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물결 (2)
* * *
덥석.
변 이사가 내 팔을 잡았다.
“에이~, 강 사장님, 어디 가~.”
마음이 급한데 변 이사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난 다시 한번 여자의 동정을 살폈고.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내 쪽을 계속 보고 있다.
“저분이요. 제가 호프집에서 사인해드린 분.”
“아~, 맞는 거 같네. 근데 그게, 뭐?”
변 이사도 그 여자를 힐끔 본 후 말했다.
“그게 뭐긴요. 네모천국인지 뭔지. 저 기세 보시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여자는 옆 사람에게 뭔가 말하고 있었고, 여자 주변 사람들까지 점점 내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네모의 신이 이곳에 나타난 것 같다고 말한 것 같다.
“에이~, 강 사장님. 모습 드러내기로 했잖아. 그냥 떳떳하게 행동해.”
“…….”
“어차피 광고 영상 나오고 하면 다 알게 될 건데. 뭘 그렇게 수줍어해.”
글쎄…….
지금 내게 있어서는 단계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익명 활동한 것을 내 몸을 가리는 옷에 비유한다면.
옷은 겉옷부터 차례대로 벗어야지, 속옷부터 벗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네모천국의 등장에 좀 놀랐고, 내 작품이 전시된 곳에서 대면 팬 미팅을 할 자신은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이사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난 변 이사의 손을 풀고 나가버렸다.
변 이사는 강태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허허~, 재밌는 구경 좀 하나 했더니만.”
“강 사장님은 연예인이 아니잖아요. 그러실 만하죠.”
어느새 오 대리가 옆에 다가와서 말했다.
“제 일도 아닌데도, 괜히 저까지 부담스러운데.”
“그래도~. 이제 강 사장은 어쩔 수 없어~.”
변 이사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급류 휩쓸리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휩쓸려 간다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면 지옥이 될 거고. 물살을 탈 수 있다면 즐기게 되는 것이지.”
“…….”
“강 사장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즐기길 바라. 그것도 노력이 필요한 일이야.”
오 대리는 변 이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에서 자주 하는 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건 가요?”
“하하. 그렇지. 역시, 예비역 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군대 인용을 잘하네.”
“당연하죠. 수색대 출신인데요.”
오 대리. 미국 영주권자 앤더슨 오는 사격 자세를 취하며 웃었다.
“저기요.”
톡. 톡.
누군가 오 대리의 어깨를 두들겼다.
“네? 어이쿠!”
오 대리는 자신의 어깨를 두들긴 여성을 보고,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호프집에서 만났던 네모의 신의 팬이었고, 그 옆에는 ‘네모천국’이 있었다.
변 이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다가올 줄은 몰랐었다.
“저 만난 적 있죠?”
여성은 오 대리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고.
꿀꺽.
오 대리는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글쎄요. 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변 이사님, 이분 기억하세요?”
“뭐? 왜 나한테 그래?!”
오 대리는 은근슬쩍 변 이사에게 공을 넘겼다.
안다고 하기도 뭐하고, 모른다고 하기에도 뭐한 상황.
“아~, 맞네. 이 아저씨도 그때 옆에 있었네. 얼굴 보니까 기억이 나네요.”
오 대리에 이어서 변 이사 얼굴까지 매칭이 되니, 그녀는 확신하는 듯했다.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네모천국’에게 말했다.
“거봐~, 맞다니까. 내가 맞다고 했잖아.”
“대박. 진짜라고? 네모의 신님이 이곳에 오셨다고?”
이제 완벽히 확신한 그녀는 오 대리에게 물었다.
“네모의 신님 어디 가셨어요? 좀 전에 옆에 같이 있었죠?”
“…….”
“그리고 두 분 뭐 하시는 분이에요? 네모의 신님이랑 어떤 관계세요?”
십여 명에게 둘러싸인 변 이사와 오 대리.
‘강 사장 나갈 때 그냥 따라 나갈걸.’
변 이사는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변 이사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이사님,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가만있어 봐. 하아…….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미치겠네.”
여성은 재촉했다.
“아저씨. 제 말 안 들려요?”
변 이사의 눈은 쉴새 없이 돌아갔고.
오 대리만 들리게 작게 말했다.
“내가 신호 주면 바로 나가는 거야.”
“알겠습니다.”
“흠!”
변 이사는 헛기침하고 여성을 바라봤다.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은 더 많아져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관련 없는 사람들도 구경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자, 말씀드릴게요. 아가씨,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그때 호프집에서 만났던 사람 맞습니다.”
“…….”
“그리고 좀 전까지 네모의 신님 같이 계셨던 것도 맞아요.”
― 꺅~!
― 네모! 네모!
― 어딨어여! 어딨어여!
COEX B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시회에 어울리지 않는 환호성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여기 전시회장이니까, 진정하시고요. 네모의 신님은 일이 있으셔서 먼저 가셨어요. 저희들은 네모의 신님 일 돕는 사람입니다.”
― 어머, 그럼 매니저야?
― 진작 말을 하지~. 그럼 잘해 드렸을 텐데.
― 매니저가 둘이나 되는 거야? 한 명은 스타일리스트인가?
변 이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저희도 다음 스케줄 때문에 나가봐야 하거든요. 네모의 신님 출품작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요. 그럼 다음 기회에 뵐게요. 조만간 네모의 신님이 직접 인사드릴 겁니다.”
“네~!”
네모천국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네~!”
변 이사와 오 대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전시장을 빠져나갔다.
* * *
절뚝. 절뚝.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 짙은 선글라스를 쓴 한 남자가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윗부분이 금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짚고 걷는데, 한쪽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김환수 작가님 작품이 어디 있지?”
목소리는 음울하고 묵직했다.
“네, 의원님. 이쪽입니다.”
절뚝이는 남자 옆에는 건장한 체격의 두 남성이 있었다.
의원이라 불린 남자는 새치로 하얗게 내린 머리를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겼고.
사십 대 후반 정도의 외모인데, 운동을 하는지 몸은 젊은이 못지않게 탄탄해 보였다.
그저 한쪽 다리만 불편해 보일 뿐.
“흠…….”
김환수 작가의 정물화 앞에서 선 그는 유심히 작품을 살폈다.
남자 비서 둘은 그 옆에 기둥처럼 서 있었다.
“기대한 대로야.”
“…….”
“이거 사라.”
“알겠습니다.”
“가자.”
“네.”
전시회장에 들어온 지 10분도 안 되어 남자는 발걸음을 밖으로 향했다.
김환수 작가의 작품 딱 하나만 본 것이다.
― 꺅~.
― 네모의 신!
― 역시 달라~. 할아버지 일생 슬퍼~.
김환수 작가의 작품이 걸린 반대편 기둥에 운집한 사람들.
뭐 때문인지 난리였다.
절뚝이는 남자는 전시회장을 빠져나가려다 호기심이 생겼다.
“저기 뭐지?”
“글쎄요.”
남자는 비서를 무심히 바라보았고.
비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남자 비서는 뛰었다.
그는 운집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큐레이터를 불러서 작품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확인하고 돌아오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의원님, 알아봤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죄송합니다.”
비서는 짧은 시간 동안 알아본 내용을 설명했다. 네모의 신이라는 유명한 종이접기 너튜버가 출품을 했으며, 운집한 사람들은 그의 추종자들이라는 등…….
“처녀작이 first zone에 걸린다고?”
절뚝이는 남자는 경매를 잘 아는 듯했다.
“네, 저도 의아했는데 관계자 말에 의하면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네모의 신…….”
절뚝이는 남자는 오늘 처음 들어본 것이다. 잠시 생각하다가 비서에게 물었다.
“자네는 아나?”
“저도 잘 모릅니다. 너튜브를 안 해서요.”
“좀 해.”
“알겠습니다.”
절뚝이는 남자는 그대로 갈까 하다가.
“이쪽으로 돌아서 가지.”
‘할아버지의 일생’이 걸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수행비서 두 사람은 절뚝이는 남자의 앞을 해치며 앞장섰다.
작품이 걸린 기둥을 천천히 돌아서 갔고. ‘할아버지의 일생’이 남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호오…….”
범상치 않아 보였다.
“가까이서 좀 보지.”
“알겠습니다.”
남자 비서 둘은 운집한 사람들을 해치며, 작품 바로 앞까지 길을 만들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 뭐야? 왜 밀어?
― 뭔데, 그래?
불만 섞인 군중들의 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절뚝이는 남자의 포스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실력자처럼 느껴졌다.
절뚝이는 남자는 ‘할아버지의 일생’ 앞에서 한참을 서서 보다가.
“이봐.”
“네.”
“이것도 사라.”
“알겠습니다.”
볼일이 끝난 듯 뒤돌아 갔다.
그리고 그 남자는 중얼거렸다.
“네모의 신. 네모의 신이라…….”
이상하게 끌렸다. 뭔가 있는 것 같은…….
“그리고.”
“네.”
“네모의 신이라는 사람. 뒷조사 좀 해봐.”
“알겠습니다.”
* * *
경매 프리뷰는 끝이 났고.
드디어 내일이 D―day 경매 당일이다.
굳이 내가 갈 필요는 없지만, 안 가는 게 정신 건강에는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궁금했다.
만약 경매 시간이 영업 시간과 겹치면 포기하려 했는데.
마침, 경매 시작도 오후 4시부터다.
다만 한 가지 염려되는 게 있어서, 어제 통화로 이정수 팀장에게 물어봤었다.
[하하. 염려 마세요. 프리뷰 때처럼 그런 난리는 없을 테니까.]
[정말이죠?]
[그렇다니까요. 프리뷰는 아무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거고요. 경매는 응찰 등록을 해야만 참여할 수 있어요. 서류 등 준비할 게 있어서 어제 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시각은 밤 10시.
맥주 500ml 두 캔째다.
기대 반. 불안 반.
자꾸 설레서 차가운 맥주로 가슴을 식히려 했다.
침대에 기대어 홀짝이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태평아.]
“…….”
[태평아~, 뭐 하느냐?]
번쩍.
난 눈을 떴다.
짙고 푸른 숲. 새벽 5시쯤 되어 보이는 어스름한 어둠. 은은한 안개.
주위를 둘러보고 대번에 깨달았다.
꿈속이구나.
“근데, 어디서 많이 봤던 곳 같은데.”
[태평아.]
허공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난 기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꿈속이니까.
“네네~.”
난 대답을 하고선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점점 안개가 더 짙어지고.
짙은 안개 속을 빠져나올 때쯤.
커다란 연못이 나타났다.
“응?!”
[잘 지냈느냐?]
연못 위에 할아버지가 떠 있었는데.
“아~.”
이제 기억났다. 나에게 금손을 안겨준 사람.
난 두려움도 잊고 한달음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네! 하하. 할아버지도 잘 지내셨어요?”
[오냐~.]
그는 흐뭇한 미소로 날 바라보았다.
[얼굴이 많이 밝아졌구나. 표정도 좋아졌고.]
“하하. 그래요?”
[그래~, 좋아 보여.]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표정이 참 자애로웠다.
[주어진 것에 대한 감당은 잘하고 있느냐?]
“…….”
금손을 말하는 거겠지.
난 곰곰이 생각한 후 대답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열심히는 살고 있는데……. 제가 가진 것을 잘 활용하고 있는지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잘하고 있는 것 같구나.]
“…….”
[다만, 너무 부담 갖지는 말거라. 압박감은 갖지 말라는 뜻이야.]
“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날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네 삶이 완전히 바뀔지도 모르겠구나.]
“…….”
[지금까지 네가 선택한 삶이었고. 앞으로도 네가 선택한 삶이야. 정해진 건 없단다.]
그의 말이 알쏭달쏭했다.
[어떠한 일이든 마음 편히 가지렴. 모든 것에 감사해하는 거 잊지 말고.]
“저, 삶이 바뀐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할아버지는 웃으며 연못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