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한다면 (2)
* * *
“저, 정말요?”
김지안은 당황한 듯 물었다.
결정하기 전에 고민은 충분히 하고, 일단 결정하고 나면 밀고 나가라. 이 결정이 맞는지 고민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일을 잘 성사할지를 고민해라.
난 변성준 선배에게 이렇게 일 배웠다.
“응. 의사결정 한 거야. 가장 빠른 날짜로 항공권 알아보고, 출장 스케줄 짜와.”
“아……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출장 일정은 주말에 가는 걸로 하자. 우리 일정 때문에 디너에 영향 주면 안 되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그리고. 직원들 지금 3번 룸에 다 있지? 외근 중인 사람 없지?”
“네, 없습니다.”
“오케이. 우선 빨리 스케줄 짜고 있어. 누가 갈 건지는 내가 지금 미팅한 후 바로 알려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래, 서두르자.”
김지안은 항공사에 전화하러 밖으로 나갔고.
난 3번 룸으로 향했다.
덜컹.
“아오, 깜짝이야.”
변 이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 좀 살살 열어~ 놀랐잖아.”
“그렇게 세게 안 열었는데.”
최경리와 오 대리는 가만히 있는데, 변 이사만 유독 놀란다.
“수상한데요?”
난 가까이 다가갔다.
“뭐가?”
“컴퓨터로 뭐 하고 있었어요? 설마 회사에서…….”
변 이사는 기겁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생사람 잡지 마!”
“제가 뭐라 그랬어요?”
직원 수도 몇 명 안 되는 회사에서, 3M 시꺼먼 보안 필름으로 모니터를 가려놓았다. 딴짓하고 있는 게 의심 가긴 하지만.
그래도 프라이버시니까, 더 묻지 않았다.
내가 변 이사와 몇 년을 함께 일했는데, 난 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요즘 한가한 것이다.
부동산 건 때문에 요즘 바쁘다는 말은 빈말이라는 걸 확신했다.
잘됐네.
“자, 모두 주목!”
난 U자형 소파 앞, 노래방 기기 옆에 섰다.
“최경리! 주목! 주목!”
최경리에게는 몇 번 반복해 말하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귀금속 세공 사업건 때문에 해외 출장을 가려고 하는데.”
“우왓! 해외 출장이요?!”
오 대리는 눈을 번쩍 뜨며 좋아했다.
* * *
“웬일이야~ 사랑산성이 해외 출장을 다 가고~”
오 대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겨우 한 마디 꺼냈을 뿐인데도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만, 최경리와 변 이사는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았다.
최경리는 괜찮지만, 변 이사는 낚여야 할 텐데.
“호텔에서 묵을 거고, 식당도 좋은 데 갈 거거든요? 진일상사 때와는 달라요. 예상 일정은 2박 3일.”
“우와! 우와!”
오 대리는 난리가 났다.
“저도 함께 가니까요. 개인 경비 쓰는 일 없을 겁니다.”
오 대리는 그저 신났고, 변 이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난 변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살며시 던졌다.
“같이 갈 사람?”
“저요! 저요!”
오 대리가 가장 먼저 손들었고.
변 이사와 최경리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주시했다.
“지원자 더 받을 수 있는데~”
변 이사가 살짝 손을 들었고.
“뭐 좀 물어봐도 돼?”
꿀꺽.
난 침을 삼킨 후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언제 가는 거야?”
“조만간?”
“뭐? 조만간?”
“네.”
“무슨 일정이 그래?”
“좀 빨리 가야 해서요. 비행기 스케줄 보고 결정할 거예요.”
지금 주말 스케줄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이 도저히 안 나왔다.
주말 출장을 가게 되면, 출장 복귀 후에 4일간 반차를 줄 생각이다.
레스토랑 운영 때문에 온전히 쉬는 건 어렵다. 이틀 대휴 대신 4일 반차로.
“그 말은…… 주말에 갈 수도 있다는 뜻인가?”
변 이사가 핵심을 찔렀고, 오 대리의 표정이 점점 바뀌어 갔다.
“아마도요?”
“아~ 강 사장님. 자꾸 대답 애매하게 할래? 이거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
그는 눈을 흘기더니, 또 핵심을 찔렀다.
“출장지가 어딘데? 설마 그것도 가봐야 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
멀뚱. 멀뚱.
난 변 이사를 바라봤다.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
“내가 묻는 말 못 들었어? 출장지가 어디냐고.”
“…….”
내가 대답을 선뜻 못 하자, 최경리와 오 대리도 이상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다.
“미얀마…….”
“뭐?”
“미얀마요.”
변 이사는 생소하다는 듯 몇 번 되뇌었고.
오 대리는 ‘미얀마’를 듣자마자, 들었던 손을 바로 내렸다.
변 이사가 말했다.
“동남아의 빈민국 아니야?”
“그렇게 빈민국은 아니에요. 방글라데시보다 나을 걸요.”
게다가 미얀마의 수도도 아니고, 지방으로 출장 간다.
다행히 어느 도시냐고까지 묻지는 않았다.
“…… 출장 지원자 받는다고 했지?”
“네.”
“난 패스.”
변 이사가 말했고.
최경리는 고개를 젓더니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오 대리는 눈알을 굴리더니.
“보셨죠? 저 손 내렸어요?”
“낙장불입이야.”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 올린 건데!”
“그러게 누가 끝까지 안 듣고 손 올리래?”
난 핸드폰 메모장에 크게 말하면서 적어넣었다.
“미얀마 출장자. 앤더슨 오. 김지안.”
“아~ 제발요! 거기 불교 국가잖아요. 저 크리스천이라 영적으로 힘들어요.”
오 대리는 다급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리고…….”
난 피식 웃고는 메모장에 한 사람 이름을 더 부르며 터치했다.
“변성준 이사님.”
“응? 뭐, 뭐어?!”
변 이사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왜? 나는 왜에?! 난 계속 팔짱 끼고 있었는데?”
난 최대한 뻔뻔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차출이에요.”
“야아~ 이거 독재야!”
“아니요. 회사 명령입니다.”
“헉…….”
변 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회사원은 회사에 소속된 이상, 회사 명령엔 칼같이 따라야 한다고.
지혜롭게 뺑기 치더라도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변 이사가 가르쳤었다.
‘명령’이라는 단어에 변 이사는 말문을 잃었다.
“자, 그럼 이렇게 정리된 겁니다.”
“잠깐만요.”
최경리가 손을 살짝 들었다.
“그럼 저는 안 가는 거예요?”
“뭐…… 그렇게 됐네?”
“그럼 저도 갈래요.”
“아니야. 안 가도 돼.”
“아니요. 가요. 제 이름도 넣어주세요.”
“레스토랑 지킬 사람도 필요해.”
“주말에 뭘 지켜요.”
“혹시 만약에 출장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혼자서 장사하라고요?”
하아…… 젠장.
* * *
인천공항. 금요일, 오후 5시.
결국, 사랑산성 전 직원이 미얀마 출장을 함께 가게 되었다.
“김지안 대리. 인원 체크 해봐. 안 온 사람 없지?”
“네. 다 오셨어요.”
변 이사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뭘 뻔한 걸 물어봐. 점심 영업 끝나고 함께 왔는데, 사람 없는 게 이상하지.”
“…….”
변 이사는 오늘 내내 툴툴거렸다.
나와 김지안은 알고 있었지만, 주말 출장으로 확정된 이후로 나머지 세 사람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대휴 안 주기만 해봐~ 노동청에 신고 할 거야. 나 이런 거 예민해.”
변 이사는 쉬는 거에 굉장히 예민하다.
대휴는 없고, 4일간 반차로 줄거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중에 분위기 봐서 얘기해야지.
“자자~ 식사하러 가시죠. 인천공항에서 제일 맛집이 어디라더라~”
5시간 40분의 비행시간.
현지 시각 밤 11시.
우리는 미얀마 양곤에 도착했다.
행정 수도는 ‘네피도’라는 곳인데, 양곤은 경제, 문화 중심지라고 한다.
김지안은 설명을 쉽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미국으로 치면요. 네피도는 워싱턴이고요. 양곤은 뉴욕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렇게 말하니 바로 알아듣기는 하겠는데, 몇몇 직원은 킥킥대며 웃었다.
거리가 온통 새까맣다. 공항이 외곽에 있어서 그런 걸까.
가로등 말고는 불빛이 거의 없어서, 밤에도 대낮 같은 우리나라와 비교됐다.
“저희 내일 아침 비행기로 갈 거라서요. 숙소는 공항 근처로 잡았거든요.”
오랜 시간 비행기 탔더니, 피곤해서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좀비처럼 김지안만 졸졸 따라다녔다.
다음날.
호텔에서 조식을 간단히 하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다들 피곤해서 얼굴이 잔뜩 부어있는데, 변 이사만 쌩쌩했다.
“아까 조식에 있던 그 국물 뭐야? 면 넣어서 먹으니까 너무 맛있던데?”
미얀마 체질인가? 낯선 음식도 잘 먹네. 난 영 먹을만한 게 없던데.
“모힝가라는 미얀마 전통 음식이에요. 생선을 고아서 만든 국인데, 미얀마의 국민 아침 음식이에요.”
변 이사가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닌 듯한데, 김지안은 술술 말했다.
“와~ 김 대리 뭐야? 왜 이렇게 잘 알어?”
“오기 전에 공부 좀 했죠. 공부가 제 주특기잖아요.”
역시…… Y대 학생답다.
김지안이 만약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간혹 그녀의 재능 넘치는 모습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양곤 공항에서 미얀마 국내선을 탔다.
“저희는 지금 ‘만달레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미얀마 제2의 경제도시에요. 거기 도착해서 차로 5시간 가면 목적지인 모곡에 도착해요.”
오 대리는 쩌든 얼굴로 물었다.
“만달레이까지 비행시간은요?”
“약 2시간 정도에요.”
“헐…… 이거 출장 일정이 가능한 거예요? 도착까지만 1박 2일인데?”
오늘은 토요일.
월요일에 레스토랑 오픈을 하려면 일요일까지 도착해야 한다.
김지안은 대답하기 전에 살짝 내 눈치를 봤는데.
난 김지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미얀마에 왔다. 이젠 말해도 된다.
“모곡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업무 시작하세요. 다음날 오후 4시 전에만 출발하면 돼요.”
“오후 4시? 일요일 오후 4시에 모곡에서 출발한다고?”
이제 막 만달레이행 비행기에 착석했고.
변 이사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요일까지 출장인데, 일요일 오후 4시에 모곡에서 출발한다니?”
“아~ 그게요. 미얀마에서 한국 가는 직항은 밤 비행기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양곤 공항에 자정까지만 도착하면 돼요.”
“뭐어? 그럼 인천 도착 시간이 몇 신데?”
“월요일 아침 7시요.”
변 이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인천공항에서 바로 내곡동으로 출근하라는 거네?”
“…….”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건 일정이 2박 3일이 아니잖아! 3박 4일이잖아!”
오 대리와 최경리의 표정도 무시무시하게 변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난 화장실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게 사장님께서 미얀마 출발 기준으로 2박 3일이라고 하셔서…….”
화장실에 가는데, 뒤에서 변 이사의 외침이 들렸다.
“어디가! 이 사기꾼아!”
오후 11시.
만달레이에 도착하여, 렌트 차량에 올라탔다.
비행기에서 내내 귀가 따가웠다. 만달레이에 도착할 때쯤 좀 잠잠해졌다. 이제 다들 포기한 것이다.
차창 밖으로 미얀마의 풍경을 보았다.
수많은 절과 커다란 천을 몸에 둘둘 말고 다니는 사람들.
우리는 모두 얼굴이 퉁퉁 부은데다가 해태 눈깔이지만, 그래도 생소한 풍경에 시선이 갔다.
“흠!”
약 30분쯤 가니, 만달레이 도심을 벗어났고.
그때부터 지옥이었다.
4시간 내내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계속 흔들거리는 차 속에 있으니, 속이 뒤집히는 건 둘째치고 허리가 나갈 것 같다.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쨌든 시간은 지나갔고.
오후 4시 30분.
높은 산세에 둘러싸인 한 마을에 도착했다.
“헬로~ 모곡 야우데(모곡에 도착했어요.)”
운전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곡동에서 출발한 지 26시간 만에.
우리는 미얀마 모곡에 도착했다.
“괜히 따라왔어. 괜히 따라왔어.”
최경리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모곡 호숫가
* * *
“베 똬말래?”(어디로 갈까요?)
“루비 시장으로 가주세요.”(파떼미야 제뛔 똬바)
내게는 만국 공통어가 가능한 핸드폰 번역기가 있다.
호주 비건 네일 브랜드. 웰시페니와 협상할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던 번역기.
검증을 해봤기에 자신이 있다.
“호~ 까운데. 미얀마 사까 아얀 쫜데~(오~ 좋은데요. 미얀마 말 정말 잘하네요.)
운전사는 내 번역기를 향해 말했다.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한 것도 아니고, 번역기가 한 말인데요.”
운전사는 연신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여기 방문한 분들 번역기 많이 쓰거든요. 이 정도 수준은 아니던데, 정말 대단한데요? 어디 핸드폰이에요?”
운전사가 과도한 관심을 보인다.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3년 된 은하수 폰이지만, 난 그냥 얼버무렸다.
“최신 폰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아~ 네.”
운전사는 활짝 웃으며 대답하고는 이제 운전에 집중했다.
약 10분 정도 지나자,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모곡 호수에요. 바로 이곳 호숫가에서 루비 경매시장이 열리거든요.”
“아…… 따로 시장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런 건 따로 없어요. 팔려는 사람이 모이면 시장인 거죠.”
난 운전자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대화했고.
다른 직원들은 그저 멍하니 바깥 구경만 했다.
그러다가 최경리와 김지안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강 사장님 미얀마에 살았었어?”
“네? 아니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김지안의 대꾸에 최경리는 다시 물었다.
“아니, 저게 번역기 맞어? 그냥 미얀마어 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운전사랑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눠?”
“호호. 지금 번역기 쓰는 거 보고 계시잖아요.”
“대화에 텀이 없잖아. 되묻는 것도 없고. 저럴 수가 있나?”
내가 번역기 쓰는 걸 처음 본 직원들은 신기해했는데.
나는 들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내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미얀마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호숫가 주변으로 쭉~ 보시면 돼요.”
“고마워요.”
마치, 내가 가이드가 된 듯하다.
어쩔 수 없다. 나를 통해야 언어가 되니까.
“그럼 언제 다시 올까요?”
운전사의 물음에 난 다시 물었다.
“여기 경매시장이 몇 시까지죠?”
“저녁 6시에요.”
“그럼 6시에 이 자리에서 만나요.”
운전사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참 잘 웃는다. 운전사가 잘 웃는 건지, 아니면 미얀마인들이 원래 그런 건지.
지금 시각 오후 5시.
6시까지 1시간 남았다.
* * *
― 냐미꼬 빼라이 메(싸게 드릴게요~)
― 찌바~(구경하세요)
경매시장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우리를 불렀다.
난 번역기를 켜고서,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은 채 돌아다녔다.
이들이 무슨 말 하는지 다 알아듣고 있다.
직원들은 내 뒤만 졸졸 따라왔다.
많은 사람이 일렬로 가판대 앞에 앉아 있고.
커다란 접시에 붉은색 조각들이 수십, 아니 수백 개 모여 있다.
얼핏 보면 크랜베리 같아 보이기도 하고…….
설마 저게 루비인가?
난 신기해서 어느 가게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이게 뭐예요? 루비 맞아요?”
내 번역기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가판대 앞에 앉은 아주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얀마사카 아얀 쫜데~(미얀마 말 잘하네요~)”
“하하.”
미얀마 도착하자마자, 칭찬 많이 듣네. 말 잘하는 게 아니라, 번역기 덕인데.
아주머니는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루비에요~ 품질 좋아요. 구경하세요.”
그때, 김지안이 나섰다.
그녀는 루비 판별하는 법을 배워왔다.
10배 확대경을 꺼내어 루비 조각을 자세히 살폈다.
그다음 유리로 만든 루비 모조품을 꺼내어 비교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장님, 루비 맞는 거 같아요.”
“오…….”
한 접시에 가득 담겨 있는데, 이 진귀한 보석을…… 무슨 강낭콩 파는 것처럼.
“얼마에요?”
난 루비 한 알을 들고 물었고.
“아하하.”
아주머니는 꺄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는 안 팔아요. 이 그릇 단위로 팔아요.”
“…….”
수백 알은 되어 보인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얼만데요?”
아주머니는 내게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음?”
나를 무슨 전문가로 아나.
루비 시장은 처음인데.
“정확히 말씀해주세요. 잘 몰라요.”
아주머니는 씩 웃고는 말했다.
“500만짯.”
흠…… 1,000짯이 700원 정도니까.
500만짯이면…… 350만 원?!
“What?!”
놀라서 나도 모르게 순간 영어가 나왔다.
변 이사가 옆에서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러는데?”
난 턱으로 수백 개의 루비 그릇을 보고 말했다.
“이게 다 해서 350만 원이라는데요?”
“뭐어?! 대박! 이거 싼 거지?”
김지안이 대답 대신했다.
“상상 이상이네요. 현지 가격이 저렴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제가 알아본 것에 비해 반도 안 되는 가격인데요.”
오 대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14억 원어치 사서 한국에서 팔면 되겠는데요?”
“두 배 번다고 쳐봐야 28억이야. 안돼. 초호화 보육원 건물 짓는데 턱없이 부족해.”
변 이사는 입맛을 다시며 오 대리의 말에 대꾸했다.
어쨌든 싸기는 진짜 싸다.
이래서 세상은 넓고, 기회는 많다는 말이 있는 건가?
“이게 ‘비둘기 핏빛 루비’인가요?”
우리가 원하는 건 일반적인 루비가 아니다. 세상에서 보기 힘든 최고급 루비.
혹시 그 루비도 이곳에서는 도처에 깔려 있다면…….
기대감을 갖고 물었다.
“바래?(뭐요?)”
그런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응대하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 제대로 못 들었나 싶어서, 난 번역기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비둘기 핏빛 루비…….”
“그런 거 없어요.”
다 말하기도 전에 칼같이 대답했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
그 친절하던 사람이 갑자기 표정이 싹 바뀌니 당혹스러웠다.
“안 살 거면 가줄래요?”
“네? 아, 네. 네.”
난 얼떨결에 대답한 뒤, 뒤로 물러났다.
최경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강 사장님 뭐 말실수했어요?”
“아니. 옆에서 하는 말 다 들었잖아. 나 번역기 썼잖아.”
“그러니까요.”
‘비둘기 핏빛 루비’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부터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거 따져볼 시간이 없다.
일단, 찾아야 한다.
“자, 지금부터 찢어져서 찾는다.”
난 영문 스펠링을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Pigeon’s blood ruby.’(비둘기 핏빛 루비)
“혹시 미얀마인들이 못 알아들으면, 영어로 써서 보여줘. 그러면 알아볼 거야.”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한 시간 뒤에 여기서 만나.”
우리 다섯 사람은 뿔뿔이 흩어졌다.
1시간 뒤.
6시가 되자, 가판대는 순식간에 정리되었고.
완전히 절어 버린 직원들이 하나둘씩 헤어진 장소로 돌아왔다.
대부분 나와 같은 반응을 만난 듯.
성과는 없고, 그냥 지친 얼굴이었다.
변 이사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해. 비둘기 얘기만 하면 다 입을 닫아버려.”
뭔가 이상하다. 왜 그럴까.
여기서는 그게 금기어인가?
김지안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일단은…… 우리 직원들 좀 쉴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도 힘들고.
“일단 뭐 좀 먹고 쉬죠. 내일도 시간이 있으니까.”
‘MOGOK HILL HOTEL’
우리가 오늘 밤 묵을 숙소.
호텔에 도착한 직원들은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그냥 좀 큰 모텔 같은 느낌.
“하아…… 진짜, 강 사장님 너무 한다. 진일상사 사장님보다 더한 거 같아. 개고생도 이런 개고생을…….”
최경리의 중얼거림…… 무시해도 되지만, 이번엔 넘어갈 수 없었다.
나를 민 사장과 비교하다니!
난 큰 소리로 말했다.
“오해야. 오해. 이곳이 모곡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여기가 워낙 작은 마을이라 호텔이 몇 개 없어.”
“설마 방도 같이 쓰라는 건 아니겠죠?”
“원하면 각방 쓰게 해줄게. 근데 미얀마 바퀴벌레가 꽤 크데. 엄지만 하다고 하던데. 도마뱀이 벽에 기어 다니기도 하고.”
최경리는 식겁한 표정을 지었고.
김지안이 최경리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최 과장님…… 방은 저랑 같이 쓰시면 안 돼요?”
“으응. 그럴까?”
우리는 호텔 안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고.
너무 지친 직원들은 다들 빨리 먹고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술 좋아하는 오 대리도 오늘은 밥만 먹었다.
“저 먼저 들어가 쉬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짓으로 숙소에 들어가는 직원들을 보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절대로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째 나 나쁜 사장 된 거 같은데…….’
* * *
하필, 미얀마는 시장이 새벽부터 열린다.
차라리 늦게 열리면, 그 핑계로 좀 쉬게 할 텐데.
우린 시간은 없고…… 난 책임져야 하는 사장이고.
아침 7시.
우리는 시장 앞에 도착했다.
“하아~ 군 전역하고 6시에 처음 일어나봤네.”
오 대리의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자, 조금만 더 힘내자! 오늘 열심히 일하고 집에 가는 거야.”
난 파이팅을 외쳤지만, 볼멘소리가 들렸다.
― 26시간 걸려서요?
― 집에 빨리 가고 싶지만, 아~ 생각만 해도 엄두가 안 나.
―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야.
리더가 이래서 힘들구나.
중요하고 물러설 수 없는 일을 해야 하는데, 지쳐있는 직원들을 움직여야 하고.
딱히 할 말이 없고, 그냥 외쳤다.
“화이팅!”
“…….”
우리는 다 함께 또 찢어졌다.
어제와 반복된 패턴.
시장은 크고, 비둘기 얘기만 꺼내면 다 외면하고.
이른 아침에는 그래도 좀 시원했는데, 아무리 북부 지방이라도 미얀마는 미얀마다.
정오쯤 되니까, 졸라 덥다.
“음?”
11시경.
12시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직원들은 이미 다 모여 있었다.
“뭐야? 일 안 해?”
내가 다가가 묻자, 최경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일 안 하냐고요? 그게 지금 적절한 단어 선택이에요? 일 안 해? 장난해요?”
“야아……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옆에서 오 대리가 말했다.
“사장님, 안 간 곳이 없어요. 각자 동선도 몇 번이나 겹쳤고요. 이제 얼굴이 익어서인지, 다가가서 물어보기도 전에 피해요.”
변 이사가 나섰다.
“강 사장님, 내 생각엔 전략을 바꿔야 할 거 같아. 이건 아니야.”
“어떻게요?”
“그건 나도 모르지.”
나도 이게 아닌 것 같다는 건 안다. 근데 방법이 없는 걸 어떡하나?
강렬한 미얀마의 태양. 막막하다.
이제 시장 어디를 가든, 우리를 향해 수군대는 미얀마 사람들의 말이 들린다.
“사장님…… 배고파요.”
김지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 일단 먹자.”
깔끔해 보이는 레스토랑을 찾아보려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골목을 들어가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디마”(저기요.)
바싹 마르고 눈만 동그란 한 소년이 내 다리를 두들겼다.
“응? 나?”
“네.”
미얀마 사람이 먼저 말 걸어온 건 처음이다.
“왜?”
난 한쪽 무릎을 꿇고 미얀마 소년과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는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꺼내더니.
내 눈앞에서 조심스럽게 펼쳤다.
“혹시 이거 찾으세요?”
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말이니?”
소년은 천 조각 정중앙을 검지로 가리켰다.
“이거요.”
소년이 가리킨 손끝에는 모래알 붉은빛이 있었는데.
“이건…….”
눈을 가까이하고 자세히 보니, 모래알 크기로 아주 작은 뭔가가 보였다.
어제부터 수많은 루비를 봐왔는데.
이건, 뭔가 달랐다.
난 눈을 더 가까이 대고 보았다.
색감이 분명 달랐다.
짙은 듯하면서도 밝고.
붉은빛에 보랏빛이 감도는…… 아주 매혹적이며 신비로운 색감.
“설마…….”
소년을 바라보자.
그는 활짝 웃으며 영어로 말했다.
“This is Mogok burmese ruby, ‘pigeon’s blood’ color.”
(미얀마 모곡산, 비둘기 핏빛 루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