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찾아서 (1)
* * *
그날 저녁.
최경리, 변 이사와 야근을 했다.
최경리가 야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내 기억엔 회식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변 이사님, 최경리 과장 야근시켜도 돼요?”
“에이~ 강 사장님.”
변 이사는 날 향해 웃으며 말했다.
“최경리가 할 때는 해~”
“아…… 불안한데.”
아무 말 없이 문서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최경리.
어두워진 밤과 사무실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참 이질적으로 보였다.
“다 들립니다.”
최경리는 시선을 컴퓨터에 고정한 채 말했다.
변 이사는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하여간 최 과장이 귀는 엄청 밝다니까.”
“그러게요. 제가 잠시 방심했습니다.”
타닥. 타닥. 타타타닥.
쉴새 없이 자판을 두들기며, 최경리는 말했다.
“시한이 정해진 급한 일이잖아요. 일단 공을 넘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을 넘겨?”
“네, 제 다음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해줘야죠.”
최경리의 다음 사람이 누구야?
설마 나한테 일 시키려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그리고, 강 사장님. 야근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
“다 청구할 거니까요.”
“그야 물론이지. 바라는 바야.”
최경리에게 밑지기 싫다.
그랬다가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반드시 야근비는 청구하기를 바라며, 야근 식대도 꼭 썼으면 좋겠다.
“식사도 하지?”
“식사는 집에서 할 건데. 야근 식대 청구해도 되죠?”
집에서 밥 먹는데, 야근 식대를 청구한다고?
뭐 시켜 먹으려고 그러나?
그냥, 그러라고 했다.
“응. 그렇게 해. 어차피 야근해서 늦게 먹는 거니까.”
“사장님 많이 세련되어지셨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요.”
뭔가 날 칭찬해 준 것 같긴 한데.
세련? 이제야 말이 통해?
기분이 유쾌해지지 않는 칭찬이다. 묘하게 기억 속에 남는.
하여간 최경리와 대화를 길게 하면 안 된다.
“최 과장~”
타닥. 타닥. 타다닥! 딱!
변 이사의 부름과 동시에 최경리의 타자 소리가 멈췄다.
“네.”
“후보자들한테 가격제시 받을 거라고 메시지 보냈어?”
“아니요.”
변 이사는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아직까지 그거 안 하고 뭐 했어? 그게 가장 급한 건데?”
최 과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변 이사와 내 앞에 문서를 들이밀었다.
#공문
가. (주)사랑산성은 토지 매도 비딩을 진행합니다.
나. 입찰 기한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 아래 조건에 해당 되는 후보자만 입찰 바랍니다.
1) 잔금 거래일은 20일 이후인 00월…….
.
.
.
정식공문이었다.
지금까지 이거 한 거였어?
“그리고 이건 입찰 양식지에요.”
종이 한 장을 또 내밀었는데.
직인, 명판란까지 있는 ‘입찰 양식지’였다.
입찰 동봉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아니 뭘 이렇게까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공공기관에서 사업 입찰 받는 것으로 알겠다.
“이사님, 돈이 오가는 일인데 명확하게 해야죠.”
“후보자들이 대부분 연세가 있는데, 공문대로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까? 알지? 절차가 생기면 그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거.”
“…….”
“절차를 어긋나면 탈락자가 되는 거라고. 최대한 많은 가격제시를 받아서, 선택지가 넓어졌으면 좋겠는데. 굳이 이런 허들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최경리는 줏대가 있었다.
변 이사가 이렇게 말해도 본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이름으로 금전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절차가 복잡할지라도 할 건 해야죠. 돈이 끼면 생각지도 못한 불협화음이 발생합니다.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
“그리고.”
최경리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연세가 있으시더라도, 토지 매수에 진심이라면. 어떻게든 절차에 맞춰서 제출하겠죠. 작성 중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문의하라고 제 이름이랑 전화번호 적어놨어요. 이건 의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변 이사의 뜻도 이해는 되지만.
최경리의 말이 좀 더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 ‘부동산 사업’의 담당자는 변 이사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흠…….”
변 이사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자기 말이 맞는 거 같다.”
피식.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난 변 이사의 이런 모습이 좋다.
“근데, 규칙을 조금만 단순히 하자. 입찰 마감 시간까지 정해 놓는 건 너무 기준이 높은 거 같아. 서면으로 받자며.”
“네. 실물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하니까요.”
“마감은 일자를 기준으로 하자. 시간까지는 말고. 그리고 양식에 만약 문제가 있다면 ‘무조건 무효’가 아니라, ‘내부협의 후 결정’하는 거로.”
“공문에 여지를 넣으면 안 좋은데.”
어쨌든 협의점을 찾아야 하기에, 이번엔 내가 나섰다.
“최경리 과장. 변 이사님 말대로 하자. 그 정도는 괜찮을 거 같애.”
“흠…… 사장님이 책임지시는 거예요?”
“그럼 누가 책임져? 뻔한 얘기를 뭐 하러 하나?”
그제야 최경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타닥. 타닥.
최경리는 ‘비딩 공문’ 및 ‘양식지’ 수정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완성되는 대로 공문이랑 양식 파일 오늘 중으로 후보자들에게 다 보낼 테니까요.”
“오케이~ 조금만 있다가 갈게.”
“그냥 빨리 가요. 방해돼요.”
하여간 까칠하기는.
난 눈치를 보다가, 변 이사를 이끌고 4번룸으로 옮겼다.
* * *
“변 이사님.”
“응.”
“땅 팔아도 돈 부족하잖아요.”
“그렇지. 건물 올린 돈도 필요하니까.”
“얼마나 더 필요하죠?”
변 이사는 내 눈을 보다가.
“가성비 좋게 갈 거지?”
우리는 ‘싸다는’ 말 대신, ‘가성비’라는 표현을 쓴다.
“뭐…… 적절히 가야죠.”
“8억은 더 있어야 해.”
“토지매도 수익 제외하고, 8억 더 필요하다는 거죠?”
“맞아.”
변 이사 스타일을 안다.
아마 내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서 예산을 낮게 잡았을 것이다.
대신 어떻게든 토지를 높은 금액에 매도해서, 건축비용을 최대한 확보하려 하겠지.
“넉넉잡고 10억은 더 있어야겠네요.”
“…….”
지금 회사에 공개한 것 외에 내 개인 재산이 2억 정도 더 있다.
역시…… 부동산이 돈 많이 드는구나.
그동안 돈 많이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부동산 금액으로 다 들어가네.
이 건축비용 또한 못해도 2달 내에는 준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토지 등기 끝나는 대로 바로 건축사무소 미팅 잡고 건물 올리려면…….
“강 사장님, 어떻게 할 거야? 방법 있어?”
“일단…… 우리에겐 담보대출이 있잖아요.”
훗. 이 말에 변 이사가 웃었다.
“그렇지! 근데~ 시기가 안 좋네. 하필 우리 토지 구매하는 곳이 서울 강남구잖아. 부동산 규제가 많아서…… 얼마 못 받을 거야.”
흠…….
어쩔 수 없다.
작업 들어가야지 뭐.
“공문 보낸 후 며칠 뒤에 입찰서 받을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까, 3일만 주려고.”
“그동안 제가 뭐 할 거 없죠?”
“없어~ 최 과장 있잖아.”
난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그럼 저 시간 좀 가져도 돼요?”
“왜?”
변 이사는 알면서 물어보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얘기해주었다.
“차기작 들어가려고요.”
* * *
토요일.
작품 영감을 얻기 위해, 난 교외로 나왔다.
벤스에 타고 창문을 모두 개방했다.
쾌적한 바람. 확실히 서울 시내와는 공기가 다르다.
운전면허 취득한 후, 교외로 나오는 건 처음이다.
터미널에서 표 끊고, 잘 안 오는 시골 버스 기다리는 그런 수고는 안 해도 된다.
그냥 내가 가고 싶은 곳, 찍고 액셀만 밟으면 되는 것이다.
편하고 좋긴 했는데.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뛰어갈 때와 걸어갈 때 풍경이 다르다.
걸어가면 오래 걸리지만, 뛰어갈 때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인다.
벤스를 끌고 있는 지금.
편한 대신에 볼 수 없는 게 많다는 것. 그런 아쉬움은 좀 있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교외. 경기 북부로 방향을 잡았다.
연천군에 들어설 무렵.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무런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사람을 좀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식당에 차를 주차 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메기매운탕 집이었다.
주인아줌마는 내 뒤를 살피고는 물었다.
“몇 분이세요?”
“혼자입니다.”
“아…….”
주인아줌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메뉴판을 보니, 1인 메뉴는 없었다.
어차피 난 배만 채우려고 온 게 아니기에…… 좀 남기더라도 대표 음식을 먹을 생각이다.
내가 돈 아껴야 하는 사회 초년생도 아니고.
“메기매운탕 중(中)자 하나랑, 공깃밥 하나 주세요.”
“양이 꽤 되는데…….”
“하하. 네. 저 혼자니까 많이 주지 마세요. 음식 남기면 안 좋잖아요.”
“호호. 알았어요. 대신 공깃밥 가격은 안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오후 3시.
점심 먹기에는 많이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홀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메기매운탕이 나왔고.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불 약하게 해놨으니까. 끄지 마시고요.”
“네~ 고맙습니다.”
난 창밖의 풍경을 보며, 천천히 음식을 즐겼다.
여유롭고 좋다.
“수제비 좀 드릴까요?”
“네~ 좋습니다.”
수제비도 넣었다.
이제 슬슬 영감이 떠올라야 할 텐데.
난 음식점 실내 구석구석에 시선을 두며, 뭔가가 떠오르기를 바랐다.
음식 맛을 천천히 음미하기도 하고.
멍하니 바깥 풍경을 보기도 하고.
흠…….
이상하다.
느낌이 안 온다.
뭔가 만들고 싶은 끌림이 와야 하는데.
‘할아버지의 일생’ 같은 끌림이 전혀 오지 않는다.
그냥…… 배만 터질 것 같다.
아주머니가 조금 준다더니 많이 주셨다.
남기긴 싫어서 꾸역꾸역 다 먹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운전하다가 졸음이 올 것 같아서, 근처 편의점에서 레쓰비를 하나 샀다.
창문을 다시 개방하고, 계속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점점 주변이 어스름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왜 영감이 안 떠오르지.’
그렇게 하염없이 가다 보니.
‘열쇠 전망대’
북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망대 표지판을 보고 나니 마음이 더 초조해진다.
‘아…… 뭔가 떠올라야 하는데.’
결국 전망대까지 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열쇠 전망대에 서서 북녘땅을 바라봤다.
‘씨바, 10억 어떻게 하지? 너무 쉽게 생각했나?’
종이 공예 작품의 경매 수익으로 큰돈을 벌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줄 알았다.
근데…… 뭘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멘붕이 찾아왔다.
전망대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북한군 초소를 바라보다가.
답답한 마음에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선배님, 접니다.]
변 이사에게 전화했다.
[뭐야~ 주말에.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까, 뭐 부탁할 거 있구만?]
[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오늘…….]
여기가 어디인지.
오늘 왜 휴전선까지 왔는지 설명해주었다.
가만히 듣던 변 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강 사장~ 자기가 무슨 예술가야?]
[네?]
[무슨 영감을 떠올려? 그냥 복잡해 보이는 거 만들어.]
[…….]
[자기는 기술자야. 기술자. 영감 같은 웃기는 얘기하지 말고, 그냥 내 손으로 찍어낸다고 생각하고 아무거나 만들라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모르나?]
[아무거나, 뭐요?]
[흠. 내가 하나 찍어줘?]
[…….]
변 이사는 살짝 고민하고는 말했다.
[자기 차를 모델로 해서 접어 보지 그래? 내부 기관도 동일하고, 차 문도 열고 닫힐 수 있게.]
차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까진 어렵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