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간다 (1)
* * *
“허허. 막장 가는 건가?”
잠자코 옆에서 보고만 있던 변 이사가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모삼촌의 10억 얘기에 훈훈하던 분위기는 비즈니스적으로 바뀌었다.
난 네모삼촌의 얘기를 아주 가볍게, 농담처럼 생각했다.
네모씨 또한 그렇게 생각한 듯.
네모삼촌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네모씨,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요. 잘 간직해야죠.”
“이게 1, 2백만 원 하는 작품이라면 모르겠는데…… 며칠 전에 네모의신 작가의 영향력 봤잖아…….”
“…….”
진심인가 보다.
네모삼촌의 눈빛이 변해있었다.
“흠. 그 얘기는 나중에 하죠.”
네모씨도 이제야 뭔가 느낀 듯, 약간 당황했다.
“선물 준 손님 있는 데서, 이런 얘기 하는 건 좀 아니잖아요.”
“아…… 그래.”
네모삼촌은 머리를 긁적이며 날 바라봤다.
“태평 씨,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자기 작품을 처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눌 건 잘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니까.”
흠…… 말이 좀 아리송한데.
“아, 네.”
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답했다.
어차피 준 선물이고, 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네모삼촌은 정중하게 감사 표현을 했다.
“하여간 태평 씨. 정말 고마워. 덕분에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겠다.”
“서울은 좀 어렵겠지만요.”
정카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난 입맛을 다신 후 대꾸했다.
“네, 어쨌든 좋아하시면 된 거죠. 뭐.”
“…….”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그때 네모씨가 서류 하나를 준비해서 나타났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이제 명실상부한 스타가 되셨는데.”
“에이~ 스타는요. 무슨.”
네모씨가 가져온 종이가 뭔지 살펴보았다.
‘소장권 및 저작권에 관한 양도계약서’
그는 내게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명확한 게 좋으니까요.”
“…… 저작권?”
선물 준 것에 대한 양도계약서를 준비한 거 같은데, 소장권은 이해가 된다.
저작권까지 명시해야 하는 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네모씨는 웃으며 설명했다.
“저작권까지 양도가 되어야 완전히 소유권 이전이 되거든요. 그게 안 되면 원본 작품의 이미지를 복제, 전시, 공중 송신 등의 방식으로 이용할 경우에는 태평 씨 컨펌을 받아야 해서.”
“아…….”
“그러면 어떻게 네모튜브 소유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냥 소장만 하고 있는 거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네모씨는 웃으며 말했다.
“태평 씨 작품이니까요. 이제 태평 씨가 만든 작품에는 권위와 무게가 있어요. 가벼운 선물로 주고받은 것도 소유권 명확하게 정리 안 했다가, 나중에 권리 싸움으로 번질 수가 있어요.”
설마?
반신반의하는 내 표정을 보며 말했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에요. 사례도 꽤 있고요.”
“아…….”
난 종이를 본 뒤, 세 남자를 보았다.
이런 게 삶이 달라졌다는 건가?
사소하게 생각한 일도 묵직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냥 가벼운 선물인데.
“계약서 주세요.”
어차피 주기로 한 선물이고, 이렇게 하는 게 세 사람 마음이 편하다고 하니.
그냥 사인해 주었다.
‘양도인. 네모의신 강태평.’
* * *
다음날 사랑산성.
근무시간에는 별다른 게 없다.
어차피 수용 인원이 한정되어 있고, 난 주방에서 일하니까.
그보다는.
사랑산성에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꽤 많은 추종자가 주변에 운집해 있어서 그들을 뚫고 가기가 쉽지 않다.
나 한번 만나보자고 몇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사랑산성은 말 그대로…… 팬들의 사랑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핑크색 티셔츠에 프린팅 된 ‘네모천국’의 물결.
“아오~ 땀나.”
수십 번의 악수와 인사.
아침부터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2층 샤워실 좀 쓴다고 해볼까?”
“안 돼요. 여자들만 쓰는 곳이라.”
김지안이 옆에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휴~ 아침마다 전쟁이네.”
난 김지안의 부채질을 받으며 땀을 식혔다.
“아, 맞다. 영상은 어떻게 됐어? 웰시페니에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준비는 끝났어요. 안 그래도 오늘 보고드리려 했어요.”
지금 시각은 오전 9시 30분.
영업 시작 1시간 30분 전.
지금은 시간이 없다.
“그래. 그럼 이따 영업 끝나고 보자. 오 대리도 같이.”
“네.”
오후 3시.
4번룸에 모인 사랑산성 전 직원은 완성된 영상을 봤다.
“괜찮네.”
변 이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오 대리가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꽤 감각 있게 편집했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오 대리는 김지안 대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지안 대리가 잘 해줬어요. 처음이라고 하더니, 센스가 있던데요?”
“그래?”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썸네일이라든지 자막 문구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영상 전개를 잘 짜오더라고요. 저는 말 그대로 촬영이랑, 프리머어(동영상편집기)기술자 역할만 했어요.”
기술적인 부분은 사실 금손을 가진 내 시각에서는 아쉽게 느껴진다.
손대고 싶어 죽겠지만, 노력한 오 대리의 사기를 생각해서 그냥 모른 척했다. 뭐, 나쁘지는 않으니까.
내가 괜찮게 보는 건 영상의 기승전결.
10분짜리 영상임에도 감동이 느껴졌다. 그냥 작품 준비해서 경매 낙찰받는 것뿐인데.
경매 낙찰받는 클라이막스 장면은 어디서 따온 거 같기도 하고.
“김지안 대리.”
“네.”
“영상 전개 방식 자기가 창작한 거야?”
“시퀀스(여러 개의 씬이 모인 이야기의 단락) 말씀이시죠?”
“어? 몰라. 용어는.”
김지안은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말했다.
“창작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나 보죠?”
“어디서 본 것 같아서.”
“호호.”
내 말에 김지안 대리는 파안대소했다.
“사장님 혹시 넛플릭스 보세요?”
아…… 넛플릭스라고 하니까 딱 떠올랐다.
“혹시 라스트 댄스?!”
“호호. 맞아요!”
농구 전설 마이클 조나단의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경매에서 낙찰받는 순간 카메라 앵글이 라스트 댄스에 나온 시카고 벌스 3연패 장면과 비슷했다.
직원들은 우리 대화를 모르는 눈치였다.
“모든 건 뼈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기도 하고요. 호호.”
우리는 김지안 얘기에 집중했다.
“이 영상의 아이덴티티는 ‘기록’이긴 하지만, 기왕 하는 거 스토리 있게 짜보고 싶어요. 그래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참조 한 거고요.”
“…….”
“느낌이 비슷할 뿐 똑같진 않아요.”
다시 한번 영상을 봤는데, 표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짧은 영상임에도 몰입이 되었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그냥 우리 얘기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기록 속에 이야기를 담았던 것이다.
며칠 밤샘을 한 노력도.
“김지안 대리 수고했어. 오 대리도.”
“감사합니다.”
“손 볼 거 없이 이대로 가면 되겠다.”
“네!”
오 대리와 김지안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웰시페니 내일 가는 거로. 시간 괜찮은지 저스틴과 확인해 봐.”
김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오 대리?”
난 경매 담당인 오 대리를 불렀다.
“네, 사장님.”
“경매 끝난 지 3일째인데, 대금 지불은 아직 얘기 없어?”
“아 네. 오늘 아침에 전화해봤는데요. 기준은 7일 이내에 낙찰대금 결제인데, 낙찰 3억 원 이상은 21일까지 기한을 준다고 해요.”
“아…….”
“아무래도 저희 작품이 고가로 낙찰되었기 때문에 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흠…… 그래.”
그래, 조바심 낼 일은 아니지.
“그럼 오늘 미팅은 이 정도로 하고. 혹시 뭐 할 말 있는 사람 있나?”
스윽.
U자형 의자 코너 쪽에서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다.
“응? 최경리?”
웬일이지? 손드는 거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최경리가 손을 드니 괜히 긴장된다.
“질문이 있는데요.”
“어, 얘기해. 기왕이면 짧게 부탁해.”
“하지 말까요?”
“아니야. 해줘.”
최경리는 날 살짝 째려보았고, 난 시선을 돌렸다.
“혹시 방송 출연 의향 있으세요?”
“…….”
최경리의 말에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멍해졌다.
“뭐, 뭐라고? 갑자기?”
“어제 방송국 작가를 만났어요.”
어제? 아…… 어제 외근 나갔다더니.
“미팅 요청이 왔고, 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해서 만났는데요.”
“나한테 사전에 말도 없이?”
“결정하러 간 자리도 아니고, 그냥 미팅인데. 이런 것도 사전에 보고해야 하나요?”
“…….”
“과장이 이 정도도 못 해요? 지금 보고 하잖아요.”
하여간 공격적이다.
변 이사가 나서려 하길래. 난 손을 들어 제지하고 말했다.
“알았어~ 최경리 말이 맞네. 계속해 봐.”
“연예인들이 애들 데리고 나와서 노는 육아 프로그램인데, 출연해 줄 수 있냐고.”
“…….”
“출연료는 100만 원 제시하더라고요. 출연료 자체는 높지 않아요.”
최경리의 눈이 빛났다.
“TV를 통해서 전국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알리면…… 특히나 그 프로그램이 네모의신을 잘 모르는 연령층들이 많이 보시거든요.”
50대 이상을 말하는 거군.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대중적인 영향력이 생긴다면, 우리 사업에 꽤 시너지가 있을 거라고 보거든요.”
난 잠시 생각해봤다.
일단…… 지금 상황도 아직 감당하기가 버겁고.
TV 출연을 하게 된다면…….
상상이 안 가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쨌든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버릴 카드는 아니고, 일단 킵 해두는 거로.
“최 과장. 좋은 생각인데. 현재 지금도 내가 정신을 못 차리겠거든? 하하. 경매부터 마무리 짓고, 사업 포트폴리오 다시 구상해 볼 생각인데. 그때 다시 논의하자. 방송국 쪽에는 아직은 생각 없다고 잘 구슬려서 얘기해줘. 짜르라는 뜻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지?”
최 과장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흠. 알겠어요.”
짝. 짝.
난 박수를 크게 치고 일어났다.
“자! 그럼 각자 업무 마무리합시다. 특히 김지안 대리는 내일 웰시페니 미팅 준비 잘하고! 이상 끝!”
* * *
웰시페니 빌딩.
김지안, 오 대리와 함께 왔다.
리셉션에는 내가 사인해 줬던 여직원이 근무 중이었다.
“하아, 이걸 어쩐다.”
우리는 리셉션을 향해 가던 발걸음을 멈춰 섰다.
이제 사랑산성 직원들도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대중 만나는 걸 조심해 한다.
“사장님, 뒤에 계세요. 제가 가서 말할게요.”
“아, 그럴래?”
김지안은 리셉션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웰시페니 미팅 있어서 왔습니다.”
“네~ 누구 만나기로 하셨나요?”
“저스틴 윌슨입니다.”
“윌슨씨?!”
여직원은 김지안을 빤히 보더니 물었다.
“저번에 오시지 않았어요?”
“온 적 있어요.”
“일행이 있으셨던 거 같은데.”
“리셉션이 이렇게 꼬치꼬치 물어보나요?”
김지안은 잘 방어했다.
“미팅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아 네. 출입 패찰 하나만 드리면 되나요?”
“두 개 더 부탁드립니다.”
여직원은 로비를 두리번거렸다.
“일행분들은 어디 계시죠?”
“저기요.”
나와 오 대리는 멀찍이 있었고.
난 오 대리 뒤에 가려서 있었다.
“…… 여기 있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김지안에 패찰을 건네받았고.
여직원은 계속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오 대리가 개찰구 앞에서, 돌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제가 먼저 돌파하고, 김지안 대리가 후방을 맡아줘. 사장님은 가운데로 끼시고요.”
“알았어.”
슬금슬금 개찰구를 향해 걸어가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오 대리가 외쳤다.
“GO!”
후다닥.
우리는 빠르게 움직였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순간.
여직원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
“잠깐만요!”
“…….”
“그냥 가면 어떡해~!”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달려오는 여직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