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만나다 (1)
* * *
“Really?”
이번엔 번역기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똥줄이 타고 있었는데.
놀라운 마음이 점점 더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이 소년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미얀마까지 왔는데, 뭐라도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앤더슨 오 대리가 나섰다.
“Can you speak english?”
“Yes, sir.”
미국 영주권자 오 대리의 숨통이 그제서야 트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휴우~ 요즘은 외국 어딜 가도 영어는 웬만하면 다 통하는데.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요.”
김지안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아무래도 시골이니까 그렇죠. 그렇다고 관광지도 아니고요. 도시에 사는 미얀마인들은 영어 잘한다고…… 책에 나와 있어요.”
오 대리는 신나서 영어로 소년과 이런저런 대화를 했고.
난 김지안에게 말했다.
“자기 비둘기 핏빛 루비 확인할 수 있어?”
“네…… 나름 연구하고 연습도 해보긴 했는데.”
김지안은 루비 두 개와 여러 가지 칼라가 인쇄된 종이 책자를 가방에서 꺼내었다.
“그게 뭐야?”
“하나는 진짜 루비고요. 하나는 모조품이에요.”
“아니, 그 옆에 있는 기다란 책.”
김지안은 책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팬톤북’이라는 건데요. 디자인 업계에서 칼라 정할 때 사용하는 책이에요.”
“아…….”
난 김지안의 철저한 준비성에 놀랐다.
“루비 원석도 진품 인증서가 있지만, 인증서도 위조가 가능하니까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야죠. 아무래도 전 비전문가라서 눈으로만 검증하기엔 한계가 있어서, 여러 가지 비교하는 방식을 활용하는 거예요.”
변 이사는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김지안은 영어로 미얀마 소년에게 말했다.
“아까 보여줬던 거 나 한번 보여줄 수 있겠니?”
“네.”
소년은 다시 모래알 루비를 꺼내었고.
김지안은 루비에 확대경을 대고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진품 루비와 모조품. 그리고 팬톤 넘버와 비교했다.
“비둘기 핏빛 루비 칼라가 ‘pantone 15―12391’과 비슷하다고 했었고…….”
김지안은 확대경으로 비둘기 핏빛 루비를 보고, 확대경을 뗀 눈으로 팬톤 칼라와 몇 번 비교해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확실히 다르네…….”
“왜? 왜?! 김 대리.”
난 다급하여 물었고.
꿀꺽.
김지안을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지, 진짜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래요.”
이 말을 들은 변 이사가 눈을 번쩍 떴고.
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강 사장님. 달려. 이럴 땐 달리는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년을 바라봤다. 번역기를 통해 미얀마어로 말했다.
“이거 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소년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 * *
좁은 골목길을 지나 외진 곳에 있는 한 건물에 도착했다.
가로로 길고, 폭은 좁은 3층 건물이었는데.
밖으로 나온 발코니에는 어지럽게 널린 빨래가 보였다.
그냥 오래된 가정집 빌라 같았다.
“혹시 집으로 가는 거니?”
“하하. 아니요. 사무실이요.”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푹한 땀 냄새가 난다.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김지안과 최경리는 코를 감싸 쥐었다.
하얀 꽃이 주변에 여기저기 달린 문 앞에 도착했다.
얼핏 보면 무당집 현관처럼 보였는데, 다른 집 현관문도 다 이런 걸 보니 문화인가 보다.
아이는 바로 문을 열고 소리쳤다.
“쎄야~ 라비.”( 사장님~ 모셔 왔어요)
“호께.”(그래.)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렸고, 곧이어 한 남자가 나타났다.
손과 목에 금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거대한 체격의 남자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밍글라바.”(안녕하세요.)
나도 똑같이 인사하며 말했다. 물론, 이번에도 번역기가 다 했다.
“밍글라바. 뛰야다 완따바데”(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미얀마 사카 아얀 쫜데. 타인바.”(미얀마어 잘하네요. 앉으세요.)
번역기에서 말소리가 나오고 있는데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보고 미얀마어 잘한다고 한다. 그렇게 감쪽같나.
우리는 자리에 앉았고, 곧이어 소년이 미얀마식 커피믹스를 가져왔다.
호로록.
“음?!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나뿐이 아니라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괜한 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었다. 달짝지근한 커피믹스에 숭늉처럼 구수한 향이 추가된 맛이랄까.
변 이사는 커피를 다시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귀국할 때 사 가야겠다.”
“그럴 시간이 있을까요.”
최경리가 옆에서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거대한 남자는 우리가 커피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땀 좀 식히셨나요?”
“아, 네. 그러고 보니, 여긴 참 시원하네요.”
“하하. 네. 에어컨 틀어놨으니까요.”
그는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Princess power Co., Ltd.’
‘President Mr. 때인놰.’
프린세스 파워? 공주의 힘?
“때인놰? 이렇게 부르면 되나요?”
“맞습니다. 그쪽은 대표님이…….”
때인놰는 그러면서 변 이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변 이사는 고개를 젓고는 날 향해 두 손으로 가리켰고.
난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Love fortress Co., Ltd.’
‘President Mr. Kang tae pyong’
떼인놰는 명함 뒤의 영문 사명을 보며 물었다.
“Love fortress? 와우~ 회사명이 뭔가 시적이네요. 우리 회사명 못지않은데요?”
‘Love fortress’라는 단어가 때인놰 입에서 나올 때.
우리 직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때는 약간 부끄러웠다.
“고맙습니다. 프린세스 파워도 멋져요.”
이렇게 가볍게 서로 소개를 마친 뒤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소년이 저희가 찾는 물건을 보여줘서, 왔습니다.”
“아~ 비둘기 핏빛 루비요?”
떼인놰가 입을 열었고, 우리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진귀한 보석이죠.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건 잘 아시죠? 세계에서 모곡 지방에서만 나는 보석인 것도.”
“네……. 그걸 좀 구할 수 있습니까?”
“쉽진 않지만, 가능합니다. 문제는 자금력이 되느냐인데.”
“됩니다.”
난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얼마가 되든 살 생각이며,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 팔 자신이 있다.
내 금 손 한두 번 써보나? 이젠 의심의 여지도 없지.
“사실 비둘기 핏빛 루비는 정부에서 반출 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모곡 지방에 들어오는 것도 꽤 많은 허가를 거쳐야 하셨을 텐데.”
사실, 비자부터 모곡 지방허가까지 쉽지 않았다. 김지안이 지난주 내내 미얀마 대사관을 몇 번을 들락거렸는지 모르겠다.
“아마 시장에서 묘한 반응을 겪으셨을 거예요. 가장 돈 되는 루비를 일반 상인들은 취급할 수 없게 하여 불만이 있거든요. 게다가, 자칫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예를 들어 잡혀간다거나…….”
오 대리가 영어로 물었다.
“그런 거로 잡혀가요?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떼인놰는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I don't know. You've heard of Myanmar's military government? I'll leave it up to your imagination.”(글쎄요. 미얀마 군부 정부에 대해서 들어보셨죠? 당신의 상상에 맡길게요.)
오 대리는 식겁한 표정을 지었고, 떼인놰는 짤막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
“특히나 재산권 관련해서는 정부가 아주 민감하거든요. 그러니 시장 상인들에게는 비둘기 핏빛 루비만 찾고 다니는 당신들이 불편했을 거예요.”
친절하던 사람들이 왜 비둘기 핏빛 루비 얘기만 꺼내면 표정이 바뀌었는지…… 이제 이해가 좀 되었다.
“하지만 분명 성과는 있습니다. 당신들이 헤집고 다닌 탓에 우리가 love fortress를 발견했잖아요.”
사랑산성이라는 단어가 떼인놰 사장의 마음에 드나 보다.
그는 말끝마다 우리를 지칭할 때 love fortress라는 표현을 썼다.
“어느 정도 사이즈를 원하십니까?”
“5캐럿 이상 생각했는데, 좀 커도 상관없습니다.”
“와우~ 5캐럿 이상이요? 큰 손이 오셨네? 하하.”
떼인놰는 아주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돈만 된다면 그보다 큰 사이즈도 상관없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보석입니다. 사이즈는 기호대로 정확히 사기 어려워요.”
“알고 있습니다. 가능한 사이즈와 가격 알려주시죠.”
떼인놰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7.4캐럿이 있는데. 가격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은 상품인데, 가격이 두 가지라니?
“A legal transaction or……”(합법적 거래 혹은……)
떼인놰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말했다.
“an illegal transaction.(암거래)
* * *
“아~”
변 이사도 이 정도 영어는 알아듣는다.
“현금 결제할 때와 카드 결제할 때 가격이 다르다는 격이네?”
어째 비유를 해도…….
하여간 변 이사는 모든 걸 쉽게 단순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난 떼인놰에게 물었다.
“좀 자세하게 말씀해주세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 세금을 적용한 가격이 있고요. 그걸 피해서 적용된 가격이 있습니다.”
“정부에서 관리한다면서요. 그게 가능합니까?”
“네. 가능해요. 어차피 둘 다 같은 사람이 판매하는 거니까.”
“네?”
“모든 실권을 갖고 계신 분이라서, 어떤 방식이든 본인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금액만 신경 써요. 세금 먹으면 그만큼 비싸게 팔면 되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좀 더 싸게 팔면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세금 부여 여부는 국가의 문제인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네.
나랏일 하는 사람이 어찌 그런 생각을…….
“가격 차이가 어떻게 됩니까?”
떼인놰는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Legal(합법) ― $1,100,000
Illegal(암거래) ― $700,000
우리는 종이에 적힌 가격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뭐야? 거의 두 배 가격이잖아?”
당연히 합벅적인 방식으로 구매하려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건,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데?
40만 불이면…… 원화로 4억6천만 원 정도…….
난 떼인놰에게 물었다.
“이렇게 가격 차이가 많이 나면,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게 더 이득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희는 암거래가 이득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죠.”
“두 거래의 차이가 있나요? 혹시 뭐 정품 인증서가 안 나온다든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가격 차이로 인한 영향은 우리 미얀마 내부적인 일입니다. 고객께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Illegal’(암거래)
어쩔 수 없이 자꾸 그쪽으로 시선이 간다.
우리나라와도 상관없고, 자기 나라 일이란다.
나 모범납세자인데…….
“강태평!”
그때, 변 이사가 큰소리 불렀다.
“흔들리지 마. 돈 좀 아끼려다가, 큰일 난다.”
오 대리가 말했다.
“가격 차이가 너무 나잖아요. 개도국에서는 다 이렇게 해요. 우리는 불법이라 생각해도 얘네들 입장에서는 그냥 거래의 한 방식이라고요.”
변 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조금이라도 잘못된 거래를 하면 안 돼. 비즈니스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나중에 다 돌아와.”
“…….”
“강 사장님. 110만 불 없는 거 아니잖아. 그걸로 해. 괜찮아. 더 잘 만들어 비싼 가격에 팔면 되는 거야.”
변 이사의 말이 옳다.
큰 금액 차이에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비싸더라도 깔끔한 게 좋다.
40만 불 차이…… 이제 사랑산성에서 그렇게 큰돈은 아니잖아.
어차피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인데.
발 쭉 뻗고 자는 게 제일 중요하지.
이제 결심하고 말하려는데.
최경리가 옆에서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니…… 근데 강 사장님 핸드폰은 배터리가 닳지를 않아요? 온종일 번역기 틀고 있는데?”
‘남은 전지 90%’
손으로 붙잡고 있으면 배터리가 잘 닳지를 않는다. 이건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딴 얘기 할래? 협상에 집중해.”
# 핸드폰 배터리
Before : 오래 쓰고 싶으면 장갑 끼고 만져야 했다.
After : 충전기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