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혹은 꿈 (2)
* * *
‘퇴근하기 싫어지는 회사.’
우리 회사는 겨우 5명.
앞으로 사업이 확장된다고 해도, 난 웬만해선 직원 수를 늘리고 싶지 않다.
채용을 많이 하면 국가에 도움 되고, 청년 실업에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지만.
내가 그런 거까지 고려해 가며 사업할 깜냥도 안 되며, 그저 난 가까운 사람들과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
내 사람들. 내게 속한 사람들에게만 잘해주는 것만 해도 벅차다.
아무리 좋아 봐야 자기 집만큼 편하겠냐마는…… 그래도 난 꿈을 갖고 싶다.
직원들도 회사를 집으로,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기를.
“강 사장님, 미치셨어요?”
변 이사는 눈을 멀뚱거리면서 말했다. 적당한 표현이 안 떠오르니, 거친 말을 존대로 표현한 듯싶었다.
“안 미쳤습니다.”
“주류사업도 도전해 보려는 거야? 아무리 우리가 종합상사지만…….”
“하하. 에이~ 변 이사님~ 무슨 뜻인지 다 아시면서~”
박 사장은 옆에서 눈만 끔뻑이며 나와 변 이사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약간 올라간 목소리로 변 이사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믿기지 않아서 되묻는 거야.”
변 이사는 어쨌든 정형화된 회사에서 20년을 넘게 근무한 회사원이다.
내가 예산도 무시하고 막 주문을 쏟아 내는 것도 참고 있었을 텐데, 사무실에 PC방과 바(bar)를 만들어 달라는 말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겠지.
“강 사장님, 회사 그렇게 운영하면 안돼. 최소한의 기본이라는 게 있어. 직원들 풀어지는 거 순식간이야. 아무리 강 사장님 능력이 좋아도 그렇지. 직원들 다 망가뜨릴 셈이야?”
“…….”
“숙직실 있고, 밥도 주고, 바까지 있는 이런 회사에서 일하면, 나중에 딴 곳 가서는 어떻게 일하라고?”
“딴 데요?”
“강 사장님이 직원들 미래를 아나? 직원들 모두 젊다고! 나야 이 회사가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
“아직 편함에 젖어들 나이가 아니야. 김지안 대리 지금 몇 살인지 알지?”
변 이사의 마음은 알겠다. 직원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현실을 불안해하는 것도.
하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하기 싫었다.
“제가 잘할게요.”
“강 사장님!”
“이건 포기 못 하겠어요. 제 꿈이에요. 현실도 중요하지만, 제가 사장으로 있는 동안은 이상을 실현해 보고 싶어요.”
“…….”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변 이사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난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이사님! 왜 제 걱정은 안 해주세요? 저도 젊은데?”
“자기는…… 다르잖아!”
활짝 웃으며 난 다시 말했다.
“아니요. 절 잘 아셔서 걱정 안 하시는 것뿐이에요.”
“…….”
“다만 세 친구는 아직 잘 모르시니까 걱정하시는 거고요. 제가 보기엔 최경리, 앤더슨 오, 김지안 모두 다 강한 친구들이에요. 그냥 나이만 좀 젊을 뿐이죠.”
“…….”
“다 성인인데.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할 사람들입니다. 지 인생 지가 사는 거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변 이사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에휴. 모르겠다. 사장이 하자면 해야지.”
난 박 사장을 향해 말했다.
“PC방과 바(bar) 적으셨죠?”
“네? 아, 네.”
* * *
이제 거의 다 정리된 것 같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혹은 기존에 상상했던 이미지를 가감 없이 얘기했는데, 잘 알아들었겠지.
“흠…… 더 없으십니까?”
“네. 제가 너무 많은 걸 말씀드렸나요?”
“아닙니다. 제가 부지 지형 고려해서 구상을 해보고,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은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네.”
“근데, 웬만하면 요청사항 다 맞추겠습니다. 상상하는 걸 만드는 것, 그게 제 일이니까요. 전 ‘안 된다’라는 말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난 그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 태도가 괜찮으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예산은…….”
박 사장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고, 이 말에 변 이사는 내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뭐…… 눈치채셨겠지만, 예산은 없습니다.”
“…….”
“구상을 해보시고요. 필요한 예산을 역으로 알려주세요.”
“아…… 네, 어렵네요. 가이드 라인이 있으면 그에 맞춰서 구상하는 게 좋은데. 제가 예산을 역으로 드리면 비싸다고 느끼실 수가 있어서…….”
난 양 팔을 쫙 펼치며 말했다.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업은 완전히 마음을 열고 진행할 거니까요. 그냥…… 소신 것만 해주세요. 그저 잘 만드는 데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저도 예산을 준비해야 하니까, 최대한 빠르게 어바웃으로 먼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약간 넉넉하게요. 돈 준비했다가 나중에 부족하면 안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박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서둘러 보겠습니다. 제가 소문은 들었지만, 강 사장님 아주 시원시원하시네요.”
“하하. 그럼요. 누구한테 일 배웠는데요.”
아직 표정이 새초롬한 변 이사를 향해 난 윙크를 하며 말했다.
“칫.”
이제야 변 이사의 표정이 좀 풀렸다.
박 사장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럼 계약은…….”
“아, 보통 계약은 이 시점에 하나요?”
“네, 건축은 그렇습니다.”
“몰랐습니다. 그럼 계약서 준비하셨나요?”
“네.”
난 그가 건넨 계약서를 빠르게 훑고는 서명했다.
“자,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하겠습니다.”
“넵.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나와 변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가려다가…….
“아! 맞다!”
“아오, 깜짝이야.”
변 이사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뭐야~ 또 있어? 아주 궁궐을 짓는 구만……궁궐을.”
난 씨익 웃고는 박 사장을 불렀다.
“박 사장님~”
“네.”
“한 가지 빠뜨린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아, 네. 작은 연못을 하나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연못이요?”
“네, 부지 정중앙에요.”
“아…… 상징물 같은 걸 말씀 하시는 거군요.”
변 이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웬 연못?!”
속초 버스 사고로 정신을 잃은 뒤, 산신령을 만났던 연못.
그 연못에서 난 금손을 얻었다.
이후로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 짓는 보육원과 새로운 사무실. 이 모든 게 연못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내게 그런 행운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라도 기념하고 싶다.
“어떤 연못이냐면요.”
난 박 사장에게 연못의 모습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너무 강렬한 기억이라 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보통 꿈은 금방 잊어버린다는데, 2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기억 속에 아주 생생하게 자리 잡혀 있다.
박 사장과 박서문은 다시 열심히 적었다.
연못의 크기, 모양, 색깔, 주변의 수풀과 바위 모양과 위치까지.
난 아주 상세히 말해주었다.
“와…… 실제로 보신 건가요? 아주 디테일 하네요?”
“하하. 네. 본 겁니다. 저에게 아주 특별한…… 근본이 되는 연못이라서.”
“아, 네.”
박 사장은 필기 내용을 정리한 후 말했다.
“알겠습니다. 연못이 크진 않아서,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겠네요.”
“하하. 네. 까다로운 의뢰자라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저희가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그제야 난 인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어느덧 저녁 8시.
몇 마디 안 한 거 같은데, 미팅을 3시간을 넘게 한 것이다.
변 이사는 기 빨린 표정으로 말했다.
“와…… 강 사장.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에 가장 열정적이었어. 안 피곤해? 3시간 내내 속사포 랩을 쏟아 내던데.”
“하하. 제가 그랬어요?”
“아마 저 두 사람. 머리에 지진 났을 거야.”
어둑한 사랑산성 주변 도로를 거닐며,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근데, 연못은 뭐야? 근본? 자기 연못에서 태어났어? 박혁거세야? 하핫.”
변 이사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에이…… 재미없어. 어디 가서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이면 그냥 웃어줬을 텐데, 변 이사님이라 말씀드리는 거예요.”
“뭐야…… 정색은.”
밤공기가 시원하다.
흐읍~ 휴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밤하늘을 향해 숨을 토해냈다.
“이제 몇 개월 뒤면 이 내곡동을 떠나네요.”
“그러게. 여기서 참 많은 일 있었다. 그치?”
사랑산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홍지아는 뭐 하고 있을까요?”
“연락 안 해봤어?”
“그러게요. 회사 나간 이후 한 번도 연락을 안 해봤네요.”
홍지아 얘기가 나오자, 변 이사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홍지아가 먼저 이직하겠다고 했지만, 떠나기 전 마음이 바뀌었을 때 변 이사는 받아주지 않았었다.
“몰라. 잘살고 있겠지. 지나간 일 말고, 앞으로 올 일 생각하자. 건물 지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
그의 불편한 반응에 나도 약간 머쓱해져서 일부러 밝게 대답했다.
“네!”
* * *
일주일 뒤.
건축사사무소 ‘금강’에서는 ‘사업보고서’를 보내왔다.
조감도까지 완벽하게 구상된 보고서였는데, 난 솔직히 좀 놀랐다.
“와…… 박 사장님 진짜 대단하시네.”
머릿속에 있는 걸 두서없게 얘기했는데도, 90% 이상 대부분 구현되어 있었다.
다른 건축사와 일해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사무소가 아닐까 싶다.
― 와…….
― 이게 진짜 보육원이라고?
― 호텔급 보육원?
빔 프로젝터로 직원들과 다 함께 봤는데, 처음엔 좋아하다가 보고서가 뒤로 갈수록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 이게 현실성이 있어?
― 원래 조감도랑 현실은 차이가 크더라.
― 말도 안 돼…… PC방? 바(Bar)?
그 불안함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정점을 찍었다.
‘건축예산 60억.’
결국, 최경리가 손을 들고 물었다.
“강 사장님.”
“어, 얘기해.”
“우리 한 5년 뒤에 이사 가는 거예요?”
“아닌데. 분묘개장공고 완료되는 대로, 바로 삽 뜰 거야.”
“그럼 저 예산은 어떻게 하려고요? 저희가 잡았던 예산이 11억 아니었어요? 거의 6배 수준인데?”
“…….”
글쎄다.
생각보다 많이 크긴 한데.
“혹시 저희가 모르는 다른 예산이 있어요?”
“뭐…… 한 4~5억 정도?”
“그래도 40억이 넘게 부족한 거잖아요?”
“뭐…… 그 정도 되겠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날 보며 최경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특기를 시전했다. 다른 사람 다 들리도록 혼자 중얼거리기.
“요즘 경매로 돈 쉽게 버시더니, 정신이 나가셨나…….”
옆에서 변 이사가 최경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야, 최 과장. 다 들려.”
“아 죄송요.”
직원들의 표정이 묘했다.
좋은 듯하면서도, 좋아할 수만은 없는 표정.
왜냐면 그들이 보기에 현실성이 너무 없어 보일 테니까.
하지만 난 자신 있었다.
“다들 왜 이래? 우리가 1년 반 동안 해왔던 일들 잊었어?”
“…….”
“40억? 난 별로 커 보이지 않는데?”
오 대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은퇴하신다더니…… 혹시 다시 종이 접으시려고요?”
“아니. 이제 종이접기는 안 해.”
난 내 금손을 믿는다.
지금까지는 나도 모르는 내 능력에 깜짝 놀라는 일들이 많았다면.
이제는 충분히 예상이 된다.
그리고 어느 사업에 내 금손이 딱일지. 어떤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낼지 말이다.
직원들이 당황한 가운데, 유난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한 직원.
“김지안 대리?”
“네, 사장님.”
“귀금속 세공 사업. 준비됐지?”
김지안 대리가 오랜 시간 준비해 온 개인 과업인 ‘귀금속 세공 사업.’
난 2주 전쯤, 본격적으로 시작할 테니 준비해 놓으라고 일러두었다.
내 물음에 김지안 대리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이제 사장님께서 등판만 하시면 됩니다.”
익산시
* * *
직원들은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귀금속 세공 사업’
분명 ‘사랑산성’을 창업할 때 얘기했던 사업이다.
창업 이후 종이공예사업, 부동산, 너튜브 홍보에 레스토랑 운영까지.
정신없이 지냈고, 매출도 충분하여 자연스럽게 묻힌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종이공예사업과 기존에 하던 레스토랑만 잘 확장해 간다면 ‘사랑산성’은 계속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전, 종이공예에서 내 손의 능력이 일반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걸 알게 되었고.
보육원 및 사무소 설립 때문에 단기간에 큰 금액이 필요해졌다.
내 손으로 돈 버는 거야 뭘 하든 자신 있지만, 단기간에 큰 금액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고민하던 중 내 눈으로 현장을 목격하고 가능성을 봤던 ‘귀금속 세공 사업’이 떠올랐다.
그래서 2주 전에 김지안에게 준비를 하라고 언질을 줬었다.
근데 좀 놀랐던 게, 김지안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를 해놓고 있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자신의 과업으로 맡겨진 일이니 꾸준히 하고 있었다고…….
그저 내가 방향만 정해주면 된다고 했다.
“어디로 등판하면 될까?”
“익산입니다.”
“익산?”
“네.”
김지안은 설명을 시작했다.
“전북 익산시에 귀금속 보석 공업단지가 있거든요. 역사가 오래된 곳인데, 지금까지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지금도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 곳이지?”
“네. 우리나라 최대 귀금속 공업단지라서 장비도 다양하게 있고요. 단기 임대가 가능한 곳도 알아 놨습니다.”
“그래.”
내가 아무리 금손이라도 외부요인이라는 게 있기에 사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멋들어진 귀금속을 만들어도 시장 상황 때문에 제값을 못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처음엔 작업 공간을 단기 임대하여 진행해보려 한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선 이후 매수를 하든, 장기 임대를 하든…….
“오케이…… 그럼 내일 가면 되나?”
내일은 금요일이다.
지방 출장은 가급적이면 금요일 오후에 가는 게 좋다.
예상치 못 하게 비즈니스가 길어질 수도 있는데, 평일에는 요리하러 무조건 아침에 와야 하니깐.
“네, 사장님이 결정해주시면 내일로 약속 잡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일 점심 영업 끝나고 가자.”
다른 직원들은 잠자코 있었고.
난 직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같이 갈 사람?”
“…….”
손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난 아무 말 없이 변 이사를 돌아봤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난 안돼. 가정 있는 사람은 주말에 건드리지 말자~ 그리고 난 부동산 때문에도 정신없어~”
변 이사가 있어야 든든한데.
가정 핑계를 댄다면 형수님께 전화를 드리고 데려가려 했는데.
부동산 때문에 바쁘다는 말에 관두었다. 그건 사실이니까. 요즘 변 이사가 좀 바쁘게 지내긴 했다.
그렇다고 김지안과 단둘이?
내일 늦게 출발하기 때문에 어쩌면 1박 해야 할 수도 있다.
여직원과 단둘이 가는 건 좀…….
흠…… 최경리와는 같이 다니기 싫고.
그럼, 한 명밖에 없네.
“오 대리! 내일 출장 준비 해.”
“네?! 제가요?”
나도 오 대리는 부담스럽다. 워낙 술을 좋아해서, 함께 다니면 피곤하다.
“그래! 못 들었어? 1박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내일 출근할 때 옷 챙겨서 와~”
“아~ 내일 프라이데이 나잇인데…….”
난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앤더슨 오 대리 님. 이거 회사 일이야. 출장을 거부한다는 건가?”
오 대리는 식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난 뒤 돌아서 혀를 삐죽 내밀고 웃었다.
* * *
익산행 KTX.
오 대리와 김지안은 맞은 편에 나란히 앉아 있다.
난 창밖으로 바뀌는 풍경을 보다가. 이럴 때 직원들과 편하게 대화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대리.”
“네.”
“요즘 뭐 힘든 거 없어?”
“힘든 거요?”
오 대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없는데요.”
“괜찮아. 아무거나 상관없어. 회사 흉봐도 좋으니까, 편하게 말해봐.”
오 대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그렇게 대놓고 면담하시는데, 어떻게 편하게 얘기해요?”
면담인 거 티 많이 났어?
오 대리의 말에 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 대리 님, 이번에 회사 이전 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복지시설이 많아진 게 가장 좋던데. 특히 뷔페식이요. 맨날 편의점 음식에 김밥만 사 먹다 보니…….”
김지안이 자연스럽게 말을 풀었다.
오…… 고마웠다.
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오 대리도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너무 좋지~ 특히, 난 바(Bar) 생기는 게 좋던데. 그런 게 있다고 해서 직원들이 막 쓰지는 않거든.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분위기를 유연하게 하는 거지.”
난 그냥 글로벌 회사 따라 한다고 넣어본 거였는데, 그런 효과가 있었군.
“근데, PC방은 필요 없는데. 그건 좀 오바야. 우리 중에 게임 하는 사람 있나? 지안 씨 게임 해?”
“아니요.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쉬기 바쁜데. 하더라도 주말에 하겠죠. 주말에 굳이 회사 PC방 와서 게임 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피시방까지는 필요 없고,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당구대 하나 정도 있으면 될 듯.”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난 재빨리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PC방은 다른 거로 바꾸는 게 낫겠구나.
김지안은 나를 돌아보고 살며시 물었다.
“좀 더할까요?”
“응?! 으응…….”
김지안은 피식 웃고는 오 대리에게 말했다.
“일하는 거 재미있으세요? 전 사실 요즘엔 좀 심심했어요. 사장님이랑 같이 다닐 때가 재밌는데, 최근에 너무 변 이사님이랑 다니셔서.”
“동감!”
오 대리는 날 살짝 흘겨보고는 말했다.
“너무 한 사람만 편애하셔.”
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헤이~ 편애라니. 아니야~ 그냥 요즘 부동산 일에 집중해야 했고, 변 이사님이 부동산 담당이셔서 그런 거뿐이야.”
김지안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치. 종이공예와 너튜브 광고 촬영 때는 안 그러셨었는데. 다른 직원들도 적극 참여시키셨는데…….”
“…….”
할 말 없게 만드네.
편애라…….
음…… 변 이사님과 다니는 걸 좀 더 선호하긴 했지.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런데 한편으로는 참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 안 시켰다고 뭐라는 경우는 또 뭐야. 그렇게 일하고 싶었어?”
“…….”
“알았어! 앞으로 일 많이 시켜줄게! 땡큐~”
김지안은 눈을 흘기며 콧소리를 냈다.
“아잉~ 사장님~ 그런 뜻이 아니구요.”
“콧소리 내지 마.”
진심이다. 김지안이 콧소리 낼 때면 그녀의 전 직장인 단란주점이 오버랩 된다. 일반적인 콧소리와는 결이 다른 뭔가가 있다.
“사장니임~ 그렇다고 너무 일 많이 주진 마시고요. 하하.”
오 대리도 따라서 콧소리를 내었고.
우리는 다 함께 웃었다.
직원들과 종종 대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산역 도착.
우리는 택시를 탔다.
“귀금속 공업단지로 가주세요.”
김지안은 마치 길을 아는 것처럼 택시 기사를 잘 안내했다.
“저기 앞에서 우회전하셔서요. 200미터만 더 가셔서 내려주시면 돼요.”
아무리 봐도 신기해서 물어봤다.
“김지안 대리. 혹시 사전 조사 왔던 거야? 왜 이렇게 길을 잘 알아?”
70~80년대 건물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 그냥 걸어 다녀도 헤맬 것 같은 길이었다.
건물 주소지도 명확하지 않아서, 내비게이션으로 찾아올 수도 없었다.
“거리뷰 통해서 미리 봐뒀거든요. 꼭 가보지 않아도, 생각해 두면 헷갈리지 않아요.”
우리는 곧 색이 바랜 노란색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여기저기 금도 가 있고, 건물 앞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딱 귀신 나오게 생겼다.
밤에는 혼자 못 오겠는데.
“귀금속 공업단지가 대부분 판매처로 바뀌었거든요. 공장이 몇 군데 없어서 섭외하는데 어려웠어요.”
김지안은 앞장서서 걸어갔고.
나와 오 대리는 살짝 머뭇거렸다.
“뭐해요? 어서 오세요.”
* * *
등산복 바지에 슬리퍼.
후줄근한 현장 자켓을 입은 장년의 남성이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국쥬얼리 사장님 되십니까?”
김지안이 다가가 묻자,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사랑산성에서 왔습니다. 전화로 연락드렸었는데.”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김지안은 웃으며 날 소개했다.
“이쪽은 저희 사랑산성의 강태평 사장님입니다.”
난 악수를 건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태평입니다.”
그도 내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채상호입니다.”
채 사장은 나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네모의 신님.”
“엇…….”
좀 놀랐다.
표정은 전혀 영광인 표정이 아닌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와서…….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이런 나와 다르게 김지안과 오 대리는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장 안.
여기저기서 쇠 두드리는 소리.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벼림질.
후끈한 분위기는 그때 배병규의 사업장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다른 게 있다면, 이곳이 훨씬 크다는 것 정도?
이런 환경이 처음인 오 대리와 김지안은 연신 두리번거렸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채 사장은 파티션으로 나눠진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그곳에는 바깥보다 좀 더 깔끔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자 채 사장은 김지안을 향해 말했다.
“요청하셨던 대로 구분된 작업장이고요. 세공에 필요한 시설들은 모두 갖췄습니다.”
“아 네, 근데 잠금장치가.”
“파티션 앞에 문 하나만 설치한 후 자물쇠만 채우면 됩니다. 계약하실지 안 하실지도 모르는데, 그것까지 미리 설치해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
난 가만히 세공예 기구들을 바라보았다. 하기로 마음먹었고, 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못 할 리가 없다.
일단은…….
“사장님, 저희가 임대하는 동안 바깥에서 직원들 일하는 모습 좀 보는 건 괜찮죠?”
“네, 공개된 장소에서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잠금장치 된 곳은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그곳은 저희 보안시설이라.”
“네.”
그리고 난 중요한 걸 대뜸 채 사장에게 물었다.
“귀금속으로 가장 돈 될만한 게 뭡니까?”
“네? 글쎄요…… 너무 거시적인 질문이시라.”
채 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반 시장원리와 똑같습니다. 간단하고 작은 걸 많이 만들어서 박리다매하던지. 아니면 고가의 보석을 세공하여 한 방에 큰 매출을 얻던지요.”
“…….”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자금력이 필요하고, 리스크도 꽤 따르겠죠?”
자금력과 리스크라.
난 지금 박리다매할 여건이 안 된다. 그만한 일꾼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럴 시간도 없다.
양으로 승부 했던 건 ‘신의 학’으로 충분하다.
“자금력이라는 건 재룟값 때문이겠죠? 보석 원석같은…….”
“네, 맞습니다.”
건축을 위해 마련해둔 돈.
그 돈을 불려야 한다.
“14억이면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보석 하나에요?”
“네.”
채 사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