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91화 (91/156)

호반에서 (2)

* * *

“왜? 나 아닌 거 같혀?”

지지직.

머리속은 지진이 난 상태.

쉴새 없이 스파크가 터지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 같은 사람 다른 느낌. 시대에 따른 모습…….

지금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어릴 적 모습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되어 뭔가 나오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잠시만요.”

“밥 상머리 앉아서 뭐 하는겨.”

머릿속에 안개가 조금씩 걷혀가고, 어렴풋이 윤곽이 잡혀지고 있었다.

“자~ 자~.”

할아버지는 숟가락을 들어 내 오른손에 억지로 쥐여주셨다.

속사정을 모르기에 이런 내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나 보다.

“그냥 시장이 반찬이라 생각하고 먹어~. 미안혀~.”

“아유, 아닙니다. 그거 때문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더 오해하지 않도록 생각을 빨리 정리하려 했다.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쯤.

할아버지를 보고 씩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너무 맛있겠는데요~.”

“애쓰는구먼.”

숟가락도 안 들고 심각한 표정 짓고 있던 모습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나 보다.

“하하. 정말이에요.”

콩자반, 장조림, 배추김치, 멸치볶음, 계란프라이.

무려 5첩 밥상이었다.

“우리 집 암탉이 직접 낳은 달걀이여. 묵어 봐~.”

“캬~, 그래서인가? 사이즈부터가 다르네요.”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보통 계란프라이보다 1.5배 정도 커 보였다.

우걱. 우걱.

난 밥 한 숟가락 퍼서 배추김치를 올려 넙죽 먹었고.

“…….”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맛있었다.

“우와! 할아버지! 진짜 맛있어요!”

“하하. 그랴? 김장김치여~. 많이 실 텐데~.”

“저 쉰 김치 좋아해요~.”

꽃무늬가 그려진 스테인리스스틸 상 위에, 정갈한 반찬과 높이 솟은 탑 같은 밥공기.

단조롭지만 반찬에는 정성이 가득했다.

반찬 자체의 맛으로는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반찬들은 밥과 어우러질 때, 기가 막힌 맛을 내었다.

쌀밥을 목에 넘기기 위해 특화된 반찬이라고 할까.

난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정신없이 먹었고.

빈 그릇에 물까지 말아서,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었다.

“캬~, 잘 먹었습니다~.”

“하하. 잘 먹는구먼. 막걸리 한잔할텨?”

“막걸리요?”

“그랴~. 김치 남았잔혀.”

낮술이라…….

너무 낯선 곳이라서 약간 망설여졌는데.

할아버지의 눈빛이 간절했다.

그래. 오늘 쉬러 온 건데, 한잔하지, 뭐.

“좋습니다~. 한 잔 주십쇼~. 하하.”

* * *

벌컥. 벌컥.

“캬~.”

한 주전자를 30분 만에 비었다.

할아버지는 말 술이었다.

막걸리를 숭늉 드시듯 마셨다.

앞에서 잔을 거들며 속도를 맞추다 보니, 나 또한 자연스럽게 많이 마셨고.

혀가 꼬여 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햇살이 쨍한 날이었는데.

낮술에 취하니, 세상이 더 밝아 보였다.

“그럼 할머니 돌아가시고부터 쭉 혼자 사신 거예요?”

“그럼~. 나이 일흔이 넘어서 새장가 가? 으하하.”

난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외롭지 않으세요?”

“외롭지~. 왜 안 외롭겠어~.”

벌컥.

할아버지는 잔을 비우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도 점점 익숙해져. 그리고 혼자 있는 것도 아니잔혀. 옆집에 황씨, 뒷집에 횡성댁, 건너에 김씨.”

“…….”

“다~들 갈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거든. 외롭다는 것도 어찌 보면 삶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는가.”

난 술잔을 기울이며 할아버지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엊그제 논두렁에서 밥 매던 박씨가 다음 날 아침에 안 일어나고, 노인정에서 함께 고스톱 치던 지씨가 돈 땄다고 좋다며 집 가던 길에 쓰러지고.”

“…….”

“이럴 나이거든. 하나하나 의미부여 하면 괴로워서 못 살어. 걍 그러려니 하는겨. 외로울 것도 괴로울 것도 없어. 그냥 있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사는겨.”

책에서 말하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 이곳에 계신 어르신들에게는 그런 삶의 모토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보였다.

“미래는 내게 중요하지 않고~. 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생각하면 마음 쓰리고~.”

할아버지가 살짝 미소지었고, 그의 눈가의 웃음 주름이 바싹 조여졌다.

“가끔 술이나 마실 때나 옛 생각하는 거지. 술기운으로는 버틸 만하니까.”

그때 난 할아버지 어릴 적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때가 몇 살 때세요?”

“8살 정도 되었을 거야.”

“아……. 기억이 나세요?”

“그럼~, 기억나지.”

여든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 시절은 기억이 난다고 한다.

“내 초등학교 입학식 날, 충주 시내 사진관 가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여.”

“…….”

“그 시절엔 사진 한번 찍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거든. 근데 아버지께서 장남이 학생 된다고 어머니와 함께 사진관에 갔었지.”

할아버지는 기분 좋은 듯 웃으셨다.

“아마 내 또래에, 저런 어릴 적 사진 갖고 있는 이는 잘 없을겨.”

그러게 말이다. 나도 사진 촬영하면서 여러 스튜디오도 가봤지만, 이건 흔한 사진은 아니다.

“할아버지. 실례가 안 된다면 젊으실 적 사진 좀 더 볼 수 있을까요?”

“하하. 그랴? 알았어. 못 보여줄 거 없지.”

오래 앉아 있어서, 허리가 뻐근하셨던지. 할아버지는 구부정한 자세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오래되어 표지가 다 바랜 앨범 하나를 들고 나오셨다.

“자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보는구랴.”

“하하. 네, 같이 봐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할아버지는 신나서 앨범 사진 하나하나 설명을 하셨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일생을 돌아봤다.

할아버지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젊음이 있었다.

한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서의 전성기도 있었으며.

그의 등 뒤로 빼곡히 보이는 어린 자녀들과 그의 옆에 서 있는 다소곳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여인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 집 안에 할아버지 혼자 남았지만.

분명 이 집의 흔적이며, 할아버지의 역사였다.

“와……. 좋네요.”

앨범은 덮으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한 것 같았다.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기도 하고.

“후회되는 일도, 즐거웠던 일도. 모두 다 좋은 추억이여.”

“…….”

“그렇게 한평생 재밌게 산 거지, 뭐.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에서.”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며, 내게 찾아왔던 영감에 확신이 들었고.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 시켜야 할지도 정리가 되었다.

“저…… 할아버지.”

“응?”

“실례가 안 된다면, 할아버지 예전 사진들 좀 찍어도 될까요?”

할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상관없어~. 근데 그건 어따 쓸라고?”

예술의 기본은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아, 네. 제가 공예를 하는 사람인데, 할아버지 모습을 참고해서 작품 만들어보려 합니다.”

“하~, 그랴?!”

할아버지는 신기한 듯 날 바라봤다.

“생긴 건 샌님처럼 생겨서, 손재주가 좋은가벼~”

“아, 예. 어쩌다 보니.”

“그랴~, 써~. 거 뭐라고. 마음껏 써~.”

“하하. 감사합니다. 대신…… 제가 답례로 할아버지 사진 한 장 찍어드릴게요.”

“으잉? 사진? 뭘 사진 가지고.”

할아버지도 스마트폰에 대해서 아는 듯했다.

무슨 사진 한 장 가지고, 생색내나 싶을 것이다.

“제가~ 조금 유명한 사진가예요. 하하.”

“허이구 야~, 재능이 많구먼. 어디 한번 보자구~.”

사진 촬영은 끊기로 마음먹었었지만, 할아버지에게 감사하기도 했고 내가 느낀 그의 모습을 담아주고 싶었다.

“포즈 어떻게 햐?”

“활짝 웃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웃는 모습이 정말 멋지시거든요.”

“하하. 그거야. 전문이지~. 으하하.”

할아버지는 내 핸드폰을 향해 금세 환하게 웃었고.

그의 주름과 앞 금니가 밝게 빛나는 순간.

찰칵!

“흠……. 괜찮네.”

오랜만에 찍었어도, 역시…… 마음에 든다.

“할아버지, 어떠세요?”

난 화면을 보여주었고.

멀리 떨어뜨리고 자세히 보시더니.

“허허.”

“…….”

웃으시는데, 눈가가 살짝 젖어 있었다.

“사진 보니까, 내가 제대로 살아온 거 같구먼. 슬프도록 멋져 보여. 고맙네.”

“제가 나중에 인화해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난 좀 더 앉아 있다가, 해 질 무렵 길을 나섰다.

* * *

시골 버스가 이 정도로 안 오는지 몰랐다.

일 차선 도로를 따라서 충주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가다가. 다행히 막차 버스를 발견하여 겨우 탔다.

어스름한 오후.

차창 밖으로 멀리 시내의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충주 시내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충주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버스는 자주 있다.

근데…… 당장 만들고 싶은……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 묵고 갈까.”

위이잉―.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진동음이 들렸다.

‘변 이사님’

“응? 이 시간에 웬일이시지.”

덜컥.

[여보세요?]

[어~, 강 사장님. 지금 어디야?]

[오늘 연차 쓴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지금 어디냐고? 내일 출근할 수 있어?]

내일은 토요일인데.

사랑산성은 제로백 컴퍼니와 동일하게 주말은 쉰다. 레스토랑도 주 5일제로 근무하고 있다.

[내일 쉬는 날이잖아요.]

[오늘 쉬었잖아.]

[오늘요? 왜요?]

[그럼 유일한 셰프가 없는데, 장사를 어떻게 해? 스페셜 데이라고 하고 손님들에게 라면 끓여 줄까?!]

아차!

그러네. 내가 쉬면 레스토랑도 쉬겠구나.

작품 생각에 빠져서 거기까지 생각 못 했다.

[갑작스럽게 휴업해서, 예약했던 손님들이 난리야. 내일이라도 장사하라고.]

[자, 잠깐만요. 그럼 혹시 ‘디너 오브 사랑산성’도.]

[맞아. 거기도 오늘 강제 휴무지.]

[…….]

난 충격 먹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나 한 명 오늘 하루 쉬느라, 매출을 얼마 까먹은 거야.

지금 식당 하나당 일 매출 삼천이 넘는다. 합쳐서 6천만 원…….

[뭐야? 진짜 생각 못 했나 보네?]

[아……. 변 이사님, 한번 물어나 봐주시지.]

[뭘 물어봐. 사장이 쉬겠다면 쉬는 거지. 다 뜻이 있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오……. 실수했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당장 서울 올라가고, 내일 장사로 만회해야지.

[어째…… 목적은 잘 이뤘어?]

아무래도 변 이사는 오 대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모양이다.

어차피 버스에 나밖에 없었고, 시내 도착하려면 시간이 있어서 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내가 겪었던 특별한 일상을 들려주니, 괜히 신이 났다.

[하하. 재밌었겠네. 할아버지 너무 좋으시다. 담에 다시 찾아가야겠는걸?]

[네~, 그러려고요.]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말이 없다가.

[강 사장님, 내일 영업은 안 하는 거로 할게.]

[네?!]

[직원들이랑 디너 쪽에도 내가 잘 알아서 수습할 테니. 이왕 간 거 마무리까지 하고 와.]

[에이~, 어떻게요. 직원들이나 설 사장님께 어떻게 더 폐를 끼쳐요.]

[에헤이~. 나 얼마 전까지 사장이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염려 말고, 마저 집중하고 와. 촉이 와서 그래. 촉이.]

[…….]

이렇게 말해주는 변 이사가 고마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래 봐야 자네가 우리 때문에 희생하는 것에 비할 바도 안 돼.]

[…….]

[갑자기 쉰다고 해도, 왜 아무도 강 사장님께 연락 안 했겠어. 다들 그럴만하다고 생각한 거야.]

가슴 한구석이 약간 뭉클해졌다.

[주변에서 도울 수 있을 땐, 그냥 돕게 해줘. 그것도 배려야.]

난 그의 말을 곱씹었다.

지금 만큼은 그를 내 회사의 직원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오랜 동료이자, 선배로서…… 고맙고 감사했다.

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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