가에 갖다 대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동수 놈은 뒤돌아선 윤영이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만 봤다.
“형, 여자 친구죠? 그렇죠? 진짜 예쁘다. 연예인 같아요.”
“어유, 이 빙구야. 네놈 눈은 장식품이냐? 엉? 쟤가 나 부를 때 뭐라고 하데? 동추 형이라고 했냐, 안 했냐? 윤영이, 쟤 남자애야. 애가 좀 예쁘장하긴 하지만 어떻게 끝까지 쟬 여자애로 볼 수가 있냐? 가까이에서 보면 다들 쟤가 남자애란 걸 알던데.”
종이봉투 안에 남은 빵 두 개를 한꺼번에 입에 쑤셔 넣고는 스쿠터 핸들에 걸린 헬멧을 뒤집어썼다. 날 데리러 온다면서 배달용 스쿠터를 끌고 오다니. 덜떨어진 놈.
“혀엉! 지, 진짜 윤영 씨, 남자예요? 진짜요?”
“그래. 남자애라고, 남자애. 그리고 뭔 윤영 씨야? 쟤, 너랑 동갑이야. 그리고 야! 이 손바닥만 한 스쿠터에 어떻게 둘이 타냐!”
“그럼 윤영 씨, 아니, 아까 걔랑은 어떤 사이인 거예요?”
“아는 후배야. 아까 윤영이도 그렇게 말했잖아. 한똥수,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절대로 둘은 못 타지, 이거? 그럼 내가 이거 타고 갈 테니까 네놈은 버스 타고 와.”
“후배라면 대학 후배요? 고등학교 후배?”
“야! 이 자식아! 왜 그렇게 집요하게 캐물어? 내가 네놈 애인이라도 되냐!”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선 입 안에 든 빵을 우물거리며 씹었다.
윤영이를 여자애라고 착각했을 때엔 넋이 나가 있더니, 남자애란 걸 아니까 이런다. 내게 여자 친구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런 질문을 던진 거겠지. ‘형, 여자 친구죠? 그렇죠?’ 그 질문에 담긴 속뜻은 ‘여자 친구, 아니죠? 그럴 리가 없죠?’였을 테고.
이 녀석이 병아리처럼 보송보송했을 때부터 봐 왔다. 나를 친형제처럼 따르는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학용품도 사 주고, 좋은 데도 데리고 다녔다. 장대같이 크기만 한 놈이 늘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못 견디게 귀여웠다.
그런데 이제 이 녀석은 귀엽지가 않다. 콩나물 대가리처럼 쑥쑥 자라고, 옆으로도 비대해지더니 보송보송 병아리가 한 마리 곰이 됐다. 거대한 곰 한 마리가 되어서도 여전히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고 나를 따라다니려 하는데, 문제는 예전처럼 그런 게 귀엽게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거다.
제발 이제 그만 예쁜 여자 친구 좀 사귀었으면 좋겠다 싶다.
“내가 여자애 하나 소개해 줄까? 괜찮은 애 있는데.”
안 그래도 만날 때마다 키 크고, 덩치 좋은 젊은 녀석 하나 소개해 달라고 졸라 대는 여자가 떠올라 말을 꺼내 봤다.
“됐어요. 누가 여자 소개해 달랬나.”
그랬더니 볼멘소리로 구시렁대면서 스쿠터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부릉부릉, 탈탈탈, 요란한 소리를 내뿜으며 시동이 걸렸다.
“네가 이거 타고 갈래? 그럼 내가 버스 타고 갈까?”
“어떻게든 잘 끼어 타 봐요. 천수 형님네 가게 근처에서 모여 가기로 했으니까.”
나는 운전자와 배달 박스 사이의 비좁은 틈을 한참을 노려보았다.
천수 형님네 가게라면 버스를 타고 가기엔 애매한 위치다. 그렇다고 지하철을 타기엔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택시를 타기엔 윤영이 녀석이랑 데이트하느라고 돈이 없고…….
하는 수 없이 나는 스쿠터 사이의 틈 안으로 몸을 끼워 넣었다. 간신히 엉덩이를 비집고 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하반신이 동수 녀석의 허리 부분에 철썩 붙는 꼴은 면할 수 없었다. 꼼지락대며 움직여 봤지만 아랫도리가 녀석의 두꺼운 허리 부분에 더 짓뭉개지기만 할 뿐,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꽈, 꽉 잡아요. 떨어질라.”
동수 녀석은 귀까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어째 내쉬는 숨결도 거칠어진 듯하다. 절대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녀석의 허리춤을 움켜쥔 거지. 본의 아니게 녀석의 등에 상체를 바짝 붙이고, 어깨에 턱을 기댄 상태가 되고 말았다. 녀석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킁킁킁, 동물이 냄새를 맡는 것 같은 소리까지 내더니 짜증을 낸다.
“왜 이렇게 형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요? 여자도 아니고.”
“향기가 나면 좋은 거지 왜 짜증을 내? 미친놈아!”
“아, 씨. 기분 이상해지잖아요. 여자들한테서나 나는 냄새나 풍기고 말이야.”
“너한테선 치킨 냄새랑 이상야릇한 냄새가 나서 내 기분이 별로거든? 빨리 출발이나 해, 새끼야.”
나도 짜증을 내며 놈의 태평양처럼 넓은 등짝을 후려쳤다. 녀석은 계속 뭐라 구시렁대면서 나한테 뺏긴 헬멧 대신 점퍼에 달린 털이 수북한 후드를 뒤집어썼다.
탈탈탈, 소리를 내며 스쿠터는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미미네 치킨 배달용 스쿠터에 성인 남자 둘이 찰싹 달라붙어 탄 꼴이 신기한지, 도로 위의 운전자들은 다들 한 번씩 우리를 쳐다보고 지나갔다.
똥수 녀석이야 그렇다 쳐도 난 오늘 윤영이를 만난다고 때 빼고 광냈다 이거야.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재킷에 붉은색 머플러, 물 잘 빠진 프리미엄 진에 진갈색 소가죽 구두를 매치한 나의 모습은 화보에서 갓 빠져나온 모델 뺨치게 멋질 거란 말이다. 끝내주게 섹시해 보일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런 놈이 치킨 배달 스쿠터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신기해 보이기도 할 거다.
더 슬픈 건 이런 모습으로 탈바가지 뒤집어쓴 변태 새끼들을 족치러 가야 한다는 거다. 이런 끝내주게 멋진 모습은 윤영이나, 클럽의 뽀송이들한테나 보여 줘야 하는데.
신호 대기에 걸려 멈춰 섰다. 라인 앞에 차들 몇 대와 나란히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등 뒤에서 빠라바라바라밤, 쌍 팔 년도 폭주족들 전문 빵빵이 소리를 내며 바이크 몇 대가 차들 사이를 비집고 달려 나왔다.
우리들이 탄 스쿠터와 비슷한 탈탈이들이 슝, 슈웅, 포탄처럼 튀어나왔다. 아직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총 세 대의 바이크는 사거리 밖으로 달려 나가 오른쪽으로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요즘 애새끼들은 대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중한 엔진 소리와 함께 바이크 한 대가 차량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면 아래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백상아리처럼. 우리들의 스쿠터나, 방금 전 지나간 탈탈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잘 빠진 수입 바이크였다.
번쩍거리는 미끈한 차체의 형태가 가히 환상적이었다. 바이크 위에는 두 명의 젊은 놈들이 타고 있었는데, 둘 다 타고 있는 바이크만큼이나 번쩍거리는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놈들도 우리들처럼 정지선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모든 탈것들이 멈춰 선 도로 위에서 두 놈을 태운 바이크는 부릉, 부릉, 연신 위협적인 엔진 소리를 토해 냈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놈들일걸요, 쟤들?”
나와 마찬가지로 바이크 쪽을 쳐다보던 동수가 입을 열었다.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알아?”
“풍기 문란 위원회인지 풍기 단속 위원회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애새끼들 잡아 패는 걸 직접 봐서 알거든요. 그때 그놈들도 저런 헬멧 쓰고 애들을 무슨 토끼처럼 구석에 몰아서 삼단봉으로 두들겨 패더라고요. 와, 되게 살벌하데요. 아까 신호 무시하고 튄 놈들 잡으러 가는 걸 거예요.”
“도망친 놈들 잡으러 가는 놈들치고는 너무 느긋한 거 아니냐? 신호 지킬 거 다 지키면서.”
“그놈들이 어디 쟤들뿐이겠어요? 다른 팀이 연락받고 아까 튄 놈들을 잡으러 갔겠죠. 아까 그 새끼들, 오늘 죽도록 얻어터지겠네.”
무심하게 도로 앞쪽을 바라보던 뒤에 탄 헬멧 놈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놈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기에 나도 놈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둘 다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헬멧 놈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은색 삼단봉이었다. 놈은 장갑 낀 손가락 끝으로 삼단봉 끝을 만지작댔다.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면서.
“저 새끼, 지금 우리한테 시비 거는 거 맞죠?”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낸 건 동수였다. 녀석은 육두문자를 잇새로 내갈기며 인상을 팍 썼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삼단봉 끝을 쓰다듬는 놈의 손가락의 움직임이며, 장갑의 거친 표면까지 똑똑히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걸 보는 나도 어째서인지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하지만 난 무기라고 할 만한 것 하나 없는 맨손이었다. 난 손가락을 움직여 손바닥을 긁었다. 손바닥 안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정지선 앞에 멈춰 서 있던 차량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을 태운 스쿠터도 움직였다. 우리는 곧장 앞으로 이동하고, 놈들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탓에 더 이상 놈들을 볼 수는 없었다. 동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저놈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던 어린놈들에게 매운맛을 단단히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10대 미성년자다. 그런 애들을 구석까지 몰고 몰아서 삼단봉으로 두들겨 패다니.
신호대기를 무시하고 달려 나간 스쿠터에 탄 애들은 하나같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겁에 잔뜩 질려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토끼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값비싼 탈것을 타고, 무기까지 손에 들고서 유유히 도망친 토끼를 쫓는 놈들은 노련한 사냥꾼 그 자체였다.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 또래 애들을 괴롭히고, 금품을 빼앗는 악질적인 불량 청소년들에게 피해를 당한 학생들이 사이트에 신고 글을 올리면 그곳 운영진들이 가장 악질적인 놈들부터 손봐 준다고 소문난 곳. 하지만 소문대로 정말 그곳이 인성 글러먹은 애새끼들, 정신 차리게 손 좀 봐 주는 곳인 걸까.
나를 빤히 바라보던 헬멧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얼굴도 볼 수 없고,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건 사람이 분명한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기분. 그것은 마치 갈색 가면이 내 위에 올라타 나를 빤히 바라보던 때, 그때 느꼈던 끝내주게 더러운 기분과 비슷했다.
*
*
차 안에 탄 사람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밤, 운전대를 쥔 것은 박천수였다. 우리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서울 지역 대표’라는 직함을 걸고 있지만 자기 차는 자기가 운전해야 속 편한 법이다.
연신마트 스티커가 붙은 10년 된 박천수의 봉고차 안에는 나와 노금영, 동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 사내놈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차 안은 찜질방처럼 후끈했다.
“금영 형님. 김태민 그 새끼, 얼굴 봤어요?”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기식이 놈이 입을 열었다. 시트에 기대앉아 핸드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노금영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약속 장소에 나가 있었더니 퀵서비스로 물품만 보냈더라.”
“전에도 김태민, 그 새끼가 일을 의뢰했으니까 형은 그 새끼 얼굴을 봤을 거 아니에요?”
“그때 그 새끼가 알려 준 사무실로 갔을 때, 나한테 박스를 건네준 건 새파랗게 젊은 놈이었어. 그때 갔던 사무실 자체가 사라졌다고 얘기했었지? 전화번호도 바꿨다고. 아마 그때 나한테 박스를 건네줬던 놈도 아르바이트생이었을 거야.”
“대체 그 새끼는 뭣 때문에 그렇게 정체를 꽁꽁 숨기고 있는 거래요?”
“네놈도 밤일꾼 일 한 지 꽤 됐으니까 알 거 아니냐. 우리한테 일 맡기는 놈들이 어디 떳떳하게 자기 신분 밝히데?”
기식이가 욕을 중얼거리며 모자를 벗고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모자 아래 드러난 얼굴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일전의 ‘귀면’들과의 싸움 때 생긴 부상 때문에 얼굴 전체를 갈아엎었다더니.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으쌰,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며 상반신을 일으켜 뒷좌석으로 팔을 길게 뻗었다.
각종 식품 박스와 공구, 옷가지들이 쌓인 공간에 얌전히 놓인 박스 하나가 있다. XX 식품 라면 박스다. 마트를 하는 박천수의 물건 같지만 저건 노금영이 퀵서비스로 받아 가지고 온 의뢰 물품이었다.
“뭐 하는 거야? 새끼야!”
내가 팔을 있는 힘껏 뻗어 라면 박스를 들어 올리자 노금영이 외쳤다.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동수도, 머리칼을 쥐어뜯던 기식이와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다른 사람들, 운전을 하던 박천수까지도 전부 눈을 부릅뜨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냐니까!”
“보면 몰라요? 상자에 든 게 뭔지 확인해 보려는 거지.”
“너 미쳤냐! 야, 임똘추!”
라면 상자 위에 붙은 테이프를 뜯다 말고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지르는 노금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은 안에 든 게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대체 뭐가 들었기에 탈바가지들이 기를 쓰고 이걸 빼앗으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냔 말입니다.”
노금영은 할 말을 잃고 인상 쓴 얼굴로 침만 꼴깍 삼켰다. 다들 침묵한 채 내 얼굴과 내 무릎 위에 놓인 상자만 번갈아 쳐다봤다.
나도 아무 말 없이 테이프를 마저 뜯었다.
찌이익, 소리와 함께 테이프가 제거되었다. 뚜껑을 열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는 솜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박스 안에 가득 담긴 솜을 헤집자 에어캡에 돌돌 말린 뭔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내 팔뚝만 한 크기였다. 딱딱했고, 길고, 얇았다.
테이프가 둘둘 말린 에어캡을 거칠게 잡아 찢었다. 말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 침만 꼴깍꼴깍 삼키면서 내가 하는 짓을 지켜만 봤다. 마침내 에어캡을 완전히 떼어 내고 안에 든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달봉 형님이었다.
“뼈…… 같은데요.”
그리고 질문에 답한 것은 동수였다. 다들 숨을 집어삼켰다. 녀석의 말대로였다. 내가 손에 쥔 물건은 뼈였다. 누가 봐도 살아 있는 생물의 뼈가 분명했다.
“소뼈나 동물 뼈인가.”
노금영이 내가 쥐고 있는 뼈를 유심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기식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소뼈는 확실히 아니에요. 동물 뼈도 아니고. 이거 아무래도…… 사람 다리뼈 같아요.”
나를 비롯한 차 안에 탄 모두가 일순 숨 쉬는 것을 멈췄다. 소름 끼치는 정적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겨우 멈췄던 숨을 쉬기 시작했지만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빠르게 뛰어 호흡이 절로 가빠졌다.
기식이 놈은 정육점 집 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소와 돼지 시체를 보고 자란 놈이 소뼈 하나 구분 못 할까.
뼈를 쥔 내 손이 경련하듯 뒤틀렸다. 손에서 놓친 뼈는 다시 라면 상자 안으로 다이빙했다. 포장이 벗겨져 알맹이가 드러난 의뢰 물품은 다시 상자 속 가득 담긴 솜 안에 포옥 파묻혔다.
일전에 노금영, 동수와 함께 감귤 박스 안에 든 게 신체 장기 같은 게 아닐까 떠들어 댔던 적이 있었다. 안에 든 게 신체 장기든, 시체든 알 게 뭐야. 우리는 이 박스를 무사히 배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때 내 생각은 그랬다. 노금영과 동수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상자 안에 인간의 신체 일부분이 들어 있었다니.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은 뼈뿐이지만 어찌 됐든.
“그럼 그때, 우리들이 배달하려 했던 상자 안에도 이런 게 들어 있었다는 거 아냐. 니미, 더러워 죽겠네. 왜 이딴 걸 배달시키고 지랄이야? 지랄이.”
기식이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김태민이란 새끼는 연쇄 살인범이나 그런 거 아닐까요. 토막 낸 시체의 뒤처리를 위해서 우리한테 이런 일을 의뢰하는 건…….”
“살인범 새끼가 왜 자기 돈을 처들여 가면서 자기가 죽인 시체 일부분을 배달시키겠냐? 장기 밀매 업자라면 몰라도.”
자기가 무슨 영화 속 탐정이라도 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껄이던 동수가 노금영의 말에 “아, 그것도 그렇다” 하며 손뼉을 탁 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천달봉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상자 안에 든 건 그냥 뼈잖아. 장기 밀매를 하려면 사람 몸에서 갓 꺼낸 장기를 아이스박스 같은 데 넣어서 배달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말이에요. 차라리 안에 장기가 든 아이스박스가 있었다면 놈의 정체를 파악할 수나 있지. 사람 뼈? 장난하나. 미친 새끼. 사람 뼈를 왜 배달시켜? 이딴 걸 받으려고 했던 새끼들은 또 뭐고? 아주 쌍으로 미쳤구먼, 쌍으로 미쳤어!”
노금영은 품 안에서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입술 사이에 끼워 넣기만 했을 뿐, 불을 붙이진 못했다.
박천수의 차 안에서는 무조건 금연이었다. 덜떨어진 똥수 자식과는 달리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른 기식이가 사탕 봉지를 꺼내 들었다. “요즘 금연 중인데 자꾸만 입이 심심해서요.” 묻지도 않았는데 중얼중얼 지껄이면서 노금영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사탕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봉지를 깐 사탕을 입 안에 던져 넣어 쭉쭉 빨았다.
자두 맛 캔디다. 어렸을 때 즐겨 먹던 사탕이었는데 이게 아직 나오는 건가. 혀로 살살 굴려가며 빨아 먹는 사탕 맛은 예전과 똑같았다. 성질 급한 노금영은 으득으득 씹어 먹기 바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입을 다물었다. 사탕 깨물어 먹는 소리, 기식이가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아예 기식이에게서 봉지를 빼앗은 노금영이 사탕 껍질을 까는 소리. 작고 일상적인 소음들만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발아래에 놓여 있는 검은 스포츠백 안에서 작은 칼 몇 개를 꺼내 바지춤, 양말 안, 코트 안주머니 속에 끼워 넣었다. 바지춤에 칼을 넣기 위해 상의를 끌어 올리는 꼴을 빤히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먼저 눈을 확 깔았다.
“칼보다는 이게 나을 거예요.”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동수 녀석이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손도끼였다. 녀석의 말대로 칼보다는 나을 수 있겠다 싶어 챙겨 들었다. 기식이와 노금영, 천달봉도 가방에서 무기를 하나씩 꺼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찌르고 쑤신다고 죽는 놈들도 아니니까, 목을 확 따 버려. 팔다리를 뭉개 버려서 움직임을 봉쇄하든가.”
천달봉이 가방 안에서 장도리를 꺼내 들고 휘젓는 시늉을 했다.
그는 나이 42세에 대기업에서 해고당해 조그만 커피숍을 하는 남자였다. 그의 가게에 수시로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단골 커피숍, 친절하고 우아한 사장님이 목을 확 따 버리라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장도리를 휘두르는 사람일 줄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파주’라고 쓰인 허공에 매달린 표지판을 훑고 지나갔다.
사방이 유백색의 뭔가로 뒤덮여 있었다. 도로 양옆의 가로등 불빛이 희뿌옇게 흐려져 처녀 귀신 옷자락처럼 아른거렸다. 바로 앞에서 달려가는 차의 뒤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안개가 굉장하네.”
박천수가 뿌연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근방은 원래 유난히 안개가 잘 끼는 지역이다. 하루 종일 날씨가 흐렸던 데다, 낮에 잠깐 비가 왔던 터라 도로 전체가 거대한 안개의 막으로 둘러싸였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들만이 남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뿌연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칠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차선뿐이었다.
박천수가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가 맞지 않아 치지직 치지직, 하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치지직대는 소음 속에서 단조로운 기계음이 흘러나와 정각 12시임을 알렸다. 그 순간 품속에서 진동이 울려 꺼내 든 핸드폰 액정 화면의 숫자도 정확히 ‘12:00’을 찍었다.
[동추 선생님. 지금 전화드려도 될까요? 여쭤볼 게 있어요.]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아이에게서 온 문자였다.
문자를 보낸 이는 한나민이었다. 녀석에게서 이런 식의 문자가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 글자를 찍었다.
[미안. 나민아. 선생님이 지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문자를 완성해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놈들이다!”
박천수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외쳤다.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들의 눈앞, 그러니까 우리들을 태운 차 앞.
도로 한가운데에 분을 처바른 여인의 얼굴 같은 새하얀 가면을 쓴 놈이 팔다리를 벌리고 나타났다. 자신의 몸으로 달리는 차를 막겠다는 듯이.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난 탓에 박천수의 차는 속도를 늦추지 못한 채 도로 위를 내달렸다. 어차피 차에 치여도 멀쩡할 놈이라지만, 그것이 사람의 모습을 한 탓일까. 박천수는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틀었다. 차는 하얀 가면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박천수는 그대로 차를 세우지 않고 도로를 벗어나 샛길로 빠져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형님, 왜 도망가요? 당장 차 세우고 붙어 싸워야죠!”
“그렇다고 도로 한복판에서 일을 벌일 순 없잖아. 어차피 저것들은 우릴 따라오게 돼 있어!”
기식이와 박천수가 거의 동시에 외쳐 댔다. 박천수의 말이 맞았다.
나는 백미러로 방금 전 하얀 가면을 쓴 놈이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달리는 차에 뒤지지 않는 속도였다. 백미러의 좁은 시야에 하얀 가면의 옆으로 칠흑의 어둠과 똑같은 검은 가면을 쓴 놈 하나가 늘어난 것이 보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또 한 놈이 늘었다.
“저것들은 대체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거야!”
아예 몸을 틀어 뒤를 바라보고 있던 노금영이 소리쳤다. 내가 백미러에서 시선을 뗀 그 순간, 하얀 가면이 허공으로 펄쩍 뛰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몇 마리인지 셀 수도 없는 귀면들이 박천수의 봉고차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도망치는 먹잇감이고 저것들은 굶주린 짐승 떼였다. 텅, 소리가 나더니 뒤쪽 차창에 한 놈이 찰싹 달라붙었다. 방금 전 내 시야에서 사라졌던 하얀 가면이었다. 또다시 텅, 터엉, 소리가 연이어 났다. 한 놈씩 차에 달라붙을 때마다 10년 된 고물 봉고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차체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놈들은 차 유리를 깨려고 발악을 했다. 차체를 타고 위로 올라간 하얀 가면이 앞 유리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앞 유리에 거꾸로 달라붙어 박천수의 시야를 가리고는, 주먹으로 유리를 두들겼다.
“다들 꽉 잡아라!”
박천수가 외친 순간, 우리는 최대한 몸을 낮춰 시트에 들러붙었다. 끼이이이익, 고막을 긁어 대는 쇳소리를 내며 차가 한적한 시골길 위를 현란하게 한 바퀴 돌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박천수의 운전 실력은 굉장하다. 젊은 시절 폭주족으로 이름을 날렸다더니 허풍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귀면들 몇 놈이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앞 유리에 붙어서 발악을 하던 하얀 가면도 나가떨어져 바닥 위를 뒹굴었다.
“준비됐냐?”
안전벨트를 푼 박천수가 뒤를 돌아보며 우리에게 물었다. 가방 속 잡동사니처럼 차 안 여기저기서 굴러다니던 우리들은 침묵했다.
“야, 임동추. 절대로 물건은 뺏기지 마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배달을 완료해. 물건을 받을 사람을 만나기로 한 장소가 저 앞에 있는 장어구잇집이야.”
나는 박천수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비게이션에 찍힌 방향은 분명 여기였다.
“그리고 금영이, 동수, 기식이, 달봉이. 너희들은 동추가 무사히 배달을 완료할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탈바가지들은 무조건 조진다. 알겠냐?”
“형님이나 기운 달린다고 쓰러지지나 마요.”
기식이가 픽 웃었다.
“새끼들 다 조져 놓고 우리도 언덕 위로 올라가서 장어나 구워 먹읍시다. 운동하고 난 뒤엔 장어 같은 보양식이 최고지.”
나도 지지 않고 입술을 열고 조잘댔다.
“저기…… 형님들. 전 장어구이는 고추장 양념 발라서 구운 거 좋아하는데요.”
“자, 나가자. 저것들 우리 기다리느라고 목 빠지겠다.”
동수도 이에 뒤질세라 한마디 거들었지만, 다들 녀석의 말은 듣지도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똥수 놈은 볼이 잔뜩 부풀어서 제일 마지막으로 기어 나왔다.
“형님들은 날 좋아하지 않아요. 왜 나만 미워할까. 난 막내인데.”
빵빵하게 볼을 부풀린 채로 꿍얼꿍얼하면서 내 옆에 붙어 섰다.
눈앞에는 놈들로 그득했다. 색깔도, 모양도 모두 다른 가면을 쓰고서 놈들은 우리들의 눈치를 살폈다.
낯선 존재를 앞에 둔 짐승 떼의 모습 그 자체다. 짐승들의 무리에는 털북숭이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있게 마련. 탈바가지들에게도 리더가 있었다. 무리들 가운데 가장 앞에 서서 우리들을 빤히 바라보는 하얀 가면이 놈들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야, 이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아! 뭐 하냐! 덤벼, 덤비라고!”
그리고 우리들의 리더 박천수가 불룩 솟아오른 똥배를 퉁퉁 치며 “으아악!” 악을 썼다.
놈들의 우두머리도 지지 않고 “카아악!” 괴성을 내지르면서 달려 나왔다. 그 순간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탈바가지들도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조종실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나라 하나가 지구 상에서 사라지는 시대. 망치, 야구 배트, 스패너 같은 무식한 흉기를 손에 쥔 우리들은 무기 하나 없는 맨몸의 적과 맞붙어 싸운다.
인간 대 귀신의 싸움. 누가 이기고 지고를 따지는 싸움이 아니다. 뺏기느냐, 뺏기지 않고 사수하느냐의 싸움이다. 눅눅한 안개로 뒤덮인 밤길 위에는 텅, 터엉, 하는 육중한 타격 음과 우리들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악에 받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주로 박살 내고, 두들겨 패는 건 우리들 쪽인데 당하는 놈들은 비명 소리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굶주린 짐승처럼 날뛰는 무리들 속에 숨어 있던 하얀 가면이 정확히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천달봉이 내 앞으로 튀어나와 달려드는 하얀 가면의 얼굴을 장도리로 후려쳤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가면의 머리통이 홱 돌아갔다. 깨진 가면 표면이 핏방울처럼 흩날렸다.
“동추야, 어서 가. 부탁한다!”
천달봉은 내 어깨를 떠밀며 외쳤다.
그의 얼굴은 벌써부터 땀에 흥건히 젖어 번들거렸다. 나는 라면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는 휙 돌아섰다. 봉고차의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유혈 난투극이 벌어지는 이 무대 위의 유일한 조명이었다.
봉고차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빛은 옅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암흑의 공간에 갇혔다. 안개 속에서 허공에 매달린 가로등 불빛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은 깜깜한 바다 위에서 발견한 등대의 불빛과도 같았다. 나는 안개 속에서 보이는 노란 불빛을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누군가 외쳐 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웅웅대며 울렸다. 지척에서 든든한 동료들이 내 앞길을 터 주고 있다. 그런데도 나 혼자만이 이 미지의 세상에 고립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눈앞에 시꺼먼 한옥집이 드러났다. 장어구잇집이 아니라 한정식집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한옥이었다.
주차 공간에는 중형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안은 어두웠다. 장어구잇집 안도 시꺼멓기만 했다. 이곳에서 물건을 전해 받기로 한 사람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1시였다. 핸드폰 액정 화면에 찍힌 숫자는 12시 25분.
하지만 과연 올까. 물건을 전해 받기로 한 사람에 대해선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일을 의뢰한 김태민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김태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박스 안에 든 뼈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체 왜 귀면들은 이것을 노리는 것인지.
우리는 이미 한 번씩 다들 의뢰받은 물품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놈이 우리들에게 다시 일을 의뢰한 것은 왜일까.
이런 일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돈을 처바르기만 한다면 사람까지 죽여 주는 놈들도 있다. 결국 김태민은 비교적 싼값에 우리들을 이용해 먹겠다, 이거다. 게다가 귀면 놈들에게 호되게 당한 우리들이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을 것이란 점을 이용한 것이겠고.
놈은 우리들이 귀면들에게 물건을 빼앗겨도 상관없는 게 아닐까. 확실한 일 처리를 위해서였다면 더 많은 돈을 들여 우리 같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밤일꾼들을 고용했겠지.
김태민의 목적이 물건을 제삼자에게 배달하는 게 아니라, 이 물건을 이용해 지하 어딘가에 숨어 있던 ‘귀면’들을 기어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면?
등 뒤에서 스스스, 스스스, 바람결에 나뭇잎 따위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라면 박스를 손으로 헤집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 있던 뼈만 끄집어내고, 박스는 바닥에 버렸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같은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안개 속에서 시꺼먼 형체가 보였다. 박스 안에서 빼낸 뼈를 바지춤에 쑤셔 넣고는 코트를 단단히 여몄다. 자유로워진 손에는 손도끼를 잡아 쥐었다.
시꺼먼 형체가 가까워지고 있다. 놈이다. 놈이 분명하다. 갈색 가면, 네놈이렷다.
“캬아악!”
아니다. 안개를 뚫고 내게 달려든 것은 흰색 가면 놈이었다. 시끄럽게 포효하며 휙 날아 달려드는 놈의 머리를 손도끼로 후려쳤다.
후려친 손도끼에 흰색 가면의 아랫부분이 빠악,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놈도 평범한 인간처럼 내 회심의 일격에 턱뼈가 으스러졌다. 가면이 깨져 드러난 턱 부분이 함몰되고 뭉개진 게 보였다. 하관이 부서져 입조차 다물어지지 않는 꼴을 하고서 놈은 팔을 부웅 휘둘렀다.
이미 천달봉이 신나게 두들겨 패 놓은 상태인 터라 놈의 움직임은 둔하고 느렸다. 기이하게 각도가 비틀어진 왼팔이 놈이 움직이자 덜렁 흔들렸다.
나는 상반신을 비틀어 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훤히 드러난 놈의 명치를 주먹으로 올려붙였다. 부서진 입에서 짓눌린 신음을 흘리며 놈이 몸을 애벌레처럼 둥글게 말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보니 한쪽 허벅지에 단도가 박혀 있는 상태였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놈들이니 금세 일어나 덤벼들 터. 나는 손도끼를 높이 쳐들고서 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얀 가면을 쓴 얼굴 반쪽이 날 쳐다보았다. 가면 위에 찍힌 검은 점 두 개. 그리고 벌어져서 타액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를 질질 흘리는 입.
뭔가 이상했다. 놈에겐 이가 하나도 없었다. 얼굴 아랫부분을 뒤덮고 있는 피부 상태도 심상치가 않았다. 게다가 놈의 입에서 풍기는 이 지독한 악취.
“네놈들은 정말 인간이 아니구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중얼거림에, 내 발아래에 주저앉아 날 올려다보던 하얀 가면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냐? 너희들은 대체?”
질문에 대답할 리가 없다. 놈의 입에선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긴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아닌 짐승의 옹알거림에 가까웠다.
나는 손을 뻗어 날 올려다보는 하얀 가면의 끝을 잡아 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가면을 움켜쥐어 떼어 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놈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사방으로 뻗은 머리칼도 윤기 하나 없는 지푸라기 같았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귀면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두 눈이 있어야 할 부분은 뻥 뚫려 있었고, 코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얼굴을 뒤덮은 피부는 군데군데 벗겨져 시뻘건 속살이 드러나 있다. 두 눈이 없는데도 놈은 눈앞에 있는 나를 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뭉개진 코끝을 벌름벌름 움직여 냄새를 맡아 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놈이 그나마 성한 오른팔을 내 쪽으로 뻗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 했다. 시꺼멓게 때가 탄 붕대에 감긴 손가락 끝에는 손톱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놈에게서 풍기는 악취는 썩은 내였다. 살아 있는 것이 죽어서 썩어 가며 내는.
귀면. 가면을 쓴 귀신 놈들. 우리가 놈들에게 붙여 준 이름이다. 그런데 정말로 살아서 움직이는 귀신 놈들일 줄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은 없어도 귀는 제대로 뚫려 있는지 놈이 내 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부서져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하고서 놈은 내게 다시 한번 달려들려고 했다. 놈이 위로 튀어 오르려 폼을 잡는 순간, 나는 손도끼로 놈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놈이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란 것을 눈으로 확인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조건 박살 내고, 뭉개고, 조지는 거지. 내 안에 숨어 있던 잔인한 폭력 성향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지금껏 꼭꼭 봉인시켜 두었던 잔악한 본성이 상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돈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안의 잔악함을 제어하기 위해 ‘밤일’을 시작했다. 나는 잔인한 놈이었다. 태어나 자란 주위 환경부터가 그랬다. 무자비한 폭력이 당연시되는 환경에서 자랐고, 나 역시 사람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휘둘렀다.
내게 있어서 세상은 무법천지의 정글이었다. 나는 무조건 강해야만 했다. 나는 무조건 사람들 머리를 짓밟고서라도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상대방을 물어뜯고서라도 내가 그 위에 서야만 했다. 그래야만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짐승 그 자체였다. 약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어미의 피 웅덩이 속에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발악을 해야만 했던 짐승이었다.
그런 나를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 주었던 사람. 내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끊임없는 관심으로 나를 지켜봐 주었던 사람. 그 여자 덕분에 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멀쩡한 인간으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저놈은 짐승이야, 짐승. 저놈 몸속에 흐르는 피가 어디 좀 더러워야지. 저놈 아비와 함께 저 애새끼도 함께 없앴어야 했어. 넌 호랑이 새끼를 보살핀 거야. 언젠가 저놈은 너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를 잡아먹으려 들 게다!>
<안 됩니다, 어르신. 안 됩니다! 아직 어린애예요. 이 애가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저리 비켜라! 너까지 다친다!>
<차라리 절 죽이세요. 저 애를 죽이시려거든 저부터 죽이셔요! 저 애는 제 아이입니다! 제 새끼예요!>
오래전 내 속에 숨은 흉포한 본능과 함께 상자 속에 봉인시켜 두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녔다. 기억 속의 나는 짧은 팔다리를 한 어린애였다. 내 소중한 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못된 노인네를 노려보는 어린애의 커다란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만하지? 이젠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속삭이는 듯한 고요한 저음이 내 귓가를 적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이 땀으로 흥건했다. 잘게 다진 고깃덩이 같은 것이 내 몸 아래에 깔려 있었다. 손에 쥔 손도끼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속이 좀 시원해졌어?”
다시 한번 아까의 낮은 저음이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꽂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나를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을 한 갈색 가면이 놓여 있었다.
“너무하네. 지금 꼴은 저래도 저놈도 살아 있을 땐 당신이나 나 같은 인간이었는데.”
놈은 내 몸 아래 깔린 하얀 가면이라 추정되는 고깃덩이를 흘끔 바라보며 쫑알거렸다. 나는 예고도 없이 갈색 가면을 향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놈이 굽히고 있던 상반신을 펼쳐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손도끼를 피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용수철 인형처럼 튀어 올라 쉼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마침 잘됐다. 나는 지금 고삐 풀린 황소 같은 상태였다. 지금 상태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무조건 달려들어 뜯어먹을 수 있을 터였다.
갈색 가면은 여전히 맨손이었다. 마치 날짐승처럼 재빠르다. 공기처럼 가볍다. 새처럼 날고 뛴다. 고무공처럼 통통 튄다. 놈은 인간이긴 하지만,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무리 네놈이 날고 기어도 결국은 찌르고 쑤시면 피를 흘리는 인간에 불과하지.
부웅, 공기를 가른 손도끼가 놈의 흩날리는 머리칼 끝을 잘랐다. 가면 표면이 빠가각,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위협적인 공격에 놈은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했다. 날 갖고 노는 건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 없이 내 공격을 피하기만 했던 팔을 썼다. 길쭉한 팔이 쭈욱 뻗어 나오는 것을 피하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놈이 비어 있는 옆구리를 반대쪽 주먹으로 쳤다. 아직 움직일 때마다 결리고 쑤시는 갈비뼈 부근이었다. 나는 미처 억누르지 못한 비명을 토해 내며 휘청거렸다.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이제 몸 생각해야 할 나이일 텐데.”
갈색 가면이 옆구리를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쳐다보며 빈정댔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네놈 찢어 죽이려고 보양식 퍼먹고 힘 좀 비축해 놨거든. 오늘은 네놈 살점으로 국을 끓여서 퍼먹을래.”
“나도 오랜만에 포식하겠네.”
되지도 않는 유치한 농담에 비슷한 수준의 농담으로 응수하는 걸 보면 나이 든 놈은 아니다. 가면 밖으로 비어져 나온 머리칼은 까마귀 깃털처럼 윤기가 좔좔 흐른다. 후드가 달린 커다란 점퍼에 청바지, 운동화. 입고 있는 옷 스타일만 보자면 많아 봤자 20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이를 빠드득 갈면서 나는 손도끼를 다잡아 쥐었다. 네놈의 그 갈색 가면을 벗기고 드러난 얼굴에 오줌을 갈겨 주마.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발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오른쪽 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자 뭔가가 내 오른쪽 발에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방금 전 열심히 다져 놓았던 하얀 가면이었다.
놀라운 건 내가 분명히 국거리용 한우 수준으로 잘게 썰어 놓았는데 내 발에 달라붙은 놈은 비교적 온건한 형체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귀면에게 붙잡힌 발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움켜쥔 힘이 얼마나 센지 오른쪽 발을 바닥에서 뗄 수조차 없었다. 놈은 필사적이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내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뿐일 테니까.
“놈들은 살점을 믹서기로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 놓아도 금방금방 재생하거든. 상대방이 기운이 달려서 쓰러지면 달려들어서 순식간에 먹어 치우지.”
어느새 갈색 가면은 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손도끼를 쥔 손을 쳐들었지만 허공에서 손목이 움켜잡혔다. 놈의 하얀 손이 으드득, 소리를 내면서 내 손목뼈를 압박했다. 악! 짧은 비명을 토해 내며 나는 손에서 든든한 아군이었던 손도끼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반대쪽 손을 쳐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경고했었지? 이 일, 그만두라고. 다시 한번 만나게 되면 당신을 죽일 거라고.”
“어디 한번 죽여 보든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양 손목을 움켜쥔 놈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왔다. 뼈가 으스러지는 기분이었다. 놈은 내 손을 끌어당겨 자기 다리 사이를 더듬게 했다. 딱딱했다. 내 손끝이 딱딱한 사타구니 위에 닿을 때마다 놈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갈색 가면을 쓴 얼굴이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뻥 뚫린 가면 위, 두 개의 동공 구멍 사이로 번들거리는 사람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냄새 죽이는데? 향수라도 뿌렸어? 당신 냄새만 맡아도 아랫도리가 불끈 서.”
“잘라 버린다, 변태 새끼야.”
놈이 킥킥 웃었다. 웃으면서 손으로 자기 아랫도리를 꾸욱 누르게 했다. 불뚝 선 놈의 것을 잡아 비틀어 버리고 싶었지만 손목을 단단히 움켜쥔 놈의 손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청바지 위로도 뜨거운 온도가 느껴지는 건강한 살덩어리였다.
차가운 가면의 표면이 한쪽 볼에 닿았다. 애무라도 하듯이 가면 표면이 내 귓바퀴를 쓸었다. 경직된 내 목덜미에 가면이 파묻혔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윤기 흐르는 머리칼로 뒤덮인 뒤통수는 동그랗다. 머리칼과 점퍼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는 희고 깨끗하고, 추위에 붉게 달아오른 귓불이 솜털로 뒤덮여 있는 게 보였다.
“당신 소원대로 죽여 줄게, 내 여기로.”
속삭이면서 놈은 청바지에 감싸인 다리를 음란하게 움직여 보였다. 변태 새끼.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새끼가 별짓을 다 한다.
“내가 이런 아기 손가락만 한 걸로 만족할 것 같냐?”
“크고 작은 건 껍질을 까 봐야 알지.”
보통 변태 새끼들은 자기 물건 작다는 소리에 발끈하게 마련인데, 이 새끼는 그런 것도 없다. 놈은 내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여전히 내 다리에 달라붙어 있던 귀면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을 저 안으로 끌고 와.”
낮게 깔린 놈의 목소리에 귀면이 내 몸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뭉개진 모습 하나 없는 멀쩡한 모습으로 내 등 뒤에 버티고 섰다. 갈색 가면이 내게서 몸을 뗐다.
아주 잠깐 자유로워졌던 양 손목은 또다시 등 뒤에 선 귀면에게 움켜잡혀 등 뒤로 뒤틀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놈은 내 팔을 꺾어 버릴 게 분명했다. 이놈은 나를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고 있는, 눈에 뵈는 것 하나 없는 굶주린 짐승이다. 괜히 허튼짓을 했다간 장어구잇집 앞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코트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갈색 가면이 아무렇지 않게 내 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안개 저 너머에 있을 동료들에게 걸려 온 전화일 것이었다.
곧 내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동료들이 달려올 것이다. 나는 지금만큼은 말 잘 듣는 개가 되어 주기로 했다.
갈색 가면은 계속해서 울려 대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안개를 헤치고 걸어 나갔다. 안개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한옥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불 꺼진 가게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애초에 가게의 문은 잠겨 있지 않은 상태였다.
주방이라 추정되는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어슴푸레한 불빛과, 현관 앞 중앙에 놓인 인공 연못.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물고기들이 참방참방 소리를 내면서 헤엄치고 있었다. 주방에 있는 냉장고가 돌아가는 굉음이 배경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주방을 지나자 디귿 자 구조의 한옥 내부가 나타났다. 갈색 가면은 지금은 손님들과 직원들이 오가는 통로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안마당이었을 공간에 멈춰 섰다.
“나를 인질로 써 봤자 별 효과 없을 텐데.”
“내가 왜 인질 따위를 잡아 둬야 하지? 어느 모로 보나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인데?”
그럼 안으론 왜 들어왔냐. 싸움에 적합한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서 아니었냐. 하하, 설마.
갈색 가면이 빙글 돌아서서 내 등 뒤에 선 귀면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귀면이 우악스럽게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서 장지문을 찢어발기듯 열었다. 나는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온돌방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갈색 가면이 신발을 신은 채로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난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슬슬 움직여 뒤로 물러섰다. 등에 딱딱한 벽이 닿았다. 가까이 다가온 놈이 내 발치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두 손과 두 다리를 마음껏 움직여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옷 속 여기저기에 넣어 둔 칼을 꺼내려 했지만 그것을 용납할 놈이 아니었다.
허우적대던 내 양팔을 귀면 놈이 움켜잡아 벽에 짓눌렀다. 두 다리를 이용한 공격도 그리 만족스럽진 못했다. 갈색 가면은 펄떡펄떡 뛰는 나를 겨우 한 번의 공격으로 무력화했다. 비겁한 새끼가 내 다리 사이를 꽈악 움켜쥔 것이다.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끔찍한 고통에 눈물까지 줄줄 새어 나왔다.
“얌전히 좀 있지? 당신한테 이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아.”
“새, 새끼…… 너 나 좋아하냐?”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지. 끔찍하게 사랑한다고.”
아, 그래. 그렇구나, 하고 쉽게 납득하는 내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놈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 대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냈었다. 그것이 순수한 의미의 호감인지, 변태 놈의 뒤틀린 애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은 좋아하는 여자애를 일부러 괴롭히는 어린 남자애 같았다. 지치지도 않고 펄떡대는 나를 두들겨 패고, 남자의 급소를 잡아 비틀긴 해도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난 놈의 적인데도 말이다.
놈이 내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겁지겁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팬티 밖으로 발기한 물건을 꺼내 들고서 내 다리 사이로 바짝 몸을 갖다 붙였다. 껍질을 까 보니 알맹이는 제법 실하다. 어린놈답게 발기한 각도도 훌륭하고, 크기도, 모양도 튼튼하고 그럴듯하다. 벌써부터 끝에서 투명한 액을 줄줄 흘리는 물건을 내 허벅지 안쪽에 비벼 댔다. 발정 난 짐승처럼 헐떡이며 내 코트 단추를 푼다. 코트 안에 숨겨 둔 뼈를 발견한 놈이 낄낄대면서 웃었다.
“아까부터 딱딱한 게 만져지더라니, 이걸 여기에 숨겨 두고 있었군. 당신도 어지간히 내가 보고 싶었나 봐?”
지금까지 들은 말 중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헛소리였다. 기가 막혀서 웃음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만 뿡뿡 뀌건 말건, 놈은 기분 나쁘게 킬킬대며 내 바지를 속옷과 함께 끌어 내렸다. 놈의 차가운 손이 축 늘어진 성기를 움켜쥐었다. 바닥 위로 늘어진 다리가 꿈틀대며 움직였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놈을 다리로 칠 수도, 손으로 건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성의하게 살점을 주물럭대는 손길에 배 속이 뒤틀렸다. 오금이 다 저렸다.
그제야 놈이 내게 하고 있는 짓이 어떤 짓인지 몸으로 와닿았다. 이 새끼, 나한테 박겠다는 거다.
“손 떼라, 새끼야. 당장 손 떼…… 니, 니미……!”
놈의 손이 음낭까지 한꺼번에 쥐어 세게 눌렀다. 나는 이를 사리물어 터져 나오는 신음을 짓누르며 고개를 젖혔다. 내 손을 쥔 귀면 놈의 눈알 없는 시꺼먼 두 개의 구멍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놈의 부서진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썩은 악취와, 아랫도리를 압박하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너, 넣기만 해 봐……. 거시기를 뭉텅 잘라 버릴 테니까.”
“애들 가르치는 선생이 그런 말을 하면 쓰나.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지.”
아이를 달래듯이 쯧쯧쯧, 혀를 차며 놈이 자신의 하반신을 더욱 밀착했다. 한계치까지 벌어진 다리 사이, 바짝 말라붙은 항문 입구에 뾰족한 뭔가가 닿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게 뭔지 알겠다. 딴에는 이딴 걸 애무라고 하는 건지 남의 성기를 지점토 주무르듯이 주물럭거리며 놈이 하반신에 힘을 주어 밀어붙였다. 노크하듯이 입구를 톡톡 두드리던 뾰족한 살점 끄트머리가 굳게 닫힌 구멍을 우악스럽게 뚫고 들어오려 했다.
사리문 잇새로 윽윽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갔다.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살점을 먹어 치울 듯이 꼭꼭 씹어 무는 구멍에 담근 놈도 괴로울 게 분명했다. 놈은 끄으응, 대면서도 집요하게 살점을 밀어 넣었다. 침입한 이물질을 내보내려 발악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꾸역꾸역 자기 걸 내벽 안으로, 더 깊게 쑤셔 넣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뭔가를 어떻게 해 볼 수조차 없는 지금의 상황이 끔찍하게 공포스러웠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극한의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아…… 당신이 내 정액을 아래 구멍으로 질질 싸면서 우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위했어. 난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당신을 백 번, 천 번, 만 번 이상 범하고 또 범했어. 흐으윽…….”
놈의 손이 딱딱하게 경직한 내 복부를 쓰다듬었다. 옷 속으로 기어들어 와 가슴팍을 어루만지고, 차가운 손끝으로 뾰족하게 선 유두를 만지작댔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 몸의 모든 감각은 아래로 쏠려 있었다. 내 몸을 가르고 밀고 들어온 살덩이의 굵기마저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항문의 좁은 구멍은 놈의 것을 씹어 물고 놔주질 않았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꿈틀대며 움직여 한 치의 틈도 없이 박혀 있는 놈의 물건을 조금씩 조금씩 먹어 치웠다.
나는 무력했다. 나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신세였다. 고통과는 또 다른 절망적인 감각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가슴팍을 성의 없이 쓰다듬던 놈의 손이 내 턱을 잡아 쥐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갈색 가면을 뒤집어쓴 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순간의 치욕을 똑똑히 기억해, 임동추.”
표정 없는 가면의 얼굴이 나를 무심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난 이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증오하는 놈이야. 난 당신을 범한 첫 번째 남자이고 두 번, 세 번, 수십·수백 번 당신을 범하고 또 범할 놈이기도 해.”
“그래……. 네놈의 목소리, 네놈의 손길, 네놈 거시기의 느낌, 절대로 잊지 않으마. 너도 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라. 난 네놈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네놈이 죽어도 육시를 할 놈이다.”
아마도 가면 아래, 놈의 얼굴은 웃고 있을 것이었다. 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려 만족스럽게 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놈은 일순, 있는 힘껏 골반에 힘을 주어 자기 물건을 뿌리 끝까지 푸욱 쑤셔 박았다. 채 억누르지 못한 참혹한 비명이 벌어진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얕게 숨을 헐떡이며 덜덜 떨었다. 피비린내인지, 놈의 정액 냄새인지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비릿한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놈이 중얼거렸다.
“석진경. 강원도 두레 식당. 민간인 피살 사건…….”
눈물이 고여 있던 눈을 크게 치떴다. 경악에 찬 내 표정이 놈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놈의 손길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함께 장지문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내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귀면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밖에 있던 누군가와 귀면이 맞붙어 싸우는 요란한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곧이어 장지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뛰어들어 온 누군가는 나와 내 몸에 찰떡같이 달라붙어 있는 갈색 가면을 발견했다. 눈에 띄게 커다란 실루엣이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세운 곰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 새끼!”
커다란 인영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달려들었다. 갈색 가면의 것이 쑤욱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바닥에 엿가락처럼 주르륵 늘어졌다.
달려든 누군가가 갈색 가면을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놈은 그것을 가볍게 피하고는 뒤로 훌쩍 뛰어 장지문을 찢고 밖으로 달아났다. 커다란 사람은 놈의 뒤를 쫓지 않았다. 놈이 달아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축 늘어져 숨만 겨우 쉬고 있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놈, 한동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제, 젠장. 이게 대체…… 그 새끼, 형한테 대체 무슨 짓을…….”
“미친놈, 당한 건 난데 왜 네놈이 우냐?”
나는 코웃음을 픽 쳤다. 놈이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새끼, 그 미친 새끼,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니미 개씹 같은…… 그 새끼, 어우우, 그 새끼…….”
벌어진 다리를 쩌억 벌리고 예쁘지도 않은 물건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내 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지 놈이 고개를 돌렸다. 울고 싶은 건 나다, 이 자식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머리라도 들이밀고 싶은 건 나라고.
나는 아직까지 미세하게 경련하는 손으로 허벅지까지 내려간 속옷을 끌어 올렸다. 바지를 끌어 올려 입고 지퍼를 닫고 단추를 채웠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려 했지만, 꼴사납게 무릎이 픽 꺾였다. 동수 놈이 휘청대는 나를 부축했다. 놈의 남자다운 얼굴이 시뻘겠다. 눈이 불꽃을 담은 듯 벌겋게 타올랐다.
“죽여 버릴게요. 내가 꼭 그 새끼, 죽여 버릴게요.”
“웃기지 마라. 그 새끼를 죽이는 건 내 몫이야, 새끼야.”
“절대로 용서 못 해. 그 새끼만은 절대로 용서 못 해요. 죽일 거야. 붙잡아서 산 채로 좆을 뭉개 버릴 거야. 빌어먹을 개새끼…….”
귀로는 놈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 안 점막을 짓씹었다. 아직까지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항문이 쑤셨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끔찍한 작열감이 온몸의 근육을 오그라들게 했다.
머릿속은 온갖 것들을 뒤죽박죽 섞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있었다. 제대로 된 생각이란 걸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석진경’, ‘강원도 두레 식당’, ‘민간인 피살 사건’ 이것들만이 뇌 속에 떠다니는 온갖 부유물들 중 가장 온전한 형태를 띤 것이었다.
형님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동수 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들에게 얘기했다간 네놈 입을 찢어 버린다.”
동수 놈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놈의 눈에 들어찬 것은 오직 살기였다. 불구덩이에서 갓 꺼낸 쇳덩이 같은 살기. 놈이 두꺼운 팔로 내 허리를 감쌌다. 허리를 감싼 놈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나는 모른 척했다.
안으로 들어온 동료들은 동수가 부축하고 있는 내 꼴만 보고도 모든 걸 파악한 듯했다. 박천수는 큿흠큿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천달봉은 힘없이 웃으며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식이는 검붉은 액체가 잔뜩 묻은 모자를 벗어서 다시 깊게 눌러쓰며 고개를 숙였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귀면에게 뼈를 뺏긴 내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개는 아까보다 더욱 짙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최근 유행하는 가요가 구성지게 울려 퍼졌다. 갈색 가면에게 뺏겼었던 내 핸드폰일 터였다.
가게 안 어디엔가 걸려 있을 괘종시계가 땡, 때앵, 정확히 두 번 육중한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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