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132화 (132/156)

영감을 찾아서 (2)

* * *

휘이잉―

스산한 바람이 분다.

금세 주변은 어두워졌다.

북녘 땅은 불빛 하나 없어서, 더 빨리 어두워지는 것 같다.

열쇠 전망대.

이곳에서 난 영감을 주제로 변 이사와 통화 중이다.

그의 말이 황당했다.

‘뭐? 차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건 어렵겠냐고?’

[변 이사님, 제가 신은 아니잖아요.]

[왜~ 자기 네모의신이잖아.]

[농담하지 마시고요.]

[하하.]

변 이사는 마른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래. 말도 안 되지. 근데 왜 자네는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까.]

[…….]

[어쨌든, 복잡하고 어려운 거 주제로 잡아서 열심히 만들어 봐. ‘와~ 너무 예술적이야.’ 이런 느낌보다는. ‘와~ 어떻게 이런 걸 종이로 접었지?’ 이런 반응을 생각하란 말이야.]

[…….]

[자동차는 예시로 든 거고, 그 외 무엇이든.]

난 잠시 생각해 봤다.

내 차를 모델로 한다?

근데 류진(龍神)같은 복잡한 작품도 있는데, 차를 접는 건 너무 심플하지 않을까?

그닥 뭐 특별하게 보일 것 같진 않은데.

변 이사는 이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난 붙잡았다.

[차 종이 모형을 보면 특별해 보일 것 같으세요?]

[글쎄……. 그냥 모형이라면 눈에 안 들어올 것 같긴 한데.]

변 이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엉뚱한 상상을 해 볼게. 자기는 네모의신이니까.]

[네,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진짜 차 같다면, 많이 놀랍겠지.]

[진짜 차?]

[그래. 진짜 차처럼 내부 기관도 동일하고, 스스로의 동력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또 그 소리예요?]

이번엔 변 이사가 목소리를 진중하게 하고 말했다.

[자기 능력에 제한을 두지 말라니까.]

[…….]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을 해왔잖아.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번 고민해봐.]

흠…….

[여튼 이제 내 휴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전화 끊어~ 이거 못 된 상사 아니야? 주말에 전화해서 일 얘기하고 말이야.]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근데 상사는요~ 무슨.]

[자긴 사장이고, 난 이사인데. 그럼 내 상사지 뭐야.]

훗.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하기도 뭐해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늦게까지 있지 말고. 어서 들어가. 돌아갈 때 지뢰 조심하고.]

[에이~ 그런 무서운 말을.]

[끊는다~]

뚝.

전화를 끊은 뒤. 북녘땅을 한번 바라봤다.

영감 안 나온다고 휴전선 넘어 달릴 수는 없는 거고.

이제 돌아가야지.

* * *

‘능력에 제한을 두지 말라니까.’

운전하는 내내 변 이사의 이 말이 생각났다.

아니 어떻게 종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해.

움직이려면 엔진이 있어야 하잖아.

‘오리가미’ 전통 방식으로 하려면, 접착이나 분할을 해서는 안 되는데.

종이로 접은 자동차 안에 소형 엔진을 장착시켜?

그래서 건전지 넣어서 움직일 수 있게?

아니야.

그냥 플라스틱 자동차 모형에서 플라스틱이 종이로 바뀌는 것뿐이잖아.

모터를 넣어야 하니, 그건 기계의 힘으로 달리는 거고.

그게 무슨 특별할 게 있겠어?

그 정도는 네모삼촌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집에 도착했다.

영감을 얻기 위한 여행은 실패했다.

하지만 한 가지 얻은 게 있다면, 실마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머리에 뭔가 꽂혀 들어가니, 계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모형이 아닌 진짜 자동차(自動車)’

자동차라는 의미 자체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거 아닌가.

방바닥에 누워서도 계속 생각했다.

종이로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게 있을까?

종이로 톱니바퀴 모양을 만든 후, 페달을 연결하여 손으로 돌린다면?

그건 손으로 미는 거나 마찬가지지. 손이 안 닿으면 못 움직이는 거고.

그럼 뒤로 쭉 땅겨서 테이프 감기는 힘으로 앞으로 튀어 나가는 형태? 장난감처럼?

아…… 그건 좀 없어 보인다.

“젠장. TV나 보자.”

한참을 고민했지만.

어차피 되도 안 되는 걸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변 이사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들어서는…….

어떻게 종이로 만든 차가 스스로 움직이게 해. 말이 되나.

방바닥에 껌 하나가 굴러다니길래, 입에 집어넣고 껌 종이는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머리를 하도 썼더니 만사가 귀찮다.

탁! 탁!

“리모컨이 왜 이래?”

리모컨이 말을 안 듣는다.

배터리가 부족한가?

아, 하필 왜 이 타이밍에…… 사러 나가기 귀찮은데.

“위치를 바꾸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깐.”

난 리모컨 건전지 덮개를 열고, 건전지를 빼내려 했다.

잘 안 빠져서, 손을 몇 번 쳤다

탁!

또르르.

건전지가 빠졌고.

바닥을 구르다가, 우연찮게 은색 껌 종이에 닿았다.

화르륵~

.

.

.

.

갑자기 껌 종이에서 연기가 났다!

“뭐, 뭐야!”

난 깜짝 놀라서, 건전지를 뗐는데.

건전지가 닿았던 은색 종이에 연한 그을음이 남았다.

“왜 이러지?”

난 순간 놀랐지만, 무언가 머리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꿀꺽.

난 다시 건전지를 껌 종이에 대어 보았다.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와 ―극이 교차로 하여 붙이자, 다시 연기가 났다.

“우와…… 대박.”

정말 놀랐다. 전혀 생각 못 했었다. 종이에도 전기가 흐를 수 있는 거잖아?!

* * *

월요일. 사랑산성.

주말 내내 재료에 대한 고민을 했다.

종이에 전류만 흐를 수 있다면, 그리고 종이 모형 속에 소형 건전지를 넣도록 장치한다면…….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도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엔진도 종이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가지 전제하에 가능하다.

재료.

전기가 흐르며, 잘 접히며, 강도도 어느 정도 있는 종이라면…….

아무리 복잡한 종이접기라도 난 자신 있으니까.

“강 사장님~ 어떻게? ‘영감’ 좀 떠올랐어?”

“…….”

변 이사는 ‘영감’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놀리는 거였다.

“칫. 몰라요. 토지 비딩 결과는 나왔어요?”

“지금 접수 받고 있어. 오늘 자정까지야. 마감일을 날짜로 지정했잖아.”

“그럼 내일 오전이면 결정 나겠네요?”

“그렇지.”

오후 3시. 점심 영업 마무리 정리까지 끝났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어디 가는데?”

“비밀입니다~”

자세히 물어보기 전에, 난 홀로 나섰다.

이상하게도 작품 준비하는 것만큼은 아무에게도 알리기 싫다.

완성된 다음에 보여주고 싶다.

경기도 광주의 한 사무소.

‘만물 종이’

인터넷으로 수소문하여 겨우 찾았다.

전기가 흐르는 종이를 ‘전도성 종이’라고 하는데.

그 전도성 종이로 가장 적절해 보이는 게 ‘흑연 종이’였다.

흑연 종이를 인터넷 판매를 하는 공장을 찾았다.

가격대는 좀 있던데, 그래봐야 몇십만 원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게는 가격보다는 퀄리티가 중요하다.

똑똑.

사무실 문을 두들긴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사무실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중 현관문에 가까운 쪽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누구십니까?”

“종이 구매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종이 구매요? 우리는 인터넷 판매만 하는데?”

“하하. 인터넷 판매하시면 현장 판매도 가능한 거잖아요. 어차피 파시려고 만드시는 거니까.”

“헛.”

이 말에 남자는 말문이 막혔고.

사무실 안쪽. 가로로 놓인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 누가 봐도 사장님 같아 보이는 분이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뭐가 필요하셔서 그러십니까?”

“네, 전도성 종이가 필요한데. 흑연 종이가 여기 종류가 많다고 해서 왔습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앉으시죠. 김 대리. 가서 흑연 종이 종류별로 갖고 와.”

“네, 사장님.”

잠시 후, 김 대리는 흑연 종이 여러 장을 가져왔다. 대략 십여 장 정도.

“보시죠.”

난 소파 가운데에 앉아서, 흑연 종이들을 살폈다.

두께감이 있는 거는 구부리는 강도가 너무 강하고.

잘 접히는 건 너무 흐늘거렸다.

어떤 종이는 손에 검은 게 묻어나기도 했다.

운용지처럼 얇으면서도 잘 접히는 게 좋은데.

“이것밖에 없습니까?”

“어디에 쓰시려고요?”

“종…….”

종이접기라고 말하려다가, 안 좋은 선입견을 가질 것 같아서 바꿔 말했다.

“미술 공예품 만드는데 사용할 겁니다. 잘 접히고, 전기가 잘 흐르는 재질이 필요해요. 두께감도 살짝 있으면 좋고요.”

“네. 흑연 종이니까, 전기는 다 잘 흐르고요.”

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가격 좀 나가도 됩니까?”

“네.”

난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 대리를 불렀다.

“김 대리. 일본 수출 건으로 제작한 거 있지? 그거 좀 가져와 봐.”

“그거 몇 장 안 되는데.”

“또 만들면 되잖아. 직접 구매하시려고 이렇게 발품 파시는데, 도와드려야지.”

잠시 후, 김 대리는 종이를 가져왔다.

“TCG―34라는 흑연 종이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얼마 전에 특허 냈고.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오…….”

아까 가져온 흑연 종이들보다 좀 더 밝은 검은색이었는데.

이 종이로 자동차를 만들면, 길에서 본 무광택 슈퍼카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접히는 느낌도 좋고, 두께감도 살짝 있네요……. 아주 잘 접히겠어요.”

종이 재질에 매료된 나는 만지면서 중얼거렸고.

자꾸 접힌다는 말에 김 대리는 날 이상하게 바라봤다.

“이걸로 사겠습니다. 얼마입니까?”

김 대리는 사장을 바라봤고.

사장이 대신 대답했다.

“한 장에 10만 원입니다.”

말을 뱉고 나서, 사장은 내 눈치를 보고 말했다.

“일본에 수출하는 가격 그대로 말씀 드린 겁니다.”

“네. 10장 주세요. 계좌 이체로 해드릴까요?”

지금 내 눈에는 한 장에 10만 원도 싸다.

그저 빨리 접고 싶을 뿐이다.

* * *

다음날.

어젯밤에 내 차 모양을 기준으로 자동차의 뼈대 정도만 접었다.

막상 손이 가니, 멈추기 힘들었지만, 지난번에 작품 했던 것처럼 밤새 만들며 무리하지 않으려 한다.

대중에 공개되는 소형 엔진 설계도를 어제 인터넷에서 구해놨고.

오늘 밤에는 엔진 및 내부구조를 만들 생각이다.

취미로 시작했던 종이접기.

지금까지 해봤던 것 중에는 제일 재밌는 것 같다.

일단 시작하면 몰입이 되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오늘 사랑산성으로 운전해오면서도 내내 엔진 설계도만 생각했다.

10시에 도착했다.

어제 난 집에서 분명히 야근한 것이므로 당당하게 사랑산성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오 대리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 오 대리.”

“피곤해 보이시네요?”

“응~ 어제 늦게까지 일했더니.”

“그렇죠? 어쩐지 좀 늦으셔서 이상하다 싶었어요.”

난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인사치레로 물었다.

“뭐 별일 없지?”

“별일이요?”

오 대리는 날 골똘히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뭘?”

“별일 있는지? 평소에는 그런 거 안 물어보시잖아요.”

“…….”

뭘 어떻게 알어. 그냥 늦게 왔으니까, 민망해서 물어본 건데.

“별일이 있다는 거야?”

“5번룸 가보세요. 손님들 와 계세요.”

“누구?”

“강남 옥션에서 왔다고 하던데요.”

강남 옥션? 영웅 옥션이 아니고, 강남 옥션?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지?

거래 해본 적도 없는데.

“그리고 얼굴 익숙한 분이 함께 오셨더라고요.”

“누구?”

“김석봉 수석이라고 기억하세요? 시가감정협회에…….”

김석봉 수석?

기억이 날 듯 말 듯…….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오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19억 작품을 5,000만 원에 감정하셨던 분 있잖아요~”

아…… 이제야 기억난다.

버스는 떠났다

* * *

“그분들이 왜?”

기억은 나지만, 만날 이유가 없다. 약속을 했던 것도 아니고.

“글쎄요. 다짜고짜 찾아왔는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내칠 수는 없잖아요.”

“…….”

“대략 뭐 때문에 왔을지는 짐작은 되는데. 그쵸?”

하필 타이밍도…….

어제 종이 접느라 잘 못 자서 피곤도 하고, 점심 장사 준비로 한창 바쁠 시간에…….

“5번 룸이라고?”

“네.”

빨리 얘기 듣고 보내야지.

날 오 대리를 향해 물었다.

“같이 갈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상어 지느러미 손질 해야 되서 바빠요. 사장님 빈자리 메꾸고 있을 테니, 갔다 오세요.”

처음 사랑산성 왔을 때만 해도 앤더슨 오는 생선 손질 못 한다고 했었는데.

이제 이 친구도 주방 전문가가 다 됐다.

5번 룸.

덜컹.

두 남자가 타원형 소파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날 보더니, 두 사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익숙한 얼굴이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아, 네 안녕하세요.”

머리가 새하얀 50대 중반의 남자.

난 감정평가사 김석봉 수석의 내민 손을 잡았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하하.”

사람 좋은 미소.

하지만 아주 정제되어 있는 가식적인 미소.

솔직히 이 사람 만나는 게 달갑지 않다.

“제 고객이신데, 오랜만에 강 사장님께 인사도 드리고요. 소개시켜드릴 분도 있어서~ 하하.”

은글슬쩍 말하는 그의 말이 거슬렸다.

“고객이요?”

반문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하하!”

김 수석은 큰 웃음으로 어색함을 숨기며 말했다.

“저희에게 의뢰하셨었고, 수수료도 지불 하셨었잖아요.”

“…….”

와…… 이렇게 뻔뻔할 수가.

결과는 쏙 빼고, 기억하고 싶은 사실만 말하네.

김 수석은 앞뒤가 안 맞는 감정평가를 했었고, 우리는 그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감정의뢰를 취소했다.

그래도 그들의 인력이 사용된 부분이 있으니, 수수료는 지급을 했었다.

주고 싶지 않았지만, 괜히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준 수수료였다.

그것도 거래를 한 걸로 되는 건가?

“하하…… 참 논리가 신선하네요.”

김 수석.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뻔뻔함은 최강이다.

뻔뻔함으로 치면 변 이사도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아쉽지만, 김 수석이 한 수 위인 거 같다.

“하하. 옆에 계신 분 소개 드립니다. 강남 옥션의 차종수 본부장님입니다.”

멀끔한 정장 차림에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넘겼다. 사십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차종수입니다.”

그는 내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명함을 내밀었다.

나도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건네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강태평입니다.”

“네, 강 사장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네모튜브 잘 보고 있습니다.”

그는 네모의 신을 알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어필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제가 신의 학을 보고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

하필 신의 학을…… 차라리 말을 말지. ‘신의 학’ 단어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1년 전에 제가 신의 학을…….”

그는 눈치 없이 계속 신의 학 얘기를 했고, 난 좀 들어주다가 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근데 본부장님께서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아 네. 그게.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그러더니 본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다시 일어나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강 사장님을 몰라뵈고…… 위탁 심의를 그만…….”

난 강남 옥션, 영웅 옥션 두 곳에 위탁 심의 메일을 보냈었고.

강남옥션은 메일을 그냥 씹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아니라 네모의 신을 몰라보셨던 거겠죠.”

“…….”

“작가 네임이 중요하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국내 1위 옥션 업체인데, 아쉬울 거 없으셨겠죠. 듣보잡 강태평 작가의 작품보다는 확실한 것을 진행하는 게 회사 입장에서 나았겠죠.”

“에이~ 듣보잡이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하하.”

차 본부장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난 웃지 않았다.

웃긴 상황도 아니었고, 별로 웃고 싶지 않았다.

“어서 용건 말씀해 주시죠. 스테이크 구우러 가야 해요.”

차 본부장은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김 수석과 눈을 마주치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혹시 종이 공예 작품을 또 하시겠죠?”

“뭐…… 아마 그렇겠죠?”

“다음엔 저희와 진행해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역시…… 이 속셈이었군.

“아시다시피, 강남 옥션은 국내 1위의 미술품 경매회사입니다. 저희만 이용하는 주거래 고객 중에 큰손이 많습니다. 영웅 옥션에서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가격에 낙찰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

난 피식 웃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반응을 잠자코 기다리던 차 본부장은 요청하지도 않은 걸 제시했다.

“위탁수수료 10% 하셨겠죠? 저희는 5%만 받겠습니다.”

“…….”

“가장 좋은 존을 작품 위치할 것을 약속드리며, 낙찰 15억 이상을 보장해 드립니다. 만약 그 금액 이하로 낙찰되더라도 저희가 15억 보전해 드릴 겁니다.”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난 그의 제안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고.

차 본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확신이 있으니까요. 저희는 대작가님께 걸맞은 대우를 확실하게 해드립니다.”

제안이 너무 파격적이라, 도리어 거부감이 든다.

듣보잡은 거들 떠도 안 보고, 대작가에게는 간, 쓸개 다 내어주고?

세상 이치가 그렇기야 하겠지만, 난 영 맘에 안 들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차 본부장은 김 수석에게 눈치를 보내었고.

김 수석은 웃으며 말했다.

“강 사장님~ 여러 생각 마시고, 현재와 미래만 보십시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허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얼굴 두께가 20cm 철연합금수준이다.

극강의 뻔뻔함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설마 이런 설득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나?

“1위는 1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거래해 보시면 아시게 될 거예요.”

나의 실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 수석은 말을 이어갔다.

문득 난 궁금하여 물었다.

“김 수석님은 강남 옥션과 무슨 관계시기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십니까?”

“지금은 없고요~ 앞으로 생길 예정입니다.”

“앞으로요?”

“네, 강남 옥션 고문으로 일하게 될 것 같아서요. 제가 거기 있으면서 더 잘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김 수석과 차 본부장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래서…… 같이 온 거구나.

흠…… 대화는 여기까지.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맘에 안 드는 사람 밥그릇까지 신경 써줄 여유는 없다.

나에겐 일 잘하는 영웅 옥션의 이정수 팀장이 있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그와 일하고 싶다.

그리고 수수료 10%에서 5% 줄이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작품 가격은 10억대가 넘는데.

“얘기 잘 들었습니다. 이만 가주시죠.”

차 본부장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다음 작품은 저희와.”

눈치가 없는 건지, 없는 척하는 건지.

확실하게 얘기해줘야 하나?

“안 합니다.”

“네?”

“관심 없습니다.”

너무 돌직구였나? 차 본부장은 당황한 눈치였고.

김 수석은 오늘은 아니라 싶었는지, 급하게 마무리 지었다.

“하하. 오늘 좀 갑작스러웠죠? 천천히 생각해 보시죠. 오늘은 답 들으러 온 게 아니니까요.”

명확하게 대답을 해줬음에도 못 들은 척하는 이 뻔뻔함.

“아, 저희 온 김에 여기서 점심 식사 하고 가고 싶은데. 그래도 되죠? 제일 비싼 거로 먹고 가겠습니다! 하하.”

김 수석은 생색내는 말투로 말했다.

어차피 메뉴는 가장 비싼 거 한 가지밖에 없는데.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왔구만.

“그거야 뭐.”

“하하. 네.”

난 문을 열며 말했다.

“일단 나가주시죠. 아직 오픈 전이니까요. 나가서 줄 서시면 됩니다.”

“…….”

“줄이 꽤 길 거예요.”

두 남자는 쭈뼛쭈뼛 일어나서, 5번 룸을 나갔다.

* * *

오전을 정신없이 보냈다.

두 남자와 미팅을 30분 정도 했는데, 영업 준비로 오전 시간은 항상 바쁘다. 그 정도 시간 쓰는 걸로도 영향이 적지 않았다.

오후 3시.

100미터 달리기하듯 일했고, 숨이 다 찬다.

마무리하고 3번룸 내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변 이사가 문을 두들겼다.

“강 사장님?”

“네.”

“잠깐 4번 룸으로 와.”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

변 이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몇 번을 물어보더니. 보육원 토지 입찰 결과 안 궁금해?”

“아~”

“어서 와. 보고하게. 직원들 다 기다리고 있어.”

“네.”

숨 돌린 틈도 없구나.

4번 룸.

직원들은 타원형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고.

최경리는 화이트 보드 앞에 서 있었다.

화이트보드 앞에 놓인 노래방 기기 위에 봉투 여러 장이 놓여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자마자 최경리가 입을 열었다.

“다 모이셨습니까. 보육원 토지 매각 건으로 비딩 진행을 했고요. 입찰 결과 지금 발표하겠습니다.”

칼 같은 눈매로 직원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우편으로 입찰받았고요. 받은 우편 내역은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 가시는 분은 우체국 가서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

“공개된 장소에서 봉투를 개봉하기 위해,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동봉된 그대로이며, 의심 가시는 분은 찢거나 붙인 자국이 있는지 다시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난 변 이사 옆에서 물었다.

“다시 확인이요?”

“이미 직원들이 다 강제로 돌아가면서 한 번씩 확인했어.”

이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몰라. 그렇게 해야 한대. 자기는 의심받기 싫다며.”

“아니, 누가 의심을 한다고…….”

“몰라. 괜히 최경리 지목했어. 숨이 막혀. 숨이.”

최경리는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상 없으시죠? 이의 없으시죠?”

“…….”

“없으신 걸로 알고 개봉하겠습니다.”

최경리는 변 이사를 바라봤다.

“제가 부를 테니 나와서 좀 적어주실래요?”

“나?”

“이사님이 담당이시잖아요.”

“흠.”

변 이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가서 펜을 쥐고 기다렸다.

“성함과 금액만 부르겠습니다.”

“알았어.”

최경리는 첫 번째 봉투를 개봉했다.

“이갑순 21억.”

“김모을 20억 5천만 원”

“정겨울 21억 1천만 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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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가 20억으로 제안해서일까.

대부분 20~21억 근처였다.

예상했던 거였고, 그 수준에 맞춰서 자금 계획을 잡았다.

“강수영 23억.”

오~

생각했던 범위를 벗어나는 가격에 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근데, 이건 시작이었다.

“고진수 25억”

“…….”

보육원 땅이 금싸라기 땅도 아니고.

25억이면, 평당 1,250만 원인데.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매매계약한 수서동 땅과도 큰 차이 안 난다. 그냥 변두리 땅을 도대체 왜…….

“마지막입니다. 곽주단 25억 5천만 원.”

변 이사는 곽주단과 고진수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 두 분과 미팅 후에, 어느 분과 계약체결 할지 결정하도록 할게.”

“…….”

막상 거래 가격을 들으니, 난 놀라서 자빠질 지경인데.

직원들은 덤덤해 보였다. 큰 금액으로 거래했다는 건 알지만, 이 땅이 원래 가치를 정확히 모르니.

예전에 흘리듯 말한 적이 있긴 하지만, 기억 못 할 것이다.

변 이사가 화이트보드를 치우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오 대리는 살며시 손을 들고 물었다.

“그 땅이 원래 얼마라고 하셨었죠?”

“지금 최고가가 25억 5천만 원이지? 음…….”

변 이사는 내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돌려서 말했다.

“강 사장님이 2년 전에 그 가격보다 22억 5천만 원 싸게 샀었어.”

“아~ 그렇군…… 네? 네?!”

오 대리와 김지안은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우왓~! 말이 돼?!”

어떤 면접

* * *

특히, 김지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놀랐다.

손까지 떨 정도였는데.

“아니, 사장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예측하신 거예요? 말도 안 돼……. 22억 5천만 원 차익이라니.”

“아…… 그게.”

“2년 전에 3억에 샀다는 거잖아요.”

“뭐, 그렇지.”

“대박! 저도 좀 알려주세요! 저 돈 모아야 해요~”

김지안은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어릴 적부터 험한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꿋꿋이 노력하여 명문대학을 입학했고, 지금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다.

“저~ 사장님이 성과금 많이 주신 거 안 쓰고 그대로 모아두고 있거든요. 재테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뭘 알아야 하죠.”

오 대리도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요~ 사장님. 노하우 좀 가르쳐 주세요. 함께 잘 살면 좋잖아요~”

당혹스럽다.

당시에는 기존 땅 주인이 보육원 땅을 팔아버리려 해서, 보육원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산 거였다.

나 역시도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고, 어쩌다 보니 얻어걸린 거지.

내막을 알고 있는 변 이사는 옆에서 그저 웃을 뿐이었다.

“흠. 그냥 그 땅을 사야 할 일이 생겼었는데, 어쩌다 보니 오른 거야. 내가 뭐 점쟁이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냥 올랐다~ 이거예요?”

“에이~ 사장님 너무 한다.”

내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오 대리와 김지안은 입을 삐죽였다.

사실이 그런 걸 어째?

오 대리가 눈치를 보며 슬쩍 말했다.

“그럼 이번 달에도 수익이 엄청나겠는데요? 으흐흐.”

성과급을 기대하는 것 같은데…….

이번엔 좀 다르다.

실망시켜서 안타깝긴 하지만, 어쨌든 설명을 하려 했다.

근데, 변 이사가 대신 입을 열었다.

“이번 수익은 전부 ‘사무소 설립’에 투자될 거야. 그리고 보육원 부지 매입은 ‘사랑산성’이 설립되기 전에 강태평 사장님 개인이 한 일이야. 그걸 회사 수익으로 기대하는 건 도둑놈 심보지.”

“에이~ 그렇다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농담 아니야. 새겨들어.”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변 이사는 정색하고 말했다.

오 대리에게서 어떤 눈빛을 봤고, 사전에 경계하려는 듯싶었다.

“우리는 회사 주인이 아니며, 내 모든 걸 바쳐서 일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무전취식 손님처럼 있어서는 안 돼.”

“…….”

“가만히 있다가 숟가락 얹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회사는 없어지는 거야. 그러면 그 여파는 곧 개인에게 돌아오게 되겠지.”

오 대리는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변 이사는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회사가 커질 조짐을 보이고 있단 말이야. 여기 네 명은 핵심 멤버잖아. 우리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해.”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변 이사가 날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말이 길었네. 강 사장님.”

“아닙니다.”

‘고맙다’라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 말을 하면 좀 이상할 것 같아서 참았다.

변 이사가 있으니, 참 든든하다.

* * *

다음날 오후 3시.

나와 변 이사, 최경리는 의정부역 앞의 문벅스로 왔다.

오늘 매도후보자 중 입찰 최고가 1, 2위를 만나기로 했다.

“고진수 씨부터 만나기로 했지?”

“네. 5시에 보기로 했습니다.”

지금 시각은 4시 30분.

변 이사가 미팅하기 전에 주지시킬 게 있다고 하여 조금 빨리 도착했다.

“자, 강 사장님. 최경리 잘 들어. 면접을 어떻게 볼 거냐면 일단 공통질문 봐봐.”

#매도후보자 공통질문

1) 비딩 조건 1, 2번 사항 재확인

2) 무슨 일을 하는지?

3) 토지를 어떻게 쓸 건지?

“비딩 첫 번째 조건은 20일 안에 잔금 처리 완료. 두 번째는 등기 이전 후, 6개월간 임대계약 체결하는 거였어. 모두 알고 있지?”

“네.”

“그 조건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지, 이행하는 데 문제없는지 확인하는 거야.”

변 이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말 바뀌는 사람이 있거든. 첫 번째 질문을 통해 이걸 확인하는 거야.”

나와 최경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2번과 3번 질문은 후보자에 대한 신뢰감, 호감도를 판단하기 위해서야.”

최경리가 살짝 손을 들고 물었다.

“땅 파는데, 호감도가 왜 필요해요? 그리고 저런 질문 하는 거 자체가 좀 실례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 신원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려고. 무슨 일하는 사람들이며, 왜 이 땅을 팔려고 하는지.”

“…….”

“그러면 서로 대화하는 거잖아. 그치? 매도자 선정기준 알려줄게. 나머지는 보면 이해될 거야.”

#매도자 선정기준

1) 약속을 잘 이행할 것인가?

2)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는가?

3) 위의 1, 2번 사항 종합하여 세 명이 투표로 결정.

“뭐, 오디션 봐요?”

최경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담당이라서,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강 사장님. 이렇게 하면 안 돼?”

변 이사라면 다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 본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안될 거 없죠. 부동산 프로젝트 책임자는 변 이사님입니다. 문제 되는 거 아니라면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봤지?”

“…….”

변 이사는 최경리와 내게 설명했다.

“내가 자기들 처음에 성과평가 하던 거랑 똑같아. 난 사람에 대한 정량평가는 믿지 않는다구. 사람에 대해 평가한다는 거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보지만, 그래도 굳이 해야 한다면 난 정성평가가 맞다고 봐. 신뢰, 호감, 책임 이런 걸 수치화할 수는 없는 거잖아.”

최경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잠자코 들었다.

“자기 느낌대로 가면 돼. 그래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평가자를 세 명으로 한 거야.”

변 이사다운 일 처리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

변 이사는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10분 남았네. 강 사장님~ 우리 바람 좀 쐬고 올까?”

“네, 그러시죠.”

* * *

5시 정각.

등산모에 뿔테 안경을 쓴 남성이 나타났다.

옷차림은 좀 들어 보이는데, 외모는 사십대 중반 정도로밖에 안 되어 보인다.

“실례합니다. 혹시 사랑산성인가요?”

목소리가 까랑까랑하다.

카페에 우리밖에 없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카페를 찾아왔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고, 변 이사가 그를 응대했다.

“저는 사랑산성의 변성준 이사라고 합니다. 이번 토지매도건 담당자입니다.”

“아, 네. 고진수라고 합니다.”

“앉으시죠.”

고진수는 자리에 앉았고, 최경리도 자기소개를 하며 인사했다.

하지만 난 목례만 할 뿐 소개를 하지 않았다.

공개 석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면, 내 신분은 밝히지 않기로 되어 있다.

고진수도 30대 초반의 내 모습을 보고는 그냥 수행직원이겠거니 하고 더 물어보지 않았다.

“저희는 사랑산성이라는 종합상사를 운영하고 있고요. 레스토랑, 공예…….”

변 이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 토지를 왜 매도하려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고진수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얘기를 들었다.

“좋은 일 하시네요. 보육원 때문에…….”

“하하. 네. 저희 사장님이 좋은 분이시거든요.”

바로 옆에 있는데, 낯 간지럽게 그런 말을…….

“저희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릴 건데요.”

“네, 말씀하세요.”

“저희 비딩 조건 1, 2번 사항 아시죠?”

“네.”

“그 조건을 수용할 수 있을 때, 입찰해달라고 요청드렸는데.”

“알고 있습니다.”

“수용할 수 있다는 거죠?”

“네. 해야죠. 다만…….”

‘다만’이라는 말에 우리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무리 매도우위 상황이라지만, 좀 불공정하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

“뭐, 맘에 안 들면 입찰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특히 어떤 부분이 그렇던가요?”

“임대료 부분이요. 겨우 6개월인데, 월세로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6개월 임대 토지를 전세로 한다? 전 이런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6개월 임대 자체가 잘 없죠.”

“아…….”

변 이사는 허를 찔렸다는 듯, 신음 소리를 냈다.

돈을 늦게 융통하겠다든지, 혹은 임대 기간을 조정하겠다는 요청이 아니었다.

상당히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6개월 임대하면서 차임 없이 보증금으로만 계약한다는 건 좀…….

“흠. 그 부분은 고민해 보겠습니다. 20일 안에 잔금 처리 조건이 있는데, 부담스럽지 않으신가요?”

“약속을 한 건데 지켜야죠. 부담스럽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할 자신이 있어서 입찰했고, 해내야죠.”

고진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혹시 무슨 일을 하시나 여쭤봐도 될까요?”

변 이사의 질문에 고진수는 잠시 망설였다.

“이 질문도 꼭 말씀을 드려야 하나요?”

“그건 자유입니다. 평가에 영향은 가겠죠.”

“…….”

고진수는 주변 눈치를 보다가, 살며시 말했다.

“회사 다닙니다. 사람들이 알만한 큰 회사요. 회사명은 말씀 못 드립니다.”

“네?! 그럼 회사원이세요? 아니, 회사 다니면서 어떻게 이런 자금과 여유를…….”

나도 놀랐다. 회사원이라고? 회사원이 25억 원 토지 거래를 하겠다고?

“혹시 집이 부유하시거나…….”

“하하. 아닙니다. 그냥 입사할 때부터 이런저런 재테크를 하면서 돈을 굴려왔습니다. 처음엔 저축했는데, 아무리 저축하더라도 제자리더라고요. 자산가치들이 너무 빨리 올라서.”

“…….”

와…… 보통 사람이 아니네.

혹시 이 사람도 금손? 금안?

자세히 보았는데, 특별한 부분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럼 이 땅은 어떻게 쓰실 건지…….”

이 질문에는 고진수는 바로 대답했다.

“잘 묵혀놨다가 좋은 값에 팔아야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전 투자자니까요.”

미팅 시작한 지 10분 정도 지났다. 솔직하고 명쾌하게 답을 하니, 더 할 말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곧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진수가 돌아간 후,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두 번째 후보자까지 미팅이 끝나고, 투표 완료하기 전까지는 대화를 나누지 않기로 했었다.

“안녕하세요~ 곽주단이에요.”

25억 5천만 원. 최고가 입찰 1위. 곽주단이 도착했다.

오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는데, 옷이 아주 화려했다.

바지는 빨간색, 윗도리는 노란색, 스카프는 파란색. 원색의 향연이다.

“안녕하세요. 담당자 변성준 이사라고 합니다.”

“어머~ 전화 주셨던 사장님이시구나?”

“이사라니까요.”

곽주단은 대화 내내 변 이사에게 사장이라고 부르며 사근거렸다.

“1, 2번 비딩 조건이요? 당연히 알죠~”

“그거 다 맞추시는데, 문제없습니까?”

“없어요~ 없어~ 다 돼요~”

“…….”

“잔금일 좀 앞당겨 드릴까요? 일단 땅 저한테 주기만 하세요~ 다 맞춰드릴 테니까.”

너무 들이대서 살짝 부담스러웠다.

“6개월 임대에 대해서는…….”

“괜찮아요~ 괜찮아~ 임대료 낮춰드려요?”

너무너무 우호적이다.

좀 전에 만났던 고진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냥 다 ‘OK’다. 계약만 해달란다.

공통질문 1번에 대해서는 더 할 필요가 없었고.

“무슨 일하세요?”

“부동산 해요~”

“중개사무소요?”

“뭐~ 중개사무소도 하고~ 땅 팔고~ 사고~ 대출도 해주고~ 부동산 관련된 건 다 해요~ 호호.”

“아…….”

대화를 들을수록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 땅은 어떻게 쓰실 건가요?”

“…….”

곽주단은 이 말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 굴리는 게 느껴졌다.

“아, 미안해요.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하나 싶어서. 계획이 많거든요.”

“…….”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있어서, 뭐라고 지금 딱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어쨌든 좋은 곳에 쓸 거예요.”

보아하니, 얘기하기 싫은 듯했다.

알맹이 있는 얘기는 별로 안 한 거 같은데, 미팅 시간은 고진수보다 더 오래 걸렸다.

“그럼~ 연락주세요~ 혹시 가격 조정 필요하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시구요~”

후보자들과 미팅이 끝난 후.

변 이사가 말했다.

“바로 투표하자. 종이에 적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돼.”

“알겠습니다.”

입찰가는 곽주단이 25억 5천만 원으로 가장 높았다.

이야길 들어보니, 자금 융통에도 문제는 없어 보인다.

고진수의 입찰가는 25억 원.

그는 명확하면서도 깔끔했지만, 까칠한 느낌도 있었다.

어쨌든 입찰가는 둘이 5천만 원 차이.

“음…….”

난 잠시 고민하다가 종이에 이름을 적고 테이블에 올렸다.

두 사람도 곧 올려놨고.

변 이사는 종이를 걷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발표할게.”

변 이사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종이를 한 장씩 펼쳤다.

그리고 씩 웃더니.

“만장일치네.”

진짜 나를?

* * *

“엇…….”

‘만장일치’라는 말에 나와 최경리는 서로 마주 보았다.

의외네.

나만 다르게 쓰지 않을까 싶었는데.

변 이사도 그렇고, 최경리도 그렇고. 나랑 생각하는 게 비슷하구나.

“고진수 씨.”

변 이사는 투표용지 내용이 보이도록 펼쳤다.

“이걸로 매수자는 결정된 거야.”

“…….”

“모두 이의 없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없습니다.”

“네.”

최경리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 그러면 바로 연락해야겠다. 아직 멀리 안 가셨을 거 같은데, 다시 시간 잡지 말고 바로 오시라고 할게. 괜찮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고진수 씨만 괜찮으시다면요.”

“오케이.”

변 이사는 바로 고진수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아 네. 변 이사입니다. 매수자로 최종 결정되셔서요. 네네. 하하. 아닙니다. 고맙긴요. 조건이 맞아서 그렇게 결정된 건데요.”

난 잠자코 변 이사가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괜찮으시다고? 아~ 네. 20분 정도.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네네~”

뚝.

변 이사는 전화를 끊은 뒤 말했다.

“돌아오시겠데. 이분도 회사원이라서 그런지, 다시 시간 잡기 어렵다고 바로 만나자고 하시네. 20분만 기다려 달래서 알겠다고 했어.”

“네, 잘하셨어요.”

변 이사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오~ 배고프다.”

어느덧 6시가 넘었다.

“우리 나가서 밥 좀 먹고 올까?”

“20분 만에 먹을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변 이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20분이면 충분하지. 천천히 먹어도 10분이면 먹잖아? 가는 길에 전화로 주문하고. 요 앞에 순댓국밥집 있더만.”

그러고 보니 배가 좀 고프긴 했다.

“그러시죠. 20분이면 충분하긴 하죠.”

최경리가 살며시 손을 들고 말했다.

“저기요. 제 생각은 안 하세요? 어떻게 여자가 순댓국을 10분 만에 먹어요.”

“…….”

변 이사는 못 들은 척하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먹을 사람은 따라와~ 내가 쏜다~”

최경리는 콧방귀를 뀌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가야지.”

* * *

순댓국집.

우리 세 사람은 정말 순댓국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었다.

나와 변 이사는 게걸스럽게 편하게 먹었지만.

최경리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소리 없이 강했다.

조신하게 천천히 아주 여성스럽게 먹는데도 졸라 빨랐다.

“아~ 잘 먹었다.”

도리어 5분 정도 갈 시간이 남았다.

변 이사는 이쑤시개를 쑤시며 말했다.

“강 사장님~ 나 솔직히 의외야.”

“네?”

“강 사장님은 곽주단 씨 적을 줄 알았거든. 최경리야 당연히 고진수 씨 적을 줄 예상했지만.”

“하하. 왜요?”

“곽주단 씨가 좀 주책 있어 보이긴 하지만, 거짓말할 사람처럼 보이진 않잖아. 무엇보다도 금액 차이가 5천만 원이나 나니까. 게다가 올려달라고 하면 가격 네고도 해줄 것 같았고.”

“…….”

“우리야 뭐 회사 일이지만, 강 사장님한테는 곧 재산이잖아. 나도 개인적으로 곽주단 씨 같은 스타일은 안 좋아하긴 하지만, 만약 내 돈이라면 5천만 원 차이…… 아~ 고민했을 거 같거든.”

변 이사의 말이 맞다.

1, 2백만 원도 아니고, 5천만 원이었다.

앞에 ‘25억’이 붙어있으니, 5천만 원의 존재감이 작았을 뿐이지. 분명 큰돈이다.

“맞아요. 좀 고민하긴 했는데요.”

“…….”

“그냥, 고진수 씨가 좀 더 신뢰가 갔습니다. 좀 까다로울지는 몰라도, 입 밖에 낸 것은 반드시 지킬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하. 그렇지. 나랑 생각이 비슷하구만. 얼마 전에 사기를 당할 뻔해서 그런가?”

성남시에서 만났던 오리고깃집 사장이 떠올랐다. 그때 김정식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당할 뻔했었다.

나와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베푸는 호의는 반드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 그 일을 통해 확실히 배웠다.

“5천만 원 큰돈이지만, 신뢰할 만한 거래가 더 중요합니다.”

변 이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안 물어봐요?”

최경리가 물음에 변 이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물어봐도 알어. 자기는 말 많은 사람 싫어하잖아.”

“흠…….”

변 이사는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엇, 이제 가야겠네. 시간 다 됐다.”

* * *

카페에 와보니, 고진수가 도착해 있었다.

“엇, 빨리 오셨네요?”

“아, 네. 생각보다 차가 안 막혀서요.”

변 이사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셨으면 연락을 주시지.”

“아직 약속 시간 안 되지 않았습니까.”

고진수를 시계를 본 후,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약간의 행동만 봐도 참 담백한 사람인 것 같다고 느껴졌다.

최경리는 서류철에서 준비된 계약서를 꺼내며 말했다.

“내용 확인해 보시죠. 6개월 임대계약 조건에 대해서는 고진수 씨 말씀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해서요. 그 부분만 공란으로 두었습니다.

지금 변 이사님과 협의하신 후에 내용 수기로 넣으시면 됩니다.”

고진수는 계약서를 쭉 읽어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계약 내용을 바꿔 달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사전에 고지받았던 내용이고, 그걸 알고서 비딩 참여를 했으니 따를게요. 그게 맞는 거죠.”

‘임대 보증금 5억 원’

그리고 고진수는 위 내용을 공란에 수기로 채워 넣었다.

변 이사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임대 조건은 다시 협의해서 바꿔도 됩니다.”

“아니에요. 그대로 가시죠.”

고진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계약서 두 장에 서명한 후 변 이사에게 말했다.

“전 다 했습니다. 서명하시죠.”

변 이사는 내게 펜을 내밀며 말했다.

“사장님, 서명하세요.”

외부 사람 앞이라서, 변 이사는 내게 존칭을 했다.

“아, 네.”

고진수는 의아한 눈길로 나와 변 이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느 분이 사랑산성 사장님이세요?”

변 이사가 설명하려던 걸 막고, 내가 소개했다.

“네, 제가 사장입니다. 강태평이라고 합니다.”

“아…….”

고진수는 눈에 이채를 보이며 물었다.

“사장님이 굉장히 젊으시네요.”

“하하. 네.”

“근데,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다 싶었는데…….”

“…….”

“이 사랑산성이 TV에 나왔던 그 사랑산성이 맞군요?”

그러면서 고진수는 활짝 웃었다. 만났던 내내 무표정했던 사람이다. 웃는 걸 처음 봤다.

“성함 들으니까 확실히 알겠네요. 맞죠? 네모의신님.”

그러면서 고진수는 내게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하하. 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거래하게 되었고, 서명도 해야 하는 데 굳이 숨길 필요 없다.

나도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맞잡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팬입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네모의 신님과 거래를 하게 되다니. 하하!”

고진수는 큰 소리로 웃으며 좋아했다.

그 모습에 변 이사와 최경리도 빙그레 웃었고. 나 또한 웃으며 물었다.

“하하. 종이접기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요~ 관심 없습니다.”

음?!

내 팬인데, 종이접기에 관심이 없다고?

“제가 한 가지에 꽂히면 파고드는 성향이거든요. 사랑산성이 단란주점의 점심 주방을 공유하여 사업 시작한 거잖아요? 그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는데.”

“…….”

“강 사장님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사회 통념이 다를지라도 돈 되는 길로 가시고, 소신도 있으시고, 어딘가 모르게 재주도 좋으신 거 같고.”

처음이다. 대부분은 종이접기나 혹은 내 손재주와 관련된 활약 때문에 내 팬이 된다.

내 금손과 상관없이, 날 좋게 평가해주는 팬을 만난 것 처음이었다.

“아…… 네.”

왠지 좀 얼떨떨했다.

원래의 진짜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거기다 좋은 일도 하시는군요. 바쁘실 텐데, 보육원 부지를 위해서 이렇게 백방으로 뛰시고.”

“뭐,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서 하는 건데…….”

고진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좋은 일입니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는 것.”

“…….”

“몇 없거든요. 그런 사람.”

고진수는 깊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진심으로 인정받는 기분이라,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뻤다.

“고맙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앞으로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계약은 정확하게 이행할 테니, 염려 마시고요.”

“네, 저희도.”

고진수는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일 출근해야 되서. 하하.”

“네,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 * *

“앞으로 20일이네.”

“네.”

잔금 및 등기 이전은 20일 이후.

그때 매도금액을 받고, 본격적으로 토지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매수 잔금일이 25일 정도 남았기에 일련의 과정에 한치의 문제도 있으면 안 된다.

최경리를 먼저 보내고, 밖에서 변 이사가 담배 태우는 걸 기다리며 얘기를 나눴다.

“그럼 나 이제 20일 동안 뭐하지? 요즘 계속 오전엔 식당, 오후엔 강 사장님이랑 밖에 다녔더니, 허전할 거 같은데.”

“하하.”

난 그의 말에 웃고는 말했다.

“20일 뒤에 전력질주 하셔야 되잖아요. 그 생각하시면서 좀 쉬세요. 집에 가서 잘하시고요. 아무리 변 이사님이라도 아마 곧 있으면 야근 피하기 어려우실걸요.”

“하하. 아마 그렇겠지.”

흡읍~ 휴우~

변 이사는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고는 말했다.

“난 회사일 바쁘게 하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어. 난 속으로 워커홀릭들 경멸했었는데. 하하. 요즘은 게임하는 거보다 회사 다니는 게 더 재밌다니깐.”

난 대답 없이 살며시 웃었다.

“강 사장님, 덕분이지 뭐. 부담 없이 마음껏 일하게 해주니까. 하는 일마다 성과도 잘 나고.”

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열심히 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변 이사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말했다.

“자, 이제 가야지. 강 사장님은 이제 작업 들어가는 거지?”

피식. 그의 말에 난 웃었다.

변 이사는 나를 너무 잘 안다.

“그래야죠. 돈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작가가 작품활동 해야죠.”

툭. 툭.

변 이사는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 무리하진 말고. 어차피 집에서 작업할 거 아니야? 회사 일은 웬만한 거 나한테 맡겨두고, 작품 끝날 때까지는 일찍 퇴근하라고.”

“하하.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 먼저 간다. 내일 봐~”

“네~ 들어가세요.”

변 이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선배님만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요즘 회사 다니는 맛에 살아요. 하하.’

* * *

집에 왔다.

“어, 벌써 도착했네.”

흑연 종이 업체에 전화 주문을 했었다. 배송비용은 지불할 테니, 퀵으로 보내 달라고.

“좋아, 확실히 크네.”

엊그제 자동차 종이를 좀 접었지만, 그건 버리려 한다.

일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왜 종이 공예는 보기만 해야 하는가?

직접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인가?

어차피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 거라면, 사람이 탈 수도 있으면 더 좋잖아?

사람이 탈 수 있는 자동차 모형을 만들기 위해, 좀 더 강도가 있고 큰 사이즈의 종이를 주문했다.

진짜 자동차처럼 크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범퍼카 정도 크기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성인 남자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면, 체구가 작은 여성이 타면 되는 것이다.

종이에 전기를 흐르게 할 수 있고, 종이로 동력을 만들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안 될 게 뭐 있어? 태평아, 해봤어?”

H건설의 정 회장님 유명한 멘트를 떠올리며, 의지를 다졌다.

그래, 한번 해보자.

실패하면 접어서 분리수거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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