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141화 (141/156)

이상 혹은 꿈 (1)

* * *

변 이사는 꼼지락거리는 내 손을 바라봤다.

“안돼. 안돼.”

내 마음을 눈치챈 변 이사는 날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박 사장은 그런 우리를 보다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난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했다.

‘손으로 표현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일단 말로 한번 해보자.’

내가 가만히 있자, 박 사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맘에 드는 게 없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머릿속에 이미지는 그려져 있다.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선 컨셉을 말하는 게 좋겠다.

“우선 보육원부터 이야기 할까요?”

“네, 그러시죠.”

“저는 내실을 중시합니다. 외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외부에서 봤을 때 투박해 보이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게 저는 좋습니다.”

“흠…….”

“디자인은 기술적인 부분에 최대한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외관이 어떤 모양이든 채광이 가장 좋은 형태면 되고요. 그 외에는 딱히 바라는 거 없습니다. 음…… 하나 더 추가하자면 건물 관리하기 좋은 심플함?”

박 사장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4번 모형이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유사해 보이는데, 어떠신가요?”

4번 모형을 보았다.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아주 투박한 외관.

주변 풍경에 묻힐 것 같았다.

“그렇네요. 4번 모형이 제가 원하는 디자인에 가장 유사하네요.”

공교롭게도 건물 모양은 정육면체.

내 활동명 ‘네모의 신’. 팬클럽 이름 ‘네모천국’.

네모는 나에게 운명인 건가.

4번 모형이 내 눈길을 끄는 것도 어쩌면 네모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박 사장이 말했다.

“네, 모양은 투박하지만 공간은 이 디자인이 제일 잘 나옵니다. 층수를 높게 설계하지 않아도 되고요.”

“좋네요.”

박 사장과 대화해가며 결정을 하니, 훨씬 수월했다.

심상만 있고, 정리되지 않았던 그림을 그가 잘 끄집어내어 주었다.

“자, 그럼 내부 모형 보실까요?”

박 사장의 말에 그의 아들 박서문은 커다란 모형을 밖에서 들고 왔다.

나와 변 이사는 좀 놀랐다.

5일간 내부 모형까지 준비했다고?

“와~ 박 사장. 손 진짜 빠르네?”

변 이사의 말에 박 사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아닙니다. 내부 모형은 일부만 준비했어요. 그 5일 안에 10개 다는 못 만들죠.”

“오호~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선택할 만한 모델만 내부 모형을 준비했다는 건가?”

“하하. 네. 변 이사님이 평소에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느낌 아니까요.”

“이야~ 박 사장 수완 좋네.”

변 이사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우리 식당에 왔다 갔다 할 때는 그냥 이마가 넓은 마음씨 좋은 아저씨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같이 일을 해보니…… 많이 달라 보인다.

“보시면, 우선 큰 공간 하나와 자잘한 공간들로 구성을 했는데.”

박 사장은 건축은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이 파티션은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니까요. 우선 보육원에 필요한 공간을 말씀하시면 그에 맞춰서 구성을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보육원의 핵심 공간은 박 사장이 가져온 모형안에 구현이 되어 있었다.

사전 조사를 한 모양이다.

컨셉과 필요한 부분만 잡아주면 될 것 같았다.

“박 사장님께서 알아서 잘하실 것 같아서, 머릿속에 있는 걸 두서없이 얘기할 테니, 일단 한번 들어봐 주세요.”

박 사장은 수첩을 꺼내었고, 박서문은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렸다.

‘최고급, 최신식. 시험 쳐서 들어오고 싶은 보육원.’

“제가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

“몇십 년이 지나도 좋다고 느껴질 건물을 지어주시면 됩니다.”

“최고급, 최신식이라…….”

박 사장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내게 물었다.

“내부 자재는 좋은 거로 저희가 알아서 쓰면 되는데요. 어떤 구성까지 들어가는 걸 원하실까요? 좀 어렵게 느껴지네요. 허허. 저희 기준에는 높은 수준으로 구성했는데, 강 사장님께는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음…….

아무래도 예시를 좀 드는 게 낫겠다.

“그럼 제가 상상하고 바라는 걸 말해볼게요. 들어보시고 이 정도 수준이면 된다~ 이렇게 봐주시면 됩니다.”

“네, 편하게 말씀 주세요.”

* * *

강태평은 ‘교육’부터 얘기했다.

“우선 교육 관련하여 말씀드리자면요. 보육원 내에 도서관, 열람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독서실을 등록해서 다닐 정도로 개인 용돈이 넉넉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시청각실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방과 후 원어민 교육 같은 걸 만들어 줄까 하거든요. 요즘 제2외국어는 기본이잖아요.”

“도서관, 열람실, 시청각실…….”

박 사장은 수첩에 적으며 중얼거렸고, 강태평은 말을 덧붙였다.

“그건 예시로 든 거고, 그 정도 수준 이상으로 교육시설이 충분히 갖춰지길 바라는 겁니다. 보육원 내에서 모든 교육이 가능하도록요.”

“네, 이해했습니다.”

강태평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다음 ‘건강’ 부분인데요. 헬스장, 탁구장, 테니스장, 농구장, 수영장…….”

강태평을 보는 변 이사의 눈이 기괴할 정도로 커졌다.

“축구장…… 아. 이건 공간이 안 나오려나요?”

“네, 축구장은 어렵지만 풋살장 정도는 가능하겠네요. 다목적 운동 공간을 만들어서 테니스장, 풋살장, 배드민턴장 등 상황에 맞게 용도변경이 가능하도록 하면 되니까요.”

“아하, 네. 하지만 운동 공간이 부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여러 용도로 활용 가능한 운동장이라면 2~3개 정도는 있어야겠네요.”

“알겠습니다.”

박 사장의 얼굴이 살짝 피곤해졌다.

“또 있습니까?”

“아, 네.”

강태평은 막상 떠올렸던 구상을 말하기 시작하니, 술술 나왔다.

“식당은 뷔페식이 좋겠어요. 유기농 식단을 만들 생각이거든요. 아이들이 좋은 것만 먹고 자랄 수 있게요.”

결국, 듣다 못한 변 이사가 끼어들었다.

“강 사장님, 뭐 호텔 만들려는 거야? 아니…… 정도껏.”

하지만, 강태평은 그의 말을 막았다.

“잠깐만요. 저 얘기 중이잖아요. 다 듣고 말씀하시면 안 돼요?”

변 이사는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강태평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침실은 2인 1실이면 될 거 같고요. 각자 책상과 1층 침대 두 개 정도는 들어가면 될 거 같아요. 부대시설을 빵빵하게 할 거니까, 침실에 더 많은 건 필요 없겠죠? 아! 아이들 허리 중요하니까요. 침대는 좋은 거 써주시고, 의자는 인체공학적으로 좋은 거로 쓰면 좋겠어요.”

박 사장은 열심히 받아 적는데, 이마에 땀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투리 공간 좀 있겠죠?”

“네, 있기는 한데 주차장도 고려를 해야 해서…….”

“아, 그 얘기 깜빡했네. 주차장은 지하로 넣어주세요. 아이들 위험하지 않도록요.”

변 이사는 이제 입술을 덜덜 떨었다.

‘태평이가 왜 이러지? 예산 생각 없이 이렇게 막무가내인 친구가 아닌데? 설마 진심인가?’

그런데 강태평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미소 짓는 표정 어딘가에 약간 그늘져 보이기도 했지만.

“그럼 짜투리 공간 나올 테니, 텃밭 만들어 주시고요. 보육원 주변에 산책로 조성해주세요.”

“…….”

“그냥 흙길은 비 오고 나면 질척거려서 걷기가 어렵더라고요.”

“아…… 네 그렇죠.”

박 사장의 펜과 박서문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잠시 후.

“혹시…… 또 있으십니까?”

강태평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대충 생각나는 건 다 말씀드렸는데…… 뭐 이 정도로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이제야 변 이사가 입을 열었다.

“강 사장님, 다 끝난 거지? 나 이제 얘기해도 되지?”

“네.”

“방금 얘기한 것들 진심이야? 이분들 오해하실 수 있으니까. 정리를 해줘야 할 것 같아.”

강태평은 물끄러미 변 이사를 바라봤다.

“진심인데요?”

“미쳤어? 우리 예산 알잖아? 어쩌려고 그래? 마음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니야.”

“…….”

“그리고 무슨 보육원을 그렇게 좋게 만들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이 말에 강태평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왜요? 보육원은 좋으면 안 돼요?”

변 이사는 생각지 못한 강태평의 공격적인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으응?!”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은 꼭 부족하게 자라야 하나요? 풍족하게 살면 안 되는 거예요?”

“아…… 강 사장. 내 말은 그런 뜻이…….”

강태평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부르게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자랄수록 느는 건 눈칫밥뿐이고. 가정의 아이들과 달리 시설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립을 강요받는 생활을 한다고요. 어린아이는 자립심이 약할 수밖에 없는데, 자립을 강요받는 상황. 그 괴리감 속에서 계속 불평불만이 커진다고요. 그게 결국엔 제한된 자원 때문인 건데.”

“…….”

“부모의 사랑을 못 받으니, 더 풍족하게 지내야죠. 아이들이 원해서 보육원에 온 게 아니잖아요.”

말하고 있는 강태평의 눈두덩이 떨렸고, 눈가도 살짝 촉촉해져 있었다.

변 이사는 그런 강태평을 보며 생각했다.

‘씩씩해 보여도 태평이도 약한 부분이 있구나. 누구나 예민한 부분이 있는 법이지.’

“오해하게 했다면 사과할게.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

휴우―

강태평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예산은 어떻게든 마련합니다. 적어도 제게 속한 보육원은 달랐으면 합니다.”

변 이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보육원 건물에 대한 구상을 다 들은 후, 박 사장이 내게 물었다.

“그럼 사무실 얘기도 해볼까요? 이것도 왠지 제 마음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하하.”

그의 말에 나와 변 이사는 함께 웃었다.

“어째, 제가 좀 까다로운 의뢰자가 된 것 같네요.”

내 말에 박 사장은 웃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까다로운 게 좋아요. 의뢰자 마음속을 헤엄쳐서 니즈를 찾아내는 게 훨씬 더 힘듭니다~”

내가 좀 까다롭지 않았나 싶어서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한시름 놓였다.

“아, 네. 그럼 사무실 얘기도 해볼게요.”

박 사장과 박서문은 다시 받아적을 준비를 했다.

“체육시설과 식당은 보육원 건물을 함께 이용하면 될 것 같고요.”

“흠. 네.”

“공동 사무공간을 넓게 해주시고. 책상은 가로 3미터 정도? 넓은 거로 해주세요. 의자는 인체공학 의자, 노트북은 최신식으로.”

변 이사가 말했다.

“의자며, 책상, 그리고 노트북 같은 건 우리가 따로 구매하면 돼.”

“아. 그렇네요. 하하. 그리고 회의실은 3개면 될 거 같은데…… 더 늘려야 하나? 어때요? 변 이사님?”

변 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3개도 충분해. 우리 직원이 5명이야.”

“직원 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충분해.”

변 이사도 은근히 구두쇠 마인드다. 아무래도 진일상사에서 20년을 근무했으니…….

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층 구분을 해서요. 숙직실도 있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누워서 쉴 수 있고, 야근하다 늦으면 자고 갈 수 있게.”

박 사장은 적으며 물었다.

“넓게 만드는 게 좋겠죠?”

“네. 안마의자도 하나씩 넣어주시고.”

변 이사가 말했다.

“그런 건 우리가 사면 된다니까.”

난 씩 웃었다.

박 사장은 다 적은 후 물었다.

“그 정도면 됩니까? 보육원보다는 좀 심플 하네요.”

“아, 한 가지 더 있어요.”

‘퇴근하기 싫은 사무실.’

내가 추구하는 사무실 환경이다.

그를 위한 오래된 내 꿈이 있었다.

글로벌 회사에는 냉장고에 맥주를 비치해 놓는다고? 적어도 ‘사랑산성’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뛰어넘고 싶다.

“PC방이랑 바(bar)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사람은 황당한 얼굴로 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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