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90화 (90/156)

호반에서 (1)

* * *

오 대리의 말을 생각해봤다.

사실 지금 하루 쉰다고 해서 갑자기 놀라운 영감이 떠오를 것 같지는 않지만.

한 박자 쉬어갈 필요는 있긴 했다.

제로백 컴퍼니가 사라지기 1달 전부터 사랑산성을 창업한 한 지금까지 쉽 없이 달려왔다.

초 긴장 상태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움직였다.

회사 생활이야 원래 하는 것이지만, 큰 흐름의 변화를 주도해야 해야 하는 건 나였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갈된 상태였고, 며칠 전부터 자꾸 눈두덩까지 떨렸다.

“나 하루 쉬어도 괜찮을까? 지금 창업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오 대리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절하다가, 약간 수그러드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달려들었다.

“당연하죠. 겨우 하루인데요. 그리고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자리가 잡혀 있잖아요.”

“응?”

“외식업은 하던 대로 하고 있고, 종이접기도 뭐…… 시간문제인 거 같은데요?”

그의 표정을 봤을 때, 괜히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흠……. 그럼 한번 가볼까.”

“하하. 좋습니다.”

오 대리는 검지를 펼치며 당부했다.

“여행 가셔서 절대로 전화나 까똑 하지 마시고요.”

“응.”

“가급적이면 매체 자체를 끊으십시오. 정 심심할 거 같으면 책 한 권만 가져가시고요.”

난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한번 가는 여행에서 뭔 책을 읽어. 그냥 구경이나 할래.”

“하하. 네, 그게 제일 좋죠.”

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겨우 하루지만, 일상과 다른 일을 할 생각을 하니 약간 설레였다.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여셔야 합니다. 마음을 닫아두시면 아무리 좋은 곳을 가셔도 아무것도 강 사장님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마음을 연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나는 원래 이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사람, 자연 등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특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말도 안 섞으려고 하지 말고요. 먼저 말도 걸어 보고, 인사도 하시고.”

난 물끄러미 오 대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이 참 자유롭고 독특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던 인상이다.

유목민 같아 보여서, 그를 선발하지 말자고 변 이사에게 말했었다.

잘 다니던 MS사를 관두고, 한국군에 자진 입대한 미국 시민권자.

본인 이상을 위해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아는 남자다.

그래서인지, 그가 조언하는 말들이 허투루 들리진 않았다.

“내일 출근하면 동료들에게 잘 말해줘. 바로 출발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특히 최경리한테 전화 오지 않도록 해줘.”

“그건 자신 없습니다.”

“…….”

* * *

다음 날 아침 8시.

동서울 터미널.

충주행 버스를 탔다.

서울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을 찾다가.

충청북도 충주를 선택했다.

고속버스로 1시간 30분 소요.

속초의 추억으로 고속버스 트라우마가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고속도로로만 이동하고, 소요시간도 그리 길지 않기에 큰마음 먹고 버스에 올랐다.

“안전운전 부탁드립니다.”

버스에 오르며 난 진심을 담아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그냥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시간은 훌쩍 지나, 충주 시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한적했고, 무엇보다도 높은 건물이 없는 게 좋았다.

결국 왔구나.

곧, 오늘 하루 여행의 시작이다.

영감을 얻으려면 자극이 있어야 하고.

난 오 대리가 했던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내 옆 자리에는 여성분이 앉아 있었는데.

옷과 헤어스타일을 봤을 때, 서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서울과 지방 사람이 뭐, 큰 차이가 나겠냐마는 한평생 서울에만 살았던 내게는 그 차이가 보인다.

두근. 두근.

그냥 가볍게 인사 한마디 걸어보려는 건데도, 막상 입을 열려니까 떨린다.

흡! 일단 질러보자.

“안녕하세요?”

“…….”

“날씨가 좋네요.”

“…….”

“충주에는 뭐가 맛있어요?”

“…….”

나 지금 혼잣말하는 거 아닌데.

옆에 여성분은 대꾸는 없었고, 표정은 불편했다.

민망했다. 이건 분명 씹힌 거였다.

이 상황에 민망함을 인정하고 시선을 돌리는 건 더 민망했다.

난 잠시 답을 기다리는 자세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다렸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곧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차가 완전히 정차할 때까지…….]

마침 그때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렸고, 너무 고마웠다.

끼이익.

버스가 정차했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 없고, 내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은 체 묵묵히 가방을 들었다.

혹시…… 내 말을 못 들은 게 아닐까.

여기서 씹힌 것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해볼 것인가.

모르는 사람과 말 한번 섞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그녀가 일어나서 가려는데.

어차피 두 번 볼 사이도 아니고, 더 부끄러울 것도 없으니.

“안녕히 가세요~.”

그녀가 인사를 받건 말건 난 상냥하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말을 건네었다.

지금까지 미동도 없던 그녀가 그때 날 돌아봤고.

살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까딱하고는 가버렸다.

어라? 지금 인사 받아준 거야?

두근!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었고, 온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미인도 아니었고, 내 스타일도 아니다.

다만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용기 내어 다가갔는데, 내 부름에 응답해 주었다는 것.

그 사실이 날 가슴 뛰게 만들었다.

가벼운 미소 한 번으로 용기가 생겼다.

마음을 열고 여행할 수 있을 거 같았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 대리 말이 맞았네.”

충주고속버스터미널.

큰길을 건너 버스를 기다렸다.

‘살미면’.

살미면은 충주호 근처에 있는 곳이다. 시골 버스를 타고 그곳까지 간 이후에, 호수와 산 풍경을 보며 많이 걸어볼 생각이다.

얼마 전 부산에 갔을 때도 느꼈는데, 걷는 게 참 힐링이 되었다.

걷다가 만약 마을이라도 나타난다면, 방금 버스에서 했던 것처럼 다가가 볼 것이다.

모르는 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별거 아닌 일이지만, 내게는 엄청난 모험이라 느껴졌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안 해봤던 걸 해가면서 나 자신에게 자극을 줘볼 생각이다. 그러다가 영감이 떠오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부우웅.

색이 바랜 하늘색 버스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면서 타려는데, 버스 운전기사가 먼저 말을 건네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 또한 꾸벅 인사하면서 탔는데.

서울 시내버스에서 기사들이 보여줬던 무미건조한 인사와는 달랐다.

버스에는 할머니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난 가장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골 버스에서는 어르신들이 많이 타기 때문에, 앉기 편한 자리는 비워둬야 한다고 김성애 수녀님에게 배웠었다.

30여 분을 달렸다.

버스는 안은 사람들로 점점 채워졌다.

버스 안은 온통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었는데. 먼 거리에서 타는 데도 다들 안면이 있어 보였다.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모습이 참 정겨웠다.

버스 창밖으로 논두렁이 보이고.

좀 더 가자, 산을 품고 있는 새파란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그림 같았다.

충주댐 때문에 이런 모양의 호수가 만들어졌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보니……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여기 처음이여?”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가 웃으며 물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네! 처음입니다. 하하.”

할아버지는 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머리 정 가운데로 고속도로가 뚫려있고, 양옆으로 수풀이 우거진 헤어스타일.

눈가에 주름 때문에 계속 웃으시는 것 같았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짐작하게 하는 인상.

얼마나 많이 웃고 사셨으면 주름이 웃고 있을까.

“잘 왔어~. 근데 혼자여?”

“네~.”

“살미에서 색시 하나 만들려고? 으하하.”

연세는 80도 넘어 보이시는데.

목소리도 쩌렁쩌렁하고, 왜소한데도 손은 솥뚜껑만 하다.

“좋죠~. 좋은 섹시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우리 동내 막내가 60인데. 괜찮혀? 으하하.”

좀 전엔 섹시 드립에는 억지로 미소만 지었었는데.

막내 60이라는 말엔 나도 따라 웃었다. 쪼금 재밌었다.

혼자 말씀하시고, 혼자 웃으시는 게.

참 즐겁게 사시는 것 같다. 눈가에 웃음 주름이 이해가 되었다.

“일 있어서 온 건 아니고?”

“네, 그냥 여행 왔어요. 여기 충주호 주변 풍광이 좋다고 해서요~.”

“아이고~, 좋지~. 잘 왔슈~.”

꼬르륵―.

그때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났다.

소리가 너무 커서 방귀 뀐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자네 소리여?”

“아, 네. 죄송합니다.”

“점심 안 먹었는가?”

지금이 딱 점심시간인데, 사실 아침도 안 먹고 왔다.

“하하. 네. 배가 많이 고프네요. 여기 가까운데 식당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어차피 목적 없이 온 곳이기 때문에, 식사는 아무 데서나 해결할 생각이었다.

“여기 식당이 어딨어~. 슈퍼도 잘 없는디.”

“아…….”

하긴 충주호반에 접어들면서 식당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 다음에 내리는데, 우리 집 갈려?”

“네?”

“우리집 가~. 큰길가에서 가까워. 있는 반찬에 밥 한 공기만 더 뜨면 되는디.”

생각지도 못한 점심 식사 초대.

있는 반찬에 밥 한 공기만 더 뜨면 된다는 말이. 참 정겹고 고마웠다.

손님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흠……. 어떻게 할까.

“진짜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따라가겠습니다. 으하하.”

난 할아버지가 웃음소리를 따라 했다.

* * *

버스 정류장에 내려, 논두렁 사이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으니, 자그마한 마을이 하나 있었다.

한…… 10여 채 정도 되려나?

정류장에서부터 30분 정도 걸었다.

“다 왔어. 조금만 더 힘내야.”

“하하, 안 힘들어요.”

곧 울타리 없는 마당에 들어섰다.

청록색 기와지붕에 색바랜 하얀색의 벽면.

집 주변은 화분, 항아리, 농기구 등 각종 잡동사니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나름 질서는 있어 보였다.

“어서 와. 외지 손님은 진짜 오랜만이구먼.”

“…….”

신발을 벗고 마루에 들어서니, 벽면 상단에 가족사진이 보였다.

근데 집 안에 인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족은…….”

“혼자여. 마누라는 5년 전에 갔고, 자식들은 다 타지에 있고.”

“아……. 네.”

“일단 앉어. 금방 찬 내 올 테니.”

“아닙니다. 제가 차리겠습니다. 시켜만 주시면.”

“어허. 손님 아닌가. 앉아 있어.”

“네…….”

할아버지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난 집 구경을 했다.

무엇보다도 내 눈을 사로잡는 건 사진들이었다.

내가 사진을 업으로 삼았던 영향도 있지만, 빛바랜 오래된 사진들이 이 집의 분위기가 어우러져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집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

그중 내 눈길을 끄는 사진이 하나 있었는데.

한…… 6살 정도?

할아버지와 분위기가 비슷한 개구장이가 앞니가 다 빠진 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흑백 사진인데, 그 아이는 한복을 곱게 입은 어머니와 양복을 입은 아버지 사이에 서서 손을 잡고 있었다.

사진 속 양복 입은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자~,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들게~.”

할아버지는 구부정한 자세로 상을 들고 왔고, 난 재빨리 일어나 상을 받았다.

“아휴. 이런 건 저 시키시지.”

“괜찮혀~.”

조심스럽게 상을 내려놓은 후, 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저 사진 속 꼬마는 누구예요? 아들이에요?”

“응?”

할아버지는 잘 안 보이는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사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 나여.”

“…….”

“옆에 내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참 고우시지?”

흐읍!

순간 머리가 띵 울렸다.

사진 속의 아이.

그 아이가 내 눈앞의 할아버지.

둘 다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많이 다르다. 나이가 다르니 당연한 것인데…….

같지만 다른 느낌. 그리고 역사.

영감이라는 것이…… 정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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