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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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일진 한번 사나운 날이었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앞에 있던 여자 가방에 걸려 코트 소매가 찢어졌다. 큰마음 먹고 5개월 할부로 산 코트였는데 말이다.

찢어진 코트 소매 끝을 붙잡고 구시렁대던 중, 갑자기 지하철이 덜컹 움직인 바람에 중심을 잃고 휘청댔다. 때문에 어떤 여자를 껴안는 형국이 되고 말아 변태로 오인받았다.

변명할 여유도 주지 않고 여자는 내게 욕을 하면서 몰아붙였다. 내가 일부러 넘어지면서 자기 가슴을 만졌다는 것이다. 주위 남자들 몇 명까지 합세해서 날 경찰서로 끌고 가려 하기에 난 이를 악물고 지하철에서 탈출했다.

플랫폼에 내려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억울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오려 했다. 그 여자의 가슴을 건드린 건 사실이지만 절대로 고의는 아니었다.

그날의 액운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던 중 달려오는 배달 오토바이에 치일 뻔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지만 오토바이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몸을 틀 때, 갈비뼈 부근까지 뒤틀려 병원으로 기어가야 했다.

“전에 가셨던 병원에서 2주 정도 안정을 취하라고 하던가요, 안 하던가요?”

“네. 그러던데요.”

“그런데 왜 이러세요?”

아버지 정도가 아니라 할아버지뻘 되는 나이 든 의사가 손자를 나무라는 듯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을 그만둘 수도 없지요. 그리고 어떻게 사람이 보름 정도를 드러누워 생활합니까?”

“푹 쉬세요. 웬만하면 운동도 자제하시고. 아직 젊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의사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모니터를 보며 쫑알댔다.

바깥 날씨는 겨울 날씨답지 않게 지나치게 포근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내쉬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면서 옆구리를 손으로 감쌌다. 진짜 눈 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콧물까지 났다. 주저앉아 엉엉 울고만 싶었다, 진짜로.

이게 뭐야. 어째 요즘엔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똥수 자식한테 휘림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 준 영감한테나 찾아가서 점이나 볼까.

애새끼 코 묻은 돈 삥이나 뜯어 처먹는 사이비라고 생각했는데 그 영감, 제법 용하지 않은가. 동수가 그 영감한테 돈 갖다 바치면서 이름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우리는 늘어져 죽은 녀석의 시체를 봐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주일. 그날 밤 이후, 벌써 1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들에게 일을 의뢰했던 김씨 성의 ‘태’ 자 돌림을 지닌 놈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한때 밤일꾼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던 귀면들도 김가 놈들과 함께 사라졌다.

귀신 가면이 노리는 것은 김가 놈들이 우리 밤일꾼들에게 건네주는 과일 상자가 분명하다. 즉, 김가네가 다시 나타나 우리들에게 과일 상자 배달 일을 의뢰하지 않는 이상, 귀면들도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란 얘기가 된다.

아무도 모른다. 수상쩍은 과일 상자 배달 일을 의뢰하는 김가 놈들이 대체 뭘 하는 놈들인지. 그놈들이 우리들에게 건네주었던 과일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밤일꾼들을 습격해 과일 상자를 빼앗아 갔던 귀신 가면들의 정체가 뭔지. 그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다.

하지만 난 다른 녀석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를 확실히 알고 있다. 귀신 가면 놈들 중 한 놈은 인간이란 것. 그놈은 날 알고 있다는 것.

<아주 잘 알고 있지. 계속 지켜봐 왔으니까.>

그 자식. 놈의 목소리, 말투, 체온, 몸의 무게, 체향,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의 형태와 질감.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볼을 만지던 하얀 손의 촉감과 모양까지도 확실히.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동수와 노금영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 두 사람은 귀신 무리들을 상대하고도 멀쩡했는데 난 인간이 분명한 어떤 놈이랑 뒹굴다가 흠씬 얻어터지고 성추행까지 당했다, 이런 얘기를 하라고? 절대로 말 못 한다. 쪽팔려서라도 말 안 한다.

갈색 가면 놈의 정체는 내 손으로 밝혀내고야 만다. 그래야만 한다. 놈은 날 알고 있다. 계속 지켜봐 왔단다. 나는 놈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는데.

남자 놈을 상대로 아랫도리 발딱 세우고 헐떡대던 걸 봐서는 그놈도 분명 게이다.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겠다. 나를 알고, 나를 계속 지켜봐 왔다는 변태 놈. 그런 놈들이 바글대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내가 굶주린 늑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먹이를 물색하러 가는 목장, 클럽 러스트.

코트 주머니 속에서 문자 알림음이 새어 나왔다. 그날 밤. 차가 박살 난 탓에 아버지한테 피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진 동수가 보낸 문자였다.

[형, 형! 냉장고에서 특A급 횡성 한우 발견! 오늘 밤 형네 집에 들고 갈게여! 고기 파티해여! 짜잔! \^ㅅ^ /]

이 자식……. 190이 넘는 러시아 불곰 같은 놈이 귀여운 척하는 거 봐라.

너희 어머니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밤낮없이 기름 냄새 뒤집어써 가며 닭을 튀기는 남편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한우, 큰마음 먹고 사 두신 걸 텐데. 그걸 홀랑 훔쳐 나올 생각을 하다니. 자식새끼 키워 놔 봤자 다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건 네놈 같은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마.

[에라이, 불효막심한 자식아. 그렇게 한우 처먹고 싶으면 내가 사 줄 테니까 집에 있는 고기에는 손도 대지 마. 알았냐?]

문자를 전송하기가 무섭게 답이 날아왔다.

[밖에서 사 먹으면 비싸자나여. 걍 형네 집에서 궈 먹는 게 문안하지 않아여?]

뒷목 잡고 쓰러지겠다, 진짜. 스무 살이나 처먹은 자식이 문자 보내는 꼴 좀 봐라. 여고생 같은 말투야 그렇다 쳐도 궈 먹어? 문안해? 이럴 때마다 따박따박, 욕을 해 가며 바른 문법을 주입해도 소용없다. 이 자식 머리는 초등학교 레벨이다. 아니다. 그건 초등학생들한테 욕이다. 요즘 애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똥수 자식이랑 비교를 할까.

비싸잖아요, 그냥, 구워 먹는 게, 무난하지 않아요? 첨삭 지도하는 것처럼 맞춤법 틀린 부분만 똑 떼서 문자를 보냈다.

[히잉. ㅠ◇ㅠ. 형. 너무 차가워여.]

놈에게 이 문자가 날아온 순간.

지금까지 수십, 아니, 수백 번은 결심하고 포기하고 또 결심하기를 반복했던 일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치킨집 똥수, 인간 만들어 보자. 말로만 친동생처럼 생각한다 하지 말고, 진짜 내 동생이라 생각하고 당장 이번 달부터 학원에 데리고 와서 교육 좀 해야겠다.

“한 며칠 안 보이더니. 휴가 다녀왔어?”

늘 끼니를 해결하곤 하는 학원 앞 분식점에 들어가자 주방 이모가 날 반갑게 맞이했다.

“휴가는요, 무슨. 다 때려치우고 어디 좀 갔으면 좋겠네.”

“그런데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술 퍼먹고 싸움질했지?”

“이모, 제가 술 마시고 그딴 짓이나 할 녀석처럼 보여요? 내가 나이가 몇인데.”

“다 늙어서도 술만 퍼마시면 개새끼 되는 놈들 수두룩해. 술 마시고 개 되는 거는 나이 안 따지더라. 그런데 뭐 줄까? 김밥? 순두부찌개?”

오늘은 낙지 알밥요! 큰 소리로 외치고는 물을 가지러 갔다. 정수기 앞 테이블 위에 잡지 하나가 놓여 있기에 가져와 봤다. 잡지 표지에 떡하니 ‘민심은 이미 떠났다’ 요런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이건 또 어디서 떨어진 간덩이 부어터진 놈이냐. 두꺼운 붉은색으로 쓰인 문장 아래에는 ‘김민재 기자’란 이름이 박혀 있다. 김민재. 설마 내가 아는 그 김민재는 아니겠지? 같은 T 대학 선배였던 그는 날고 기는 놈들로 가득한 학교 내에서도 알아주던 천재였고, 괴짜였다. 김민재가 멀쩡히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기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

대학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막걸리, 소맥, 동동주, 온갖 술을 다 섭렵하던 그 시기. 당장 눈앞에 닥친 기말시험보다 여대생들과의 미팅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던 그때. 군 제대 후 복학했던 우리들보다 네 살 연상이었던 김민재는 노릇하게 익은 어른이었다.

온갖 고초 다 겪은 중년의 꼰대처럼 그는 스물다섯 살 무렵, 이미 팍 삭아 있었다. 철모르던 우리들은 그런 그를 영감 같다면서 비웃었다. 노친네 끼어들면 분위기 망친다면서 술자리에 끼워 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김민재는 끈질기게 우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들이 그렇게 눈치를 주고, 술김에 아예 대놓고 말해도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아직 순수한 너희들이 좋다면서.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껄껄껄 웃었다.

<출세하고 싶냐? 그럼 인간답게 양심 지키며 사는 걸 포기해라.>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병아리 후배들을 앞에 두고서 그가 했던 말이다.

살아 보니 그 인간 말이 정답이었다. 출세하려면 인간으로 살면 안 되더라. 양심 같은 건 잘게 찢어서 지나가던 똥개한테 던져 줘야 되더라고. 진짜로.

내가 그 짓을 못 했으니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거지. 난 잡지 페이지를 넘기면서 킥킥 웃었다.

주문한 알밥이 나왔다.

커다란 돌솥 안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밥알을 열심히 비벼 입 안에 퍼 넣었다. 입에 넣은 밥알이 욕 나오도록 뜨거워서 온갖 쇼를 다 했다. 먹은 걸 더럽게 뱉을 수도 없고, 그대로 삼키자니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 같고. 물을 머금어 그나마 미지근하게 식은 밥알을 꿀꺽 삼켰다. 밥을 후우후우 불어 가면서 야무지게 씹어 먹다가 아무 생각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 골목 어귀에 알록달록 패딩 점퍼 무리들이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이 근처 고등학생 애들이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늘씬하게 키가 컸고 덩치도 좋았다. 녀석들 중 한 놈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건 녀석이 패딩 점퍼 대신 교복 위에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뽀얗고 비리비리한 녀석이다. 등을 구부리고 있는 자세 때문에 더 작아 보이는 듯하다. 패딩 점퍼 무리들에게 에워싸인 뽀얀 녀석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다. 딱 봐도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저 뽀얀 녀석은 패딩 무리들의 밥인 거다.

뽀얀 녀석이 한번 왕, 하고 짖어 본 모양인지 패딩 무리들이 번갈아 가며 녀석을 후려갈겨 댔다. 녀석은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어머 어머, 쟤 얻어맞고 있네. 불쌍해라. 왕따·학교 폭력 그런 거 아니야, 저거?”

이모들도 바깥 상황을 주시하며 문간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저거 어쩌지? 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아서라, 아서.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괜히 잘못 나섰다가 큰일 나.”

이모 한 명이 가게 전화기에 손을 댔다. 경찰에 전화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모들의 말이 백번 옳다. 요즘 애들은 애들이 아니다. 저것들은 목줄도 하지 않은 어린 맹수다.

어머머! 저걸 어째! 이모들이 동시에 새된 소리를 내며 숨을 집어삼켰다. 빨간색 패딩 놈이 어딜 맞았는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뽀얀 놈의 덜미를 붙잡고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거시기에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어린놈들의 새끼가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 와서는! 나는 숟가락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식삿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걸어 나가자 이모들이 옆에 착 달라붙었다.

“가서 말리게? 그러지 마. 그러다 다쳐.”

“그래. 그냥 경찰에 신고해. 요즘 애들 진짜 장난 아냐.”

그래 봤자 애새끼들이지. 난 달라붙어 만류하는 이모들을 뿌리치고 한달음에 도로를 건넜다. 이모들이 염려하는 유혈 사태는 없을 터였다. 몸 상태가 이 모양인데 애새끼들을 상대로 힘 쓸 생각 없다. 난 녀석들이 뽀얀이를 끌고 들어간 골목으로 들어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패딩 녀석들은 신나게 뽀얀이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뽀얀이는 온몸을 둥글게 말고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끄집어낸 핸드폰을 들어 여유롭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행태를 동영상으로 찍었다.

“뭐 하는 거야, 새끼야!”

패딩 놈 중 하나가 날 발견하고는 악을 썼다. 그때에서야 녀석들의 발길질이 멈췄다.

녀석들 전부 하던 짓을 멈추고 나를 꼬나보았다. 어쩌면 저렇게 판에 찍어 낸 듯이 똑같은 꼴을 하고 있을까. 커다란 패딩 점퍼에 딱 달라붙는 교복 바지에, 색깔 현란한 유명 메이커 운동화, 거북이 등짝처럼 등에 탁 달라붙은 홀쭉한 가방들. 하나같이 시꺼먼 얼굴에, 험악하게 구겨진 표정을 하고서 침을 찍찍 내뱉는다.

“너 이 새끼, 방금 전에 무슨 짓 했어?”

“어? 별거 아니고 너희들 동영상 좀 찍었다.”

입으로 지껄이면서 얼른 핸드폰을 들어 날 노려보고 있는 애새끼들의 사진을 찍었다. 찰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녀석들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 저절로 저장되었다.

“니들 사진발 진짜 잘 받는다, 야. 원판보다 사진이 훨씬 낫네.”

“아우! 이게 미쳤나!”

깜장 패딩 놈이 땡감 씹은 얼굴을 하고서 달려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빨간색 패딩이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녀석이 깜장 패딩 놈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녀석이 구겨진 눈으로 날 위아래로 스캔했다.

난 녀석들을 둘러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방금 전에 찍은 사진이랑 동영상, 인터넷에 올릴 생각이거든. 요즘 한창 뜨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사이트가 있다던데? 거기에 이런 거 올리면 그쪽 형님들이 인생은 실전이란 걸 가르쳐 준다며?”

녀석들이 움찔, 하고 굳는 게 확실히 보였다.

학원 애들 사이에서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풍기 문란 단속 위원회>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사이트에 있는 신고란에 누가 피해 사례 글을 올리면, 거기 관계자들이 가해자에게 직접 찾아가 손봐 준다는 것이다.

“너, 뭐 하는 놈인데?”

“어째 니들, 말끝이 좀 짧다? 어른한테 건방지게. 안 되겠다. 당장 니들 사진이랑, 동영상이랑 1급 신고란에 올려야겠다.”

“뭐, 뭐 하는 놈…… 아니, 형님이신데요!”

학원 애들 말대로다. 학교 선생한테까지 욕하며 대드는 애새끼들도 풍기 문란 사이트 1급 신고란에 글 올릴 거라고 외치면 표정이 딱 굳는다더니.

“난 저기 학원에서 일하는 선생님이야. 일진 놀이나 하면서 인생 허비하지 말고 우리 학원에 공부하러 와. 우리 학원에 오면 내가 책임지고 니들 대학 보내 줄게.”

녀석들은 그놈의 똥개 더럽게도 짖어 댄다, 이런 표정을 하고서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책임지고 D 예고 애들이랑 매주 미팅 시켜 준다.”

종이를 뒤집듯 순식간에 녀석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여드름 뽁뽁 올라온 못생긴 얼굴들이 하나같이 환하게 폈다. 남학교 녀석들에겐 여학생들과의 미팅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일 거다. 게다가 연예인 뺨치는 미인들 많기로 소문난 D 예고라니. 지금까지 이 대왕 떡밥을 물지 않는 붕어들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간혹 저 빨간 패딩처럼 예외는 있다. 미팅? D 예고? 진짜야? 구라 아냐? 옆에서 짹짹대며 떠드는 친구들 사이에서 빨간 패딩만이 돌처럼 굳은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지랄. 선생 좋아하네. 끽해야 학원 강사 주제에.”

“욕이나 찍찍 내뱉으라고 만들어진 한글이 아닌데. 저세상에서 세종 대왕님이 한탄하실 거다. 바른말 고운 말 좀 쓰자?”

“지랄 까지 마! 선생도 아닌 주제에 어디서 설교질이야!”

빨간 패딩이 일명 일진 양아치 스타일 침 뱉기 기술을 구사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씨발. 좆같네” 욕설을 내뱉으며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짓도 잊지 않았다. 곧이어 피라미 패딩들이 우르르 빨간 패딩의 뒤를 쫓았다.

“진짜 D 예고 애들이랑 만나게 해 주실 거예요?”

제일 뒤에서 쫓아오던 작은 녀석이 갓 건져 올린 아귀 같은 얼굴을 들이대면서 속삭였다. 그럼. 선생님을 믿어. 난 씩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아귀도 씨익 웃고는 얼른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구석에 구겨져 있던 뽀얀이가 일어서서 옷을 털어 내고,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녀석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날 향해 다가오는 게 아니라 이쪽이 유일한 퇴로라 별수 없다.

가까이 다가온 녀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딱 한 번 고개를 까딱여 보이고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반쯤 벌린 녀석의 입술은 부어터져 있고, 헝클어진 머리칼에 가려진 눈은 내리깔고 있다. 걸을 때 얻어맞은 부분이 아픈지 끄응, 약하게 앓는 소리도 냈다.

패잔병 같은 꼴을 한 녀석이 향하는 곳은 학원 건물이었다. 저 녀석, 우리 학원에 다니는 녀석이었나. 뒤따라 들어가자 녀석은 엘리베이터 앞에 멍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너, 우리 학원에 다녔었구나.”

옆에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녀석이 깜짝 놀라 옆에 선 나를 쳐다보았다.

“뭘 그리 놀라? 말했잖아. 나 이 학원에서 일한다고.”

“알아요. 학원에서 선생님 본 적 있어요.”

“그래? 넌 어느 선생님 강의 듣는데?”

예상했던 대로 신영 선생님 수업요, 한다.

우리 학원에 오는 녀석들 대부분이 박신영 강사의 수업을 들으러 온다. 그는 얼마 전까지 시내에 있는 유명 학원에서 일하던 스타 강사였다.

“하긴 신영 선생님이 참 잘 가르치지. 내가 봐도 그 선생 수업은 재미있어.”

“선생님 수업도 재미있어요.”

고개를 돌리자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도 날 빤히 바라보았다. 까만색 머리카락 사이로 날 바라보는 동공 두 개가 빛났다.

“너 내 수업 들어 본 적 있냐?”

녀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주말에 하는 무료 강의를 들으러 왔던 녀석들 중 한 명이었을 거다.

“선생님 수업도 재미있고 좋았는데, 신영 선생님이 족집게 강의로 유명하잖아요. 저 T 대학이 목표거든요.”

“내가 책임지고 너, T 대학 보내 준다고 하면 내 수업 들을래?”

아까 양아치 애들한테 했던 말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난 절대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놈이다.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고 예쁜 눈인데 왜 저렇게 답답하게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닐까.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고 싶어서 손이 다 근질근질했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잠깐만요! 저희도 탈 거예요!” 여자애들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들어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참새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쉴 새 없이 짹짹댔다. 녀석들한테선 희미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가만히 보니 이 녀석들, 다들 옅게 화장을 하고 있다. 비비크림을 떡칠해서 얼굴은 허옇고 빨간 입술은 번들번들 윤이 난다. 여자애들 역시 아까 학원 앞에서 봤던 양아치 녀석들처럼 커다란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화장품 냄새 폴폴 풍기는 참새들과는 달리 옆에 선 사내 녀석한테선 흙냄새가 물씬 풍겼다. 얻어맞느라 바닥을 뒹굴었으니 흙 비린내가 날 만도 하다. 가만히 보니 녀석이 입고 있는 얇은 카디건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카디건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이 퍼렇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얇게 입고 안 추워?”

멍청하게 숫자판을 올려다보던 녀석에게 말을 걸었는데 앞에서 재잘대던 여자애들이 날 바라봤다. 여자애들은 곧 자기들에게 한 말이 아니란 걸 깨닫자 고개를 돌리곤 다시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위에 코트라도 좀 입고 다니지.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다간 감기 걸린다.”

“코트는 아침에 입고 왔었는데요…….”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흙먼지 묻은 카디건 소매를 반대쪽 손으로 뽀득뽀득 닦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겠다.

하얗고 마른 데다 등은 구부정하게 굽어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김이 다 빠진 맥주 같은 녀석이다. 이런 녀석들은 백이면 백, 주먹질 좀 잘한다고 으스대는 수컷 놈들한테 찍힌다. 무조건 찍혀서 놈들의 밥이 된다.

녀석은 계속 소매 끝을 만지작대며 바닥만 쳐다보았다. 더러워진 녀석의 운동화는 요즘 애들 다 신고 다니는 메이커 운동화도 아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싸구려 짝퉁이다. 등에 멘 가방끈도 너덜너덜하다. 위에 걸친 카디건도 보풀이 잔뜩 일어난 낡은 것이고.

그런데 이런 녀석을 에워싸고 두들겨 패던 녀석들은 몇십만 원짜리 패딩 점퍼를 교복처럼 맞춰 입고 있었지. 장대같이 큰 허연 녀석이 내 학창 시절의 모습 같아서 입 안에 쓴 타액이 고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짹짹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난 핸드폰을 꺼내 내 한 발자국 정도 뒤에서 걸어오는 녀석의 앞에 불쑥 내밀었다.

“전화번호 찍어라.”

“네? 왜, 왜요?”

“잔말 말고 찍으라면 찍어.”

녀석이 마지못해 한껏 미간을 좁히고서 내 손에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곧 전화번호가 찍힌 핸드폰이 내 손바닥 위에 놓였다.

“T 대학에 가고 싶댔지? 나 이래 봬도 T 대학 출신이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해서 물어보든가 문자로 물어봐. 그런데 이름이 뭐냐?”

“한나민요.”

“좋아. 한나민. 내가 지금 네 번호로 문자 보내 놨다.”

녀석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내 액정 화면에 찍힌 번호를 확인했다.

“짜증 난다고 스팸으로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저장해.”

녀석은 입술 한쪽을 말아 웃으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 눈은 핸드폰을 보며 웃는 녀석의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상하다. 저 웃는 옆얼굴. 저 뽀얀 볼 하며, 말려 올라간 입술 모양이며, 이쑤시개로 찔러 놓은 것처럼 움푹 팬 보조개. 왠지 낯이 익다.

“나민아,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

핸드폰을 바라보던 녀석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학원에서 선생님이랑 몇 번 마주친 적 있어요. 그래서 낯이 익은 게 아닐까요.”

그런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내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 얼굴은 다 기억하지만 학원 내에서 스쳐 지나가는 애들 얼굴 전부를 기억할 순 없으니까.

“어쨌든 너도 수업 들어가 봐라.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그리고 앞머리 좀 잘라라. 답답하지도 않냐?”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녀석의 눈을 덮고 있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려 주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크고 시원시원한 눈이었다. 눈썹도 짙고 속눈썹도 풍성하다. 앞에 선 날 바라보는 동공뿐만 아니라 흰자위도 푸른빛이 돌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너 진짜 나 어디서 만난 적 없어? 학원 안에서 말고.”

“저…… 수업 들어가 볼게요!”

녀석은 내 손목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아 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저편으로 뛰어갔다.

내가 저 녀석을 대체 어디서 봤더라. 학원 안에서 몇 번 마주쳤다면 똑똑히 기억할 텐데 말이다.

도무지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요새 왜 이렇게 자꾸 깜빡깜빡하는 건지 몰라. 오메가3라도 챙겨 먹어야 하나. 비 맞은 중처럼 연신 중얼거리며 나는 복도를 걸어갔다.

*

*

금요일 밤도 아닌데 가게 안은 손님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게 아예 홀에서 테이블도 치워 버렸다. 사람들은 맥주 한 병씩 들고 서서 끼리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입구를 막고 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등 뒤에 시선이 꽂혔다. 미안합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이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등 뒤에 꽂히는 시선들은 쌓여만 갔다.

술과 음료를 주문할 수 있는 바에 다다랐을 때에는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를 손님에게 건네주던 진기 녀석이 날 알아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 이게 누구야. 동추 형 아니야? 요즘 한창 연애 중이라고 하더니 웬일이래? 설마 그때 걔랑 벌써 끝났어?”

“그만 좀 짖어 대고 맥주나 내놔. 근데 왜 이렇게 덥냐? 에어컨도 안 켜냐?”

“겨울에 무슨 에어컨을 틀어.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으니까 덥지. 좀 벗어라.”

“으하하. 벗으라니, 되게 야한 말이다” 하면서 놈은 자기가 지껄인 말에 자기가 킬킬댄다. 덜떨어진 놈. 녀석이 가져다준 맥주를 들이마시며 목을 감싸고 있던 머플러를 벗었다. 코트도 벗고 싶었지만 옆에 서서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는 어떤 놈 때문에 관뒀다.

“그나저나 오늘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진짜 몰라서 물어? 오늘 쇼 하는 날이잖아.”

아, 그렇구나. 그래서 가게 안에 심상치 않은 열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군. 단숨에 남은 맥주를 비우고 빈 병을 내려놓다가 옆의 놈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국적인 외모를 한 미남이지만 하얗지도 않고, 가늘지도 않다. 몸 전체가 쓸데없이 크기만 한 근육 맨이다. 놈이 나를 바라보는 채로 점원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찐한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걸쭉한 게, 우려낸 사골 국물 같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새 맥주병을 들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일단 사 주니까 마시는 거다. 그뿐이다.

아주 나를 산 채로 오독오독 씹어 먹을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저런 타입은 정말 싫다. 내 남자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희고, 가늘고, 귀엽고, 바보처럼 순진한 맛이 있는 애들.

“역시 우리 동추 형님, 인기 한번 죽여준다니까. 저 사람 때문에 요새 고양이 새끼들, 발정 난 것처럼 아주 난리가 났던데.”

진기가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속살거렸다.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저 기름 둥둥 뜬 사골 국물 같은 놈한테 마음이 있는 듯했다.

“젠장, 이 죽일 놈의 인기. 난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잘났을까.”

“우와아, 미친. 이걸로 확 찍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재수 없다, 진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목에 힘을 주어 거들먹거리자 진기가 얼음송곳을 쥔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너도 알잖아. 꼬물대는 강아지들이 내 취향이란 거. 저런 사냥개는 줘도 싫다.”

“사냥개라도 멋있기만 하구먼, 뭘.”

“그럼 네가 술 한잔 사면서 들이대 보든가. 근데 명진 형은 어디 있냐?”

진기 녀석은 손으로 바 뒤의 벽 쪽을 가리켰다.

뻔하다. 이 양반, 또 술에 취해서 직원용 대기실에서 퍼 자고 있겠지. 김명진이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더 이상 후덥지근한 이곳에서 땀 빼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난 맥주가 반 정도 남은 병을 내려놓고 얼른 바에서 벗어났다. 사냥개가 “저기요, 잠깐만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놓고 무시했다.

직원용 로커와 휴게실, 창고 같은 게 있는 가게 뒤쪽의 공간에선 녹녹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볕도 들지 않는 지하인 데다 조명등도 제대로 달려 있지 않은 이곳은 언제나 불쾌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 좁아터진 복도 양옆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어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조명이라곤 천장 구석에 매달린 비상등이 전부다.

복도 끝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내 녀석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김명진의 굵고 거친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수풀을 헤치고 복도 끝에 다다르자 진한 향수 냄새가 콧속으로 후욱 파고들었다.

모여 선 사내놈들은 팬티 한 장 달랑 입은 꼴로 온갖 폼을 다 잡고 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비스듬히 선 놈, 연신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놈, 탱탱하게 솟은 엉덩이를 자기 손으로 슬슬 문지르는 놈, 서 있는 폼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몸도 좋고 늘씬한 것이 스테이지 뒤의 모델들 같다.

김명진은 헐벗은 사내 녀석들 사이에 서서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가장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걸 보니 저 인간, 벌써 거나하게 취했다.

“명진 형, 거기서 뭐 해요? 한참 찾았잖아요.”

나는 마치 그를 찾아 온 가게 안을 헤맨 사람처럼 말하며 김명진에게 다가갔다. 늘씬하게 잘 빠진 녀석들이 성큼성큼 다가가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동추, 네가 웬일이냐? 드디어 윤영이랑 깨졌구나!”

“안 깨졌어요. 한창 깨 볶는 중이거든요.”

번쩍거리는 황금 팬티를 입은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나는 입만 열어 조잘댔다. 탄력 있는 엉덩이며, 쭉 빠진 허벅지며,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이며, 흠잡을 데가 없는 몸이다. 지나가는 여자 가슴 뚫어지게 바라보는 중년 아저씨처럼 근육이 불룩하게 들어찬 가슴팍을 음미하듯 쳐다보자, 녀석도 씨이익 웃는다. 자기들 멋있고 잘생긴 걸 잘 아는 녀석들이다. 외모에 자신감이 넘쳐흐르니 사람들 앞에서 팬티 한 장 달랑 입고 춤출 생각을 하는 거지.

이 낡아빠진 클럽에 손님들이 바글대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이 클럽이 술이 특별히 맛있기라도 해, 안주가 맛있어, 점원이나 사장이 친절해, 서비스가 좋아. ‘술값 싸고, 안주 기똥차게 맛있고, 손님은 무조건 왕!’이라는 마인드로 손님에게 과한 친절을 베푸는 가게들은 쌔고 쌨다. 그런데도 낡고 좁고, 서비스도 형편없는 이 가게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가 뭔가. 2주에 한 번, 목요일 밤마다 열리는 쇼를 보기 위해서다.

쇼는 쇼인데 광대꾼들이 나와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를 부르느냐. 그건 아니다. 몸매 끝내주고, 얼굴 잘생긴 젊은 남자애들이 무대 위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쉽게 말하면 남성 스트립쇼다. 더 쉽게 말하자면 끝내주는 남자애들이 무대 위에서 팬티 하나만 입은 채로 엉덩이와 허리를 마구 흔들며 음란 댄스를 춘다 이거다.

과연 그런 게 인기가 있을까, 하는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어디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건지는 몰라도 엄청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빚을 갚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이벤트가 대박이 터진 덕분에 사장 김명진은 순식간에 돈방석에 올랐다.

벽 너머에서 고막을 찌르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게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사내놈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쇼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김명진이 옆에 있는 애의 형광 핑크 팬티에 감싸인 앙증맞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김명진은 흐뭇하게 미소 띤 얼굴로 무대 위로 오르는 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애들 물 좋네. 저런 애들은 대체 어디서 데려오는 거예요?”

“구인 글 올리니까 알아서 몰려오던데 뭘. 예전엔 무대 위에 올라갈 애들이 없어서 주위 녀석들한테 매달려서 애걸복걸했었는데 말이야.”

김명진이 곁눈질로 날 흘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랬었다. 남성 스트립쇼를 기획했을 당시, 김명진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었다. “제발 좀 해 줘라. 너밖에 없다, 동추야. 너처럼 괜찮은 녀석이 무대 위에 올라가면 다들 난리가 날 거야. 제발 부탁이다. 이 형 좀 살려 줘라. 응?” 한우 구워 먹이고, 술까지 퍼 먹인 뒤에 매달려서 애원을 하는데 “그럼 딱 한 번만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형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거예요” 하면서 마지못해 무대 위에 올라가겠노라 약속했었다.

“생각 있으면 너도 다시 한번 무대에 올라가 볼래?”

난 속으로 코웃음을 픽 쳤다. 그땐 내가 너한테 매달려 부탁하는 신세였지만 이제는 네놈이 나한테 매달려야 할 때다.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요즘에도 일 끝나면 일당 바로 주는 거 맞죠? 안 그래도 요즘 돈이 없어 죽겠는데 한번 해 볼까.”

“어, 어어. 그렇지. 애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바로 현금 봉투 챙겨서 주긴 해. 그런데 진짜 해 볼 생각이야?”

김명진은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돈만 제대로 챙겨 받을 수 있다면 무대 위에서 팬티까지 벗어 던질 수도 있었다.

“너 학원에서 잘렸냐?”

“아뇨. 잘 다니고 있는데요.”

“요즘 이상한 새끼들이 나타나서 밤일꾼들이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던데. 그래서 쪼들리는 거야?”

귀면들에 대한 소문은 게이 클럽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김명진은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아까 네놈이 야릇한 눈으로 쳐다보던 황금 팬티. 걔도 밤일꾼이란다. 걔한테 들은 얘기론 탈바가지 쓴 씹어 죽일 새끼들이 설치고 다니면서 너희 일을 방해한다던데. 대체 뭐래? 그 새끼들?”

“귀신 새끼들요.”

담배 연기를 코와 입으로 뿜으며 김명진이 인상을 썼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예요. 인간이 아니에요, 그 새끼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온몸이 정육점 고깃덩이처럼 짓이겨졌는데도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데요.”

“가능한 얘기냐, 그게?”

그러게 말입니다. 난 고개를 얕게 주억거리며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윤영이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내가 안 만나 준다고 바람피우거나 하는 거 아니죠? 한눈팔지 말아요.]

액정 화면 가득 뜬 글자들의 나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우리 예쁜 윤영이 놔두고 왜 한눈을 팔겠어. 나한텐 윤영이밖에 없어.]

시험 공부 하던 중, 불길한 예감이 든 윤영이가 당장 확인 전화를 걸기 전에 빛의 속도로 멘트를 찍어 전송했다. 그랬더니 30초도 지나지 않아 답 문자가 날아왔는데.

[난 형을 믿어요.]

이런 의미심장한 문장이 떠억 찍혀 있는 것이다.

[응. 형만 콱 믿어. 사랑해♥]

문장 끝에 특별할 때 아니면 남발하지 않는 하트까지 붙여 보냈다.

“야, 이 미친놈아. 뭐 하는 짓거리냐, 이게?”

어느새 뒤로 다가와서 핸드폰 화면을 훔쳐보고 있었는지 김명진이 담배 연기 팍팍 뿜어 가며 욕을 갈겼다. 그는 급기야 내 손에서 핸드폰까지 낚아채 갔다.

“넌 인마, 윤영이 같은 애랑 사귀면서 바람피우고 싶냐?”

“핸드폰 내놔요! 그리고 누가 바람을 피운다고 그래요!”

“윤영이 몰래 클럽에 온 거 보면 뻔하지, 새끼야!”

핸드폰을 다시 뺏으려 하자 김명진은 그 큰 덩치로 날 마구 밀어 댔다. 곰 같은 커다란 등과 우람한 팔로 내 움직임을 봉쇄하고는 자기 멋대로 남의 핸드폰을 조작해 사진 앨범을 열어 보는 것이다.

사진 앨범에 든 사진 대부분은 윤영이의 것이다. 절대로 내가 찍은 건 아니다. 녀석이 날 만날 때마다 찍어 댄 것이지. 사진 앨범 속에는 녀석의 세미 누드 사진도 있었다. 윤영이 녀석이 트렁크 팬티 한 장 입고서 카메라를 향해 브이 자를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발견한 김명진의 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양반은 윤영이가 이 클럽에 드나들 때부터 녀석을 눈여겨봐 왔었다. 하지만 윤영이가 선택한 것은 나였다. 술도 사 주고, 먹고 싶다는 거 다 만들어 주고, 선물까지 안겨 주었던 게이 클럽 사장이 아니라.

“너희들 이런 사진도 찍고 그러냐.”

“사귀는 사이니까요. 그리고 이 사진은 그 녀석이 직접 찍은 거니까 사람 변태 취급하거나 하진 말아요.”

“윤영이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면 넌 내 손에 죽는다.”

김명진의 이런 점만큼은 부러웠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간도 쓸개도 다 내줄 것처럼 절절하게 사랑하는 순정적인 면. 난 그러질 못한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꽁꽁 얼어붙었다.

“7년 전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죠. 이번엔 확실히 죽여 줘요.”

“너 이 새끼, 말을 해도 꼭…….”

담배 연기와 함께 말끝을 불분명하게 흐리며 김명진은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아직 진경이 어머니한테 돈 보내냐?”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김명진은 쯔읏, 길게 혀를 찼다.

“난 아직도 네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진경이 그렇게 된 거 네 탓 아냐. 걔 어머니도 그러셨잖아. 절대로 네 잘못이 아니라고. 자기 아들의 운명이 그런 거라고. 지금이라도 그 녀석 어머니한테 돈 부치는 거 관둬라. 이젠 손 털고 잊어라, 좀.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서 구질구질하게 살래?”

같은 대학 동기였던 석진경.

스물한 살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한 녀석. 지금까지 대학 시절 선후배, 친구라는 인연을 이어 가고 있는 김명진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난 진경이를 사랑했다. 가슴 깊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었다. 녀석이 죽은 그날,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도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 녀석 어머니가 꼭 우리 어머니 같아서 그래요. 그래서 도저히 인연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분, 내가 찾아가는 날이면 나 좋아하는 음식들 만들고 계세요. 초인종을 누르면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오셔서 ‘동추 왔냐!’ 하시면서 날 와락 끌어안으세요. 그런데 어떻게 연을 끊을 수가 있습니까. 그분과 전 이제 남이 아닌데.”

“그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에이, 됐다. 내 인생도 구질구질 거지 엿 같은데 누가 누구한테 충고를 한다고. 기왕 온 거 술이나 한잔하자.”

“됐어요. 술 마시러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왔어? 역시 윤영이 몰래 남자 꼬시러 온 거 맞지?”

“아니라니까요. 형한테 뭣 좀 물어보려고 왔어요.”

김명진은 반이나 남은 장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듬성듬성 수염이 난 턱을 긁어 댔다.

“형. 위에 입은 그 촌스러운 티셔츠 갖다 버려요, 좀. 그리고 제발 티셔츠 좀 바지 속에 넣어 입지 말라니까요. 어유, 저놈의 배 좀 봐. 임신했어요? 응?”

“아 그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물어보고 싶은 거나 물어봐. 그리고 내 배가 어때서. 똥그래서 귀엽기만 하구먼.”

구시렁대며 그는 바지춤에 눌러 넣었던 티셔츠를 빼냈다.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축 늘어진 뱃살을 보니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클럽에 오는 녀석들 중에서 이상한 놈 없어요?”

“무슨 말이야, 그게? 이상한 놈 없냐고? 우리 가게에 오는 놈들 거의 대부분이 이상해.”

“그게 아니라 꼭 무슨 약쟁이처럼 눈이 게게 풀어져 있거나, 당장 사람 하나 찔러 죽일 것 같은 인상을 하고 있거나, 말투나 행동이 또라이 같은 놈들요.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던 놈들 중에서 말이에요.”

“너한테 관심 있던 놈들이 어디 한둘이냐? 가게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널 쳐다봐. 대부분의 손님들이 너한테 간택받고 싶어서 몸이 달아서 헐떡거리잖아. 그중에서 특별히 또라이 같은 놈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내가 뭘 알겠냐. 그런 건 나보다 홀에서 일하는 진기한테 물어보는 게…… 어, 잠깐. 야, 핸드폰 좀 다시 줘 봐라.”

그는 핸드폰 속 사진 앨범을 다시 뒤졌다. 통통한 손가락으로 저장된 사진들을 빠르게 넘기더니, 어떤 사진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아까 사진들 보면서 설마 싶었는데. 이 녀석 말이다.”

김명진이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얼마 전 학원 앞에서 찍은 일진 양아치 애새끼들을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미간을 좁히곤 눈을 끔뻑이자, 김명진은 손가락으로 사진 속 인물들 중 한 놈의 얼굴 부분을 쿡쿡 찔렀다.

색색깔의 패딩 점퍼 무리들의 리더로 보였던 빨간 패딩이었다. 날 씹어 죽일 듯이 노려보며 욕을 타액처럼 찍찍 내갈기던 그놈.

“우리 가게에 몇 번 왔었던 놈이야, 이 녀석.”

“확실해요? 잘못 본 건 아니고요?”

“아냐. 일전에 이 자식이 술 퍼마시고 진기한테 시비를 걸었던 적이 있어서 정확히 기억해. 사진으로 봐도 알겠지만 이 자식, 얼굴 생김새가 독특하잖아. 눈빛도 예사롭지 않고.”

“얼마 전부터 오기 시작했어요?”

“진기 말로는 한 몇 달 됐다던데. 늘 혼자 와서 구석에 처박혀 서서 사람들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맥주만 홀짝이다 갔다더라. 아직 어린 것 같은데 그날따라 술을 너무 많이 퍼마시기에 진기가 그만 마시라고 했나 봐. 그랬더니 갑자기 달려들어서 진기 멱살을 붙잡았다네.”

“언제 일어난 일이에요? 사진 속의 이 녀석이 진기한테 시비 걸었다던 그 일요.”

“얼마 안 됐어. 저번 달 네 번째 주 목요일, 쇼가 있었던 날이었어.”

그날 나도 이 클럽에 쇼를 구경하러 왔었다.

나를 알아보는 녀석들과 어울려 술을 물처럼 퍼마시다가, 어느 구석에서 촉촉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윤영이를 발견했다. 즉시 윤영이에게 다가가 술을 사고 전화번호를 땄다. 쇼 구경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게 불과 보름 전 일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 녀석 사진을 가지고 있냐? 그리고 이 녀석들 패딩 점퍼 밑에 입은 이거, 설마 교복…….”

나는 얼른 핸드폰을 빼앗아 사진을 화면에서 없앴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온 복도를 다시 걸어갔다. 등 뒤에서 김명진이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들리지 않았다. 직원용 비상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순식간에 뼛속까지 쨍쨍하게 얼어붙었지만 핸드폰을 쥔 손바닥 안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

*

신영 선생의 신명 나는 수험 대비 특강 수업이 끝나자 앞문, 뒷문으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뒤쪽 문에서 긴 머리칼을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자기 얼굴의 반만 한 뿔테 안경을 쓴 작은 여자애와 나란히 서서 걸어 나오는 녀석을 발견했다.

큰 눈과 뽀얀 피부를 한 귀여운 애다. 여자애가 뭐라고 하자 녀석이 수줍게 웃었다. 하얀 볼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옆에 선 여자애를 흘끔거리면서. 저 녀석, 저 여자애를 좋아하는구나. 딱 보기만 해도 알겠다.

“나민아!” 하고 이름을 부르자 여자애가 먼저 내 쪽을 쳐다봤다. 뒤이어 녀석도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어슬렁어슬렁, 녀석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애는 웃음 띤 커다란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는데, 그 모습이 꼭 하얀 말티즈 새끼 같았다.

“와아, 똘추 선생님이다.”

여자애가 환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다가 흠칫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내가 똘추 선생님이다, 이 녀석아.”

귀엽다고 여자애 머리칼을 함부로 쓰다듬기라도 했다간 난리가 난다. 나는 웃으며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려 여자애의 이마를 콩, 치는 시늉을 했다. 여자애가 “죄송해요오” 콧소리를 내면서 히히히 웃었다.

“바로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면 선생님이랑 저녁 먹고 갈래?”

“진짜로 선생님한테 맛난 거 얻어먹고 싶은데 엄마가 학원 앞에서 기다려서 안 돼요.”

“너한테 한 말이 아니라 나민이한테 한 말이거든? 넌 필요 없으니 얼른 가라.”

녀석이 “흥! 핏! 치!” 어린 여자애들 삐침 의성어 3종 세트를 연발하고는 짧은 다리로 종종거리면서 뛰어갔다.

“너 저 애 좋아하지?”

여자애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난 녀석의 팔꿈치를 툭 치며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아,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그런 거구먼.”

“좋아는 하지만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하정이는 좋은 동생이에요.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좋은 파트너고.”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지한 어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말이 그러냐. 친구면 친구지. 애가 애다워야 귀여운 거야, 녀석아.”

“애 아니에요. 성인이에요, 저.”

“원래 네 나이 대 애들은 자기가 다 큰 줄 알지.”

“아뇨. 저 진짜 법적으로 성인 맞아요. 만 19세 됐어요.”

난 할 말을 잃었다. 진짜인가. 재수생이고 삼수생이고, 대학 입시를 목표로 하는 건 마찬가지긴 하니까. 난 잠시 나민이를 바라봤다. 생김새만 보자면 아직 애다.

나이도 많은 녀석이 고등학생 놈들한테 괴롭힘이나 당하고 있냐. 그 말이 치밀어 올랐지만 입 밖으로 끄집어내진 않았다.

“됐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난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힘을 주어 끌었다. 녀석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지만 가지 않겠다고 버티진 않았다. 힘없이 끌려오긴 하는데 이상한 짓을 당한 여자애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짝 얼어붙어 있다.

“먹고 싶은 거 없어? 다 말해. 선생님이 사 줄게.”

“아, 아뇨…… 전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뭐?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그럼 역 근처에 있는 떡볶잇집 갈까?”

건물 밖으로 나와 떡볶잇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녀석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빳빳하게 굳어서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 위에 손을 올려놓고서 눈만 굴렸다. 꼭 벌받는 어린애처럼.

“여기 떡볶이랑 튀김, 어묵 1인분씩 주세요. 아, 그리고 순대도요.”

주문했던 음식이 하나씩 나왔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떡볶이랑 어묵이었다. 젓가락을 꺼내서 녀석의 앞에 내밀었다. 녀석은 두 손으로 그것을 냉큼 받아 들었지만, 먹을 거 앞에 두고 고사만 지내고 앉아 있다.

“왜 안 먹어? 떡볶이 싫어해? 이 집 떡볶이 맛있는데.”

혹시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기 전에는 음식엔 손도 대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나. 나는 먼저 빨간 떡 하나를 찍어서 입 안에 욱여넣었다. 쫀득거리는 떡을 어금니로 야무지게 꼭꼭 씹으며 “너도 먹어. 얼른 먹어” 몇 번이나 권한 뒤에야 녀석은 마지못해 젓가락을 떡볶이 접시 위에 갖다 댔다.

보통 이 나이 대 남자애들은 뭐든지 물처럼 들이마시는 것처럼 먹게 마련인데 이 녀석은 참 예쁘게도 먹는다. 떡을 집어 입 안에 넣고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씹어 꿀꺽 삼킨다. 쩝쩝거리는 소리도 없이, 빨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좀 매운지 발갛게 물든 입술을 뾰족하게 오므려 후우우, 숨을 내쉬고는 어묵 국물을 두어 번 떠먹은 뒤에야 녀석은 입을 열었다.

“저 다음 달부터 선생님 수업 들을 거예요.”

“그래? 그거 잘됐다.”

나도 모르게 뚫어지게 바라보던 녀석의 선홍색으로 물든 입술에서 얼른 눈을 뗐다.

“저 꼭 T 대학 가야 돼요, 선생님.”

“내 수업만 열심히 듣고 잘만 따라와 주면 분명히 갈 수 있을 거다. 그런데 T 대학에 꼭 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

“신우 그룹에 들어가려고요.”

당혹감이 묻어난 목소리를 착 깔고서 물어봤더니 나오는 대답이란 게 이렇다. 이 나라 최고의 명문 대학인 T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애들한테 이유를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다 이런 대답들을 한다. 좋은 데 취직하려고요, 하고.

“그런데 요즘엔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T 대학에 가면 무조건 신우 그룹 같은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거 다 옛말이야. 나 졸업할 때도 그런 거 없었어.”

간장에 찍은 김말이 튀김을 우물우물 씹었다. 이로 씹을 때마다 부서지는 튀김옷 사이에서 기름기가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또 대화가 끊겼다. 나민이는 아까처럼 말없이 테이블 위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떡볶이와 튀김을 집어 먹었다.

대입 학원 강사란 놈이 예비 수험생한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이야기만 해야 되는데, 어두운 현실 얘기를 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떡볶이가 맛이 없는 걸지도. 녀석이 침묵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확실히 또래 애들이랑 잘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너한테 뭘 좀 물어보고 싶은데. 그때 널 때렸던 애들 중에서 빨간 패딩 입은 애.”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사실 용건은 이거였다.

“박하신요? 걔가 왜요?”

“아, 걔 이름이 하신이야? 걔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없나 해서.”

“걔, 어릴 때에는 되게 착했어요. 공부도 잘하고, 어른들 말씀도 잘 듣고, 성격도 좋아서 친구도 많았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그 녀석 좀 이상해졌어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야?”

“네. 형 동생 하던 사이였는데. 동생한테 얻어터지고 다니는 한심한 형이죠, 제가.”

“아냐. 한심하지 않아. 덩치 큰 애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거 보면 나도 가끔 무서운데, 뭐.”

대충 맞장구쳐 주자 녀석의 입에서 말이 술술 새어 나왔다.

“하신이 걔가 언젠가부터 동네 형들이랑 어울려 다니더니 금방 담배도 피우고, 여자애들하고 사귀고, 오토바이도 타고,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녔어요. 걔 아버지가 학교에 몇 번이나 찾아와서 졸업만은 무사히 하게 해 달라고 빌어서 중학교는 무사히 졸업했대요. 그런데 고등학교 가서 더 심해진 거죠.”

녀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물을 마셨다. 난 녀석 앞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주며 조용히 녀석이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 자식은 대체 왜 그러나 모르겠어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시기인데. 한 번 쏟아지면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게 시간인데. 한심한 새끼.”

붉게 물든 녀석의 입술 끝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녀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말려 올라간 녀석의 입술 위에 선명한 보조개가 생겼다. 살짝 내리깐 눈꺼풀에 촘촘히 매달린 속눈썹의 끝이 가게 안 조명에 비쳐 연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묘한 위화감에 뒤통수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어째서일까. 이 녀석을 처음 봤을 때에도 이런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별로 유쾌하진 않아. 도대체 어디서 녀석을 봤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으면서. 그런 주제에 미간에 힘을 주고 확실치 않은 기억을 더듬어 가려 하니까 말이다. 습기 잔뜩 머금은 새벽에 피부에 닿는 축축한 거미줄, 살을 스치는 칼날 같은 잡초 잎들, 그런 것들을 헤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란 말이다.

“저기, 나민아. 넌 기억 못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널 분명히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인데. 정말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나민이, 네가 낯설지가 않아서.”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떡볶이를 씹으며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업을 듣느라 빗어 넘겼던 머리칼이 흘러내려 또 녀석의 눈을 가렸다.

“기억하시나 보네요.”

학원 안에서 마주쳤거나, 학원 근처 길가에서 스쳐 지나갔거나, 그런 종류의 대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터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역시 너, 나랑 만난 적 있지? 근데 내가 널 본 적 있다는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어디서 본 건지 모르겠어.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야.”

“그때 선생님, 술에 잔뜩 취해 있었으니까요.”

술? 내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취할 때까지 마시지는 않는다. 가끔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시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대개……. 잠깐. 설마, 설마 그럴 리가…….

“<러스트>라는 클럽에서요. 선생님을 봤어요.”

맞은편에 앉은 하얀 녀석이 떡볶이 국물에 푹 젖어 빨갛게 익은 입술을 달싹였다. 손에 쥐고 있던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포크 끝에 걸려 있던 순대가 처참하게 박살 났다.

“아까 여쭤보셨던 하신이요. 그 자식한테 거기에 억지로 끌려갔어요. 그 자식이 호모 새끼란 거 그때 처음 알았죠. 무섭게 생긴 형들이 우리한테 다가와서 술을 사 줬어요. 옆에 앉은 새끼가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허벅지랑 거시기를 막 만지려고 해서 욕을 하면서 일어났거든요. 그랬더니 그 새끼가 내 멱살을 움켜쥐고 날 두들겨 패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선생님이 나타나서 절 구해 주셨어요.”

녀석은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밋밋한 어조로 중얼중얼 늘어놓았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앞에 앉은 녀석이 표정 없는 얼굴로 계속 쫑알댔다. 녀석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은 덜덜 떨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새끼가 도망가니까 이제 선생님이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작업을 거시더라고요. 술이 떡이 돼서 혀가 완전 꼬부라졌는데도 계속 ‘너 예쁘다. 귀엽다’ 하시면서 막 제 얼굴을 만지고, 팔을 쓰다듬고…….”

“자, 자, 잠깐…… 저기 나민아.”

“왜요? 거기까지는 기억 안 나세요? 계속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고 집요하게 물으셨잖아요.”

아니. 기억한다. 모든 게 다 기억났다. 녀석의 입에서 클럽 얘기가 나오자 잊고 있던 기억들이 줄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실 김명진이 빨간 패딩 녀석이 클럽에 드나든다는 얘기를 했을 때,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에이, 그럴 리가, 하면서 의식적으로 차단했다.

그날따라 난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꽤 짭짤한 밤일 거리가 들어와서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다 보니, 간덩이가 부어터져 비싼 양주를 겁도 없이 터억 시켜서는 클럽 죽돌이 놈들이랑 물처럼 퍼마셨다.

늘 맥주, 소주, 막걸리만 술이라고 들이붓던 싸구려 입이 간만에 호사를 누렸던 날이었다. 순식간에 취해서 눈이 게게 풀리고, 벌어진 입에선 영구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는 꼴로 주위를 둘러봤는데.

엄청나게 괜찮은 애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닌가. 키는 훤칠하고, 호리호리하게 쫙 빠진 몸매는 늘씬하고, 어두운 데서도 자체 발광하는 피부에 이목구비 또한 기가 막히게 단아했다. 무엇보다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바짝 얼어서 눈만 또록또록 굴리며 주위를 경계하는 그 모습이라니.

저 녀석은 ‘내 거! 내 밥!’ 요러고 눈으로 찜해 두고, 침을 쓰윽 닦으며 입맛을 다시는데, 웬 새끼들이 뽀얀 애기한테 어슬렁어슬렁 다가가는 거다. 새끼가 제 주제도 모르고 썩은 비린내 폴폴 풍기면서 뽀얀 애기 몸을 만지작대며 성추행을 시도했는데, 애기가 겁에 질려 바르르 떨면서도 ‘왕!’ 짖은 거다. 빌어먹을 새끼가 뽀얀 녀석, 설탕 과자 같은 얼굴에 흠집을 내려 하기에 다짜고짜 달려들었지.

그리고 뽀얀 녀석한테 다가갔다. 본격적으로 작업하려고.

“저기 그, 그러니까 그때 내가 나민이 너랑…….”

“잤냐고요?”

툭 튀어나오는 녀석의 무심한 말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뇨. 그런 일은 없었어요. 하지만.”

안도할 새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하지만, 뒤에 붙은 말이 유쾌한 내용일 리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뭐? 눈이 커지고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숨까지 거칠어졌다.

“집에 데려다주신다 하시고는 절 모텔로 데리고 가려고 하셨죠.”

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끄으응, 치질 걸린 강아지 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머리통을 감쌌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었다. 바닥에 보이는 움푹 팬 구멍에 대가리 처박고 울고 싶었다. 진짜 그랬다. 괴성을 내지르면서 막 울고만 싶었다.

“중간에 모텔들 많은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에야 눈치챘죠. 아, 집에 데려다주시는 게 아니라 날 저기로 데려가려고 하시는구나. 그래도 제가 집에 가야 된다고 막 울면서 사정하니까 알았어, 누가 너 잡아먹는대? 울지 마, 울지 마, 하시면서 택시까지 태워서 보내 주셨어요. 택시비도 주시고요.”

“미안하다, 정말.”

입에서 세계 공통 책임 회피 멘트가 비어져 나왔다. 이 한 마디면 웬만한 상황은 종료가 된다.

“선생님이 저한테 미안해하실 일이 뭐 있는데요? 수험생 주제에 그런 데 간 제 잘못이죠. 선생님 사과받자고 꺼낸 말이 아니라 선생님이 정말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 있는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한 거예요.”

“아니, 그래도…….”

“정말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이 학원에 와서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좀 놀라긴 했지만요.”

목소리만 듣고 보면 정말 그렇다. 조금은 특별했던 어느 날의 일상을 말하는 것처럼 녀석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고개를 슬쩍 들어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녀석은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살짝 걸쳐 놓은 채, 손가락을 타다닥타다닥 움직이면서.

창밖을 쳐다보는 그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학원에서 마주치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습관처럼 녀석이 볼을 씰룩이자 아직 앳되고 둥근 곡선을 지닌 볼살 중간에 깊은 우물이 팬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요, 선생님.”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녀석이 입술만 움직였다.

“저도 그때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선생님도 그렇게 해 주세요. 알려져 봤자 뭐가 좋겠어요.”

“아, 그,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하자.”

솔직히 말하자면 두 사람만의 비밀은 아니다. 그때, 빨간 패딩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자식은 날 알고 있다. 하지만 불공평하다느니, 어쩌고저쩌고할 때가 아니었다. 녀석이 먼저 그날 일을 묻어 두자고 한다. 비밀로 하잔다. 녀석에게 넙죽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계속 창밖을 쳐다보던 녀석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어, 응. 단답형의 소리만 몇 번 지껄인 뒤에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선생님, 전 가 볼게요. 떡볶이 잘 먹었습니다.”

“나민아, 선생님한테 뭐 부탁할 거 있거나 하면 언제든지 말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막 사 달라고 하고. 시험 기간 전에 특별히 일대일 보충 수업도 해 줄 테니까.”

가방을 어깨에 메며 녀석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대답 대신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은 겉모습과는 달리 되게 착하고 순수하신 것 같아요. 은근히 마음도 여리고. 그래서 귀여워요, 선생님.”

그러면서 녀석이 싱긋 웃었다. 한쪽 볼에 깊게 팬 보조개를 만들면서. 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할 말을 잃었다. 그 순간에는 코웃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녀석이 나간 뒤에야 허, 허허, 목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만 실컷 냈다.

뭐?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착하고 순수해? 마음이 여려? 그래서 귀여워? 허허허! 워낙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 같아서 엄마나 주위 어른들한테 빈말로라도 귀엽단 말을 못 들어 보고 살았건만. 이제 갓 성인이 된 핏덩이 같은 애새끼가 낼모레면 서른인 어른한테 귀여워?

그건 내가 클럽에서 만난 뽀송뽀송한 애기들한테나 쓰는 말이다, 인마. 불가리 옴므 향기 후욱 풍기며 45도 각도로 고개를 비틀어 샐쭉 웃으면서 하는 전용 멘트야. 너 진짜 귀엽다, 이름이 뭐야?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이면 대부분의 애기들은 나한테 홀랑 넘어왔어. 난 최고로 잘나가는 놈이라고. 매력적이고, 섹시하고, 관능적이고, 남성미 팍팍 풍기는 한 마리 수컷 늑대야. 나 임동추는!

그런데 존슨즈베이비 로션 향기 날 것 같은 뽀송이가 ‘선생님, 귀여워요’ 하는데 왜 이놈의 미친 심장은 두근거리는 건가. ‘선생님, 멋져요’도 아니고 ‘귀여워’, 하면서 웃는 얼굴을 올려다본 건데 대체 왜.

갑자기 온몸에 열이 확 올라서 냉수나 들이켜려 했더니 물통이 텅 비어 있었다.

“이모. 여기 물 좀 더 줘요!”

“학원 선생이란 놈이 글씨도 못 읽어? 우리 집은 셀프야, 셀프!”

커다란 주걱으로 떡볶이가 가득 담긴 철판을 휘휘 젓던 떡볶잇집 이모가 흡사 사자후를 방불케 하는 괴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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