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귀신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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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한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밤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음울한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풀벌레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이 울어 대는 소리가 전부인 적막한 밤.
어두운 밤의 장막을 찢고,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라이트를 켠 차는 어두컴컴한 길 위를 조심스럽게 내달렸다. 남의 집에 몰래 숨어드는 밤도둑처럼.
나는 굳게 닫힌 차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시꺼먼 풍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이했다. 불빛에 비쳤다가 사라지고, 또다시 불빛에 비쳤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풍경은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생물처럼 보인다.
야밤에 아무도 없는 길을 지나다 보면 이런 묘한 생각이 들곤 한다. 뭔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지 않을까. 이런 숲속에서 뭔가 나타나 봤자 들짐승이겠지만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끄으응. 하이고. 죽겠네.”
뒷좌석에서 장마철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던 노금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우우. 그만 좀 해요! 노인네같이 끙끙대는 거 듣기 싫어 죽겠네.”
운전을 하고 있던 막내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끼야. 넌 형이 아파 죽어 가는데 말을 꼭 그따위로 해야 되냐? 네가 인마, 치과 가서 멀쩡한 이 두 개나 빼 봐라.”
“겨우 사랑니 두 개 뺀 걸로 웬 엄살이에요? 배에 구멍이 뚫려서도 잘만 걸어 다니던 사람이.”
“그땐 아픈 것보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렬해서 고통을 잊었던 거지. 그런데 입 쫙 벌린 채로 생니 잡아 빼는 느낌이 얼마나 지랄 같은지 아냐?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퉁퉁 부은 볼을 문지르며 웅얼거리던 노금영은 다시 끄으응 앓는 소리를 냈다.
“진짜 더럽게 아프네! 야, 똘추야. 물 있냐?”
그는 발로 조수석을 치며 물었다.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대시보드 위의 생수병을 들어, 뒷좌석의 인간에게 집어 던졌다.
“또 한 번 그딴 이름으로 부르면 입을 확 찢어 버릴 겁니다.”
온 힘을 실어 생수병을 집어 던지는 것과 동시에, 험악한 얼굴로 한마디 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망할 노금영은 물을 마시면서도 낄낄대면서 웃어 댔다.
빌어먹을 인간. 임동추라는 멀쩡한 이름 놔두고 어째서 저 인간은 매번 똘추, 똘추, 해 대는 건지. 저 인간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선 임동추가 아닌 ‘임똘추’로 통한다. 하도 열이 받아서 저 인간을 부를 때도 ‘노구멍, 노구멍!’ 목에 핏대를 세워 외쳤지만 어디 똘추만 하랴.
하지만 인간 노구멍의 거지 같은 작명 센스에 희생당한 건 나뿐만이 아니다.
“야. 똥수야. 형님, 더럽게 심심하다. 풍악이나 좀 울려라.”
“미쳤어요? 우리가 지금 놀러 가는 줄 알아요? 그리고 제발 좀 똥수라고 부르지 좀 말라니까요!”
한동수.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저 어린 녀석도 예외는 아니다.
노구멍이 우리들이 살던 동네에 이사 온 건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였다. 동수 녀석은 그 당시 일곱 살이었고. 동수는 일곱 살 때부터 노구멍에게 시달려 왔다. 불쌍하게도.
“나 개명한 거 몰라요? 이제 난 똥수가 아니라 휘림이에요, 한휘림!”
동수 녀석이 핸들을 틀어쥔 손에 불끈 힘을 주어 외친다. 나와 노금영은 동시에 배가 터져라 웃어 젖혔다.
“으하하! 야, 이 미친놈아. 네놈이 무슨 아이돌 그룹 멤버냐? 한휘림? 똥 싸고 자빠졌다, 진짜!”
“그래서 이 행님이 그럴듯한 별명 하나 지어 줬잖냐. 치킨 똥수! 얼마나 멋져? 그게 싫으면 신속 배달 똥수, 아니면 유식하게 영어로다가 스파이시 핫 치킨 똥수로 불러 줄까?”
“으아아악! 진짜! 어디 가서 확 죽어 버리련다! 이대로는 내가 못산다! 못살아!”
한동수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팡팡 쳐 대며 피고름 맺힌 샤우팅을 내질렀다.
놈이 한휘림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밤, 누군가 프라이드치킨 다섯 마리와 양념 치킨 세 마리를 배달시켰단다. 장사도 잘되지 않는데 한꺼번에 여덟 마리씩이나 주문이 들어와서 신이 난 동수 아부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닭을 튀겼고, 머리에 플라스틱 롤을 돌돌 만 동수 엄마는 남편 노랫가락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이면서 닭을 포장했다.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며 만화책을 보던 동수 놈은 비옷을 입고 툴툴대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치킨 배달을 시킨 곳은 야트막한 뒷산 앞에 있는 주택이었는데, 이미 집 안 거실에 자리 잡은 십여 명의 사람들은 술판을 벌인 상태였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젊은 놈이 치킨값을 계산하고, 거나하게 취한 중년 여자가 “총각. 이리 와서 한잔하고 가아아” 하며 같잖은 애교를 피웠다.
<전 오토바이를 몰고 가야 해서 술은 곤란합니다.>
동수는 딱 잘라 거절했지만 중년 여자는 끈질겼다.
<그럼 술 말고 다른 거라도 좀 먹고 가. 음식이 너무 많아서 어차피 우리들끼리는 다 먹지도 못해.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중년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앵앵대자 중년 사내들이 “그래, 올라와! 올라와서 좀 먹고 가!” 이러면서 동수를 유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치킨은 여덟 마리나 왜 시켰는가!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동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동수 놈이 하는 말이 이랬다. “아저씨들이 어찌나 인상이 험악하고 덩치들이 좋은지. 다들 소 한 마리씩은 때려잡게 생겼더라고요.” 그러는 자기도 신장 190이 넘는 거구인 주제에.
어쨌든 동수는 마지못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따라 저녁을 좀 시원찮게 먹어서 출출했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동수는 상 위의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러다 옆에 앉은 중년 여자가 따라 주는 탁주도 한 잔 두 잔 받아먹고.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옆에서 샐샐 웃으며 애교를 떠는 중년 여자의 얼굴이 연예인 뺨칠 정도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싶을 때.
노인 한 명이 나타났다. 노인이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치킨값을 계산했던 젊은 놈이 얼른 달려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받아서 정리하고, 외투를 받아 챙겼다. 그토록 시끄럽게 떠들던 사내들도, 쉴 새 없이 웃어 대던 여자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검은 머리칼 한 올 없는 백발에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은 옛날 양반들처럼 컷흠컷흠, 헛기침을 하면서 휘적휘적 거실로 올라섰다.
노인은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아 사람들 눈치만 슬슬 살피며 꿀 절편을 씹고 있던 동수의 앞에 섰다. 동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이름이 뭐냐?>
<이름이요? 동수입니다. 한동수요.>
<너, 그 이름으로 살다간 올해 안에 뒈진다.>
<네, 네에? 무슨 말씀이세요?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곧 죽는다니요!>
노인의 말에 술이 확 깨더란다.
<네놈 운명이 그래. 아마 네놈이 태어났을 때도 네놈 부모들이 나 같은 놈한테 비슷한 말을 들었을 게다. 그러니 애 이름을 동수라고 지었지. 그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에 네놈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게야. 그런데 이제 네놈 이름도 수명이 다했어.>
놀랄 노 자였다. 동수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한 번씩 동수가 어릴 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그나마 ‘동수’라는 이름이었기에 매번 살아남았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제야 가만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말로는 설명 못 할 교교한 귀기가 흐르는데, 그 순간 직감했단다. 저 노인은 진짜라고. 5년 전인가, 놀러 갔던 안개 자욱이 낀 계룡산 자락에서 마주친 도인과 똑같은 분위기를 풍기더라고 했다.
동수는 “저 좀 살려 주세요! 영감니임!” 하며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고, 노인은 “그럼 신령님의 기운을 빌려 이름 하나를 지어 주마. 하지만 공짜로 신령님의 기운을 빌릴 순 없으니, 네 녀석이 할 수 있는 한 신령님에게 정성을 보여라” 하며 인자하게 웃었다.
동수는 당장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가 30만 원을 인출해서 가지고 왔고, 노인은 자신이 모시는 ‘신령님’의 기운을 빌려 정성껏 이름 하나를 지어 주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한휘림이다.
동수 놈은 신이 났다.
동수라는 촌티 풀풀 날리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휘림이라는 멋진 이름이 생기다니. 게다가 이 이름으로 바꾸면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다니!
집으로 달려가서 “아부지, 어머니! 이제 날 부를 때 한휘림으로 불러 줘요. 이제 내 이름은 휘림이야!” 이러고 외쳤다가 오다리 씹으며 맥주를 마시던 아부지한테 삼선 슬리퍼로 얻어터지고, 엄마한테는 밥주걱으로 등짝을 얻어맞고, 동네 친구들한테는 실컷 놀림이나 당하고. 30만 원이나 주고 지어 온 멋진 새 이름인데 아무도 불러 주질 않고, 실컷 놀려 먹기나 하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까.
그런 녀석이 딱하긴 하다만, 절대로 그 이름으로 불러 줄 생각은 없다.
한휘림? 녀석에게 그 이름이 어울리기나 하냔 말이다. 동수 놈은 영감탱이한테 사기당한 거다. 놈은 덩치만 커다랄 뿐,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애다. 그런 순진한 애를 속여서 30만 원이나 삥 뜯다니.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이번 일이 끝나면 노금영이랑 영감탱이 한번 손봐 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나 노금영이나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놈이 겁도 없이 감히 우리 ‘패밀리’를 건드리는 새끼들이다.
녀석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소리에 라디오를 켰다. 순식간에 차 안에는 음악 소리가 가득 찼다. 셋 다 평소에는 듣지도 않는 클래식 선율이 흘러나왔다. 나는 핸드폰을 끄집어내 액정 화면에 찍힌 문자를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똘추 자식 또 애인 생겼나 보네. 여자들은 저 비쩍 곯은 멸치 새끼가 뭐 좋다고 개떼같이 달려드는지 몰라.”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노금영이 빈정댔다.
“내가 형보다 더 크고 체중도 더 나가는 거 알아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요. 내가 비쩍 곯은 멸치처럼 보이는지.”
나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지지 않고 응수했다. 노금영은 “헤엥!” 크게 코웃음을 치며 조수석을 발로 찼다.
“아씨! 발로 차지 좀 마요! 카시트 더러워지면 아부지한테 뒈지게 얻어터진다고요!”
동수가 목에 핏대를 올리고 꽥꽥댔다.
주머니 안에서 다시 한번 핸드폰이 진동했다. 동수 놈과 같은 나이인 스무 살이라고 하는데, 어째 미성년자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 어린것이 보낸 문자였다. ‘나 오늘 밤 되게 한가한데에에. 나랑 놀아 줘요오’ 첫 번째 문자가 그렇게 왔는데 답이 없었으니 놀아 달라고 칭얼대는 문자를 한 번 더 보낸 것일 거다. 귀여운 짜식.
오늘 밤 이 일만 없었다면 윤영이, 이름도 귀엽고 외모도 끝내주게 귀여운 요 녀석의 자취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을 텐데. 먹고살기 더럽게 힘들구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클래식 선율에 섞여 뽁뽁대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노금영이 뒷자리에서 퍼져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저 뒤에 실린 거, 저거 대체 뭐야?”
노금영이 말하는 ‘저거’는 트렁크에 실린 상자를 말하는 것일 게다. 오늘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트렁크에 든 상자를 누군가에게 직접 전해 줘야 하는 일이었다.
“그거야 우리도 뭔지 모르죠. 의뢰인이 절대로 상자를 열어 보지도 말고, 안에 뭐가 든 건지 알려고 하지도 말라던데요.”
“혹시 안에 신체 장기 같은 거라도 든 거 아냐?”
“안에 든 게 장기든 뭐든, 이 야밤에 산속에서 만나서 물건을 전해 받으려는 걸 보면 보통 물건은 아닌가 보죠.”
동수가 시큰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묻는 쪽도 대답하는 쪽도 듣는 쪽도, 아무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의뢰인이 맡긴 상자 안에 든 게 진짜 인간의 장기라 해도 무슨 상관이랴. 이런 일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니고.
돈만 확실히 받을 수 있다면 된다. 사람을 죽이는 짓만 빼고는 돈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한다.
나나 동수, 노금영, 모두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이런 ‘밤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우리의 부모는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자식인 우리들 역시 없는 놈이다. 없는 놈은 밤낮없이 피 토하며 일을 해야 그럭저럭 먹고살 수가 있다. 더럽게 치사하지만 이 세상 이치가 그렇다.
어째 이 동네는 도로가 뚫려 있는데도 주위에 집 한 채 없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노란 중앙선이 전부다.
길가 수풀 사이로 <푸름 사슴 농장>이라는 간판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저기가 목적지였다. 물건을 받을 사람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자정이다. 아직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최근 유행하는 걸그룹의 노래다. 동수가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어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녀석이 흘끔, 핸드폰을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녀석이야말로 여자 친구가 생긴 건가.
“이번 주 토요일에 친구들이 술 먹자고 하네요. 예쁜 여자애들 왕창 나온다고.”
“그래? 좋겠네. 네 마음에 드는 여자 있으면 확 잡아.”
“그래도 될까요?”
“왜 그걸 나한테 묻냐?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사귀는 거지. 내가 네놈 엄마도 아니고.”
“아니, 그냥, 동추 형은 연애 경험도 많고 하니까…….”
동수 놈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게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 자식은 중학교 때부터 이랬지. 같은 반 여자애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후배가 사귀자고 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는 누나가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하면서 여자에 관련된 얘기는 전부 나한테 털어놓았다.
이 자식이 왜 이러는지 잘 안다. 잘 알고 있지만 녀석 앞에선 내색도 하지 않으련다.
“동수, 너한테는 연상이 어울릴 거다. 넌 어린 여자애들은 감당 못 할 거야.”
“형도 연상이 좋아요?”
“아니. 난 연하가 좋지.”
“그건 나도 그래.”
뒤에서 핸드폰 게임에 열중해 있던 노금영도 낄낄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동수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였다. 녀석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동수가 핸드폰으로 다시 시선을 가져갔을 때였다.
눈앞으로 쭈욱 뻗은 노란 중앙선 사이에 뭔가가 보였다. 들짐승? 아니다. 웅크려 앉은 사람이다!
“한똥수! 앞! 앞을 봐!”
내가 황급히 소리쳤을 때였다. 웅크려 있던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동수도 고개를 번쩍 쳐들어 재빨리 핸들을 틀었지만 때는 늦었다.
‘터엉!’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차체에 뭔가 부딪쳐 공중으로 날아갔다. 끼이이익,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도로 위를 가로지른 차는 도로 바깥쪽의 나무를 들이받고서야 멈춰 섰다.
엿가락처럼 우그러진 범퍼 사이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와 동수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어 상태가 좀 나은 편이었지만, 노금영은 뒷좌석에서 걸레짝처럼 구겨져 있었다.
“형. 괜찮아요?”
노금영이 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앞 시트에 이마가 부딪쳐 피가 흐르긴 하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에 뭐였냐?”
“아무래도 사람을 친 것 같아요.”
나는 노금영에게 주유소에서 받은 티슈를 내밀었다.
그때 동수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말릴 새도 없었다. 녀석은 곧바로 도로 위에 널브러진 덩어리를 향해 달려갔다. 축 늘어져서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날아갈 때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거나, 죽었거나…….
노금영이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이밀고 내 귀에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묻는 것이다.
“야, 동추야. 근데 우리가 친 게 진짜 사람이 맞긴 한 거냐?”
사람이면 사람이지 진짜 사람이냐고?
머리를 부딪혀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어깨를 움켜쥔 노금영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나도 곧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본 게 있으니까.
분명 누군가 차에 정면으로 치여 날아갔다. 그런데 어떻게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을 수 있는가. 아스팔트 위는 깨끗했다. 도로 위에 널브러진 건 사람이 아니라 누가 갖다 버린 검은 비닐봉지처럼 보였다.
분명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더럽게 찜찜하고 더럽게 불쾌한 뭔가가.
동수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 널브러진 사람의 형체 앞에 쭈그려 앉아 상대방의 어깨를 흔드는 게 보였다.
사람의 형체를 한 그것은 흔들흔들, 힘없이 움직였다. 기이하게 뒤틀린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는 사람의 얼굴은 흰색이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하얗다. 하얀 페인트를 처덕처덕 발라 놓은 것처럼.
아니, 아니다. 저 하얀 건 얼굴이 아니다. 얼굴에 뒤집어쓴 하얀 가면이었다.
눈 부분은 동그랗고, 눈썹은 짙고 검으며, 이마·양 볼에 빨간색 연지를 찍어 바른 것 같은 기괴한 모양의 가면이었다.
동수도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상반신을 뒤로 확 잡아 뺐다.
흰 가면을 쓴 사람의 몸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동수는 천천히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동수가 멀어지려 하자 바닥에 미동도 없이 드러누워 있던 하얀 얼굴을 한 사람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뒤틀려 이상한 각도로 꺾인 다리로 바닥을 지탱하고서. 다리로 지탱해 서자 꺾인 다리 관절 사이로 뾰족한 뭔가가 튀어나왔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러진 뼈일 것이다. 관절이 빠진 팔 하나가 축 늘어졌고, 목뼈도 완전히 뒤틀려 흰 가면을 쓴 얼굴은 90도 각도로 돌아가 있었다.
사람? 사람인 건가, 저게?
사람이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던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 혼자였다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노금영도 있었다. 그리고 동수도 있다. 그래. 저 밖엔 동수가 있었다.
“똥수, 이 자식아! 빨리 차에 타!”
노금영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동수에게 소리쳤다. 동수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차를 향해 뛰어왔다.
그러자 흰 가면을 쓴 무언가도 뛰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흡사 한 마리 짐승 같았다. 관절이 빠지고 부러진 뼈들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그런데도 90도로 홱 돌아간 흰 가면을 쓴 놈은 아무렇지 않게 움직인다.
공포 영화가 따로 없다.
차 안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인데 쫓기는 동수는 오죽할까. 동수가 전력을 다해 뛰는데도 그것은 순식간에 녀석을 따라잡았다. 으스러진 팔로 동수의 머리칼이나 옷깃을 붙잡을 수가 없는 탓에, 그것은 허공을 휙 날아 몸뚱이 전체로 동수를 덮쳤다.
“저 새끼가!”
욕을 내갈기며 노금영이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
노금영이 겉옷 품 안에서 꺼내 든 단도 날이 달빛에 비쳐 푸른색으로 번쩍였다. 동수를 덮친 저것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차를 움직이는 게 우선이다. 나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비어 있는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시동을 걸기도 전에 차체 위로 쿠웅, 소리를 내며 뭔가가 떨어졌다. 뒤이어 쿠웅쿠웅, 하는 육중한 소리가 연이어 이어졌다.
가면을 쓴 사람 몸뚱이들이 차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고, 차 아래로 툭 떨어지고, 뒤쪽 범퍼를 흔들며 바닥에 착지했다. 흰 가면, 도깨비 같은 형상을 한 가면, 시꺼먼 곰보 가면. 그것들이 뒤집어쓴 탈바가지는 종류도 다양했다.
에에이! 씨발! 벌어진 입에서 절로 상큼한 욕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차는 가면 무리들에게 에워싸였다.
정면에 선 한 놈이 주먹으로 앞 범퍼를 텅텅 두들겼다. 또 다른 한 놈은 차창을 마구 쳤다. 그리고 두어 놈이 합세해서 차를 흔들었다. 놈들은 나름 일사불란했다. 각자의 역할이 확실하게 주어진 특공대 같은 놈들이었다.
놈들에겐 자신들의 주먹 자체가 무기요, 흉기였다.
맨주먹으로 두어 번 두들기기만 했는데도 차창이 쩌억, 갈라졌다. 아까부터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온몸의 뼈가 부서진 주제에 굶주린 들개처럼 뛰는 놈이 있더니, 이젠 맨주먹으로 차 유리를 깨는 놈들이다. 대체 저것들은 뭐란 말이냐!
나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크르릉크르릉, 짐승 울음소리 같은 엔진 소리를 내기만 할 뿐 좀처럼 시동이 걸리질 않았다. 나무를 들이받을 때 차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쩌억 갈라졌던 창이 드디어 완전히 깨졌다. 잘게 깨진 유리 파편들과 함께 뻥 뚫린 구멍 사이로 갈색 가면을 뒤집어쓴 놈의 손이 불쑥 뻗어 나왔다.
“으악!”
놈의 손이 내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소금 뿌린 미꾸리처럼 몸을 뒤틀었다.
머리칼을 움켜쥔 놈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왔다. 필사적으로 손을 버둥거려 놈의 손, 팔뚝을 때리고 손톱으로 긁었지만 놈은 끄떡도 없었다.
힘겹게, 정말로 힘겹게 품 안 깊숙이 꽂혀 있던 칼을 끄집어냈다. ‘밤일’을 하는 우리 같은 놈들은 작은 칼을 품속에 몇 개씩 숨겨 다니곤 한다.
칼로 놈의 팔뚝을 인정사정없이 푹 쑤셨다. 기대했던 비명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칼을 움켜쥔 손에 힘이 빠지긴 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놈은 놓친 나를 잡기 위해 칼이 박힌 팔을 뒤틀었다.
저 새끼는 아프지도 않은 건가. 뒤집어쓴 가면에는 표정이 없어서 더더욱 소름 끼쳤다.
나는 차를 깨끗이 포기했다. 시동도 걸리지 않는 차는 쓸모없는 고물에 불과했다. 양옆, 아니, 사방에 가면 무리들이 에워싸고 있어 무력행사 없이는 탈출이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조수석 쪽의 문을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찼다. 문이 열리는 반동에 의해 달라붙어 있던 가면 놈이 떨어져 나간 틈을 타 밖으로 기어 나갔다.
“이 새끼들 대체 뭐야!”
노금영이 도로 위에 서서 꽥꽥 소리를 내지르는 게 들렸다. 동수는 보이지도 않았다.
도로 옆, 수풀 뒤에서 녀석이 악악대며 욕을 해 대는 소리가 들리긴 했다. 녀석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양이었다.
노금영의 앞에는 붉은색 가면을 쓴 놈이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비칠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가 들고 있던 칼로 놈의 몸뚱이를 푹푹 찔렀다. 찌르고 쑤셔 박을 때마다 가면 놈의 몸이 크게 휘청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놈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더 무서운 건 그렇게 찔러 댔는데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인간이 아냐, 이 새끼들. 귀신이야!”
미친…….
하지만 노금영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코웃음을 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귀신이 아니라면 저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냐.
등 뒤로 가면 놈 한 마리가 들러붙었다. 나는 들고 있던 칼로 등 뒤에 바짝 붙은 놈의 배를 쑤셨다. 그르르, 소리를 내며 휘청대는 놈을 있는 힘껏 밀쳐 떼어 냈다.
나는 노금영에게 달려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형, 안되겠습니다. 물건 가지고 튑시다.”
“근데 이 새끼들, 물건이 목적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물건을 놔두고 튈 순 없잖습니까. 위약금이 얼만데.”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의뢰받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때, 우리들이 의뢰인에게 줘야 할 위약금이란 게 있다.
무조건 먼저 받은 선불금의 두 배다. 돈도 돈이지만, 의뢰받은 일을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우리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요즘엔 하도 먹고살기가 어려운 세상이라 힘 좀 쓰는 젊은 놈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밤일’에 뛰어든다. 이 업계에서도 예외 없이 무한 경쟁 시스템이 적용되는 것이다.
노금영과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우리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노금영과 나는 동시에 움직였다.
우리들이 차를 향해 달려가자 방금 전까지 노금영이 쑤시고 찌르던 놈이 절뚝절뚝하면서 쫓아왔다. 둔해 빠진 움직임이었지만 몸을 날려 우리들을 덮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뛰면서 허리춤, 벨트 뒤쪽에 달아 놓은 작은 파우치 속에 숨겨 두었던 칼을 끄집어 들었다.
우리의 생각은 맞았다.
이놈들의 목적은 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물건을 훔치는 것이었다. 놈들은 여전히 차 주위에 몰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트렁크를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제아무리 차 유리도 맨손으로 깨는 괴력의 소유자들이라 해도, 꽉 닫힌 트렁크를 열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차 내부의 버튼을 조작하거나, 차 키를 빼 와 문을 여는 정도의 머리는 없는 듯하고.
우리들이 다시 차 근처에 나타나자 놈들의 관심도 당연히 이쪽으로 향했다.
“탈바가지들아, 이리 와라. 형이랑 한번 신나게 놀아 보자!”
노금영이 일부러 과장되게 몸을 흔들어 빈정대며 놈들을 도발했다.
놈들은 동네 똥개들보다도 더 단순했다. 똥개들은 그나마 누가 아무리 앞에서 알짱대도 잠시 눈치라도 살피는데, 놈들은 그냥 무작정 달려들고 봤다.
놈들이 노금영에게 굶주린 개 떼처럼 달려드는 것을 보며 나는 차 안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 차 키를 빼 왔다. 이제는 트렁크 문을 열고 안에 든 물건을 빼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작업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우리의 계획엔 큰 문제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아직도 적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눈에 보이는 놈들은 일단 전부 거머리같이 노금영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트렁크 문을 열고 제주 감귤 상자를 꺼내 안아 든 순간, 또 한 놈이 나타났다.
놈은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시꺼먼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조금도 놈의 낌새를 알아챌 수가 없었다.
놈은 뭉개진 개떡 같은 형상의 가면으로 뒤덮인 얼굴을 불쑥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앞서 말했듯이, 누가 옆에 다가왔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터라 그야말로 일순 심장 크기가 10분의 1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숨 쉬는 것도 잊었을 정도였다. 가슴팍에 제주 감귤 상자를 껴안은 채, 나는 눈을 치떴다. 눈을 너무 크게 치뜨고 있어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가면들과는 다른 형상이다.
얼굴 형상인데 동그랗게 뚫린 눈이 네 개였다. 눈썹 아래에 하나, 그 아래에 또 하나. 뭉툭한 코에 웃고 있는 입. 귀는 얼굴의 반만 하다. 나무를 깎아 만든 웃고 있는 형상의 갈색 얼굴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순 주위의 공기가 쨍쨍하게 얼어붙은 듯했다.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내 것은 아니다. 내 숨소리는 아주 빠르고, 아주 작다. 이 숨소리는 갈색 가면의 것이다.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귀신은 아니란 얘기였다.
“너…… 뭐냐?”
입술을 비집고 그 말이 새어 나왔다. 극도의 긴장 탓에 목구멍이 오그라들어 발음이 형편없었다. 대답은 없었다.
“네놈들, 대체 뭐야?”
이번에도 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 수 있을 리가. 얼굴 전체를 가면으로 덧씌워 놓았는데.
놈은 대답 대신 후우우욱, 거칠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놈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달빛에 비친 놈의 손은 희다. 굵은 핏줄이 도드라진 젊은 남자의 건강한 손이었다.
뻗은 손은 내가 들고 있는 감귤 박스로 향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어 놈의 손을 쳐 냈다. 감귤 박스를 품에 단단히 껴안고 상반신을 돌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넘겨.”
놀라운 일이었다. 놈이 말을 했다.
가면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웅얼대는 소리이긴 했지만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크게 뜬 눈으로 놈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놈은 내가 겁에 질린 것이라 생각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굳어 있는 근육을 이완시키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어느 정도 겁에 질려 있긴 했다.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귀신같은 놈들. 뼈가 으스러져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서 달려드는 놈들은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무서웠다. 공포 영화 속 주인공처럼 허공에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놈은 다르다. 이놈은 저 새끼들과는 다른 부류다. 숨을 쉬고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손을 가지고 있는, 분명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우리들처럼 칼로 쑤시면 피가 흐르고, 고통을 느끼는 놈이란 얘기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말해 주면 넘겨주지. 우리도 찜찜한 놈을 고객 삼고 싶지 않거든.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었기에 이 난리야?”
입으로는 중얼거리며 나는 조심스럽게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주머니칼을 끄집어냈다. 다소 누그러진 말투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갈색 가면은 착실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안에 든 게 뭔지는 알 거 없어. 찜찜한 놈을 고객 삼고 싶지 않다고 했지? 그럼 이 일을 의뢰한 놈하고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마. 얽혀 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 놈이야.”
어어, 그래? 친절한 답변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척하다가 끄집어낸 주머니칼로 놈의 옆구리를 쑤셨다. 푸욱, 꽂히는 감각이 손에 느껴졌다. 물컹한 살점이 뚫리는 감각이 분명히 전해졌다. 윽, 하는 작은 소리가 가면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걸 똑똑히 들었다.
나는 칼을 더욱 깊게 살 속으로 쑤셔 박았다. 놈의 하얀 손이 내 얼굴을 후려쳤다. 하얗고 고운 손이건만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다시 한번 얼굴이 반대쪽으로 홱 돌아갔다. 얻어맞은 충격에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갈색 가면은 내 복부에 주먹을 처넣었다. 날아드는 통나무에 얻어맞은 것처럼 배 속의 내장들이 역류하는 듯했다. 나는 짓눌린 신음과 함께 피 섞인 타액을 허공에 흩뿌리며 앞으로 크게 무너졌다.
“겨우 이런 걸로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
갈색 가면이 밋밋한 음정으로 중얼거리며, 내가 주저앉으며 떨어뜨린 감귤 박스로 손을 뻗었다. 보기보다는 꽤 무겁지만 놈은 인형 안아 올리듯 달랑 한 손으로 주워 들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놈은 더 이상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지퍼를 목까지 채운 점퍼에 청바지, 운동화를 갖춰 입은 놈의 뒷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내놈이었다.
그냥 뒤돌아섰다 이거지. 내가 겨우 배에 한 방 먹인 걸로 무너진 거라고 생각했나.
겨우 이런 걸로 목숨까지 걸 필요 없다고? 대단히 미안한데 겨우 이딴 걸로 목숨 좀 걸어야겠다!
아쉽게도 칼은 없다. 남은 무기라고는 이 튼튼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뿐이다.
나는 몸을 낮춰 놈에게 달려갔다. 소리 없이, 잽싸게 달려 나가 놈을 뒤에서 덮쳤다. 몸을 휙 날려 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놈과 나는 한 덩어리가 되어 흙바닥 위에 엎어졌다. 약간 경사진 길 위라 하나의 덩어리가 된 우리들은 신나게 산 비탈길 아래를 뒹굴었다.
삭신이 쑤시고, 정신은 혼미하고,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그건 놈도 마찬가지였다. 내 발치에 가면 놈이 죽은 짐승처럼 엎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놈은 미동도 없었다.
겨우 이 정도 높이에서 굴러떨어졌다고 죽은 건가. 나는 욱신거리며 쑤시는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 높진 않아도 산길이다. 튀어나온 돌에 머리를 맞았을 수도 있고, 나뭇가지에 찔렸을 수도 있다.
상관없지. 죽든 말든 알 게 뭐야.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감귤 박스가 비탈길 중간, 마른 나뭇가지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저 위, 도로 쪽에서 누군가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금영이었다. 분명히 저 위의 귀신같은 놈들한테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발광하듯 날뛰고 있겠지. 찢어져서 피가 배어 나온 입술에 미소를 띠었을 때였다.
육중한 뭔가가 등 뒤에서 날아들어 허리를 감싸 안고 나를 쓰러뜨렸다.
아까 내가 놈을 뒤에서 덮친 것처럼 놈도 똑같은 방법으로 나를 찍어누른 것이다. 뒤에서 덮친다고 얌전히 쓰러져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허리를 끌어안아 쓰러뜨리면 상반신은 비교적 자유롭다. 아까, 놈은 박스를 들고 있었지만 내 손은 자유로웠다.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상반신을 오른쪽으로 틀어 팔꿈치로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놈의 안면을 찍었다.
빠악, 하는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효과는 없었다. 놈이 뒤집어쓴 가면 덕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팔꿈치를 쳐들었지만 적은 두 번째의 기회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놈의 하얀 손이 손목을 움켜잡았다. 팔을 들어 올린 탓에 훤히 노출된 겨드랑이 아랫부분에 여지없이 칼날 같은 주먹이 꽂혔다. 숨도 쉴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나는 비명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했다. 그저 눈을 크게 치뜨고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을 뿐이었다.
내가 늘어져서 헐떡대고 있는 지금이 나를 죽일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놈은 그저 내 몸 위에 앉아 있기만 했다. 끝부분이 깨지고 더러워진 갈색 가면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꿈틀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면 밖으로 비어져 나온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흙투성이가 된 놈의 몸에선 옅은 피 냄새가 났다.
“당신, 질겨. 진짜로.”
“그래서 내 별명이 임거머리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신을 임거머리가 아니라 임똘추라고 부르지 않아?”
비꼬는 듯한 음색이었다. 가면 아래에서 비어져 나오는 소리가 발음은 뭉개졌지만 빈정거리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너…… 나, 아냐?”
얼굴이 굳었다. 목소리도 굳었다. 비어져 나오는 목소리가 우스울 정도로 떨렸다.
“아주 잘 알고 있지. 계속 지켜봐 왔으니까.”
갈색 가면이 말했다.
내 허리께에 올라타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나는 지금 놈에게 제압당해 있다. 제압당한 것은 몸뚱이뿐만이 아니다. 놈은 내 정신 줄까지 움켜쥐어 흔들고 있었다.
날 알고 있다. 쭈욱 지켜봐 왔단다.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좋죠?’ 하고 인사를 하는 사람, 열병 걸린 환자 같은 축축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사람, 나만 보면 얼굴을 구기고 욕을 하는 사람, 내가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들,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들, 나를 스쳐 지나갔던 사람, 사람들……. 그 속에 저 갈색 가면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당연하다. 당연한 일이다.
누구지? 넌 대체 누구지? 뭐 하는 놈이야, 너?
“너 대체 어떤 새끼야?”
기름을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갈색 가면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필시 눈의 착각일 테지만.
“충고 하나 하겠는데 당장 이 일, 그만둬. 당신이 이 일을 계속하는 이상 언젠가는 또 날 만나게 될 거거든?”
흙냄새가 나는 하얀 손끝이 내 볼을 긁었다. 손톱 끝으로 피부를 간질이는 듯한 촉감. 난 대번에 내 볼을 쓰는 손끝에 실린 어떤 감정을 눈치챘다.
“당신을 죽이고 싶진 않아.”
놈이 아까보다 더 은근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자식은 날 그렇고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거다. 물론 내리꽂히는 놈의 시선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를 긁는 손끝의 촉감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허리께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느낌이 가장 확실한 증거다.
발기했다, 이놈. 발정 난 개새끼처럼 발기한 아래를 남의 허리 부근에 느른하게 문질렀다.
“변태냐, 너?”
하도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당신 그렇게 웃을 때 죽여주게 섹시한 거 알아? 아, 니미…… 당장 내 걸 당신 입 속에 처넣고 싶네.”
“잘리고 싶으면 그러든지. 나도 고기 맛 좀 보자.”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가면 아래에서 새어 나왔다.
놈이 아래에 더욱 힘을 주어 아랫부분을 내 허리춤에 꾸욱 짓눌렀다. 짓눌린 허리 아랫부분에 힘을 주어 꿈틀대 봤지만 소용없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도 위에 올라탄 이놈을 떼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반항해 봤자 얻어터지기만 할 게 분명하고.
이대로 맥없이 당하는 건가. 물비린내 나는 흙바닥 위에서,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딴 새끼한테?
사지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부릅뜨고, 입가엔 미소를 띠었다. 필사적으로 한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놈이 손으로 내 가슴을 힘껏 짓눌렀다. 얻어맞은 겨드랑이 아래쪽이 욱신댔다. 덜덜 떨리는 손끝에 갈색 가면 끝이 닿았다. 손톱으로 서늘하고 딱딱한 표면을 긁었다. 좀 더 힘을 주어 손가락 전체로 가면을 툭, 쳤다. 뒤집어쓴 가면이 한쪽으로 살짝 빗나갔다.
“질겨, 정말.” 다시 한번 그 말을 반복하면서 놈은 안 그래도 쿡쿡 쑤시는 갈비뼈 부근을 손으로 꽈악 움켜쥐었다. 난 비명을 지르며 두 다리를 퍼덕거렸다.
“동추 형! 형! 어디에 있어요!”
“야! 똘추야! 이 새끼,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살아 있긴 한 거냐? 야! 임똘추!”
멀리서 동수와 노금영이 번갈아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갈색 가면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흙바닥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저 위에서 보이는 번쩍거리는 불빛뿐이었다. 놈이 일어서서 무심하게 무릎이며, 바지에 달라붙은 흙과 나뭇잎들을 털어 냈다.
“다음에 만나면 죽는다, 너…….”
스스로가 듣기에도 한심할 정도로 맥없는 중얼거림이었다.
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놈이 비탈길 중간에 걸린 박스를 주워 들고 몸을 숙여 어두운 잡초 덤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필사적으로 잡아 뜨고 나는 그 자식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삐이이, 삐이이, 이름 모를 새가 처량하게 울어 댔다.
힘겹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땀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동물 사체가 썩는 듯한 악취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눈꼬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 귓바퀴에 고였다가 흙 위로 떨어졌다.
“어헝헝! 형! 동추 혀어엉!”
동수 자식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멀쩡하다, 이 자식아. 멀쩡하게 살아 있긴 한데 그냥 좀 더럽게 졸리다.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하자. 한숨 자고 난 뒤에 그 빌어먹을 새끼들에 대해서 얘기하자. 그 탈바가지 새끼들을 쳐 죽이든, 씹어 삼키든 일단 좀 자고 난 뒤에……. 딱 거기까지 생각하던 중간에 의식이 뚝 끊겼다.
*
*
[다들 놈들을 귀면이라 부른단다. 가면을 뒤집어쓴 귀신 놈들이라고.]
난 그 소리를 듣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름 한번 잘 지었네요. 귀신 가면.”
[귀면이고 나발이고 그 새끼들 때문에 다들 난리도 아냐. 이 지역에서 ‘밤일’ 하는 놈들 대부분이 그 새끼들하고 마주쳤단다. 너 기식이 알지? 그 자식, 병원에 입원했어.]
“많이 다쳤답니까?”
[죽을 정도는 아니고. 얼굴 한쪽이 완전히 갈려서 성형 수술까지 해야 하나 보더라.]
“잘됐네. 이번 기회에 얼굴 좀 뜯어고치고 연애나 하라고 해요.”
[뜯어고친다고 용 될 얼굴이냐? 그게? 가물치가 광어 되는 정도지.]
수화기 너머에서 저급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따라서 웃다가 갈비뼈 부근이 아파서 옆구리를 움켜쥐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야 했다.
[어쨌든 너희들도 조심해. 직접 상대해 봐서 잘 알겠지만 그 새끼들, 보통이 아냐. 보통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간이 아니지. 찌르고 쑤셔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게 인간이겠냐?]
“그러게요. 뼈가 부러지고 목이 돌아가도 잘만 움직이더라고요.”
[솔직히 아직도 꿈만 같다. 말이 되냐고, 이게. 핸드폰으로 인터넷도 하는 시대에 귀신 타령이라니. 아주 그냥 단체로 홱 미쳐 버려서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수화기 저편의 상대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일 거다.
[대체 그 새끼들은 어디서 기어 나온 걸까?]
“어디서 기어 나오긴요. 무덤에서 기어 나왔겠지.”
[니미. 씨발. <전설의 고향>이냐? 밤만 되면 무덤이 반으로 쫙 갈라져서 귀신들이 기어 나오게?]
“그러고 보니 시골 공동묘지에서 원정 온 놈들이네. 천수 형님, 다음엔 꼭 새끼들한테 통행료 받아요. 어디 감히 우리 구역에서 지랄이야? 지랄이.”
담배 연기를 잘못 들이마시기라도 했는지 박천수가 켈룩켈룩, 기침까지 하면서 웃어 댔다.
기침 소리와 웃음소리에 섞여 딸랑거리는 벨 소리가 들려왔다. 박천수의 가게에 손님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중에 통화하자, 동추야.]
그는 작게 속삭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손끝으로 만지작대며 다 식어 빠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째 오늘따라 커피 맛이 더럽게 쓰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하지만 이건 구더기 정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바퀴벌레보다 더한 존재다.
바퀴벌레는 피하면 그만이라지만 이것들은 문다. 지랄 발광 하면서 눈에 보이는 건 무조건 공격하고 물어뜯는다. 아직 죽은 놈은 없다지만, 이대로라면 다수의 사망자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다.
그럼 ‘밤일’을 관둬라. 누가 속 편하게 지껄이기라도 한다면 확 목을 비틀어 버릴 거다.
방금 전까지 통화를 하던 박천수. 올해 마흔다섯 살이 된 그는 일단은 ‘서울 지역 대표’란 직함을 달고 있다.
허울 좋은 직함일 뿐이다. 명색이 서울 지역 대표란 사람이 좁아터진 사무실 하나 없고, 그 흔한 명함 한 장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이 하는 ‘밤일’은 불법이다. 걸리면 예쁜 은팔찌 차고 사이좋게 닭장에 갇혀 콩밥이나 씹어 먹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는 ‘연신마트 박 사장’이다. 자식들은 커 가고 빚은 늘어만 가는 이 도시의 흔한 소시민이다.
밤에 하는 일이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다. 암울한 마이너스 인생에 그나마 아주 잠깐이라도 볕 들게 해 주는 고마운 돈벌이다.
이 일을 하는 놈들 대부분이 그렇다. 당장 밤일을 관두면 허리가 휜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진다. 이 일에 가족들의 생계가 걸린 사람들도 있다. 결국은 돈이 문제다. 그놈의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이슬 맞으며 식구들 몰래 집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거다.
나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귀면. 가면을 쓴 귀신 놈들. 놈들이 인간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들, 귀신 무리들 중에서 사람 새끼가 한 마리 있긴 했다.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놈. 남의 몸 위에서 아랫도리를 불룩하게 세우고 지껄이던 갈색 가면을 쓴 새끼.
“깜찍한 새끼…….”
앙다문 잇새로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이고, 고 깜찍한 새끼.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이 새끼, 사람 잘못 건드렸다. 임거머리란 별명이 괜히 붙은 줄 아냐? 진짜 엄청나게 질긴 왕거머리한테 물려 봤냐? 이번 기회에 한번 물려 봐라. 진짜 질긴 왕거머리는 살점과 함께 도려내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핸드폰이 울렸다. 노금영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상투적인 안부 인사 같은 것도 없이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통화가 안 돼. 없는 번호란다. 사무실도 사라졌어. 튀었다, 그 새끼들.]
“이상하네요. 그쪽이 배달 의뢰한 물건을 뺏긴 건 우리잖아요. 우리가 그쪽에 위약금을 줘야 하는 상황인데 어째서 그쪽이 튄 걸까요?”
[확실히 이상하지? 그런데 말이다. 달봉이 형님네가 1주일 전에 맡은 일이 김태성이란 남자가 의뢰한 일이라더라.]
우리들에게 감귤 박스를 푸름 사슴 농장으로 배달해 달라는 일을 의뢰했던 자의 이름이 김태민이다. 그리고 달봉이 형님 쪽에 일을 의뢰한 놈이 김태성. 형제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이름이다.
[김태성이란 놈이 달봉이 형님네에 건네준 배달 물품은 황토 고구마 박스였단다.]
“우리 건 제주 감귤 박스였죠.”
[달봉이 형님이 그러는데, 기식이 있지?]
“아, 그 자식 얼굴이 완전히 뭉개져서 성형 수술 받아야 된다고 하대요?”
[그러냐?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기식이네가 물품 배달 일을 맡은 게 이틀 전이래. 의뢰인 이름은 김태식. 물품은 나주 배 박스.]
“방금 전에 천수 형님이랑 통화했는데, 천수 형님네는 사흘 전에 일을 했나 보더라고요. 의뢰인 이름은 모르지만 웬 묵직한 과일 박스 하나를 배달하다가 귀면들을 만났다고.”
[귀면? 귀신 가면이라. 그럴듯하네. 그럼 천수 형님도 과일 박스를 배달하다가 그놈들을 만났다 이거군. 어째 어디서 구린내가 진동하지 않냐?]
노금영이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콧속으로 썩은 생선 비린내 같은 것이 파고드는 듯했다.
김태민. 김태성. 김태식. 그리고 각종 박스들. 김씨 성을 지니고 ‘태’ 자 돌림을 쓰는 놈들에게 의뢰받은 물품을 배달하던 밤일꾼들은 모두 귀신 무리들을 만났다.
“그럼 우리처럼 다들 귀면들한테 배달해야 할 상자를 뺏겼답니까?”
[그렇다네. 놈들의 목적은 우리들이 배달하던 상자들이었던 것 같아.]
“대체 상자 속에 든 게 뭐였을까요.”
노금영은 침묵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 중 아무도 감귤 박스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우리들은 의뢰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의뢰인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조용히, 신속하게 처리해 줘야만 한다. 그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토 달면 바로 아웃이다. 괜히 눈알 굴리며 머리 굴렸다간 말 그대로 매장당한다.
철저한 비밀 유지. 그게 이 업계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다.
[놈, 아니, 어쩌면 한 놈이 여러 이름을 돌려쓰는 걸지도 모르지. 어찌 됐든 김태민, 그 새끼 잡기만 하면 가만 안 놔둔다.]
개풀 뜯어 먹는 소리 지껄인다. 가만 안 놔두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사라진 의뢰인을 찾는다 해도 병원비를 받아 내기는커녕 위약금이나 물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넌 어디냐? 학원이냐?]
“그렇죠, 뭐. 일은 해야 먹고살지요.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 나와 있어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았다.
[오늘 저녁에 달봉이 형님이 술 한잔하잔다. 수업 끝나고 올 수 있으면 와라.]
“네, 시간 되면 가 볼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등 뒤에서 “동추 혀엉!” 하고 부르는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으며 몸을 돌렸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척하며 동대문에서 산 짝퉁 명품 시계를 두른 손목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녀석이 들어서자 칙칙한 카페 안이 순식간에 밝아진 듯했다. 호리호리한 몸을 감싼 커다란 점퍼, 스웨터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빨간색 백팩을 멘 녀석은 여전히 상큼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면서 쪼르르 이리로 달려오는데, 아주 그냥 당장 씹어 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오래 기다렸어요, 혀엉? 수업 끝나고 금방 달려오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오늘따라 수업을 늦게 끝내 주시는 거예요.”
“아니. 나도 방금 전에 왔어.”
사실 여기에 도착한 건 한 시간 전이지만. 대학교 앞의 카페라 눈요기는 실컷 했다. 특히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저 녀석들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요즘엔 사내 녀석들도 어쩌면 이렇게 다들 예쁜 건지.
윤영이 녀석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러메고 있던 커다란 백팩을 내려놓고는 점퍼까지 훌훌 벗어 던졌다. 아이보리색 스웨터에 감싸인 호리낭창한 몸을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저 귀여운 얼굴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지만,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욕구를 억눌렀다.
“커피 마셔도 되죠?”
“상관없긴 한데, 새로 사다 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이 컵을 낚아채 안에 든 커피를 호로록, 단숨에 들이마셨다. “으, 다 식었네” 하면서 인상을 쓰는데, 오만상을 찌푸린 표정까지도 사랑스럽다. 아무리 봐도 참 신기하다. 저 녀석은 어쩌면 저렇게 내 취향에 딱 맞게 생겨 먹었을까. 얼굴도, 몸매도, 기가 막히게 내 취향이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얼굴 뚫어지겠네.”
“윤영이, 네가 너무 귀여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네.”
“에이, 형도 참.”
녀석이 주먹으로 내 손등을 탁 치며 헤헤헤 웃었다. 하얀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익었다. 그렇게 좋냐? 네가 그렇게 좋다면 앞으로도 혓바닥에 버터 듬뿍 발라서 마음껏 지껄여 주마.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혓바닥 놀리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
가늘게 접힌 커다란 녀석의 눈을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쳐다봤다. 이때의 포인트는 은은하게 미소가 번진 입가와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이다. 너 진짜 너무 예뻐, 예뻐 죽겠다,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 요런 눈으로 지그시 쳐다보면 열에 아홉은 홀랑 넘어오게 되어 있다. 이 녀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녀석이 배시시 웃으면서 몸을 비비 꼬았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테이블만 긁어 댔다.
“저녁 먹을 시간 다 됐는데 밥 먹으러 나갈까? 아니면 커피 한잔 마실래?”
속삭이듯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녀석은 날 쳐다보지도 못한 채로 “커피 마시고 싶어요” 하면서 옹알거렸다.
“그래, 알았어. 형이 사 올 테니까 앉아 있어. 카푸치노면 돼?”
“어어. 내가 카페 오면 카푸치노만 마시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보니까 전에도 카푸치노를 시켜 먹더라. 좋아하나 보다 싶었지.”
녀석의 얼굴이 녹은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풀어졌다.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온 지금, 녀석은 의자에 늘어져 앉아 실실 웃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내 손이 스쳐 지나갔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귀엽다, 귀여워. 아직 어리고 순진해서 좋다. 귀엽고, 어리고, 예쁘고, 때가 덜 묻어서 보송보송하니까 선택한 거다. 어두운 클럽 구석에 멍하게 앉아서 넋 놓고 날 바라보던 녀석의 얼굴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내가 술잔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니까 눈을 가늘게 접고서 이를 드러내 웃던 얼굴. 날 보던 깨끗한 눈.
보송보송한 어린것들은 날 좋아한다.
호의를 넘어선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곤 한다. 멋지단다. 한 마리 고고한 늑대 같아서.
예전에 잠깐 사귀다 헤어진 어떤 놈은 날더러 아주 맛있게 농익었다고 했다. 그 녀석은 날 한 입 깨물면 입 안 가득 달고 신 과육이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과일로 묘사했다. 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향기가 진동해서 미칠 것 같다고.
그림 그린다는 놈이 혓바닥 놀리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제대로 그림 공부해 보겠다고 외국으로 유학까지 떠났지만, 내 보기에 화가보다는 사기꾼으로 대성할 놈이었다.
“카푸치노 한 잔에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치즈 케이크도 주시죠.”
계산대에 선 통통한 여자아이가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서 날 비스듬히 올려다봤다. 이렇듯 어린것들은 날 참 좋아한다.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치즈 케이크엔 두 종류가 있는데 뭘 드릴까요?”
“뉴욕 치즈 케이크, 저걸로 주세요. 그리고 목소리가 참 고우시네요. 얼굴도 예쁘시고. 남자들한테 인기 많으시겠네.”
습관처럼 입에 밴 작업 멘트를 지껄이며 곁눈질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녀석을 훑었다.
영수증을 건네주는 계산대 여자애의 눈엔 별까지 총총히 떴다. 영수증을 받아 챙기며 “고마워요” 하며 한 번 웃어 줬다. 아무리 귀엽고 예뻐도 여자애는 상대도 하지 않는 주의지만 세상 일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잖은가. 이놈의 세상이 넓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좁다.
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며 창가에 자리를 잡은 덩치 녀석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인지 커피를 주문하지도 않고서 가방에서 두꺼운 영어 책부터 꺼낸다. 눈이 나쁜지 미간을 좁히고 열중해서 영어 책을 읽는 옆얼굴이 제법 괜찮다.
얼굴도 덩치도 지나치게 남자다워서 내 취향은 아니지만 지켜보는 맛은 있다. 노골적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는데도 녀석은 단 한 번도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같은 남자인 자신을 핥듯이 쳐다보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일 테지.
“형, 몸은 좀 괜찮아요?”
커피와 케이크를 들고 올라가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윤영이가 고개를 쳐들고서 물었다. 참 빨리도 묻는다, 녀석에게는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말해 둔 터였다.
“아직 무리하게 움직이면 좀 아프긴 한데 괜찮아.”
“그래도 형이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흘려 넘기듯 대충 하는 말 같지만 녀석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근데요. 얼굴에 반창고 붙이고 있으니까 형, 되게 섹시해요.”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목소리를 착 깔고 한다는 소리가 이렇다. 그러고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들고는 히히히 웃는다.
“지금에서야 하는 소린데 솔직히 거짓말인 줄 알았다.”
네? 뭐가요? 치즈 케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말이야. 미성년자가 아닐까 의심했거든. 그런데 다행이다. 대학생이라서. 그나저나 우리 윤영이, 보기보다 공부 잘했구나? 이런 좋은 대학도 다니고. 학교는 다닐 만해? 나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학생 때는 다들 놀고먹기 바빴는데, 요즘 애들은 대학생 때에도 머리 싸잡고 공부만 하더라.”
“저 공부하는 거 되게 좋아해요. 고등학교 땐 공부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외모도 성격도 별로고, 비리비리해서 싸움질도 못해서 공부라도 잘해야 그나마 인정받고 살 수 있었거든요.”
에이, 안 그래요. 저도 공부 안 하고 막 놀아요.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건만 분위기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네가 어때서? 성격 좋지, 귀엽, 아니 잘생겼지, 머리도 좋지. 너 정도면 끝내주는 킹카야, 킹카.”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이런 말 하면 되게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나, 눈 되게 높거든? 진짜 괜찮은 애 아니면 말도 걸지 않는다. 클럽에서 처음 너 봤을 때 파바박, 필이 왔거든.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얼른 앞발을 뻗은 거야. 나 말고도 너한테 눈독 들이던 놈들 많았거든.”
“어어, 그랬어요?” 하면서 능청을 떤다. 앙큼한 것. 굶주린 짐승 새끼들이 숨을 헐떡대면서 자기를 곁눈질하는 시선을 은근히 즐겼으면서.
“누가 봐도 너 정말 괜찮은 녀석이니까 자신감을 가져.”
“그럼, 형. 형은 나 좋아해요?”
미소 머금은 입가에 커피 잔을 가져갔다. 잠시간의 침묵이 필요할 때다. 약 30초간의 침묵은 뒤이어 올 말의 맛을 더해 줄 합성 감미료다.
“좋아하니까 이렇게 들이대는 거지.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한테 뭐 하러 이렇게 공을 들이겠어? 나 그렇게 한가한 놈 아니다.”
맞은편에서 호로로록, 커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거다. 뒤이어 “나도 형 좋아해요” 요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저녁 먹고 영화 보러 갈까? 재밌는 영화들 많이 개봉했던데.”
녀석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요동쳤다. 내가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윤영이 녀석은 커피를 마시며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말이 필요 없는 감정이다. 저 녀석은 온몸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있다. 저 녀석은 날 좋아한다. 깊고 짙은 감정이다. 내 속은 이렇게도 얕고 얄팍한데 말이다.
“되게 바쁘게 사시네요, 형은.”
“투잡을 뛰거든. 요즘엔 그게 대세잖냐.”
“무슨 일 하시는데요?”
어설프게 파고들려 하기에 웃는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나에 대해 알고 싶기도 할 거다. 하지만 절대로 녀석에게 껍데기 속 알맹이를 내보이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너의 귀여운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반했듯이 너도 그냥 내 화려한 껍데기만 보고 좋아해라. 벗겨 봤자 별거 없다. 더럽게 구질구질하고 형편없다. 반짝반짝 빛나는 겉모습 속 알맹이는.
스무 살. 제일 예쁘고 빛날 시기에 하는 첫사랑 상대가 멋지고 화려해야 나중에라도 좋은 추억으로 남지.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계속 안에 있으니까 좀 답답하다.”
난 빈 접시와 컵을 트레이에 담아 들고 일어섰다.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가방을 메고서 녀석은 쪼르르 쫓아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걸을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쑤시고 결리는 갈비뼈 부근의 뭣 같은 통증은 잠시도 날 가만두지 않았다. 귀여운 사내애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걸으며 속살거리는 녀석의 깜찍한 농담에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내 옆구리를 찔러 댔다. 아주 잠깐이라도 다디단 환상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거다.
지랄 같았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