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98화 (98/156)

물꼬가 트이다 (1)

* * *

서면 심의 신청 메일을 발송한 후.

네모튜브와는 헤어졌다.

최경리와는 같은 방향이라 전철을 함께 탔다.

“…….”

몇 정거장을 지나쳤지만, 침묵만 흘렀다.

그냥 다른 칸에 타서 갈 걸 그랬나?

그래도 1년 가까이 함께 일한 동료인데, 이렇게 어색할 줄이야.

문득 생각해보니, 최경리와는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잘 없다.

우리 회사에서 변 이사 다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직원인데…….

뭐, 그래 봐야 다른 직원들과 몇 개월 차이 안 나긴 하지만.

사적인 얘기 좀 해볼까.

그녀의 연애 경험이 좀 궁금하긴 하다.

“저기…….”

“오천만 원이 적습니까?”

“응?”

내가 말 걸려던 걸 예상했던 걸까?

최경리는 대뜸 일 얘기를 시작했다.

“오천만 원이요. 물론, 사장님이 만든 종이 모형……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쪽은 문외한이긴 하지만, 느낄 수는 있는 거니까.”

“…….”

“감정평가사에게 네모삼촌님이 들이대는 거 보고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거든요. 아무리 작품이 훌륭해도…… 저라면 오천만 원은커녕, 천만 원이라고 해도 안 사거든요. 그 돈 있으면 저축을 하고 말지.”

젠장. 졸라 솔직하네.

“누가 물어봤어? 나라면 안 산다는 말은 뭐 하려 해?”

“제가 먼저 얘기했잖아요. 취향 차이라고. 솔직히 오천만 원이면 큰돈 아니에요?”

나도 감정평가사에게 오천만 원 얘기를 들었을 때 첫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그 가격이 낮다고 말하는 네모튜브 사람들 보며 다시 놀라기도 했지만.

오천만 원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 솔직히 했었다.

“큰돈이지.”

“근데 왜 가만히 계셨어요?”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갔어.”

“겨우 그런 이유에요?”

“아니. 꼭 그뿐만은 아니지.”

난 웃으며 말했다.

“네모튜브 사람들 믿거든. 최경리는 잘 모르겠지만, 그분들 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어떤 믿음이요? 날 위해서 행동할 거라는 그런 사적인 믿음?”

약간 비꼬는 투였다.

“사적인 믿음도 있지. 하지만 그분들이 비즈니스적으로도 꽤 감각 있고, 수완도 좋아. 아마, 네모 씨는 내공이 변 이사님 못지않을걸?”

“…….”

“최 과장은 네모튜브를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셀럽들도 관심 갖는 너튜브의 아주 유명한 채널이야. 네모 씨는 그 채널을 개발하고 유지해 가는 사람이고. 정카는 외주 촬영사업도 하고 있으며, 네모삼촌은 한국종이접기협회 고문이야. 하여간 다들 대단한 사람들이야. 무엇보다도 종이접기 분야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라고.”

이제야 최경리가 약간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난 손재주가 좀 있을 뿐이지, 최 과장과 별다를 거 없거든. 종이접기 잘 몰라.”

“…….”

“나와 꽤 긴 시간 함께 일했고, 전문가들이잖아. 이분들의 의견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그것도 확신 있게 말하는 거라면.”

그들은 평가액에 대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천만 원이라는 감정평가액을 듣자마자, 모두 화를 낼 정도였으니까.

“…….”

내 말이 끝난 후, 최경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잠자코 있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몇 정거장 더 가면 최경리가 내린다.

조심스럽게 한마디 건네었다.

“오늘 수고 많았어. 오 대리 대신 와서 늦게까지 일하고 가네.”

“야근 수당 신청할 거예요.”

“하하. 알았어.”

* * *

정신없었던 지난 일주일.

말 그대로 속전속결이었다.

종이접기 공예 사업을 시작해보기로 하고.

배워서, 만들고, 감정받고, 이젠 경매에 출품해 보기 위한 준비까지 마쳤다.

그리고 그 정신없던 와중에 영상도 하나 찍었다.

단양 수도원 영상의 영향력을 활용하고자, 동일한 모습으로 영상을 찍었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경매 위탁 서면 심의 이메일 2개.

광고 수락 이메일 1개.

감정평가원에서 호기롭게 수수료만 주고, 발급서는 안 받고 나왔었는데.

만약 경매 출품 서면 심의조차 통과를 못 한다면…… 그다음은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할지.

답이 안 나온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리고 광고 수락 메일.

분명 너튜브 영상에 광고 제안 댓글을 달아놓고서는, 왜 답장을 안 보내는지.

메일 보낸 지 벌써 4일이 지났다.

혹시 광고 수락 회신을 너무 늦게 보내서 그런 걸까? 광고 제의 댓글은 영상 올린 다음 날에 달렸던데.

일주일간 영상 반응 보지 않기로 했던 게 독이 됐던 걸까.

하여간…… 별생각이 다 들었다.

왜 이리 조바심이 나는지 모르겠다. 직원일 때는 안 이랬던 거 같은데.

“에이, 젠장. 어떤 답이든 빨리 오는 게 좋은데.”

사랑산성 점심 영업이 끝나고, 룸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강 사장님이 욕도 해요?”

음?

룸 입구 쪽에 검은 원피스에 화려한 금목걸이를 한 미모의 여성이 서 있었다.

눈이 부셨다.

“엇, 안녕하세요~. 하하. 순간 못 알아봤네.”

설수민이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 그새 잊으신 거예요?”

“에이~, 잊긴요. 꿈속에서도 뵈었는데요.”

“호호.”

“너무 눈부셔서 순간 못 알아본 겁니다아~.”

설수민은 내 드립에 깔깔대며 좋아했다.

“어머~, 완전 아재 같아. 호호.”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에 설수민이 참 어려웠는데.

언제부턴가 참 편해졌다.

내가 이런 아재 농담하는 여성은 김성애 수녀님과 설수민밖에 없는 것 같다.

“근데 어쩐 일로?”

디너 오브 사랑산성 영업 시작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이제 겨우 3시고, 보통 4시가 넘어서야 디너 직원들이 주방으로 내려와 영업 준비를 한다.

“요즘 너무 바쁘신 거 아니에요?”

설수민은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엇……. 지금 작업 거시는 거예요?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 바쁜데?”

난 손에 든 마대를 보이며 말했고, 설수민은 깔깔대며 웃었다.

“호호. 와~, 설수민이 많이 죽었네~. 남자한테 이런 취급을 당하고. 제가 마대보다 못하다는 거죠?”

“에이~, 설마요. 하하.”

난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업은 잘되고 있죠?”

“네~, 뭐. 그럭저럭. 일 매출 3천 찍죠. 많이 나올 때는 4천 나올 때도.”

“하하. 네, 다행입니다.”

설수민은 눈을 흘기며 물었다.

“소문은 들었는데…… 아무리 바빠도 너무 안 들리시는 거 아니에요? 같은 집에서 일하는데?”

“아~, 하하.”

제로백 컴퍼니에 있을 때는 디너 타임에도 간간이 주방에 갔었다.

사랑산성 창업한 이후로는 오픈 날에 한번 가보고 아직까지 못 가봤다.

신사업 준비 때문에 정신도 없었고, 실제로 시간 여유도 없었다.

“저 약간 서운해요.”

“네?”

“신사업 준비하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너무 선 그으시는 거 아니에요? 얼마 전에 직원들 다 모아놓고 작품평 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저도 불러주시지. 그래도 같은 사랑산성인데.”

“아~.”

난 머쓱해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저야 부르고 싶었지만, 바쁘실까 봐 그랬죠.”

“그래도 불러주세요. 바쁘면 제가 안 가면 되는 거니까.”

“하하. 그렇게 할게요.”

설수민도 새로운 이름으로 영업 시작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관심 가져 줘서 고마웠다.

“직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저 구경 한번 해도 돼요?”

“뭘요?”

“아홉 난쟁이? 이렇게 부르던데?”

‘할아버지의 일생’ 말하는 거군.

정식 명칭보다 부제로 더 불리는 것 같다.

“아~, 실물은 집에 있는데.”

“힝~, 아쉽다.”

“정 아쉬우시면, 저희 집에 와서 보셔도…….”

흡.

말을 뱉고 나서 재빨리 입을 막았다. 방금 실수한 것 같다.

설수민의 눈도 동그래졌다.

“사, 사진 있거든요? 사진으로 보여드릴게요.”

난 분위기를 모면하고자 재빨리 핸드폰 켜서 ‘할아버지의 일생’ 사진을 보였다.

“첫 작품이라, 아직 좀 부족합니다.”

“어머…….”

설수민은 미동도 없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걸…… 강 사장님이 만드신 거라고요?”

“하하. 네. 어쩌다 보니.”

“진짜…… 멋진데요. 근데, 왜 이렇게 슬퍼 보이죠?”

설수민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한참을 넋 놓고 보더니.

“이래서 예술품 보는 거구나. 제가 잠깐 빠졌었네요.”

“…….”

“다음에…… 꼭 실물로 한번 보여주세요.”

설수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 * *

서면 심의 제출한 지 7일째 되던 날.

아침에 출근해 보니, 직원들 표정이 침울해 보였다.

무슨 일 있나?

다들 내 눈을 피하는 분위기인데.

난 가까이에 있던 오 대리에게 물었다.

“분위기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 그게.”

오 대리는 쭈뼛거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떨어졌데요.”

건너편에서 마른 수건으로 식기 닦고 있던 최경리가 말했다.

“강남옥션이요. 메일 왔어요.”

사랑산성은 회사 공통 메일주소를 사용하고 있다.

아무래도 답장이 온 모양이다.

“아……. 그래?”

강남옥션이 현대미술품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좀 더 기대했었는데…….

난 속으로 실망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다른 메일은…… 없었고?”

“네.”

오 대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최경리를 바라봤다.

“최 과장, 서면 심의는 접수 후 7일 내로 답장 온다고 했었지?”

“네, 영웅옥션도 오늘 중에는 오겠죠.”

난 광고 제의 메일에 대해서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웰시페니? 그 호주 네일 브랜드에 답장 보낸 지가 10일이 다 되어 가는데…….

아~, 생각하면 욕 나온다. 희망 고문 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좋다 말았다. 왜 그런 댓글을 남겨서는…….

의사가 바뀌었다고 답 메일이라도 보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글로벌 브랜드라고 우리처럼 작은 회사는 무시하는 건가.

“강 사장님.”

변 이사가 날 툭툭 건드렸다.

“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없던 버릇이 생겼어?”

“제가요?”

나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어? 내가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건데.

변 이사는 탁자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핸드폰 오잖아. 진동 소리도 엄청 크구만.”

“아…….”

[02―XXX―XXXX]

모르는 번호.

안 받으려고 핸드폰을 덮었다가.

왠지 좀 신경 쓰여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광고 전화면 바로 끊을 생각으로, 귀를 살짝 떼고 있었다.

[강태평 작가님 되십니까?]

작가?

[아……. 네, 강태평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오, 귀 따가워.”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전화기를 멀리했다.

[누구세요?]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작가님! 영웅옥션! 미술경매 팀 이정수 팀장 인사 올립니다!]

“영웅옥션?”

근데 왜 전화를 했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직원들이 다 날 주시했다.

[네, 근데 왜 전화를…….]

[미팅 날짜 잡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인사도 드릴 겸요. 하하!]

[…….]

[소중한 작품 꼭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높은 가격에 낙찰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작품 꼭 저희에게 맡겨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잠깐만요.]

난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서면 심의 통과했다는 건가요?]

[네? 당연하죠! 이 굉장한 작품이 심의가 무슨 필요 있습니까? 어떻게 작품 준비를 해야 할지 내부 회의를 하느라…….]

그는 말하고 있었지만, 난 전화기를 귀에서 잠깐 떼고.

지켜보고 있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영웅옥션이야. 위탁 심의 통과했다는데?”

우왓~!

직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했다.

심지어 최경리까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